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59)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01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①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토한다’는 토함산 동쪽 정상 못 미친 곳에 석굴암이 있고 불국사는 서쪽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1995년에 석굴암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불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불국사(佛國寺)는 이름이 말해 주듯 흔한 이름의 절이 아니다. 최치원은 불국사가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였다고 기록했고 한때 화엄법류사(華嚴法流類寺사)라고도 불렸다. 불국사는 경덕왕 10년(751)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이보다 오래 전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첫째는 눌지마립간(417~457) 시절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둘째는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이차돈이 순교한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과 기윤 부인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셋째는 문무왕 10년(670)에 불국사에 무설전을 짓고 의상대사와 제자 오진 등 열 사람의 대덕으로 화엄경을 강설했다고 한다. 신문왕 1년(681) 4월, 가섭과 아란 상이 조성되었다는 기록도 '복장기'에 나와 있다고 신영훈은 적었다.


'불국사, 김대성 발원 창건' 가장 유력



그러나 가장 유력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으로 김대성('삼국사기'에는 김대정)이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은 751년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혜공왕 10년(774)까지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 국가에서 완성시켰지만 정확한 완성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상연 박사는 이종상(李鐘祥, 1799~?)의 시 '등불국범영루'에는 ‘스님은 39년에 완성했다 하네’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을 감안할 때 원성왕 6년(790)에 완공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적었다.1) 그러므로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의 원찰(願刹)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원찰로 건설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최치원도 그의 시에서 ‘임금이 주인이 되어 친히 이룩하시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왕실의 원찰로 조성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석굴암이 먼저 준공된 이후 불국사는 더욱 활발하게 건설이 진척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의 석축을 쌓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총 공사기간이 30년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를 전면에서 바라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 당시에 건설된 8세기 유물이고 그 위의 목조건물들은 임진왜란 전까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으며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복원 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불국사 전경(사진lake2030).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

불국사를 이해하려면 이 땅이 곧 불국토라고 믿었던 신라의 독특한 불교관을 이해해야 한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처럼 왕실에서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후 민간신앙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밟지 않았다. 즉 불교가 신라에 도입되는 초기에 불교를 수용하는데 다소의 저항과 반발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불교가 당면한 문제는 불교가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은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없는 곳이 아니라 본래부터 불국(佛國)이었다고 믿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불국토사상은 불교가 우리의 종교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한다. 이 단원은 정병조의 글을 주로 참조했다.

신라의 불국토사상은 당대에 전해지던 몇 가지 설화로서도 알 수 있다.

첫째는 전불가람지(前佛伽藍地)에 대한 것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일곱 개 가람 터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가섭불이 설법했다는 황룡사이다.

둘째는 진흥왕이 불상 조성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 배에는 철과 황금이 가득 있었고 서축의 아육왕이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석가삼존상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니 인연 있는 땅에 가서 성공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진흥왕은 아육왕의 기원대로 동왕 32년(573)에 아육왕이 보낸 재료로 장륙존상을 만들었다.

셋째는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으로 의상은 입당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동해변을 참배했다. 그러나 관음을 보지 못하자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이때 홍련(紅蓮)이 바다 속에서 피어나며 의상을 건지고 그 안에 나타난 관음보살이 수정염주를 주면서 의상의 높은 신심을 찬양했다. 의상대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관음소상을 모셨다.


'신라=불국토' 알려주기 위해 건설된 사찰



이들 설화는 불교가 신라 땅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다. 즉 신라인들에게 신라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불어넣으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도록 유도했다. 또한 국명도 불교성지의 이름을 써서 실라벌(實羅伐)이라 표기하면서 서라벌의 어원을 이룬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이 당시 신라가 불국토라는 것을 충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건설된 사찰이라 볼 수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이상적인 피안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국사는 언뜻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무설전, 자하문, 청운교, 백운교, 범영루, 좌경루,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있는 넓은 구역과 그 옆에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보교, 연화교, 안양문 등이 있는 비교적 좁은 구역이 있다. 또한 무설전 뒤로 비로전과 관음전이 있으며 앞의 두 구역과 달리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없어 구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세 구역 중 넓은 구역은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이며 다소 작은 규모의 구역은 '무량수경'에 의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이며 무설전 뒤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이다. 결국 불국사는 세 분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국사 경내에 들어서면 우선 대석단(大石壇)과 마주친다. 대석단은 크게 양분되어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석단 위는 부처님의 전유 공간으로 불국토이고 석단 아래는 범부의 세계이다. 동쪽의 석가모니 부처님 세계는 석단에 마련된 청운교와 백운교를 통하지 않고는 오를 수 없으며 서쪽의 극락전 역시 석단에 마련된 연화교와 칠보교를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비로전이나 관음전 일곽 역시 대웅전 및 극락전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 이 단원은 김동현 박사의 글을 많이 참고했다.

불국사 배치도(「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


대웅전 일곽은 석단의 계단을 통해 자하문에 이르며 이 문을 통해 대웅전 정면 내정에 들어서게 되며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서쪽에 석가탑, 동쪽에 다보탑이 대칭되게 서있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자하문 및 대웅전의 남북 중심축 상에 강당인 무설전이 동서로 길게 자리 잡고 있으며 이들 자하문, 대웅전, 무설전은 동서남북으로 둘러싸인 회랑으로 둘러져 석가모니불의 전유 공간임을 나타낸다. 회랑 일곽의 동남 및 서남쪽 모서리에는 동회랑과 서회랑이 연장되어 남회랑보다 남쪽으로 돌출되어 특수한 공간 처리를 하였다.

극락전 일곽은 서쪽의 석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구역에는 안양문과 극락전 그리고 남, 서, 북회랑이 있는 비교적 단순한 공간 배치로 되어 있다.

비로전 및 관음전 일곽은 사찰 후방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쪽 높은 대지에 관음전이 있고 서쪽에 비로전이 위치하고 있다. 불국사의 중요 부분을 아미타정토와 석가정토, 연화장 세계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석축 위는 부처님 나라, 그 아래는 범부의 세계



<석가정토>

석가가 상주하는 절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돌계단으로 올라간다.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다리의 중간 부분에 아치형 터널이 있어 밑에 물이 흐르는 다리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지상에서 천상으로 상승함과 동시에 강 또는 바다를 건너 하늘에 있는 불국토에 도착한다.

① 청운교와 백운교

불국사의 가장 특징적인 조형물 중 하나인 석축(석단)의 위는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이고 그 밑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뜻한다.

석단은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내는데 석단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세계의 굳셈을 상징하기도 한다. 두 모퉁이 위에는 경루와 종루가 있다.

석단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백운교(국보 제23호), 극락전을 행하는 연화교‧칠보교(국보 제22호)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 있는데 층층다리가 국보로 지정된 예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아 불국사가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청운교‧백운교는 석가모니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에 연결되어 있고 칠보교‧연화교는 아미타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안양문에 연결되어 있다.

청운교의 높이는 신라 척도로 12척(3.82미터)이고 폭은 16척(5.16미터)이다. 백운교의 높이는 10척에 폭은 16척이다.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33천(天)을 상징하는 것으로 욕심의 정화에 뜻을 두고 노력하는 자들이 걸어서 올라가는 다리로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의 다리이다(신영훈은 원래 36계단이라 설명). 두 개의 돌다리가 45도의 경사로 높다랗게 걸려 있는데 계단을 다리 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백운교 옆에서 보면 3:4:5의 직각삼각형



특히 백운교를 옆에서 보면 직각삼각형 모양이다. 백운교의 높이와 폭과 계단의 길이를 간단한 비로 나타내면 약 3 : 4 : 5가 된다. 피타고라스 정리에 따르면,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을 a 와 b, 빗변을 c라 할 때 a2+b2=c2이다. 백운교의 비 3 : 4 : 5에서도32+42=52 인 관계가 성립한다.

20세기 초의 백운교·청운교.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동양에서는 ‘구고현의 정리’라고 한다. 구(勾)는 넓적다리, 고(股)는 정강이를 뜻하며, 넓적다리와 정강이를 직각으로 했을 때 엉덩이 아래 부분에서 발뒤꿈치까지가 현(弦)이다. 직각삼각형에서는 밑변이 ‘구’, 높이가 ‘고’, 빗변이 ‘현’이 된다. 중국의 수학책인 '주비산경'은 서양보다 500년이나 앞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한 장의 그림으로 증명했는데, 이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수많은 증명 중 가장 간결하고 우아한 증명의 하나라고 이경미는 설명했다.

화강암의 장대석으로 계단을 갈고 양쪽 난간에는 원통형의 돌을 이었으며 계단 위에 설치된 세 줄의 등연석은 각각 너비 70센티미터, 길이 6.2미터나 되는 거대한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장방형의 돌기둥 위에 밭쳐진 홍예는 반원을 이루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U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의 홍예의 시원을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석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공법이 사용되었다.

고구려에서 많이 사용한 그랭이 공법이다. 그랭이 공법은 간단하게 말하여 기준 돌의 형태에 맞추어 돌을 다듬어 쌓은 것이다.

백운교 좌우의 거대한 바위로 쌓은 부분에서 확연하게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천연바위를 그대로 둔 채 장대석과 접합시켜 수평을 이루도록 했다. 이러한 작업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울퉁불퉁한 바위의 곡선과 장대석의 직선이 맞이음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신영훈은 불국사를 창건하면서 이와 같이 어려운 작업을 채택한 것은 불국사가 상징하는 의미가 그토록 컸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아치의 구조법은 석빙고의 천장구조와 유사하다. 골격이 되는 아치의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사이를 장대석처럼 다듬는 판석을 치밀하게 축조해 천장을 완성시키는 방식인데 골격에 의지하고 그 위에 덧쌓아서 골격과 천장돌 사이에 요철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형식은 전체를 아치로 만든 구름다리나 성문들과는 달리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이를 구조재로 하여 그 사이를 석재로 쌓거나 판석을 얹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석빙고의 아치와 또 다른 방법을 채택했다.

신영훈은 석빙고형의 아치를 ‘속틀’이라 가칭하고 마구리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홍예석을 ‘겉틀’이라고 명명한다면 속틀이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완성시킨 반면 겉틀은 좌우로 한 돌씩 반달같이 다듬어 틀어 올렸다. 이러한 이중 아치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으므로 ‘불국사형 아치’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신라인들은 다리의 아치 축조에 있어도 남다른 창의력을 발휘했다.  

또한 석빙고의 아치는 같은 크기의 돌을 아치로 쌓아 올려 무지개 형상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상부에 다른 돌보다 조금 크기가 다른 석재를 꽂아 마감했는데 이를 ‘아치종석’이라 부른다.

그런데 겉틀의 아치종석은 밑 부분이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의 모습인 반면에 속틀 아치종석은 반대로 위가 넓고 밑이 좁아 역사다리꼴이다. 보편적으로 아치종석은 어느 나라의 것이든 대부분 속틀의 모습을 하는데 불국사의 겉틀 아치종석은 반대인 것이다. 특히 속틀 골격의 아치종석 위로 겉틀의 아치종석이 놓여있다. 이것은 아치종석의 뒷몸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천장돌의 하나로 구조되어 보다 단단히 결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구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자하문



②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나타나는데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가 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온다는 자금색 광채를 말한다. 이 문을 통해서 부처가 있는 대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축대를 따라 5칸씩 행각이 있고 그 끝에 1칸씩 앞으로 돌출하고 지붕이 솟아오르게 건축되었는데 동편의 것이 경루(經樓)이고 서쪽이 종루(鐘樓)이다. 종루의 원명은 수미종각(須彌鐘閣)으로 수미산에 있는 종각이란 뜻이다.

수미산은 석가여래의 이상향인 사바세계의 표상이다. 신라인들은 부처의 나라(佛國)를 만들기 위해 토함산 기슭에 수미산을 쌓았는데 그것이 불국사의 자연석 축대로 상징되고 그 위의 건축물들은 부처가 상주하는 보궁(寶宮)이었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가설되어 있는 구역의 석축은 수미산을 상징하는 자연석 바위로 기반을 축조했는데 반하여 자하문과 돌다리 하부는 정교하게 다듬은 석대로 축조했다.

골격은 네모반듯한 돌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우고 기둥 중간에 중방을 들이듯이 두 단을 간격을 두면서 설치한 뒤에 기둥머리에 멍에를 얹어 마감하고 돌난간을 올려 세웠다. 돌기둥 사이의 간격에는 판석을 한 장씩 끼워서 마감했다.

백운교의 2중 아치 모습, 백운교 속틀 골격의 아치종석 위로 겉틀의 아치종석이 놓여있는데 이런 구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에도 대단한 건축 기법이 숨어있다. 돌기둥에 중방을 들이듯이 결구한 부분을 자세히 보면 기둥머리에 네모 난 돌이 약간 나와 있다. 이 돌이 바로 ‘동틀돌’로 안으로 깊숙이 박혀 있는데 석굴암의 궁륭천장도 바로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동틀돌은 머리 안쪽으로 홈을 판 후 그 홈에 상하의 돌기둥이 걸리고 또 좌우의 중방처럼 생긴 수장재도 끼워진다. 그 턱에 걸리게 결구되면서 앞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즉 토압 때문에 석재대를 형성한 석재들이 밀려나기 쉬운데 동틀돌을 사용하면 이런 위험을 원천부터 봉쇄할 수 있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이런 과학적인 시공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와 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자하문 좌우에 회랑이 복원되었는데 회랑의 구조는 궁중의 것과 유사하다.

국왕은 세간의 왕이요 불(佛)은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창건 당시 대웅전에 삼존불 모셔



③ 대웅전과 무설전

현재의 대웅전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 1659년에 중건했던 것을 1765년에 다시 지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와는 구조가 달라졌다고 추정한다. 또한 창건 당시에는 석가여래와 미륵보살, 갈라보살의 삼존상이 모셔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영훈은 이것은 불국사의 또 다른 특성 중에 하나라고 설명했다.

협시(挾侍)보살로 미륵과 갈라보살이 서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미륵불이 아직 성불하기 전의 모습이며 갈라보살은 정광여래(定光如來)가 성불하기 이전의 형상인데 정광여래가 과거불이면 미륵불은 미래불이어서 현세불인 석가여래와 함께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삼세불의 세계를 석가삼존불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 세워졌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 경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로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왕명에 의해 무설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불국사를 창건한 751년보다 훨씬 앞서므로 무설전은 불국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건물로 추정한다. 따라서 무설전은 현재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다소 작은 규모의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

무설전은 경론(經論)을 강술(講述)하는 장소이므로 건물 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단지 강당으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다고 본다. 무설전이란 설이 없는 전당이란 뜻으로 강당이면서도 강의함이 없다는 건물명을 갖고 있음은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김상현 박사는 적었다.

④다보탑

불국사가 갖고 있는 예술의 정수로 석가탑(국보 제21호)과 다보탑(국보 제20호)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높이도 10.4미터로 같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은 외형상으로 개석 위의 난순에 둘러싸인 것을 탑의 주체부로 본다면 3층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체부가 편평한 개석 위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아래에 4개의 기둥으로 개방적인 공간을 구성한 부분을 하나의 층으로 보아 4층으로도 볼 수 있다고 김광현 박사는 적었다. 물론 다보탑이 몇 층인가 하는 외형상의 형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다보탑과 석가탑.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 상층기단 중앙에는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아래에 주춧돌이 있고 머리 위에 주두를 얹었다. 네 기둥과 가운데 기둥은 오방(五方)을 뜻하는데 오방은 티베트 불교에서 우주의 표상이다.


다보탑 속에 두었을 유물 일제 때 사라져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보탑 자체는 신라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다보탑은 칠보로 장식된 화려하고 장엄한 탑으로 묘사되어 법화신앙이 팽배하던 남북조시대에 중국인들이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고종 건봉(乾封) 2년(667)에 혜상(惠祥)이 지은 '홍찬법화경(弘贊法華經)'에서 여러 기의 다보탑 건립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최완수는 적었다.

‘동진(東晋) 애제(哀帝) 흥녕(興寧) 2년(364)에 혜력(慧力)이라는 승려가 건강(建康; 현재 남경) 와관사(瓦官寺)에 돌로 다보탑 하나를 만들었다.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5년(428) 팽성(彭城) 사람 유불애(劉佛愛)가 건강에 다보사를 짓고 또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제(齊)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479)에 예주(豫州)자사(刺史) 호해지(胡諧之)가 종산(鍾山)에 법음사(法音寺)를 지으니 사인(舍人) 서엄조(徐儼助)가 석조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당나라 국자좨주 소경(簫璟)은 난릉(蘭陵) 사람인데 양무제의 현손으로 누님이 수양제의 황후가 되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불법을 깊이 믿었으므로 수양제 대업(大業, 605~616년) 중에 스스로 ‘법화경’을 외우다가 경문(經文)에 의지하여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전단 향나무로 하였다.’

이 글을 보면 4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다보탑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은 다보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중국 다보탑의 형식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다보탑 안에는 항상 지붕과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목조다층탑 양식으로 하층부에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이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이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불국사 다보탑도 중국에서 건설된 역대 다보탑을 참고한 후 그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 다보탑은 중국식의 누각형 층탑개념에서 벗어나 스투파(stupa) 원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국의 석탑양식으로 변모시킨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성덕왕릉을 비롯한 스투파식 왕릉을 축조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다보탑을 건립할 때 영향을 끼친 결과일 수도 있다고 최완수는 적었다.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운교의 구고현, 청운교·백운교는 33계단으로 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유일한 신라의 다리이다(신영훈은 원래 36계단이라 설명).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七寶塔)이 있으니 높이는 500유순이고 가로와 세로는 250유순인데 땅에서 솟아나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갖가지 보물로 장식하니 오천의 난간과 천만의 감실(龕室)이 있고 무수한 당번(幢)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배영락을 드리우고 보배방울 만억을 그 위에 달았다. 사면(四面)에서 모두 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檀香)의 향기가 나와 세계에 두루 가득 차고, 모든 번개(幡蓋)는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진주, 매괴 등 칠보(七寶)로 합쳐 만드니 높이가 사천왕(四天王) 궁전까지 이르렀다.’


법화경의 진리 구현한 다보탑 변화무쌍



이런 내용을 가능한 한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불국사 다보탑이라는 설명으로 세계에서 한국의 다보탑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법화경'의 진리를 이상적으로 구현한 탑은 찾아볼 수 없다.

다보탑에는 지금 사자 한 마리가 서있다. 하지만 원래는 네 마리였다. 1902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도 다보탑을 조사한 후 사자 네 마리가 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1909년 다시 왔을 땐 두 마리만 남았다고 했다. 1916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에 두 마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두 마리가, 1916년 이후 다시 한 마리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빙허의 '불국사기행'에는 “이 탑의 네 귀에는 돌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의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500만원을 주어야 내어 놓겠다 한다던가? (중략)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이 만일 있다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라고 썼다고 홍석민은 적었다. (계속) 05/5/7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②
⑤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다보탑과 대조되는 것은 대웅전 앞 뜰 서쪽에 있는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불국사삼층석탑이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탑’ 이라고 줄인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

석가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이 알맞은 뛰어난 작품으로 사람에 따라 다보탑보다 더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한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한국 탑에서는 지붕의 처마 밑 부분의 공포구조를 추상한 형태로 만든다. 석가탑에서는 여러 층급으로 단을 이루는 방식에 따라 5단이다. 처마 좌우 끝에는 구멍을 파고 금동으로 만든 장엄구를 장치했다. 3층 지붕 위에는 노반(露盤)을 얹고 위에 상륜(相輪)을 올렸는데 철심(鐵心)에 돌을 다듬어 만든 여러 부재들을 중첩시켜 완성했다.


석가탑서 사리·사리용기·각종 장엄구 발견



석가탑은 엉뚱한 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탑으로도 유명하다. 석가탑은 창건 이후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66년 9월 도굴범에 의해 석탑훼손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정부는 도굴꾼이 훼손한 탑을 복원하기 위해 탑신부를 해체했는데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지붕돌 중앙에 있는 방형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유물’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26호로 지정)와 각종 장엄구 등을 발견했다.

이 당시 발견된 유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금동제, 은제 사리외합 1점
② 은제 사리내합 1점
③ 금동 방형사리합 1점
④ 동경, 청동비천상
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축
⑥ 묵서지편
⑦ 곡옥, 홍마뇌 환옥, 수정 환옥 등 옥 종류
⑧ 은가락지, 수정 큰 구슬
⑨ 목탑 12점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경문은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690년에서 705년 사이 당나라 측천무후 당시에 공문서에 사용되었던 글자 중 네 글자가 10여 차례나 등장하고 있어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다라니경은 석가탑 건립 이전에 만들어서 불국사 창건 당시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부분은 <'세계기록유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과 금속활자(1)', 국정브리핑, 2005.4.23>을 참조하기 바란다.

불국사 창건 당시의 복원상상도.


석가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진건의 소설로도 유명한 아사녀와 아사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는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불국사가 널리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사준은 석가탑을 건축한 아사달이 황룡사 9층탑을 지은 아비지와 동족으로 백제 사람일 것으로 추정했다.

석가탑은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탑이다. 이 탑을 세운 아사달은 이 점에 착안해 석가탑의 자리를 보통의 탑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탑의 기단이 땅과 만나는 곳에 놓는 석재를 지대석이라고 하는데, 이 지대석의 아래에 큰 바윗돌을 옮겨다 놓아 탑이 바위를 타고 앉은 모습으로 만들었는데 석가모니가 눈 덮인 히말라야 산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면서 앉았던 자리가 주로 바위였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가탑은 바위 위에 조성됐다. 탑 아랫 부분을 자세히 보면 바위와 탑의 기단이 만나는 부분이 독특한 것을 알게 된다.

울퉁불퉁하게 크고 작은 바위들을 깔고 그 위에 석가탑을 올렸는데 여기에서도 그랭이 공법이 사용되었다. 받침돌을 울퉁불퉁한 바위에 따라 도려내고 수평을 맞춘 것이다. 자연미가 돋보이는 부분으로 다른 나라의 탑에선 찾아볼 수 없다. 그랭이 공법에 대해 설명한다.


바위 형태따라 다듬어 맞추는 그렝이 공법



그랭이 공법은 불국사 석벽에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원래 자연석과 자연석을 접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게 생겼고 이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르게 쌓으려면 자연석을 가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렝이 공법은 특정 바위를 생긴대로 놓아둔 채 바위의 형태에 따라 다듬어 가면서 맞추는 것이다.

이 공법은 우리나라 건축의 독특한 특성 중에 하나이다. 서양의 건물은 주춧돌과 기둥을 서로 견고하게 결색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는 주춧돌 위에 기둥을 간단하게 올려놓기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물은 지진과 같은 충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재에 의해 건물이 소실되는 경우는 많지만 지진 등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에 큰 지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한국의 건물들 대부분이 충격에 강한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춧돌을 아무리 유리와 같이 갈아 놓는다하더라도 기둥을 올려놓으면 유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기둥과 주춧돌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기 위해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다. 주춧돌을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 밑둥을 도려내어 밀착시킨 것이다. 그레질칼로 기둥을 다듬어 돌에 맞추면 돌의 요철에 따라 기둥이 톱니처럼 서로 맞물린 듯이 된다. 기둥과 주춧돌은 막중한 건물의 하중으로 인해 밀착되기 때문에 지진에 흔들렸다하더라도 기둥의 요철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영훈은 1967년에 멕시코의 멕시코시에 전통적인 한국 건축 기법으로 건설한 한국정(韓國亭)이 멕시코에서 일어난 수많은 지진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아직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00년 초의 연화교·칠보교.


석가탑의 둘레에는 팔방금강좌라고 하는 별도의 탑구가 있다. 정사각형의 탑구 네 모서리와 네 변의 중심에 원형의 연화좌대를 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한 것이다. 각각의 연화대에는 여덟 분의 보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석가탑의 탑신의 높이는 2층보다 1층이 훨씬 높다. 2층부터는 1층 높이의 반 이하로 줄어든다. 3층은 2층보다도 약간 낮게 만들었다. 폭과 지붕돌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덮개에 해당하는 상․하 갑석의 윗면은 경사를 약간 주어 빗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경사가 사방에 나 있으므로 모서리에 45도 각도로 융기된 선이 생겨나는데, 이 선을 무리 없이 다듬기란 쉽지 않은 데도 석가탑을 보면 둔하게 보이기 쉬운 부분을 아주 뛰어난 솜씨로 날렵하게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상륜은 3층 지붕돌 위에 올린 네모반듯한 모양의 노반에서 시작된다. 노반 위에 복발 그리고 이어서 앙화, 보륜, 보개, 수연받침, 수연, 용차, 보주의 순으로 상륜이 구성된다. 이 석재들은 크기가 작은 데다 높게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중심부에 구멍을 내고 3층 지붕돌에 꽂아 세운 '철찰주(철로 만든 기둥)'에 죽 내려 끼우는 방식으로 설치하였다. 상륜부 전체에 세밀한 조각들이 많지만 특히 앙화의 네 모서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 네 변에는 음식을 바치는 공양비천상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가탑은 원래 앙화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서 그 위의 상륜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귀솟음·안쏠림 기법으로 시각 교정



석가탑은 매우 정교한 시각 교정을 가하도록 건축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단 기둥의 수치를 보면 안쪽 기둥에 비하여 바깥쪽 모서리 기둥의 높이가 약간씩 높다. 또한 기단과 탑신의 너비는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다. 이것을 귀솟음과 안쏠림기법이라고 부른다.

귀솟음은 중심 기둥과 모서리 기둥의 높이를 같게 할 경우 양쪽 끝이 중심보다 낮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기법이다. 이는 가령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부가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부의 기둥을 높게 하는 것을 반대로 이용한 기법이다.

안쏠림은 기단과 탑신의 기둥을 수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으로 역시 수직으로 올렸을 때 착시 현상에 의해 건물의 윗부분이 넓어 보이는 것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강우방은 설명했다.

석가탑은 통일신라 초기 석탑 양식의 대세를 따르고 있지만 이를 보다 간략화하면서 석재가 갖고 있는 특성을 최대한 살려 하나의 완성된 양식을 확립했다. 탑신부의 비례도 통일 초기의 경향에 따라 초층에 비해 2층부터 체감률이 급격히 높아지지만 옥신석은 높이에 비해 폭이 줄어들어 종래의 장중한 외관에서 경쾌한 외관으로 바뀐다. 이후 이러한 석가탑의 양식을 따라서 건축된 신라의 수많은 석탑들을 일반적으로 ‘일반형 석탑’이라고 부른다.

석가탑은 또 다시 해체 복원할 계획이다. 그러나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석가탑은 기단부에 문제가 있어서 해체해야 한다는 대원칙은 수립됐지만 어떤 조사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지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석가탑 그랭이 공법, 그랭이 공법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건축공법으로 기준 돌의 형태에 맞춰 돌을 다듬어 쌓은 것이다.


<아미타정토>

칠보교와 연화교를 지나 다다르게 되는 아미타정토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구역은 석가정토보다 면적도 좁고 건물도 낮으며 장식도 간단하다.

8세기에 한창 융성한 아미타 신앙은 모든 중생이 나무아미타불을 단 한 번만 염불하면 속세의 고통에서 즉각 벗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고통이 없는 행복의 땅인 극락세계가 바로 아미타정토이다.

아미타 신앙대로라면 불국사에서 아미타정토 구역을 제일 장엄하고 높게 조성하는 것이 이치이지만 규모나 구조면에서 아미타정토는 석가정토의 부속물로 설계되었다. 권지연은 이와 같이 설계된 이유로 아미타 신앙이 신라시대 대중 사이에 크게 유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화엄사상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화엄사상에 의하면 아미타정토는 가장 낮은 단계로 근기가 낮은 중생을 위한 것이고 연화장세계는 가장 높은 단계로서 근기가 높은 중생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연화장세계는 바로 해탈의 경지인데 이곳은 만물이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석가정토, 아미타정토보다 돋보이게 표현



불교 세계에는 아미타여래가 있는 극락정토, 약사여래가 있는 유리광정토 등 수많은 정토가 있지만 불교의 주 관심사는 석가여래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난 사바세계에 있다. 그러므로 많은 여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여래는 사바세계의 석가여래이므로 연화장세계로 변모한 석가정토가 아미타정토보다 단계가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국사의 건축은 석가정토를 아미타정토보다 월등히 부각시킴으로써 이러한 화엄사상의 면모를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즉 우리의 이상은 저 멀리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를 연화장세계로 변모시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노력과 실천으로 깨침에 다다르면 이 사바세계가 가장 훌륭한 정토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불국사의 건축은 말해주고 있다고 최준식은 적었다.

① 칠보교와 연화교

대웅전으로 가는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에는 아미타여래의 서방 극락세계로 가기 위한 칠보교·연화교가 있다.

칠보교(칠보는 일곱 가지 보석을 뜻한다고 설명되나 부처의 본질인 깨달음의 일곱 가지 덕성을 말한다는 설명도 있음)·연화교는 청운교·백운교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경사가 훨씬 완만하게 처리되어 있다. 다리 밑에는 약간 완만한 곡선을 이룬 홍예가 만들어져 있다. 이 다리는 창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는데 헌강왕비가 비구니가 되어 왕이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청운교·백운교에 비해 부드럽고 온화한 다리로 신라시대 석조 기법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② 극락전

안양문을 지나면 석등과 극락전(아미타여래가 주존으로 봉안된 사찰 건물을 무량수전이라고 하며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함)이 나타난다. 안양이란 극락정토의 다른 이름으로 이 문을 지나면 사방의 극락정토에 이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극락전, 극락전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으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가 봉안되어 있다(사진 김영윤).


아미타여래는 무량광 또는 무량수로 번역된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으로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가 봉안되어 있다. '고금창기'에는 6칸 건물로 전후 26칸의 행랑이 적혀 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영조 26년(1750)에 중창했으나 기단과 초석, 계단 등은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모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로 하여 1960년에 중건된 것이다.

극락전을 위축전(爲祝殿)이라고도 부르는데 위축전이란 조선 왕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명산대찰에 지은 원당(願堂)을 뜻하는데 1920년까지 온돌을 들여 원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20년에 온돌을 철거하고 다시 극락전으로 환원되었다.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통하는 길에는 3열을 지어 쌓은 계단이 있는데 각각이 16계단이므로 모두 48계단이 된다. 이것은 아미타불의 48원(願)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계단은 구례 화엄사에서도 발견된다.

③ 비로전

석가여래의 사바세계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비로자나불이 주석하고 있는 법계가 있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으므로 연화장 세계의 불국인 비로전을 건축했다.

비로전은 대웅전으로부터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1970년대의 발굴로 터전이 확인되어 그 자리에 다시 중건했다.


기단, 앞쪽에 삼단 층계 좌우에 삼각형 소맷돌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조립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화강암 기단, 앞쪽 중앙에 삼단의 층계, 좌우에 삼각형 소맷돌을 설치했다. 소맷돌은 받침돌과 위에 놓이는 두 돌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런 소맷돌은 황룡사나 감은사에서도 볼 수 있지만 불국사의 다른 전각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비로전의 주인은 비로자나불인데 화엄사상에 따르면 비로자나불은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는 뜻으로 모든 부처님의 본체 곧 진리의 몸인 법신불이다. 단순히 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부처님 중의 한 분이 아니라 그 모든 부처의 근본이요 중심으로 간주되는 부처님이다(비로자나불이 주존일 경우 그를 봉안하는 전각을 대적광전이라 함)

불단에 모셔진 비로자나불좌상(국보 26호)은 극락전의 아미타불과 마찬가지로 금동불인데 주조 기법이나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몸은 바로 앉아서 앞을 바라보고 오른손의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워서 왼손으로 잡고 있는데 이러한 수인을 지권인(智拳印)이라 한다. 오른손은 부처의 세계를 왼손은 중생들의 세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심오한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수인은 비교적 후대에 비로자나불이 밀교의 주존(主尊)으로 대일여래가 불렸을 때 흔히 나타났다고 최준식은 적었다.

<연화장세계>

불교 신앙에서 관음 신앙을 무시할 수 없다. 아미타 신앙과 더불어 가장 민중과 가까웠던 신앙이 관음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비로전보다 높은 곳에 관음전이 있는 것은 보타락가산을 나타낸 것이다. 옛날에는 산 모습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계단식으로 되어 산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되어있다. 산으로 오르는 계단을 낙가교라 부르고 있다. 낙가교(洛伽橋)란 보타락가산으로 오르는 계단이라는 뜻이다. 관음전으로 들어서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 하여 남해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관음전 역시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1973년 중창할 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복원된 다포식 건물이다. '고금창기'에 의하면 관음전 주변에 여러 건물이 일곽을 이루고 있었으며 922년에 경명왕비가 낙지공에게 명하여 전단향목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전했다고 하나 그 후 없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73년 복원공사 때 새로 조성한 것이다.

이상의 설명으로 불국사를 왜 불국사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국토들이 총망라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민중적인 신앙인 관음 신앙까지 배려해서 설계했기 때문이다.

비로전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불국사의 건축 양식을 보면 그 당시까지 일반적으로 출현했던 탑 중심형의 사찰에서, 탑의 비중이 약화되고 금당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황룡사처럼 평지에 세운 탑 중심형 사찰은 탑을 기준으로 삼아 사찰의 전체 영역을 조직화하지만 불국사에서는 상대적으로 탑과 금당이 병립되어 있다. 이런 탑-금당 병립형 사찰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탑으로부터 금당으로 신앙의 중심성이 전이되는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권지연은 해석했다. 탑-금당 병립형의 출현이야말로 바깥에서 들어온 사찰 배치 형식을 신라의 형식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최준식 박사의 설명이다.


불교의 심오한 교리 조형적 언어로 표현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함께 등록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절묘한 설계를 바탕으로 불교의 심오한 교리를 조형적 언어로 표현한 최상의 종교예술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석굴암 제대로 보기 (1), (2)', 국정브리핑, 2004.10.11 및 10. 16)을 참조하기 바란다.

신라의 최치원은 불국사는 ‘화엄불국’에 깊은 뜻이 있다면서 '화엄불국사아미타불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동해 동산에 아름다운 절이 있으니
화엄 불국이라 이름하였다.
임금이 종이 되어 친히 세우니
절 이름 네 마디에 깊은 뜻이 있다.
화엄을 주시하며 연화장을 우러르고
불국에 달리는 마음 안양으로 이어지면
마산의 독한 기운을 가라 앉히니
마침내 고해의 거친 파도를 잠잠케 한다.'

근래 우리 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 가격 그 중에서도 국보급의 가격은 얼마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원칙적으로 국보급은 판매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므로 가격을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있다. 작품에 대한 보험가가 산정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최고의 보험가는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으로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문화교류전 출품 때 적용되었던 4백 억 원이다. 그 다음은 1998년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한국실 개관 기념 특별전에 출품되었던 ‘금동반가사유상(국보 78호)’으로 3백 억 원 짜리 보험에 가입했다. 제작시대나 모양이 비슷한 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모두 한국 최고의 불상으로 꼽힌다.

한편 건축물의 경우 문화적 가치와 복구비를 기준으로 삼아 보험가를 산정하는데 불국사와 석굴암은 1백 91억 원이며, 수원‧화성은 1백 13억 원이다. 불국사가 지불하는 보험료는 1999년을 기준으로 3년간 1억 2천만 원, 수원시가 지불하는 보험료는 14개월간 2천 6백만 원으로 알려졌다.
05/5/15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