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67)전략과 전술의 귀재,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09
을지문덕 성장과정 역사적 기록 없어
전략과 전술의 귀재, 살수대첩의 을지문덕(1)
<기록이 없는 을지문덕>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을 김유신에 이어 두 번째 위인의 자리에 놓았으며, ‘고구려가 대국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능히 그 나라가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는데 『춘추좌전』에도 ‘믿을 만한 이야기다’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고려ㆍ조선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근ㆍ현대에 들어와서는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 정기를 드높인 위인으로 받들어졌다.

중국사서 재편집 불과…'선비족 출신' 소문도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을지문덕 전기는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을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며, 내용도 612년 수나라 군대를 격퇴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의 조상ㆍ출생지ㆍ성장 과정 등에 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삼국사기』에도 ‘출생과 성장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이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돼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수문제와 수양제의 고구려 침입경로.


한편 중국 쪽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인용된 『혁명기(革命記)』라는 책에는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으로 나온다. 중국 북쪽의 유목민인 선비족에는 ‘울지’라는 성이 있어 중국 왕조에도 관료로 많이 진출했다.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기에 ‘울지경덕’이란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을지문덕’이 선비족 계통의 귀화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학자들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명림(明臨)’ 같은 복성(複姓)이 있었던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하고 있다. 특히 ‘을지’라는 성이 고구려 관위명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ㆍ가부장을 뜻한다는 해석과 ‘을’만이 성이고 ‘지’는 존대의 접미사라는 견해도 있다.

이선민 박사에 따르면 고구려는 부여족을 중심으로 말갈ㆍ거란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을지문덕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을지문덕에 대해 3회에 걸쳐 설명한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야욕>

고구려는 5세기 이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동방사회의 맹주로서 부각되었다. 고구려는 고분 벽화와 천문학과 관측술 등을 통해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581년 중원에 수나라가 건설되어 천하를 평정할 기세를 보이자 평원왕은 고구려의 전통에 따라 이이제이(夷以制夷) 외교 정책을 썼다. 수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남조의 진(陳)에도 사신을 계속 파견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강화하려 했다.

이때 수문제(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는 평원왕(평강공주의 오빠로 온달장군의 매부)을 정3품 대장군과 고구려왕에 봉했다.

을지문덕 조상, 을지문덕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전쟁박물관).
중국은 평원왕의 이런 책봉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임을 납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책봉이라는 것도 인접국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 관례의 하나이다. 수나라와 고구려가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평원왕은 581년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수나라의 동태가 이상하자 585년부터 아예 사신을 보내지 않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 관해 황 원갑은 평원왕이 수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킬 시간을 벌고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 통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한 수문제는 동북방에 있는 강력한 고구려가 반발할 경우 중국 통일에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사절을 파견하라고 평원왕에게 경고성 서한을 보내는 등 고구려를 위협했다.

수문제 중국통일 하자 고구려는 전력보강 앞장

그런데 평원왕 31년(589) 수문제가 결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자 평원왕은 다음 공격 목표는 고구려일 가능성이 있다며 수문제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면서 산성을 수리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등 전력보강에 앞장섰다.  

『수서』<고구려전>에는 수문제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개황(開皇, 수문제의 연호) 초에는 입조하는 사신이 자주 있었으나 진을 평정한 뒤로는 탕(湯, 평원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평원왕은 수문제와 대결을 하지 못하고 590년에 갑자기 사망했다. 평원왕이 사망했지만 고구려로서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새로 즉위한 영양왕(재위 590~618)은 25년간 태자로 왕의 수업을 받으면서 국정의 핵심을 잘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준비된 임금이었다.

영양왕이 즉위하자 수문제는 사절을 직접 파견하여 영양왕을 ‘개부의동삼사’라는 관직을 봉하고 요동군공의 벼슬을 주면서 고구려가 자기의 휘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런데 수문제가 영양왕에게 보낸 직책이라는 ‘개부의동삼사’는 대장군보다도 지위가 낮은 것으로 중국 동북방에서 독자적인 대국을 갖고 있던 고구려를 깔보는 처사였다.

수 문제, 수문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고구려에 복속을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수문제의 요구를 묵살하고 수나라와 일전을 준비했다.
이와 같이 수문제가 고구려를 모욕한 것은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일하여 천자라고 자임하고 있던 수문제에게 고구려가 전혀 굴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제가 영양왕 8년에 보낸 국서에도 영양왕을 노골적으로 모욕하는 글이 적혀 있다. 이덕일의 글에서 인용한다.

‘왕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수문제)과 덕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후에 여진족)을 못 견디게 괴롭히고, 거란을 금고시켰다(이 뜻은 당시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뜻함). 우리나라는 공인(工人)이 적지 않으니, 그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나에게 주청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여러 해 전에는 몰래 재물을 뿌려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 다연발 화살을 만드는 사람)를 빼어갔다. 병기(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좆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겠는가.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가 넓다한들 장강(양자강)과 어찌 비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한들 어찌 진국(陳國)과 비교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하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지만 그래도 순순이 타일르니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

수문제의 불평은 계속 된다.

‘왕은 짐의 사자를 빈 객관에 앉혀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끝내 듣고 보지도 못하게 했다.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막으며 그 살피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또 종종 기마병을 보내 짐의 변경 사람들을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내용을 그대로 해석한다면 고구려는 수나라 사신이 도착하자 고구려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빈 객관에 가두어 놓았다고 볼 수 있으며 수나라의 변경지대에 군사를 보내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에 복속할 생각이 전혀 없이 수나라가 공격해오는 것조차 겁을 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만무례한 글은 칼로 화답해야한다" 개전

〈수나라를 선공한 영양왕〉

영양왕이 수문제의 모욕적인 서신을 받고 크게 노하여 수문제에게 어떻게 회답해야 할지 중신회의를 소집하자 강이식(姜以式, 강이식 장군의 무덤은 중국 심양현 원수림이 있다고 전한다)은 “이 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합니다.”고 개전(開戰)을 주장했다.

강이식 장군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진주시 봉산사, 수문제의 모욕적인 서신을 받자 강이식(姜以式)은 “이 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해야 합니다”고 개전(開戰)을 주장, 중국의 요서를 선제공격했다(사진 진주강씨대종회).


영양왕은 그의 말을 쫓아 강이식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예(濊, 『수서』의 말갈) 군사 1만으로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케 했다. 또한 거란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을 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수나라와 고구려의 제1차 전투이다. 과거부터 한국은 오로지 외침만 당했다는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이 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 당시 중국을 통일하여 명실상부하게 세계를 지배한다고 자부하는 중국 천자의 지배를 거부한 것은 고구려뿐이었다.

『삼국사기』에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영양왕 9년(598) 왕이 말갈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하니, 영주(지금의 중국 요녕성 조양시) 총관 위충이 이를 격퇴했다. 수문제가 듣고 크게 노해 한왕 양(諒, 문제의 넷째 아들)과 왕세적을 원수로 삼고 주나후를 수군총관으로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게 했다.’

수나라로서는 통일을 달성한 지 불과 7년 만에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당함으로써 급소를 찔린 셈이다. 이는 고구려가 이 당시에 요하 동쪽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나라도 곧바로 대응하여 산해관 서북지역인 임유관을 지나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임유관을 기세 좋게 통과해 고구려 영토로 진격했지만 마침 장마철이라 유행병이 만연하고 보급 역시 원활치 못한 상태에다 산동성을 출발한 해군은 도중에 태풍을 만나 전함을 대부분 잃었다. 이때의 수군 80〜90퍼센트가 죽었다고 할 정도로 피해가 막심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대동운해(大東韻海)』와 『서곽잡록(西郭雜錄)』이란 책을 인용해 수나라와의 1차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고구려 장수의 이름을 강이식(姜以式)이라 적었다. 특히 영양왕이 수나라의 1차 침략을 물리친 후 2년 후에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고구려 역사서인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도록 한 것은 통일제국 수나라를 완패시킨 자부심의 표현으로 풀이 된다.

그런데 영양왕 15년(604) 7월, 수나라에서 대 격변이 일어난다. 태자 광(廣)이 아버지 수문제를 살해하고 수양제로 즉위한 것이다.

이때 상황이 묘하게 꼬이면서 수양제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607년 수양제가 서부를 시찰하고 돌궐의 계민가한의 막사에 들렸을 때 고구려의 사신과 마주쳤다. 영양왕이 돌궐과 연합전선을 맺어 수나라를 압박하려 한 것인데 그만 수양제에게 발각된 것이다.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는 수나라 군대, 수나라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국 고구려에 패배하여 당나라에 나라까지 빼앗겼다.
수양제는 고구려 사신을 직접 불러 고구려 영양왕이 자신에게 입조하지 않는 이유를 따지면서 영양왕에게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양왕은 돌궐에 파견되었던 사신의 말을 듣고도 이를 묵살하면서 입조는커녕 백제나 신라 등으로 수나라 사신이 가는 길을 막을 정도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수양제로서는 영양왕의 이런 오만불손한 행동과 아버지 수문제의 참패를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런데 양제의 총신 배구(裵矩)가 “고구려의 땅은 거의 한사군의 땅인데, 중국이 이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수치입니다. 선제가 일찍이 고구려를 토멸하려 했으나 양양 장군이 재능이 없어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전하께서 어찌 이를 잊으시겠습니까.”하고 고구려 침공을 사주했다.

수양제는 그의 말을 듣고 곧바로 고구려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고구려는 당대의 강자였다. 또한 자신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동안 만리장성 밖의 북방기마민족이 침략해 올 우려도 있었음으로 섣불리 군사를 동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양제 고구려 정벌 앞서 변방수비 강화

그러므로 양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만리장성을 수리하는 등 고구려 정벌에 앞서 변방의 수비를 강화했다. 여기에 동원된 장정만도 100만 명에 달한다.

또한 수양제는 전국의 조선 기술자들을 산동으로 집결시키고 군함 500척을 건조케 했다. 그 당시 건설된 함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만들어진 전선 한 척의 도면을 보면 오층 누선으로 최고 1000명을 태울 수 있는 그야말로 거대한 군함으로 알려진다.

중국 내부의 불안 요소가 어느 정도 해결했다고 생각한 수양제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군사를 동원한다. 수양제가 고구려 2차 침공 때 동원한 군사는 무려 113만 3천 8백 명에 달한다. 그런데 이 숫자는 수나라의 군 편제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수양제는 전군을 24군으로 편성했으며 1군은 기병 40대와 보병 80대였다.

을지문덕 대첩도.


그런데 그 당시 1대가 100명이므로 1군은 1만 2천명, 전투병은 28만 8천 명 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툭하면 100만 대군이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삼국지』에서 조조가 형주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백만 대군을 이끌고 갔다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20만 명이었고 형주에서 오나라와 적벽대전을 치를 때는 15만 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임 용한 박사는 수나라가 113만 명을 동원했다는데 과장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앞에서 24군을 동원하여 전투병 자체로는 28만 8천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치중대(수송대)가 전투병 수만큼 편성되었고 중간에 보급기지를 설치하고 그곳에도 경비병과 병참부대를 확보해야 했다. 그러므로 수양제가 200만 대군을 동원했다고 자랑한 것도 병력 외에도 군량을 운반하는 데 동원된 인원도 같은 수가 있어야 하므로 200만 명도 과장된 숫자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200만 명이라도 당시에 전 중국 인구의 5〜7.7퍼센트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 점이 수나라의 약점이었다. 전 인구의 5퍼센트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는 한국군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1970년대에 한국군은 60만 명으로 병력 수만 따져서 세계 5위 안에 들었는데 그 당시의 인구를 3천 만 명으로 계상해도 2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런데 중국처럼 넓은 땅에서 5퍼센트의 인구를 원정에 통원했다면 중국의 국내 군사력은 거의 텅 비었다는 뜻이 된다. 이 때 반란이 일어나거나 주변의 이민족이 침공하면 꼼짝없이 당하기 마련인데 실제로 수나라가 그런 꼴이었다.

더구나 대군이 동원되면 워낙 긴 전선으로 펼쳐져야 하므로 지형을 잘 아는 수비군의 게릴라전에 걸리면 그야말로 낭패이다. 군이 공격 받아 둘로 분산되면 전력이 1/2로 떨어지고 넷으로 분산되면 1/4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투부대와 수송대가 서로 분리되면 분열된 부대는 전력 자체를 상실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인간은 매일 물을 마셔야 하며 음식을 먹지 않으면 단 며칠 안에 전력이란 존재하지 않는 지경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의 제1 목표로 속전속결을 내세웠다. 대군을 동원하여 일거에 고구려의 평양까지 점령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수륙양면 작전을 구상했다. 육군은 100일 동안 먹을 식량을 지참하고 전격작전으로 고구려를 공략하며 동시에 수군(水軍)은 평양까지의 해상을 장악하여 육군이 필요로 하는 식량 등 보급품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수양제가 대형 함선들을 건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때 수나라 공격군에게는 매우 불리한 천재지변이 일어난다. 산동과 하남에 큰 수재가 발생하여 30여 개 군이 물에 잠겼다. 농번기임에도 군사를 동원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자 농경지는 황무지로 변하여 식량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적절치 못한 군사동원에 전국에서 반란도 끊이지를 않았지만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 의지는 꺾기지 않았다. (계속) 05/9/5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치고 빠지는 전술 '수나라군대' 무력화
전략과 전술의 귀재, 살수대첩의 을지문덕(2)
<첨단무기 제작>

고구려 청야 · 수성작전 기본 전술

수양제도 고구려의 전투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는 청야작전과 수성작전을 기본으로 삼았는데 청야작전은 침략군이 공격해오면 전 주민들이 튼튼한 석조구조물의 산성으로 대피하면서 중도에 침략군이 이용할 수 있는 곡식 등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공격하려면 공격군이 모든 보급품을 확보해야 했다. 수양제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이지만 고구려가 청야작전과 수성작전으로 일관할 경우 산성을 호락호락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이 수양제의 고민이었다. 그러므로 수양제도 고구려 성을 공격하는 데는 공성무기 확보가 관건이라 생각하고 대대적인 신무기 제작을 명령한다.

그 당시 개발된 수나라의 무기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지는 아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이와 거의 유사한 무기를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이 단원은 임 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해자를 건너는데 사용된 수나라의 호차와 접첩교, 성 밖에 설치되어 있는 해자를 건너는데 부교로 사용한다.


구름사다리: 고구려 성벽 넘기 위한 장비

① 운제(구름사다리) : 고구려의 철옹성 같은 성벽을 넘기 위한 장비로 수레에 탄 군사들이 밧줄을 잡아당기면 약 40미터 가량의 사다리가 펼쳐진다. 운제의 규모에 따라 사륜ㆍ육륜ㆍ팔륜 차가 있었다.

② 소차 :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성 안의 동태를 살피는 정찰용 차량이다.

③ 전호피차 : 성벽 가까이 접근해 땅을 팔 수 있도록 만든 장갑무기로 터널을 만들어 성안의 진입을 꾀할 때 사용한다.

④ 포차 : 발석차라고도 하는데 거대한 돌을 공격목표 지점까지 날려 보내는 무기로 성벽을 파괴하거나 성벽 위의 적군과 방어무기를 공격한다.

⑤ 당차 : 거대한 쇠망치를 앞뒤로 흔들어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한다.

⑥ 삼단노 : 대형 활로 고구려 성을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⑦ 호차와 접첩교 : 성 밖에 설치되어 있는 해자를 건너는데 부교로 사용한다.

⑧ 충차(공성퇴) :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하는 장비로 끝을 뾰족하게 깎은 커다란 통나무(쇠를 씌우기도 함)를 밀고 가서 부딪히는 장비이다.

⑨ 누차(팔륜누차, 공성탑) : 운제와 충차를 결합한 초대형 구조물로 대체로 팔륜으로 제작된다.  

영화에서는 공격군이 충차나 운제 등을 동원하여 공격하면 수비군이 불화살이나 기름, 또는 돌을 떨어뜨려서 격퇴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방법으로 공격군을 격퇴하기는 매우 어렵다.

공격군도 수비군의 방어 방법을 잘 알고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성파괴 충차 지붕 삼각형으로 돌 피해 최소

우선 공격 장비를 생나무로 만들고 미리 충분한 물기를 먹여 두므로 불이 잘 붙지 않는다. 충차와 같은 경우 물탱크를 두어 아예 소화 병력을 별도로 배치하기도 한다. 또한 돌 공격도 쉽지 않은 것이 나무는 탄력이 있어 의외로 돌에 강하다. 특히 성을 파괴하는데 중요한 충차는 장갑을 이중으로 하고 지붕 부분을 삼각형으로 만들어 떨어지는 돌이 미끄러져 떨어지도록 했으므로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공격군이 운차나 충차로 공격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어수단은 영화장면처럼 불이나 돌이 아니고 갈고리이다. 갈고리로 걸어 쓰러뜨리는 것이다. 일단 공격무기가 쓰러지면 다시 세우기도 힘들고 쓰러질 때 크게 파손되기 십상이다. 또한 수비 측에서도 충차를 만들어 운제를 파괴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성문이나 성벽 파괴에 동원된 포차(좌)와 충차(우), 중국에서는 머리카락처럼 보이는 줄을 잡아당겨 돌을 날리는 포차가 발달했는데 포차 1대당 작게는 50명 많게는 250명이 동원됐다.


공성탑은 거대한 망루와 같지만 공격용 무기이므로 수비 측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다. 그러므로 대부분 사면에 장갑을 둘렀다. 내부에 여러 층을 두고 맨 꼭대기에는 성벽으로 돌출한 널판을 두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병사들이 널판을 가로질러 성벽 안으로 뛰어들 수 있다. 하부에는 공성토를 설치하여 성벽을 부순다. 또한 층층마다 궁수가 있으므로 성 안의 병사와 대등한 높이에서 또는 그보다 높은 곳에서 엄호사격을 할 수 있다.

방어선 뚫리면 병력 신속 투입 전세장악

공성전이 치열해지면 누차를 중앙에 두고 주변에 보다 작은 운제를 보조 공격용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일단 성벽의 어느 부분의 방어선이 뚫리면 운제가 함께 붙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신속하게 투입하여 전세를 장악하도록 한다.

성을 공격하는 데 있어 성문을 파괴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성벽은 두터운 돌이나 흙벽으로 쌓았기 때문에 파괴가 간단하지 않지만 성문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다 용이하다.

성문을 파괴하는 데는 충차 대신에 화공도 효과적인 방법이므로 특별히 화공용 충차를 만들기도 하는데 기름과 장작을 적재하고 성벽에 부딪혀 성문에 불을 붙인다.

화공대비 성문에 창살모양 셔터 붙여

물론 수비군도 화공에 대비하여 성문 앞면에 철판을 대고 창살 모양의 셔터를 붙여 이중문을 만든다. 공격군이 기름불을 사용할 때 물만으로 불을 끄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수비군은 화공을 사용한 공격에 대비하여 미리 성문에다 젖은 진흙을 발라두기도 한다. 견고한 성을 공격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더구나 수비 측은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미리 함정 또는 장애물을 설치한다. 이때의 최상의 방법은 역시 해자(성벽 주변을 호수로 만들거나 참호를 파서 물을 채운다)를 설치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으로 장갑차를 몰고 성벽에 접근해서 땅을 파는 방법도 있다 소위 무지막지하게 땅굴을 파는 것인데 이것은 성안으로 진입하는 용도와 성벽을 무너뜨리는 용도로 구분되었다. 수나라군은 전호피차를 제작했다. 하나 수나라의 이런 작전은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고구려 토질 단단한 화강암 땅굴 못파

우리나라의 토질은 많은 지역이 단단한 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어 땅굴을 파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사실 수와 당나라가 고구려의 성 밑으로 땅굴을 쉽사리 뚫을 수 있었다면 고구려는 수많은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여하튼 공격 측은 성벽을 빠른 시간에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수비 측은 부서진 부분을 막고 보수하며 버티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므로 전투가 격렬해지면 수비 측의 장수는 임기응변으로 공격에 따른 각종 피해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암성의 치, 수나라는 첨단 무기를 제작해 고구려의 산성들을 공격했으나 고구려의 산성들이 견고해 점령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백암성의 치는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돼 있는데 이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고구려도 수나라의 공격을 예상하고 철저한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고구려의 가장 큰 방어전술은 청야작전과 적소에 유기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산성을 이용하는 산성전술을 써서 적이 퇴각할 때까지 항전하는 것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 성 밖으로 나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고구려 백암성 성벽높이 15미터 견고

고구려의 산성이 얼마나 견고하게 건설되었는지는 현재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백암성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백암성의 성벽 높이는 10미터이지만 원래는 15미터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내부는 반구릉 지대로 한 쪽 면에 태자하라는 강을 끼고 있고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백암성의 다른 한쪽은 20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이다.

또한 백암성은 60미터 간격으로 거대한 치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간격은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것이다. 치가 있으면 성벽을 오르는 적군을 세 방향에서 유효적절하게 공격할 수 있다. 고구려성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성문 진입이 어렵다는 것이다. 성문을 반원형 성벽으로 감싸 안아 그 안에 들어온 적군은 꼼짝없이 갇힌 채 화살공격을 받게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상태에서 수양제는 국내 여건이 매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612년 탁군에 군사를 집결시킨 후 평양성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바 있다.  

동원인원수 113만3800명 중국역사상 최대규모

그 당시 동원된 인원수가 무려 113만3,800명이나 되므로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만도 40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 당시 대군이 앞뒤로 이어진 거리가 무려 960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대 동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때 백제의 무왕은 사신을 보내 출병의 시기를 물었다. 수양제는 자신이 고구려 북쪽과 서쪽을 공격하는 동안 백제가 남쪽을 공격하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사신을 보내 침략시기를 알려주었다. 고구려는 양쪽 전쟁을 동시에 치러야하는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여하튼 수나라 군은 요수까지 전격했지만 고구려 군이 강어귀에서 지키고 있어 쉽게 강을 건널 수 없자 3척의 부교를 만들어 띄웠다. 그런데 마침 부교의 길이가 3미터가 짧아 난관에 봉착했을 때 고구려 군이 공격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수나라 군은 이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틀 후 부교를 다시 설치하는데 성공했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 군을 재공격하여 결국 1만여 명의 인명손실을 입히는 대승을 거두었다.

2005년에 발간된 고구려시리즈 개마무사 기념우표, 중장갑기병인 개마무사는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때 나타나 적을 철저하게 응징했다.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승리다운 승리를 거두어 요하 서편을 확보한 수양제는 점령당한 지역 주민들에게 10년 동안 부역을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주민들을 감복하게 했다.

수나라군 고구려 관문 요동성 공격

여세를 모아 수나라 군은 고구려의 관문이자 요동 지역의 최고 요새인 요동성(요령성의 요양시)을 공격한다. 불행하게도 수나라의 백만 대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요동성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요동성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전투 상황이 다소나마 알려져졌다.  

요동성은 태자하를 해자로 삼아 평지에 새운 성이다. 성벽 높이는 30미터, 고구려군은 수군과의 직접 전투를 피하고 성안에서 계속 항전하자 수나라 군사는 단 한 번도 이 성벽을 넘지 못한다. 당시 산성 안에는 50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해놓고 수나라 백만 대군의 발목을 계속 잡았다. 수양제가 직접 현장에 나와 장병들을 독려했는데도 고구려 성은 3개월이나 끄떡없었다.

그러자 수양제는 작전을 바꾸었다. 전군을 공성군과 별동대 두 부대로 나누어 공성군은 여러 성을 계속 포위해 고구려 병사들을 성 안에 묶어두고 별동대가 별도로 평양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을지문덕 수양제에 '항복협상' 타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5천 명을 편성했다. 그런데 수의 별동대가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 을지문덕이 수에 항복협상을 타진했다. 『수서』에 따르면 수양제가 우중문에게 ‘영양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는 밀지를 주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보면 고구려의 항복 에 관한 협상에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직접 수의 진영을 찾아가는 것으로 사전 약속이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을지문덕이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했다고 추정하는데 임용한은 일국의 수상이 오직 정탐을 위해서 그런 위험을 했을 리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고구려의 진정한 목적은 시간 끌기임으로 전투에서 시간을 끌려면 협상을 벌이는 것이 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수나라로 하여금 진정한 협상제안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면 적어도 을지문덕 장군 수준의 인물이 나서야 했다고 설명한다. 을지문덕은 죽음을 각오하고 수나라 진영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이 찾아가자 우중문은 수양제의 명에 따라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는데 수군 진영에 위무사로 종군했던 상서우승 유사룡이 항복하려는 적장을 체포해서는 일을 그르친다며 끝까지 체포에 반대하여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결국 유사룡은 이 일로 전쟁이 끝난 후 수양제에게 처형당했다.

을지문덕 수난군사 식량부족 파악

그런데 을지문덕은 자신이 직접 수나라 진영에 갔을 때 수나라 군사들이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병사들이 스스로 직접 운반해야 하는 100일치의 식량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진군하는 도중에 이를 땅에 파묻었는데 전투기간이 길어지자 식량부족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도(전쟁기념관).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더욱 지치게 만들려는 유인책으로 싸움을 자주 걸면서 지는 것처럼 도주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가 하루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했다’고 할 정도로 계속 고구려 영토 깊숙이  유인했다.

그런데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는 별동대 30만5천 명을 지원하기 위해 래호아는 수나라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60리 되는 패수(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는 내친김에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여 외성을 돌파했다.

그러나 고구려를 완파했다고 믿은 내호아는 전투가 채 종결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다.  

절안에 매복해 있던 개마무사 수군 격멸

이때 절 안에 매복해 있던 왕의 동생 건무(수륙군의 대원수)가 이끄는 500여명의 개마무사가 튀어 나와 수군을 격멸하기 시작했다. 이 날 건무의 활약이 얼마나 영웅적이었는지는 자신들의 패배를 기록하는데 매우 인색한 중국조차 ‘그의 효용이 절륜하여 500명의 결사대로 내호아군을 패퇴시켰다’라고 기록한 데서 여실히 들어난다.  

내호아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는데 그를 따라 함대까지 도착한 병사는 당초 평양으로 진격한 4만 명의 병사 중 불과 수천에 불과했다. 고구려 군에 혼이 난 내호하는 대동강 하구로 후퇴했다. 이 말은 수나라 수군(水軍)이 당초의 작전계획대로 육군과 합류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을지문덕의 오언시>

당초의 작전 계획대로 수군과 육군이 합류하지 못했다는 것은 수나라의 작전에 결정적인 차질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원정이 내호아의 패배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수양제는 원래 육군이 공격에 필요한 식량만 지참하고 신속하게 진격하여 평양성을 점령토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추가 보급은 수군이 맡도록 했는데 수군이 전멸했다는 것은 육군에 더 이상 보급품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30만5천별동대 고구려진영 계속진격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문제의 특명을 받은 30만5천 명의 별동대 육군은 고구려 성을 공격할 각종 공성장비를 끌고 고구려 진영으로 계속 진격했다. 그 당시 수나라 진영에서도 보급로가 길어지고 식량이 거의 고갈되자 회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수양제는 우중문에게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군을 추격하도록 명령했다. 평양성만 점령하면 식량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육군은 계속 전진하여 살수(지금의 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되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고구려의 유명한 작전 중에 하나가 청야전술임은 이미 말한바와 같다. 고구려 영토에 진입한 적군이 한 톨의 식량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청야전술인데 고구려는 모든 주민과 식량을 성 안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으므로 평양 인근은 인적이 끊겨 식량 한 줌도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고구려 평양성(장안성), 장안성은 552년에 쌓기 시작해 586년에 완공된 성으로 북성, 내성, 중성, 외성등 4개의 성으로 구성됐으며, 그 둘레는 23킬로미터, 성 안 총면적은 1186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큰 성이다. 내호아는 외성을 돌파했지만 고구려의 반격으로 철수했다.


우문술이 의심이 들어 전령으로 하여금 성문을 두드리자 성안에서의 회답은 우문술을 놀라게 했다. 고구려가 항복 준비를 하려고 토지와 인구 대장을 조사하는 중이니 수나라 군대는 성 밖에서 5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문술은 고구려의 회신을 받고 기다렸으나 5일은 커녕 10일이 지나도 항복하는 사절이 나오지 않자 그 때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고 공격을 명령했다.

이때 을지문덕이 사절을 파견하여 유명한 오언시 한 편을 보냈다.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통달했다. / 이미 싸움에 이겨 공이 높으니 /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한가.’

우문술 고구려계략 알고 곧바로 철군명령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이 유명한 시를 받아 본 우문술은 자신들이 고구려의 계략에 걸린 것을 알아채고 곧바로 철군을 명령했다. 수나라군대가 철군하기 시작하자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를 사면에서 습격하였고 수나라 군대가 그해 7월 살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반의 병력을 잃은 상태였다.

전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고구려군은 살수의 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군이 건너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은 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 군대 대열의 허리를 끊었다. 그런 다음 고립된 수나라군의 선두와 후미를 총공격했고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 압록강까지 추격했다.

이때 수나라 장수 신세웅이 전사하는 등 고구려 공격군 30만 5천 명 대부분을 잃었다. 수나라군사가 요동성에 도착했을 때는 살아남은 병사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이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라고 한다.

그 당시 수나라에는 이런 반전 가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긴창은 하늘 덮고 수레와 칼은 번쩍인다

‘긴 창은 하늘을 덮고 수레와 칼은 햇빛에 번쩍인다. / 산 위에선 사슴과 노루를 잡고 산 아래에선 소와 양을 잡는다. / 문득 관군이 왔다는데 칼을 들어 먼 나라를 공격한다고 한다. / 그러나 요동에 가면 오직 죽음뿐, 머리 잘리고 어찌 상하지 않겠는가.’

수양제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은 출정준비와 출정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산동과 하남에서 큰 수재가 일어나 민심이 악화된 데다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 군이 지리적 조건과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로 수나라 군을 무력화시켰다. 이것은 전략과 전술에 앞선 을지문덕이 고구려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전쟁을 이끌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나라가 백만 대군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군에게 참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요인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왕의 동생 건무가 내호아가 이끄는 수군(水軍)을 격파하지 않았으면 을지문덕이 육전에서 승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들어 건무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계속) 05/9/12
고구려 '살수 물막이공사'로 수나라군 몰살?
전략과 전술의 귀재,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③-끝)
〈수양제의 만용〉
수양제는 귀국하여 패전의 죄를 우중문, 우문술 등 여러 장수들에게 돌려 파면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패전의 치욕을 잊지 못하여 613년 다시 조서를 내려 군대를 탁군에 집결케 했다. 또한 요동고성을 짓고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지시한 후 또 다시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특히 “제장(諸將)의 패전은 군량이 모자라서이지 전쟁을 잘못해서가 아니다”라면서 다시 장군들을 복직시킨 후 그해 4월 우문술과 양의신에게 요수를 건너 평양성을 치게 했다. 반면 패전의 책임을 가장 크게 뒤집어쓴 우중문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집에서 머물다 울화병으로 죽었다. 그 당시 왕인공이 신성(고이산성)에 도착하여 고구려군에게 포위되었음에도 큰 승리를 거두어 수나라 군의 사기를 올렸다.

양제 공격에 고구려요동성 철벽 20일 버텨

제2차 정벌 때와는 달리 서전에서 괄목할만한 승리를 거둔 양제는 1, 2차 정벌 때도 점령하지 못한 요동성을 다시 공격토록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은 이번에도 철벽을 자랑하면서 20일이나 버텼다. 수문제는 요동성과 높이가 같은 어량(魚梁, 공격형 방어벽으로 모래포대로 쌓았으므로 물고기 비늘이나 그물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을 만들어 요동성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중국에서 급보가 날라 들었다. 중국 본토에 남아 군량 수송을 책임지던 예부상서 양현감(수양제 즉위의 일등공신인 양소의 아들)이 하남성 여양에서 10만 군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수나라 군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군수품과 공성장비를 그대로 둔 채 밤중에 몰래 철수하기 시작했다.

살수대첩 기록화(독립기념관).


그러나 그들의 후퇴는 고구려 군에 포착되어 후군(後軍)이 고구려의 습격을 받고 거의 전멸했다. 수양제로서 다행한 것은 양현감의 봉기가 회군한 원정군에 의해 격파되어 반란이 손쉽게 진압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내부의 반란을 잘 수습했다고 생각한 수양제는 연패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을 단념하지 않았다. 고구려 점령에 대한 그의 집념은 614년 병력의 탁군 재집결로 이어졌다. 양제는 직접 임유궁으로 가서 황제(黃帝) 사당에 참배했다.

수나라의 초전 결과는 이번에도 순조로웠다. 우선 비사성(요녕 금현성동 대흑산의 고구려산성)으로 진격하여 고구려 군을 격파했다.

고구려 요충지 함락에도 항전의 의지 불태워

그러나 고구려는 요충지가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항전 의지를 불태우면서 수나라 군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무모하게 고구려를 침략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당초 예상한 것보다 전투 기간이 길어지고 고구려 군의 게릴라전으로 탈주병이 늘어나는 등 도저히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수양제로서도 철군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명색이 중국의 황제인데 일단 시작한 전쟁을 명분 없이 끝낼 수는 없었다. 상황이 점점 파국으로 치닫자 수양제는 결국 고구려에 대해 자신을 배반한 곡사정(斛斯政)만 인도하면 철수하겠다고 화의를 제의했다.

이때 고구려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어 국론이 두 파로 갈리었다. 한 파는 남쪽의 신라와 백제를 토멸하기 전에는 수양제와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고 또 한 파는 신라와 백제는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으니 차라리 넓고 넓은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아예 중국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나라가 연전연패하여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있는 남쪽은 방어만 하고 중국 대륙을 공격하면 전 중국을 손에 넣는 것이 오히려 간단하다고 강조했다.

영양왕 곡사정 인도 조건으로 화의 수락

전자는 주로 영양왕의 동생인 건무가 주장했고 후자는 을지문덕이 주장했다.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 두 사람의 주장이 갈리자 결국 곡사정을 인도하는 조건으로 화의를 수락했다. 신채호는 그 당시 화의 차 수나라로 간 장수 중 한 명이 화의에 분개하여 쇠뇌를 몸에 품고 사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 양제의 가슴을 쏘아 맞히고 달아났다고 적었다.

그 후에도 자존심이 상한 수양제는 영양왕에게 직접 입조하라고 계속 독촉했으나 수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양왕이 이를 들을 리 만무였다.

살수대첩도 우표.


수와 고구려 간에 벌어진 전투에 대한 대차대조표는 극명했다. 수나라는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만 입고 아무런 성과 없이 퇴각한 반면에 고구려는 장기간의 전투와 일부 피해에도 불구하고 요동지구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수나라의 운명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수양제는 618년 3월,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했다. 최후의 순간에 양제는 자살하겠다고 했으나 우문화급은 그것도 용인하지 않고 양제의 목을 졸라 죽였다. 살해된 양제의 시신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후궁 하나가 평상을 뜯어 그 판자로 관을 만들어 매장했다고 임용한은 기술했다. 양제의 나이 50세였다.

수양제 중국 역사상 가장 무모한 황제 기록 수모

그해 중국에는 이세민이 세운 당이 들어섰고 다음 해인 619년 수나라는 결국 당나라에 멸망했다. 고구려와의 무모한 전투가 결국 수나라로 하여금 건국한지 단 30년도 안되어 당나라로 대체되는 요인이 되었고 수양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모한 행동을 한 황제로 기록되는 수모를 당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반목을 끝내고 내치에 힘쓰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후 고구려에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냈다.

‘우리나라와 귀국이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게 되어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살수대첩 제대로 보기〉

위에 설명한 내용은 살수대첩에 대해 중국 측과 한국 측의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정보시대에 살고 있는 요즈음 역사에 대한 비평은 매우 진지하고 또 무서우리만치 합리적이고 공격적이다.

부처님 가호로 수나라군 살수에서 물리쳐

살수대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살수전투가 있기 전에 일곱 명의 고구려 병사가 스님으로 변장하고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철수하고 있던 수나라 군사는 그곳 여울이 얕은 줄 알고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고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렇게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큰물이 쏟아져 내리고 사방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몰려나와 공격하자 수나라군은 지리멸렬했다. 그 뒤 고구려에서는 부처님의 가호로 수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으므로 그 공덕을 기려 칠불사를 창건했다는 것이다. 그때 스님으로 변장한 일곱 명은 고구려 병사가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었다는 설명이다.

수나라의 최신 무기인 삼단노, 수나라는 고구려을 공격하기 위해 최첨단 무기들을 개발했지만 고구려의 작전에 휘말려 대패했다.


그런데 딴지일보에서 '영화 속의 비과학적 구라'라는 컬럼을 선보였던 구라도리는 살수대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의문점을 조목조목 제시하면서 명쾌한 판단을 요구했다. 가능한 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살수에서 수나라 군이 모두 수장이 되려면 9군 30만 5천 대부분이 살수를 도하하고 있을 때 둑을 터뜨려야 하는데 수나라 9군 중 첫째인 1군이 살수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9군은 어디쯤 있었을까?

계산을 하기에 앞서 당시 평양성에 진격한 수나라 9군의 편제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1군의 구성은 기병 40대로 1대는 1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기병 총수 4천명이었고, 보병은 80대로 1대는 2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보병 총수는 1만 6천명이다. 그래서 보병, 기병 합계 2만 명으로 1군이 구성이 된다. 그래서 순수 전투병은 18만 명이고 여기에 수송, 경비, 병참을 포함하여 30만 5천의 군이 된 것이다(임 용한은 수나라는 모두 24군을 동원했는데 1군은 기병 40대와 보병 80대로 구성되었고 1대는 100명이므로 1군은 1만 2천명, 총 28만 8천 명이라고  계상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서는 출정 시 각 군마다 40리 간격을 두고 출발을 시켜서 24군 전군의 길이는 960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1군 20,000명 + 기타 병력의 행군 길이는 40리, 즉 16킬로미터 정도이다. 물론 이 거리엔 후미 부대와의 거리도 포함되어있다.

30만5000의 병력(현재 우리나라 육군의 50%)의 행군형태를 현재 2열종대로 행군했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가정한 이유는 우리나라 산악 지형과 좁은 길의 특성상 이렇게 행군할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5만2천5백 명으로 이루어진 종대 형 행군의 길이는 144킬로미터이다(서울에서 대전 간의 거리). 한편 수나라 군은 퇴각시 마름모꼴 형태의 방진을 치며 퇴각했다고 한다. 수나라 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지형 때문인 듯하다.  

계산상의 편의를 위해 35만 전군이 방진을 치며 퇴각했다고 가정하고 방진의 형태는 마름모의 네 귀퉁이에 병력이 포진한다고 가정한다면 진군시보다 약 20퍼센트가 줄어 115킬로미터면 가능하다. 그런데 이 115킬로미터도 평양성에서 살수(지금의 청천강) 상류까지의 직선거리보다도 멀다.

행군로가 굽은 도로라는 점을 감안해도 1군이 살수를 넘을 때 후미군인 9군은 살수에서 최소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면 이들이 살수에서 몰살했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결론적으로 당시 군 편제나 행군 대열을 감안해 보면 살수에서 모두 수장시켰다는 것은 크게 과장됐다는 것이다.’

비사성, 고구려를 공격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구려의 중국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 중에 하나로 수나라군과 고구려군은 비사성을 둘러싸고 혈투를 벌렸다(사진 신형식).


살수상류 둑 '살수대첩' 최대 미스터리

살수대첩을 최대의 미스터리로 만들고 있는 것은 살수 상류에 세워졌다고 하는 둑이다. 그 둑에는 여러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이 부분의 해석도 매우 진지하다.

우선 고구려 군은 수나라 군을 수장시킬 최적의 둑의 위치를 찾은 후 그곳에 비밀리에 둑을 쌓았다고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을지문덕함,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육군뿐만 아니라 수군으로 격파하는 등 해군과 많은 관련이 있다.
강을 도하해야 하는 수나라 군의 입장에선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하류보다는 강폭이 좁고 수심이 낮은 중, 상류를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다. 또한 수나라 군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장되었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수나라 군이 도하한 장소로 당초에 평양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청천강을 건넜던 장소가 가장 유력하다. 또 처음 건넜을 때 부교를 이용하여 넘었지만, 철수할 때는 고구려군이 상류지역에 둑을 쌓아 놓아 살수의 수심이 얕아졌기 때문에 부교를 이용하지 않고 건넜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둑을 쌓는 고구려의 입장에선 우선 둑의 위치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쌓아야 하기 때문에 강폭이 좁은 지역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고구려군의 입장에서 볼 때 수나라 군이 회군하여 도주 할 때 어느 지점을 선택할지는 쉽게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수나라의 철수에 대비하여 물막이 공사를 진행했다.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 군이 살수를 넘어 평양에 머무르다 다시 살수를 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2주일에서 3주 정도라 하므로 이 기간에 공사를 완성했음이 틀림없다.

도하 시 개인간의 간격 2미터로 간주

수나라 군이 한꺼번에 모두 도하를 하다 수장되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1) 강의 상류를 막아놓았기 때문에 수나라 군이 도하할 지점의 수심은 사람이 건널 수 있을 정도이다.

2) 도하 시 개인 간의 간격은 물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2미터정도로 간주한다.

3) 수나라 전 병력이 강을 도하 중이라 하면 강 폭의 1/2인 250미터까지 사람이(125명) 건널 수 있고 3)의 가정으로 강 상/하류로 뻗어진 길이를 계산을 해보면 4,480미터(2440명)다.

구라도리는 여기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나라 군사들을 몰살시킬 수 있는 물의 량을 계산했다.

우선 내려오는 물로 사람이 쓸려 내려가려면 사람의 무게중심보다 높은 수위(최소 1미터)의 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야 한다.

위의 가정에서 단순하게 계산해보면 최소한 2,440,000세제곱미터(톤)의 물이 상류 둑에서 수나라 군이 있는 지역까지 손실 없이 그대로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둑의 위치에서 수나라 군까지의 거리는 전혀 고려치 않은 최소의 양이기 때문에 둑에서 수나라 군까지의 거리인 최소 7킬로미터, 최대 10킬로미터의 양을 계산하면 7킬로미터일 경우는 3,500,000톤, 10킬로미터일 경우 5,000,000톤이 된다.

그렇다면 둑이 저장할 물의 양은 최소한 5,940,000톤에서 최대 7,440,000톤이 되어야 한다.

이 정도의 저수량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전용 댐 정도의 크기로 금강에 있는 무주댐은 저수량 3,400,000톤에서 5,200,000톤이고 댐 높이는 60미터이다.

고구려가 5백만톤 넘는 댐을 20일내 만들수 있었을까

그런데 과연 서기 612년 고구려의 토목기술로 흙만을 이용하여 저수량 5백만 톤이 넘는 크기의 댐을 10일에서 20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을까? 근래의 토목 기술로도 설계부터 완공까지 최소한 10년 이상이 걸린다.

5백만 톤을 저장하는 둑을 단번에 터트릴 방법도 만만한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다이너마이트나 화약을 사용하지 않고 기계적인 장치나 인력으로 댐을 한 번에 부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댐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북한 측의 살수대첩 추정지.



제일 먼저 상류에서 5백만 톤의 물을 방류하면 하류에서 얼마의 시간이 걸려야 도착한다는 것을 고구려 군은 알아야 한다. 현대 과학 기술로는 이와 같이 절묘한 시간에 댐을 폭파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 실제 똑같은 조건에서 둑을 터뜨려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과 둘째 컴퓨터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시간을 계산하는 방법이다.

당시의 상황으론 어느 것 하나 가능하지 않다. 결국 살수에서 30만여 명의 수나라군이 수장되었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이들 작전이 어느 정도 과장됐다 하더라도 수나라 대군이 고구려군에 대패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다.  

이상과 같은 살수대첩에 대한 의문점과 해법은 그야말로 신선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상식으로 귀결된다. 수나라 군이 살수 등지에서 대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고구려 군이 물막이 공사로 수나라 군을 몰살시켰다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약간의 과학적 지식만 갖고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면 살수에서 둑을 터뜨려 대승했다는 말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과학의 입장에서 음미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살수대첩에 대한 북한의 역사기술은 우리와 다르다.

북한의 살수대첩 역사기술 우리와 달라

살수대첩이 있었던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 북부지역이 아니라 모두 지금의 압록강 이북, 즉 중국 요령성 일대라는 것이다.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는 현재 평안남ㆍ북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황해로 흘러드는 청천강이 아니며, 전사에 등장하는 평양성이나 압록수도 지금의 평양이나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해석이다.

1979년에 발간된 북한 통사인 『조선전사』 제3권<고구려사>에 따르면 살수대첩의 살수는 현재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大洋河)의 지류인 소자하이다. 또한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을 향해 떠날 때 건넜던 압록수는 소자하 위쪽에 있는 오늘날의 태자하 하류(일명 오렬수)이며,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평양성도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현재 봉성)이라고 설명된다.

당시 고구려에는 수도 평양 외에 평양의 북쪽(북평양)과 남쪽(남평양)에 각각 부수도(副首都)를 가지고 있었는데 봉황성(임금이 있는 성)은 북평양이었는데 고구려 왕이 있던 왕성이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이곳을 평양(수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1년 평양에서 발간된 『력사사전』 제2권에는 살수가 청천강으로 되어 있다. 05/9/20 이종호(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