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1) | |||||||||||||||||||||||||||||||||||||||||||||||||||||||||||||||||||||||||||
우세한 대포·자동발사화기로 초반 열세 뒤집어 |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성시대라고도 불러도 될 만큼 한국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충무공을 소재로 한 소설을 감동 깊게 읽었다고 밝혔는가 하면, 현직 부장판사는 충무공에 관한 평전을 내놓았고 급기야 KBS-TV는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방영키로 했다. 성웅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이순신은 분명 '국난 극복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역사적 맥락을 갖추지 못한 채 애국주의를 고취할 목적으로 그의 삶과 업적이 이용되기도 하여 오히려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순신과 조선 해군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영웅순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 자체를 바탕으로 이순신과 임진왜란의 실체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되어 왔다. 이순신 장군의 재평가 작업을 벌이고 있는 연구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면모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일지라도 그를 둘러싼 각종 인물과 사건에 대한 역사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정설로 굳어진 이순신 일대기가 조선 왕조 시대에는 정조에 의해서,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주도된 국가 사업의 결과임을 강조한다. 이순신 장군 연구에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인 『이충무공 전서』는 탕평책을 한창 펼치던 정조의 어명에 의해 1795년에 편찬되었다. 또 이순신 장군에 관련된 유물 유적이 정리되는 등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대통령의 제3공화국 시대였다. 물론 기존 정설을 신봉하는 연구가들은 새 조류가 등장하는 것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선조실록』등 몇몇 문헌의 사료적 가치에 의한 임진왜란에 대한 재평가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 문헌 역시 당쟁의 또 다른 산물이기도 하므로 이들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발맞추어 임진왜란에 대한 평가도 새로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조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군이 고전했지만 대형 화기, 즉 대포나 자동발사화기에서는 일본보다 월등하게 우세했기 때문에 전세를 뒤집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왜군이 철수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망하지 않았더라도 왜군은 곧바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추정한다. 말하자면 임진왜란은 초기에는 조선이 불리했지만 왜군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선이 임진왜란의 승리자라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성격이 이와 같이 재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 수군의 역할이 큰 작용을 했다. 조선수군은 원균 장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기적을 이뤄냈다. 더구나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함선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므로 막상 명량해전에 즈음하여 이순신 장군이 지휘할 수 있는 배는 고작 13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133척에 달하는 왜수군을 대파하여 세계 해전사를 다시 쓰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파싸움이나 일삼던 조선 수군이 어떻게 연전연승하면서 왜수군을 격파할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4회에 걸쳐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인 우리나라 조선(造船) 역사와 기술,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한 함선과 화포, 거북선의 전설과 거북선을 과연 찾을 수 있는가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한다. 〈나침반의 발명자는 중국이 아닌 신라〉 삼 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배의 사용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은 유물로도 알 수 있다. 선조들이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물에 뜰 수 있는 나무토막, 조롱박, 갈대나 가죽주머니 등을 이용하여 강이나 바다 속으로 들어가 어로 작업을 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후 수상 생활에 따른 경험이 축적되자, 통나무의 가운데를 파낸 통나무배가 이용되었다가 나무널판이나 통나무 등을 조립한 조립선(뗏목 등)들로 발전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짐을 싣고 빨리 달릴 수 있으며 안전한 배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저었고 좀 더 발전하여 돛을 이용하는 배가 등장하며 점차 조선 기술이 발전하여 현대와 같은 대형 선박으로 이어진다. 지탑리 유적과 마산리 유적을 비롯한 강가에 있는 유적들에서 그물추가 발견되었고 서포항에서는 그물추, 작살, 낚시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포항 4기층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의 술부분은 등쪽이 좁고 끝 쪽이 넓은데(길이 31센티미터, 두께 1.5센티미터, 끝 쪽의 넓이가 13센티미터), 고래뼈로 노를 만들었다는 것은 나무보다 고래뼈가 견고하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바다에 살고 있는 커다란 고래뼈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울산군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에 있는 바위그림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벽화에는 물고기, 고래, 호랑이 등 짐승은 물론 사람들이 타고 고래를 잡는 배도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이 선박을 이용했다는 기록은 기원전 2세기에 고조선의 준왕이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뱃길로 마한에 갔다는 기사에서 보인다. 이것은 고조선과 마한에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구가 있었고 수천 명의 군사를 태울 수 있는 배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배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당시에도 이미 육군과 수군이 편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33∼234년,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책봉하면서 고구려와 연합하여 위나라의 조조를 견제하고 공손연을 공격하자고 보낸 사신 사굉과 진구가 압록강 하구에 있는 안평구라는 항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607년에 고구려군이 바닷길을 이용하여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아산만 남쪽 당진군 한진리로 추정)을 공격했다는 기록은 고구려 수군이 해안을 따라 수천 리를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편 백제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 중국과 일본의 왕래는 주로 바다를 통했으므로 조선과 항해기술이 발달했다. 일본과의 왕래로 조선기술도 전달되어 『일본서기』에는 271년 백제사람의 후손이 일본에서 선장으로 일했고 백제의 선박에 의해 기술자와 학자들의 왕래가 빈번하게 있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규모가 크고 든든한 배를 ‘백제배’라고 불렀다. 신라에서도 289년에 왜적이 침공한다는 통보를 받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했으며 467년 봄에 관원을 시켜 전함을 수리했고 583년에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했다는 것을 볼 때 조선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먼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박도 중요하지만 항해기술 즉 배가 육지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나침반이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나침반(羅針盤)의 사용에 있어 세계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년) 정월조에 당나라 승려 법안이 신라에서 자석을 얻어간 사실이 쓰여 있고 5월에는 급찬 지진산 등을 통해 자석 두 상자를 당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3대 발명품(나침반, 종이, 화약) 중에 하나가 나침반인데 중국의 나침반은 송나라 때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료를 보더라도 세계 최초로 나침반을 발명한 나라는 신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나침반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침반의 원래 이름이 신라침반(新羅針盤)인데 ‘신’자가 빠진 나침반으로 읽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나침반에 대한 기록은 통일신라가 등장한 이듬해이지만 통일신라 전에 나침반이 사용되었음이 틀림없으며 어느 나라보다 나침반을 사용했다면 당시 항해술도 매우 앞섰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원정에서도 파선되지 않은 고려 군선〉
우리나라의 배가 세계 조선사(造船史)에 있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선형과 구조가 특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재래식 배는 그 선종과 연대 여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구조 방식 즉 두껍고 평탄한 저판을 밑에 깔고 외판을 붙이고 가룡목을 설치한 방식으로 건조되어 있다. 다른 나라 배들은 용골이라는 배의 등뼈를 기준으로 판자를 붙여 배의 아래가 역삼각형으로 좁혀지지만 우리나라 배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통 모양이다. 이와 같은 선형과 구조를 평저선구조(平底船構造)라고 하는데 김재근 박사는 이런 구조를 가진 배를 통털어 ‘한선(韓船)’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와는 다른 독특한 조선 기술이 태어난 것은 삼 면이 바다로 둘려 싸여 있기 때문이다. 평저선은 해안선이 길고 갯벌이 많은 서남해안에 출입하는데 적합한 구조이다. 썰물 때 배를 갯벌 위에 올려놓고 작업을 할 수 있으며 항구가 아니더라도 어디에나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삼국시대의 배들의 원형이 발견되지 않아 구조와 규모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당시에도 한선(韓船)의 기본 구조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되는 증거들은 발견된다. 신라의 유물로 보이는 배모양의 꽃 단지와 가야 고분에서 발굴된 배 모양의 질그릇(사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나른다는 뜻의 장례의식용 도구로 추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배 모양의 꽃단지로 유추할 경우 후미부분의 모양은 전투할 때 적선에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로 인정되며 선수부분의 용골선이 점차 위로 올라간 것은 배의 구조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해상 전투시 병사들이 적선에 올라가는 종경사를 작게 하여 전투를 용이하게 할 목적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형태의 배는 유럽에서 14∼15세기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동시대에서 한국의 조선기술이 얼마나 탁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해상활동이 활발히 벌어지자 조선과 항해 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고려시대의 배들은 전투용 군함과 무역 및 대외 활동을 위한 무역선과 조세나 공물을 운반하는 조운선으로 나뉘었다. 조운선은 각지에서 공물로 받아들인 조세미와 진상품을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데 사용하던 배로 초마선의 경우 한강 유역에서 주로 사용하던 배는 적재량을 200섬으로 제한했지만 원래의 초마선의 적재량은 1000섬이나 되는 큰 배이다. 전투용 군함으로 대표적인 것은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이다. 『고려사』에 914년에 ‘태조가 전함 100여 척을 더 건조했는데 그중 배 10여 척은 각각 사방이 16보이며 그 위에 다락을 세웠고 말을 달릴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방이 16보(1보는 6자)라는 것은 배의 길이가 약 36.6미터나 되며 말이 달릴 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 넓은 갑판을 가지고 있는 배임을 알 수 있다. 이 규모로 배를 만들면 250여 명의 학생들이 줄을 서면 윤곽선을 채울 수 있다. 과선이란 말 그대로 적선을 찔러 물리칠 수 있는 고려 특유의 군함으로 11세기초부터 약 100년 동안 함경도 지방 여진의 침입을 방비하면서 사용한 중요한 전투선의 하나였다. 이 당시 여진(동여진)의 해적들은 동해안 각지에 자주 침범하여 현종 2년(1011) 8월에는 100여 척이 떼지어 경주에 침입한 적도 있을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이에 고려는 해군기지사령부라 할 수 있는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를 각 지에 두어 대치했는데 이때 동북 방면에 배치된 군선이 바로 과선이다. 고려 군선의 우수성은 1268년 원나라와 함께 일본을 원정할 때 증명된다. 『원사』에 원나라의 왕운이 해전에서의 실패에 대해 “태풍을 만나 파도 때문에 서로 부딪쳐 크고 작은 많은 우리 함선들은 파괴되었으나 오직 고려의 군함만은 견고하여 정상적으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라는 기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원의 세조가 일본에 원정할 대함(大艦) 300척을 포함한 군용선 900척을 요청하자 고려의 김방경은 배를 중국식으로 만든다면 노동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기일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설계도면으로 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관철시켰다. 김재근 박사는 이 당시 고려의 배들은 한선의 구조법과 동일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당시 원은 군량미 3000∼4000섬을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를 요구했는데 군량미가 3000∼4000섬 정도라면 현재의 단위로 약 250∼320톤이 되므로 이 배의 배수량은 400∼500톤이 된다. 그런데 고려에서는 이들 배를 단 4개월에 만들었다는 것을 볼 때 고려의 조선 기술이 얼마나 앞선지를 알 수 있다. 고려 배의 크기는 여 몽 연합함대가 정박했다가 폭풍을 만난 나가사키현 다카시다에서 발견된 700년 전의 침몰선 유물로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배는 바다 속에서 부식되어 사라졌지만 1994년에 소나무 닻이 인양되었다. 이 당시 인양된 닻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닻에는 두 개의 돌이 함께 놓여 있었다. 닻돌이라고 불리는 길이 2미터 가량의 이 돌은 닻의 한 가운데 박았는데 두 개 돌의 무게는 무려 338킬로그램이다. 〈KBS역사스페셜팀〉은 닻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적색 응회암으로 이 돌의 성분은 전라남도 장흥군 천관산의 돌과 일치했다고 발표했다. 이 배는 천관산의 나무와 돌로 만든 것이다. 인양된 닻을 복원하니 그 길이가 무려 7미터에 이른다. 학자들은 두 개의 닻돌과 닻의 무게를 합하면 약 1톤 가량으로 이를 근거로 배의 길이를 추정하면 30∼40미터가 된다고 계산했다. 한편 이원식은 고려 대선의 크기를 25∼30미터로 추정했다. 이같은 규모는 고려의 군선이 대단히 과학적이고 실용적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현재 서해와 남해의 풍파의 파장을 40∼50미터, 파고를 2미터 정도로 감안할 때 안전한 선박의 길이는 적어도 25∼30미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대선의 크기로 볼 때 전투병 60명, 선원 30∼40명을 포함하여 모두 90∼100명 정도가 승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완도선 발견〉 1983년 말,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지섬에서 불과 72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서 청자 4점이 조개잡이 어부의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 감정결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본격적인 인양작업에 들어갔다. 3개월 간 계속된 인양 작업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12세기 전반 고려 중엽의 일반적인 청자로 녹청자 30648점였다. 가마터를 제외하고 이렇게 많은 청자가 한꺼번에 나온 건 처음이다.
발굴에 참여한 학자들도 처음에는 배가 수장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유물들이 한 군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잠수요원들을 통해 조사를 시작한 결과 뻘을 걷어내자 배의 모습이 드러났고 81개의 조각으로 떼어내어 인양했다. 이 배의 발견은 사학계를 흥분시켰다. 그동안 고려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다고 전해지기는 했지만 당시의 선박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 증인을 드디어 찾아냈기 때문이다. 인양된 유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용골이 없고 바닥이 평평하다 ② 가룡목으로 좌 우현을 고정시켰다 ③ 흠불이로 외판을 접합했다 ④ 전통 한선의 해충구제법인 연훈법(煙燻法)으로 목재를 그을렸다. 근세까지도 활용된 이 방법은 배가 썩지 않도록 배의 바깥 면을 정기적으로 불에 그을리는 것으로 완도 배에서는 두께 1밀리미터의 새까만 층이 발견되었다. ⑤ 돛대가 하나인 단주범선이다 ⑥ 사용된 재료는 한국산 육송 등이며 나무못이 사용됐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완성한 인양선은 길이 9미터, 너비 3.5미터, 깊이 1.7미터의 나무배로 무게는 약 10톤이다. 그러나 학자들로부터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완도선이 그동안 계속 추정되어 온 우리 한선의 특징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선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쇠못 대신 나무못을 사용했다는 점인데 완도선에서 느티나무 못을 사용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쇠못은 염분이 있으면 쉽게 부식되며 철이 부식할 때 나무도 함께 부식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선조들은 나무못을 사용했다고 알려졌었는데 그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장학근 박사는 배가 물에 들어가면 밖에 있는 선재가 불어 나무못은 오히려 강도가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동양에서 최초로 충파 전술 채택〉 옛날 수군이 해전을 하는 데는 세 가지 전술이 있었다. 하나는 선수 수면 하에 뾰족한 衝角(ram)을 달고 적선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충파 전술이다. 이 전술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사용된 전법으로 19세기 초엽 트라팔가 해전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됐다. 그런데 김양기 박사는 ‘고려 군선의 선체는 고대(高大)하고 선면(船面)은 철조각령(鐵造角令)으로서 적선을 충파(衝破)하게 되었다’라는 글을 근거로 이 군선이 과선이고 선수에 철각(鐵角)을 붙어 적선을 충파하였다고 보았다. 배머리에 달린 철각(鐵角)은 상대측 함선에 배를 맞대고 적선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배에 접근하여 배머리의 철각(鐵角)으로 적선의 흘수선 아래를 받아 침수되도록 치명상을 입힌 후 적과 싸우는 독특한 전법을 적용할 때 효과적이므로 철각이 배의 윗부분에 있으면 적의 배를 부수기 어렵기 때문에 배의 아래쪽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자들은 커다란 통나무를 대고 그 앞에 철로 쇠를 덧씌워 뿔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와 같은 전술은 동양에서는 고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후 거북선으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배를 박치기로 부수는 것인데 다소 무지막지한 수법 같지만 당시 여건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공격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이어 임진왜란 당시의 한선이 왜 그렇게 강했는지를 살펴보자.
박치기용으로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한선은 강도를 높이기 위해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소나무로 만들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배의 겉판을 만드는 침엽수 중에서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또 한선은 척추에 해당하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므로 강도를 보강하기 위해 두꺼운 판자를 사용했다. 그렇다고 모두 소나무로 만든 것은 아니다.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보다 강한 나무로 보강했다. 박상진 교수는 주로 참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등을 사용했는데 그 중에서도 전투배의 선미는 진목(眞木) 즉 참나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참나무는 1제곱센티미터에 500킬로그램의 압축 강도를 견딜 만큼 단단하고 질기다. 또 다른 참나무 종류인 가시나무(상록수 참나무 무리 중 따뜻한 남해안 및 섬 지방에서 자람)는 더 단단한 나무이다. 반면에 일본의 산에는 소나무가 드물고 주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자란다. 이들은 곧고 빨리 자라는 잇점은 있으나 무르고 약하다. 이런 나무로 아무리 배를 크게 만든다해도 한선의 소나무 배와 박치기했을 때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더구나 왜선은 전투선 자체도 한선보다 작았기 때문에 충격은 더욱 컸다. 칠천량 전투(1597)를 묘사한 일본인들의 기록에 이를 잘 보여준다. ‘조선 배는 우리 배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다. 그래서 조선 배에 바짝 달라붙어도, 자루의 길이가 두 칸이나 되는 창으로 미치지 못하니 배에 뛰어드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한선은 왜선에 비해 배의 규모도 큰데다가 튼튼하였으므로 군함과의 싸움은 당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꼭 정면 박치기가 아니고 측면 박치기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선을 만들 때 배의 너비 방향을 고정하고 가룡목이라는 가로 버팀목을 썼는데, 이 역시 참나무와 가시나무였다. 근본적으로 한선은 재료부터 왜선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왜선이 배가 맥을 못 춘 것이다. 둘째는 적선에 접근하여 기어올라 백병전으로 적선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보어딩(boarding) 전술이다. 이는 육전과 백병전에 능한 나라가 좋아하는 전술로 로마가 이 방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제압했으며 유명한 해적들이 약탈할 때 사용하는 것도 주로 이 전법이다. 고려 말의 왜구와 임진왜란 때 왜수군이 채택한 기본전술이지만 이 전술의 문제점은 일단 적함 안으로 침투해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왜군이나 여진의 해적들은 백병전에 능숙하므로 재빠르게 적선에 다가가 배에 기어올라가는 육박전에 치중했지만 한국은 아예 적들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는 배를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태어난 것이 고려의 과선과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과 거북선 등으로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왜군의 배에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고 왜군 스스로가 실토했을 정도이다. 마지막으로는 적진에 접근하되 밀착하지 않고 화포나 화전 등 장거리 무기를 발사하여 적선을 분멸(焚滅)시키는 전법이다. 이 전술이야말로 한국 수군의 장기이다. 당시 조선 수군이 무장하고 있는 화약무기는 왜보다 월등하게 성능이 우수했다. 간단하게 말해 화포의 사정거리도 길고 명중률도 높았으므로 조선 수군의 입맛에 맞게 먼 거리에서 집중적으로 화포 등을 발사하여 적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04/7/31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2) | |||||||||||||||||||||||||||||||||||||||||||||||||||||||||||||||||||||||||||
조선 수군이 가진 화포는 고려말 최무선이 개발 | |||||||||||||||||||||||||||||||||||||||||||||||||||||||||||||||||||||||||||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소위 압도적인 군함과 화포를 장착하였기 때문에 첫 번째와 세 번째 전술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면서 왜수군을 격파했다. 그런데 조선의 함선이 왜선에 비해 견고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조선 수군이 세 번째 전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는 것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 번째 전술을 사용하려면 적선을 먼거리에서도 격파시킬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강력한 화약무기가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왜군이 조총 등 당시 최첨단 무기를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왜수군이 조선 수군보다 더 우수한 화포 등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실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쟁이 일어나느냐 안 일어나느냐로 갑론을박하고 있는 상태에서 전쟁 준비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철저한 침공준비를 한 후 조선을 공격한 왜군의 전력이 월등히 우세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소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소형무기에 있어서는 왜군이 앞섰지만 대형무기 즉 대포와 같은 대형무기에서는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에도 조선이 월등히 앞서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형무기들은 임진왜란 때 갑자기 개발된 것이 아니라는데 더욱 놀랄만한 일이다. 이들 최첨단 무기들은 임진왜란보다 무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에 이미 한국에서는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대형무기들이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결실은 사실상 고려 말 고려를 최강의 군사 강국으로 만든 최무선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말 최무선이 등장하여 화약과 화포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고려 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왜구를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시대에 왜구(倭寇)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종 10년(1223)이다. 고려 말의 왜구는 침입횟수가 많은 것은 물론 그 규모가 매우 컸다. 많을 때는 200∼500척까지 떼지어 몰려들어 특정 해안지대는 물론 공주, 부여에도 왜구가 분산 침입했고 강화도 일대까지 침입하여 약탈했다. 한때 조정에서 천도론(遷都論)이 나올 정도로 그 피해가 막심했다. 왜구가 이와 같이 극성부린 이유는 일본이 남 북조로 갈려 60여 년간(1322∼1392) 내전에 휘말리면서 중앙정부의 위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하자 일본 서부의 호족들이 곡식과 기타 필수품을 획득하기 위해 해적들을 조직하여 고려를 조직적으로 침입했기 때문이다. 왜구가 창궐한 원인 중에 하나는 고려 전략에도 기인한다. 고려는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을 육지에 상륙시켜 놓고 요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육전(陸戰) 위주의 전술을 견지했다. 그러나 왜구의 장기가 백병전을 위주로 한 육전(陸戰)이므로 고려의 피해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육전에서 수전(水戰)으로 전략을 바꾸어 왜구들을 육지에 상륙시키지 않고 바다 위에서 격퇴하는 해전위주의 전술을 채택했다. 이때 왜구의 격퇴를 사실상 책임을 진 사람은 최무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무선은 고려 말엽인 충숙왕 12년(1325) 경북 영주(현재의 영천)에서 광흥창사 동순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무선이 무관으로 임관했을 때 고려 조정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육전 위주에서 해전 위주의 전술로 바꾸었으므로 대대적으로 후속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선박을 건조하고 강력한 수군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군함만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억제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내습하는 왜구의 숫자가 워낙 많은데다가 기존 수군의 전략 즉 충파나 육박전으로는 고려수군의 피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함선 내에 화포를 장착하여 바다에서 왜구의 배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으면서 격파하는 방법이다. 소위 세 번째 전술이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지만 세 번째 전술을 사용하려면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대형 화약무기에 필요한 대용량의 화약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화약 무기 개발 상황을 보자. 학자들은 1232년 금나라에서 원시적인 폭탄인 진천뢰와 로켓의 원리에 의해 분사추진이 되는 불화살 비화창(飛火槍)이 등장하고 14세기초 원나라가 둥그런 탄환 혹은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유통식(有筒式) 화기인 화포(또는 총통)가 개발되었다고 추정한다. 이같은 화기류는 원군의 유럽 원정으로 아랍과 유럽 세계에, 그리고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고려에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은 화약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화약 제조법을 군사기밀인 극비사항으로 엄격히 통제했으므로 좀처럼 다른 나라에서 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민왕은 1373년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왜구의 습격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있다. 근래에 왜구의 형세가 더욱 치열하니 바다에서 적을 추격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근절시키기 위해 배를 만들려고 한다. 그 배 위에서 사용할 기계, 화약, 유황, 염초 등의 물건을 조달할 방법이 없으니 명나라에서 분배해 달라’고 요청했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개국한 명나라도 왜구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으므로 왜구를 격퇴하겠다는 고려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지만 고려가 요청한 양을 모두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명나라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고려에서 요청한 양에서 턱도 없는 염초 50만 근과 유황 10만 근 만을 원조했다. 명나라로부터 충분한 양의 화약을 공급받지 못하자 사실상 함선에 화약무기를 장착하여 골머리 아픈 왜구를 격퇴하려는 계획은 큰 난관에 봉착한 셈이었다. 고려 조정은 결국 국내에서 화약 만드는 방법이 최상이라는 것을 절감하고 최무선에게 그 임무를 맡긴 것이다. 최무선은 우선 과거에 화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염초에 반묘(유황)와 버드나무 숯(분탄)을 섞어 화약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반묘와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염초를 만드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그는 화약을 만들기 위해 부엌 아궁이의 재나 마루 밑의 흙을 물에 타서 끓이는 등 수 없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드디어 초보적으로 염초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화약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보다 간편한 염초 제조법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염초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을 수소문했다. 우여곡절 끝에 염초 제조법을 알고 있는 중국인 이원(李元)을 만났고 결국 이원으로부터 염초자취법이란 화약제조법을 알아냈다. 이것은 오늘날 흑색 화약(유연 화약)과 같은 것으로 질산칼륨 75%, 유황 10%, 목탄 15%를 화합하여 만든 화약을 말한다. 흑색 화약은 염초를 산화제로, 목탄을 가연제로 하고 여기에 점화촉진제인 유황으로 이를 압축 성형하는 것이다. 흑색 화약은 약 300℃로 가열하면 발화하면서 세차게 탄다. 대기 중에서 흑색 화약의 밀도가 1.5 정도일 때 발화 속도는 1∼3m/초로 매우 빠르지만 연소 속도는 10mm/초로 매우 작다. 그러나 압력이 높아지면 연소 속도는 증가한다. 흑색 화약은 예로부터 폭약 또는 추진약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현재도 연소성이 좋고 긴 화염을 일으키므로 고체 추진체의 점화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은 화약을 이용한 무기, 즉 화전,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해본 후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화약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드디어 화약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관(提調官)으로 임명했으며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을 조직했다. 국방군사연구소 발행 『한국무기 발달사』에 의하면 최무선은 화통도감에서 17종의 화약무기를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무기는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三將軍),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筒), 화전(火箭), 주화(走火), 유화(流火), 촉천화(觸天火), 천산(穿山), 오룡전(五龍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질려포( 藜砲), 철탄자(鐵彈子) 등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화통도감이 설치된 후에 최무선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은 아니다. 화통도감이 설치되기 전인 공민왕 5년(1356), 왕이 서북면 방어 병력의 열병식을 참관했는데 이때 총통에서 발사한 화살이 남강에서 순천사 남쪽까지 날라 갔다는 기록을 보면 고려는 이미 총통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총통 발사에 사용한 화약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최무선은 이 직접 화약 만드는 법을 습득하자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화약무기를 개량하고 새로운 무기들을 독창적으로 개발했다는 것이 옳은 이야기로 보인다. 〈명나라 화포를 압도한 조선 화포〉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대장군, 이장군, 화포, 화통 등은 발사기 종류이고 화전,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은 피발사체 혹은 자체 폭발력을 지닌 로켓화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화포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대장군포는 쇠탄두가 달린 나무탄인 ‘차대전’과 ‘중전’을 평사로 쏘는 포인데, 조선시대에는 이것을 ‘장군화통’이라고 했다. 대장군포는 한쪽이 막힌 둥근 통 모양의 포신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포의 내부 직경은 96.9밀리미터, 길이는 859.5mm, 중량이 62.8kg이다. 화약통에는 흑색 화약이 채워졌다 폭발하기 때문에 이 폭발력을 견딜수 있도록 몸통 벽 두께를 위치에 따라 다르게 하였는데 평균 34∼46mm이다. 외탄도 계산 결과 발사각이 45도일 때 탄의 비행거리는 1060m, 최대 고도는 270m이다. 이곳에서 발사하는 대전은 2.7kg의 쇠탄두가 앞에 달려 있고 그 가운데로부터 뒤쪽에 십자형으로 쇠날개가 4개 달려 있으며 쇠탄두, 날개 그리고 꼬리 부분에 쇠띠가 감겨 있었다. 형태가 로켓을 방불케 하는 대전은 목표를 한번에 파괴하는 위력을 가졌다. 대장군포는 주로 적의 성루, 성문, 성벽, 배 등을 파괴하는데 사용됐다. 같은 형태의 ‘이장군포’는 다소 규모가 작은데 640m의 비행거리와 120m/초의 속도를 가졌다. 또 그보다 작은 삼장군포와 둥근 돌탄을 재었다가 곡사로 발사하며 운반에 편리하게 조립식으로 만든 육화석포(六花石砲)도 있었다. 육석화포란 동으로 만들었는데 격목통과 포신의 길이가 330.6mm로 짧기 때문에 장약된 화약이 발사 후 포신 안에서 다 타지 못하고 일부 포신 밖으로 나가면서 타는데 그 불꽃이 여섯 가지 색깔을 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총의 무게는 121.8kg으로 이동할 때는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따로따로 운반하여 필요한 곳에서 간단히 조립하여 포격을 가할 수 있는 등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은 지리적 조건에서는 매우 위력적인 무기였다. 탄도 계산 결과에 의하면 탄의 속도는 최대 약 42m/초이며 45도 초기 경사각으로 발사할 때 최대 비행거리는 약 175m, 최대 비행 고도는 48m이다. 『고려사』에는 이 포로 수백 근의 돌탄을 쏘았다고 적혀 있다. 최무선이 사망한 지 12년이 지난 1407년,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기감(軍器監) 화약장(火藥匠) 33명에게 각각 쌀 1석씩을 내려 주었다. 제야(除夜)에 군기감에서 화산대(火山臺)를 대궐 가운데 베풀었는데, 화약의 맹렬하기가 전날에 배나 되어, 왜사(倭使)가 와서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제색(諸色) 장인(匠人)에게도 추포 50필을 내려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군기감에 설치한 화산대에서 화약무기를 발사하는 실험을 했는데 화약의 위력이 기존 것의 2배에 이르고 거기에 참가했던 일본 사신들을 놀라게 하여, 화약장 33명에게 쌀 한 섬씩을 시상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화약과 이를 사용한 무기 제조에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화포는 명나라 화포와의 대비 실험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명종 원년 11월 8일, 군기시 제조가 명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 중국 사람에게서 화포의 법을 전습하여 모화관(慕華館)에서 쏘아보았으나 별로 맹렬한 힘이 없어 40보 밖에 표적을 세우고 쏘았는데도 모두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포는 한 발이 방패에 맞았는데 도로 튕기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삼(杉)나무의 재를 쓰기 때문에 빠르고 맹렬한데 여기서는 버드나무 재를 쓰기 때문에 맹렬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기계가 매우 둔하여 우리나라 포만 못합니다.” 최무선에 의해 화약무기의 기술이 정착되자 최무선이 사망한 후에도 화약무기는 계속 개발되었고 이들 화포들을 분석하면 당시의 대형 무기들이 얼마나 우수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당시의 가장 큰 포는 날개를 가진 길쭉한 ‘대장군전’ 또는 둥근 주철탄을 발사하는 천자총통이다. 천자총통의 전체 길이는 1370mm이며 중량은 725kg, 포신 길이는 890mm이다. 여기에서 대장군전이란 천자총통에서 발사되던 탄이다. 대장군전의 전체 길이는 992mm이고 전체 중량은 29.84kg이다.
대장군전을 쏠 경우 포신 끝에서 탄의 속도는 142m/초이다. 직경 20mm의 철알탄 200개를 쏘는 경우 포신 끝에서의 탄의 속도는 205m/초이다. 천자총통에서 발사각 45도로 대장군전을 쏠 경우에는 사거리 1,645m, 발사각을 30도로 하는 경우에는 1503m이다. 주철 200개를 쏠 경우 발사각 45도로 664m를 보낼 수 있었다. 지자총통 역시 ‘장군전’ 1개 또는 주철탄 200개를 함께 발사하는, 당시로서는 두번째로 큰 포이다. 전체 길이는 1171mm, 중량은 132kg이다. 장군전은 지자총통에서 발사되는 탄이다. 현자총통은 날개가 달린 길쭉하고 유선형인 ‘차대전’ 1개 또는 주철탄 100개를 발사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세번째로 큰 포이다. 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 모두 작동 원리는 천자총통과 같고, 다만 그것들보다 크기가 작고 위력이 약한 것이다. 총통 못지 않게 중요한 무기로는 완구(碗口)가 있다. 완구는 시한폭탄 원리의 진천뢰 또는 둥근 돌탄을 곡사로 발사하는 중세기 우리나라의 절구포이다. 『융원필비』에는 ‘완구는 바리 모양으로 생겼으며 구멍으로 탄을 설치하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완구이다’라고 했다. 이 포를 쏘면 돌탄에 의해 허물어지거나 분쇄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성을 공격할 때 첫째가는 화약무기였다. 완구는 크기에 따라 별대완구,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소소완구 등 다섯 가지가 있었다. 완구는 고려시대의 육화석포를 계승한 것으로 고려 때의 것은 조립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의 것은 일체식으로 주조되었다. '별대완구'의 경우 구경 370mm, 외경 480mm, 총 길이 860mm, 중량 656.7kg으로 매우 큰 무기였다. 별대완구로 71kg이나 나가는 둥근 돌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는 496m, 비진천뢰를 발사할 때는 434m이다. 학자들은 최무선이 기존에 있던 로켓화기인 화전을 보다 개량하고 새로운 개념의 ‘주화’를 발명했다고 추정한다. 화전은 화살에 달린 화약통에 불을 단 다음 화살에 활을 재어 날리는 무기이지만 주화는 화전과는 달리 화살의 화약통에 불을 달아 자체 추진력으로 불화살이 날아가게 한 무기이다. 화전과 주화는 추진 화약의 작용에 의한 분사추진식 화살로서 추진 원리는 지금의 로켓과 같지만 적군에게 주는 파괴력은 주화가 화전보다 월등하다. 주화는 1448년(세종30년)때 금촉주화→세주화→금촉소주화→소·중·대주화를 거쳐 소·중·대신기전(神機箭)으로 불리며 화차에서 발사할 수 있는 자동화무기로 변한다. 임진왜란 때 그 위력을 발휘한 신기전은 전쟁에서 표적을 태워버리는 무기로 쓰였으며 '기화'라 하여 불, 연기, 소리 등을 통한 신호 수단으로도 쓰였다(「행주대첩, 첨단과학 무기 사용해 가능」, 국정브리핑, 2004.03.29 참조). 신기전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것은 약통 앞부분에 발화통이 붙어있어 목표물에 도착할 즈음 폭발했다. 당시의 다른 화기와는 달리 비행 중에 불과 연기를 분출하며 큰 소리를 내는데다가 목표물을 향해 비행한 뒤 스스로 폭발해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대형 화전은 성을 방어할 때나 해전에서 체적이 크고 불이 잘 붙지 않는 목표물을 태우기 위하여 주로 사용되었다. 〈세계 해전사를 다시 쓰게 한 고려 수군〉 최무선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서 군함에 화포를 장착하여 적들의 배를 파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우여곡절 끝에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고 화통도감의 판서가 되어 화약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데 그의 진가는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다. 우왕 6년(1380),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 2만여 명이 500여 척의 배로 진포(현 군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휩쓸고 다녔다.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羅世, 원래 원나라 사람으로 귀화하여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워 당시 2등공신이 되었으며 진포대첩으로 판도판서(版圖判書)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승진했다)와 함께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전선 80여척을 동원 왜구를 토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왜구들은 주력이 이미 상륙하였고 선박들을 모두 연결하여 항구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무장한 고려 군함은 왜선에 다가가 포격을 퍼부었다. 이 당시 화포, 화통, 질려포 등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로켓무기인 주화, 유화, 촉천화 등이 전선 깊숙이 날라가 500여 척의 선단을 단 한 척도 남김없이 격멸했다.
진포바다 싸움은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화포를 사용하여 적선을 소각하였는데…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배를 지키던 적병들은 거의 타죽었으며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자들도 많았다.’ 최무선의 화약무기 공격으로 배를 모두 잃은 왜구 잔병은 충청도 옥천과 경상도 상주, 김천을 거쳐 남하하다가 후에 조선왕조를 세우는 이성계에 의해 지리산 밑의 운봉(雲峰)에서 완전히 섬멸된다. 이 전투가 유명한 남원의 운봉 황산대첩으로 이때도 최무선의 화기가 사용되어 그 위력을 발휘했다. 우왕9년(1383)에 또 다시 왜구들이 120척의 배로 침입해 왔으나 정지 장군이 화포를 장착한 군함 47척으로 왜구의 선박 120척을 추격하여 남해 관음포에 이르러 화포로 왜구들이 갖고 있던 선박을 모두 격멸한다. 승기를 잡은 고려 조정은 왜구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키로 하고 1389년에 박위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여 전선 100척을 동원하여 대마도 토벌에 나선다. 고려군은 30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왜구 소굴을 철저히 파괴하고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 백성 100여명을 구출해서 귀국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약무기가 한선에서 탁월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선의 구조가 평저선이기 때문이다. 배에서 화포를 발사하면 배는 큰 충격을 받는다. 특히 재료가 나무로 되어 있고 배수량이 일정한 규모라면 심한 진동을 받으며 흔들린다. 이러한 진동과 흔들림은 배의 안정성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화포의 명중률에도 큰 영향을 주는데 고려의 전함은 평저선이므로 포 사격시 발생하는 진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된 후 왜군이 화포를 장착한 조선 수군의 위력에 놀라 조선 수군과 마찬가지로 화포를 설치하지만 용골이 하나뿐인 구조로 인하여 조선 수군에 비해 화포의 명중률이 현저하게 낮았다. 왜수군이 조선 수군에게 연전연패한 가장 큰 요인 중에 하나이다. 여하튼 최무선의 중요성은 진포 앞바다의 해전이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선박에 화포를 설치하여 정박 중인 적선을 완파했고 관음포에서는 바다에서 함포로 적선을 격침시키는 해전을 치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게 평가된다. 유럽에서 화포를 사용하여 해전을 벌인 것은 고려보다 무려 2백 년이나 늦은 1571년 10월 7일 아침,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연합 함대가 투르크 함대를 격파한 레판토 해전이다.
당시에 세계의 주도권은 이슬람교로 무장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슐레이만 대제로 불리는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는 오스만 제국에 미증유의 번영을 가져왔고 서방 세계의 분쟁에 중재자로 나서는 한편 제국의 통치 기구를 확고하게 다졌다. 그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여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다뉴브 강을 넘었고 세계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청동거상이 설치되었던 로도스 섬을 점령했다. 그러나 슐레이만은 육군 이외에 비장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함대가 그것이다. 오스만 함대는 합스부르크 함대를 격파하고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연안을 제압했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확보했고 키프로스 섬을 점령했다. 이 당시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자 로마교황 피우스 5세는 유럽을 규합하여 반 오스만 연합을 결성했다. 교황과 에스파니아는 오스트리아와 베네치아를 동맹으로 끌어 드린 후 오스트리아 카알 5세의 서자인 돈 환으로 하여금 연합함대를 이끌게 했다. 마침 오스만 함대는 키프로스 작전 후 군함들의 보수를 위해 지중해 코린트 만 어귀의 레판토 항구에 정박해 있었는데 돈 환이 거느린 신성동맹(神聖同盟)의 그리스도교도 함대가 다가오자 오스만 함대의 사령관 메흐메트 알리는 선박들이 완전하게 보수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그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항을 명령했다. 양쪽 세력은 비슷했지만 200척을 넘는 갤리선과 약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투르크 측이 수적으로 다소 우세했다. 그러나 오스만 함대는 그리스도 교도 함대에 신형 무기 즉 대포가 탑재되어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강력한 대포를 비치한 신형 베네치아 갤리선에서 예상치 못한 포격을 하자 투르크 함대는 곧바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오경 이미 전세는 그리스도 군에게 넘어갔고 오후 4시에 승리를 거두었다. 투르크 군의 100 척이 넘는 군함들이 나포되었고 거의 1만 명이나 되는 장병들이 생포되었다. 이 전투는 기독교 진영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최초의 승리였다. 레판토 해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곧바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로 넘어가고 역사의 주도권은 이후 바다를 누비는 국가가 차지한다. 그러므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비롯하여 영국과 프랑스군의 해군이 격돌한 트라팔가 해전도 최무선이 화약무기를 선박에 장착하기 시작한 아이디어를 답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무선의 화약무기로 함대를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은 세계 해전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음을 감안할 때 그의 비중은 세계 어느 과학자와 견주어 볼 때 결코 낮다고 볼 수 없다(「세계 해전사 바꾼 최무선의 화포」, 국정브리핑, 2004.02.16 참조). 04/8/7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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