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과학적인韓國史

(70) 조선시대의 과학적인 수사와 인권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3. 09:18
'부모 죽인 원수'에 복수땐 사형 대신 유배형
조선시대, 과학수사와 인권 중시는 기본(1)
소설 장르 중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것은 사랑과 범죄 수사물이다. 범죄 수사물은 각종 범죄를 일으킨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 주류를 이루는데 요즈음은 범인의 지능이 높아져 첨단과학기술을 동원하지 않으면 어림없다고 수사관들이 실토한다.

범인을 잡는 방법은 과거나 현재나 대동소이하다. 살인사건을 비롯한 범행이 일어나면 조사원들은 사건 정황을 그려보며 피살자가 어떻게 살해되었는가를 검증한다. 다음에는 범인이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파악한 후 범인이 누구인가를 추정한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자료만으로 범인을 찾을 수 없다면 추리를 통해 사실 가능성이 높은 이론, 즉 가설을 세운다. 그런 다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범인은 누구일까”

범행 당시를 설명하는 가정을 올바로 세우면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대로 사건 정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면 오히려 범인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빠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기 마련이다.

실종된 메어리 셀레스트 호와 동일한 요트, 메어리 셀러스트 호는 승무원이 갑자기 사라진 채 발견돼 선박 실종 사건 중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선박 실종 사건으로 알려진다.


추리를 통한 과학수사의 원조로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대부분 아서 도일(1859~1930)을 꼽는다. 그가 소설가로 등장하게 된 것은 매우 이상한 사건이 버뮤다 삼각지대를 통과하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코난 도일 '셜록 홈즈' 탄생시킨 과학수사의 원조

1861년 노바스코사의 스펜서 섬에서 건조되어 아마존 호로 명명되었다가 1867년 메리 셀레스테 호로 이름을 바꾼 선박의 승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메리 셀레스테 호는 배수량 288톤에 2개의 마스트(돛)가 달렸고 길이 103피트, 폭 25피트로 매우 큰 배로 1872년 11월 5일 미국의 이스트리버 항을 출발해 이탈리아의 제노바로 향하고 있었다. 12월 5일 지브롤터의 서쪽 950킬로미터 지점의 아조레스 제도 부근에서 셀레스테 호를 뒤따르던 데이 그라시 호의 선장 무어하우스는 메리 셀레스테 호가 돛은 펼쳐져 있었으나 항해하는 모습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해 선원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다. 셀레스테 호를 조사하던 선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황급하게 그곳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배의 승무원은 8명이었으며 선장 브릭스의 처와 2살 된 딸도 함께 타고 있었다.

메리 셀레스테 호의 수수께끼는 정밀하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늘어갔다. 나침반 상자가 망가져 있고 나침반도 고장 나 있었다. 선장실에 항해용 기계류나 측정기가 보이지 않았고 항해일지에 의하면 9일 동안 약 1230㎞를 표류했었다. 가장 의심스런 일은 구명보트는 없어졌는데도 살아남는데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전혀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리 셀레스테 호의 선원실종 사건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건이 일어난 지점이 버뮤다 삼각지대는 아니지만 유기된 채로 발견되기 직전 버뮤다 삼각지대 북쪽을 통과하였기 때문에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종 사건이 거론될 때마다 거론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여 “선원들이 우주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회오리바람이나 거대한 바다뱀이 갑판 위의 선원들을 쓸어갔다, 해적의 소행이다, 선원들이 갑자기 미쳐서 모두 자살했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은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어 수많은 미스터리 책자에서 단골로 다루고 있다.

1882년, 의사자격증을 딴 23살의 아서 도일은 포츠머스 교외의 사우스 시에서 병원을 열었다. 그러나 환자가 별로 없어 심심풀이로 메리 셀레스테 호의 의문스런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884년 〈콘힐〉이라는 잡지에 「제이 하버쿠크 젭슨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도일의 추리소설은 예상외로 큰 인기를 끌었다. 어디까지나 흥미 본위로 쓴 소설이었기 때문에 메리 셀레스테 호의 미스터리를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그 후 전문적인 작가로 길을 나섰다. 이 사람이 바로 추리 소설의 으뜸으로 치는 로서 불후의 대 성공을 거두는 코난 도일로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코난 도일((1859~1930), 서양에서는 유명한 탐정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을 일반적으로 추리를 통한 과학수사의 원조로 간주한다.


셜록 홈즈는 범인 추적을 정확히 과학적으로 하는 탐정이다. 당시에는 과학적인 범죄수사라는 것이 없었던 때였는데 코난 도일은 의사로서의 전문 지식을 십분 발휘하여 셜록 홈즈를 통해 범인을 찾아나갔다.

물론 셜록 홈즈의 모델은 존재한다. 그가 다닌 에딘버러 의과대학의 조셉 벨 교수이다. 벨 교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진단에는 눈과 귀와 손과 머리를 써야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진찰실에 들어 온 환자가 말도 하기 전에 무슨 병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환자의 지금까지의 생활태도까지 학생들 앞에서 맞추곤 했다 한다.

2004년 유영철은 20여 명에 달하는 연쇄살인, 토막 살인과 암매장 등 그야말로 공포영화나 엽기 소설에서나 나올만한 사건을 터뜨려 한반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이런 강력사건은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항상 도사리고 있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라고 해서 예외일리는 만무이다. 조선에서는 범죄가 생겼을 때 어떻게 처리했으며 어떤 방법으로 범인을 잡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럽에서는 셜록 홈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조선에서의 과학수사는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과학수사에 대해 4회에 걸쳐 설명한다. 이 글은 이남희, 김호, 이욱, 박석무, 송철희, 장윤희, 박근태, 이진기,최상규, 조승호 등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다.

〈강력사건은 어디서나 존재〉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10년(1734) 5월 5일, 경기도 광주에서 노비가 주인과 다른 노비들을 집단으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김대뢰의 노비 영만이 김대뢰와 그의 노비 30여 명을 연쇄적으로 살해한 것이다. 그러자 김대뢰의 노비 세적이 자신의 주인과 부모를 죽인 영만을 직접 살해하고 관아에 자수했다.

부모 죽인 가해자 살해 정상참작 장 60대 관대한 처분

여기에서 유교 국가답게 초법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관대한 판결이 내려진다. 형조에서는 정상을 참작하여 장(杖) 60대로 결정했고 영조는 그대로 결재했다. 인권을 중요시하는 현대로 볼 때도 살인자에게 매우 관대한 판결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원은 이남희의 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다.

숙종 9년(1683) 1월 11일에는 존속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함경도 경성의 김명익이 직접 어머니와 두 딸 및 사촌누이인 백삼길의 아내를 칼로 찔러 죽였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아들 김유백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이게 했으며 백삼길로 하여금 자신의 아들 두 명 역시 살해하도록 했고 노비로 하여금 또 아들 한 명을 찔러 죽이게 했다. 김명익 자신은 그 노비를 찔러 죽이고 백삼길은 또한 김명익을 죽여 서로 죽인 자가 모두 10명에 달했다.

김명익의 여러 아들이 천연두를 앓고 미치광이의 말을 하니 김명익은 이를 요사한 귀신이 붙었다고 여겨 불침(火針)을 주었다. 그러자 아들들이 한꺼번에 발광하여 칼로 서로 죽인 것이다. 아들 김유백은 이 와중에서도 사망하지는 않았는데 그는 “그 때 어머니를 보니 마치 산짐승이나 들짐승 같았으므로 아비의 말에 따라 칼로 찔렀다”고 말했다.

조정에서는 김명익과 김유백이 어머니를 죽였고 노비도 주인을 죽이는 등 강상(綱常)의 죄를 지었으므로 김유백을 국문하여 목을 베고 백삼길은 십악(十惡)으로 논죄했다.

영국 런던의 셜록홈즈 박물관, 셜록 홈즈를 실존 인물로 여기도록 소설의 내용대로 꾸몄다(사진 조미영).


조선에서의 십악은 가장 큰 죄를 뜻하는데 모반(謀反), 모대역(謨大逆), 모반(謀叛), 악역(惡逆), 부도(不道), 대불경(大不敬),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의(不義), 내란(內亂)을 가리킨다. 여기서의 내란은 근친상간을 의미한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4일 안주의 백성 임부개가 어머니와 소를 가지고 다투다 어머니의 목을 매어 끌었다. 그의 누이동생이 소리를 지르자 부개는 자신의 행동이 탄로날까하여 그의 아우들과 함께 누이동생을 때려 죽였다.

태종 4년(1404) 2월 27일에는 노비 실구지 형제와 박질이 상전을 강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양의 판사(判事) 이자지에게는 16살 난 맏딸 내은과 두 딸이 있었는데 이자지 부부가 연이어 사망하자 맏딸 내인이 두 동생과 더불어 종 연지와 소노를 데리고 삼년상을 치르려고 했다. 그런데 실구지의 처남 박질이 내은을 강간했다. 중종 29년(1534) 12월 종성에서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 김부기가 그 혐의를 자백하지 않은 채 감옥에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런 강력사건에 대한 처벌에 인정이 있을 리 만무였다. 임부개 사건의 경우 법률에 따라 부개를 찢어 죽였고 실구지 사건의 경우 율(律)에 의해 능지처참했다. 김부기의 경우 감옥에서 이미 사망했지만 중종은 김부기의 시신을 능지처참하고 효수하여 전국을 돌게 했다. 능지처참이란 능지처사(陵遲處死) 또는 지해(支解)라고도 하는데 죄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사지를 하나씩 베어내고 마지막에 목을 베어 여섯 토막을 내어 죽이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다. 능지는 시체를 토막 내는 것이지만 시체토막을 각 도에 회람하거나 머리만 효수하는 등 시체에 대한 형벌을 가중시켰다.

사형죄일 경우 3심제도 운영등 인명중시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사형죄에 해당할 경우 기본적으로 3심 제도를 운용하는 등 인명을 중시했다. 중종 24년 9월 12일,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형옥의 일 가운데 살인공사(殺人公事)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무릇 사죄(死罪)에 해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삼복(三覆)을 하게 하는 것은 인명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목숨으로 보상함이 마땅하지만 형관은 모름지기 반복해 자세히 살펴야 한다.”

조선시대 처형도구(약현성당 박물관).


한편 유교 국가답게 형사사건도 인륜을 감안하여 처리했다.

황해도 수안군에서 김씨 양반 댁에 초상이 있자 동네 상여계(喪輿契) 계원들이 상여를 가지러 마을 창고로 갔는데 상여계 전ㆍ현 소임(所任)인 이노미와 정완석이 다투다가 정완석이 사망한 것이다.

이노미는 상여에 사용되는 죽장(竹杖)이 본래 아홉 개인데 한 개가 없어져서 그 이유를 전임 계장 정완석에게 물었더니 이미 인수인계가 끝난 일을 가지고 전임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도리어 화를 내는 바람에 서로 욕을 하다가 죽장을 들고 휘두르며 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노미는 정완석이 먼저 자신의 엉덩이를 두 차례 가격하므로 화가 나서 정완석의 머리 부위를 몇 차례 때렸는데 그만 사망한 것이다.

이에 인근 동네로 시집을 간 정완석의 35살 난 딸이 친정으로 돌아와 70살 된 노인인 아버지를 죽인 이노미를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조사한 수안군수는 다음과 같이 보고를 올렸다.

“정 여인이 인명(人命)을 타살(打殺)한 것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살옥(殺獄) 조항에 ‘그 아비가 구타당해 중상을 입은 경우 아들이 그 사람을 죽일 때는 사형을 면해 유배에 처한다(減死定配)’고 하였고, 또 ‘아비가 살해된 경우 관의 조사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원수를 마음대로 죽인 경우에도 감사정배(減死定配)한다’고 하였으므로 정 여인을 율문(律文)에 따라 유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그런데 그의 보고를 받은 황해도 관찰사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살옥(殺獄)의 죄 값은 반드시 정범을 확정한 후에 처리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정완석이 맞은 후 금방 사망하였고, 귀 부위가 급소인 데다가 여러 사람의 증언을 참고하면 칠십 노인을 가격한 흉한(兇漢)이 이노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정씨 부인의 복수는 천리(天理)에 따름이니 형틀을 채우거나 고문하지 말 것이다.

만일 사람을 죽인 자는 역시 죽여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정씨 부인은 법전(法典)에 의거해 특별히 사면하고, 두 구의 시신은 모두 가족에게 내주어 매장하도록 할 것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이 조선 시대 사람들의 윤리의식이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복수라면 비록 살인이라도 용서됐다. 다만 공권력(公權力)에 의한 처리를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살인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지 아니하고 형을 줄여 유배형을 내렸다.

'여자의 몸으로 원수 죽였다'이유 유배도 면하고 사면

그런데 정씨 부인처럼 여자의 몸으로 원수를 때려 죽였다는 것은 오히려 상을 받을 일로 생각했다. 이는 효녀나 장부(壯婦)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씨 부인은 유배형도 면한 채 '사면(赦免)'을 받은 것으로 당시의 관습에 따라 인정과 도리에 의한 행동은 여러 면에서 구제를 받았다.

뒤에 설명하는 정약용이 저술한 『흠흠신서(欽欽新書)』 「상형추의(詳刑追議)」의 <형벌을 신중하게 적용하기 위해 덧붙인 논의>에는 의붓아들이 아버지를 구타하자 친아들이 의붓아들을 죽인 사건이 기록돼있다.

황해도 봉산에서 박봉손이 의붓아들 배종남을 죽였다. 사건의 원인은 배종남이 박봉손의 의붓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재산(쌀 한 섬)을 주는 것에 인색하자 의붓아버지를 움켜잡고 때리고 욕을 하여 가슴을 다치게 하자 친아들인 박봉손이 이를 보고 배종남을 때리고 걷어차다 살해한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는 박봉선은 친아들이고 배종남은 의붓아들이지만 부자의 의리는 같은데도 불구하고 한 섬의 곡식으로 하여 욕질을 하고 함부로 범행하여 가슴을 다치게 했으므로 비록 길을 가던 사람이라도 마땅히 팔을 걷어붙이고 분풀이를 했을 것으로 적었다. 하물며 친아들이 이 상황을 목격하고 용감히 달려들어 가로막고 힘을 다하여 때리고 차다가 사망까지 이르게 했으니 이는 자연의 도리와 인간의 정리로 볼 때 당연하다고 했다.

조선말 고문 후 처형 장면, 죄수를 처형할 때 양 다리와 팔을 주리로 완전히 부러뜨린 후 비단끈을 사용해 죄수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서양인 아손 크렙스트는 적었다(사진 아손 그렙스트).


당대에는 의붓아버지를 때린 자는 형장 60에 징역 1년이고 뼈가 부러지거나 접찔린 다침 이상인 경우에는 싸우다가 다친 죄에 한 등급을 더하고 같이 사는 경우에는 한 등급을 더하며, 죽기에 이른 경우에는 참형으로 다스렸다.

그러므로 의붓아버지를 때리려는 사람을 보고 남들도 때리려 할 것임을 고려하여 친아들인 박봉손이 의붓아들을 살해하였지만 죄를 줄 수는 없다며 석방했다.

한편 재령의 이후상이 어머니 방소사(方召史)를 위해 공소사(孔召史)를 살해했는데 이 경우에는 징역 3년을 선고하고 유배시켰다. 이는 박봉선의 경우와 형질이 다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후상의 어머니 방소사와 이후상에게 살해당한 공소사는 10촌 동서간이다. 그런데 나이가 7살이나 적은 공소사가 방소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뺨을 때리자 이후상이 화가 나 공소사를 주먹과 발로 찼는데 사망한 것이다.

당시에 부모가 남에게 맞아 무거운 상처를 입었을 때 그 아들이 그 사람을 때려 죽게 한 자는 사형에서 줄여 유배시킨다는 점에서는 박봉손과 같이 취급할 수는 있지만 배종남은 의붓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의붓아버지를 때렸다는 것을 더욱 큰 죄로 보았으므로 형량에도 차이가 났다. 부모를 때리려는 사람을 구타하여 살인한 것은 동일하지만 박봉손은 방면되고 이후상은 3년 징역에 유배시킨 것이다.

'자살 시체' 원인 분석 과학적 수사기법 적용

<과학수사는 고위 관리의 기본>

기록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강력사건을 살펴보면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적용하여 사건의 전후를 판별했다는 것이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

정조 31년(1796), 황해도 평산 서봉방의 장옹암 마을에서 양반 양성한이라는 젊은 남자가 자살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성 추행사건이다. 한 마을에 사는 상놈 이춘대의 딸 족금이 이팔청춘의 꽃다운 나이인데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양성한이 춘정을 이기지 못해 뒤에서 달려들어 갑자기 껴안았다. 백주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희롱을 하고 족금이의 비녀를 뽑아들고는 “너는 이제 내 사람이 되었다”면서 달아났다.

족금의 아비 이춘대는 이 소식에 노발대발하여 양씨 집안으로 달려가서 “우리 딸의 혼사길을 막았으니 어찌할 것인가?”라며 양성한의 아버지 양계수에 항의했다. 심지어 양반인 양계수에게 ‘너 죽고 나 죽자’며 칼을 휘둘렀다.

갑자기 상놈에게 봉변을 당했으나 아들의 죄가 너무나 명백하므로 양계수는 족금이를 서둘러 시집보내도록 하자며 이춘대를 구슬린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상놈에게 봉변당한 양계수는 사건의 장본인인 양성한에게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으니 나가 죽으라”고 꾸짖었다. 이 말을 듣고 양성한이 집에 있던 간수를 마시고 집 뜰에서 자살한 것이다.

아들이 자살하자 양계수는 자식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자살한 아들의 애비인 자신이 상놈 이춘대에게 봉변을 받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고 고발했다. 그리고는 아들의 시체를 상놈 이춘대의 집으로 가져다 놓았다. 일종의 시위였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 등 특수한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지역 사또가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야 했다. 그러므로 평산부사이자 초검관인 유광천은 사건 접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사체가 있는 장옹암 마을로 달려갔다.

칼을 쓴 죄수, 중죄인에게 칼을 씌웠는데 큰칼은 길이가 135센티미터, 작은 칼은 1미터 정도이다. 사진은 1910년대의 죄수들로 의병일 가능성도 있다는 설명이다.


유광천의 검시보고서에는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있는데 가톨릭대학교 김호 교수, 고려대학교 이욱의 글을 인용한다.

‘시체는 이춘대의 방에서 동으로는 벽까지 4척 8촌, 서쪽으로는 4척 5촌, 남쪽으로는 2척, 북쪽으로는 5척 5촌이다. 방 안이 좁아 시체를 마음대로 조사하기 어려우므로 마당으로 끌어내 판자 위에 놓고 차례로 옷을 벗겼다. 오작사령이라는 관아 소속 노비 도손이가 일을 담당했다.

먼저 시신을 덮고 있는 푸른색 면이불 한 채를 벗겨내자 목면 저고리를 입고 누워있는 양성한의 시신이 드러났다. 바지의 허리띠에는 담뱃갑 하나, 그리고 주머니가 매달려 있는데 조그만 거울 하나와 나무빗 하나가 들어있었다. 알몸이 된 후 자세히 살펴보니 대략 23~24세의 중간 몸집의 남자로 키는 주척으로 7척 9촌이고 두발은 흐트러졌는데 2척 5촌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입은 약간 벌리고 코에서 피가 흘러 나왔는데 전신의 살빛이 누런색이고 배는 팽창하지 않았고 구타 등의 상처도 없었으므로 약물사고로 추측되었다.

독을 먹었는지 의심스러워 은비녀를 항문에 집어넣었더니 금방 검은색으로 변하였다. 변을 채취하여 가열했더니 흰 색의 소금 결정 등이 나타났다. 간수를 마신 것이 틀림없었다. 증거 확보를 위해 양성한 집의 곳간을 뒤졌더니 두부를 만들려고 만들어 둔 간수병이 발견되었다. 그 옆에 간수를 담아 마셨는지 사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망 원인은 간수를 마시고 죽은 ‘복로치사(服鹵致死)’가 분명하다.’

<인권 중시는 기본>

1901년 8월 전주 군수 이삼응은 부서면에 사는 이경선이 자신의 부인과 싸운 후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출동했다. 이경선의 부인 장씨의 나이는 35살이었는데 그녀는 무능한 남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 몸은 매우 빈한하여 술을 팔아 생계를 꾸렸는데도 제 남편은 항상 도박과 술로 세월을 지새웠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도 술 팔아 번 돈을 도박에서 모두 잃었고 저와 다툰 후 남편은 외출했고 닭이 우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와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잠이 들었다가 날이 밝아 깨어보니 남편이 허리띠로 서까래에 목을 매어 죽어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이웃사람에게 부탁하여 끈을 풀어 내렸지만 이미 죽었습니다. 결혼한 지는 17년째이며 그 동안 1남 2녀를 낳아 기르고 있습니다. 목을 맨 허리띠는 경황이 없어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신은 이미 염을 하려고 관을 준비해 두었지만 언뜻 봐서도 시체는 자연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흉측한 몰골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두 손은 주먹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다리는 곧게 펴고 있었다. 눈동자는 튀어 나와 있었고 청흑색으로 부풀어 오른 복부를 두드리니 소리가 났다. 배꼽 아래는 청홍색을 띈 채 크게 부어 있었고 뒤집어 항문을 보니 역시 돌출해 있었다. 『증수무원록언해』에는 이런 경우 중독사라고 적었다.

독살 분명했지만 장씨부인 '자살했다' 주장 굽히지 않아

독살이 분명했지만 장씨 부인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가 수년 전부터 박사권과 간통하는 사이로 부부싸움이 잦았다는 것을 들은 전주군수 이삼응은 박사권과 내통해 남편을 모살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쳤지만 장씨 부인은 완강했다.

자신이 술장사를 하면서 우연히 박사권을 알게 되어 간통하였는데 동리에 소문이 나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그래서 잠시 박사권과 함께 도망가 살기도 했는데 자식들 생각이 나고 남편과 사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집으로 돌아 왔는데 살해라는 것은 당치 않다고 항변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이광숙이 장씨 부인에게 남편이 박사권과 간통한 일 때문에 자주 때리므로 술에다 양잿물을 타 먹였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하자 그녀는 무슨 원한이 있길래 근거 없는 소리를 내느냐고 큰소리를 질렀다. 얼굴에는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복검(復檢)에 들어가자 장씨 부인은 뜻밖에도 진술을 번복하고 독살을 시인했다. 간부(姦夫) 박사권의 사주라는 것이었다. 항상 남편을 살해하면 평생 같이 살 수 있다던 박사권이 양잿물을 주면서 술에 타서 먹이라고 하여 부부의 인정상 곧바로 죽이지 못하다가 결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박사권은 도주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가 수월치 않았다. 박사권을 잡을 때까지 사건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2년 뒤 드디어 박사권이 체포됐다. 당시까지도 자백한 장씨 부인과 사건 관련자들은 옥에 갇혀 있었다. 전주 군수는 박사권에 대한 심문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장씨 부인의 진술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박사권은 고리대금업자로 장씨 부인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종종 만나 통간했다는 점에는 시인했지만 갑자기 장씨 부인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잡혀갈지 모른다고 생각해 도망갔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경선을 죽이려고 장씨 부인에게 독약을 주거나 사주한 일은 전연 없다는 주장이었다. 장씨 부인이 무고한 사람을 물고 늘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진술을 장씨 부인에게 알리고 추궁하자 그녀는 또 말을 바꾸었다. 박사권이 사주한 것이 아니지만 이웃 이광숙이 시켜서 꾸며댔다는 것이었다. 이광숙이 자신에게 말하기를 박사권이 독약을 주면서 남편을 죽이라고 사주했다고 하면 도망 간 박사권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다며 거짓말을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인명 관련된 경우 의문 · 의혹 풀어 원통함 없도록 대처


마침내 마지막으로 진산군수 서상경에게 사건이 넘어갔고 서상경이 거짓말한 것을 추궁하자 장씨 부인은 자신이 억울하다는 소리뿐이었다. 게다가 장씨 부인을 도와 이경선의 사체를 서까래에서 풀어 내렸던 이광숙은 어찌된 영문인지 그 사이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이광숙은 장씨 부인의 독살을 주장한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수사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 됐다. 장씨 부인은 증인이 사망하자 거칠 것 없이 자신은 무죄이고 억울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진산 군수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는 장씨 부인의 행동이 미심쩍지만 하는 수 없이 장씨 부인과 박사권을 엄벌하도록 요청하는 선에서 사건 조사를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도 물증이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으면 의법 처리할 수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처럼 인명(人命)이 관련된 사건의 경우 함부로 조사를 끝내거나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의문이나 의혹을 남김없이 풀어 원통함이 없도록 하려는 인정(仁政)에서 증거 확보나 과학적인 조사 등 조선시대에도 법 집행에서 현대에 못지않게 인권을 중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속)이종호(05/11/7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미해결 살인사건 변사체 네번이나 검시
조선시대, 과학수사와 인권 중시는 기본(2)
<치정 사건>

조선 시대에도 치정관계로 인한 살인 사건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살인은 보통 백주대낮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간부(姦夫)와 간부(奸婦)가 치밀한 계획 하에 살인하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암매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살인이 발각되더라도 증거가 인멸되어 범인을 추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4차, 5차에 걸쳐 수사했다.

황해도 토산에서 김천의란 자가 길 가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시체는 몇 십호(戶)가 사는 마을로 들어가는 큰 길에 있었다. 그 길은 행인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으나 김천의가 피살당하는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시신에는 사인을 짐작할만한 상처도 없었다. 온 몸에 다친 상처가 없었고, 은비녀로 독살 여부를 살폈지만 색깔이 변하지 않았고 찰밥을 넣었으나 빛깔에 중험됨이 없어 3차에 걸쳐 시신을 조사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부패한 시신 복부만 썩지 않고 살빛 달라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는데 사건 해결은 4차 조사에 참여한 서흥현감(瑞興縣監)에 의해 이루어졌다. 4차 조사는 죽은 지 이미 석 달이 지난 다음이었고, 시신은 심하게 부패해 있었지만 서흥현감은 부패한 시신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시신 중 유독 복부만 팽창된 채 썩지 않았으며 살빛도 보통과 달랐다. 의심이 생긴 서흥현감은 시신을 자세히 살폈고 마침내 배 위에 두 개의 밟힌 자국을 찾아냈다.

이에 서흥 현감은 『무원록』의 규정에 따라, 식초·등겨·파·매실 등으로 밟힌 자국이 있는  부위를 문질렀다. 그러자 상처 자국이 분명해지면서 진흙에 찍힌 발자국과 같은 모양이 나타났다. 발자국은 뒤쪽이 깊고 앞쪽이 옅게 찍혀 누군가 발뒤꿈치로 밟았음을 보여주었다. 서흥현감은 좀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정수리와 발바닥을 다시 조사했다. 그것은 신경(腎經)이 아랫배에 있고 그 혈락(血絡)은 위로는 정수리, 아래로는 발바닥 가운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식초 등으로 문지르니 과연 정수리 가운데에 검붉은 빛깔이 드러났고 발바닥 가운데에서도 선홍 빛깔이 생겼다.

조선후기 검시 장면도.


이러한 현상은 『무원록』에서 밟혀죽은 시체가 보이는 특징으로 설명하는 것과 일치했다. 『무원록』의 짓밟혀 죽은 시체에 관한 조문을 보면, ‘사람이 밟은 상처는 두 쪽으로서 길며 한 머리는 무겁고 한 머리는 가볍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눌러서 질식해 죽은 시체에 관한 조문의 주석에는 ‘검골(檢骨)을 해보면 상처가 정수리 가운데와 두 발바닥 가운데에 있다’고 되어 있다.

배에 발자국 발견…심문 끝 며느리와 내연관계 남자 범인

서흥현감은 이를 토대로 김천의가 누군가에게 밟혀죽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탐문 수사를 벌인 결과 김천의가 시체로 발견되기 사흘 전에 김몽세란 자와 다툼이 있었고, 김천의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 김몽세 형의 집과 4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음도 알아냈다. 탐문 수사를 마치고 서흥현감은 몇 가지 정황 증거를 토대로 김몽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만약 김천의가 김몽세와 헤어진 그날 죽었다면 헤어질 때까지 멀쩡하던 이가 5리도 못 가서 갑자기 죽은 것이 된다. 또한 만일 시체가 발견된 날 김천의가 죽었다면 2, 3일 사이에 겨우 4리를 갔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 역시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끝으로 시체를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이가 김몽세의 형인 김몽동이라는 점에도 의심을 품었다. 살아있는 김천의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김몽세였고, 죽어있는 김천의를 처음으로 본 사람은 김몽동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는 3일의 시간 차이가 있었으므로 김천의는 이곳에 사흘 이상 머물러 있었음이 확실했다.

그런데 3일 동안 번잡한 길을 오간 사람이 수 천 명이나 되는데도 아무도 김천의를 보지 못했으며 3일 뒤에야 비로소 김몽동이 발견했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론은 김몽세가 김천의를 밟아 죽이고는 밤에 몰래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김몽세를 범인으로 지목한 서흥현감은 김몽세 등을 옥에 가두고 심문했다. 완강하게 자백을 거부하던 김몽세는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가 털어놓은 사건의 발단은 김몽세 며느리의 부정 때문이었다.

김몽세의 아들은 병약했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아들이 죽기 전부터 그의 며느리는 김천의와 내연의 관계였다. 게다가 김몽세 아들의 장례식날, 김몽세의 사돈은 자신의 딸이 젊은 나이에 수절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공공연하게 개가시킬 의사를 보였다. 김몽세는 아들을 묻은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개가 운운하는 사돈의 처사와 며느리의 부정행위에 매우 분개했다. 그래서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하는 판에, 내연남인 김천의가 김몽세의 집을 찾아왔다. 김천의는 김몽세의 며느리에게 용복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매우 허물없는 사이임을 드러냈고, 그녀에게 친정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김천의의 행동에 격분한 김몽세는 밤에 김천의를 밟아 죽이고 먼 곳으로 시체를 유기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중요성은 조선시대임에도 불구하고 4번이나 검험을 했다는 점이다. 재검과 삼검에서 죽은 원인에 대한 기록과 신문 조목 등이 약간 다른 점이 발견되자 4검까지 거친 것으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므로 철저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고 한 것은 높이 평가될 만하다는 설명이다.

충청도 당진에서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흙과 돌로 덮여 있던 시신이 비로 인해 흙과 돌이 쓸리면서 노출되었는데 시신은 까마귀가 파먹고 비에 쓸려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시신의 주인공은 홍귀산이었다.

죄인의 목을 치는 장면, 왼쪽의 관리 두 명이 사형 집행 장면을 외면하는 듯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있다(사진 이남희).


구타 당해 죽은 시신 범행 완강히 부인

1차 조사를 담당한 당진현감은 홍귀산의 시신을 검사했다. 시신 뒤통수에는 피멍이 있었고 앞면 두 눈썹 사이의 뼈가 붉은 색을 띠었다. 그리고 광대뼈에 둥글게 멍이 있었는데 약간 붉은 색을 띠었다. 이러한 특징은 모두 『무원록』에서 맞아 죽은 시신의 특징으로 설명하는 것과 딱 들어맞았다. 상처 부위가 급소가 아닌 데가 없었고, 뼈에도 맞은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과 살갗이 그대로 있을 때 다친 것임이 명백했다. 게다가 손도인이라는 자가 홍귀산을 구타했다고 증언하는 증인들도 많았다. 이에 당진 현감은 손도인을 범인으로 지목하여 체포했다.

손도인은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홍귀산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주장했고, 가슴뼈가 부러진 것은 급히 시체를 싣다가 부러진 것이라고 꾸며댔다. 정부에서는 그가 용서하기 어려운 중범죄이고 따라서 반드시 자백을 받아내도록 명령했다.

손도인은 자기 집의 남자 종인 홍귀산의 아내 오단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리고는 기어이 오단을 강제로 빼앗아 함께 살았다. 홍귀산은 오단을 되찾고 싶었지만 양반의 세력에 눌려 단지 아내를 돌려달라고 애걸하기만 했다. 살해당하던 날 밤에도 홍귀산은 감히 집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면서 부인을 돌려달라고 애원했다. 손도인은 그러한 그를 귀찮게 생각하여 심하게 구타했는데 구타 과정에서 홍귀산이 죽자 손도인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홍귀산을 몰래 매장했는데 세월이 흘러 빗물에 흙이 씻겨 나가면서 유해가 나타나 재수사하여 사건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당사자의 한 명인 오단은 “얻어터질 때 몇 번의 아이고 소리만 들었다.”라고 진술했다. 당시의 조사관은 손도인의 범행이 오단의 계책에 의한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간통한 사내가 본남편을 죽일 때 그 사실을 안 경우에도 본래 사형에 해당한다며 오단은 남편을 살해한 손도인과 죄가 다를 바 없으므로 함께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적었다. 왕은 이에 대음과 같이 결재했다.

‘애초에는 그 아내를 빼앗고 나중에는 또 그 몸을 죽여 숨겼고 한 해가 지나도록 시체의 뼈가 드러나게 하여 까마귀가 쪼도록 방임했으며, 한때 입을 막으려 오공지계(蜈蚣之計)를 실행하려 했으니 그 정상을 헤아릴 때 하나하나 잔인하고 악독하다.

(중략) 이런 흉악하고 사나운 놈을 형률(刑律)에 따라 목숨으로 보상하도록 아니하면 저 호소할 곳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백성은 아내와 자식도 보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그 몸과 목숨도 보존하지 못할 테니, 어지 슬프고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오단에 있어서는 사실을 알았거나 계책을 꾸몄거나를 막론하고 경의 형조에서 형률을 상고하여 모두 적용토록 하고, 손도인과 오단 등을 모두 특별히 엄중한 형장을 더하여 신문해서 기어이 자백을 받도록 하라.’

태형, 태형은 비교적 경한 범죄에 적용되었으며 바지를 벗기고 형틀에 묶은 채 볼기를 치는데 1대에 1냥 4돈으로 속전되기도 했다.


<자살을 위장한 살해>

자살을 위장한 살인 사건을 해결한 기록도 있다.

동네 상놈에 겁강당한 후 수치심 못이겨 자살 증언

조선왕조 말기인 1894년 음력 6월, 문경군수 김영연에게 신북면 화지리의 존위(尊位ㆍ마을 어른) 최상보가 동헌으로 들어와 같은 동네에 사는 양반 안도흠의 고발장을 들고 왔다. 고발장에는 안도흠의 며느리가 지난 5월 동네 상놈 정이문에게 겁간당할 뻔 한 후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매고 말았다는 것이다.

김영연은 상놈이 반가(班家)의 여성을 겁탈했다는데 놀라서 검험(檢驗ㆍ현장에 나가 시체나 상처를 확인하는 일)에 필요한 도서와 도구를 준비하도록 서리들에게 명하고 기록 담당 서리를 비롯, 검시에 동반할 의생(醫生), 율생(律生) 및 오작사령(시체를 다루는 관비) 등을 이끌고 출동했다.

사건의 열쇠를 쥔 정이문은 이미 달아났으므로 황씨 부인의 남편 안재찬을 불러 심문했다. 30세의 안재찬은 5월에 상놈 정이문이 안방에 잠입해 아내를 겁간하려다가 자신의 눈에 띄어 담을 넘어 도주했고,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또 수치심을 느낀 아내가 여러 차례 자진하려는 것을 자신과 아버지가 말렸는데도 이런 변고를 당했다는 주장이었다. 숨진 아내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26세이며 결혼한 지 12년이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동네 사람들을 심문했지만 모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달아난 정이문의 할아버지 정태극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손자가 황씨 부인을 겁탈한 게 아니라 5, 6년 전부터 둘 사이가 남달랐다"

피해자 가족은 겁탈 당한 것이 수치스러워 자살했다고 하는 반면에 가해자의 할아버지는 두 사람이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로 정을 통했다는 것이다. 간통인지 강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일단 검시를 위해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을 자로 정확히 측정했다. 시신은 머리를 동남쪽으로 향한 모습으로 동쪽 문지방에서 3촌, 서쪽 벽에서 6척5촌, 남쪽 벽에서 3척1촌 떨어져 있었고, 북쪽 벽에 두 발이 닿아 있었다. 방 안이 너무 좁아 여러 사람이 몸을 움직이기 불편하므로 시체를 밖으로 꺼낸 후 시체의 옷가지며 버선 따위를 하나씩 벗겨냈다. 원래 양반집 부녀자 시체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겨 검시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는 법례(法例)가 있긴 했지만 검시(檢屍)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작사령이 치마를 벗겨내고 허리띠를 풀고 적삼과 목면 홑바지를 벗겨 낸 후 마지막 남은 속옷을 벗기니 똥이 어지럽게 묻어 있는 변사체였다. 최종적으로 신고 있던 버선까지 벗겨 내니 25세쯤으로 보이는 신장 4척9촌의 여성이 머리를 산발한 채 얼굴을 위로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공주의 원옥(圓獄), 재래의 감옥은 원형으로 공주감옥은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다. 지름은 30미터이며 담의 높이는 한 길, 폭은 3자 정도였다.


목부위 상처 졸린 흔적 뚜렷…자살로 위장한 사건

얼굴은 얻어맞은 듯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누렇게 보이기도 하고, 희기도 했다. 뒤에서 설명하는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冤錄諺解)』의 구타살해 조항과 너무 흡사한 시반도 나타났다. 좀 더 살펴보니 머리 정수리 좌측에 피부가 벗겨진 상처도 있었다. 목 부위의 혈흔을 살펴보니 상처가 여러 군데 나 있었는데 목 졸린 흔적이 뚜렷했다. 갈비뼈와 가슴 부위에도 얻어맞은 흔적이 있었다. 시체를 뒤집어 보니, 등 역시 전체적으로 피부색이 검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하고, 희기도 한 등 구타 흔적이 역력했다.

김영현은 여러 가지 정황 상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독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비녀 모양의 은으로 만든 뾰족한 도구를 입안에 넣어 색깔이 변하는지를 살폈으나 색이 변하지 않았다.

독살은 아니었지만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사건임이 분명했다. 일단 아무도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으므로 증거 보존을 위해 시체를 다시 방 안에 다시 들여놓고 횟가루를 뿌려 훼손하지 못하도록 표시를 해 두었다.

사건의 해결 방법은 『증수무원록언해』에 적혀 있었다. 시체의 목 뒤에 '일(一)'자로 길게 난 상처는 주로 타살일 때 많으며 자살이라면 대개 목 앞에서 귀밑 쪽으로 사선이 생긴다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목 매달아 자살한 경우 서까래 올가미 흔적 여러줄

'목 매달아 자살한 경우 대들보나 서까래의 올가미 흔적은 한 줄이 아니다. 먼지가 많은 곳이라면 어지럽게 줄 자국이 흩어져 있어야 스스로 목을 맨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올가미 자국이 한 줄로만 나 있고 먼지가 어지럽혀져 있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맨 것이 아니다.'

그는 즉시 황씨 부인이 목을 맨 장소로 달려가 서까래 위에 단 한 줄의 자국만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목 졸라 살해한 후 자살로 위장한 것이 분명하므로 남편인 안재찬을 다그쳤다.

과학적인 자료에 의거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 분명한 점을 조목조목 밝히자 안재찬은 범행 모두를 털어놓았다. 심지어 자신이 개 잡듯 올가미를 씌워 등에 짊어진 채 부인을 죽였다는 끔찍한 말까지 쏟아놓았다.

“정이문이 안방에 들어가려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 처를 의심해 홍두깨로 때렸더니 그날 이후로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습니다. 그 후 제가 아들과 함께 자는데 애 우는 소리가 나서 처를 살펴보니 거의 죽을 듯했습니다. 정이문에 대한 복수심에서 끈으로 아내의 목을 묶고 정이문의 집에 업고 가 서까래에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꾸민 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주리틀기, 주리는 고문할 때 쓰던 것으로 두 발목을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주릿대를 끼워서 엇비슷이 트는 형벌로 '주리를 트는 고문에는 당하는 자가 없고 안한 짓도 했다 한다'는 말이 있다.


<전제국가다운 정실 재판>

성종 9년(1478) 1월, 모화관 인근에서 여자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 삼사(三司)인 사헌부ㆍ사간부ㆍ홍문관에서 합동 수사를 펼쳤지만 단서가 잡히지 않자 범인을 체포하는 자나 신고하는 자에게는 현상금을 지급한다는 포고령이 내렸다. 이남희 박사의 글에서 많이 참조했다.

그런데 포고령이 내린지 얼마 안 되어 범인이 누구라고 알려주는 익명의 편지 한 통이 날라들었다. 범인은 창원군 이성(세조의 후궁 귀인 박씨의 2남)이라는 것이다.

세조의 친아들 유력한 살인용의자 올라

세조의 친아들이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올랐으므로 조정에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창원군에게 묻자 물론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수사 결과 창원군이 범행을 지시했고 창원군의 종들이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종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을 지키자니 종친에 대해 단죄하여야 하고 종친을 봐주자니 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종은 결국 3월, 부처(付處, 유배의 일종으로 일정한 지역에 강제 거주시키는 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신이 부처 명령을 내린지 2일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죄를 용서하자고 중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창원군의 죄질이 가볍지 않으니 마땅히 먼 지방에 부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대왕대비(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께서 하교하시기를 ”세조대왕의 친자에 오직 창원군 형제만 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외방에 부처한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물며 창원군은 생계가 빈한하니 만약 집을 떠나 생업을 잃는다면 생활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우선 너그럽게 용서해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떤가“하셨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매우 슬프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은비녀들, 옛날 비녀들은 주로 은으로 만들었는데 은비녀는 조선시대 특유의 수사기법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흔히 쓰던 '비상'은 비소와 황의 화합물인데, 은은 비상의 황과 결합하면 검게 변한다(사진 jjhm231).


이에 승정원에서 성종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했다.

“법은 굽힐 수 없는 것이나 때로는 굽히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대왕대비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우선 부처를 정지하고 집에 있게 하되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창원군을 부처하지 말도록 하고 직첩만 회수하도록 했다. 그러나 창원군의 부처 취소 명령은 곧바로 중신들의 반발을 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은 성종의 판결에 불복해 창원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연일 올렸다.

청원군 유배 가지 않고 직첩만 회수로 마무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이세광(李世匡)은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창원군의 죄는 부처(付處)에 그칠 것이 아니나, 다만 지친(至親)인 까닭에 특별히 말감(末減)에 따랐으니, 이미 지나치게 가볍게 처단한 잘못이 있습니다. 어찌 대비(大妃)의 하교(下敎)로 인하여 이미 이루어진 명령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김괴(金塊)도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지금 성지(聖旨)를 들으니, 신도 또한 측연(惻然)합니다. 그러나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의 죄가 지극히 무거우니 가볍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 의지(懿旨)로써 법을 굽힐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영(令)이 한 번 나가면 오직 시행(施行)할 뿐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이루어진 명령을 중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도 상소했다.

“법은 천하의 공기(公器)이니 친귀(親貴)로 하여 흔들릴 수 없습니다. 법이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는 일이 있다면 백성이 어떻게 편안히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옛날의 성왕은 능히 신하가 법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한 뒤에라야 그 법이 믿어지고 조정이 의지할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간 경준은 다음과 같이 직언했다.

경준 : “창원군(昌原君)의 죄는 가벼이 용서할 수 없는데, 지금 도리어 중지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대비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성상께서 만약 조정의 법으로써 대비께 아뢰셨다면, 어찌 들어주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성종 : “대가의 말이 옳다. 그러나 대비께서 하교하시기를, ‘창원군은 세조의 유체(遺體)로서 나이가 어리고 또 어리석으니,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마음에 차마 할 수 없다.’고 하시고, 또 지금 대비께서 몸이 편안치 않으시다. 아마도 이일로 하여 상심하셔서 그런 것으로 여겨진다. 그대들은 어찌 생각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는가?”

사간 경준의 상소에 성종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짜증까지 내었지만 신하들이 이에 불복하고 계속 상소를 하자 성종이 “대간의 말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한명희는 “대간이 언론하는 바를 주상께서 취하거나 버리거나 하실 뿐이다”라며 단호하게 성종의 편을 들었다.

사건의 결말은 대간들의 거센 간언에도 불구하고 창원군은 유배도 가지 않고 직첩만 회수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회수된 직첩도 같은 해 10월 돌려주었다.

군주제인 조선시대에 원칙적인 법의 정신과 적용이 모두 지켜지지는 않았다는 사례로서 자주 인용되는 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이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극히 드물다는 것은 왕이 나라를 통치하는 전제국가임에도 법이 권력의 시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예로서도 인용되기도 한다. (계속) 이종호(05/11/14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법의학 · 수사 지침서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언록'
조선시대, 과학수사와 인권 중시는 기본(3)
앞에서 설명한 유광천의 검시보고서를 보아도 매우 구체적으로 검시는 물론 사건 조사도 병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또인 유광천이 수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의 관리 즉 사또 급이 이와 같이 수사에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 관리의 필독서라고 볼 수 있는 수사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사용된 수사집의 원본은 원래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 1261~1346)가 1308년에 저술한 책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 일본 등지에서 법의학 지침서로 널리 활용되었다. 특히 고려 중기인 문종 1년(1047)부터 인명살상에 관한 재판에서 신중을 기하기 위해 삼심제도를 실시했는데 『무원록』이 출판된 후 고려에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무원록』의 경우 점차 조선의 사회 구조가 중국과는 달라 발생하는 사건들의 성향이 다르므로 『무원록』의 조사 방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무원록』이 간행된 지 100여년이 지난 세종 17년(1435), 『무원록』에는 검시하는 격례(格例)가 잘 갖춰져 있으므로 이과(吏科), 율과(律科)의 시험 과목으로 정하고 조사(朝士)들도 이를 익히게 하여 검험에 사용하자는 뜻으로 세종은 최치운을 중심으로 『무원록』의 해설을 명했다.

신주무원록, 1440년 초판 발행

이에 최치운 등은 명나라에서 발간된 『무원록(無寃錄)』의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고 『세원록』과 『평원록』 등을 참고하여 세종 20년(1438) 11월에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완성했으며 1440년에 강원도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TV수사극 별순검의 검시장면

『신주무원록』은 검시의 지침을 다룬 법의학서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범죄와 얽힌 생활사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는 생활사 연구의 자료이기도 한 귀중한 사료이다.

물론 동양의 검시는 서양과 달랐다. 동양의 경우 시신을 해부하지 않으므로 검시의 핵심은 바로 시체의 안색(顔色)을 관찰하는 방법이었다.

실제 『신주무원록』에 표현된 색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적색 계통만 보아도 적색에서부터 적자색, 적흑색, 담홍적, 미적, 미적황색, 청적색 등 여러 단계로 색이 세분화되었다. 이와 같은 안색의 관찰은 전통적으로 색(色)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지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색은 곧 ‘기(氣)의 발화(發化)’라는 『황제내경』의 사상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한편 시체의 상태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그 안색이 매우 달랐는데 이를 구별하는 일 또한 중요하였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시반의 변화를 정확히 안다면 거꾸로 사망 후 경과 시간을 추급하여 사망 일자를 과학적으로 추정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상흔 위장 찾는 방법도 매우 발달

또한 상흔의 위장(僞裝)을 찾아내는 방법도 상당히 발달하였다. 가령 타물(他物)로 구타, 살해한 경우 상흔이 푸르거나 붉게 나타날 것이 틀림없지만, 갯버들나무의 껍질을 상처 부위에 덮어두면, 상흔 안이 짓무르고 상하여 검은색이 되는 등 구타 흔적을 위조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손으로 만져보아 부어오르거나 단단하지 않으면 위장의 흔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밖에도 칼로 살해한 후 불에 타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경우, 범인이 검시인들을 사주하여 시체의 상처에 초를 발라 상흔을 지운 경우,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끓는 물에 데여 죽은 경우, 얼어 죽은 경우 등 그 상황에 맞게 다양한 약재와 보조도구를 사용하는 과학적인 판별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시신을 해부하지도 않고 이와 같이 엄밀한 검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신주무원록』의 내용 전체가 검시의학에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과 집행상의 주의할 점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마련했는데, 검시의 기본은 바로 정확성과 엄격함이었다. 예컨대 검시에 직접 관련되어 있는 행인(行人)과 이인(吏人) 등에게는 잠시라도 검시관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다짐받고 또 이를 검시관이 감독하였으니 이들이 조금이라도 뇌물에 연루될까 미리 예방하였던 것이다.

검시의 기본은 정확·엄격성

이처럼 엄밀함과 정확성을 기하려는 정신은 ‘타물(他物)’, ‘자액(自縊)’, ‘중독(中毒)’ 등과 같은 용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검안 문서의 표현에도 나타난다. 가령 ‘피부가 파손되었는데 피가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은 부적절하며, ‘피부가 약간 손상되어 피는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신주무원록』이 강조하는 정확한 용어 및 서술 정신은 이를 활용하려는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정확한 번역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끔 했고, 그 이해 과정에서 조선 전기의 법의학 지식과 행형상(行刑上)의 절차가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살해 후 자살한 것처럼 시체의 목을 매 조작한 ‘조액사(弔縊死)’가 가장 판별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죽기 전에 즉시 목을 매달면, 시체의 상흔이 스스로 목을 매 죽은 자액(自縊)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을 맨 장소가 목을 맬 수 있는 높이인지, 목을 맨 들보나 기둥 위에 흔적이 어지럽게 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목을 매단 끈이나 줄이 단단하게 탄성을 유지하면 자액이지만, 끈이 느슨하고 늘어지면 이는 시체를 옮겨 매단 흔적임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시체를 관찰하면서 ‘눈을 감았는지 여부’를 주의 깊게 검험하도록 하였다. 타살이라면 입과 눈을 벌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는 칼에 찔린 경우, 독을 먹은 경우, 서로 구타 후 물에 빠져 죽은 경우 등에서 검시를 통해 신중하게 판별해야 할 사항이었다.

독약을 먹고 죽은 경우, 은비녀를 인후(咽喉) 안에 깊이 넣었다가 잠시 후 꺼내면 비녀의 색이 검어진다고 적었다. 독사(毒死)의 경우, 전적으로 은비녀에 의지했다.

시대 상황 맞는 특유의 수사 기법

이 점은 『신주무원록』이 갖고 있는 조선 특유의 수사기법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비상으로 인명을 해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상으로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흔히 쓰던 '비상'은 비소와 황의 화합물인데, 은은 비상의 황과 결합하면 검게 변한다.  

상흔을 변질시키지는 않았다 해도 사체가 외부에 노출되어 시일이 오래 경과되면 시반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법물(法物)을 사용한 과학수사가 더욱 빛을 발한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 도구 및 수단들로 널리 알려진 것은 100% 순도의 은비녀이며 그밖에 지게미(糟), 초(醋), 파, 소금, 매실과육은 물론 창출(蒼朮), 조각(皂角) 등의 약재도 사용되었다. 지게미, 초, 파, 매실과육 등은 사체의 상흔을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고 창출, 조각은 시체가 놓인 곳의 악취를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증수무원록언해의 한 페이지.


이런 긴요한 법물(法物)을 검시에 닥쳐서야 검시 관리들이 이웃이나 피고의 집에서 얻어다 사용하는데, 시장이나 공장에서 동(銅)을 섞어 만든 가짜 은비녀들이 많아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고 적었다. 따라서 백성의 원망과 억울함을 없애려면 관(官)의 관리 하에 품질 좋은 은으로 은비녀를 만들어 봉하여 간직했다가 검시 전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시대 변천에 따른 수사집 보완>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 및 병조호란 등으로 사회의 기강이 많이 무너지고 범죄 수법도 다양해지자 과거의 법의학 지식만으로는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웠다.

영조 24년(1748)에 간행된 구택규의 『증수무언록(增修無寃錄)』은 이와 같은 변화를 반영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에서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새로운 사건 등을 새로이 삽입했다. 구택규의 아들 구운명(具允明, 1711~1797)이 더욱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버전을 내놓았다.

그는 그동안 조선에서 누적된 다양한 검험 지식과 수사 기법 가운데 기록할만한 것은 모두 첨가하여 『증수무언록대전』을 편찬했다. 정조는 서유린(徐有隣, 1738~1802)에게 『증수무언록대전』을 언해하도록 명령하여 1796년 『증수무언록대전』과 『증수무언록언해』가 함께 출간되었다. 전자는 한문으로 되었고 후자는 한글본이었다. 이 두 책은 1905년 새로운 형법이 반포된 이후에도 검시 지침서로 계속 활용되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검시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우선 그 시신의 혈속(血屬)과 이웃에게 그 신원을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후 시신이 놓인 위치와 상태를 정확히 측량하거나 관찰하여 기록하는데, 그 자리가 검시하기에 마땅치 않아 시신을 옮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일을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다음 시신의 상태와 상처를 샅샅이 관찰하고 치명상은 무엇인지 확정하도록 한다. 이때에는 시장(屍帳)에서 인체의 부위를 그려놓은 앙면(仰面)과 합면(合面)의 각 부위의 상처를 기록하도록 했다. 다음 시신을 평평하고 밝은 곳으로 옮기고 원래 입고 있던 의복과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기록한 뒤, 원고와 피고 및 관련된 가족, 이웃 등에게 확인시켜 서명하도록 하고 있다.

초검관은 복검 참여 못해…검시 객관성 유지

특히 초검관(初檢官)은 복검할 때,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검시의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으며 상급 기관의 복검이 여의치 않을 경우 대처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했다. 송철의 교수 등의 『역주 역주증수무언록언해』에서 인용한다.

‘검시의 정한 기한이 있어서 잠시도 늦추기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니, 혹 인근의 관리가 유고(有故)하고 다른 고을의 원(員, 같은 도에 있는 먼 고을의 수령)이 관할 지역 내에 지나감을 만나면 본관이 문첩(文牒)하여 복검을 청하는 것이 곧 국조(國朝)의 옛 일임에도 지금은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으니 사리(事理)가 마땅히 단단히 알려 경계하여 행하여야 한다.’

증수무원록언해의 신체부위표시 앙면과합면.

『증수무원록언해』에서는 살인에 쓴 칼이 오래돼 핏자국을 찾기 어렵거든 숯불에 달군 후 고초(高醋)라는 강한 식초를 뿌리면 핏자국이 드러난다고 한다.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오래된 피에 남아있던 철이온은 소량이라도 티오시안산과 반응하면 붉은색이 드러난다’며 ‘고초에는 티오시안산이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방울도 채 안 되는 혈흔을 탐지할 수 있는 현대의 루미놀 기법에 못지않은 과학수사기법인 셈이다.

현대 못지않는 과학 수사기법

현대의 루미놀 기법에서는 루미놀에 과산화수소수를 혼합한 용액을 사용한다. 혈흔을 찾고자 하는 곳에 이 혼합액을 뿌리면 과산화수소수가 혈흔의 혈색소와 만나 산소가 떨어져 나가고 이 산소가 루미놀을 산화시킴으로써 파란 형광 빛을 낸다. 범죄 현장이 실내인 경우 어둡게 한 후 루미놀 기법을 쓰면 아무리 작은 혈흔이라도 루미놀을 만나 반딧불처럼 빛난다.

『증수무언록언해』에 나타난 다음 기록은 당시에 얼마나 과학적인 수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상처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흔적이 의심스러운 부위가 있으면, 먼저 그 부위에 물을 뿌려 적신 후에 파의 흰 부분을 짓찧어 상흔이 있는 곳에 넓게 퍼 바르고 초에 담가 두었던 종이를 그 위에 덮어둔 채 한 시간 여를 지난 후 이를 걷어내고 물로 씻으면 상처가 바로 나타날 것이다.’


간혹 범인이 사체를 부검하는 데 참여하는 관원을 매수하여 꼭두서니와 같은 풀을 식초에 담갔다가 상처에 바르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면 상흔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증수무언록언해』는 ‘의심스럽다고 생각이 들면 사또는 반드시 감초즙으로 해당 부위를 닦도록 하라. 진짜 상처가 있었다면 즉시 나타날 것이다’라고 적었다.

시신의 추정 사망일자도 계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성한(盛寒, 한추위) 때에는 5일이 한더위 때의 1일과 같고, 반달이 여름의 3∼5일과 같다. 봄·가을은 기후가 온화해서 2, 3일이 가히 여름의 1일에 비견될 수 있고, 8, 9일이 가히 여름 3, 4일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살찌고 어린 사람은 상하기 쉽고 여위고 늙은 사람은 상하기 쉽지 않으며, 또 남쪽과 북쪽은 기후가 같지 않고 산 속은 춥고 덥기가 두돈(陡頓, 빠르게 변하는 것)하여 일정하지 않으니 그때 그때 가서 변화를 두루 살피는 일에 (요체가) 있다.’

여자를 검시할 때에는 특별한 주의를 하도록 했다.

‘부녀자를 검험함에는 가히 수치심을 피하지 못하는 법이다. 부녀자를 검험함에 있어서 상처 입은 곳이 없으면 모름지기 음문(陰門)을 보라. (이는) 여기로부터 칼을 배 안으로 들여보냈을까 의심함인데, 살갗에서부터 거리가 얕으면 배꼽 상하에 적게 피가 생긴 것이 있고, 깊으면 없는 법이다. 부녀자가 산문(産門)에 상처 입음으로 인하여 죽어 살갗과 살이 소화(消火, 썩어 업어지는 것)한 부녀자는 그 신문(숫구멍)골(顖門骨)과 가골(架骨)이 다 검붉고 붉은 색이다. 처녀의 주검을 검험함에는 수생파(收生婆, 해산시키는 여자)로 하여금 중지갑(中指甲, 장지 손톱)을 베어 버리고 솜으로써 싸서 감고 주검의 가족과 이웃 여자 두세 사람을 함께 보게 하여 산파로 하여금 솜 감은 손가락 끝을 음호(陰戶) 안에 시험하여 검은 피가 있으면 곧 이는 처녀이고 없으면 곧 아니다.’

해부하지 않고 겉모습만 살핀 한계도

물론 『신주무원록』의 기록에는 틀린 부분도 있다. 젖은 종이에 질식사한 경우 시체의 배가 부어오른다는 내용 등이다. 서울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는 “질식사의 경우 혈액이 고여 내부 장기가 부을 수 있지만 시체의 배가 부어오를 정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시체를 해부하지 않고 시체의 겉모습만 살폈던 조선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다.

조선시대에도 몽타주를 활용했는데 이를 ‘용파’라고 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글로 사람의 생김새 등을 묘사했다.

키와 얼굴빛, 머리 모양과 그 사람만의 특이한 생김새, 주로 얼굴이나 팔 등의 상처 혹은 뜸을 놓았던 부위 등을 기록해 포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에는 현대의 유전자 감식 같은 기술이 없으므로 용모나 병력(病歷)에 따른 상처, 혹은 문신 등을 수사에 참조했다.

『증수무원록언해』에서도 검시할 경우 반드시 ‘생전에 팔ㆍ다리가 부러졌는지, 곱사등이였는지, 조막손이나 절름발이였는지, 대머리였는지, 사마귀나 혹이 있었는지, 여러 가지 병의 상처나 문신, 뜸을 뜬 자국, 옴이나 버짐, 종기나 뾰두라지 부스럼 등의 흔적이 원래 있던 것인지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지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못 박았다.

흥미 있는 것은 벼락에 맞은 사람의 시신 등 자연 재해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었다는 점이다.

‘시신이 살빛이 누렇게 타고 온몸이 무르고 검으며 두 손이 혹 쥐어졌거나 혹 흩어져 있고 입이 열려지고 눈이 튀어나와 있고 이후(耳後), 발제(髮際)가 타서 누렇고 머리와 상투가 흐트러져 있고 불에 탄 곳은(천둥과 번개를 입은 곳) 피부와 살이 딱딱하며 단단히 오그라들어 있고 몸 위의 옷이 천둥과 번개에 태워졌거나 혹 불타지 않았다. 상처 난 흔적이 머리 위와 뇌후(腦後)에 있으되 뇌봉(腦縫)이 많이 터져 있다. 귀밑털과 털이 불꽃에 태운 것과 같고 위부터 아래가지 손바닥만한, 들뜬 살갗이 검붉으며 붉은색이 있으되 살은 상하지 않고 가슴, 목, 등, 팔뚝 위에 혹 전자(篆字) 흔적 같은 것이 있다.’

술에 취하여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많은 내용을 기록했다.

‘먼저 여러 사람들과(증인) 처음에 함께 자리했던 회수등인(會首等人, 술을 먹던 사람 중 어른)을 모아 놓고서, 여러 사람 앞에서 오작(仵作), 행인(行人)을 시켜 끓인 물로 씻기고 이를 마친 뒤에 먼저 몸에 있는 것을 검험하여 만일 상처 흔적이 없으면 곧 이는 술에 취하기를 과도하게 하여 심폐(心肺)가 부풀어 올라 죽은 것이니 손으로 두피(뱃가죽)를 두드리면, 팽창했기 때문에 소리가 맞추어진다.

(중략) 무릇 술을 먹어 찧어지고 밟혀 속이 상하기에 이르면 또한 가히 죽을 수 있지만, 그 모습은 매우 밝히기 어렵다. 그 시신이 바깥에 특별히 다른 연고가 없고 오직 입과 코, 항문에 음식과 똥이 피를 띠고 흘러 나와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만나면 모름지기 자세히 체구(體究, 정성스럽게 구문하라는 뜻)하되, 일찍이 다른 사람과 서로 다투어 이로 인해서 찧어지고 밟혔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체구하라. 목격한 사람이 증언한 것이 분명해야만 바야흐로 죽은 정황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과학기술의 한계로 인해 황당한 내용이 과학수사 기법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핏방울의 응고 여부로 친자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핏방울 응고 여부로 따진 친자확인법

중국 무술영화에서 친자를 확인할 때 자주 나오는 방법이기도 한데 조선 후기 혼란된 사회의 영향으로 친자 등을 확인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등장한 방법이다.

‘친자나 형제가 어려서부터 나뉘어 떠나 있어서 기억해 내어 알고자 하지만 진짜와 거짓을 가리기 어렵거든, 각기 찔러서 피를 내어 한 그릇 안에 떨어뜨리면 진짜는 서로 합쳐져 하나가 되고 진짜가 아니면 합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생피가 소금과 초를 만나면 엉겨지니 먼저 사용할 그릇을 당면(當面, 관원이 직접 보는 곳)한 채로 씻어 맑게 하거나 혹 특별히 새 그릇을 가져다가 시험하라. 또 피를 떨어뜨려 물에 넣을 때 만일 그릇이 크고 물이 많아 둘의 거리가 멀면 곧 능히 합쳐지지 못할 것이고 혹 물에 떨어뜨릴 때 약간의 앞뒤(시간차)가 있으면 곧 피가 차고 덥기가 다름이 있어서 또한 능히 합쳐지지 못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친자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각각 피를 내어 한 그릇 안에 떨어뜨리는데 친자라면 하나로 응결되고 아니면 응결되지 않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혈청과 혈액의 응고에 대한 생리적 지식을 조금이라도 아는 현대인이라면 웃고 말겠지만 이와 같은 내용이 유명한 법의학지침서에 삽입되어 있으므로 부모형제가 아닌 사람들이 호부호형(呼父呼兄)했을 것임이 틀림없다고 김호 박사는 적었다.

조선시대 수사관 모습(TV 한장면).
한편 조선판 CSI 과학 수사대 드라마로 TV에서 방영된 「별순검」은 『증수무원록』을 바탕으로 수사관 별순검이 지휘하는 과학 수사 정황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특수 경찰 이야기로 볼 수 있는 「별순검」은 기존 사극이 주로 연애와 역사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반해 조선시대에도 과학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하여 범인을 몰아가는 점 등이 다소 색다르다는 평을 받았다. 『증수무원록』을 기반으로 했으므로 원전이 탄탄한데다가 추리로 범인을 찾는다는 내용은 어느 시대나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로 부각되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MBC-TV 드라마 「다모」에서의 다모(茶母)는 원래 조선시대 각 관청에서 차심부름을 하기 위해 서민계층에서 선발된 격이 낮은 여성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조선 중엽 이후 포도청에서 선발한 여자 비밀형사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내외(內外)의 법도가 엄해 외간남자는 남의 집 안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규방(閨房)사건을 수사하는 데는 여자가 적격이기 때문이다.

다모들은 주로 염탐과 탐문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임무였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김자점(金自點) 역모사건도 다모의 정보로 전모가 드러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계속) 이종호(05/11/29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살인사건 실무처리서 정약용의 '흠흠신서'
조선시대, 과학수사와 인권 중시는 기본 (4)
<정약용의 『흠흠신서(欽欽新書)』>

조선시대의 과학수사를 논하면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알려진 정약용(1762~1836)의 『흠흠신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흠흠신서』는 정약용이 유배돼 있을 동안 『증수무원록』을 토대로 저작한 책이다. 당시의 제도는 목민관이 입법ㆍ사법ㆍ행정의 삼권을 온통 행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억울하게 죽게 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 정약용의 목적이었다.

법의학·형사적 측면까지 포괄

그러므로 『흠흠신서』의 내용을 요즘의 법률적 논리로 본다면 형법과 형사소송법 상의 살인 사건에 대한 형사소추에 관한 절차나 전개과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박석무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나 정약용은 법률적 접근만 다룬 것이 아니라, 법의학적ㆍ형사적인 측면을 포괄하고 있으며 사건의 조사와 시체 검험 등 과학적인 접근까지 상세하게 다뤘다.

생명에 관한 범죄는 조심스럽고 성실하게 공정히 처리해야하며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꼼꼼하고 치밀한 조사ㆍ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정약용의 3대 역작 중에 하나인 이 책은 우리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심리 실무지침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정약용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12년이나 감옥에 있었던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정조 23년(1799) 4월, 정조는 정약용을 형조참의에 임명하고 이미 확정 판결된 것들을 포함해 전국의 형사사건을 모두 회계(回啓)하라고 명령했다. 특히 정조가 직접 함봉련 사건에 의문의 꼬투리가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다.

사건은 평창의 나졸 모갑(某甲)이 환곡을 독촉하러 김태명의 집에 가서 송아지를 끌고 가다가 길에서 김태명을 만난 것에서 시작한다. 김태명이 송아지를 도로 빼앗으려다가 서로 싸움이 일어났고 모갑의 배를 짚고 무릎으로 가슴을 짓찧은 후 송아지를 데리고 가다가 길에서 땔감을 지고 돌아오는 함봉련을 만났다.

함봉련은 김태명 일가 사람의 머슴이었다. 김태명은 함봉련에게 모갑을 가리키며 그가 자신의 송아지를 훔친 사람이니 혼을 내주라고 했다. 함봉련은 지게를 진 채 모갑의 등을 떼밀었는데 그가 밭 사이에 넘어졌다가 곧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모갑이 집에서 피를 토해내자 아내에게 “나를 죽인 자는 김태명이니 복수하라”고 한 후 죽었다.

아내가 그의 말대로 고발했고 초검과 시체검험서에서 가슴 한 곳이 검붉고 딱딱하며 둘레는 3촌 7푼이고 코와 입이 피로 막힌 것 외에는 별로 다친 자국이 없어서 죽은 원인으로 맞아 죽었다고 적었다. 그런데 주범을 함봉련, 목격한 증인을 김태명으로 했고 증인들이 모두 함봉련이 밀어서 사망한 것이라고 적었다. 재검도 같은 취지였다.

정약용은 이 사건이 대표적으로 거짓 진술에 의한 오판임을 지적했다. 우선 형사 사건을 판결함에 있어 세 가지 근거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적었다. 첫째 유족의 진술, 둘째 시체검험서의 증거, 셋째는 공변된 증언이 서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시체검험서의 다친 자국과 유족의 진술이 서로 일치해 부합함에도 오로지 범인의 꾸며낸 말을 믿고 주범을 바꾸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시체검험서로 보면 가슴인데 가슴을 짓찧은 자는 김태명의 무릎이며 함봉련은 단지 손바닥으로 등을 떼밀었다고 했는데 등에는 다친 자국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김태명은 주범으로 고발당한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목격자로 삼았으므로 함봉련에게 올바른 증언을 하지 않았다. 다른 증인들도 함봉련이 김태명과 관련되는 머슴이므로 김태명을 응원했다고 밝혔다. 정조는 그의 보고서를 받자마자 곧바로 함봉련을 석방하고 김태명을 체포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을 줄여 조사 처리하도록 한 후 함봉련에 대한 원래의 사건 문서를 모두 태워 없애도록 지시했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포스터, 여주인공 샤론 스톤은 형사들의 심문 도중 담배를 피면서 뇌쇄적인 ‘다리를 꼬는’ 자세를 취했다. 심리학자들은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정조가 10여년이 지난 사건임에도 인명을 다루는 사건인 경우 의심스러운 것은 함부로 결재하지 않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정약용이 함봉련의 무고함을 밝히자 곧바로 석방하라고 지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무죄 판결땐 관련서류도 모두 없애

특히 함봉련에 대한 원래의 사건 문서를 태워 없애라고 한 것은 무죄를 받은 사람의 경우 관청에 서류조차 남겨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죄 없는 사람에 대한 서류가 남는 것조차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정약용은 살인사건의 경우 범인이 판결할 때 고의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려서 고의성이 없을 경우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조 22년(1798) 황주의 엿장수인 선착실이 모갑(某甲)을 살해했다고 재판을 받았다.

모갑이 외상으로 엿 두 개를 먹었는데 갚지 않자 연말이 되어 그 집으로 찾아가 독촉하니 모갑이 갚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말다툼이 벌어져 선착실이 손으로 모갑을 떼밀었는데 마침 등 뒤에 넘어져 있던 지게뿔이 모갑의 항문에 바로 맞히면서 위로 배를 찔려 사망한 것이다.

고의성 없을 경우엔 정상참작

모두들 죄수가 두 닢의 돈 때문에 사람을 죽였으니 반드시 용서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정약용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지게뿔이란 본래 곧고 예리하지 않으며 사람의 항문은 은밀한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찔려서 죽었다는 것은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선착실에게 비록 사람을 떼민 죄는 있으나 사람을 죽일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다. 왕도 그의 뜻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여 선착실을 석방하도록 지시했다.  

따라서 정약용의 『흠흠신서』를 가리켜 일부 학자들은 ‘우리 법제사상 최초의 율학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심리 실무지침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정약용 사후에 『흠흠신서』는 대량 인쇄되어 목민관들의 지침서로 활용되었고 조선 후기에 벌어진 각종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는데 일조했다.

『흠흠신서』는 조선의 근대 이전시기, 법의학서의 길잡이가 되었고 특히 정조가 이를 토대로 하여 인권을 중시하고 죄인의 형벌에 공정성을 기약하려 노력했다고 인식하므로 더욱 중요성이 높아진다.

〈과학수사의 현주소〉

필자가 고대의 과학수사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고 하자 독자들이 조선시대 수사기법에 부연하여 현대 과학수사 기법을 연계하여 설명해 달라고 말했다. 근래의 첨단 과학수사 기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현대의 수사기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다. 범인의 지능이 높아지고 수사관들을 속이는 방법이 고차원화 되었기 때문에 수사관들도 이에 못지않은 대응책을 강구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지문 감식 장면, 과거의 지문 검식은 지문이 다른 사람과 동일할 확률이 전혀 없으므로 범인 검거에 가장 널리 사용됐으나 범인이 장갑을 낄 경우 지문채취가 불가능한 단점이 있었다.


일단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범인과 수사관의 싸움으로 변한다. 범인은 범행이 탄로 나지 않도록 각종 대비책을 마련하고 수사관은 신속한 시간 내에 범인을 체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범인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각종 위장 방법을 강구한 범인이라면 범행을 자인시키기란 쉬운 방법이 아니다. 소위 범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가는 것인데 수사물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것도 머리 좋은 범인과 수사관 또는 탐정과의 머리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수사관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범인의 거짓말을 조목조목 명쾌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샤론 스톤을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시킨 영화 '원초적 본능'에서 그녀는 형사들의 신문 도중 담배를 피면서 뇌쇄적인 ‘다리를 꼬는’ 자세를 취했다. 영화에서는 명장면으로 끝났지만 유능한 범죄 심리학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샤론 스톤의 거짓말을 명쾌하게 가려냈을 것이라고 수사 전문가는 지적한다. 이야기할 때 다리를 꼬는 것은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행동이나 대화 통해 진실·거짓 판단 가능

범죄심리학에서는 범죄인들의 행동이나 말을 통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고 말한다. 범인들이 거짓말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토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쟁이가 워낙 똑똑하여 거짓말을 감추고 진실 행동만 한다면 수사관을 멋지게 속여 넘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머리 좋은 과학자들이 나섰다. 그들은 기계적인 방법으로 거짓말쟁이를 찾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그 기계를 만들어 냈다. 바로 ‘거짓말탐지기’이다.

2004년부터 ‘거짓말탐지기’라는 용어가 인간존엄을 해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심리생리검사기’로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거짓말탐지기’로 기술한다.

거짓말탐지기의 이론적인 배경은 죄를 지은 사람은 거짓말이 탄로날까 봐 두려워하므로 가슴이 부풀며 호흡이 빨라지고 침을 자주 삼킨다거나 땀을 흘리는 등 생리적인 변화를 보인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거짓말탐지기는 범인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도덕성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검사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범행이 탄로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탐지하는 것이다.

거짓말탐지기가 정말로 정확한가? 1978년 한 자료에 의하면 거짓말탐지기의 신뢰도는 90% 이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초보 검사관은 79%의 정확도에 비해 경험 많은 검사관은 91.4%의 정확도를 보였다. 이것은 거짓말탐지기에 의할 경우 20%에서 10%의 오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오차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나오게 함은 물론이다.

거짓말 탐지기 찬반 논란

바로 이런 문제점 때문에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하는 것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찬성하는 측은 ‘거짓말탐지기를 속일 가능성은 배심원을 속일 가능성만큼이나 작다’는데 근거한다. 더구나 목격자들의 증언이 대체로 거짓말탐지기보다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더욱이 거짓말탐지기를 찬성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한다고 하면 용의자로 하여금 자백하게 하는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반대측의 주장은 거짓말탐지기의 잘못된 검사로 상당수의 정직한 사람들이 거짓말로 낙인찍히고 있다는 점이다(미국의 경우 매년 50만 명 이상). 특히 돈에 관계되는 증권 거래의 경우 내부자 거래 수사에서 아무 문제없이 탐지기를 통과한 일부 투자 은행가들이 나중 수사에서 내부자 거래에 협조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스라엘에서 21명의 경찰관을 대상으로 ‘거짓말 탐지기’에 대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적성검사’라는 명목으로 필기시험을 치렀고 자신의 답안지를 직접 채점하도록 했다. 답안지에는 부정행위를 잡아낼 수 있도록 화학처리가 됐고 21명 가운데 7명이 처음에 쓴 답을 고쳐서 냈다.

거짓말 탐지기 검사 결과 자백한 3명과 검사를 거절한 부정행위자 2명을 제외하고 탐지기는 2명의 부정행위자를 밝혀냈다. 하지만 결백한 용의자 두 명도 거짓말을 한 것으로 판단했다. 다시 말하면 거짓말탐지기도 거짓말을 한다는 것으로 거짓말탐지기의 신용이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혈흔검출기, 현대과학 수사에서 혈흔은 매우 중요한 자료 중에 하나이므로 수사진은 혈흔 확보에 주력한다. 루미놀은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 극히 미량의 혈흔에도 반응해 강한 형광의 빛을 발산한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미국 레이건의 행정부에서 일어났다.

레이건 행정부는 백악관 내부에서 뉴욕타임스에 정보를 흘린 내부자를 찾기 위해 백악관 보좌관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했다. 이때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인 로버트 맥팔레인은 두 번씩이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모든 정황이 그에게 불리해지자 그는 자신이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뉴욕타임스의 발행인에게 자신의 결백을 레이건 행정부에 알려달라고 했다. 발행인은 편집장으로부터 그 기사의 정보원은 맥팔레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주었고 그는 대통령으로부터 결백을 입증 받았다.

<뇌는 주인을 배반>

거짓말탐지기는 조사 대상자의 정서 반응에 의존하므로 엉뚱한 결과가 나올 개연성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정서 대신에 인지 과정을 이용하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뇌안에 숨어있는 유죄정보 추적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라이켄 교수가 제안한 유죄지식검사(Guilty knowledge test)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의 머리에 범행에 관련된 정보가 저장되어 있으므로 뇌 안을 뒤지면 유죄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범죄를 계획, 실행, 기억하는 것은 뇌이기 때문에 뇌 안에 유죄의 증거가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뇌 안에 숨겨진 유죄정보를 어떻게 추적하느냐인데 현재 3가지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첫 번째는 1991년 미국의 로렌스 파웰이 제시한 ‘뇌지문감식’법이다. 피검사자의 머리 위에 10여 개의 미세 전극이 내장된 장치를 씌우고 범죄 장면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뇌파를 검사하는 것이다. 피검사자가 범죄를 부인하더라도 뇌가 주인을 배반해서 범행을 자백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이 방법은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무고한 혐의자를 가려내는데 오히려 탁월한 효과를 보여준다. 1978년 당시 17세의 흑인 소년이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는데 사건이 지난 20년이 지난 다음에 무죄를 받은 적도 있다. 소년의 뇌가 범죄 장면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가 알리바이로 내세우는 음악회 관람과 관련된 문장에 강력히 반응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개발한 뇌 영상기술이다. 자기공명영상장치(MRI)로 뇌를 검사해 거짓말을 할 때 뇌의 여러 부위에서 일어나는 활동에 따라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기술이다.

세 번째 방법은 뇌지문감식처럼 미세 전극을 사용하지도 않고 MRI처럼 첨단기기를 사용하지 않는데도 신뢰성이 높은 방법이다. 단지 질문에 대한 반응시간을 측정해 머릿속의 유죄 지식을 판독해 내는 것이다. 미국의 트래비스 세이머 교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여러 차례 연습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도 2배 가까이 반응이 늦다는 것을 발견했다.

국내에서도 2004년부터 뇌파분석기를 범죄 수사에 도입하여 2년 동안 제자리를 맴돌던 살인사건 용의자를 추정해 내는가 하면, 살인방화범의 범행방법을 밝혀내기도 했다. 최초의 분석 대상이 된 사건은 독극물 연쇄 살해사건이다.

3명이 비슷한 수법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2003년 발생했는데 수사진은 이렇다 할 증거가 없고 용의자마저 강력히 부인하자 대검 과학수사과에서 용의자를 대상으로 뇌파분석을 시도했다. 검찰은 용의자에게 컴퓨터 모니터로 여러 가지 단어와 사진 등을 일정한 간격으로 보여주었다.

용의자 뇌파, 범행과 밀접하게 반응

수많은 화면 가운데 범행에 사용됐던 독극물이나 범행 장소 주변 건물 등이 지나가자 용의자의 뇌파가 조금씩 반응을 보였다. 검찰은 그의 뇌파가 범행과 밀접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 다른 사건은 2004년 살인방화사건으로 피해자를 방에 가둔 채 불을 질러 목숨을 빼앗은 사건이다. 용의자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용의자에게 현장에서 발견된 도구를 제시하자 용의자의 뇌파가 반응했다.

또 다른 거짓말 탐지 기술은 높은 해상도로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열을 감지하는 것이다. 소위 얼굴의 열을 감지하는 사진기술인데, 기존의 거짓말 탐지기보다 사용이 훨씬 간편하고 실용적인 것이 특징인데다 83%에 이르는 정확도로 범인을 색출했다(범죄인 확인 75%, 무죄확인 90%).

이 기술의 핵심은 대부분 강도의 상기된 얼굴은 유죄의 증거라는 사실에 근거한 기술이다. 특히 범인의 눈 주위에 나타나는 열은 원초적으로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공포-도주’ 반응이라고 한다. 이런 얼굴의 열상은 거짓말이나 충격을 받으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서 얼굴의 혈관이 느슨해지기 때문일 것으로 과학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과학수사의 총아 DNA>

혈액형과 마찬가지로 현대과학수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수사 기법 중에 하나는 DNA지문 분석이다.

1983년 영국의 앤더비에서 15세의 한 소녀가 강간을 당하고 목 졸려 죽었으며 3년 후에도 인근에서 15세의 소녀가 같은 형태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동일 소행범에 의해 저질러진 범행으로 추정했지만 확증을 할 수 없었다. 엔더비의 살인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어 17세의 소년이 체포되었고 그는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도 했다.

수집된 각종 자료로 수사 단서를 확보하는 장면(자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때 개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식별하는 DNA 분석법이라는 놀라운 방법이 개발되었다.

유전자 분석법이란 199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멀리스(Kary B. Mullis)가 발명한 PCR(중합효소 연쇄반응: Polymer chain reaction) 기법을 기초로 한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개인의 DNA를 분석할 수 있다. PCR 기법이란 특정 부위의 DNA를 복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제공된 시료를 20회 반복하여 복제하면 약 100만 배까지 늘릴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늘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세 시간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가능한 것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를 통해 유전자가 자식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유전자의 절반은 어머니로부터 오고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로부터 온다. 따라서 우리 개인의 대부분의 독특성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조합에서 유래한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46개의 염색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생식세포라고 불리는 정자와 난자는 그 절반인 23개의 염색체만 갖고 있어서 자식을 만들려면 서로 다른 남녀의 정자와 난자가 합쳐져서 46개의 염색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 사람의 몸속에서 평생을 통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수의 정자는 유전자의 내용이 모두 다르다. 여자의 경우도 사춘기부터 폐경기까지 배란되는 약 450개의 난자 속에 있는 유전자의 내용이 전부 다르다. 인간이 되기 위해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데 어떤 조합이 이루어질지는 그야말로 우연이라는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들어질 때는 더 복잡한 과정이 일어난다. 46개의 염색체가 그 절반인 23개로 나누어지는 과정에서 단순하게 무를 칼로 자르듯이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교차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어머니에게서 온 염색체와 아버지에게서 온 염색체 위에 있는 약 10만 개의 유전자가 쌍을 이루면서 무작위로 섞이는 것이다. 이것을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한 부모로부터 223x23즉, 약 70조 명의 자식이 태어나더라도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을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한 부모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경우에도 이와 같이 달라지는데 다른 부모를 둔 경우에 서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DNA분석이라는 새로운 기법이 개발되었다는 것을 안 영국경찰은 살해된 희생자들에게서 발견된 잔존물과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소년의 DNA 표본을 비교한 결과 다르게 나타나자 소년이 범인이라고 자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석방되었다. DNA 감식법에 의해 혐의를 벗은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이후 범죄수사에 지문과 함께 DNA 지문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987년 11월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성범죄에서 DNA 지문법을 적용, 범인에게 22년의 징역형 선고를 내리게 한 것이 최초였다. 이후 캐나다에서는 1989년 4월, 연금을 받는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연속 강간사건에서 용의자의 혈액과 현장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형을 분석 대조한 것이 최초이다.

DNA 감식기법 1991년 우리나라 첫 도입

국내에서는 1991년 DNA 감식기법을 도입했다.

1992년 한 동네 길가에서 혼자 놀던 L양(8살)을 어떤 청년이 부근 공터로 끌고 가 강제 추행하고 도주했다. 경찰은 현장 감식을 실시했지만 현장에는 신문지 조각만 발견되었고 다른 증거물은 없었다. 당시 신문지에는 끈적거리는 물질이 묻어 있었는데 사람의 정액이었고 혈액형은 AB형이었다.

경찰은 사건발생 이틀 만에 외판원 C씨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그의 혈액형은 AB형이었지만 C씨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한국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신문지에 묻는 정액 증거물과 용의자 C씨의 혈액으로부터 각각 유전자를 분석했고 두 시료는 동일 인물임이 증명되었다. 결국 용의자 C씨는 범행을 완전히 자백했고 이 사건은 유전자 분석을 통한 국내 최초의 범인 검거 사례였다고 최상규 박사는 말했다.

대형 인명피해 사고 신원확인 큰 공헌

그 후 강력사건은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1995), 괌에서 일어난 항공기 추락사고(1997), 화성씨랜드 화재사고(1999),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2003) 등 대규모 인명피해 사건에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등 DNA 지문법은 사회에 큰 공헌을 해 왔다.

32년에 범인을 잡은 DNA 검사표, 미국 3개 주(州)에서 적어도 25명 이상의 여성을 강간한 범인은 32년 전인 1973년 피해자인 여성의 속옷에 남긴 자신의 DNA 때문에 체포됐다. 이 사건은 DNA 데이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줬다.
현재 미국에서는 각종 범죄현장에서 머리카락, 혈액, 담배꽁초에 묻은 타액 등을 통해 범인 DNA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 또한 미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막아 범인을 철저하게 검거하기 위해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음에도 수배중인 범인의 별명이나 신체상 특징 등을 곁들여 ‘홍길동’, ‘아무개’ 식으로 기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전자 검색이 가능한 것은 대부분의 범죄 상황에서는 언제나 분석 가능한 혈흔, 강간범의 정자, 혹은 머리카락이나 피부 조직 등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수사 당국은 만약 범인이 DNA 지문 감식이 가능한 몇 올의 머리카락, 혈액, 정액, 타액, 오줌 혹은 다른 조직들을 남겨 놓았다면 그들이 누구인지를 밝혀낼 수 있다. 이는 길가에 함부로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미국 3개 주(州)에서 적어도 25명 이상의 여성을 강간한 클라렌스 윌리암은 32년 전인 1973년 피해자인 여성의 속옷에 남긴 자신의 DNA 때문에 체포됐다. 이 사건은 그동안 꾸준히 모아온 DNA 데이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고 32년이나 흐른 뒤에도 DNA검사를 통해 범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첨단과학수사를 이기려는 두뇌는 어느 일도 성공할 수 있다>

영화 등 추리물에서 범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추리 영화를 자주 보는 사람은 장갑을 끼고 있는 장면만 보고도 그가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이다. 장갑을 끼는 것은 지문을 없애기 위한 전단계로 여겨지는데 이제 그런 방법도 현대 과학에는 손을 들 수밖에 없다.

범행에 사용된 장갑, 의류 등에서도 지문을 찾아낼 수 있는 레이저장비가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땀과 같은 분비물에는 리보플라빈 등 몇 가지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성분이 묻은 섬유에 레이저 광선을 통하면 지문 형태가 나타난다.

지문·혈액 흔적 지워도 찾아낼 수 있어

만약 범인이 사건현장에 남긴 혈액 자국을 모두 물로 닦아냈다면 어떻게 될까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를 집에서 살해한 후 피를 모두 닦아내고 나서 시체를 옮겨 길거리 도로표지판에 묶어두어도 수사진들은 찾아낼 수 있다.

1992년,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위안부로 생활하는 Y양이 흉기로 이마부위를 맞아 사망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미군 M일병으로부터 직접적인 증거물을 찾지 못했고 그가 입었던 남방과 바지는 이미 세탁된 후였다. 육안으로는 혈흔이 식별되지 않자 루미놀(Luminol) 용액을 옷에 분무했다. 남방에서 미량의 희석된 혈흔이 검출되었고 피해자와 동일한 혈액형이었다. 루미놀은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는 1만 배 희석된 혈액 성분과 접촉되더라도 강한 형광의 빛을 발산한다. TV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약이다.

마약수사는 첨단 장비로 더욱 활기를 띤다. 2002년 유명 남자연예인 K씨가 마약을 복용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소변검사를 실시했지만 마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경찰은 K씨의 모발을 검사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그가 머리를 삭발하고 다녔기 때문에 머리털을 채취할 수 없다는 점이다. 소변의 경우 마약성분이 3~4일이면 배설돼 버리지만 머리카락 등 체모에는 6개월에서 1년까지 잔존한다. 모발의 뿌리인 모근까지 퍼진 모세혈관을 통해 마약성분이 모발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K씨가 약간의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에 착안하여 수염을 채취하여 분석했다. 결국 엑스터시 양성반응이 나와 K씨는 마약을 복용했다고 자백했다. 몇 년 전에만 해도 마약을 복용한 사람들이 소변검사의 한계성을 잘 알고 있으므로 시간이 경과한 경우 마약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나 최근 개발된 모발감식법은 그들의 거짓 주장을 낱낱이 벗겨내고 있다.

죄를 지은 범인의 거짓말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항상 폭로된다는 것은 우리를 즐겁게 한다. 거짓말쟁이는 매우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 어떤 거짓말을 했는지를 항상 외어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거짓말을 듣고 어떤 사람이 과장하거나 불리하게 말해 올 때라도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발설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짓말 발달 할수록 수사기법도 발전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거짓말한 사실을 일일이 기록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기록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공인하는 것이므로 오로지 자신의 기억력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점점 더 큰 거짓말로 비약됨은 물론이다. 결국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현재 검찰과 경찰에서는 수사 과학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진술조서의 증거 능력이 법정에서 인정되지 않고 강압수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수사 과학화가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그저 피의자의 자백만 받아내서는 기껏 기소를 해봐야 법정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인 셈이다.

그러나 범인의 지능 즉 거짓말이 발달하면 할수록 과학수사 장비는 물론 수사 기법도 발전한다는 사실은 결국 범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한 수사관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첨단 과학 수사를 이기려는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머리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않겠는가.’  끝. 이종호(05/12/07 
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