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69) 한국풀 순장바둑의 고찰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17
한국 바둑이 불참하면 2류 국제대회 전락
세계 제패의 원동력, 한국류 순장바둑 (1)
언론인 한삼희는 2005년 3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1939년 중국에서 온 오청원(吳淸源)과 일본의 청년 고수 기타니 미노루(木谷實)가 ‘치수(置數) 고치기 10번기’를 벌였다. 10차례 대국하는 동안 4승 차가 나면 치수를 고치는, 명예와 자존심의 대결이다. 오청원이 6국에서 5승1패를 올려 기타니의 치수는 덤 없던 그 시절의 호선(互先)에서 선상선(先相先)으로 한 단계 내려갔다. 오청원과 둘 때 한 번은 백, 두 번은 흑을 잡는 하수 처지가 된 것이다. 이후 오청원은 일본 고수들의 치수를 모조리 고쳐 놓았다.  

바둑 본산 중국 이창호에 경악

기도(碁道)를 꽃피우고 구가하던 일본이 바둑 본산에서 온 천재에게 정복당했던 것처럼 중국이 이창호에게 경악하고 있다. 이창호는 상하이에서 열린 농심배 바둑대회에서 중국과 일본의 맹장 5명을 차례로 꺾어 한국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ㆍ중ㆍ일 5명씩 출전한 연승전에서 한국은 앞선 4명이 1승밖에 못 올린 채 탈락했다. 마지막 남은 이창호가 5연승할 산술적 확률은 3퍼센트 남짓. 이창호는 결국 신화를 써냈다.  

‘한 사내 관문 지키니 만 명도 뚫지 못한다(一夫當關 萬夫莫開).’

중국 신문은 이백의 ‘촉도난(蜀道難)’ 한 구절을 인용해 찬탄했다. 이창호라는 관문이 촉(蜀)으로 가는 길목 검각(劒閣)만큼이나 험난하다는 얘기다. 삼국지에서 장판교를 홀로 막아서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장비도 연상시킨다. 관우가 단기(單騎)로 조조의 다섯 관문 장수들을 차례로 베고 유비에게 돌아갔다는 ‘오관참장(五關斬將)’을 이창호는 바둑 삼국지에서 해냈다. (중략) 이창호가 있어서 행복하다.’

조남철 소년과 기타니 9단과의 대국(1934),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이 11살 때 7점을 놓고 일본 기타니(木谷實) 6단과 대국해 한 점으로 패배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3년 뒤 도일 유학한 후 1944년 귀국, 불모지였던 한국 바둑을 이끌었다.


곧 올림픽 종목에도 채택될 듯

근래 바둑이 스포츠로 인정받는 등 여러 면에서 격상되어 조만간 올림픽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중국 · 북한 · 동구권 등에서는 바둑이 ‘스포츠’로 분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프로기사들의 경우 10여 점 차이가 나면 돌을 거두는 것이 관례인데도 불구하고 중국 기사들의 경우 끝까지 바둑을 두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중국기사들이 바둑을 스포츠로 인식하므로 끝까지 두는 것이 오히려 스포츠 정신에 맞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의 경우 아직 대한체육회의 정식 단체가 아닌 인정단체로 인정받고 있으나(전국체전에 전시종목으로 출전) 바둑이 올림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바둑 붐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됨은 물론이다.

바둑의 인기는 2005년 9월 11일 중국 후난성 남방장성에서 열린 `2005 남방장성 세계 바둑 고수 대결'로서도 알 수 있다. 세계 바둑 고수 대결은 사람이 바둑알이 되고 땅이 바둑판이 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둑 이벤트다.

바둑판 크기는 가로 31.7m, 세로 31.7m, 넓이는 300여 ㎡로 일반 바둑판의 1만 배 크기로 세계 최대 규모다. 청홍석으로 만들어진 바둑판은 돌 무게만 159t에 달하며 평평한 바위에 가로 세로 줄이 새겨져 있다. 바둑돌은 사람이 대신한다. 흰옷, 검은 옷을 입은 소림사 무술인 361명이 이어폰으로 등ㆍ퇴장의 연락을 받고 대국자가 착점한 곳으로 뛰어다닌다.

2003년에 한국의 조훈현 9단과 창하오 9단이 대국하여 조훈현 9단이 승리했고 2005년에는 한국의 이창호 9단과 중국의 창하오 9단이 대결했다. 승부는 3패빅을 기록해 무승부로 끝났다.

북한도 바둑 열기…남북 어린이 바둑대결도

선비들이 바둑 두는 모습(「후원아집도」).
바둑의 열기는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2005년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 5개 도시(베이징, 도쿄, 타이페이, 부산, 평양) 소년소녀 바둑대회에 북한이 참석하여 사상 첫 남북어린이 대국이 열리기도 했다.

현재 프로 기사가 되기 위해 수많은 어린이들이 바둑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세계 최강인 한국 바둑에 매료되어 한국을 찾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고령사회가 되면서 치매 등이 관건으로 떠오르자 바둑을 두면 뇌의 기능을 활성화시켜 치매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고 있다.

2000년 <한국갤럽>에서 조사한 한국의 바둑 인구는 유단자 0.3퍼센트(약 14만 명), 1~3급 1.0퍼센트(48만 명), 4~10급 12퍼센트(576만 명), 11~15급 3.3퍼센트(158만 명). 16급 이하 15.5퍼센트(744만 명)로 집계되었다.

바둑 인구 638만명 총인구의 13.2%

바둑을 둔다는 한국인이 무려 154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총 인구의 32퍼센트나 된다. 우리나라 인구의 1/3이 바둑을 둔다는 뜻이다. 한편 일반적으로 10급 이상을 유효 바둑 인구라 본다면 우리나라의 바둑 인구는 약 638만 명으로 총 인구의 13.2퍼센트나 된다.  

이와 같이 많은 한국인들이 바둑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즐기면서 한국이 세계적인 바둑 강국이 되자 바둑이 신토불이라는 설명도 있고 바둑을 스포츠로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설명도 있다.

변모된 한국에서의 바둑 위상은 바둑의 과거사를 따진다면 매우 놀라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바둑을 한량들의 잡기 중의 하나로 여겼고 한국의 바둑 실력도 세계적으로 보아 아마추어 수준으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왕따를 당할 정도였다.  

한국 바둑이 세계를 제패한 원동력이라고 알려지는 순장바둑과 바둑의 과학성 등에 대해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글은 전 <재단법인한국기원>의 사무총장 유건재 七단, 명지대 바둑학과 정수현 교수, 바둑전문가 김방식 등 많은 사람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제공 받았다.

80년대 까지 중국·일본 합심 한국 바둑 '왕따'

<왕따 당한 한국 바둑>

바둑 강국인 우리나라도 이창호가 나오기 전에는 일본과 중국에게 왕따를 당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단원은 네티즌 ‘가난한 엘프’의 글을 주로 참조했다.

근대 바둑을 꽃피운 일본과 바둑 후진국이던 한국은 1970년대에 처음으로 교류전을 갖는다. 결과는 8 : 2, 9 : 1. 한국의 2년 연속 대참패였다. 바둑 선진국으로 자부하던 일본은 한국과 교류전을 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자 3년째에는 아예 참석조차 거부했다.

2005년 중국 후난성 남방장성 세계바둑고수대결, 남방장성 세계 바둑 고수 대결은 사람이 바둑알이 되고 땅이 바둑판이 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바둑 이벤트다.


일본은 1980년대 들어 중ㆍ일 슈퍼대항전이란 국가 대항전을 만들지만 이번엔 중국과 합세하여 한국을 왕따시켰다.  

한국의 왕따는 일본과 중국에게만 당한 것은 아니다. 1988년, 대만의 갑부 잉창치가 우승 상금만 4억 원인 잉창치 배라는 슈퍼울트라 바둑대회를 만든다. 잉창치 배의 주최국인 대만은 각국에 출전권을 부여했는데 일본과 중국에는 각각 6, 7명의 출전권을 주더니 한국에는 단 1명을 배정했다. 잉창치 배에는 아마추어 수준인 미국, 유럽, 남미에도 각각 한 장씩의 출전권이 주었으므로 한국은 아마추어 취급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훈현 단신으로 대회 참가 섭위평 제치고 우승

당시에 조남철 · 김인 · 윤기현 · 조훈현 · 하찬석 등이 일본 유학했으나 일본은 한국에는 안중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은 조훈현이 단신으로 잉창치배에 참가했다. 조훈현은 중국과 일본의 고수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싸워 결승 5번기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철의 수문장으로 알려진 섭위평으로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어 바둑 두는 도중에 휴대용 산소 호흡기로 산소를 마셔 가면서 바둑을 둬야 했다. 섭위평은 문화 대혁명 당시 유한계급으로 분류되어 하루아침에 흑룡강 돼지우리 반장으로 신분이 하락되기도 한 특이한 이력의 사나이다.

둘은 치열하게 승부를 주고받았다. 결국 2 : 2 타이스코어에 운명의 마지막 대국에서 섭위평은 중간에 돌을 거뒀고, 옆에서 지켜보던 섭위평의 부인은 얼굴을 감싸 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섭위평과 부인은 그 후 갈등이 심해져 이혼까지 하게 된다.

조훈현이 감격의 잉창치배 우승하는 순간을 ‘가난한 엘프’는 다음과 같이 흥미 있게 묘사했다.

승리소식에 TV 해설자가 '만세삼창' 선동

‘단장으로 간 김수영 7단은 그 자리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TV로 공개 해설하던 노영하 8단은 조훈현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선동해(?) 만세 삼창을 했다. 차갑고 이지적인 해설자 노영하 8단. 평소에 별명도 선비다. 난 그가 그렇게 이성을 잃고 배가 튀어 나올 정도로 만세 삼창을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선비가 저렇게 망가져도 되나 괜히 나 혼자 걱정 했다.’

조훈현의 잉창치배 우승 이후 상황은 급반전하여 한국 바둑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세계 바둑대회는 한국의 독무대가 되는데 바둑의 세계는 실력자만 우대받는다는 극적인 사건이 생긴다.

아시아 5개 도시 어린이 바둑 대회.


1990년대 중반 한국의 이창호가 국내 도전기 전념을 위해 일본의 후지쯔배에 불참을 선언했다. 후지쯔로선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이미 세계 기류는 이창호의 참가 여부에 따라서 일류와 이류 대회로 분류되는 시대로 바뀌었고 그 중심에 이창호가 있었다.

골프엔 타이거 우즈, 바둑엔 이창호

골프에서 타이거 우즈가 참여하면 그 대회가 더욱 빛이 나듯이 이창호의 참여만으로도 그 대회의 격이 상승된다. 일본 측에선 이창호를 참가시키기 위해 한국의 고위층에까지 로비를 했지만 이창호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창호는 개인적으로 가볍게 일본 바둑계를 왕따시켰다고 ‘가난한 엘프’는 적었다.

하지만 더욱 일본을 괴롭게 만든 것은 다음해에 후지쯔배에 참가한 이창호가 간단하게 우승했다. 이창호의 신화가 태어나는 것이다.

한국을 왕따시킨 중일슈퍼대항전은 1990년대에 들어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중일슈퍼대항전 주최 측의 대답은 통쾌감을 느끼게 한다.

‘한국이 참가하지 않는 대회는 의미가 없다.’

이제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의미가 상실되는 시대다. 그렇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던 한국 바둑. 이젠 왕따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세계의 중심에 선 것이다. 실제로 한국바둑은 지난 2001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 세계대회란 세계대회에서 한국이 23차례나 연속으로 우승하는 영광을 안겨주었다. 잉창치배 · 삼성화재배 · 후지쓰배 · LG기왕전 · 춘란배 · 농심신라면배 ·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 · 도요타&덴소배 등이다.

천재 이창호도 새벽 2~3시까지 연마

유건재 七단도 한국 바둑은 걸출한 이창호와 그를 뒤쫓는 기사들이 있었기에 중국과 일본의 협공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창호 같은 천재도 노력을 하는지 의문이 드는 모양이다.

정답. 이창호는 새벽 2, 3시까지 바둑돌을 놓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천재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바둑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창호가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는 비결은 결국 부단한 노력과 실력 배양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바둑의 탄생>

바둑의 기원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게 전해지는 문헌이 없어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바둑의 기원을 대부분 고대의 전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둑알과 바둑통, 서진(西晉)시대인 301년경 매장된 유보장군의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흑103개, 백129개의 알과 도자기로 된 바둑통이 있다(자료 안용이).


중국 진대(晋代, 서기 265∼420)의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 ‘요조위기단주선지(堯造圍碁丹朱善之)'라고 적혀 있다. 또한 『중흥서(中興書)』에는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글이 있다. 우자(愚子)라 함은 요제(堯帝, 기원전 2333~2234)의 아들 단주(丹朱)와 순제(舜帝, 기원전 2234〜2184)의 아들 상균(商均)을 가리키는 말로 이 말은 ‘요나라 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 단주를 가르쳤다’와 ‘순나라 임금이 아들 상균의 어리석음을 깨치기 위하여 바둑을 가르쳤다’라는 뜻이다.

"요ㆍ순 임금이 아들 깨치기 위해 바둑 가르쳐"

요ㆍ순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황제이다. 그런데 황제가 된 요임금은 자신의 자식인 단주에게 제위(帝位)를 계승시키기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신하 중에서 동서남북 사제후(四諸侯)의 장(長)인 사악(四嶽)이 천거한 순을 만났다.

요임금은 순이 자신의 제왕위(帝王位)를 물려받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양위의 뜻을 굳혔다. 처음에 간곡히 사양하던 순은 요임금이 죽은 뒤 왕자 단주를 굳이 내세웠으나 제후들의 소망을 물리치지 못하고 천명으로 받아들여 61세 되던 해에 천자(天子)에 즉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유명한 오청원 기성은 요임금에게 선인이 아들 단주에게 바둑을 가르치라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적었다.

360은 일수, 네귀는 4계절, 72로는 1년 절후

‘만물의 수는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반면에는 361로의 눈이 있고 일이라는 수의 근원은 천원으로부터 시발하여 사방을 제한다. 360이라는 수는 하늘이 일회전하는 일수를 표현하며 네 귀로 나누어지는 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의미한다. 외주의 합계가 72로인 것은 1년을 72절후로 구분하는 것과 같으며 360개의 기석이 흑백 반반인 것은 음과 양을 표시하는 것이다.

기반의 선을 평이라 하고 선과 선 사이를 괘라고 한다. 바둑판은 네모지고 정적이지만 바둑돌은 원형으로 동적이다. 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바둑이 두어졌지만 동일한 국면의 바둑은 한 판도 재현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일일신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특히 선인이 부연하기를 바둑은 발흥존망(發興存亡)의 기예(技藝)이므로 단주의 성품 기질로 보아 바둑에 몰두한다면 차츰 바둑 두는 데 흥미를 붙여 세상에서 만용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설명에 대하여 부정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국 원대의 순제 9년(1349년)에 엄덕보(嚴德甫)와 안천장(晏天章) 두 사람이 공동 편저한 『현현기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중국 고대의 황제 요ㆍ순은 바둑을 창안하여 그 아들에게 이를 가르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의문을 품고 요제의 아들 단주와 순제의 아들 상균이 둘 다 어리석은 자였다고 하는데 모름지기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요ㆍ순 임금이 아들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리를 가르쳤어야 옳은 일이지 어찌하여 한가하게 노는 기구와 남을 기만하는 술법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더하게 하셨을 것일까 했다. 그럴 리가 없다.’

중국 남경의 부자묘(공자 사당) 야경, 공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장기나 바둑을 두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사실 ‘어리석은 아들'이라면 바둑을 배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바둑이 단순 놀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게 익힐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욱이 일본의 소천탁치(小川琢治)는 『태평어람』에서 ‘단주선지(丹朱善之, 단주가 바둑에 능했다)’라는 글이 있고 『광운』에서는 요임금이 아니라 순임금으로 바뀌어 있는 점을 들어 요ㆍ순 중 누가 맞는지 결정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소천탁치는 중국에서 요와 순을 내세운 것은 육조(六朝)시대에 바둑이 유한(有閑) 계급들로부터 호감을 받게 되자 바둑이 재지(才智) 계발(啓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요와 순이 만들어서 남긴 것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고 추후에 점점 과장이 되어왔다고 추정했다. 한편 바둑 역사가 미즈구치는 바둑의 기원으로 중국의 은나라(기원전 16세기~17세기)로 잡고 있으며 전국시대에 바둑이 활발히 두어졌음은 인정했다.

바둑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현현기경』이 적은 내용은 매우 날카롭다.

"바둑은 곧 우주"

‘바둑이라는 것은 그 형상으로 보아 하늘은 둥글고(天圓) 땅은 네모진 모양(地方)과 흡사하게 만들어졌고 흑백의 다툼에는 천지음양동정(天地陰陽動靜)의 도리가 작용한다. 바둑을 두어 가는 반면의 위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질서정연함이 있고 국면의 추이는 풍운의 변화와 같은 기운을 함축하고 있다.

살아 있던 바둑돌이 죽는 수도 있고 전 국면을 통하여 변화해 가는 흐름의 양상이 마치 산하의 표리지세(表裡之勢)를 나타내는 조화와 같으니 인간세의 도리나 부침이 하나같이 바둑의 이치와 같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현현기경』은 바둑의 이점을 다음과 같은 일화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송나라 명제(明帝) : “바둑은 인군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소암노인(卲庵老人) : “옛날 성인이 기구를 만드는 데 있어서 그 정밀한 뜻이 신묘한데 이르렀으니 결코 무익한 습속이 아닙니다. (중략) 바둑을 두는 데 있어서 그 계획 · 조직 · 운영하는 방법과 공격과 수비를 살펴서 결정하는 도는 국가에서 정령(政令)을 출납(出納)하는 기틀과 전쟁터에서 싸움하는 방법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배워서 익히는 것은 편안한 시기에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계감이 될 수 있습니다.”

원나라 말기 지정 9년(1339)에 구양현은 『혁서(弈序)』에서 자신의 성미가 급하고 졸렬하며 어렸을 때 가난하여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금(琴)과 바둑(弈)에 무지하여 매번마다 사대부들에게 조롱을 받았다며 바둑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여섯가지 재능 익힌 후 바둑으로 지혜 점검


‘옛날에는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소학(小學)을 가르쳤고, 20세가 되면 약(弱)이라 하여 관례(冠禮)를 치렀는데, 이때쯤 되면 벌써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 이 여섯 가지 재능을 다 익힌다. 그리하여 훗날, 활쏘기를 하고 난 뒤 여가 시간에 투호(投壺)로 예(禮)를 관찰했고 바둑을 두어 지혜를 점검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양심(良心)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긴장과 이완을 조절하는 좋은 방법이 된다.’

바둑은 공자가 거론했다는데도 큰 중요성이 있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포식하고 날을 보내며 마음을 쓰는 데가 없다면, 그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장기나 바둑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거라도 하는 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飽食終日 無所用心 不有博弈者乎).’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바둑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로 바둑이 많이 보급되었음을 뜻한다. (계속)
이종호(05/10/17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조선 성리학 세계관과 맥 맞닿아"
세계 제패의 원동력, 한국류 순장바둑(2)
<19줄 바둑 탄생>

오청원 기성의 설명에 의하면 바둑이 19줄로 처음부터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학자들은 바둑이 처음부터 요즘처럼 19줄로 된 바둑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9줄 정도에서 17줄, 19줄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추측한다. 이것은 과거의 바둑은 현재보다 훨씬 단순한 게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둑이 17줄로 변경된 과정에는 다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처음에 9줄에서 11줄로 늘려 게임을 복잡하게 하여 흥미진진하게 만들었고 계속하여 13줄, 17줄로 서서히 확대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둘째는 9줄 4개를 합쳐 17줄이 되었다는 것으로 일본의 야스나가(安英一)가 주장한 설이다.

그러나 다니오카 이치로는 앞의 두 가지 설보다는 9줄에서 중앙에 한 줄씩 삽입하여 17줄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간단하게 말하여 지면이나 돌, 나무로 9줄의 바둑판을 만들었는데 그 중간마다 한 줄을 더 삽입하여 17줄로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19줄 바둑 기원 확실치 않아

고려시대 연꽃무늬 바둑판(자료 한국기원).

19줄의 바둑이 당나라 초에 이미 행해졌다는 것은 일본 정창원(正倉院, 일본 고대왕실의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되어 있는 바둑판이 19줄인 사실에 비추어 명확하다고 생각하지만 19줄 바둑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위(魏)나라 한단순(邯鄲淳)의 『예교』, 오(吳)나라 위소(韋昭)의 『박혁론』, 송(宋)나라의 『오잡조』등의 문헌에는 한위(漢魏) 이전의 바둑판은 17×17줄이었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내용은 1953년 중국 한(漢)나라의 망도(望都, 하북성)에 있는 고분을 발굴한 결과, 그 안에서 17×17로 된 돌로 만든 바둑판이 출토됨으로써 사실임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후한말부터 삼국 시대에 행해졌던 바둑이 17줄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6세기 전반 양무제(502〜549)가 19줄을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6세기 전반에 19줄이 도입된 것 아닌가 추정한다.

그런데 17줄에서 19줄로 변경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설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게임은 일반적으로 복잡함이 늘어나면서 재미가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된다. 그러나 복잡함이 지나쳐서 불필요한 시간이 걸리거나 게임 룰이 복잡하면 흥미를 잃는 경향이 있는데 17줄이나 19줄과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이다.

"19줄보다 17줄이 더 재미있을 수도"

우선 19줄이 17줄보다 반드시 더 재미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바둑, 장기 등 여러 가지 게임에 관한 인공지능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시즈오카 대학의 이이다(飯田) 교수는 19줄보다 17줄이 더 재미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3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17줄 티베트 돌바둑판.


이것은 19줄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대략 361!/4(패, 후절수 등과 같이 이미 둔 곳에 돌을 들어내고 다시 둘 수 있는 경우는 제외함) 정도로 본다. 이것을 계산하면 10의 700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된다. 17줄의 경우도 289!/4가 되는데 이것도 만만한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4로 나누는 이유는 바둑판은 상하좌우 대칭의 구조로 되어 있어 4면으로 나뉘어 지며 각 면의 착점은 동일한 경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청난 경우의 수 때문에 인간에 필적할 수 있는 컴퓨터 대국 프로그램의 개발은 거의 불가능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적으로 현재까지 개발된 대국 프로그램 중 가장 강한 것이 10급 정도의 기력을 갖고 있다고 최일호 교수는 설명했다.

체스는 컴퓨터가 인간 이겨

한편 체스의 경우는 상대적인 경우의 수가 적어서 컴퓨터 디프블루II(Deep blue)가 1997년 1500년 체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던 러시아의 게리 카스파로프를 6전 2승 3무 1패로 물리쳤다. 공식 경기에서 로봇이 인간을 처음으로 패배시켰는데 그 대상이 세계적인 천재라는 체스챔피언이라는 점에서 세계가 경악했다.

물론 딥 블루의 승리는 딥 블루의 프로그램을 설계한 프로그래머에게 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정확한 지적이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보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지만 그것을 계산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만들어 준 것은 체스에 대해 이해가 높은 프로그래머라는 뜻이다. 즉 프로그래머는 카스파로프와 직접 대결하여 체스 경기를 이길 수는 없지만 프로그래머가 입력시킨 수많은 경우의 수를 딥 블루가 저장된 정보에서 불러드릴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카스파로프가 패배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바둑판이 17줄에서 19줄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가설의 또 다른 문제점은 17줄보다 19줄을 그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9줄에서 17줄을 만드는 것은 비교적 단순한데 반하여 19줄을 만들려면 적어도 17줄 바둑판을 먼저 그리고 그것을 크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즉 재미 면이나 제작 면에서 힘든 19줄로 변형될 이유가 크지 않다는 지적으로  게임론의 측면 즉 19줄이 17줄보다 더 재미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규모가 크게 되었다는 설명이 궁색해진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17줄에서 19줄로 변경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고 믿는다.

바둑판 과거에는 달력으로 사용

정창원에 보관된 바둑판, 한국에서 7세기경 전해진 것으로 추정하며 테두리가 없다.

일본의 안도(安藤如意) 교수는 17줄에서 19줄로 변한 것은 중국 당나라의 달력개정에 의한 것으로 설명했다. 또한 다니오카 이치로는 원칙적으로 수나라에 이미 19줄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19줄이 처음 나타났다는 설 자체는 부정되지만 당나라와 수나라의 개국 연대상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둑판이 점이나 달력으로 사용되어 졌다는 설명에는 많은 학자들이 동감한다. 중국의 고전인 『현현기경』에는 1년은 360일(바둑판은 19X19에서 천원을 빼면 360이 됨)이고 바둑판의 9개의 성(星)은 구요(九曜), 4개의 방향은 동서남북을 나타내고 4개의 귀는 사계절을 표현한다고 설명된다. 이런 설명은 바둑판을 점으로 사용했다는 것과도 연결되어 기원전 11세기 주나라 시대의 음양오행설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즉 수나라 또는 당나라로 확정짓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17줄과 19줄이 수나라와 당나라 때 동시에 발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도 있다.

다니오카 이치로는 대략 춘추전국시대가 끝나는 수나라 시대에 점을 담당하는 관리가 바둑판은 17줄보다 19줄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설명하여 19줄로 변경되었다고 가정했다.

한편 7세기경 한국에서 전해졌다고 알려진 일본의 정창원에 보관된 19줄의 바둑판에는 테두리가 없다. 즉 그려져는 있으나 이 선 위에 무리를 해도 돌을 올려놓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는 17줄로 바둑이 두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달력이나 점의 목적으로 테두리 부분을 포함하니까 자동적으로 19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둑의 기원 '천체관측설'

여하튼 바둑의 기원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천체관측설’이다.

농경(農耕)사회였던 고대에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하유역에는 해마다 홍수가 범람하여 선사시대 때부터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던 도구가 발전되어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천체관측설’에 오청원 기성도 다음과 같이 동조했다.

바둑은 당초부터 천문학을 연구하는 도구로 태어났고 요임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임금이 부족한 아들 단주에게 바둑을 가르친 것은 바둑을 공부하면 천문학을 연구하는 역(易)이나 제례에 관한 교양을 터득할 수 있다는 의미라는 뜻이다. 간단하게 말하여 아들에게 제정(祭政) 중에서 제(祭) 쪽을 맡아 일하고 정치에는 손을 떼라는 뜻을 함축한다.

바둑을 한자로 기(碁) 또는 혁(奕)이라고 쓰는데 혁(奕)ㆍ역(易)ㆍ의(醫)는 중국발음으로 '이'라고 읽으며 력(曆)은 '리'라고 발음하니 비슷하게 닮았다는 점도 이 가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먼 옛날 중국의 통치개념이 제정일치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역이나 천문이나 천명, 즉 신의 명령이나 암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 오청원 기성의 생각이다.

가장 오래된 바둑판은 티베트서 출토된 3000년전 것

한편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돌바둑판은 20세기 말 티베트 왕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약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티베트 바둑은 왕족과 승려들이 주로 두었는데 17줄이다. 지금까지는 1952년 중국 하북성 망도에서 출토된 17줄 돌 바둑판(후한시대 서기 182년)이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 배치도, 네 군데 귀와 변, 그리고 중앙 한 복판에 17의 돌을 미리 놓고 백1, 흑2, 백3, 흑4로 바둑이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바둑은 중국에서 태어나 한국, 일본 등으로 퍼졌지만 현대바둑의 틀은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일본 막부(幕府)시대에 바둑은 국기(國技)로 적극 지원을 받으면서 바야흐로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바둑을 업(業)으로 삼는 기사(棋士)제도와 본인방(本因坊)등의 바둑가문이 생기고, 이들에 의해 룰이 정비되며 각종 이론, 정석이 태어나는 등 비로소 근대경기로서의 틀과 체계가 세워졌다.

20세기에 이르러 가문세습제도 대신 협회(일본기원)와 프로제도가 탄생하고, 신문사들이 기전의 스폰서로 나섰다. 일본의 뒤를 이어 뒤늦게 중국, 한국, 대만 등지에서도 프로 바둑제도를 도입하고 다양한 국제기전을 창설하는 등 적극적으로 바둑을 권장하자 오늘날과 같은 바둑 붐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바둑은 한국말>

'바둑'이란 말은 한자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고유한 우리말로 추정한다. 해방 전까지는 '바독' 또는 '바돌'이라 불렀으며 일부지방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독'이나 '돌'자는 한자의 돌석(石)의 뜻을 표현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단원은 네티즌 ‘뿌리(ko5135)'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최남선, 산스크트어 'Badh(바드)'→'바독'→'바둑' 추정

육당 최남선 선생은 일찍이 인도네시아어인 '바투(Batu)'를 바둑의 원말로 보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바둑서지학자인 안영이는 우리의 순장바둑이 티베트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바둑을 뜻하는 초기 산스크트어 'Badh(바드)'가 '바독-바둑'으로 변화된 것으로 추정했다.

한편 바둑의 어원을 ‘밭(田)'과 ’돌'의 결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역에 따라 돌(石)을 ‘독'(경상ㆍ전라ㆍ제주ㆍ충청도 등 남부지방)이라고 하고 바둑을 ’바돌'이라고 하는 것을 감안할 때 바독의 ‘독'이 석(石)을 의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밭독'으로부터 ‘ㅌ’ 받침이 떨어져나가 ‘바독'이 되고 다시 ‘독'이 ‘둑'으로 변하여 오늘날의 바둑이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밭'과 ’독'이 결합하여 지시하는 의미가 분명치 않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밭독'설에 근거한다면, ‘밭'은 넓은 바둑판을 지칭할 수도 있고 361개의 네모난 공간을 가리 킬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역사언어’라는 음운학적 추출 방법론(PEM, Phonological Extraction Methodology)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한자, 한글 등 각종 어휘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권명수는 바둑을 ‘바닥에 줄로 그은 집을, 서로 뺏으려고, 차례로 돌을 두어, 그 에워 싼 집의 크기로, 겨루는 것’이 줄은 말이라고 설명한다.  즉, ‘뺏으려+(돌을) 두어+겨루는 것’à ‘ㅂ+ㄷ+ㄱ’à ‘바+둑’이라는 뜻이다.

한국, 중국·일본과 달리 고대부터 순장바둑

중국 당(唐)나라 때 기사들의 실전에서 나타난 포석장면, 흑.백이 대각선으로 네 귀의 화점에 미리 돌을 놓고 백의 선수로써 바둑이 시작된다.

여하튼 우리나라는 일본과 중국과는 달리 고대부터 순장바둑을 두었다. 순장바둑은 17개의 지점에 바둑돌을 미리 배치하고 시작 했는데, 이를 일컫는 배자(排子)가 바둑이라는 명칭의 어원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화점상의 배자, 즉 ‘백돌-배독-바독-바둑'으로 변음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다. 순장바둑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한다.  

바둑을 한자로는 기(棋), 기(碁), 혁(奕), 위기(圍棋)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기(碁)'가 주로 사용되고 중국에서는 ‘기(棋)' 자를 쓰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다. ‘혁'이라는 글자는 공자의 글에서 나타나는데 혁의 뜻은 '바둑 두는 것', 즉 위기와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위기(圍棋)'는 ‘바둑을 둔다'는 행위를 뜻하는 중국용어이다.

바둑 전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한사군설(漢四郡說)

일반적으로 바둑의 한반도 전래설에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한사군설(漢四郡說) 두 가지가 있다고 권경언 六단은 적었다.

기자동래설이란 『한서지리지』에 근거하는 설로서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周)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紂)왕을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운 뒤 현인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책봉하여 단군조선의 뒤를 잇게 했는데 당시 기자가 부하 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올 때 학술ㆍ기예 등 각 분야에 훌륭한 인재들이 기자를 따라와 조선에 문화를 전파했으며 그 중에 바둑 두는 사람이 있어 한반도에 바둑을 전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한사군설이란 중국 한나라 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당시 조선을 통치하던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을 멸망시키고 위씨조선의 옛 땅에 낙랑ㆍ진번ㆍ임둔ㆍ현도 등 4개의 군현을 설치했는데 그 시절 한인 관리와 상인들이 내왕하면서 바둑이 전해졌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기자동래설은 한족(漢族)이 한사군을 지배할 당시 그들의 통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억지로 조작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고 위만에게 멸망당한 기자조선의 마지막 임금 준왕의 성이 한(韓)씨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 씨 정권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기자를 참칭(僭稱)했다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으므로 기자조선시대에 바둑이 전래되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권 6단은 적었다. 또한 한사군시대의 바둑전래설도 확실한 문헌의 근거는 없다는 지적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삼국시대에 이미 바둑이 성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중국 사서 "백제 바둑을 가장 숭상"

중국의 『북사(北史)』 <백제전>, 『주서(周書)』 <백제전>, 『수서(隋書)』 <동이전> 등에는 「백제의 풍속에 투호ㆍ저포 등 여러 가지 놀이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바둑을 가장 숭상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구당서(舊唐書)』 <고려전>, 『신당서(新唐書)』<고려전> 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바둑과 투호놀이를 좋아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신당서』 <신라전>과 『구당서』 <신라전>에는 당나라 현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 신라인들이 바둑을 잘 두므로 바둑을 잘 두는 인물 솔부병조참군 양계응(楊季鷹)을 부사로 삼아 보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조(蓋鹵王條)에 나오는 승려 도림(道琳)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막강한 백제가 버티고 있으므로, 고구려에서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장수왕에게 첩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백제에 거짓 망명을 하였다.

백제에 와서 개로왕과 바둑을 두면서 친하게 되자 도림은 개로왕에게 진언하여 왕릉ㆍ성곽 등을 개수하도록 하고, 그 결과 국고를 탕진시켜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치자, 패배한 개로왕은 피살되고 태자 문주(文周)는 몇 사람의 심복과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도망가 임시 도읍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바둑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신라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기 전 왕자로 있을 때 신충(信忠)과 함께 대궐 안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 왕자는 신충이 어질고 현명한 데 마음이 끌려 ‘후일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으면 저 잣나무가 증언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려시대 여성들도 바둑 즐겨

여가시간에 담배 피고 바둑 두는 기생, 고려 시대의 이규보는 평양 기생 진주(眞珠)가 바둑이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한판 두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를 쓸 정도로 고대에는 남녀가 모두 바둑을 뒀다.

그 후 성덕왕 36년에 부왕이 승하하자 효성왕이 왕위에 올랐고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신충이 빠져 있었다. 이에 신충은 못내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잣나무에 글귀를 써서 붙였다. 그러자 잣나무가 말라죽고 말았다. 효성왕은 이상히 여겨 잣나무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에서 신충의 글이 발견되었다. 효성왕은 놀라 ‘내가 국사에 골몰하다가 그만 그대와의 언약을 잊을 뻔했구나'하면서 신충을 불러 작록을 내리고 그에게 국사를 맡겼더니 잣나무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도 바둑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평양 기생 진주(眞珠)가 바둑이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한판 두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보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다. 그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자주 어울려 바둑을 두었는데, 당대 제일가는 고수로 알려졌다. 또한 이순신 장군도 평소 바둑을 즐겼다는 것은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바둑 두었다는 말이 4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대원군, 바둑 잘둔다고 사또 임명도

흥선대원군이 매우 바둑을 즐겼는데, 김만수라는 사람이 바둑을 잘 둔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함께 바둑을 둔 결과 실력이 우수하자 대원군은 김만수를 의성(義城) 고을의 사또로까지 임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최근 바둑의 ‘중국 기원설(起源說)'에 대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바둑사학자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바둑이 중국에서 발상했다는 것은, 지역적으로 한반도 이북의 땅이면 무조건 중국이라고 여기는 데서 비롯된 오류로 보인다. 바둑이 요ㆍ순(堯舜)시대에 생겼다는 기록을 인정하더라도 그때에 무슨 중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가. (중략) 오늘날 만주로 불리는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이른바 ‘동이족(東夷族)'이었고 그들은 후에 고구려를 세웠고 우리 민족의 원류가 되었다.

따라서 바둑은 ‘지역적 산물'이 아니라 '종족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게다가 지역적으로 보더라도 한반도 이북의 만주 지역은 우리의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땅이었다. 그렇다고 바둑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우리가 강조하는 바는, 바둑은 그저 ‘동이족'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편이 보다 사실에 접근하는 태도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여 보다 명쾌한 결론을 제시할 것이므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한국 바둑의 뿌리 순장바둑>

기본적으로 바둑이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한ㆍ중ㆍ일 동양3국 각 나라마다 바둑 두는 식이 과거에는 다소 달랐다. 우리나라 고유의 순장바둑은 네 군데 귀와 변, 그리고 중앙 한 복판에 돌을 미리 놓고 바둑을 시작한다. 따라서 순장바둑에는 소목이니 외목, 고목 따위의 착점이 있을 수 없고 포석이 없으며 흑, 백의 돌이 서로 끼어져 놓여 있어서 출발부터 곧바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한ㆍ중ㆍ일, 과거 바둑두는 방식 서로 달라

반면에 중국 당(唐)나라 때 기사들의 기보를 보면 요즘과 달리 흑, 백이 대각선으로 네 귀의 화점에 미리 돌을 놓고 백의 선수로써 바둑이 시작된다. 이를 보면 과거에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삼국이 똑같이 중국식 바둑을 두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에서는 배자(排子 : 미리 놓고 두는 돌)가 많아지고 일본에서는 배자가 사라지는 쪽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다.

순장바둑이 우리나라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두어졌다는 것으로는 앞에서 설명한 일본의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바둑판으로도 알 수 있다.

서기730년경 일본의 성무제(聖武帝)가 애용했다는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에는 백제의 의자왕이 보냈다는 명문이 있다. 모양은 우리의 재래식 네발 달린 주안상과 비슷한데 반면은 자주색 박달나무판이고 가로 세로 눈금은 상아를 가늘게 박았으며 정교한 꽃술무늬 화점(花點) 17개가 박혀 있다. 옆면에는 낙타, 사슴, 공작새 등 각종 동물과 꽃을 상아로 조각하여 박았고 바둑알을 넣는 서랍이 대각으로 달려 있어 정교하고도 화려한 공예예술의 진귀품으로 바둑알은 300개이다.

순장바둑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은 순장이란 단어조차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권경언 6단의 글에서 참조한다.   

"순장바둑, 조선바둑과 일본바둑 구분위해 생겨"

한국기단 초창기의 노국수이자 한학자인 신호열(辛鎬烈)은 우리나라의 바둑 명칭은 원래 화점바둑이라고 설명했다. 바둑돌을 놓는 점에 꽃무늬로 표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순장바둑이란 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바둑이 들어오면서 조선바둑과 일본바둑을 구분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라고 적었다. 그러므로 순장바둑이란 그냥 우리말이며 한자로 표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서 만약 꼭 한자로 쓴다면 순수한 어른스런 점을 놓고 둔다는 의미에서 순장(純丈)이 라고 쓰는 것이 옳다고 설명했다.

한학자 홍진표는 순장(巡將)으로 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판 위에 17의 배자를 놓은 모양이 요소마다 장수를 배치한 것과 흡사하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것이다. 바둑은 예로부터 용병에 비유되었다. 쉬운 예를 들어서 진을 치고, 공격하고, 수비하고, 쫓아가고, 도망치고, 죽이고, 살리고, 하는 바둑 용어들이 모두 전쟁용어이므로 순장이라는 말이 바둑에서 사용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는 설명이다.

권명수는 순장이라는 한자의 뜻을 보면 ‘서로 돌아가면서 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바둑’에서 그렇게 안 두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그는 순장(巡將, 쒼+쟝)이란, ‘처음에, 맞서게+쌓고 두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반면에 한국 바둑의 개척자로 불리는 원로기사 조남철 9단은 자서전에서 순장(順丈)바둑이라고 표기했다. 이것은 순번대로 장(丈)점을 놓고 둔다는 의미이다.

한편 1933년 11월, 조선기원에 나오는 몇몇 국수급 기사들이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해 『신정기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순장바둑의 맞바둑 기보와 접바둑 기보, 그리고 순장바둑 정석 등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순장이란 말은 없고 장점(將點)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반면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순장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바둑 서지학자인 안영이씨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연화문바둑판을 공개하여 사실이 아님을 확인했다. 17개의 화점과 그중에서도 천원의 연꽃무늬가 크게 그려졌으며 바둑판을 뒤집으면 역시 중앙에도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때 고려시대에도 순장바둑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또한 구한말 고종 때 금부도사와 중추원의관 등을 지낸 정환직의 기국문에는 ‘순장혹흑점겸백권이흑마(巡將或黑點兼白圈以黑摩, 순장은 흑점, 또는 백의 세력권에도 흑기를 꽂았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장이라는 말은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생긴 말은 아닌 것이 확인된다.

반면에 문용직 五단은 순장바둑이 조선 성리학과도 맥이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순장의 어원은 순랏길로 궁성 수비를 하는 종3품 이상의 벼슬아치로 볼 수 있다. 논어에 나오듯이 천원을 북극성으로 볼 때 이를 둘러싸 지키는 순장바둑의 형태는 조선 성리학의 세계관과 맥이 맞닿아있다고 여겨진다."

한편 순장이란 단어를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권경언 6단은 순장바둑의 바둑이란 말은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순장은 한문의 어조가 분명한 것으로 보이므로 한자를 사용할 때는 순장(巡將)이 옳다고 설명했다.

"미리 포석 전투적 형상 특징"


정수현 교수는 순장바둑의 특성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순장바둑은 바둑판 위에 미리 16점의 돌을 깔아놓고 두는 특이한 방식이다. 반상의 요소를 흑과 백이 똑같이 점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미리 포석을 해 놓고 시작하는 식이다. 그런데 돌의 배치가 각자의 진형 사이사이에 상대방의 돌이 들어가 있어 전투적인 형상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순장바둑은 처음부터 전투로 돌입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 때문에 이론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으며,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적 처리가 중요하다.’ (계속)
이종호(05/10/24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일본식 정석 탈피 자유분방한 기법 구사
세계 제패의 원동력, 한국류 순장바둑(3)
<한국류 바둑과 통하는 순장바둑>
순장바둑은 그동안 자료 부족으로 베일에 싸여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2005년 4월 바둑사료연구가 안영이씨에 의해 ‘순장(巡將)바둑’ 기보가 대거 발굴되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일보>에 게재됐던 순장바둑 기보(棋譜) 39개를 새로 발굴하여 공개했다. 그가 발표하기 전까지 내려온 순장 기보는 3, 4국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새로 발굴된 순장 기보 39국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26년 <중외일보>에 실렸던 도은각ㆍ김형권의 「제1회 명가기전 신국」으로 지금까지 최고(最古) 순장 기보로 전해져 온 1927년의 윤경문ㆍ손득준 대전 기보보다 앞선다.

1926년 도은각-김형권 대국 가장 오래된 순장 기보

이들 39국 중 초기 6국은 1926년부터 1928년 사이 <중외일보>에, 나머지 33국은 1933년부터 1937년까지 3년 반 사이 <조선일보>에 각각 게재됐다.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압곡리 물골의 순장 돌바둑판, 순장점이 선명히 보이며 취석정을 세운 최문발(1607~1673)이 제작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사진 남치형).


이 무렵은 자유 포석 방식의 일본 규칙이 국내에서도 성행했던 시기로 <조선일보>에 실린 33국은 '조선기원위기대국보', '국수선발위기대국보' 등으로 타이틀전 형태를 띠었다. 특히 1937년 3월 말부터 한 달여 동안 게재된 노사초ㆍ채극문 대전 기보는 마지막 순장 기보이다. 1937년 1월 1일을 기해 유진하ㆍ윤경문 등의 국수급 기사들이 ‘현대화’를 명분으로 순장바둑의 폐지를 결의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임덕수는 순장바둑이 폐지되고 일본 규칙을 채택한 것은 포석의 개념과 연구가 없었던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특히 한국 바둑의 산 증인이라고도 불려지는 조남철 9단을 비롯한 한국의 기사들이 일본에서 바둑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일본의 바둑이론과 기술을 보급함으로써 한국바둑은 일본바둑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 한국바둑이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한편 순장바둑 규칙의 ‘첫 수’ 착점과 관련된 표기법에도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1926~1938년 사이 <중외일보>와 <매일신보>에서는 1착을 백으로 시작한 것과 달리, <조선일보>에서는 1933년부터 일관되게 복점(腹點, 천원)의 흑1을 첫 점으로 표기했다. 또한 순장바둑에도 현대식 ‘덤(공제)’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순장바둑, 현대 한국류 바둑과 일맥상통"

정수현 교수는 순장바둑이 현대 한국류 바둑과 일맥상통한다고 적었다.

‘전통적인 일본바둑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착상이 한국바둑에서는 상당히 흔하게 나타난다. 처음에 한국류 정석이 나왔을 때 일본의 어떤 기사는 “모양도 이상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결과는 나쁘지 않으니 희한하다"고 평했다.’

‘한국류 정석’ 또는 ‘한국형 정석’은 일반적으로 한국기사들의 연구 · 계발을 통해 얻어진 독특한 성격의 정석을 가리킨다고 임 덕수는 적었다. 김승준과 김창호는 한국류 신수의 특장(特長)을 ‘일정한 타성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실전적인 수법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것’이라고 규정했고 박치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류란 일견 거칠고 험하며 이전투구의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원리에 얽매이지 않으며 필요하다면 미추를 떠나 빈삼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순장바둑 기보, 순장바둑은 1937년 1월 1일을 기해 ‘현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폐지됐다.


정수현 교수도 한국류를 바둑 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출현’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한국류의 정석은 이론과 모양에 입각한 일본식 정석에서 벗어나 실전 상황이라는 맥락에서 돌의 효율성을 추구하여 자유분방하게 수를 구사하는 특색을 갖고 있다.’

정수현 교수는 바둑에서 독특한 맛을 풍기는 한국류는 우리 조상들이 즐겼던 순장바둑의 전통에서 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순장바둑을 배운 적이 없는 이창호ㆍ이세돌 등 젊은 기사들이 순장바둑의 얼을 이어받은 것은 한국적인 토양에서 형성된 전통이 핏줄 속에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평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오늘날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것은 과거부터 축적된 실력이라고 보아도 된다는 설명이 된다.

이론 · 모양보다 싸움으로 바둑판 주도

유건재 7단은 한국 바둑에 있어 순장바둑의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순장바둑은 한정된 공간에서 전투를 벌이는 로마 콜로세움 안에 있는 검투사들과 같다. 검투사들이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을 죽이거나 죽었을 때이다.

순장바둑은 사전에 바둑돌을 놓고 두기 때문에 이론과 모양보다는 싸움으로 바둑판을 주도하면 이기고 그렇지 못하면 패한다. 반면에 일본 바둑은 이론과 모양에 치중하여 한국 기사들의 순발력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할 수 있다. 한국의 바둑이 이론과 모양에서는 이상하다고 일본인들이 말했음에도 한국 기사들이 승리하는 것은 순장바둑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류의 전통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한국류라 불리는 신수, 신형 대다수의 형태는 이미 중국이나 일본에서 시도되었던 수들의 파생형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임덕수는 적었다. 물론 한국에서 자체 개발된 새로운 형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천 년에 걸쳐 연구되어 온 바둑 이론의 토대 위에서 보았을 때 한국류란 기존 바둑이론의 큰 줄기에서 나온 하나의 작은 줄기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반면에 조훈현, 이창호 등 국수(國手)들이 순장바둑의 핏줄이라는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문용직 5단은 한국류가 한국기사의 바둑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님을 지적했다. 그는 ‘한국류’란 한국바둑이 제한시간이 짧고 덤이 일본보다 1집이 많은 데 기인하여 전투적 성향을 띠는 것으로 한국류를 어떤 독특한 발상, 새로운 영역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문 5단은 우리의 핏속에는 훨씬 깊은 원초적인 바둑의 기운이 있으며, 그건 인류 모두에게 있다고 설명했다. 순장은 바둑 형식의 일부로 폭 넓은 계층이 향유한 것도 아니었으며, 금기서화(琴棋書畵)를 즐기고 시간이 남았던 몇몇 소수들의 오락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바둑의 보편성이 바둑의 출발 · 종착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5단은 순장바둑이 우리의 전통이라는 데에는 인식을 같이 한다. 그는 과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특정한 과거보다는 보편적 바탕에의 이해가 오늘날 요긴하다고 주장했다. 다소 난해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문 五단은 바둑의 보편성이야말로 바둑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이라고 설명했다.

바둑을 한민족의 과거 역사와 연계시키는 시도도 있다. 한국은 외적의 침입이 비교적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전력의 열세로 초반에는 매우 고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슬기롭게 극복했다는 것은 한국민이라는 특성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글을 독자적으로 사용하면서 한국이라는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외적이 침입하여 패배했을 경우 모든 권한은 승자에게 돌아가고 패자는 승자의 아량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한 난세를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큰 틀에서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비교적 대국의 형세를 잘 살피고 바둑판면을 확실히 이해하면서 대국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은 한국민들에게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유산이라는 것이다.

2005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바둑대회, 외국인들의 바둑 열기에 힘입어 문화전도사로서 바둑 사범들을 세계에 파견하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사진 이요섭).


<문화전도사로의 바둑 역할>

바둑은 평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동양에서 예로부터 금기서화(琴棋書畵) 즉 4가지 예(藝)의 하나로 유희 중에서도 최고의 유희로 인정받았다. 그러므로 바둑을 스포츠 혹은 놀이로 말하는 것을 거부하며 도(道) 혹은 예술로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테오리치는 중국 사람들은 바둑만 잘 두면 다른 것으로 그 능력을 증명해 보일 필요 없이 무엇이든 잘 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고 적었다고 남치형은 적었다. 즉 바둑은 바둑을 두는 사람의 격을 높여주는 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바둑은 어느 정도 귀족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바둑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다른 놀이처럼 쉬운 것도 아니며 한 판을 두는데도 많은 시간을 소모하므로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둘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바둑과 관련되는 인물들이 대부분 양반 계급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물론 바둑이 마을 전체의 도락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는다. 정호영 교수는 바둑판과 함께 돌장기판, 돌고누판 등이 발견되는 것을 볼 때 바둑도 이들 놀이와 함께 서민들이 즐겼다는 추정이다.

여하튼 바둑의 장점으로 바둑전문가 김방식은 교육적 가치와 정서적 가치를 꼽았다.

바둑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교육적 가치가 많다는 것은 바둑의 자정능력 때문이다. 바둑의 덕목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는 바둑을 두면서 인생을 터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손으로만 두는데도 정서적 가치 얻을 수 있어

바둑을 커다란 전쟁터로 연상하고 처음 착점부터 전쟁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착점에 따라 자신의 작전을 변경시키는 등 효율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상황에 따라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군사들을 포기하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집요하게 추궁하기도 하며 격렬한 전투를 하면서도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휴전을 꾀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180여수를 두는 동안 공격과 수비, 타협과 휴전 등을 통해 인생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면을 느끼고 배워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적 가치를 바둑을 두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바둑을 두면서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바둑 자체로 대화를 한다는 점이다. 소위 바둑돌을 손으로만 두는데도 서로 교감을 갖고 대화에 응하는 자체가 도(道)를 이해하는데 첩경이라는 뜻이다.

바둑을 두면서 나름대로 미래를 점쳐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도 큰 장점이 된다. 자신의 과욕이나 욕심이 화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인생 생활을 적절하게 운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바로 이러한 점을 서양인들이 간파하고 동양에서 도입해야 할 문화로 인식하며 바둑 붐을 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유 건재 7단은 말한다.

한편 러시아의 수학교수 라자레프(Lazarev. A. V.)는 지난 2001년 발표한 '고대 바둑이 현대과학과 경제학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바둑의 운명과 관련해 정곡을 찌르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바둑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단순한 놀이로 남아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솔직히 말해서 바둑을 과학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자연 연구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든가 인간의 일상생활에 이용할 수 있든가 하는 데 반해 ‘비록 바둑을 둘 때 최적의 연속수를 두었다고 할지라도 바둑판 이외에는 어디서도 그 수가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바둑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귀환은 적었다. 적어도 바둑이 라자레프 교수가 함축적으로 대답했듯이 ‘새로운 수학적 도구와 방법을 연구개발하기 위한 시험대’ 정도로 되든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돌파구를 열어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그 무엇을 보여주든지 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서 유일하게 명지대 바둑학과 개설

세계 70여 개 국에 바둑협회가 설립되어 있을 정도로 바둑이 전 세계적으로 활성화되는 단계에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바둑 인프라는 세계에서 최고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명지대학교에 바둑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바둑 방송이 3개나 있다. 바둑에 대한 연구의 장으로 바둑학회도 있다.

현재 국제대회에서 중국이 계속 공격해오고는 있지만 한국이 거의 독식한다는 자체가 한국의 바둑이 세계 최강이라는 것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많은 외국인들이 바둑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한국이 최강이기 때문이다.

주산 교육받는 초등학생, 주산이 어린이들의 계산능력을 길러주는 데 효과적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주산 교육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사진 정양환).


특히 외국인들이 바둑을 보는 시각은 우리들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둑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인식을 하는 이유는 바둑이라는 고단수의 게임은 지적 특권층만이 즐길 수 있다는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수현 교수는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둑을 한국의 이미지와 연결시킨다면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를 증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즉 바둑의 세계화를 이루자는 설명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과거에 태권도 사범들이 세계 각지에서 태권도 보급에 힘을 쓸 수 있도록 각종 지원과 정책이 강구되었던 것처럼 바둑 사범들이 해외로 눈을 뜨게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세계정상 유지 위해선 과감한 변신 필요

일본의 경우 오래 전부터 외국에 프로기사들을 파견해왔으며, 일본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체재비와 생활비를 지원했고 바둑을 뜻하는 일본어 ‘고’는 이들의 영향이 큰 밑걸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현재는 한국 바둑이 세계를 제패하자 ‘바둑’이라는 단어도 사용되는 추세이다.

여하튼 현재 한국이 누리고 있는 바둑의 인프라도 정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난관에 봉착한다는 바둑전문가의 지적이다. 특히 현재의 지나친 이용후생적인 면으로 접근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바둑이 세계 정상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변신일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바둑 관계인들이 제시할 것으로 보이므로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바둑과 현대과학>

바둑이 의학과 관계되는 내용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와 전설속의 신의(神醫)로 소문난 화타(華陀) 이야기이다.

형주에 있던 관우는 조조의 용맹한 장수인 방덕의 군대와 전투를 치루는 중 팔에 독화살을 맞아 상처가 심해지는 위중한 상황을 맞게 된다. 즉 상처에서 나는 열로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을 정도로 상처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관우가 위중한 병에 걸렸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치료하고자 달려온 사람이 화타였다.

화타는 관우의 상처를 살펴보고 독이 뼈까지 침투했으니 오염된 살을 도려내고 독이 침투해 있는 뼈를 긁어내면 완치가 가능할 것이라 설명했다. 관우는 화타더러 곧바로 수술하도록 했다.

관우, 관우가 마취도 없이 바둑을 두면서 수술을 받았다고 하나 의학자들은 그런 경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자료 winehome).
이에 화타는 시술하는 동안 관우가 고통을 참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관우의 몸을 먼저 묶으려 하나 관우가 이를 제지하며 바둑판과 술을 대령하게 한다. 그리고 화타가 한 팔을 치료할 동안 다른 한 팔로 자신의 진영에 있던 마량과 바둑을 둔다.

화타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상처를 째고, 독에 오염된 뼈를 긁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화타가 오염된 뼈를 모두 긁어낸 다음,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을 무렵, 관우가 두던 바둑도 거의 종국이 되었다고 한다.

관우가 완치되자 관우는 화타에게 큰 상을 내리려 했으나 화타는 거절하였다. 화타는 장군 같은 환자는 처음 보았으며, 명환자가 있기에 명의가 존재할 수 있었다며 유유히 길을 떠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의 ‘과학향기’는 뼈를 깎는 시술에 마취제도 없이 버티기는 힘든 일로, 중국 특유의 과장이 심한 점을 감안한다면, 시술이 대단치 않은 정도였거나, 아니면 화타가 요즘의 마약류에 해당하는 약제를 분명 국부의 마취제로 썼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최승일은 관우와 같은 경우는 소설에만 나오는 특수한 예에 불과하고, 만약에 정말로 그렇게 수술했다면 관우는 분명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여하튼 관우의 수술이 사실이든 아니든 『삼국지』가 전하는 뜻은 바둑이 정신 집중하는데 매우 좋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바둑이 바둑 두는 사람 외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단순한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라자레프 교수는 지적했지만 이 말은 역으로 바둑의 효용성을 높여준다는 의미도 된다. 즉 바둑을 두는 사람의 경우 바둑의 효용성은 놀이의 차원이 아니라 바둑을 둠으로써 당사자의 건강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고령사회가 되면서 이른바 치매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치매가 유전적 원인에 의해 발병될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치매의 발현이 장수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 과거에는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었음에도 크게 주의를 끌지 못했다. 지금보다 인간의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다. 치매는 사람의 평균수명이 길어진 후부터 드러나게 된 특수한 질병인데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심한 치매를 앓았을 정도이다.

그런데 알츠하이머 성 치매는 초기 진단이 어렵고 발병 원인이 불분명하므로 그 예방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두뇌를 쓰지 않기 때문에 치매 증상이 나타나는 이른바 폐용성(廢用性) 치매는 뇌세포를 자극하는 것으로서 어느 정도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기억력 훈련의 중요성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노화연구소장 게리 스몰 박사는 건강한 생활습관과 낱말 맞추기, 퍼즐 등 간단한 두뇌운동으로도 알츠하이머병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발표했다.

바둑과 같은 고난도 게임 두뇌 활성화 도움

건강한 생활습관이란 활발한 신체활동을 계속하고 저지방 음식을 먹으며 과일과야채 등 항산화성분 식품을 많이 섭취하고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피하는 것을 말하지만 스몰 박사는 특히 ‘두뇌 에어로빅’의 효과를 강조했다. 낱말 맞추기 퍼즐, 새로운 언어 배우기, 또는 오른손잡이의 경우 왼손으로 글씨쓰기 등이 훌륭한 `두뇌 에어로빅' 운동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둑과 같은 고난도 두뇌 게임이 두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즉 뇌의 생리적 노화, 특히 폐용성 치매를 예방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로서도 증빙된다. 이 글은 윤숙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다.  

뇌의 노화라는 것이 어떠한 상태인 것인가를 컴퓨터 단층촬영사진으로 조사해 본 결과 45세 전후부터 뇌의 용적이 점차 줄어든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뇌의 위축이라고 하는데 그 주된 원인은 뇌의 신경세포가 점점 감소되기 때문이다. 신경세포는 분열이나 증식이 되지 않으므로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소하기 마련이다.

보고에 의하면 갓난아기 때에 대뇌의 신경 세포 수는 1백 45억 개로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변화가 없지만 그 이후는 매일 10만개씩 감소되어 간다고 한다. 하루에 10만 개씩 감소하면 1년에 3천 6백 5십만 개가 되며 100살까지 산다고 하면 29억 2천만 개가 감소한다. 145억 개 중에서 무려 20퍼센트나 줄어든 숫자이다.

그런데 뇌의 신경세포수가 이와 같이 줄어들면 두뇌가 퇴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상하게도 뇌의 위축현상과 치매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1백 살이 넘어도 치매증상이 없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이유로 사람의 뇌 속에 신경세포가 감소하면 나머지 세포가 더 활발히 움직이는 대상기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신경세포의 구조는 세포체와 그로부터 튀어나온 돌기로 구성되어 있다. 돌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수상돌기라고 하여 다른 신경세포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돌기는 시냅스라고 불리는 마치 컴퓨터의 회로에 상당하는 기능으로 접합되어 있다.

나이를 먹으면 뇌의 신경 세포 수는  감소하지만 신경세포의 돌기가 발달하여 고밀도 상태에서 두뇌의 활동을 유지한다. 다시 말하면, 회로의 수를 늘려 보충하고자 하는 일종의 대상기능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신경세포수가 줄어도 두뇌가 퇴화되지 않는다.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뇌에 자극을 주면 그 뇌신경 세포의 회로가 증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쥐 한 마리를 격리해서 사육한 경우와 네 마리를 함께 사육한 경우, 3개월 후 뇌를 해부해 조사해 본 결과 뇌 신경세포의 회로수가 네 마리를 함께 사육한 쪽이 훨씬 많았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뇌 신경세포의 회로수가 노쇠한 쥐에게서 좀 더 많이 나타났다. 한 마리만을 사육한 경우에는 자극이 거의 없었으나  네 마리를 함께 기른 쪽에서는 매일 먹이 다툼을 벌이는 자극 속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이 실험은 노령이 되어 아무런 자극 없이 살아가면 신경이 둔화되고 뇌가 감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으로 말하면 노령이 되어도 적당한 자극이 가해지면 뇌의 활동기능이 퇴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일본에서는 70세에 바둑을 배우기 시작해 82세에 아마3단이 된 경우도 있었으며 102세 된 노인이 아마 5단이 된 일도 있었다.

이는 인간의 뇌기능이 70세가 넘어서도 얼마든지 발달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앙당 간부는 적어도 80세가 되어야 선발되는 것이 관례였다.

<바둑은 기억 활성화에 일조>


일반적으로 사람의 능력에는 유동성 능력과 결정성 능력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기억력이나 계산력 등 타고난 능력이고 후자는 종합력, 판단력 등 경험이나 학습에 의해 향상되는 능력이다.

2005년 제86회 전국체전 바둑대회 일반부 경기 장면, 과학자들은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것이 치매 방지에 좋은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사진 김경동).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유동성 능력은 떨어지지만 결정성 능력은 높아진다. 따라서 뇌의 기능이라는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저하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질이 변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스톱과 장기 등이 노인들의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돌아 경로당마다 화투와 장기를 돌린 적이 있다. 카드나 화투 놀이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과 같이 손 자극운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데는 많은 의학자들이 동조하고 있다.

근래에 전자계산기와 컴퓨터의 등장으로 잊혀져 가던 주산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도 주목거리다. 1980년대만 해도 동네마다 자리 잡았던 주산 암산학원은 컴퓨터와 전자계산기에 밀려 1990년대에 들면서 하나둘씩 문을 닫았는데 최근 주산이 어린이 수리능력 향상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인기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바둑과 관련시켜 보면 상당히 의미가 있다.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상력, 판단력이다. 바둑은 실시간 시뮬레이션이 아닌 고전 게임이다. 바둑을 두다보면 수많은 전쟁과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전투 후에 마치 평화협정이라도 맺은 듯 서로 대치하며 영역을 넓히고, 집을 정돈하고 그러다 또 다시 특공대를 파견하는 전투를 하다가 마지막으로는 하나하나 집짓기를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자기 집을 정돈한다.

즉, 한 곳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곳에서 회복하면 된다는 대국관이 바둑을 두면서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대두된다. 인간의 뇌에는 좌뇌와 우뇌라는 상이한 두 가지 작용이 있다. 계산력이나 암기력 같은 것은 좌뇌의 기능에 속하는 반면 종합력과 판단력은 우뇌의 기능에 속한다.

우뇌의 장애가 있는 사람은 포석이 잘 짜여 지지 않으며 정석의 모양인식도 어려워서 대국도중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좌뇌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중반의 공방이 허약해 수 싸움은 잘 못하지만 포석이나 정석의 감각은 좋은 편이다.

따라서, 바둑과 같이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계속한다면 노후까지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결론은 바둑의 효용성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종호(05/10/31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