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66)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하)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08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4)
<중국과 다른 철 생산 기술>

개마무사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면 중국은 왜 고구려와 같이 개마무사를 도입하지 않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중국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병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이 도입한 기병제도는 중국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에 복속한 이민족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용병이어서 고구려 군과 같은 결집력이 부족하여 전투력이 떨어졌다.

한편 중국이 고구려와 같은 개마무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하는 학자들이 많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는데 반하여 다른 국가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강원도 철령에서 발굴된 3세기경의 철마군단(고구려연구회 제공).


세계적으로 볼 때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이란,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기원전 1200~1000년경에 연철을 열처리하여 강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유럽에서 생산된 철기는 전부 연철이고 주철은 그보다 늦어 14세기경 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처음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누어지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되었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백색주철 주조성좋고 강도높아

반면에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되어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가장 낮은데도(1,130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한편 강철 제련은 선철의 경우 보다 높은 온도 즉 보통 1,500도 이상에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철을 만드는 비법은 철의 용융점이 1,539도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려야 한다.

진천 석장리 제철용 송풍관, 한민족이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도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되어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며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문화가 진전되었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들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에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 되는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 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 최고의 철 생산 능력>

철은 온도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는데 기본 방식은 유사하다. 당시 철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이다.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선철생산 공정은 철광석을 일정한 덩어리로 만들어 숯을 여러 층으로 엇바꾸어 넣고(용재로 석회석을 소량 삽입) 밑에서 불을 지핀 다음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때의 연로로도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하는데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개마무사와 방패, 고구려는 질 좋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적들과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050~1,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되어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로 되며 1,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갈라진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철을 다시 녹여 1,500도 정도로 온도를 높여 강철을 만드는데 과거의 제철 능력으로 볼 때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온도인 1,500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강철을 만드는데도 비밀이 있다. 숯(탄소)을 적절하게 배합시키면 제련로 안의 온도가 1,200도가 되어도 철의 용융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 속에 탄소가 4.3퍼센트 정도 들어가면 철탄소합금의 용융점이 1,130도로 낮아지며 1,200도 정도에서도 탄소를 적절히 융합하면 철이 용융한다.

제련과정을 거쳐 뽑아낸 철을 괴련철(잡쇠덩이)이라 하는데 아직 불순물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괴련철을 다시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단단한 철만 남는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의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조선 영역에서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률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고광록』에 의하면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있다.

'고조선 강철' 최강국가 발돋움 원동력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철 생산지가 많다. 오늘의 무산일대와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가 철산지로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 연철제품이 발굴되었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기원전 2~1세기에는 강철을 제작했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중요한 철광지를 지키기 위하여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000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수ㆍ당은 현재의 무순 지역의 신성(고이산성)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고구려가 이곳을 수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은 무순 지역이 철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신성은 동천왕 18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이래 봉상왕 2년(293)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격퇴시킨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영양왕 24년(613) 수양제의 침입이나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의 침략 때에도 신성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성은 중국의 동진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신성의 중요성은 보장왕 26년(667) 고구려를 침입한 이적(李勣)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신성은 고구려 서변의 요새이니 먼저 이곳을 빼앗지 못하면 나머지 성도 쉽게 취하지 못할 것이다.’

고이산성은 70~140미터 전후의 3개 야산을 하나로 묶은 환성(環城)으로 최고봉인 장군 봉으로부터 세 줄기의 산등성이가 남으로 뻗어 있으며 산꼭대기에 넓은 평지가 있어 마을을 연상케 한다. 신성은 남으로는 혼하와 동쪽으로는 그 지류인 무서하를 천연의 해자로 하고 있으므로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성곽은 서성의 서쪽 외곽인 서성지 일대와 남위성의 서남단과 동성의 동남쪽 산등성이 부분에 주로 남아 있으며, 그 외 많은 부분이 토성이다.

이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중안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쓰러져 있는 신성(고이산성) 표지석, 중국은 신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고구려에게 번번히 격퇴되었다.


현재는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되어 있으며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보인다. 필자가 신성을 찾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지만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거의 잦아볼 수 없고 입구를 비롯하여 희미한 증거만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고이산성을 가리키는 석비도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고구려의 청야전투>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강력한 무기와 장비를 이용해 중국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것만으로 영광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사를 보면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한 만큼 중국도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전반적으로 고구려는 중국의 막강한 공격에 몇 번의 좌절을 겪기도 했지만 연개소문의 아들이 나ㆍ당 연합군에게 국가를 내줄 때까지는 패배라는 것을 거의 몰랐다.

그런데 중국과 고구려의 전투를 보면 고구려가 마냥 강력한 전력으로 일대일 백병전을 벌려 이들을 격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다른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침공을 할 때는 월등한 전력을 확보해야 한다. 지리에 어두워 곳곳에서 함정에 빠질 우려도 있고 전투가 장기화될 경우 보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장기간의 원거리 원정을 떠날 때에는 특히 장병들이 먹어야 할 식량과 식수의 보급이 절대적이다.

반면 수비 측에서는 침공군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스스로 철수하게 만들고 철수할 때 틈이 있으면 이들을 공격하여 다시는 침공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책이다.

여기에 고구려는 다른 국가들이 사용하지 못한 전술을 도입했다.

첫째는 잘 알려진 청야전투이고 둘째는 산성전투이다. 청야전투를 먼저 설명한다.

나라와 시대는 다르지만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막대한 인원과 장비를 동원하고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요인은 여러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유달리 추웠던 러시아의 겨울 기후를 주범으로 들 수 있다.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원정 때도 그랬지만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 때에도 침공군은 날씨가 예년에 비해 유달리 추워 이런 돌발 변수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제물에 붕괴되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나폴레옹 또는 히틀러 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하게 찾아 온 혹한에 큰 덕을 보긴 했지만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 기후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러시아를 공격할 때 광대한 영토로 진격하면 당연히 전선이 길어지고 보급에 문제가 생기며 여차하면 겨울의 덫에 걸릴 수도 있음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불타는 모스크바, 악전고투 끝에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청야작전에 휘말려 모스크바에서 철수했지만 러시아군의 추격과 농민의 게릴라 공격으로 포로 10만 명을 비롯, 55만 명을 잃었고 무사히 귀환한 군사는 겨우 2만 5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잘 무장된 군인과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전격 작전을 벌리면 겨울이 오기 전에 러시아의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러시아는 막강한 침략군에 대항하기 위해 유별나게 추운 날씨가 닥쳐오도록 기도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침공군에게 최대의 타격을 줄 수 있는 러시아 특유의 전술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가 외적이 침공했을 때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청야작전’이다.

원래 공격군은 신속한 진격을 위해 꼭 필요한 일정량의 식량과 무기만 휴대한다. 그러므로 적국으로 진격하여 전투를 벌여야 할 경우 전격작전을 구사하여 적을 패배시키고 그들이 갖고 있는 군수품을 확보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청야작전: 후퇴시 적군 식량·물자 모두 파괴하는것

러시아가 구사한 청야작전이란 적군과 맞붙어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작전상 후퇴하면서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파괴하거나 불태우는 것을 말한다. 즉 공격군이 진입하더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식량과 물자는 모두 불태우므로 공격군은 모든 보급을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더구나 러시아가 무작정 후퇴만 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에 진입한 공격군에게 보급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도록 곳곳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식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사람들의 끈질긴 게릴라전은 효과를 보아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프랑스군과 독일군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의 패배가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몰락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바로 고구려가 중국을 상대로 사용한 작전이 러시아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청야(淸野)작전’이다.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가장 먼저 신경을 쓴 것은 원활한 군수품의 보급이다. 사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이므로 기본 전력이 부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우선 인원이 상대국보다 압도적으로 많아 언제든지 소위 인해전술이 가능하며 농업국답게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병력이 수십만이 될 경우 이들이 소비하는 물자는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며 또한 이들 군수품을 공급하는 지원군이 소비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잘 알려져 있는 『손자병법』에서 속전속결을 강조한 이유도 알고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장기전이 되면 불가피하게 대량의 물자가 필요한데 적지에서 이를 도달한다는 것이 수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중국과 전투가 벌어지면 침략군인 중국의 약점을 철저히 이용했다.

사실상 고구려는 중국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주력부대와 정면 대결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승리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우선 고구려는 전략 거점이 되는 산성을 중심으로 버티면서 장기전을 유도했다. 즉 중국의 주력부대가 고구려 영토 깊숙이 진격할 경우 소규모 전투를 벌여 패하는 척하면서 유도 작전을 펼쳤다.

특히 고구려는 유인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국군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이나 물자를 청야작전에 따라 철저하게 파괴했고 배후에서 보급을 차단하여 보다 큰 피해를 주었다.

중국도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겨울이 닥치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고구려의 청야작전과 산성전투에 휘말리면서 번번이 시간을 놓쳤다. 중국의 역대왕조가 고구려를 침공했다가도 가을이 되도록 승리하지 못하면 곧바로 철수 작전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수많은 전투 기록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영토에서 퇴각한다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퇴각하는 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전력이 저하된 상태이므로 이때 고구려가 자랑하는 개마무사 등을 동원해 침공군을 섬멸했다.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 실패와 그 피해는 국권마저 당나라에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계속)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5)
<페르시아도 굴복시킨 청야전투>

원래 청야전투는 북방기마민족이 고대로부터 사용하던 큰 전술 중에 하나이다.

청야전투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예로 기마민족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키타이와 페르시아간의 전투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전투를 보면 고구려가 사용했던 청야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스키타이가 강성할 때 세계의 패자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8~기원전 486)였다. 페르시아는 서쪽으로 유럽의 발칸까지 진출했고 남쪽으로는 리비아, 에티오피아 및 수단을 포함했고 동쪽으로는 펀잡 지방과 인더스 계곡 전역을 손에 넣는 등 그야말로 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북쪽 국경 너머에는 공포의 기마민족인 스키타이가 있었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어디서인지 모를 정도로 갑자기 나타나 약탈을 일삼고 또 재빨리 철수하곤 했기 때문에 응징이 불가능했다.

600척 대선단에 70만 태우고 스키타이본거지 공격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얕보고 방자한 행동을 하는 스키타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으므로 버릇을 고쳐줄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기원전 514년 고대 국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대군을 동원했다. 다리우스는 600척의 대선단에 70만 명(과장되었다는 설도 있음)의 장병을 태우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트라키아(현 루마니아)에 상륙한 후 스키타이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기원전 514년 혹은 기원전 513년에 벌어진 이 ‘페르시아-스키타이 전쟁’은 아시아와 유럽세력이 격돌한 최초로 전쟁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스키타이의 작전은 ‘히트 앤 런’(치고 빠지기)작전이었다.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스키타이 왕 이단티르소스가 기발한 전술로 적의 힘 빼기 작전에 나섰다고 지적했다. 스키타이는 페르시아 군이 하루 정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먹을 만한 것은 모두 불태웠고 우물도 메웠다. 그러다가 페르시아 군에 허점이 보이면 전광석화와 같이 반격을 가한 후 다시 후퇴하곤 했다. 소위 전형적인 청야(淸野)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다리우스는 끝없는 평원의 지평선 너머로 잡히지 않는 적을 쫓아 허망한 추격을 계속했다. 스키타이 병사들이 도나우 강과 볼가 강 사이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다리우스의 약을 올리자 화가 치민 다리우스는 이단티르소스 왕에게 다음과 같은 전갈을 보냈다.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페르시아는 길이 4백50미터, 폭 3백 미터로 궁전이라기보다 궁전 속의 대도시를 건설할 정도로 당대 최강의 국가였지만 스키타이의 치고 빠지는 작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대는 도망만 다니고 있는데 결국 다음에 말할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우리 군대에 맞서 싸울 자신이 있다면 더 이상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지 말고 한 곳에서 싸우도록 하자. 만약 역부족이라고 느낀다면 더 이상 도망치지 말로 그대의 주군인 내게 헌상품으로 땅과 물을 알현하러 오라.”

다리우스의 편지에 이단티르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합당한 이유가 없는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해 도망친 적은 없소.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요. 우리나라에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들과 서둘러 싸워야만 되는 도시나 과수원이 없소.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그리고 내가 주군으로서 받드는 분은 우리의 선조이신 제우스와 스키타이의 여왕 헤스티아(화덕의 여신) 두 분밖에 없소. 그대에게 땅과 물 대신 그대에게 합당한 다른 것을 보내 주겠소. 그리고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엿 먹어라’요.”

전격작전을 구상한 다리우스였지만 스키타이의 힘 빼기 작전에 시간만 낭비하자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 군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소비하는 식량이 문제였다. 스키타이가 먹을 만한 것이라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황량한 들판에서는 곡식을 구할 수 없었다.

헤로도토스는 다리우스군의 철수에 대해 매우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했다. 스키타이는 자신들이 펼친 청야작전에 휘말려 다리우스가 궁지에 빠졌음을 알아채고 다리우스에게 선물로 새와 쥐와 개구리 그리고 다섯 개의 화살을 보냈다. 다리우스는 선물을 갖고 온 사자에게 선물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자신은 선물을 전달하고 돌아오라는 명령만 받았다며 돌아갔다.

다리우스는 스키타이 쪽에서 보낸 선물의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에서 다리우스는 스키타이인들이 항복을 하고 땅과 물을 바칠 생각인 것 같다고 다음과 같은 풀이를 했다.  

“쥐는 땅 속에서 살면서 인간과 똑같은 곡물을 먹고, 개구리는 수중에서 살며, 새는 말과 매우 비슷하고(속도가 빠르다는 뜻), 화살을 가져온 것은 그들의 무기를 인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소.”

그러나 다리우스의 부하인 고브리아스는 다리우스와는 달리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페르시아 놈들아. 네놈들이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든지, 쥐가 되어 땅속으로 숨든지, 아니면 개구리가 되어 호수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한, 반드시 이 화살에 꿰뚫려 무사히 귀국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다리우스는 자신의 해석이 틀리고 고브리아스의 해석이 옳다고 판단한 후 철수를 단행했다. 청야전투의 위력에 혼이 난 다리우스는 이후 결코 이들과 대적하려 하지 않았다.

중국 중경 통원문(通遠門)에 조각된 공성도, 난공불락으로 알려진 중경의 관문을 공격하는 공성 장면으로 성벽이 견고할 경우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지정학을 이용한 산성전투>

고구려가 외적이 침입했을 때 사용한 또 다른 전술은 청야전투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산성전투이다.  

러시아나 스키타이의 전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야전투는 자유자재로 공격을 하는 동시에 불리한 경우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라는 넓은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러시아나 스키타이(헝가리를 포함한 동구권 거의 전 지역)처럼 광대한 지역을 배경으로 전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험준한 산악 거점 활용 청야작전 전개

고구려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청야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 험준한 산악을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 설명된 것 것처럼 지리적 특징이 매우 뚜렷한 지역 중 하나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넓게 탁 트인 벌판이 적다는 이야기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지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활을 주요 무기로 채택했다.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멀리서 쏘아대는 활은 개활지에 비해 위력이 배가될 수 있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면 소수부대로라도 지형지물만 잘 이용하면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활은 적의 접근을 막아주는 지원 세력이 없이는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더구나 활이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에 부합하는 무기라고 해도 항상 고구려의 입맛에 맞게 전장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고구려라 해서 평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궁수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해야 할 때도 있다. 또 언제나 천연지형지물만 이용해서 전투를 치룰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중국과 서역을 연결하는 중국 측 마지막 관문인 양관과 한나라 시대에 사용된 고대 무기, 중국 한나라 시대의 무기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도 이와 유사한 무기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인공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다. 간단한 목책을 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마름쇠 같은 것만 뿌려놓아도 적 기병이나 보병이 신속하게 아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고구려는 산성(山城)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활이나 노 같은 무기들은 성에 의지해서 싸울 때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성을 공격하는 적의 보병과 기병은 성에 닿을 때까지 거의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성안에 있는 수비군들의 활이나 노 등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노출된다. 가공할만한 위용을 보이는 공성(攻城) 무기 등도 성문 또는 성 자체를 파괴할 때까지는 공격 측이 거의 일방적으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고구려가 사용한 전형적인 전술은 다음과 같다.

적군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든 주민들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의해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들이 입성할 때 청야작전에 따라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이 기본이다.

산성엔 외적침입 대비 식량 · 물자 항시 비축

고구려의 자랑은 산성으로 철수할 때 큰 짐을 갖고 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산성에는 항상 외적이 침입할 때 들어가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전략 물자 등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는 고구려가 항상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성이 점령되면 모두가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므로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러므로 산성에 들어가면 군ㆍ관ㆍ민 모두 적군을 격퇴하기 위해 한데 힘을 모았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런 작전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외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더라도 해를 넘기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만주지역인 고구려 영토에서 원정군이 혹독한 겨울 기후를 버티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고구려는 중국군이 지쳐 철수할 때 경기병이나 개마무사들은 풀어 이들을 추격하여 섬멸했다. 중국이 고구려의 이러한 작전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는 각종 중국 측 자료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주서』도 고구려의 전술은 ‘성안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킨다’고 기록했다. 성안 농성이 주 전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성을 공격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손자병법에도 그 이유가 잘 설명돼 있다.

‘가장 훌륭한 방책은 적의 전쟁 의도를 분쇄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의 외교관계를 끊어 고립시키는 것이며, 그 다음은 적의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고 그보다 하책이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후수단이나 마찬가지이다. 성을 공격하려면 노나 분온을 수리하고 공성용 장비를 준비하는 데 3개월이나 걸리며 또 적의 성안을 내려다보는 흙산을 쌓아올리는 데 3개월은 걸려야 완공할 수 있다. 그동안에 장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앞서 말한바 준비도 없이 그저 사병들을 적의 성벽에 개미떼가 달라붙듯이 기어오르게 하고 그중 3분의 1이나 죽게 하고서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이는 공격을 해서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공(謀攻)에 능숙한 장수는 적의 병사들을 굴복시키지만 전투를 감행하지 않으며, 적의 성을 함락시키지만 구태여 공격을 가하지 않으며, 적국을 허물어뜨리지만 장기전을 하지 않는다.’

혼강에서 바라본 오녀산성 전경, 졸본성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절벽과 같은 산 정상에 위치하여 방어에 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산성 내부로 출입하는 통로는 1~2명이 겨우 지나칠 정도로 좁다.


<산성의 국가>

고구려가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산성전투를 견지했다는 것은 산성전투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산성이 도처에 확보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성을 기간으로 적군을 퇴치하는 기본전략에 따라 국경선 부근에 여러 겹의 방어용 성을 쌓았고 수도로 접근하는 통로에도 차단용 성을 건설했다. 또한 이런 전략 요충지가 격파되었을 경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수도를 평지성(平地城, 평화시)과 산성(山城, 전쟁시)으로 이원화하는 이른바 도성체제(都城體制)를 확립했다.

고구려의 역사는 ‘축성(築城)의 역사’라고 말한다. 당 태종도 고구려는 산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게 정벌할 수 없었음을 인정할 정도로 고구려는 견고한 산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산성체제를 북한에서는 요하 일대에 구축된 전연방어성(기본방어성)을 축으로 하고 수도(집안)에 이르는 중간지역(태자하 상류와 소자하 일대)에 중심방어성(중간방어성)과 수도 방어를 위한 수도방어성으로 나뉜 3중 구조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수도를 향하는 길목에 여러 방어성을 조성하는 수비책은 고구려 초창기의 오녀산성(졸본성: 홀승골성)과 하고성을 비롯하여, 국내성과 환도산성, 평양 천도 후의 대성산성과 안학궁 등으로 이어진다.

고구려 산성의 숫자는 학자에 따라 달라지나 대체로 요령성의 120여기를 포함하여 길림성이나 한반도에 남아 있는 것 등을 모두 합쳐 200여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구려가 고분과 함께 돌의 문화를 이룬 국가로서 결국 고구려의 성장과 문화는 돌을 통해 이루었음을 나타낸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등 고대 국가들이 치수(治水)에 의한 대규모 인력동원으로 성장한 것처럼 고구려는 치석(治石)을 통한 많은 인력동원에서 나라를 이룩하고 발전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조선기술발전사』에 따르면 고구려의 산성은 지형에 따라 크게 4가지로 구분되어 건설되었다. 이 부분은 「고구려인은 축성의 달인이었다」(국정브리핑, 2004.5.2)에서도 약간 다루었지만 이를 좀 더 보완해 설명한다.  

단동시의 동호산성의 우물, 산성의 건설에 수원지 확보는 필수적으로 이 우물을 보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수량을 갖고 있다.


첫째, 고구려 산성은 ‘고로봉식’으로 이는 고리짝같이 4면 주위가 높은 산등으로 둘러막히고 가운데가 오묵하게 생긴 지형이며 둘째, ‘산봉식’으로 마늘 밑둥 모양으로 높은 산. 넓은 대지가 있고 그 둘레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룬 지형이며 셋째, ‘사모봉’형으로 사모(고대 관리들이 쓰던 모자의 한 가지) 모양으로 뒤에 산이 가로막히고 앞은 평지로 되어 있어 그 등성이와 평지에 걸쳐 성을 쌓은 형태이며 마지막으로 ‘마안봉식’으로 말안장 모양으로 산마루의 양쪽이 높고 중간이 약간 우묵하게 들어간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고구려는 장병들의 삶을 안전하게 보장하면서 장기전에 들어갈 수 있는 고로봉식 산성을 위주로 건설했다.

산 능선 · 절벽따라 성벽 쌓아 방어 유리

고로봉식 산성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산 능선 또는 절벽을 따라 성벽을 쌓기 때문에 적이 쳐들어오기에는 불리하고 적을 방어하기에는 유리하다.

둘째로 성벽을 산 능선을 따라가면서 쌓기 때문에 겹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다.

셋째로 성 안은 우묵한 골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 안에서는 적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으나 성 밖에 있는 적들은 성 안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전투에서 전술상 유리한 조건에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다.

넷째로 풍부한 수원과 넓은 골짜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고 전투 물자를 비축해 장기전에 대처할 수 있다.

또한 돌을 4각추 형태로 다듬어서 서로 잘 물리도록 쌓았는데 암반기초가 없는 부분에서는 땅을 깊이 파고 돌로 기초를 튼튼히 한 후 그 위에 큰 돌 순서로 엇바꾸어 쌓았으므로 견고한 성벽을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견고하고 지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세워진 산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 밖에 토산(假山)을 만들어 대항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나라와 혈전을 벌였던 안시성의 전투 상황(645)이 이를 잘 말해준다.

‘강하왕 도종은 군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 귀퉁이에다 돌산을 쌓고 성을 침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의 사졸이 분전하여 교전하기를 하루에 6~7회, 충차(衝車)와 포차(抛車)로 성을 파괴하니 성 안에서는 목책(木柵)을 세워 빈 곳을 막았다.’

백암성 망대(적대), 성문 가까운 양쪽에 성벽과 같은 너비와 높이를 돌출시켜 성문에 다가오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킬 수 있다.


<중국과 다른 산성>

고구려 산성이 절대적인 위용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산성이 견고한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황화 강 유역의 평지에 황토를 층층이 다져 성곽을 축조했다. 이에 따라 평지에 쌓은 네모꼴 토성이 중국 성곽의 기본형이 되었다. 고구려보다 늦게 만주를 호령했던 여진족의 금도 이를 받아들여 평지 토성을 축조했다.

반면, 고구려는 평상시에 들판에서 농사를 짓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험준한 산으로 대피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산성을 쌓았다. 이때 고구려인들은 적석총을 만들면서 터득한 돌 다루는 솜씨를 활용했다. 산에다 쌓은 석성(石城)은 고구려의 고유 브랜드인 셈이다.

물론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돌로만 쌓은 것은 아니다. 가령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도성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모두 쌓았는데 평원지대에서는 구하기 쉬운 흙으로 토성을 많이 쌓았다. 특히 평지성이나 토성을 축조할 때는 중국의 축성술을 도입해 활용하는 등 고구려 특유의 전통과 신기술을 접목시켜 성의 나라를 건설했다고 여 호규 박사는 말한다.

고구려 산성은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갖고 있어야 하므로 다소 특이한 구조로 건설되었다.

성문 장엄한 외형… 정문 제외하고 대부분 은폐


우선 산성은 산성 자체를 보호하고 외적을 방어해야하므로 어느 정도의 필수시설을 구비했다. 우선 성문은 성의 정문으로서 출입구인 동시에 장엄한 외형을 나타낸다. 산성의 경우 성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은폐시켰다. 한편 평지성의 경우 정문을 교통 요지에 설치했다.

현재 실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대체로 2층 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망루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성문은 적의 제일 중요한 공격목표인 동시에 최후 방어선이므로 매우 견고하게 건설했는데 당나라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할 때 고구려 군이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성문이 견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격군은 가능한 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성문이 스스로 열리도록 하는 계책을 사용했다.

둘째는 성문을 철통같이 막는 옹성(甕城)이다. 옹성은 성에 접근하는 적을 퇴치하기 위해 성벽을 이중으로 쌓는 것을 말한다. 성문의 안이나 밖에다 현지 지형에 맞게 여러 가지 특징과 모양으로 설치했다. 고이산성 남문의 경우 성문 밖을 반원형으로 감쌌으며 국내성은 ⊂형을 하고 있고 환도산성의 경우는 성안으로 네모나게 오므렸다.

셋째는 전투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치성(雉城)이다. 성벽을 직선으로 쌓으면 시각이 좁아 사각지대가 생기므로 성벽 바로 밑에서 접근하는 적을 놓칠 수 있고 공격할 때도 전면에서만 공격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쉽게 관측하는 등 전투력을 배양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을 치성(치(雉)라고도 함)이라고 한다. 백암성의 경우 5개의 치가 남아 있는데 그 크기는 6제곱미터로 56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어있다. 석대자산성은 치가 10개나 된다.

넷째로 적대(敵臺)가 있다. 이것은 성문 가까운 양쪽에 성벽과 같은 너비와 높이를 돌출시킨 망대(望臺)로 성문에 다가오는 적을 정면과 좌우에서 격퇴시키는 시설물이다. 치와 적대는 성 위에서 시계(視界)와 사계(射界)를 넓히고 화살의 발사 각도를 최소한 좁히게 한다.

다섯째는 각루(角樓)이다. 각루는 모서리를 지키는 시설로 성내의 전투를 지휘하는 보조지휘소 역할을 하며 성의 위엄을 나타내는 부수적인 역할도 한다.

여섯째는 암문(暗門)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다. 평상시에는 성벽과 같이 막아두었다가 필요시에 사용하는 것으로 암문으로 통하는 성벽 안에 군대의 비밀집결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공지가 있다. 이러한 암문과 달리 배수구로서의 수구문이 따로 있다.

일곱째로 여장(女檣)이 있는데 이것은 성벽 위에 설치한 사격대로 성벽위에 몸을 숨기거나 낮춘 후 접근하는 적을 사격하는 시설물로 상층부는 대개 요철(凹凸) 모양을 하고 있다. 환도산성이나 패왕조산성의 경우 여장 밑에는 100미터 간격으로 네모의 구멍이 있는데 위치와 크기로 보아 노포(弩砲)를 성벽 위에 설치하고 고정시키는데 쓴 것으로 추정한다.

여덟 번째로 풍부하고 완벽한 저수시설과 배수시설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고구려 산성의 특징이 높고 험악한 산 위에 건설된 것이지만 모두 물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위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폭우로 인해 물이 불어나도 배수가 잘 되어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저수지와 배수구를 유효 적절히 배치하였다. 오녀산성의 천지, 용담산성의 용담, 환도산성의 음마만(飮馬灣)이 그것들이다. 또한 대성산성에는 100여개의 못(우물)이 있었다. 환도산성에서도 2개가의 우물이 확인되었다.

마지막으로 성 안에는 이외에도 많은 시설을 갖추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전체를 지휘하는 내성(아성)과 점장대(성 안에서 안팎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가 있었다. 점장대는 성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구릉에 둔 망대로서 전투지휘소이다. 백암성의 경우 높게 쌓은 석축 안에 있어 후세에 봉수대(墩臺)로 활용되기도 했다. 봉수대는 주변과 연락하는 통신시설로서 성의 필수시설이다. 또한 성밖으로는 적군이 성벽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밖으로 도랑을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군사들이 장기간 머물 수 있는 병영엔 온돌을 만들고 곡식과 무기 창고도 곳곳에 설치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계속)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6)
<산성의 축조 방법>

고구려 산성은 중국과는 달리 매우 견고하게 쌓았기 때문에 현재도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신형식 박사와 서길수 박사의 글을 주로 참조한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기초 작업이다. 특히 고로봉식 산성은 성벽이 골짜기를 통과하는 등 지반이 나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우 인공지반을 구축하여 성벽의 안전도를 높였다. 지반이 약한 경우 토압이 3N/제곱미터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를 보통지반의 토압인 10~20N/제곱미터가 되도록 보강공사를 했다.

지반이 아주 약한 경우 성벽이 통과할 구간의 하단부의 지반을 완전히 들어내고 직경 약 30센티미터, 길이 5~6미터의 통나무를 1~1.5미터 간격으로 놓았다. 그 위에 다시 이보다 더 굵은, 직경이 약 50센티미터의 통나무를 마치 철길모양으로 약 4미터 간격으로 세로방향으로 놓았으며 그 위에 자갈과 모래, 흙을 넣고 다진 다음 돌로 성벽을 쌓아올렸으므로 축조에 공은 많이 들어가지만 성벽은 매우 견고했다.

높은 성벽 축조땐 굽도리로 계단식 기단부 축성

성벽의 기초 부분은 큰 돌로 밑받침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았다. 사용된 돌의 크기는 가로, 세로 20~60센티미터. 높이 15~40센티미터 정도이다. 성벽 축조는 위에서 아래까지 직선이나 약간 경사지게 하였고 성벽 하단 부는 굽도리 벽을 조성하여 경사지게 쌓았다. 이러한 굽도리를 조성한 계단식 기단부의 축성은 협곡이나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적용되었으며 백암성의 경우 높이가 4~6미터나 된다.

굽도리(원래 방 안 벽의 아랫도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성벽의 아랫도리. 북한에서는 축대라고 한다)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특수 공법을 도입했다.

박작성 입구, 천혜의 요충인 박작성을 기어코 함락시키지 못한 당태종은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① 기단은 큰 돌 : 맨 아래 기단은 큰 돌로 받쳤다. 땅을 파고 기초를 한 뒤 먼저 큰 돌을 한 두 층 쌓아 굽도리를 만들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쌓아 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백암성의 경우 기초 돌은 윗부분에 쌓은 돌보다 3배 이상 크다.

② 굽도리부분 들여쌓기 : 굽도리 부분은 들여쌓았는데(퇴물려쌓기) 이는 튼튼한 굽도리를 위한 공법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다. 특히 치성에서는 그 특징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③ 굽도리 부분 내쌓기 : 들여쌓기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들여서 쌓는 것에 반해 내쌓기는 성벽 밑에 굽도리를 마치 네모난 상자로 받쳐 놓은 것처럼 내쌓는 것을 말한다. 심양 근방에 있는 석대자산성의 치에서 이러한 축성법을 볼 수 있다.

④ 그랭이 공법 : 성벽을 쌓으면서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내지 않고, 쌓는 돌을 바위가 생긴 대로 쪼아내어 이빨을 맞추듯 완벽하게 접합시키는 것이 그레질이다. 태왕릉이나 장군총에서 볼 수 있는데 이 공법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정확하게 접합시키면 상하가 밀착되어 매우 안전한 것으로 고구려의 축성법에서 대표적인 것이다. 그랭이 공법에 대해서는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불국사 (2)」(국정브리핑, 2005.5.7)을 참조하기 바란다.

둘째는 완벽한 겉 쌓기와 속 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겉 쌓기란 돌로 성벽을 쌓을 때 바깥 면을 말하며 외면 쌓기(한 면만 겉 쌓기)와 양면 쌓기(양면 모두 겉 쌓기)를 한다. 겉 쌓기는 작고 잘 다음은 돌로 하므로 마치 메주를 쌓은 것처럼 가지런하고 빈틈이 없다. 특히 강냉이 알 같은 쐐기꼴 돌을 사용하는 것이 고구려 산성 축조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잘 다듬어진 쐐기꼴 돌을 머리가 큰 부분을 벽 바깥쪽에 놓으며 성벽의 경사에 따라 뒷부분의 두께를 조정한다.

백암성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백암성은 남쪽의 안시성 및 요동성과 함께 고구려 서북방 방어의 요충으로 남쪽 성벽은 수십 미터의 가파른 절벽으로 돼 있고 그 아래 유명한 태자하가 흐른다. 고구려 산성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겉 쌓기의 기본공법은 벽돌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로 ‘6합쌓기’를 했다. 6합이란 벽돌을 쌓는데 같은 줄 양 옆에 2개를 놓고 윗줄과 아랫줄 2개는 반씩 물리게 쌓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의 건물에서 이와 같은 방식을 채용하는데 이와 갚은 6합 쌓기는 밖으로 튀어나오는 치성과 체성을 이을 때 서로 엇갈려 물리기 때문에 잘 연결된다. 여기서 치성은 성이 밖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쐐기꼴 돌의 꼬리부분을 길게 하여 속에 있는 돌과 서로 꽉 맞물리게 하여 성벽 안에 속 쌓기를 한 돌도 큰 힘을 받도록 했다. 이렇게 쌓은 성벽은 비록 일부 성벽 돌이 자연히 뽑아지거나 성 밑에서 돌을 뽑아내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고구려의 축성 기술은 신라와 백제에도 도입했다. 백제와 신라는 처음에 거의 산봉식산성이었는데 백제의 경우 산봉식산성의 단점과 고로봉산성의 장점을 파악하고 이미 축조된 산봉식산성에 고구려의 고로봉식산성을 결합하여 이른바 ‘복합식 산성’을 건설했다.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의 사산성,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견지산성, 경기도 화성시의 당성 등이 그런 예이다. 신라의 경우도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고로봉식산성을 건설했는데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 경기도 여주군 파사성(매초성) 등이 그것들이다.

고구려의 성은 산성이 중심이었지만 평지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지성은 주로 도성체제상의 산성에 대응되는 평화시의 성곽과 책성(柵城)으로 되어 있다. 평지성의 경우 대체로 정상적인 평지에 있고 왕성으로 국내성과 안학궁이 있다. 대표적인 평지성으로 하고성은 오녀산성이 험준한 절벽에 있으므로 그 보완적 의미가 있다. 고구려 산성은 200여 개가 되므로 이곳에서는 일일이 상술하지 않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혈투기간에 가장 크게 활약한 천리장성과 압록강 하구의 산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한다.

천리장성 위치도, 요하 동편에 구축된 천리장성은 북으로 부여성(농안 일대)으로부터 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으로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했지만 연개소문이 처음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해 중요한 산성을 보완 개축한 것이다.
〈천리장성과 압록강 하구의 산성〉

요하 동편에 구축된 천리장성은 북으로 부여성(농안 일대)으로부터 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으로 당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했고 그 축성의 주역은 연개소문이었다.

신 형식 박사는 영류왕 때 연개소문이 처음으로 축성한 것이 아니라 그전부토 있던 중요 산성들을 보수, 개축하여 하나의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신성(무순의 고이산성-古爾山城)ㆍ요동성(요양)ㆍ백암성ㆍ안시성(해성의 영성자산성)ㆍ건안성ㆍ비사성(대련의 대흑산성) 등으로 이어지는 방어성이 곧 천리장성의 주축이 된다.

신성 · 백암성 · 요동성등 공동전선 구축

그러나 천리장성은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이 신성에서 비사성까지 하나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방어성이 신성ㆍ백암성ㆍ요동성ㆍ안시성ㆍ비사성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공동전선을 구축한 것으로 이들 산성은 각기 독자적인 상호연락망을 통해 방어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당(對唐)전선을 구성했다. 특히 안시성과 백암성은 남북에서 요동성을 보호했고, 건안성은 수륙양면의 요충이며, 비사성은 오호도에 건설된 당군의 군량기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등 수ㆍ당의 수륙양면 작전에 대응하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이들 산성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앞에서 산성의 축조 방법을 설명할 때 거론된 백암성이다.

백암성은 남쪽의 안시성 및 요동성과 함께 고구려 서북방 방어의 요충으로 산성 정상 부분에 4미터의 넓은 길이 나 있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백암성의 특징은 고구려 산성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는 북쪽의 성벽과 현재까지 남아있는 5개의 치(雉)의 존재이다. 남북과 동서의 길이가 6미터인 치가 북벽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 네모로 튼튼하게 쌓은 망대(봉수대)가 있고 그 주위에 장수들이 주둔했던 내성(內城)이 있다. 10미터가 넘는 치를 받치기 위해 밑 부분은 2~3미터 정도의 굽도리 기단을 계단식으로  쌓아 고구려의 산성 축조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북쪽 성벽 위의 자연 암석으로 보호되는 성내(內城) 안에는 점장대가 있다. 이 전방지휘소 아래 남쪽 성벽은 수십 미터의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유명한 태자하가 흐른다.

백암성은 요동 지방 최대의 산성이지만 성주인 손대음이 645년 당 태종에게 모반하여 고구려 군이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645년 전투 당시 이적은 서남쪽, 지금의 서문지 쪽으로 쳐들어왔고 당 태종은 서북쪽 즉 현재의 마을 북쪽 끝 부분으로 침입했다. 이는 동쪽(절벽)과 남쪽(태자하)으로는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암성이 손대음의 모반으로 손쉽게 무너졌다는 것은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 요충이 무너졌음을 뜻한다. 따라서 국가의 운명을 남쪽에 있는 안시성이 맡게 되자 고구려와 당나라가 안시성에서 혈투를 벌인 것이다.

여하튼 백암성을 비롯한 천리장성은 당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고구려인의 단결된 의지의 표현이자 중국에 대한 민족보존의 최후 보루였다. 물론 이를 위해 고구려인들이 쏟은 땀은 고구려인의 투철한 애국정신의 결집이라 볼 수 있지만 그 보존에 따른 경제적ㆍ군사적 모험으로 수도 방어의 허점이 노출되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허망하게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해안선은 정치ㆍ군사ㆍ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중국이 통일되어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이게 되자 요동반도가 양국의 운명을 건 군사적 충돌의 격전장이 되었다. 이 대결에서 영토를 수호해야하는 입장이었던 고구려는 곳곳에 방어체제를 구축했다.

백암성의 굽도리 들여쌓기(사진 서길수).
고구려 해양방어체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방위 성 연결선은 건안성에서 시작하여 비사성, 장산도, 해양도, 오고성, 석성 등 요동반도의 성들과 압록강변의 서안평성, 구련성, 박작성, 대행성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요동반도와 압록강 하구 및 대동강 하구의 전략지구는 황해북부와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압록강 하구로 서한만의 입구인 서안평성에 진출했다. 고구려 군은 태조왕 94년(146)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왔다. 이후 동천왕 때 손권의 오나라와 교섭한다. 당시 요동반도는 양국에 적대적인 공손씨가 장악하고 있으므로 손권의 사신들은 양자강 하구에서 출발하여 서안평성을 통해 수도인 국내성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권은 235년에 동천왕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고 의복과 보물을 보내어 고구려와 함께 요동을 치자고 제의했다. 서안평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과 가까우므로 수ㆍ당군의 침입을 방어하는 기지 역할을 한다. 압록강 강구는 폭이 좁으므로 적이 수로를 통해서 국내성까지 침입하기가 쉽지 않다. 강폭이 넓을 때는 강안에서 방어하기가 힘들지만 폭이 좁을 때는 충분히 강 양변에서 공격할 수 있고 강에다가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설치할 수도 있다. 학자들은 인근에 있는 박작성과 긴밀히 연관을 맺으면서 공동작전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박작성은 압록강구의 교통을 말할 때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성으로 호산진 호산촌에 있으며 현재는 그 자리에 명나라의 장성인 탑호산성이 세워져 있다.

박작성 1990년 발굴 대형 돌 건축 유적 발견

박작성은 199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석벽 500미터와 대형 돌 건축 유지가 발견되었다. 커다란 돌로 쌓은 우물도 발견되었는데 입구의 직경이 4.4미터, 우물 바닥은 지면으로부터 23여 미터, 우물의 깊이는 13미터였다.

우물 내부에서는 길이 3.7미터의 목선이 나왔는데 이것은 고구려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한 목선이다. 이외에 성 안에서 철촉ㆍ철창ㆍ철 도끼 등 무기류와 거울ㆍ낫ㆍ괭이 같은 농기구도 발견되었다. 박작성은 서진(西晉) 또는 그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필자가 2002년 현장을 방문했을 때는 이 고구려 성터에 세워진 명나라 성이 관광지로 개발되는 바람에 고구려 우물은 메워져 있었다.

<죽어서도 사는 고구려인>

고구려는 중국이 침공했을 때 흔히 산성전투와 청야작전으로 맞섰다. 이 때 중국 군에 허점이 보이면 그 유명한 개마무사와 경기병 등을 투입하여 침략군을 철저히 응징했다.

고구려의 이 같은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중국 동북방의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중국 세력에 직면하여 고구려는 한편으로는 경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으르렁거리며 지냈다.

중국이 타국에 비해 우월성을 보이는 것은 압도적으로 많은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數)이다. 물론 전쟁은 장병의 수만 많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의 역사에서 볼 때 대규모 인해전술과 물량작전을 펴서 실패한 경우는 퍽 드물다.

저승에서 사자를 위해 일할 우샵티, 이집트인들은 죽은 후에도 이승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반드시 저승에서 부릴 하인들을 함께 매장했다. 유명한 투탄카멘 묘에서는 우삽티와 샤웁티가 400개가 발견됐다.


하나 중국은 고구려를 상대해서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중국보다 우수한 장비를 부단히 공급할 수 있었고 산성전투와 청야전투 등을 활용하면서 공격군에게 치명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도 초창기에는 고구려에 장비가 다소 뒤졌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가면 서로의 장단점을 꿰뚫어보기 시작했다. 고구려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지』에도 자주 나온다.

이는 장수끼리의 일 대 일 대결에서 일부러 등을 보이며 도망가다가 몰래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재빨리 돌아서서 적을 쏘는 것인데 이를 타도계(拖刀計)라 한다. 상대가 바짝 뒤쫓아 와서 창으로 막 찌르려는 순간 뒤돌아서 활을 쏘는 것이다. 화살이 급소를 비켜 간다고 하더라도 화살을 피하려는 동작 때문에 말에서 떨어지기 십상이다. 뒤쫓아 오던 자가 자주 포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고구려가 중국의 물량작전에 강인하게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전술의 복합적 구사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또 하나의 중요 요인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의 평소의 삶과 정신세계이다.   

고구려의 유산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많은 무덤의 벽화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벽화는 기원전 27세기에서 11세기까지 그려진 이집트 고분벽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 만들어진 이탈리아의 폼페이 유적의 벽화, 기원후 4세기에서 7세기까지 만들어진 고구려의 벽화, 기원후 4세기에서 13세기까지 만들어진 중국의 돈황 벽화 등이다.

이 중에서 폼페이 벽화는 꽃과 과일나무, 새로 가득 찬 즐거운 정원 풍경, 연극 장면 등이 신화나 설화와 어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그림은 당대의 그리스ㆍ로마 예술의 영향을 받아 폼페이 시민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돋보이게 하는 목적으로 그려졌다.

돈황의 벽화는 실크로드를 지나는 상인들과 불교도들이 꿈꾸는 이상세계를 재현하면서 당시의 종교관과 동ㆍ서문화의 교류상을 담고 있다. 수많은 돈황의 석굴사원은 하나하나가 작은 미술관이라고 할 만큼 수많은 회화와 장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천장을 메운 장식이나 선인의 모습이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고구려와 서역의 폭넓은 교류를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들 벽화들과 고구려나 이집트의 고분벽화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이집트의 벽화에는 농사짓고 고기를 잡고 포도주를 만들고 빵을 굽는 등의 장면들이 있으며 머리를 깎고 면도하는 장면도 있다. 무용은 물론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실생활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고분의 벽화만으로도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상당히 넓게 파악할 수 있다.

안악 3호 고분의 물 긷는 아낙 모습, 무덤 주인공의 살던 집은 물론 고인이 실제 생활했던 모습을 그대로 벽화로 재현하여 죽어서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들 모두 매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자신의 작업에 충실히 임하는 모습이었다.

이집트인은 어느 민족보다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신이자 통치자인 파라오의 강력한 지배 하에 살았지만 이집트인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불행해 보이진 않는다.  

더욱이 3천2백 년의 긴 역사 동안 이집트인들은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며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인물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이집트는 평온한 생활을 영위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민족에 비하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별로 근심도 없었는데 그것은 이집트의 전력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이집트가 다른 나라보다 전력이 강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투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만큼 위험한 요소는 없다.  병사들의 전투 공포심, 탈영, 사기저하 등은 거의 모두 패배할 경우의 죽음 또는 노예로 끌려갈 경우의 고통 등에 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은 죽으면 오히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파라오를 위해 싸우다가 사망해도 걱정이 없었다. 파라오와 함께 내세에서 다시 태어나 영원히 살아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는 폼페이, 돈황, 이집트와 고구려 벽화들을 각각 현장에서 직접 보면서 폼페이와 돈황 벽화와는 달리 이집트 벽화의 그림 소재가 고구려 고분벽화의 그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고구려 벽화에도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베를 짜는 여인이나 부엌, 고깃간, 방앗간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사냥을 하는 장면, 무용하는 모습 등 무덤의 주인이 체험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이집트 고분 벽화는 쌍둥이」(국정브리핑, 2004.6.5)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통과 풍습은 물론 종교도 다르고 또 지역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벽화만을 놓고 볼 때 이집트와 고구려의 차이점은 별로 없었다. 무덤을 죽은 자의 집으로 여기고 죽은 후에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점은 두 사회의 공통점이었다. 고구려인들도 이집트인처럼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의 삶이 천상에서 이어진다고 믿었다.

고구려 내세에 무한한 믿음…벽화 내용 밝고 힘차

고구려인들이 이집트인들과 같이 내세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벽화의 내용이 매우 밝고 힘차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특히 고구려의 벽화에 사신과 도깨비 귀신, 하늘을 나는 신선과 용, 학, 봉황, 기린 등이 등장하지만 사악한 신이나 지옥의 풍경은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고구려인들은 내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므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다 설사 전투에서 죽는다하더라도 보다 좋은 영원의 세계로 간다고 생각하는 고구려인들에게는 전쟁도 살아가는 삶의 일종이었다. 고구려 군이 어느 나라 군보다 사기가 높고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고구려가 강성하게 된 내부 요인으로 신채호는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꼽았다. 선배제도의 창설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창설은 태조 때로 추정된다.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仙人)’, ‘선인(先人)’이라 쓴다. 해마다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사람을 모아 칼춤을 추고 활도 쏘며, 태껸도 하고 또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을 하는가 하면 노래하고 춤도 추었다.  이런 여러 가지 놀이와 내기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선배’라 일컫고 우대했는데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겼다.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 또는 ‘태대형’이라 일컫고 그 다음이 마리(대형), 맨 아래는 소형이라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전쟁터로 나갔고 승리하면 응당 보상이 있었으나 패하면 이들을 업신여겼으므로 선배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했다고 전한다.

당시 고구려의 신분제도는 철저한 골품제를 유지했으므로 미천한 사람이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선배에 소속된 사람들은 귀천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들이 국가적인 위기가 닥쳤을 때 똘똘 뭉쳐 환란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 가운데서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고 단재 신채호는 말했다. 유명한 온달장군, 연개소문 등도 선배 출신으로 추정한다. 04/8/30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