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1) | ||||||||||||||||||||||||||||||||||||||||||||||||||||||||||||||||||||||||||||||||||||||||||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갖는 것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되어 있는 광대한 지역을 한민족으로 구성된 강한 군대로 마음껏 뛰어다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현재의 중국의 수도 북경지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다는 사실은 한민족으로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이다. 그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멸망이 국가의 운명을 건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했다던가 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당나라와 전투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마자 그의 아들들 간에 권력싸움이 일어나 국가를 당나라에 바쳤다는데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곧바로 당나라와 결별하고 독자노선을 걸었다는 점을 크게 인정하더라도 아쉬움이 배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인들이 고구려의 멸망을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는가는 'EBS공사창립5주년특집 다큐멘터리' 설문조사의 ‘역사학자 100인이 말하는 우리 역사의 희노애락’의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참고적으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8ㆍ15광복,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6ㆍ10민주항쟁이며 가장 분노했던 순간은 5ㆍ18광주항쟁, 삼전도 치욕, 동학농민군 패배이다. 함석헌 선생의 “신라는 너무 값비싼 값을 주고 통일을 샀으나 그 통일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통일이었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는 한탄이 더욱 가슴에 닿는다. 그 기저에 깔린 아쉬움은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자 정복국가였기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낸 고구려> 진수(233〜279)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고구려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고, 평원과 호수는 없다. 산과 계곡을 따라 주거를 하고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으므로 비록 힘써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하다. 그들의 풍속은 음식을 절약하면서 궁전이나 주거지를 성대하기 짓기를 좋아한다. (중략) 그곳 사람들의 성정은 사납고 급하며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 (중략) 상제ㆍ안제 연간(106〜124)에 구려왕 궁(宮, 고구려 태조왕, 53〜146)이 자주 요동군을 공격했다. 궁이 죽자 아들 백고가 즉위한 후 순제와 환제 시대(126〜167)에 다시 요동군을 침범하고,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였으며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식을 빼앗았다.’ 진수는 위ㆍ촉ㆍ오 삼국이 대립하던 시대에 촉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촉은 진수의 나이 31세 때 위에 정복되었다. 그 위마저도 수년 후에는 진에게 멸망해 망국의 국민이 되었지만 삼국에 대한 정사를 편찬하면서 한국의 근간이 되는 한반도 주변의 국가들에 대해 많은 자료를 남겼다. 그러면서도 중국인 사가답게 중국을 괴롭힌 고구려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앞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수의 설명대로라면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배불리 먹기에도 부족한 고구려가 중국을 공격할 수 있었던 실력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중국을 공격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전력이 확보되어 있어야 하며 이들이 역습해 올 때 격퇴시킬 수 있는 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고대의 전쟁은 그야말로 영웅담으로 채워져 있기 일쑤다. 용감한 장수 한 명이 나서서 몰려오는 적병을 줄줄이 베어버리는 것은 물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발사되는 화살망을 뚫고 적장을 쫓아가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전에서 이런 식으로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용맹스럽고 유능한 장군들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거나 사기를 높일 수는 있지만 혼자서 수 만 명의 적병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 두 명의 영웅이 있어서가 아니라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과학이라는 틀에서 6회에 걸쳐 설명한다. 이 글은 최 태용, 황 원갑, 이 희진, 민 승기, 이 진수, 김 후, 임 용한 등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고구려는 정복국가> 한국의 과거사를 읽을 때마다 짜증이 난다고 말하는 한국인이 많다. 약소국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당, 몽골, 청나라 등에 국토가 유린당했고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까지 당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한국의 과거는 부끄러움의 역사라고까지 매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은 고구려의 역사만 읽어도 알 수 있다. 1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소국통합을 기본적으로 끝낸 후 왕성한 정복활동으로 고조선 옛 땅의 수복에 착수했다. 태조왕 53년(105)에 요동군, 현토군에 대한 일대 공세를 취했고 요동지방의 6개 현을 함락시켰다. 105년에 진행된 고구려군의 요동공격이 후한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가는 106년에 후한이 요동지방의 군현들을 대폭 개편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고구려의 공세는 마침 중국의 내ㆍ외부에서 일어난 복잡한 정세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1세기말부터 2세기 초에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북방기마민족 선비족의 침입 등으로 후한의 동북방면 주, 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또한 과중한 세금과 노역 등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는 등 내부에서의 혼란이 일어나 중국의 국력이 자동적으로 저하되었기 때문에 외부 세력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중국이 내부 사정으로 다소 혼란된 상황에 처해 있었다하더라도 고구려가 이 기회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도 저력임은 틀림없다.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피정복지 통치방식 중에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부른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경우가 그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 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당시 전쟁은 태조왕의 동생 수성(遂成, 차대왕)이 주로 전담했는데 그는 고구려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 땅의 넓이와 인구수가 한나라에 미치지 못하나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한은 평원광야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다.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피폐하게 한 뒤 이를 격멸하면 우리가 중국을 이길 수 있다.’ 차대왕의 이 말은 고구려가 중국을 멸망시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구려의 인물이 이렇게 호방한 말을 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할지 모르지만 차대왕은 결코 허세로 말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의 중국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어 118년에는 고구려군이 ‘예맥’의 군사들과 함께 한나라 현토군을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에 참을 수 없었던 후한의 안제(安帝)는 기원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군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에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때도 태조왕은 동생 수성을 보내 역습하게 했다. 수성은 기만 작전을 구사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즉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풍환과 요광의 군사를 묶어두고는, 비밀리에 잠입한 3,000명의 군사로 현도군과 요동군을 기습 공격해 성곽을 불사르고 2,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놀란 요동태수 채풍이 다급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웠지만, 고구려군의 예봉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했지만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漢)으로서는 치욕스러운 패배였고 고구려로서는 대(對) 중국 투쟁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승리였다. 2세기 말에도 후한은 격동의 시기로 대규모의 ‘황건족 반란’이 일어났고 선비족들이 끊임없이 공격해왔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속에서 현토군의 한 하급관리였던 공손도가 189년에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요동에 오자 자신의 출신과 경력이 미천하다는 것을 알고 업신여기는 토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요동, 요서, 산동 반도의 일부까지 통제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공손도는 자기 역량이 미약했던 초기에는 고구려와 협력하여 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 일대에 있는 ‘부산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때마침 고구려에서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왕위문제로 어수선해지자 과거의 은혜를 배신하고 고구려를 침공하다가 대패한다. 공손도가 대패하여 물러났지만 이들에게 배신을 당한 고구려는 그들의 재침을 방지하기 위해 198년에 연나부지역에 환도성(국내성)을 쌓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204년에 공손도가 죽고 그 아들 공손강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197년의 침공실패를 만회하려고 집권하자마자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나 또 다시 실패한다. 공손 씨의 세력이 고구려를 계속 압박하자 고구려는 서북지방의 주요길목과 그 부근의 성들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으며 산상왕 13년(209)에는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기기까지 한다. <중국 삼국(오, 초, 위)시대의 강자 고구려> 220년, 중국에서는 후한이 망하고 나관중의 『삼국지』로 유명한 위나라(220-265), 촉나라(촉한 221-263), 오나라(222-280)로 분리된다.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은 위나라와 오나라 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서기 237년에 자립하여 국호를 연이라고 했다. 이때 위나라의 왕은 조조의 아들 조비였다. 조비는 관구검을 유주자사로 임명하여 공손연을 공격케 했으나 쉽게 승부가 나지 않자 238년 제갈량의 숙적이자 위나라 최고의 전략가인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 세력을 멸망시켰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동천왕이 주부와 대가로 하여금 수천 명을 이끌고 사마의를 지원토록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위나라의 배신이었다. 연나라가 멸망하자 위나라는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까지도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동천왕은 이들의 배신을 응징하기 위해 239년부터 240년 사이에 요동군의 북부와 남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42년에는 요동군 서안평현에 다시 진격하여 현성을 함락시켰다. 서안평은 현재의 신의주 바로 건너편인 요녕성 단동현 구련성공사 첨고성(尖古城)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북한과 요동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지금도 이곳을 따라 심양과 장춘으로 연결되는 철도가 놓여 있을 정도로 중국에 있어 중요한 요충지이다. 중국의 길목을 점령당한 위나라는 곧바로 관구검으로 하여금 즉시 반격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서도록 했다. 이 당시에 현도태수 왕기와 선비족 계통으로 유명한 흉노계열의 오환의 병력도 합세했다. 이들에 대항하여 동천왕은 철기군(개마무사) 5,000명을 포함하여 20,000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이때 고구려로서는 천추의 한을 일으키는 대악수가 두어진다. 동천왕이 위군의 추격에만 급급하여 철기군 5,000명만 데리고 쫓아가다가 위군의 역습에 밀려 오히려 대패한 것이다. 원래 대오를 잃고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군대를 섬멸하는 것은 기병의 몫이지만 기병이 단독으로 보병진지에 정면으로 돌격한다면 상황이 어떻든 항상 위험해지는 것이 전투의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동천왕은 위군이 궤멸 직전이라 판단하고 기병만으로 추격에 앞장섰다가 위군의 역습을 받아 대패한 것이다. 이 부분은 후에 다시 설명한다. 고구려의 철기병은 구성 요원 자체가 고구려의 상층부 인원으로 고구려의 주력부대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이 패배는 고구려로서는 치명적이었다. 다행한 것은 관구검도 고구려를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철수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관구검은 다음해 10월 군사를 재정비하고 또 다시 공격해 왔다. 이때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점령되고 동천왕은 국가 지도부만 데리고 곧바로 함경도 산맥지역인 옥저로 피신하는 등 고구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승세를 잡은 관구검은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킬 기회라고 판단하고 현도태수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케 했다. 왕기의 추적은 집요하여 드디어 동천왕은 황초령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왕기의 한 부대에게 포착되었다. 공격을 받은 고구려군은 산산이 흩어졌는데 동부 출신 밀우가 결사대를 이끌고 추격군 속으로 돌격하여 적을 저지했다. 덕분에 동천왕은 고개를 넘어 도주할 수 있었다. 패잔병을 수습하여 진형을 갖춘 동천왕은 특공대를 보내 밀우를 구해오게 했는데 다행하게도 밀우는 부상을 입고 적진 속에 쓰러져 있다가 구출되었다. 동천왕이 결코 장병들을 헛되게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자 장병들의 사기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고구려의 유유가 계교를 냈다. 유유는 음식을 준비하여 적장을 찾아가 항복의사를 밝혔다. 적장은 유유의 항복을 진심으로 믿고 그를 맞이하자 유유는 음식을 꺼내면서 그릇 속에 감추었던 단검을 꺼내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지휘관을 잃은 현도군은 후퇴했고 동천왕은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왕기는 그 뒤에도 동천왕을 계속 추격했지만 숙신 땅의 경계(간도 지방으로 추정)에서 회군했다. 왕기가 철수하자 동천왕은 수도로 귀환했으나 고구려의 근거지인 국내성과 그 일대는 크게 파손된 상태였다. 새 근거지를 위해 동천왕은 평양을 개발ㆍ육성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위나라는 259년에도 울지해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케 했지만 고구려의 기병 5,000명에게 양맥골짜기에서 공격을 받아 8,000여 명이 살해되는 등 대패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위나라와 쫓고 쫓기는 혈투를 계속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동북 지역에서 중국과 대등한 제국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장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이들 기본 전력을 먼저 설명한다. ① 맥궁(각궁)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동 시대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활줄을 풀었을 때 만궁이 뒤집어져 휘는 각도가 활에 따라 다른데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도 가장 심하여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이런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활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들의 기술은 대단하여 우선 『진서(晉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돌로 만든 살촉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석자 다섯 치의 단궁과 한 자 몇 치쯤 되는 길이의 고시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 주(周) 무왕 때 그 고시와 석노를 바쳤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만 해도 다음과 같다. 〇 부여(夫餘) : 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 〇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의 다른 성이 작은 물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소수맥은 좋은 활을 생산했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란 것이 그것이다. 〇 읍루(挹婁) : 그곳 사람들은 활쏘기에 뛰어나 사람을 쏠 때에는 모두 눈을 적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적중되면 모두 죽는다. 〇 예(濊) : 낙랑의 단궁(檀弓)이라 불리는 활은 이 땅에서 생산 된다. 〇 진한(辰韓) : 진한은 국명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狐)라 부른다. 『진서(秦書)』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견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단궁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낙랑단궁은 맥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낙랑이라고 할 때의 낙랑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있던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물소뿔을 구하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활의 기본 재료로 사용한 것은 물소뿔을 활채의 안쪽에 붙여서 활을 당겼을 때 당시에 어떤 재료보다도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소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물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궁은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고 민 승기는 적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각궁을 만드는데 최소한 5년 이상이나 걸리는 등 제작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고구려에서 이들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한데다가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른데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꿰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뼈(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도 발견된다. 『전한서』〈흉노전〉에 따르면 선제(宣帝, 재위 기원전 74~49)는 흉노의 호한연 선우에게 ‘활 한 구와 화살 네 개’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후한 대에 와서도 이러한 관례는 지속되었다. 활과 화살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볼 때 두 국가 간의 의례적인 행사로 볼 수 있지만 흉노가 어떠한 방법으로든 한식궁을 도입했다면 고구려도 이들 활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특히 고구려가 한군(漢軍)과의 수많은 전투 과정에서 한식궁을 노획하여 이를 사용했음직도 하다. (계속) |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2) | ||||||||||||||||||||||||||||||||||||||||||||||||||||||||||||||||||||||||||||||||||||||||||
② 화살 고구려의 만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한데는 화살의 영향도 크다. 전쟁에서 화살은 소모품으로 대량으로 발사할 경우 적군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화살 100개 중에서 99개를 피한다고 해도 한 개가 몸에 맞으면 전투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화살의 궤도를 정확하게 유지하면서도 파괴력을 높이도록 화살의 용도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길이와 무게의 화살을 제작했다. 평양시에 있는 고산동 7호 무덤의 활촉은 도끼날식(끌날식)으로 불리는데 밑이 좁고 끝으로 가면서 점차로 벌어지고 그 끝의 날이 직선형태이다. 도끼날식 활촉의 두께는 끝이 예리하고 뿌리 부분의 무게는 12그램, 촉의 평면의 면적은 19제곱센티미터인데 이런 도끼날식 활촉은 고구려 초기무덤에서 많이 발견된다. 도끼날식 활촉 일반 화살의 2배 거리 날아 도끼날식 활촉의 장점은 평면이 거의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날아가므로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화살 뒤쪽에는 큰 날개가 달려 있으므로 이 화살은 앞뒤에 각각 날개를 갖고 있는 비행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현대 비행기에서 앞뒤에 날개를 갖고 있는 이른바 오리형 비행체와 유사한데 이런 구조는 앞뒤 날개에 각각 양력이 생기면서 원거리 비행이 가능하다. 실험에 의하면 일반 화살보다 2배 정도 더 멀리 날아간다. 물론 고구려가 도끼날식 활촉만 사용한 것은 아니다. 도끼날식은 상처를 크게 낼 수는 있지만 송곳과 같이 끝이 뾰족한 활촉에 비해 상처를 깊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명중률에서도 끝이 뾰족한 활촉보다 못하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가야의 화살촉 역시 끝이 넓적하거나 둘 혹은 셋으로 나누어진 화살촉을 사용했다. 이 화살촉은 화살이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현대의 총열에 강선을 넣어 총알이 회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적들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때 도끼날 식 활촉을 사용하고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좁은 활촉을 사용하였다고 추정한다.
화살 뒤쪽에 큰 날개를 다는 것은 화살은 구조상 날아가면서 자연적으로 회전하므로 이것을 더욱 빠르게 회전시키기 위해 깃을 사용하는 것이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국궁용 화살의 경우 왼손으로 활을 밀고 오른손으로 활줄을 당기는 우궁이 사용하는 화살과 오른손으로 활을 밀면서 왼손으로 줄을 당기는 좌궁이 사용하는 화살은 다르게 제작된다. 직선을 이루지 못하고 완만한 곡선을 이룰 수밖에 없는 화살깃을 부착할 때, 좌ㆍ우궁용 화살을 구분해 반대방향으로 붙인다. 화살을 만드는 장인들은 좌궁의 화살깃은 꿩의 오른쪽 날개 깃털을 사용하고, 우궁의 화살깃은 왼쪽 날개 깃털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무용총의 기사가 발사하는 화살에 큰 소리를 내는 명적(鳴鏑)도 보인다는 점이다. 명적은 형식상 두 종류로 나뉘는데 그 하나는 촉신 부분과 명향(鳴響) 부분으로 나뉘는 것으로 명적부의 크기는 3~4센티미터 폭 2센티미터 정도이다. 경산남도 양산 부부총과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된 것이 이 종류로 시베리아에서도 같은 류가 발견된다. 간단히 말해 명적은 화살촉 아래에 짐승 뼈나 뿔로 만든 조그만 화살통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날아갈 때 소리를 내는 화살로 향전도 있지만 명적이 향전과 다른 것은 명적의 끝에 화살촉이 달려있기 때문에 살상력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태조가 명적 쏘기를 좋아하여, 그의 아버지 환조 앞에서 명적으로 노루 일곱 마리를 연달아 쏘아 잡았다는 글이 있는데 이는 명적 끝에 화살촉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명적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므로 비교적 자세하게 다룬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지 10여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하였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기원전 209~174),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의 약어다. ‘탱리(撑犂)’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의 흉노의 왕을 뜻하며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임)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다음과 같은 화친의 골자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증가되었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그렇다).
묵특은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이다. 흉노의 선우 즉 묵특의 아버지는 두만(頭曼)이었다. 그런데 두만의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가 아들을 낳자 두만은 묵특을 폐하고 연지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두만은 묵특을 인질로 월지에 보냈고 곧바로 월지를 급습했다. 참고적으로 월지는 중국의 현 감숙성의 돈황에 있던 나라로 흉노에 쫓겨 간다라 지역에 정착하여 대월지국을 세운 후 간다라 예술을 탄생시켜 동아시아의 불교 예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예로 보면 서로 예를 갖춰 인질을 교환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이면 인질을 처형하는 것이 관례였다. 묵특은 아버지 두만의 기대와는 달리 월지에서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두만은 묵특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아들이 대범한 것을 알고 만인대(萬人隊)로 구성된 기병군단의 지휘권을 주었다. 여기에서 유명한 ‘명적(鳴鏑)’의 고사가 나타난다. 묵특은 명적 즉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을 만들고 부하들에게 철저하게 사격훈련을 시켰다. 그는 자신이 명적을 쏘면 다같이 그곳을 향해 쏘라고 명령하면서 화살을 쏘지 않는 사람들을 참형에 처했다. 훈련의 도를 점점 올려 자신의 명마, 애첩을 향해 명적을 쏘았는데 뒤따라서 화살을 쏘지 않는 장병들을 참형할 정도였다. 전투개시 의미한 소리나는 화살 그 후 부하들은 묵특이 명적을 쏘면 일사불란하게 화살을 쏘았다. 전쟁터에서 공격 명령을 내릴 때 명적을 한 발 공중으로 발사하는데 이 소리 나는 화살은 전투개시 신호를 의미하며 효시(嚆矢)는 이때부터 나온 말이다.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을 확신한 묵특은 아버지 두만이 수렵에 나갔을 때 명적을 아버지 두만을 향해 쏘았다. 묵특의 부하들이 따라서 두만이 있는 곳을 향해 화살을 쏘았고 두만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묵특은 곧바로 계모와 동생 등을 모조리 제거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묵특이 명적으로 부하들을 훈련시킨 이유는 여러 가지 복선이 깔려 있었다. 묵특은 명적을 쏘아 부친을 교묘하게 살해하고 정권을 찬탈했다는 ‘아버지 시해죄’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자신의 부하들 모두가 화살을 쏘게 하여 그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후 자신들의 공범자 즉 부하들과 하나로 연결하여 권력을 나누었다. 공범자인 부하들은 묵특의 예상대로 묵특과 누구보다도 밀착된 결속력을 가지고 주변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동호(東胡, 동호는 어떤 원어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추정)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가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 후 두 나라 사이에는 황무지로 1000여 리의 땅이 있는데 황무지이므로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는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가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되었는데 묵특은 자신의 치세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6)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이 당시 흉노의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할 만큼 대제국이다.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는 것은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 법종 교수가 고조선은 중국과는 춘추ㆍ전국시대 및 진ㆍ한(秦ㆍ漢) 교체기에 조선이란 존재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조우하며 특히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하여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한다고 적은 것도 이 부분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계속하여 연장선에서 한반도로 한(漢)이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적었는데 이것도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 (「북방 기마민족의 가야‧신라로 동천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70호, 2004)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김 상천 박사는 위에서 설명된 동호는 북부여를 뜻한다고 주장했고 서 영수 박사는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여하튼 명적은 무용총의 고분뿐만 아니라 약수리와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보인다. 학자들은 고구려에서 동물을 사냥할 때 명적을 사용한 것은 소리가 크게 나므로 동물들을 사냥하는데 오히려 적합하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유럽의 경우 몽골군의 침입 당시에 처음으로 명적을 접했기 때문에 명적의 날카로운 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이를 ‘악마의 화살(devil arrow)'이라고 불렀다. 명적쏘는 무인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 ③ 파르티안 기사법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서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법을 연습하는 그림이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말을 탄 4명의 무인, 평복 차림의 인물이 3명이 있고 표적은 5개이다. 그림의 오른 쪽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馬射戱)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 외에도 마장(馬場) 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에 ‘사희주기인(사희를 기록하는 것을 주재하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말 탄 무인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의 역할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선수는 4명이다. 2사람은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겨누고 있다. 나머지 2사람은 한 순을 돌아 나왔거나 아니면 준비 자세를 취하는 중이다. 과녁은 5개의 장대 위에 송판을 붙인 것 같은데 2개는 누가 쏘아 맞혔는지 두 동강이 난 채 땅위에 떨어져 있다. 이 그림에서도 과녁을 겨눈 채 말을 달려 나가는 왼쪽 무인은 완전한 형태의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하고 있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된 방법이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좌우간 이 기술 덕분에 기병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하는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했다고 여겨진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서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말 타는 솜씨가 수준급이상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병은 상대방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활쏘기 편하게 말 안장 안교 똑바로 세워 고구려가 승마를 생활해 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복식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 복식의 특징은 북방기마민족이 입던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이다. 호복은 양팔을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좁은 소매통의 웃옷인 습(褶)과 양다리를 민첩하게 활동할 수 있는 좁은 바지인 고(袴)로 구성되어 있어서 말 타고 사냥하는데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들 고구려 복식은 평상시에 입으면 평상복이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투복이 된다. 또 말 위에서 의복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띠를 매었는데 그 띠에는 금구를 달았다. 신발도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는 등 모든 것이 승마에 적합한 복장이다. 말에 얹은 안장은 서양식처럼 안교가 낮고 평면적이며 여유 있게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뒤의 안교가 똑바로 세워져 있어 입체적이며 앉기에는 좁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될 수 있는 한 신체를 말의 탄성으로부터 피하게 하여 상하의 진동을 적게 하고 표적을 쏘아 맞추기 위해 말 등으로부터 허리를 띄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채택한 방법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데 능하다’고 적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에도 적혀 있다. 온달도 평강공주가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했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말을 사육하는 실제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생활화했음을 알 수 있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백제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기마수렵인물상과 경주 사정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문양전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백제금동향로의 수렵인물상은 백제의 수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며 또한 일본 정창원 소장의 은제선조수렵문과 연관해서 일본 문화에 미친 백제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는 설명이다. 이와 같은 기사법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는데 히도미의 『한객수구록』에는 1681~1684년 사이에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절단과의 수담(手談)이 적혀있다. “비장 정태석, 형서정 홍금의 전복을 입고 말을 달린다. 안장에서 일어나고 혹은 물구나무서며 안장을 붙들고 땅에 닿을 듯 매달리며, 혹은 누어서 말을 힘차게 몬다. 말을 몰며 서로 웨치는데 그 소리가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꾸짖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말을 달리면서 웨치는 소리는 웃는 것인가, 꾸짖는 것인가?’ 물으니 ‘이것은 포효니 기(氣)를 돋구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당시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따라간 무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마상재(馬上材)의 시범을 보여준 것이다. 18세기에 이세정장이 쓴 『정장잡기』에서는 “마장(馬長)이 처음부터 끝까지 웨치듯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쏜다”고 했으며 이런 일이 일본의 고대는 없었다고 했다. (계속) |
사상 최강의 고구려, 이유 있다(3) | ||||||||||||||||||||||||||||||||||||||||||||||||||||||||||||||||||||||||||||||||||||||||||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전쟁을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을 이와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과 사람 모두가 갑옷으로 중무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개마무사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힘 개마무사(鎧馬武士)」, 국정브리핑, 2004.3.15)을 참조하기 바란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槊)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단원은 임 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대열 지어 장병들 심리적인 안정 유도 그러므로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 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로마군이 주변국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밀집대형으로 군 체제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보병의 대형이 허물어진다면 승패는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대열을 만들 때의 또 다른 장점은 대열에 묶여 있는 병사들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열 중에 있는 병사가 도망가려면 주변 전우들의 행동과 반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열에서 한 두 명이 이탈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곧바로 명령불복종이나 탈영자 등으로 낙인을 찍혀 현장에서 곧바로 처형되기 일쑤다. 지휘관들이 탈영자들이 생길 경우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본보기로 처단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보병의 중요성은 보병 개개인은 전투력과 기동력에서 기병보다 떨어지지만 산악지형에 취약한 기병과는 달리 어떤 지형에서든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보병은 기병과 달리 무장과 무기의 종류가 다양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보병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될 수 있기 때문으로 일반적으로 경보병과 중장보병으로 분류한다. 경보병대의 주력은 도끼를 맨 도부수이다. 도끼는 내려치는 힘이 매우 강해 투구를 쪼개고 갑옷을 찢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갑옷은 창과 화살같이 찌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베거나 도끼와 같은 강한 충격을 동반한 공격에는 취약하다. 반면에 중장보병은 기병과 같이 갑옷을 입고 창과 길쭉한 방패를 들었다. 이들이 최정예군으로 경보병처럼 밀집대형을 이루며 보병대열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이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창은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임용한 박사는 적었다. 보병이 중장기병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기병은 말이라는 동물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말은 장애물을 싫어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는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말은 아무리 기수가 명령을 해도 자신을 겨누고 있는 창날이나 장애물 앞으로 무모하게 돌격하지 않는다. 또한 말은 일반적으로 자신에 의해 인명이 살상될 경우 전진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 「간디」에서 인도의 무저항시민들이 영국의 기병이 돌격하자 말들은 절대로 사람을 밟고 넘어가지 않는다며 대형을 흐트러뜨리지 말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말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력한 개마무사들이 돌진하면서 적진을 돌파하려해도 수비군이 밀집중장병대로 구성되어 개마무사의 공격에 대항한다면 기병의 특성상 오히려 개마무사가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대 전투에서 보병이 기병을 격파하는 경우가 자주 생기는 이유이다. 더구나 지형에 따라서는 기병의 활약이 크게 제한되므로 오히려 보병이 전투를 주도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개마무사의 이런 약점을 경기병이라는 또 다른 기병을 투입하여 보완했다. <경비병의 활약> 보병과 중장기병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경기병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은 고대 전투에서 현대의 고사포를 발사하는 역할의 궁수가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궁수는 보병과 기병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보병과 기병은 양 군이 접근하기 전까지는 적에게 아무런 타격도 가하지 못한다. 반면에 궁수는 적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화살을 발사하여 공격할 수 있다. 즉 궁수는 보병과 기병만으로 구성된 적의 부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궁수는 공격 때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갖는다. 고구려 군이 원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전열에 서거나 또는 중장보병의 엄호를 받으면서 사격하고 고구려 군이 접근하면 이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영화에서 보병이나 기병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자주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실상 개마무사의 약점은 개마의 무게 때문에 밀집대형을 이루면서 천천히 진격해야 한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중국은 이러한 개마무사의 약점을 파악하고 밀집한 궁수들로 하여금 무차별로 화살을 발사토록 했다. 간단하게 말하여 개마무사들은 진군속도가 느리므로 반드시 집중 공격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궁수들이 발사하는 집중 화망을 뚫고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마무사가 태어난 것도 기병의 약점 때문이다. 기병은 사람보다 훨씬 체구가 큰 말을 동반해야 하므로 화살의 집중 화망을 뚫을 때 말이 사람보다 화살을 더 많이 받게 된다. 군마의 부상은 기병에 치명상을 주므로 고구려가 개마로 말의 외부를 감싸도록 하여 부상을 방지토록 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많은 궁수를 동원하더라도 활의 공격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개마무사의 장점이다. 개마의 효용성은 궁수가 쏜 화살이 갑옷을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미터이고 절대 살상거리는 30미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일단 화살의 유효 살상 거리 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의 화망을 뚫기만 하면 궁수들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궁수들이 개마무사들에게 집중하여 화살로 공격하더라도 한두 번밖에 화살을 발사할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다. 더구나 기병은 5미터나 되는 창을 갖고 있으므로 궁수나 보병과의 간격이 20〜30미터 거리로 좁혀지면 기병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개마무사가 화살을 피하는 순간 이미 궁수에게 다가와 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중국군도 이런 상황을 예측하여 또 다른 방비책을 준비했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이지만 화살망을 뚫고 중장기병이 공격해 오면 20〜30미터 정도의 저지선에 각종 장애물을 설치하여 함정에 빠지도록 한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의 중장갑기병이 돌진하자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순간에 기다란 목창을 들어 중장갑기병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도 중장갑기병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대비했기 때문이다. 진격 저지되면 곧바로 보병 · 기병이 나서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중장기병의 경우 장갑력은 강하지만 보병에 비해 대형이 쉽게 허물어진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진격이 저지되면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나 준비된 기병들이 역으로 공격에 나선다. 중장기병이 육박전에 휘말리게 되면 오히려 패배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개마무사에 대한 중국의 대비책을 무산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경기병 제도를 도입했다. 경기병은 대체로 중무장하지 않고 말의 기동력과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하는 임무를 갖는다. 물론 이들이 연합하더라도 보병 밀집 대형의 중앙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 또는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경기병대는 주로 맥궁으로 무장한 후 적군의 궁수와 보병을 상대로 활을 발사하여 적진을 혼란에 빠지도록 하는 임무를 갖는다. 맥궁의 사정거리가 중국활보다 긴 것은 물론 파르티안 기사법으로 무장했으므로 어느 장소에서건 재빠르게 화살을 발사하고 빠지는데 적격이다. 전투력이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경기병대가 공격해오면 이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다 체력을 소모해야 하므로 대형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만약 적진이 완강하여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경기병대는 무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이럴 때 고의적으로 후퇴하는 위장술을 겸용하기도 하며 상황에 따라 집요하게 계속적으로 공격하여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가랑비에 옷이 젖고 집요한 매에 당해 낼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수비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면서 약점을 보이면 준비된 개마무사가 출동하여 승부를 결정짓는다.
시대는 약간 후대이지만 이들 전술은 칭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사용한 방법과 유사할 것으로 추정한다. 김상운의 글에서 주로 인용한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칭기스칸은 1223년, 제베와 수베데이로 하여금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를 공략하도록 했다. 몽골군은 2만 명, 러시아군은 8만 명, 이 당시 러시아군들은 갑옷과 투구로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다(중세시대 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갑병을 뜻함). 몽골군은 러시아군과 교전하다가 힘이 부치듯 이내 달아나기 시작했고 잡힐 듯하면 달아나고 잡힐 듯하면 달아나고, 무려 일주일간 달아나기만 했다. 러시아군의 추격 작전은 계속되고 행렬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고 장병과 말이 지칠대로 지쳤다. 갑자기 몽골군이 일제히 멈추더니 모두 새로운 말로 갈아탔다. 공격의 선봉에는 경기마대가 전투대형을 갖춘 일급 궁수들이었다. 이들은 일제히 활을 쏘며 길게 늘어진 러시아군 대열을 휘젓고 돌아다녔고 러시아 진영은 눈깜짝할 사이에 흐트러졌다. 그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경기병대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중무장한 중기마대가 나타났다. 중기마대는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과는 달리 쇠미늘 갑옷에 흉갑을 두르고 전투용 도끼와 활 2개를 갖고 다녔다. 3.6미터에 달하는 긴 창을 마치 장난감을 갖고 놀듯 자유자재로 내질렀다. 러시아군 선봉대가 무너지자 잠시 사라졌던 경기마대가 다시 나타나 러시아군 본진에 비 오듯 화살을 쏘았다. 러시아군이 우왕좌왕 아수라장으로 변하자 경기마대는 다시 중기마대에 전투를 넘기고 러시아군 후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퇴로마저 차단당한 러시아군은 추풍낙엽으로 몽고군의 창칼에 맥없이 쓰러져 갔다.’ 몽골군과 고구려군의 전투가 다소 다르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북방기마민족의 전투방법을 잘 예시해주고 있다. 군의 체계따라 중장기병 · 경기병대 숫자 조정 위에서 설명된 것과 같이 중장기병대와 경기병대는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출동해야만 전투 효과가 배가되므로 군의 체계에 따라 중장기병과 경기병대 숫자를 조정했다. 고구려보다 후대이기는 하지만 금나라는 아예 기병대 자체를 20명의 중장기병과 30명의 활로 무장한 경기병으로 섞어 편제했다. 고구려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를 운용했을 것으로 임용한 박사는 추정했다. 중장기병대는 다른 병종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선발된다. 말과 갑옷이 매우 비싼 장비였고 기마술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랜 훈련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니면 중장기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군마는 소처럼 여물을 먹이지 않고 반드시 생초나 곡물을 먹여야 한다. 더구나 기마술을 익히려면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중장기병은 전쟁에 나갈 때에도 종자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마무사의 장점은 철이지만 철의 약점은 녹이 잘 쓰므로 갑옷을 매일 닦아주고 기름 치고 조여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중장기병대는 보병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보병과 기병의 비율은 3 대 1 정도이며 또한 중장기병을 전체 기병의 40퍼센트(금나라를 계상) 정도로 설정한다면 전체 병력의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여하튼 고구려는 기병과 보병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고구려가 연전연승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무모하게 개마무사 등 최정예 부대들을 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가 당대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력부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할 만큼 최첨단 군수품으로 무장했고 적절한 작전을 구사하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장병들의 전투력 즉 사기가 높았다는 것을 뜻한다. 참고적으로 개마무사는 고구려만 운용했던 것은 아니다. 부산 복천동 10호분에서 벽화에 표현된 말 얼굴 가리개인 마주가 발견됐다. 말의 몸 전체를 보호하는 찰갑형 마갑도 경남 함안 도항리 마갑총에서 부위에 따라 크기가 다른 찰갑으로 겹겹이 쌓인 채 발견되었다. 가야도 고구려와 유사한 철기군을 운영했음을 보여준다고 이 태호 교수는 적었다. (계속) 04/8/5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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