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창덕궁 ① | ||||||||||||||||||||||||||||||||||||||||||||||||||||||||||||||||||||||||||||||||||||||||||
한국과 중국, 일본을 모두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세 나라의 궁궐 중에서 어느 나라 건물들이 가장 아름다우냐고 질문하면 단연코 한국의 궁궐이 가장 아름답다고 대답한다. 기다랗게 늘어져 버선코 마냥 날아갈 듯 오른 추녀선이며 아름다운 색으로 칠해진 단청을 보면 한국인들의 심미안이 놀랍다고 칭찬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건축물이 다른 나라 목조 건축물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한국의 자연적인 풍토와 잘 어우러지는 형태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으뜸으로 든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굳이 자연적인 지형을 깎거나 변형시키지 않았으며 나무나 돌도 자연을 그대로 이용했다. 건축물 재료조차 자연을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한국 건축물의 대부분에서 사용된 원형기둥이다. 이는 건축물에 사용된 나무가 원형이므로 특별한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일본과 중국의 경우는 사각형의 기둥이 자주 보인다. 사각형 기둥은 원형의 나무를 인공적으로 깎아 사각형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 면만 보면 중국과 일본이 건물을 건설할 때 보다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계적인 톱이 없었던 과거에 원형 기둥을 사각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다. 더구나 대형 건물에 사용되는 기둥은 매우 크기 때문에 쉽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한국이 매우 안정된 국가라는 것을 뜻한다. 한국은 원칙적으로 노예제도가 없었다. 한반도 내에서 전쟁이 많기는 했지만 설사 죄를 지어 죄인이 되고 천민이 되어 양반에 소속되는 신분으로 되었다 해도 외국의 노예에 비할 바가 아니다. 건축 자연환경에 알맞게 조화 노예와 같은 잉여 노동력이 없던 한국에서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고 당연히 자연에 가장 알맞은 형태를 생각했다. 그렇다고 원형기둥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아니다. 대형 건물의 기둥은 착시 현상을 고려하여 배불림을 채택했으며 목조 건물에 있어서의 피치 못할 단점인 부식 문제를 아름다운 단청으로 해결하였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건축 방법 즉 한국의 자연과 환경에 알맞도록 모든 것을 조화시켰다는 것은 건축에서 어느 나라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기술과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창덕궁은 1997년 우리나라의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은 움직일 수 없는 건축물, 성곽, 탑 등이 그 대상이며, 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해당 문화의 유산이나 자연유산의 진정성, 가치의 탁월성, 해당 국가의 관리 계획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공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한 문화권 내에서의 건축, 기념물 조각, 정원 및 조경 디자인, 관련 예술 또는 인간 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복궁 복구 때까지 300여 년간 정궁 역할 <한국인들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는 궁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2대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한다. 3대 태종 때에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는데 이때 경복궁 동쪽에 별궁을 짓는다. 이것이 창덕궁이다. 초창기의 창덕궁은 외전(外殿) 74칸, 내전(內殿) 118칸으로 현재의 창덕궁보다 작았다. 그러나 정궁인 경복궁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창덕궁을 크게 이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소실되자 창덕궁이 가장 먼저 재건되었다. 이후에도 창덕궁은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됐으나 인조 25년(1647)에 소실된 건물 재건 공사를 완료했다. 복구된 건물은 인정전, 승정원 등 314칸과 내전 421칸으로 합계 735칸이 되는 큰 공사였다.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정문인 돈화문이 남향으로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 정전의 출입문인 인정문이 나타난다. 인정문의 좌우로 행랑이 있는데 이 행랑에 둘러싸인 중앙에 인정전이 자리 잡고 있다. 인정전의 우측에 편전인 선정전이 있고 선정전 우측으로 내전, 희정당의 뒤로 대조전이 있다. 희정당의 동편에 성정각 등 부속건물이 있으며 담장을 경계로 동궁(東宮)과 창경궁이 접하여 있다. 내전의 뒤로 후원이 전개되며 이 후원도 동쪽으로 창경궁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정궁이었던 경복궁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경복궁은 외전과 내전이 앞뒤로 놓이고 정문과 정전은 남북으로 뻗은 직선 축 상에 나란히 놓여 있는데 반하여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롭게 건물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창덕궁은 경복궁이 조선말기에 복구될 때까지 300여 년간 역대 임금이 정사를 본 왕궁으로 창경궁과 함께 ‘동궐’ 또는 ‘동관대궐’이라고 불렸다. 창경궁은 수강궁(壽康宮,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에 거처하던 궁, 1419년 창건) 터에 건설한 것이다. 성종은 왕실의 어른인 정희왕후(세조비이자 성종의 할머니), 소혜왕후(덕종비이며 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비이며 성종의 작은어머니)와 창덕궁에서 거처했는데 이들을 위하여 따로 지은 궁궐이 창경궁으로 일종의 대비궁(大妃宮)이라 볼 수 있다. 광무 1년(1907), 순종이 즉위하고 1919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조약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루어졌으며 순종이 창덕궁 전하(殿下)로 격하되면서 창덕궁은 500여 년의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리는 것을 목격한다. 1926년 4월 25일에는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창덕궁은 주인을 잃었고 일제는 곧바로 일반인들에게 관람을 허가하여 창덕궁은 관람장으로 변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동쪽으로 창경궁과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남쪽으로 종묘가 자리하고 있어 출입이 가능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광해군 2년(1610)에 중건하여 사용하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다시 불에 탔고, 인조 25년(1647) 다시 중건이 시작된 이후 크고 작은 화재와 재건축이 이어졌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부터 경복궁 재건 전까지 약 270여 년간 법궁(정궁, 왕이 정사를 돌보며 살아가는 곳)의 역할을 대신 해 왔다. 1910년 소위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체결되었으며,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짓게 된다. 또한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선원전을 후미진 곳으로 이전하는 등 일제는 의도적으로 창덕궁의 모습을 왜곡했다. 그 후 1926년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전각을 헐어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하여 일반인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다.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으나,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로 남아있다. 태종, 취약한 권력기반 다지려 서둘러 <창건배경>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했을 때 이미 한양에는 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이 건설되어 있었다. 그런데 왕위 계승문제 등 계속되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1~2차 왕자의 난을 경복궁에서 겪게 되고, 정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정종의 뒤를 이어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종은 취약한 권력 기반을 다지고, 왕권 강화를 위해 한양 재천도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쉽게 관철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 한양 천도와 궁궐을 새로이 짓는 문제가 권력기반의 완성을 의미했기에 태종의 노력은 집요했다. 마침내 태종은 태종 4년(1404) 새로이 궁궐 조성을 명함으로써, 그해 10월부터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이궁(離宮)으로 조영되기 시작한다. 결국 태종은 이듬해 한양 천도를 단행한다. 1405년 궁궐이 완성된 지 하루만인 10월 20일 태종이 궁궐에 임어하게 되며, 10월 25일 창덕궁(昌德宮)이란 궁호를 받았다.
태종의 창덕궁 임어와 더불어 한양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도읍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조선왕조는 본격적인 체제 정비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최초의 양 궐 체제를 갖추게 되는 셈이었으니, 태종 즉위 후 5년만의 일이었다. 이처럼 창덕궁의 창건배경과 시작은 '태종의 왕권강화와 조선왕조의 본격적인 출발'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는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보다 훨씬 비중 있는 궁궐로 자리 잡게 되었다. 헌종 연간에 편찬된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순조가 친히 지은 '창덕궁명병서(昌德宮銘幷序)'에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되라'는 뜻이 창덕궁의 이름에 담겨져 있다고 전한다. 태종이 정궁인 경복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궁인 창덕궁을 건설한 것은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경복궁에 대한 나쁜 이미지 때문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태종이 창덕궁을 건설함으로써 한양에는 두 개의 궁궐이 존재하게 되었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여러 궁궐이 건설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우동선 박사는 적었다. 원래 이궁은 ‘천자출유지궁(天子出遊之宮)’이라 하여 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는 궁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왕위에 있을 때 몇 달을 제외하고는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창덕궁을 이궁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더구나 태종이 경복궁을 소홀히 하여 폐궁으로 만든 것도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태종은 두 개의 궁궐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태종 이후 세종부터는 경복궁과 창덕궁을 자유롭게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궁궐 내에 화재나 전염병과 같은 재난이 있을 때 피정하면서 거처할 곳을 따로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궁이나 별궁 제도는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궁역 계속 확장, 성종이 문 이름 총 29개 확정 <변천사> 140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은 외전 83칸, 내전 195칸으로 총 278간 규모였으며, 당시 총 755칸에 달하는 경복궁에 비하면 3분의 1 정도였다. 창덕궁은 왕이 오랫동안 거처하는 궁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궁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작은 규모로 설계한 것이다. 그 이후 공사는 계속되어 태종 6년(1406)에 광연루(廣延樓)가 완공되고, 며칠 뒤 동북쪽 후원에 해온정을 건설했다.
태종 11년(1411)에는 누각과 침실, 그리고 진선문(進善門)이 세워지고 그 남쪽에 석교를 세우고, 이듬해 마침내 돈화문(敦化門)이 건립되었다. 이후 세종 즉위년(1418) 9월 인정전이 완공되자 세종이 창덕궁으로 잠시 이어하게 된다. 세조 7년(1461)에는 전각의 이름을 개정하여 이전의 전각 명칭과는 다른 '고유명칭'을 부여받았으며 계속 궁역을 확장하였다. 그 뒤 성종 6년(1475)년에는 서거정으로 하여금 문의 이름을 지어 올리게 하여, 성종이 직접 선별에 나서 총 29개 문 이름을 확정하기도 했다. 또한 성종 대에는 창덕궁의 정비와 더불어 창경궁이 완공됨에 따라 경복궁이 정궁이 되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이궁으로 삼게 하는 정궁과 이궁의 '양궐체제(兩闕體制)'를 완성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창덕궁 역시 왜군에 의해 소실되고 만다. 이후 경복궁, 창덕궁 등을 재건하지 못하다가 선조 말에 들어와 창덕궁의 재건에 나선다. 당시 환도한 선조의 거처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의 사저로 정릉동은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하는 것은 태조 때 신덕왕후 현비의 능인 정릉을 이곳에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릉을 다른 곳으로 옮기자 현재의 정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조가 정궁인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먼저 재건한 이유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 초기부터 제기된 길지설(吉地說)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난 경복궁은 불길한 곳이라는 인식이 종종 제기되었고 특히 세종 조에는 경복궁에 대한 신료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표출되기도 했다. 둘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서 경복궁보다 규모가 작은 창덕궁 일대를 복구하는 것이 민력의 소모를 줄일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였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중건은 워낙 큰 역사이므로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대원군이 중건을 시작한다. 그동안의 조선왕조는 사실상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창덕궁은 계속 수난을 당하는데 인조반정(1623) 당시 실화로 창덕궁이 크게 소실되고(인조반정군이 광해군을 수색하는 와중에 실수로 불을 내었다고 알려짐), 이듬해 이조반정의 공적 평가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된 '이괄의 난'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다시 한 번 크게 소실된다. 창덕궁은 인조 25년(1647년)에 이르러서야 복구되면서 원래의 규모를 거의 회복하였다. 그 후 정조 즉위년(1776)에 현재의 부용지, 즉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건설하며 동궁을 왕의 침전 가까운 곳으로 짓게 하였다. 순조 3년(1803) 12월에는 인정전이 소실되고 이듬해 중건하게 되었으며, 순조 33년에는 큰불이 일어나 희정당과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의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헌종12년(1846)에는 후궁들을 위해 낙선재 일곽이 만들어졌다.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이 물러나고 덕수궁에 머물게 되자, 순종이 창덕궁에 임어하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인정전에서 강제 체결되는 비운을 겪게 되면서 조선왕조는 이곳 창덕궁에서 막을 내린다.
1917년 대조전 서쪽에서 큰불이 일어나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 선정전 동쪽의 내전 등이 크게 소실되며 대조전 영역의 복구는 1919년 정월 고종의 승하와 삼일운동, 고종의 국장 등으로 인해 1920년에서야 준공을 보게 된다. 더구나 복구과정에서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경성전, 응지당, 흠경각, 함원전, 만수전, 흥복전 등을 헐어내고 그 목재로 창덕궁의 대조전, 희정당, 흥복헌, 경훈각, 함원전 등을 건설했다. 1917년 창덕궁의 대조전의 화재가 실수로 일어난 화재가 아니라 '일제에 의한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복원된 창덕궁 대조전 일대의 영역은 건축 양식을 절충해서 짓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 동북쪽 후미진 곳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옮기면서, 인정전 서쪽에 있던 원래의 선원전은 폐지되고 만다. 선원전은 조선왕조 역대 왕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이는 궁궐의 공간 중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1926년 4월 창덕궁 대조전에서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함에 따라 창덕궁은 본격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인정전 동서 행각과 인정문 등이 철거되어 전시장으로 개조되고, 수많은 전각들이 헐렸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대대적인 정비 공사가 벌어졌으며 1995년부터는 인정문과 인정문의 서쪽 행각이, 1999년부터는 진선문과 숙장문이 복원되었고 현재 선원전 주변의 관청 지역 등을 복원하고 있다. 창덕궁은 1989년 낙선재에서 돈화문을 통해 이방자 여사의 운구행렬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간 이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지형조건 최대활용 건물 남북방향 배치 <공간구성과 배치> 창덕궁의 공간구성은 고대 궁궐 제도의 규범으로 전해지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따른 공간구성의 기본적인 원칙과는 크게 다르다. 궁궐은 원래 왕의 집무 공간이자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인데, 창덕궁의 경우 집무 공간보다는 생활공간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 그러므로 관료들의 공간도 많지 않았고 각 건물도 경복궁보다 작은 규모이다. 가장 중요한 건물인 인정전에 대해 태종이 너무 협소하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창덕궁은 주어진 지형지세를 활용한 자유로운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중시하여 한국적인 궁궐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주례'의 궁궐제도는 어디까지나 규범일 뿐 이를 활용도에 맞게 창의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창덕궁은 응봉 아래 비좁은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 지세가 평탄하지 않았다. 따라서 건물의 배치가 자유롭고 지형조건을 최대한 이용하여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건물이 남북방향으로 배치되었던 경복궁과는 달리 건물들이 동북방향으로 옆으로 놓였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서남 모서리에 있고 법전인 인정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길을 꺾고 금천교를 건넌 후 다시 왼쪽으로 꺾어야한다. 편전인 선정전은 인정전의 동쪽에 있으며, 침전인 희정당과 대조전은 다시 편전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창덕궁의 후원은 궁궐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창덕궁의 동쪽으로는 창경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자연의 지세를 최대한 활용했던 고려궁궐의 기본배치를 충실히 계승하고, 고려시대 이래 관습적으로 이어오던 궁중 생활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의 전체 규모를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것은 1830년 전후에 작성된 '동궐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궁궐 그림의 최대 걸작이자 가장 많은 정보를 전하고 있는데 '동궐도'는 한 면이 가로 36.5센티미터, 세로 45.4센티미터의 크기이며 전체를 펼쳐놓으면 가로 584센티미터, 세로 273센티미터의 대작이다. 비단에 먹으로 그리고 채색했으며 부감법을 사용하여 그린 것으로 창덕궁과 창경궁 전각들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경과 산수까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배치에서 축, 건물간의 거리, 방향에 대해서는 화법의 속성상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지적도 있다. 또 다른 그림으로 '동궐도형'이 있는데 이는 1900년 전후한 시점에 그려진 것으로 '동궐도'와는 달리 건축 평면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각 간의 치수를 척(尺) 단위로 기입하여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창덕궁을 초기에 건설한 책임자 즉 건축가는 감역관 박자청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창덕궁 영건 당시에 이직, 신극례 등과 함께 제조(提調)에 참여했고 성균관 문묘를 건설하는 공사에도 참여했다. 우동선과 조재모 박사의 글을 인용한다.
박자청은 원래 황희석의 수행원 출신인데 영선 공사에 자질을 발휘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성질이 다소 까다롭고 급하여 공사 감독을 하면 항상 빨리 완공하도록 재촉하여 인부들로부터 불만을 사기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번번이 조정에 소환되어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원래 건축공사에 능력이 있으므로 태조 산릉의 공사, 군자감 공사, 정릉동의 흥천사 공사 등에 계속 참여했고 공조판서에 이를 정도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태종 11년(1411)에 만들어진 창덕궁의 최고 구축물로 불리는 금천교 역시 그의 감독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조의 경복궁 공사, 시전 장랑의 건설에도 참여했다. 창덕궁 정전의 인정전 앞에는 진선문과 숙장문, 그리고 인정문으로 둘러싸인 사다리꼴 모양의 마당에 있는데 이 당시 공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처음 태종이 인정문 밖에 향랑을 건립하라는 명령을 내려 박자청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함과 동시에 아무쪼록 단정하게 할 것을 명했는데, 박자청이 뜰의 넓고 좁은 것도 요량하지 않고 성 짓기를 시작하여 이미 기둥을 세우고 상량까지 하였으니, 인정전에서 보면 경사가 진 것처럼 보여 바르지 못하므로 태종이 성내어 곧 헐어버리게 하고 박자청 등을 하옥시켰다.’ 이 기록을 보면 이 마당이 사다리꼴인 것은 원래의 의도가 아니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동궐도』에는 행랑에 내병조, 상서원, 호위청 등의 관청이 들어서 있는데, 경사진 행랑을 고치라고 명하면서 행랑을 세우지 말고 도로 담장을 쌓도록 했던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 |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창덕궁② | |||||||||||||||||||||||||||||||||||||||||||||||||||||||||||||||||||||||||||||||||||||||||||||||||||||||||||||||||||||||||||||||||||||||||||||||||||||||||||||||||||||||||||||||||||||||
창덕궁은 1997년 우리나라의 궁궐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므로 창덕궁 안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 모두가 세계유산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창덕궁의 수많은 건물을 일일이 소개하려면 방대한 분량이 되므로 돈화문, 금천교, 인정전, 선정전, 낙선재, 희정당, 대조전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이 단원은 국가문화유산종합정보센터, 신영훈, 우동선, 조재모, 장순영 등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중건 ① 돈화문(보물 제383호) 돈화문은 2층으로 된 창덕궁의 정문이다. 태종12년(1412) 5월에 건설되어 2층 문루에서 큰 북을 걸고 조석으로 인경을 쳤다. 문종 즉위년(1450) 6월에 돈화문를 재축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광해군 때 중건되었다. 지금은 돈화문을 창덕궁의 정문으로 여기지만 과거에는 돈화문을 설명할 때 인정전의 가장 바깥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창덕궁에 들어가기 위한 정문이지만 과거에는 왕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돈화문 2층은 기둥 하나 없이 탁 트인 공간으로 바닥엔 장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서까래와 종도리가 올려다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사면 벽에 널빤지의 판문을 설치하여 적이 공격하면 얼른 몸을 숨겨 방어할 수 있게 했다. 거북선에도 이런 판문이 설치되어 있다. 돈화문은 영조가 2층에서 신료들로부터 생일 하례잔치를 받기도 하여 전투 장소의 개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중문(重門)인 돈화문의 구조는 광화문이 홍예문이 열린 높은 댓돌 위에 2층 문루를 세운 것과는 구조법이 다르다. 중문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이므로 삼국시대 이래 조선까지 계속되던 문의 한가지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궁궐의 문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왕이나 외국 사신이 출입할 때만 대문이 열렸으며 보통 신하들은 돈화문 동쪽의 1칸짜리 단봉문을 이용하여 출입하였다.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 12년(1412) 5월에 세워진 돈화문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중층양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2층 문루에 큰 종을 주조하여 돈화문에 걸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의 돈화문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41년(1608)에 재건되었음이 1976년 돈화문 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굴된 상량문을 통해서 밝혀져 창덕궁에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졌다. 돈화문과 관련해 특이한 점은 돈화문의 지붕양식이다.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돈화문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우진각지붕으로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이 모두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는 지적이다. 현재 돈화문은 1996년 12월 돈화문 앞 석계 공사를 마무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보물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종 11년 조성…직각으로 꺾인 것이 특징 ② 금천교 태종 11년(1411) 3월에 진선문 밖에 처음 조성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의 금천교 중 가장 오래된 다리가 창덕궁 금천교이다. 다리는 궁궐마다 설치되는 공통적인 건조물이지만 다른 궁에서는 정문에서 들어오는 주축에 설치되는 데 비해 이곳 창덕궁의 금천교는 직각으로 꺾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리는 두 개의 홍예를 틀어 돌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삼도를 깔았으며 동서 방향이다. 홍예의 가운데 남북방향으로 귀면을 각각 양각하여 새겨놓았다. 홍예 사이에 역삼각형의 귀면 석재가 있는데 조각된 귀면은 부정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이 역삼각형의 석재를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서는 ‘청정무사’라고 했는데 귀면이 잠자리 두 눈 사이의 모습과 유사하여 불려 진 듯하다. 돌다리 폭은 왕이 거동 할 때 좌우의 호위군사가 함께 행진할 수 있을 만큼 넓다. 금천교의 남쪽과 북쪽 각각 서수들이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거북모양의 서수가 남쪽에는 개의 모습에 가까운 서수가 놓여 있다. 금천교는 현재 진선문과 숙장문의 축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다. 하지만 182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를 통해보면 일직선상의 축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2001년 현재 금천교 발굴조사를 통해, 원래의 위치에서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위치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용마루 꽃무늬 이화(李花) ③ 인정전(仁政殿 : 국보 225호) 인정전 앞에 인정문이 있는데 인정문은 법전인 인정전을 통행하는 문으로 그 격이 상당히 높은 문이다. 왕도 즉위 전에는 아직 법전에 들어갈 자격이 없으므로 인정문에서 즉위하고 인정전으로 들어가 좌정한 후에 비로소 대소 신료들의 하례를 받았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 여러 왕이 이 문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인정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용마루에 표시된 꽃무늬 이화(李花)이다. 고종이 중국의 제후국인 왕으로가 아니라 황제로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자 국가 상징인 문장을 조선왕조의 성씨인 이씨를 상징하는 이화(李花)로 정했기 때문이다. 인정전의 월대는 경복궁의 월대와는 달리 돌난간과 사방신, 십이지신상이 없으며 중앙의 어도(御道)는 의식을 거행할 때 외에는 왕도 통행하지 않았다. 어도 근처의 동서로 키가 낮고 작은 표석인 품계석들이 세워져 있다. 인정문 쪽에서 9품이라 쓴 글씨부터 인정문 쪽으로 정1품, 종1품까지 써 있다. 왕이 참석하는 조회 때 문관과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정렬하던 곳이다. 동쪽이 문관, 서쪽에 무관들이 열을 이루며 마주 본다. 왕은 선정전 정면에 설치되었던 천랑(穿廊)을 통해 걸어와 인정전 동월랑을 통해 월대를 거쳐 인정전의 동쪽 문을 통하여 옥좌에 올라 용상에 앉았다. 왕이 옥좌에 앉으면 앞 기둥에 말아 올려진 발이 드리워지면서 왕의 얼굴을 가리게 된다. 또한 왕이 있는 곳은 바깥보다 어두워 밖에서는 왕이 보이지 않지만 왕은 밝은 마당을 내다보게 되면서 군왕의 위엄을 높였다. 개화바람이 불면서 인정전 내에도 전등이 설치되었고 인테리어도 서양풍 장식으로 변경되어 유리창과 커튼이 설치되었다.
인정전 용마루는 마치 백시멘트를 바른 듯 하얗게 보인다. 조선시대에 백시멘트가 있었는가에 의아해하며 놀랄지 모르지만 한국에는 고대부터 백시멘트보다 더 견고하고 수명이 긴 ‘삼화토’가 있었다. 삼화토는 삼국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오랜 역사를 지닌 건축 재료이다. 삼화토로 용마루를 하얗게 싸바르는 것은 날짐승이나 구렁이가 기와 틈에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는 의도였다. 인정문과 인정전은 조선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신하들의 하례식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는 등 공식적으로 국가 행사가 열린 건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이곳 인정전에서 즉위한 왕으로는 연산군(1494)과 현종(1659)이 있다. 태종 5년(1405) 창덕궁 창건과 더불어 건립되었으나 태종 18년(14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세종 즉위년(1418년) 9월에 준공되었다. 이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때 중건하고, 정조 1년(1777) 9월에 조정에 품계석을 설치했다. 몇 차례의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1908년 탁지부 건축소에 의해 인정전 내부를 서양식으로 개조하였다. 인정전 용마루에 다섯 개의 오얏꽃(李花)문양을 만들어 넣은 것도 이때이다. 그 뒤 일제시기를 거쳐 인정전은 물론, 그 주변과 조정마당까지 심하게 왜곡되어 버려져 왔었다. 그 뒤 현재 인정전의 모습은 1999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덕궁 외전(外殿)의 중심인 법전인 인정전은 인정문을 통해 이어진 어도를 따라 조정 마당을 지나 인정전 월대에 이르러 답도를 통해 오르게 되어 있다. 답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 두 마리의 봉황이 양각되어 있다. 봉황은 '성군이 나타나거나, 성군이 다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정을 베풀겠다는 왕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이라 하겠다. 인정전은 두벌의 월대 위에 놓여 있다. 인정전의 월대는 경복궁 근정전과 달리 난간석을 두르지 않았다. 또 인정전의 상하 월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주술적 상징물인 '드므'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 '드므'는 '입이 넓은 큰 그릇'이란 뜻의 순우리말이다. 인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여는 궁궐과 다른 차이점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서양식 커튼과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있고, 다른 궁궐의 법전이 전돌로 바닥을 깔은 것과는 달리 이곳은 마루가 깔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양풍으로 인정전이 단장된 것은 대한제국기인 순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왕의 자리인 어좌와 그 뒤에 나무로 만든 곡병이 쳐져있다. 그리고 이를 두른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 보인다. 창덕궁의 일월오봉병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조금 높게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이 또한 인정전 내부를 개조하면서 그 형식을 약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천장을 보면 두 마리의 봉황이 날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봉황이 출현하는' 성군이 존재하고 있음을, 혹은 백성이 평안한 태평성대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전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씻을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곳에서 강제로 체결됨에 따라 조선왕조는 이곳 인정전에서 마침표를 찍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 식민통치 36년의 암흑 속에서 굴종의 삶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지붕의 다포구조이다. 현판글씨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명필이었던 죽석 서영보가 썼다고 한다. 현재 국보 225호이다. 임금이 신하들과 국가 정치 논하던 집무실 ④ 선정전(宣政殿 : 보물 814호) 세조 7년(1461년)에 조계청(朝啓廳)이었던 것을 선정전(宣政殿)이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인조반정 등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다가 인조 25년(1647년)에 인경궁의 재목을 이용하여 다시 완공하였다. 선정전은 외전(外殿)에 속하는 편전(便殿)이다. 편전이란 임금이 신하들과 국가의 정치를 논하던 공식 집무실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개의 궁궐 전각들과 같이 공식 집무실의 용도로만 국한되어 쓰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과 '궁궐지'에 의하면 성종 2년(1417) 가을에 왕비가 선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성종 8년(1477) 3월에 왕비가 첫 친잠례를 행한 이후에 선정전에서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고 치사했으며, 문신 그리고 성균관 유생들과 학문을 논하기도 했다고 한다. 선정전은 명종 8년(1533)에는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한 곳이기도 했다. 선정전의 내부에는 보개천장을 두고 일월오봉병을 둘렀다. 선정전 앞에는 월대를 두었고, 월대 모서리에는 드므를 설치했다. 순조 이후에는 희정당이 편전의 역할로 주로 쓰였다고 한다. 선정전은 소규모의 단층 건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펴던 편전으로 현재 궁궐에서 유일하게 청기와가 남아 있는 건물로 유명하다. 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선정전 지붕이 초록색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청기와로 지붕을 올렸기 때문이다. 창덕궁 안에는 여러 동의 청기와 건물이 있었는데 모두 불타버렸고 특히 조선 중기의 공포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시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구조이다. 현재 보물 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기와에 대해 좀 더 설명한다. 청기와는 ‘고려청기와’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명성을 떨칠 정도로 고려청자의 맥을 이은 기와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청기와는 자기를 굽는 것과 유사하므로 지붕을 덮을 정도의 청기와를 생산하려면 엄청난 공과 인력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세종 15년(1433) 경복궁 근정전의 치를 보수할 때 “청기와를 굽는데 비용이 많이 드니 다른 기와를 사용하라”라는 어명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세조와 연산군 대에 청기와가 다시 생산되어 사찰과 궁전 건축에 사용되었다. 세조는 1461년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방대한 량의 불교서적들을 출판하는 것은 물론 원각사를 건설하면서 법당 지붕용으로 8만 장이나 되는 방대한 량의 청기와를 생산케 했다. 세종은 경복궁의 치미를 보수하는 것도 경비가 많이 든다고 지적했는데 세조의 8만장에 달하는 청기와 생산이 얼마나 많은 량임을 알 수 있다. 청기와에 제조 방법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 청기와를 염초로 만든다는 기록이 있고 '예종실록'에도 ‘청기와생산에 필요한 연철을 김성현에서 채취하여 보냈다’라고 적었으며 '연산군일기'에는 ‘함경도 단천에서 바친 연 6,900근에서 은을 제련해 낸 연슬러그로 청기와를 만들게 했다’고 적었다. 청기와의 기본원료인 찰흙의 크기는 0.01밀리미터 이하의 점토질로, 재료가 미세하면 미세할수록 팽창성과 수축성이 적어지면서 균열이 적어진다. 그러므로 청기와 생산에서는 될수록 미세한 찰흙원료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청기와의 원료로 염초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대의 질산칼륨을 말한다. 질산칼륨의 용융점은 330도로 화합물의 용융점을 낮추는 작용을 할 뿐만 아니라 흡수성이 적어 녹여지는 화합물이 골고루 융합되게 함으로써 기와의 표면을 고르고 매끄럽게 만든다. 연스러그는 청기와의 색깔을 내는 원료로 볼 수 있다. 연스러그에는 납과 아연이 상당량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납은 푸른색이 흰색과 조화된 유연한 금속으로 용융점이 327〜400도에 불과하지만 알카리와 철산화물 등이 들어있는 고령토와 납가루를 섞어 만든 유약으로 기와표면에 발라 1,000〜1,150도에서 소성하면 청기와의 푸른색이 나타난다. 그러나 청기와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량 생산하는데 많은 문제점이 있으므로 17세기부터 점차 줄어들며 임진왜란이후 청기와 제조법조차 사라진다.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서울의 궁전들을 복구할 때 청기와를 사용하려 했으나 그 제조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기술자들이 없어 실현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청기와 제작이 다시 고개를 들다가 노란색 기와 제조로 방향이 선회된다고 윤용이 박사는 적었다. 국상 당한 왕후·후궁들이 소복 입고 은거하던 곳 ⑤ 낙선재(樂善齎) 낙선재는 원래 국상(國喪)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던 곳이다. 주택을 연상하는 연속된 3채 건물과 후원이 딸려 있으며 상중의 왕후는 소박한 건물에서 근신하는 법도에 따라 단청도 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의 주택 사랑채를 닮은 소박한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에 초익공 양식이며, 서쪽 옆 칸에 누마루를 한 칸 돌출시켰다. 모두 17칸 반의 소규모이지만 다양한 건축물이 있고 보존 상태가 좋아 왕조의 궁궐로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다. 1926년에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繼后)인 윤비가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했다.
원래는 창경궁 영역에 속해 있었으나 현재는 창덕궁 영역에 속해있다. 낙선재는 '승정원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을 통해 헌종 13년(1847)에 건립되었음이 확인되어 1830년대에 작성된 '동궐도'에 이 건물이 누락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원래 낙선재는 국상을 당한 왕후나 후궁들을 위해 지어진 전각이다. 현재 낙선재 구역은 낙선재와 석복헌, 수강재와 그 부속 건물로 이루어졌다. 1997년 낙선재에 지어 놓았던 왜식 건물을 없애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장락이란 '오래도록 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장락문 앞에 서서 낙선재 영역을 들여다보면 한 폭의 그림이 액자에 담겨 있는 듯하다. 한편 장락은 신선이 살던 월궁(月宮)을 뜻하기도 하니 이는 곧 선계에 들어섬을 의미한다. 장락문 현판은 '대원군장(大院君章)'의 낙관이 찍혀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 대원군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낙선재 뒤편은 아기자기하게 꾸민 화계를 가지고 있고 괴석을 비롯하여 석분(石盆), 연지(蓮池) 등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1917년 대조전 일곽의 대화재로 인해 순종이 잠시 낙선재에 머물기도 했으며, 1926년 대조전에서 순종이 승하하자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비(尹妃)가 여생을 보내기도 했다. 1963년 영왕(英王), 영왕비 이방자 여사, 고종과 엄비의 소생인 덕혜옹주가 함께 귀국하여 이곳 낙선재에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영왕은 의식불명상태에서 귀국한 후 7년여의 병원생활을 하다가 1970년 임종직전 이곳 낙선재로 옮겨와 타계하고 만다. 그 뒤 1989년에는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 역시 모두 이곳 낙선재에서 같은 해에 차례로 타계하였다. 이처럼 최근까지 대한황실의 가족들이 살았던 곳이 바로 낙선재다.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는 낙선재의 동편에 붙어 있는 안사랑에 해당하는 전각이다. 석복헌과 수강재는 현재 일반인들의 관람이 허용되지 않아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영왕 타계 당시 덕혜옹주가 수강재에 잠시 머물기도 했으며, 석복헌은 주로 낙선재의 부속건물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들 전각은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소박해 보이며, 담을 비롯한 창호 등에 여성적이고 아기자기한 각종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석복헌은 정면 6칸에 측면 2칸으로 되었으나 건물전체는 ᄆ자형의 구조로 되어 실제로는 정면 4칸으로 보인다. 수강재도 정면 6칸에 측면 2칸 구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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