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60)땀 흘리는 사명대사 표충비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02
땀 흘리는 사명대사 표충비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있는 홍제사(弘濟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 이곳에 ‘땀 흘리는 비’로 알려진 표충비가 있다. 표충비는 비 높이 2.76미터, 비두(碑頭)와 기단석까지 포함하면 3.9미터이며 폭 97센티미터, 두께 70센티미터의 검은 색 돌로 재질은 흑랍석으로 흔히 오석(烏石)이라고도 부른다. 기와지붕으로 된 비각이 이 비를 보호하고 있다.

밀양시의 밀양경찰서는 홍제사 표충비의 땀 흘리는 현상을 '표충비 한출(汗出) 동향'으로 역대 정권에 보고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비석에서 땀이 나는 것 자체가 희한한 일일 뿐더러 그것을 권력층에서 민심과 연결시켜 예민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 땀 흘리는 비석은 비단 권력층의 관심사만은 아니었다. ‘요시찰 대상 1호’로 표충비를 관찰하는 관내 파출소에서는 ‘나라에 사건 사고 등 변고가 생기거나 데모 등 큰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면 으레 표충비가 땀을 흘리지 않느냐는 일반인들의 전화 문의가 심심찮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비석에서 땀을 흘리는 것과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연결시켜보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표충비는 1894년 갑오 동학혁명 7일 전에 3말1되 분량의 땀을 흘린 이후 줄곧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땀을 흘려왔기 때문이다.

표충비각.



국내 큰 사건 예견…노 대통령 탄핵 예고설까지



표충비는 영조 18년(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法孫)인 남붕(南鵬)이 경북 경산에서 돌을 캐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비에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의현(李宜顯)이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려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절이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홍제사에서는 우선 표충비가 세워진 후 이를 관리하기 위해 절을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이 비가 유명하게 된 것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적마다 ‘땀을 흘리는’ 신기한 현상 때문이다. 최근의 기록으로 2004년 2월 21일 오후 9시부터 22일 오전 11시까지, 2월 29일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땀을 흘렸는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과 100년 만의 폭설을 예고한 것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헌법재판소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을 앞두고 있던 지난 2월21일과 22일 사이 14시간동안 30리터, 같은 달 29일부터 3월1일 사이 9시간동안 20리터의 땀을 흘렸다. 2004년 6월 20일에도 오전 10시40분경부터 1.8리터 가량의 땀을 흘렸다. 2004년 6월 20일 흘린 땀에 대해서는 이라크에서 피살된 김선일 씨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표충비가 땀을 흘리는 것은 사람이 땀을 흘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먼저 ‘앞이마’인 비두로부터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서 주르륵 흘러내린 뒤로 점차로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비가 땀을 흘릴 때 비신(碑身) 표면에만 물방울이 맺힐 뿐 글자의 획 안이나 비석 위를 덮는 비개석(碑蓋石), 기초부분인 기단석(基壇石)에는 전혀 비치지 않고 주로 비신 윗부분에서 맺혀 아래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물론 땀을 흘리는 날은 습하거나 건조한 날씨를 가리지 않는다.

사찰측은 비에서 땀이 흐를 때마다 바닥에 무명천을 깔아 이를 짜 양을 재고 있으며 땀을 흘린 기록을 정리해 보관하고 있다. 사찰 측의 기록에 따르면 1998년 2월 20일 오전 4시부터 오후 3시까지 1말 7되가 흘렀으며 1997년 2월 25일에는 오후 4시 30분부터 다음날인 26일 오전 5시 30분까지, 1997년 새해 첫날에는 낮 12시 30분부터 1시간 동안 땀을 흘렸는데 이때 한보사태, 황장엽 비서 망명, 이한영 피습 사건 등이 일어났다.


바닥에 무명 깔았다가 나중에 짜서 흐른 땀 계량



표충비가 땀을 흘린 기록은 화려하다. 1894년 갑오군란 7일 전, 땀을 서 말 한 되 흘렸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1910년 경술 합방 17일 전에 네 말 여섯 되의 땀을 흘렸다고 한다. 1945년 해방 14일 전에는 다섯 말 일곱 되, 1950년 6ㆍ25 발발 25일 전에 서 말 여덟 되, 1960년 4ㆍ19혁명 당일 19시간 동안 땀을 흘렸고 1961년 5ㆍ16 5일전에도 다섯 말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5일 전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1991년 4월17일 오후 10시부터 18일 오전 8시까지 고르바초프 대통령 방문 1일 전, 1996년 1월 14일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가 일어났을 때, 1996년 11월 5일 강릉 잠수함 무장 공비 침투 때도 땀을 흘린 기록이 있다. 땀의 양은 바닥에 무명천 등을 깐 뒤 이를 짜서 재었기 때문에 정확할 수는 없지만 상당량이 흘러나온 것은 사실이다.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비.


표충비는 평소에 마른 돌 그대로 맑은 빛을 띠고 있지만 어떤 일을 예언해 줄 때는 2~3일 전부터 비석 색깔이 변하여 먹구름처럼 어둡고 침침해서 물기가 생기며 사람들이 흘리는 땀과 같이 흐른다고 한다. 다음은 비석이 땀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 땀을 발라 보았다는 한 할머니의 증언이다.

“비석의 땀을 얼굴에 바르면 피부가 고와지고 잘 안 늙는다고 해서 손으로 찍어 얼굴에 발라 보았더니 끈적끈적한 것이 사람의 땀과 비슷하더군요. 맛도 보았는데 찝찔한 것이 꼭 사람이 흘리는 땀과 같았어요.”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구전되면서 이 절을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비가 땀을 흘린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신비로운 느낌이 들어 방문하지만 사명대사의 영험을 구하기 위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병이 든 환자나 소원을 빌려는 사람들이 주로 찾아오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꿈에 사명대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밀양사람들은 아예 밀양 출신의 사명대사를 ‘밀양의 수호신’으로 여기는 경향도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표충비는 여느 비석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비각 앞에는 촛대와 향로가 설치돼 있는데 참배객들이 찾아와 향을 사르고 비석에 예를 갖추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밀양에서 매년 벌어지는 전통 축제인 ‘아랑제’ 행사는 표충비 비각에서 점화식을 가짐으로써 시작되고, 무안면의 줄다리기와 용호놀이도 반드시 표충비에서 제를 드린 다음 행사가 거행된다.


일본인들이 무서워 한 사명대사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년)의 본관은 풍천(豊川), 속명은 임응규(任應圭)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명종 13년(1558년),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마저 죽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였다. 3년 뒤 승과에 합격하였고 선조 8년(1575년) 선종의 본거지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의 휴정(休靜)을 찾아가 수행에 정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스승인 휴정과 함께 투옥 당했으나 강릉 지방 유생들의 탄원으로 풀려났다. 1592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3월에는 서울 부근 삼각산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1594년 4월부터 1597년 3월 사이에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4차례의 협상에 참석하였다. 1605년 4월에는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500명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하였는데 이때 왜군에 강탈당했던 통도사의 석가모니 진신사리도 되찾아서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 안치했다. 1610년 8월에 해인사의 홍제암에서 66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명대사에 대한 전설은 끊임이 없다. 표충비에서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영취산 대법사(밀양시 중산리)에는 사명대사가 50살 때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나 잎을 피웠다는 아름드리 모과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높이가 2.2미터, 굵기는 3.2미터로 나무 밑둥은 어른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야 마주 잡을 정도로 우람하다.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 부도탑.


이 절은 사명대사가 임종하기 전 10여 년 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한데, 임종 후 그 영정을 모신 곳이라 해서 조정에서 표충사(表忠詞)라는 이름을 하사했다가 후에 영정이 현 표충사로 모셔지는 바람에 대법사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절에서 1990년대 초, 법당이 너무 협소하여 확장하려고 법당 앞에 있는 커다란 모과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려는 작업을 추진했다.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기 전날 밤, 주지인 지혜 스님은 기묘한 꿈을 꾸었다. 밖에서 천둥번개가 치더니 사명대사가 나타난 것이다. 사명대사는 “내가 400년을 기르며 지켜온 나무를 왜 해치려 하느냐? 나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라고 꾸짖었다. 그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주지 스님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음날 주지스님은 이전 작업을 취소하였다.

이 같은 이야기가 한 스님의 개인적인 신비체험일 뿐이라고 무시해버리기에는 현재의 대법사 구조가 이상하다. 원래의 협소한 법당과 모과나무는 그대로 놔둔 채, 법당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비켜 앉은 공터에 새 법당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본존불을 모시는 법당을 중심에서 멀어진 곳에다 짓는, 즉 사찰 건축 상식에서 크게 어긋나는 공사를 하는 것은 사명대사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기백 끊으려 비석주변 파해친 일본인 의문사



일제강점기 말기에 한 일본인은 한국인들의 기백을 끊기 위해 풍수 논리까지 도입했다. 진등산의 정기가 내려와 뭉쳐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표충비 바로 뒤쪽 땅 밑에 일본은 엄청난 규모의 철근을 꽂아놓고 그 위에다 담배창고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독한 냄새가 나는 담배는 모두 맥을 끊기 위한 수단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사명대사 비석 주위로 일본인 관사와 지서(현 파출소)를 설치해 ‘비석의 기’를 차단하는 한편 비석 앞쪽에 있던 연못을 메워버리기까지 했다.

이 여파로 표충비에 균열이 생겼다. 그 직후 그 일본인들은 의문사를 당했고 표충비는 상처가 아물 듯이 말짱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갈라진 틈으로 손가락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는데 상처가 차차 아물어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고 한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면 통일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데 곧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민들은 피력한다.

사명대사의 영험에 대해서는 다른 예도 있다. 구한말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지자 팔도에는 오경 후에 홍제존자가 통곡한다는 소문이 불처럼 번져나갔다. 이것은 경술년 국치를 앞두고 해인사 안에 있는 사명대사비가 밤새워 울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사명대사의 다비처에 세워진 이 비석의 정식 명칭은 ‘자통홍제존자 사명대사 석장비’이다. 멀리서 곡소리가 나서 가까이 가보면 들리지 않다가 멀어지면 곡소리가 다시 났다는 것이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왜장들을 골탕 먹이던 것이 민중들에게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으므로 항일의 여론을 만들 필요가 있을 때는 사명대사의 비문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의 기운이 한참 퍼져나가던 1943년에도 해인사 홍제암의 사명대사비가 울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팔도로 번져나가 일본이 곧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된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자 이에 당황한 합천경찰서가 사명대사비를 4토막 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비석을 깨뜨린 사람들은 사명대사의 벌을 받아 모두 사망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은 없다.

사명대사의 영험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특출한 활약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승병을 지휘하며 일본군들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승병 7명이 278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일본군은 사명대사에게 철저히 농락당하자 사명대사가 지휘하는 승병들과 마주치지 않도록 도망가기에 바빴다.

표충비의 땀 흘리는 장면.


사명대사가 선조 37년(1604년) 강화사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만나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협상할 때의 일이다.

도쿠가와 :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
사명대사 : 일본에 있다.
도쿠가와 : 무슨 뜻이냐?
사명대사 : 우리나라 사람은 누구나 막론하고 당신의 머리를 베고자 하니 당신의 머리가 바로 보배요.

일본에 와서 태연스럽게 자신의 목이 보배라는 말을 하는 사명대사를 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대담함에 놀라 협상이 순조로워졌고 급기야는 조선인 포로 3,500명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허균의 석장비문과 표충사의 영당비문에 적혀 있다.  

그러나 사명대사에 관한 전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협상을 위해 일본에 머물러 있었던 때의 이야기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치명상을 안겨 준 사명대사의 명성을 시기한 일본인들은 사명대사가 묵을 방바닥 밑에 철판을 깔고 방바닥 밑에서 밤새도록 불을 땠다. 사명대사는 일본인들의 흉계를 알고 품에 품고 온 포척자(과일 이름) 세 개를 내어 한 개는 자리 밑에 깔고 두 개는 양손에 갈라 쥐었다. 그리고 영사(수은을 고아서 만든 약재)로 서리 상(霜), 눈 설(雪)자를 네 벽에 써 붙인 다음 정신을 통일하고 비밀 진언을 외며 앉아 있었다. 한참 후 사명대사가 있는 방은 얼음과 눈이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 일본인들이 문을 열어 보니 대사의 긴 수염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대사는 일본인을 보자 큰 소리로 호령하였다.

“일본이 조선보다 따뜻하다고 들었는데 간밤에 어찌 그리도 추우냐. 외국의 사신에 대한 대접이 너무나도 소홀하다.”

하루는 접반사가 천황이 뵙자고 한다고 대사를 황궁으로 인도하였다. 성문으로 들어가는 좌우에는 무쇠로 만든 말이 양쪽으로 다섯 필씩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 말들은 미리 시뻘겋게 달구어져 있었다. 그 사이는 몸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였다. 그 틈을 잘못 가다가는 몸이 타 버릴 상황이었다.

대사는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비밀 진언을 외었다. 그러자 돌연 북쪽 하늘에서 구름이 떠오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불에 달구어졌던 무쇠 말들은 곧 식어버렸다. 이것을 본 일본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싹싹 빌면서 사명대사의 신통력에 경의를 표하고 금으로 꾸민 가마에 태워서 황궁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자들은 사명대사의 공적이 상상을 초월하기에 도술을 부리는 신기한 인물로 묘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상 확인되는 실존 인물로서 전설이든 아니든 사명대사만큼 초능력을 발휘하였다는 사람은 없다.

사명대사의 일본행을 그린 일본 지도.



사람 땀과 비슷한 성분의 표충비 땀



표충비가 땀 흘리는 현상은 사명대사의 신통력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를 제공한다. 표충비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땀 흘리는 현상이 현재의 과학적 상식으로 풀리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안영배의 글에서 인용한다.

‘첫째 표충비 땀은 사람 몸에서 땀이 나는 것처럼 비석 사면에서 퐁퐁 올라온다. 또 그 땀을 맛보면 약간 짠맛이 느껴질 정도로 사람 땀과 흡사한데, 이는 보통 물이 아니라는 증거다.

둘째 표충비 땀이 습기 등 기후에 의한 자연 현상이라고 하는데 습기를 가득 머금은 장마철에는 한 번도 땀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설령 기후에 의한 자연현상으로 땀을 흘린다 쳐도 비석에 깊게 새겨진 글자 속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세로 방향으로 새겨진 한자들 사이, 즉 표면이 매끈한 곳을 골라 흐른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물이란 것은 움푹한 곳으로 흘러드는 것이 상식인데 표충비 땀은 그렇지 않다.

넷째 표충비를 보호하는 비각 기둥은 물론 바로 10미터 떨어진 곳에 크기가 비슷한 홍제사 사적비에서는 같은 조건에서도 전혀 땀이 나지 않는다.’

사찰 측에서는 시공을 초월한 사명대사의 구국혼이 비석을 매개로 중대사를 예시, 후손들로 하여금 대비케 하려는 것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주변의 다른 사물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국가적으로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으로 미뤄 사명대사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사명대사의 영험이 깃들어 있다는 표충비의 신비에 대해 학계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우선 표충비가 현재의 위치까지 오게 된 경로를 조사했다.

기록에 의하면 표충비는 1738년(영조 14년)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그의 법손인 남붕(南鵬)이 경산(慶山; 경주의 산)에서 채취한 돌로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또 단장면 표충사에 보관돼 있는 「사명당 비각 이전 서문」에 의하면 조선조 말 부산진에 있던 비를 밀양으로 이전해 왔다고 기록돼 있다.

부산에 있던 비석을 밀양으로 옮겨왔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기록에 따르면 표충비가 맨 처음으로 땀을 낸 것은 1894년 동학혁명 때 일이다. 그러니까 1738년에 조성된 이후 1백50여 년 간은 표충비가 땀을 흘렸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조선조 말, 즉 18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땀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밀양의 무안면이라는 특수한 지형 자체가 표충비가 땀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밀양시보건소〉에서 표충비의 땀을 채취, 〈경남보건환경연구원〉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분석 결과 표충비 땀은 몇 가지 중금속과 함께 인체의 땀과 비슷한 염소성분(염분)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이 실험에 참여한 바 있는 보건소의 이금희는 ‘주민들이 표충사 땀에서 짭짤한 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염소 성분 때문이고, 표충비 석재 자체에서도 염소성분이 검출된 걸로 안다’고 말했다.

표충비의 재질과 관련해 부산대의 김항묵 교수는 흥미로운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오석이라 불리는 표충비는 철분이 다량 함유된 염기성 화성암인 휘록암으로 쉽게 차가워지는 성질이 있어 다습(多濕)한 공기 등이 불어올 경우 다른 재질보다 이슬이 잘 맺히는 특성이 있음을 밝혀냈다. 그러므로 기류에 따른 온도가 5도 이상 차이가 날 때 머금었던 습기를 분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슬이 맺히는 결로(結露) 현상은 통풍이 불량한 분지형에서 잘 발생한다. 즉 비오기 전이나 안개가 낀 날 등 습도가 높은 공기가 불어와 차가운 것에 부딪히면 이슬을 맺게 되는데, 통풍이 여의치 않은 곳에서는 이슬이 제대로 증발되지 않기 때문에 물이 돼 흐르는 현상이 생긴다.’

무안면은 분지형의 지세를 갖추고 있어 표충비가 땀을 낼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었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비석은 표면이 거울처럼 매끈매끈해 표면장력 때문에 한번 맺힌 이슬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특성 또한 갖추고 있다고 했다. 반면 표충비를 보호하는 비각의 기둥에서 땀이 흐르지 않은 것은 그 재질이 산성 용회암으로 쉽게 차가워지지 않아 이슬맺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표충비는 그 재질 자체가 땀을 잘 낼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대의 진병화 교수도 '표충비 표면의 응결 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흥미로운 실험 자료를 발표했다.

‘비석 냉각의 주요인은 비각으로 인해 햇볕을 직접적으로 받는 양이 적기 때문이며 이로 인한 냉각효과는 비각이 없는 경우보다 일 평군 3.8도이다. 따라서 냉각된 비석 표면에 온난하고 습한 공기의 접촉에 의해 응결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된다.


"냉각된 비석에 온난다습한 공기 닿아 을결" 해석도



선퀴스트(1988)의 모델을 적용한 결과 비석과 공기의 온도차가 클수록 응결량이 많았고 비석이 가열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응결 초기에 가열률이 컸고 시간이 흐를수록 가열률이 작았으며 비석과 공기의 온도차가 20도일 경우 시간당 1.33리터 정도 응결되었으며 응결 지속시간은 12~24시간 이내로 추정된다.’

사명대사 영정.


그러나 사명대사의 영험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은 바깥 기온이 5도 이상 차이가 나지 않는 동지섣달에도 표충비가 땀을 흘리며 물방울이 얼지 않고 흐르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부산대학교의 문승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기가 닿는 부분이 차갑거나 수증기가 공기 중에 많은 경우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의 일기도를 분석한 결과 ‘땀이 흘렀다’는 날은 수증기가 많은 온난 또는 한랭전선이 통과했으며 ‘땀이 오래 흘렀다’는 날은 기압골이 깊었던 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한랭전선이 통과할 때마다 매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므로 속단하지는 못한다.”

문 교수는 과학적인 원인 규명을 하려면 주변에 대한 정밀한 기상 관측을 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더구나 기묘한 것은 표충비가 땀을 흘리면, 전북 송광사 대웅전의 3불상에서도 눈물이 흐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밀양의 표충비가 임진왜란과 관계돼 있다면 송광사는 병자호란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조선조 중기 1620년에 인조대왕이 불력(佛力)을 빌려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병자호란 때 중국 심양에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귀환을 빌기 위해 중창불사를 한 전형적인 호국사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절의 본당인 대웅전 삼존불상(석가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과 명부전의 지장보살 불상이 국가 위기시마다 어김없이 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이 절의 주지인 지원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93년 송광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내 눈으로 부처님이 땀을 흘리는 것을 4번이나 목격했다. 대웅전의 아미타불은 96년 11월경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아군과 공비가 사살되는 어지러운 시점에서부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는데 95년 말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95년 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무렵에는 명부전의 지장보살상이 엄청나게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고 93년 10월 서해페리호가 변산 앞바다에서 침몰했을 때는 대웅전의 약사여래불이 눈물을 흘렸다. 희한한 것은 대웅전에는 똑같은 조건의 부처님 3분이 모셔져 있는데 눈물을 같이 흘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따로따로 흘리니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대웅전의 아미타불과 석가불, 약사여래불에서 물이 흐른 자국이 선명하다. 그리고 대웅전 옆 한 귀퉁이에는 지금까지 땀을 흘린 불상 사진과 날짜를 기입해 전시해 놓고 있었다. 표충비와의 기록을 보면 어느 정도 일치성을 보여주는 것은 송광사 기록을 기준으로 5번(송광사에서 땀 흘린 기록은 8차례)이나 되었다. 이와 같이 홍제사 표충비와 송광사 3불상에 물기가 흘렀던 시기가 같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볼 수만은 없는 무언가 있다는 설명이다.

해인사의 산중 암자로서 사명대사가 입적하였고 광해군이 내린 사명대사 비석과 부도가 있는 홍제암의 본흥 스님은 이와 같은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무언가 신화를 만들어서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신화는 보편적인 상황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사명대사는 가장 알맞는 조건을 갖고 있다’

사명대사와 최영 장군을 연계하기도 한다. 민통선 안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에 장군으로 진급코자 하는 많은 군인들이 찾아가 제사를 지낸다. 그 이유는 최영 장군의 영(靈)이 보답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국가에 충성한 최영 장군이 자신의 뜻을 이어갈 군인들을 점지하여 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영 장군의 영은 국가를 지킬 군인을 지도하는 수준임에 반하여 사명대사의 영은 국가의 안위를 알려 줄 정도의 높은 차원이다. 표충비의 땀 흘림을 사명대사가 국가를 위한 염원의 발로라고 믿는다면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처럼 실존 인물에 대한 전설이나 신화가 많지 않은 나라는 없을 듯하다. 외국의 경우 유명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이나 유품들이 경매에서 고가로 팔리면서 그 사람에 대한 신화나 전설은 계속 쌓여 나간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머리카락 몇 올의 값은 무려 10여 만 달러에 팔렸고 처칠이 사용하던 지팡이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이러한 전설이나 신화가 결국 후손들의 문화적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를 지배한 일본인들은 말할 것 없고, 광복 이후 국민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않은 권력자들은 표충비가 땀 흘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껴왔다는 것은 서두의 예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표충비를 관리하는 표충사 스님들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표충비에서 땀을 흘리기라도 하면 관리들이 외부에 발설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땀 흘린 양을 적게 해달라고 부탁해 오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는 표충비가 정서적으로 독재자들에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식이었고, 이에 항거하는 국민들에게는 하나의 카타르시스가 돼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들로부터 표충비의 땀 흘림이 인간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믿음을 계속 얻어 간다면 표충비에 대한 신화나 전설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05/5/23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