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64)유네스코 등록 '조선왕조실록'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06
유네스코 등록, 조선왕조실록(1)
태조∼철종 25대 472년간 기록…왕도 열람금지 비밀보장 철저
<세계에 유래가 없는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이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03)의 역사 즉 172,000여 일을 연ㆍ월ㆍ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며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반면에 26대 고종과 마지막 국왕 27대 순종의 실록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 진데다가 조선왕조실록처럼 엄격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사관(史官)은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원래 사관은 중국의 전설시대인 황제 때부터 있었으며 공갑ㆍ창힐ㆍ저성 등이 사관이었다고 하나 이들의 실존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은(상)나라와 주나라 이래로 태사ㆍ소사ㆍ내사ㆍ외사ㆍ좌사ㆍ우사ㆍ여사 등 여러 이름으로 다양한 사관들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사기에 고구려 영양왕 시대 '유기(留記)', 백제 근초고왕 시대 '서기(書記)', 신라 진흥왕 시대 '국사(國史)' 등의 사서가 편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어떠한 형태로든 사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본격적인 역사 편찬의 주무부서인 춘추관(史館)은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춘추관은 고려 초기 광종 시대에 비로소 설치되었다. 송나라 제도를 적용시켜 운영했지만 무신시대를 거치면서 기사의 내용이 정치권의 영향을 받아 다소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사관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사관은 전임사관과 겸임사관이 있었다. 전자는 예문관의 전임관으로 춘추관의 기사관을 겸임하였던 봉교(정7품 2명), 대교(정8품 2명), 검열(정9품 4명) 등 8명이 있었으며, 후자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소속되어 본직을 수행하면서 춘추관의 직책을 겸임했다(대체로 60여명).

조선왕조실록.


실록은 왕이 죽은 직후에 편찬된다. 그런데 왕이 죽은 직후에 실록을 편찬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왕은 비록 죽었어도 그를 모신 신하들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반정과 같은 사건이 생길 경우에는 선왕에 반대하는 측들이 권력을 쥐고 있으므로 공정성이 결여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므로 〈태조실록〉을 편찬할 때 실록의 편찬시기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태종 8년(1408) 태조가 사망하자, 태종은 이듬해 영춘추관사 하륜에게 〈태조실록〉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사관들은 태조 시대의 신하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올바르게 편찬할 수 없으니 3대 후에 편찬하는 것이 옳다고 건의했다. 태종은 이 문제를 논의에 붙였다.

사관들은 당대 역사를 당대인이 편찬하는 것은 필화의 우려가 있으므로 불가하다고 자신들의 주장을 견지했다. 즉 태조로부터 태종까지 3대이기는 하나 겨우 18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편찬관 중에는 자신과 관련된 일이 있을 수 있으므로 동시대인이 동시대의 인물을 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태종 때 하륜은 왕 사후 곧바로 편찬 주장

이에 반해 하륜은 사관이 당시의 사실을 모두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며, 원로대신들이 살아 있을 때 편찬해야 본말을 기록할 수 있다며 왕의 사후에 곧바로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종은 두 견해에 대해 하륜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때부터 왕의 사후에 실록을 편찬하는 선례가 만들어져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편찬되는 원칙이 이어졌다.

여하튼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 후에 실록청 또는 찬수청, 일기청에서 담당하였는데 보통 실록청의 총재관은 재상이 맡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했다.

세종대왕,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로 끝내 실록을 보지 못한 일화는 후대의 왕들이 실록을 보지 못하게 하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보관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소실되기도 하여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 초까지 강화도의 정족산,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강원도 무주의 적상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해졌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역대의 실록(實錄)을 보관하던 창고를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없어지자, 고종은 1227년(고종14)에 『명종실록』을 완성하여 개경의 사관(史館)과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하였다. 1270년(원종 11) 강화도에서 환도한 뒤에는 일시 불당고(佛堂庫)에 실록을 보관하다가, 1274년 9월에는 중서성(中書省)에 사관을 두고 실록을 이장(移藏)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의 사간(春秋館의 별칭)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여 <태종실록>을 편찬할 때까지 한양에 내사고(內史庫), 외사고(外史庫)로는 충주사고(忠州史庫)를 두었다. 세종 21년(1439)에 경상도 성주(星州)와 전라도 전주(全州)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함으로써 내사고인 춘추관실록각(春秋館實錄閣)과 외사고인 충주ㆍ전주ㆍ성주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가 운영되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춘추관ㆍ충주ㆍ성주사고가 불타고 전주사고본만 병화를 면했다. 전주사고본실록은 정읍(井邑)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묘향산 보현사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겨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영변객사(寧邊容含)로 옮겼고, 다시 1603년 등서(謄書)를 위해 강화도로 옮겼다. 1606년 재인(再印)되어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ㆍ묘향산ㆍ태백산ㆍ오대산의 5사고에 보관되었다.

춘추관사고는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ㆍ병자호란 때 불타 없어지거나 산실(散失)되었고, 4사고만 일제 강점기까지 내려오다가 오대산사고본은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겨졌으나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인조 11년(1633)에 마련된 적상산사고본은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되어 구황실장서각에 보관돼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정족산 사고와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했다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본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1973년에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 의해 『훈민정음』(국보 70호)과 더불어 세계기록유산에 선정되었다.

세계유산이란 세계적으로 중요하고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후손에게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는 유산으로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재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계유산이 선정될 초기에는 자연이나 유적 등만 선정하였으므로 전통 민속이나 기록 문화재는 선정 대상에서 제외했다.

'인조무인사초'의 원본인 가장사초, 가장사초는 사관이 작성하여 집안에 보관했다. 가장사초에는 당대 정치 현안과 고위관료, 국왕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담겨있는 것이 통례였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이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인류의 역사와 문화 발전에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지정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유산으로는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 『승정원일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의 선정 기준은 한 국가의 역사나 문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사와 세계 문화의 주요 사항을 기록했거나, 문화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완성도가 탁월한 기록물을 의미하는데 『조선왕조실록』등 4개의 기록물이 이런 기준에 통과한 것이다.

<조선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다>

원래 ‘실록(實錄)’이란 명칭은 어떤 특정한 역사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한자어 뜻을 그대로 풀면 ‘사실을(정확하게) 기록한 (책)’이다. 대체로 실록이란 왕의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사실을 국가에서 주도하여 편년체로 편찬한 이른바 관찬 역사를 뜻한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역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있었다. 고려의 실록들이 조선 초까지도 전해서 고려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는 기본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실록은 정사를 편찬한 후에 모두 소각하는 관례에 따라 소각되어 불행하게도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고 윤용인 박사는 적었다.

여하튼 『조선왕조실록』은 내용과 기재 방법이 엄밀하게 정해져 있었다. 반드시 기재해야 하는 내용은 대부분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왕의 공식일정, 국가의 공식행사, 주요 정치적 사건, 고위 관료의 인사, 천재지변 등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히 정치적 사실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다양한 학문 분양의 내용과 사회 현상도 담겨있다.

창덕궁 비원 속의 주합루, 정조는 탕평정책 추진의 중추기구로 이층 다락집인 주합루(2층)와 규장각(1층)을 건축했다. 규장각은 원래 숙종 연간에 종부시에 지은 왕실 관련 서책을 보관하던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가 이를 키워 왕립도서관으로 사용했다(사진 ssmin4).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총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로 간주하는 이유이다.

『조선왕조실록』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정부 기관에서 보고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일성록』, 『비변사등록』, 조보(朝報)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민간에 떠도는 구전 등이다.

그러나 실록을 편찬할 때 가장 골격을 이루는 자료는 사초였다. 사초는 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고 실록은 사초를 토대로 편찬했다.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처리한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한 것이다. 왕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관 2명이 따라다녔다. 사관 한 명은 왕과 신하 간에 오간 대화와 토론을 기록하고 또 다른 한 명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표정까지 기록했다.

가장사초 제일중요…제출 못하면 자손금고·벌금도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사초이다. 가장사초는 비밀사항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로 사관이 집에 보관했다가 실록청이 열리면 그 때 제출했다. 가장사초는 사관의 역사의식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자료로 일정 기간에 제출하지 아니한 자에게는 자손을 금고하고 은 20냥을 벌금으로 물게 하는 법까지 세워 모든 자료를 필히 제출케 했다.

실록 편찬은 세 단계로 나뉘어 졌다. 각종 자료 가운데서 중요한 사실을 초출하여 초초를 작성하는 것이 첫째 단계이고 둘째 단계는 초초 가운데 빠진 사실을 추가하고 불필요한 내용을 삭제하는 동시에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여 중초를 작성하는 것이며, 셋째 단계는 총재관 등이 중초의 잘못을 재수정하는 동시에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정초를 작성하는 것이다.

진주의 문충공 하륜 묘, 하륜은 원로대신들이 살아 있을 때 실록을 편찬해야 본말을 기록할 수 있으므로 왕의 사후에 곧바로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www.coreaking.com).
왕에게도 열람을 금지했기 때문에 왕의 실정과 비정까지 낱낱이 기록할 수 있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 개인이 직필한 사료로써 가장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여 각종 사화(士禍)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사초는 주로 예문관원으로서 사관인자가 쓴 개인 기록의 가장사초(家藏史草)를 말하나 승정원의 주서가 쓴 사초도 있다. 예문관 사관은 매일의 기사를 시정기에 적은 다음 인군의 선악, 신하들의 선악 시비를 비판하는 자신의 의견을 ‘사신왈’이라고 시작하여 익명으로 적는다.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예종은 세조의 왕위찬탈의 주역들을 실록청에 임명하고 사초를 쓴 사관의 이름을 기입하게 하여 왕위찬탈에 대한 악평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계략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큰 의미는 왕이 자신의 언행이 낱낱이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권력을 행사해야 했다는 것이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기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왕에게 큰 압력을 줄 수 있었다. 어느 역사서보다 실록은 왕권을 제약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에 실록은 단지 역사기록으로서만 의의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실록 편찬 자체로 현실 정치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실록이 숱한 정변의 원인이 되었다.

<세종의 고집을 꺾은 신하>

오늘날도 공개되어도 좋은 기일을 정하여 공개하는 국가 기밀문서가 있다. 기밀의 중요성에 따라 몇 십 년이 지나야 공개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기밀문서가 공개되어도 별다른 파장이 없을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개하는 것이다.

실록도 유사하다. 실록을 비밀리에 보관하고 열람을 금지시킨 것은 실록이 공개되면 파장이 일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 사람이 당대 실록을 열람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제군주제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기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세계의 중심지요 역사를 철저하게 기록한다는 중국의 경우, 황제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실록을 보는 일이 많았다. 자신이 적은 기록에 의해 후환이 두려운 사관은 황제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기록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직필이 아니라 곡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명실록』은 2,964권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글자 수는 총 1,600만 자에 불과했다. 기록이 불실했기 때문이다.

조선 초에도 이런 사실이 일어났다. 이 단원은 국사편찬위원회, 이성무, 윤용인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다.  

춘양면 석현리 각화산 중턱에 위치한 태백산 사고지(사진 이성원).


사초는 치세 중인 국왕에 대한 당대 기록이고 실록은 국왕이 죽은 후에 편찬되는 역사서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이 조선을 건국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은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이었지만 쿠데타로 조선을 건국했으므로 사관들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태조 4년(1395년) 당태종의 고사를 들어 국왕도 사초를 볼 수 있다면서 즉위 이후의 사초를 모두 제출하라고 명했다. 국왕이 사초를 보면 직필이 불가능하다면서 대신들이 반대하자 왕은 일단 이를 수용했지만 3년 후 다시 사초를 보겠다고 고집하면서 기어이 사초를 제출케 했다.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조가 사초를 굳이 보자고 한 것은 자신이 집권하기 전 고려 말의 상황이 사초에 어떻게 기록되었는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태조는 자신의 즉위과정에서 국왕과 신하가 몰래 나눈 대화를 사관이 제대로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사초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는 제출된 사초의 상당 부분을 수정케 했다. 이성계를 미화시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것이다. 태종도 〈태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 사관들에게 또 사초를 고치도록 했다. 태종도 개국 당시의 기밀은 자신만이 알고 있음으로 사관이 쓴 사초는 부정확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결국 『조선왕조실록』의 중요성과 의의를 실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세종 '실록열람 반대' 맹사성 건의 수용


세종은 당대 기록인 사초는 보려고 하지 않았으나 선대의 실록만은 보고자 했다. 실제로 〈태조실록〉을 열람한 후 세종 13년(1431) 자신의 아버지인 〈태종실록〉이 완성되자 ‘전대의 제왕들 중에 선대의 기록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면서 〈태종실록〉을 보려고 했다. 이때 맹사성이 국왕이 실록을 본다면 사관들이 두려워 직필하지 못한다며 세종의 실록 열람을 반대했다. 세종은 그의 건의를 수용했다.

그러나 세종은 1438년 또 다시 실록을 보자고 했다. 세종은 자신이 이미 〈태조실록〉은 보았는데 〈태종실록〉은 왜 볼 수 없느냐고 반문했다. 당대의 역사인 사초를 보는 것은 안 되지만 선대 실록을 보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논법도 제시했다. 이번에는 황희와 신개가 세종의 실록 열람을 반대했다. 그들은 ‘선대의 실록은 비록 당대는 아니나 편수한 신하들이 모두 살아있다. 만약 왕이 실록을 본다면 이들의 마음이 편치 못할 것이다’라고 반대했다.

세종은 이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태종실록〉을 보지 못했다. 세종이 몇 차례에 걸쳐 실록을 보려고 했음에도 끝내 신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일화는 조선 왕조에서 중요한 전례로 작용했다. 이후 왕이 실록 열람을 요청하면 신하들은 세종의 예를 들어 국왕의 실록 열람을 견제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작성자의 성명을 기입하는 사초실명제 때문이다. 작성자가 분명하게 노출되는 상황에서 사관이 소신껏 사초를 작성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록의 권위와 공정성을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사초실명제의 폐단이 논의되었지만 그때마다 대신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당시 사관들의 직급은 매우 낮았지만 자신들보다 직급이 높은 대신들일지라도 불의와 정도를 걷지 않는다고 생각할 경우 소신껏 비판했다. 대신들은 항상 자신에 대한 내용이 사관들에 의해서 어떻게 적혀질지를 우려했으므로 사초실명제는 사관들에게 압력을 주는 좋은 장치였다. 그러므로 대신들은 사관들이 주관적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면서 사초실명제를 옹호했다. (계속)

유네스코 등록 '조선왕조실록'(2)
연산군때 '사림파 피의숙청'으로 사관 시련 절정
사초 삭제하거나 내용 수정하면 참형

사초실명제에 대한 필화사건은 사관의 직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잘 보여준다. 예종1년(1469년)〈세조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을 설치하자 세조대에 사관을 역임한 민수도 관례대로 자신의 사초를 제출했다. 그런데 민수는 자신이 비판한 양성지가 실록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실록청 기사관 강치성을 찾아가 실록청에 제출한 자신의 사초를 몰래 꺼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제출한 사초를 다시 꺼내는 것이 불법이지만 민수를 동정한 강치성은 사초를 꺼내 주었고 민수는 문제가 될 만한 항목을 고친 후 다시 제출했다.

문제는 두 사람의 비밀행동이 실록청의 다른 관리들에게 알려졌다는 점이다. 당시 사초수정은 물론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관리는 극형을 받게 되었음으로 이를 우려한 다른 관리가 이들의 불법사실을 밀고했다. 민수가 사초에서 고친 것은 모두 세조대의 대신들의 비리를 비판한 것으로 특히 실록청의 책임자로 부임한 양성지에 대해서였다. 그는 양성지가 대사헌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옥사가 있어 사헌부 관리가 전원 좌천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사헌부의 최고책임자인 양성지가 책임지고 물러나지 않은 사실을 비판했지만 이 사실이 양성지에게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서 그에 대한 기록을 삭제했다. 원숙강도 권람이 큰 저택을 지은 사실을 비판했다가 나중에 이를 삭제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민수 상관비판기록 공개 두려워 사초 고쳐

세종대왕실록.
예종은 원숙강을 문초했다. 문초과정에 예종은 사초를 고칠 때 권람을 비판한 기사는 삭제했는데도 정작 세조를 비판한 기사는 삭제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예종 : 너는 재상의 허물은 삭제했으면서 임금의 허물은 그대로 둔 이유가 무엇인가?
원숙강 : 대신을 거스르면 그 화가 빠르기 때문에 삭제했습니다. 더구나 군주의 일은 의정부와 육조의 등록에 실려 있으므로 신이 비록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기록에 남습니다.

민수와 원숙강은 사초실명제로 자신의 상관에 대한 기록 내용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사초를 고친 것이지만 이는 가장 큰 죄를 범한 것이었다. 원숙강과 강치성은 참형되었고 민수도 참형 대상자였지만 예종의 세자 시절에 서연관(세자의 스승)이었음을 감안하여 장 100대를 맞고 제주도의 관노가 되었다.

사관의 시련은 연산군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성종 때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사림은 사관 직을 비롯한 이른바 청직(淸職)을 모토로 했음으로 기득권층인 훈구세력의 비리와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훈구파들이 사림들을 곱게 볼 리 없었고 그들을 몰아 낼 명분을 찾고 있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성종실록〉편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극돈이 실록청의 책임자가 되자 그는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김인손이 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쓴 사초에서 자신의 비행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초에 기록된 이극돈의 비행은 성조 때 불경을 외고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에 정희왕후 상을 당했을 때 관기와 더불어 주연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개인 사감과 비리 삭제요구 거절이 무오사화 발단

이극돈은 곧바로 유자광을 찾아갔는데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었다. 김종직은 남이(南怡) 옥사를 일으켰던 유자광을 미워하여 유자광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누각현판에 걸어두었던 시를 철거해 불태워버릴 정도였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신진사림을 대거 숙청할 빌미로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을 이용했다. 김일손은 사초에서 단종인 노산군의 시신이 숲 속에 버려져 거두는 자가 없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는데 한 백성이 밤에 시신을 업고 달아나서 어디에 던져버렸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했으며 이어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충정이 깃들어 있다고 논평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조의제문’은 외견상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사실을 두고 의제를 조문하여 지은 제문이나 실은 의제를 단종으로, 항우를 세조에 빗대어 그의 집권이 반인륜적인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조의제문’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김일손의 방자함은 김종직의 문인 전체로 확대되었고 김종직의 문집에서는 또 다른 세조 비방 사실이 발견되었다.

유자광 등은 연산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무도한 행위를 했고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모두 제출하라고 명했다. 이 때 이극돈은 사초는 군주가 볼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결국 김일손의 사초 중에서 필요한 부분만 추려서 연산군에게 제출했다.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데 사사건건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왕권을 제약하던 사림들을 싫어했으므로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내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은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성종 때 정계로 진출한 대부분의 사림은 죽거나 유배당했다. 이것이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제일 처음인 무오사화이다. 특히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굳이 사화(士禍)가 아니라 사화(史禍)라고 불리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왕조실록, 유래 없는 실화서이나 한계성은 있어

『조선왕조실록』이 『훈민정음』 등과 함께 199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조선왕조실록』이 모든 면에서 완벽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윤영인은 『조선왕조실록』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논할 때 동아시아의 다른 실록에 견주어 볼 때 비교 우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적었다.

'황명실록', 줄여서 '명실록'이라고도 하며 총 2900여 권의 분량으로 돼 있지만 글자 수는 총 1600만자에 불과해 '조선왕조실록'의 6400만 자에 비해 못 미친다.
『조선왕조실록』이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며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천체현상도 과학적인 연구의 소산이 아니라 천체 현상이 정치적인 요소와 결합하기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역대 왕들의 실록을 빠짐없이 기록했지만 각 왕들에 대한 기록에도 천양지차의 차이가 있어 실록이 일부 왕대에 집중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 말기에 편찬된 『헌종실록』의 경우 내용이 특히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기록하는 항목이나 항목별 기사의 비율도 일정하지 않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 워낙 장시간에 걸쳐 만들어졌으므로 실록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질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실록이 편찬된 시대나 사관이 다르므로 기록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는 각도가 다르고 사관들의 지식수준이나 관심도에 따라 정확성에도 차이가 나기도 한다.

"절대군주의 모든 행동 낱낱이 기록할 수는 없는 일"

더구나 사관들이 항상 붓을 들고 왕을 따라다니면서 국왕의 모든 언행을 빠짐없이 기록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것이다. 국왕들은 원하면 얼마든지 사관이 없는 상황에서도 신하들과 밀담을 나눌 수 있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절대군주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태생적인 한계를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하는 사관들이 극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당쟁이 심해지면서 사관들의 당파나 개인적인 의견에 의한 편견도 많이 작용했는데, 사관을 구성하는 주요 관직이 집권당에 의해 독점되어 실록 편찬의 공정성을 잃기도 했고, 정권이 다시 바뀌면 수정 또는 개수 실록이 다시 편찬되기도 했다.

즉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에는 『수정선조실록』과 『경종수정실록』이 만들어졌고 『현종실록』에는 『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에는 『숙종실록보궐정오』가 별도로 있다.

비판 있지만 세계 최장기간인 472년간 기록 인정받은 실화서

일부 학자들의 신랄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이 『훈민정음』 등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서울대 규장각의 조선왕조실록 서고(사진 조민근).


우선 한 왕조의 역사적 기록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472년)에 걸쳐 기록된 자료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당나라 『순종실록』 5권과 송나라 『태종실록』 20권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 왕조를 기록한 것이 아니므로 대표적인 중국의 실록으로 『황명실록』과 『대청역조실록』가 있는데 전자는 260년에 불과하고 후자도 296년에 불과하다. 베트남의 『대남식록』의 경우는 더욱 짧아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50년에 걸친 기록이다.

둘째, 『조선왕조실록』은 다른 나라의 실록보다 내용이 풍부하다. 일본의 『삼대실록』이나 중국의 『황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비하여 기록내용이 매우 부실하다. 『황명실록』의 경우 2964권이나 되는데도 글자 수는 총 1600만자에 불과하나 『조선왕조실록』은 총 6400만 자 인 것만 보아도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이내 알 수 있다.

셋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블랙박스로서 의미로서도 큰 의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이 매우 다양하여 가히 백과사전이라 부를만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정치ㆍ외교ㆍ군사ㆍ제도ㆍ법률ㆍ경제ㆍ산업ㆍ교통ㆍ통신 등은 물론 천문ㆍ지리ㆍ음악ㆍ과학적 사실이나 자연재해 같은 천문현상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과학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지적이다.

넷째 국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생활기록이 꾸밈없이 담겨져 있어 조선 시대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왕과 모든 관료들 심지어 향촌의 유생들까지 그들의 언행을 살펴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단순히 있는 사실을 정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교적 명분에 의거하여 역사적 시비득실을 정확하게 판단했다. 그러므로 ‘내가 무서워하는 바는 하늘과 사관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관의 평가를 높이 평가했다.

"사관의 독립성·기록 비밀성 보장됐던 객관적 사료" 인정

다섯째 『조선왕조실록』이 어느 사료보다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은 일부 오손된  부분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 기록물이라는 점이다. 사관은 독립성과 기록의 비밀을 보장받은 전문 관료로서 왕이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음으로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사료를 정리할 수 있었다.

여섯째 472년이라는 오랜 동안 실록이 보존되어 온 것도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다는 점이다. 조선 정부는 국가의 정사라고 볼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서 4대 사고(史庫)를 만드는 등 기록 보존에 힘썼다. 사실상 조선시대에 많은 전란이 있었음에도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보존에 그만큼 공이 들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조선왕조실록』은 단 4부를 찍기 위해서 금속활자를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중국ㆍ일본ㆍ몽골 등 동아시아 각 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역사 연구에서 중국의 자료는 그 양과 질에서 다른 어느 국가의 기록보다 월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 왕조는 중화사상에 젖어있어 외국과의 교류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균형도 맞지 않는데 『조선왕조실록』을 의존하면 동아시아 각 국의 관계사를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록포쇄제명, 서고에서 실록을 꺼내 말리는 작업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요도를 높여주는 단적인 예는 여타 외국 실록보다 과학적인 자료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이는 17세기 소빙하기에 대한 연구 자료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태진 박사는 일련의 논문에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1500년부터 1750년까지 250년 동안 지구가 커다란 운석군을 만나서 여러 가지 기상 이변을 겪었으며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현상이 한랭화였는데 『조선왕조실록』처럼 이 시기를 정확하게 기술한 자료는 없다고 발표했다.  

이 시기를 소빙기로 간주하는데 그 당시 역사 전개는 세계적으로 다른 시기와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한국, 일본, 만주를 비롯하여 각국이 자연 환경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644년 중국 왕조의 교체도 이 당시에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 당시의 천재지변 때문에 유독 정치적인 변혁이 많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반면에 중국의 『황명실록』과 『대청역조실록』에 나타나는 천체나 자연 현상은 워낙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어 소빙기 연구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윤영인 박사는 적었다. 중국의 실록에서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것은 천체의 이상 현상이 곧바로 황제의 실정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천체기록만 보더라도 『조선왕조실록』의 다양하고 충실한 기록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한하다는 것이 학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편중적 역사 기록인 데다가 당시 성리학적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사론이므로 붕당간의 시각 차이로 객관성이 결여되고 승자의 시각에서 편찬했다는 비판도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기본적으로 왕실과 조정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이나 지방의 실정을 소홀히 다루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과 같이 철저하게 당대의 모든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수록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그 어느 유산보다도 값지다고 볼 수 있다. 몇몇 오류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 『조선왕조실록』의 공정성과 의미를 다소 저하시키는 감은 있으나 실록 모두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국역해 CD-ROM 전산화 한 건 '학문적 혁명'으로 평가

한편 『조선왕조실록』은 대규모의 한국어 번역사업과 전산화 과정을 통해 그 어느 나라의 전근대 역사기록보다 철저하게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대중화란 대중이 사료 해석의 주체가 된 것을 말하며 나아가서는 그 해석을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왕조실록』은 남ㆍ북한에서 모두 번역이 이뤄졌는데 북한에서 20여 년, 한국에서 는 25년이 걸렸다. 특히 국역 사업에 이어 『조선왕조실록』의 CD-ROM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의 CD-ROM 전산화야말로 학문적인 ‘혁명’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그 파급효과는 크다.

디지털 미디어의 최대 장점은 검색 기능인데, 『조선왕조실록』은 일반 책의 목차나 색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본문 속의 모든 단어가 어절(語節) 단위로 색인화 되어 있다. 즉 디지털 미디어의 검색 기능은 『조선왕조실록』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편년체 사료의 산만함을 극복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실록』 CD-ROM이 출현되자 전에는 소홀했거나 찾아볼 수 없었던 분야에 대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으며 나아가 새로운 역사 연구의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근래 조선시대에 관한 책들이 활발하게 출판되고 TV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의 대중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밀랍이 떨어져 나가면서 크게 훼손된 '성종실록', 아래는 손상된 글자를 확대한 사진(사진 조운찬).
학자들은 21세기에 들어서서 한국은 세계화의 거센 물결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외국의 문화에 대응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세계화를 위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 모두가 동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과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를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역사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조선왕조실록』의 중요도를 더욱 높여준다는 설명이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만이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만의 역사 기록이 아니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인류의 자산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이를 두고 한국 문화가 세계화 과정에서 이룬 또 하나의 큰 성과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은 1998∼99년에 전면적인 조사를 받았는데 1229책 중 약 10퍼센트인 131권의 훼손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특히 <세종실록>은 154책 중 절반이 넘는 86책이 불량본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손상 정도가 심한 131권의 대부분이 밀랍본(蜜臘本)이라는 사실이다.

밀랍본은 <태조실록>에서 <명종실록>까지만 나타나는데, 밀랍본 실록 614책을 기준으로 할 때 훼손율은 21퍼센트로 높아진다.

밀랍본은 벌집에서 추출한 밀랍성분을 종이에 입힌 책으로 책의 수명을 높이기 위해 고려말·조선 초기에 주로 사용되었다. 종이에 밀랍을 입히는 것은 당시 중국에서도 활용된 최첨단 기법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벌레에 의한 손상을 막는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장기간 보관하기위해 채택한 최첨단 밀랍법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많은 실록을 훼손한 것이다.

장기보관 위해 철저하게 관리된 '조선왕조실록'

용인대학교의 박지선 교수는 “밀랍본은 일반 한지로 만든 생지본(生紙本)에 비해 손상 정도가 심하고, 일부는 책장끼리 붙어 있어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상태였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이에 입히는 밀랍의 양이 줄어들고, <명종실록> 이후에는 아예 밀랍을 쓰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미 당시에도 훼손이 나타나자 더 이상 밀랍본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서울대 규장각은 2004년부터 손상된 일부 실록의 복구 방안을 찾고 장기 보존책을 마련하기 위해 실록을 ‘해부’하는 작업을 벌여 왔다. 이를 위해 우선 조선시대 당시 실록이 어떻게 제작됐고 또 어떻게 관리했는지 정밀한 역추적 작업을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흔히 『조선왕조실록』은 최초에 만들어 졌던 그대로 온전히 전해졌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후대에 꾸준한 개보수를 통해 유지돼 왔다는 것이다.

규장각 신 병주 학예연구사는 “조선 전기부터의 원본으로 알려진 ‘정족산본’중에도 군데군데 후대에 새로 만들거나 보수한 책들이 끼여 있었다”고 밝혔다. 제작과 보관에 아무리 완벽을 기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되거나 사라진 책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만큼 꾸준한 개보수가 최선의 방법인데 조선도 이를 따랐다는 것이다.

실록을 보전하기 위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관심과 노력이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흔히 실록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4대서고 체제’를 든다. 실록을 한 곳에 모아두는 대신 지방 곳곳에 서고를 만들어 각각 보관함으로써 화재 등의 위험을 분산하는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리스크 헤지’방식이 수많은 전란 속에서도 실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설명이다.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시대 실록의 제작과 보관의 전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서울대 규장각은 “조선시대의 실록의 제작과 관리는 단순한 서책 제작과 보관을 넘어선 국가적 대역사였다”고 발표했다. 단지 『조선왕조실록』을 분산 보관하는 차원을 넘어 고도의 관리체계가 뒷받침됐다는 설명이다.

대표적인 것이 『실록청의궤』인데 이 의궤는 실록청이 남긴 백서로 실록을 제작해 서고로 봉안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물론 투입된 물자와 투입된 인원까지 세세히 기록했다. 사후관리도 마찬가지다. 지방 서고의 실록들은 매 2∼3년마다 꺼내 바람에 습기를 말리는 ‘포쇄’과정을 거쳤다. 이때도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전 과정을 감독했으며 다시 실록의 보관 상태를 소상히 점검해 「실록형지안」이라는 문서를 남겼다는 것이다. 05/7/18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