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sr]산행,여행

인공위성사진과 함께 보는 서울 풍수 이야기 / 한양도성 일주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18. 14:02

 

 

 

위의 사진은  구글어스에서 편집한 서울의 경복궁의 인공위성 사진입니다.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한권의 책을 사보게 되었습니다.

육관 손석우도사의 "터"라는 책이었습니다. 93년도일 겁니다.

그때 심심풀이로 그냥 읽었던 책을  정확히 1년 후 다시 똑박또박 읽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관 손석우 도사가 예언한 김일성의 죽음이 정확히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터"라는 책에서 육관도사는 김일성의 정기가  전주 모악산에서 받은 것인데 그 정기가

94년에 끝난다고 하면서 예언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덮어 두었는데

94년 한여름  속보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바로 김일성의 죽음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바로  육관도사의 예언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읽게 되었고 또

풍수라는 말을 되세겨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인공위성사진을 마음대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때 읽었던 내용을 인공위성 사진과 더불어 재구성해 볼려고 합니다.

 

이성계의 한양천도에 얽힌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설전을 재구성 해 보겠습니다.

이성계는  고려의 손때가 묻은 개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금으로 말하는 소위 '기득권층 타파"

로 여기고  새술은 새부대라는 슬로건 하에 천도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을 다니면서  물색한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답사차 와서

처음 본 곳이 왕십리(往十理)였다죠.  여기서 10리를 더 가야 한다는 곳. 그래서 10리를 더 온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터라고 합니다.

 

주산은  삼각산(북한산)으로 잡고  바로 뒤는 북악산, 인왕산줄기는 우백호, 반대편은 좌청룡.

위의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습니다.  (전문전 풍수가가 아니라서 전문용어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터를 잡는 과정에서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꿈 해몽을 잘 해주면서  百年之友가 된 무학대사와 역성혁명의 바람잡이이자 실질적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설전은  그 누구도 못 말릴 지경이었습니다.

(물론 말빨이 더 쎈 유학자 정도전이 이기긴 이겼습니다. 지금도 말빨센넘이 이기지요)

 

그 말싸움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풍수사상의 근간인  주산을 근간으로 삼아  좌청룡 우백호를 토대로  남향의 배산임수지역이

항상 명당자리로 취급받습니다. 그와 아울러서  군왕은 항상  북쪽에서 남쪽을 보고 다스린다는

전통적인 음양사상까지 가미됩니다. (음양사상으로 볼때 북이 양, 남이 음)

 

그런데  우리의  도사님인  무학대사님이  딴지를 걸고 나왔습니다.  崇儒抑佛정책의 화신이자

당시 최고 실권자인  정도전에게  딴지를 걸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성계의 빽이 없었다면

딴지를 걸 수 없었겠지요.  보통의 중넘 같으면  벌써 댕그렁 했을터인데  빽이 빽인지라 정도전도

그렇게는  못하고 지금 누구가 좋아하는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만 아는 조선시대 초의  100분토론이 생방송되었습니다. 

사회자는 이성계  패널은  정도전과  무학대사였습니다.

 

사회자 이성계 : 지금부터  한양천도와 함께 도성 위치결정을 위한 100분토론을 방송하겠습니다.

                     패널은 정도전과  무학대사입니다. 서로들 인사 하시지요.

무학대사 :  안녕하십니까? 나무 관세음보살

정도전  : 어음.  (존심때문에 인사도 안받는다)

사회자 이성계 :  무학대사님  왜 딴지를 걸고 나왔는지 먼저 발제토론 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학대사 : 뭐 딴지라고 하면 섭하구요. 나무관세음보살.

              다  군왕과  이 새로운 나라의 천년사직을 위함이지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설명을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한 610년정도 지나야 볼수 있는 한양부근 인공위성사진을 여러분에게만

            특별히 먼저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괜히 도사가 아니라는 증거올시다.

           

  짠~~~  인공위성 사진 등장.

 

 

 

 

            보시는 것처럼  보면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다른 것은 다 좋습니다. 주산이 북한산하며

            주작인 남산  그리고 한강수  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좌청룡과 우백호의

            언밸런스입니다. 

 

 정도전 ;  잠깐만요.  지금 때가 어느땐데  또 풍수이야기입니까?  지금이 고려시대인줄 아세요?

             지금은  새로운 조선시대입니다.   고려가 왜 망한줄 아세요. 바로 중넘의 요상한

             짓거리 때문에 망했는데 지금 또 그 짓거리 한다는 겁니까?

무학대사 : 나무관세음보살.  사회자님 아직 저의 발언시간인줄 압니다만.

사회자 이성계 :  정도전님.  좀 있다가 발언하세요. 사회자가 호구는 아니잖습니까?

정도전 : 지송^^

무학대사 : 다시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좌청룡과 우백호의 언밸런스가 무언고 하니

              바로 이것입니다.   그 줄기의 장단과 고저를  우백호가  인왕산줄기에서 그 기가

              꺽기는데  비해서 좌청룡은 죽 이어져 나갑니다.  즉  우백호의 기운이 좌청룡의

              기운보다 약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무릇 우백호는 長子(맏이,적통자)를 뜻하며  좌청룡은(次子)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맏이를 뜻하는 우백호보다  次子를 뜻하는 좌청룡이 더 實하다는

              것은   그 기운상  나라의 변고를 많이 가져오게 됩니다.

              자연의 순리상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야 정상이고 불은 물을 만나면 꺼져야

              하는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오히려 반대가 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좌청룡의 기운보다  우백호의 기운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무릇 물과 기운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양에서 음으로 흘러야 합니다.

              그런데  양이라고 할 수 있는 우백호가  음이라고 하는 좌청룡보다 약하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사회자 이성계 :  뭐 그렇게 현실적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도성의 선택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의 재기를 했으니까  대안까지도 말씀하셔야

               시청자분들도  납득할 텐데 대안은 무엇 입니까? 

 

무학대사 :  참 좋은 질문 하셨습니다.  제가 괜히 도사가 아닙니다.  그럼  다음의 사진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사진은  내가 도사라서 볼 수 있는 겁니다. 무려 600년을 앞서서

               보는 것이니까  죽더라도 발설하면 안됩니다.  정말 천기누설이 되니 꼭 비밀은 지켜야 합니다.

               짠  사진 2 등장

 

 

 

무학대사 :  바로   남향대신에  왕궁을 동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존 경복궁터에서  지금의 명륜당 터쪽으로 옮겨서  동향으로 짓는다면

                기존의 좌청룡맥은 신우백호가 되고  새로운 좌청룡이 생기는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동향으로 왕궁을 짓는다면 새로운 조선은 천년사직을 보장받을 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공위성 사진으로 보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 이성계 : 그럼 지금부터  정도전님 발론해 보세요.

 

정도전 :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한번 말씀 드리지만 지금은 고려시대가 아닙니다.

           새로운 조선시대입니다.   중넘들이 설치던 고려시대가 아니란 거죠. 

           고려가 왜 망했습니까?  위화도 회군땀시 고려가 망한게 아닙니다. 바로 중넘들의

           뻘짓거리땀시 망한겁니다.  풍수지리 잘 보고 그것대로 한 고려가 망한건 멈니까?

           그렇게 믿는 풍수지리로 본다면 고려가 망하면 안되죠.  안그래요?

          

            글구  개경에서 왜 돈들여 가면서  한양으로 천도 합니까?  바로  중넘들하고

           고려 기득권층이 만들어 놓은것 보기 싫고  또 그 기득권을 없애고 또 고려를 망해먹은

            불고의 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혁의 의지와 사상인  유교이념을 구현하여

           새시대를 열고자 함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와서 또 중넘 말을 또 들어야 합니까?

 

무학대사 :  나무 관세음보살.  사회자님.  인신공격성 발언은 자제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 이성계 :  정도전님.  인신공격성 발언은  강퇴요건이오니 자제바랍니다.

정도전 : 쩝~  글타면  에헤 ^ㅅ^

            그러니까  지금와서  새술은 새부대에 담고  과거사를 청산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다시  꼴텅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무학대사 : 나무관세음보살.  신고 들어갑니다.

사회자  이성계 : 정도전님   꼴텅은 금지어입니다.  경고 1회.

정도전  :  버릇이 되서리.  지송.  그러니까  무릇  임금은 북쪽에서 남쪽을 보고 다스리는 것이

              고래로 부터의 전통이자  또 그렇게 해야 위엄이 섭니다.  동향을 보고 마주 한다는 것은

              일반 백성도 그렇게 안합니다.  또  집값도 동향보다는 남향이 더 비쌉니다.

              동촉하여 주시옵서서. (사족 : 글고 동향이면  아침에 늦잠자기도 힙듭니다.)

 

사회자 이성계 ; 그럼 외국의 사례는 어떻습니까?

 

정도전 :  아직까지 왕궁이 동향인 경우는 없는 줄 아뢰옵니다.

            게다가 이미 설계가 끝난 마당에 지금와서 다시 설계하면 추가비용도 들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새 왕궁에 입주가 그만큼 늦어 집니다.

             늦어지게 되면  지긋지긋한 개경에서 그만큼 더 머물러야 하고  또  대출이자하고

             공기 늘어나는 것 만큼 공사비도 늘고 그만큼 개혁의 힘이 분산됩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우리는 임진나루에서  수구세력이자  꼴텅인 왕씨넘들을

              무참히 수장까지 시키고 왔습니다.   다 새로운 조선의 개혁을 위함인데

             지금와서  수구 꼴텅인 중x말을 다시 듣는 다는 것은 개혁의지의 후퇴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모(이성계를 사모하는 모임)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통치기반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동촉하여 주시옵서서.

 

             그리고  사이좋은  왕자님들이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왕자님들에게 대한 모략이

            아니옵고 무엇이란 말이옵니까? 

 

사회자 이성계 : 무학대사님  반론해 주시죠

 

무학대사 : 나무관세음보살.

              저는 전문가입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보는 전문가입니다.  내가 괜히 인공위성사진까지

              보여주는 줄 아세요.  바로  전문가이기 때문에  600년 후에것 까지도 보여줄 수 있는겁니다.

              정도전님은 저에게 비한다면 아마추어도 아닙니다. 미래를 보는 눈을 정도전님은 없습니다.

              그저 공자왈 맹자왈 밖에 더합니까?  저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지

              뻥카를 말하는 거 아닙니다.

 

정도전  :  사회자님.  지금  무학대사는 저에게 인신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전문가와 아마추어라는

              전형적인 이분법 논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탕질로 발전할 수 있으니 주의주시기 바랍니다.

 

무학대사 ; 뭐가 이분법 논리입니까?  사실을 말하는 건데

 

사회자 이성계 : 무학대사님 인신공격 하지 마시구요.  다들 진정하세요.  이러다가 사이트 망해요.

                자 그럼 이상으로 토론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이멜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결과는 말빨 더 쎈 정도전의 뜻대로 갔습니다. 당시의 개혁논리의 승리였지요.

그러나 희안하게도  역사는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흘러갔습니다.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건국이라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던 정도전은  결국 이성계의 5번째

왕자  이방원에 의해서 목이 댕강하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정도전의 정확한

시신과 묘는 어딘지 모르고 있습니다.

 

또 조선의 왕들은  역대로 장자 상속이 별로 없었습니다.  단명하거나  반정으로 엎어지기 일수

였습니다.  게다가 더 아이러니 한것은  임금뿐만 아니라 이렇한 것은 민간에게도 그대로 그

기운이 전해졌다는 겁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예로 든다면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임금포함)들 보면 장자보다는 차자이하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 현재도 잘되는 집안(기업)을 보면 장자상속 보다는 차자이하의 상속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떤지요?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4편>

곽경근 입력 2021. 05. 17. 06:12 댓글 6

 

- 궁궐이 발아래 "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 창의문에서 숙정문 지나 삼청공원까지
- 서울의 독특한 경관과 역사 체험 동시 ‘순성(巡城)’
- 선비들 하루에 성곽 길 완주하며 과거급제 기원- 백악마루는 순성 길 중 최고의 조망 자랑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쿠키뉴스] 글·사진 곽경근 대기자 = 과거를 보기위해 경상도 상주 땅을 떠나 한양에 다다른 김 진사는 성 밖에서 하루 유숙한다. 다음 날 새벽, 성문이 열리는 시각인 파루(罷漏)를 기다려 아침 일찍 순성 길에 올랐다. 40리 순성 길 중 가장 오르기 힘든 백악산 정상, 백악마루에 서서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좌청룡 낙타산과 우백호 인왕산 그리고 맞은편 목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내사산 능선을 따라 용트림 하듯 굽이치고 휘돌아가는 한양도성의 웅장함이 시골 유생의 눈을 휘둥그레 해 진다.

성곽도시‘서울’어제와 오늘을 잇다.한양도성 순성 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니다. 600년 서울의 두터운 역사와 숨결을 오늘의 길에서 만나며 천년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 발 아래를 내려다보자 화려한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길게 펼쳐진다.
김 진사의 시선이 품계석이 세워진 근정전 뜰에 고정된다. 국왕이 정기적으로 신하들을 모아 놓고 조회를 하는 장소이자, 국가의 중요한 행사와 의식이 벌어지는 바로 그 자리... 김 진사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내 기필코 이번 대과에는 급제 하련다. 가문을 일으키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리라...”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길이가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 중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백악산 산책에 나선 시민들/ 창의문에서 숙정문 구간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었으나 현재는 탐방 절차가 간소해져 365일 편하게 입산할 수 있다. 단 계절에 따라 개방 시간 차이가 있다.


(4) 궁궐이 발아래 “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전국 팔도에서 상경하는 백성들에게 멀리 보이는 한양도성은 반가움과 조선 백성으로서 자긍심이었다. 몇날 며칠을 길게는 보름 넘게 걸어서 온 이들이었으니 먼발치에서 한양도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드디어 한양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나 과거시험을 보러 상경하는 선비들의 경우 한양도성의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과거 보러 온 선비들 중에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비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도성민들에게도 전해져 ‘순성(巡城)놀이’라는 도성 돌아보기가 생겼다. 훗날 종로에 자리 잡은 상인들도 개업한 상점의 번창을 기원하며 도성을 한 바퀴씩 돌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창의문에서 시작하는 백악산 순성길, 한양도성 탐사 길 중 가장 가파른 코스이다.


정조 때 학자인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순성놀이를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안팎의 멋진 경치를 구경하는 놀이”라면서 “순성 길은 필운대의 살구꽃, 성북동의 복사꽃, 오간수문의 버들이 유명하다”고 기록했다. 그의 아들인 유본예(1777∼1842년)도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봄과 여름이면 한양 사람들은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안팎의 경치를 구경한다. 이른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40리)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상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고 순성놀이에 대해 설명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양도성 순성은 전통행사로 이어져왔다.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되던 일간신문 ‘매일신보’ 1916년 5월 14일자에 ‘금일은 순성하세’라는 제목으로 지면의 절반 이상을 할애해 한양도성 순성을 다뤘다.
오늘날 서울시도 옛사람들의 순성놀이를 계승해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서울시 한양도성 홈페이지에 따르면 내사산을 중심으로 한 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 구간과 도성이 멸실된 흥인지문·숭례문 구간 등 6구간으로 나누어 걷기를 추천하고 있다.

- 창의문에서 숙정문 지나 삼청공원까지
1968년 발생한 ‘1·21 사태’ 이후 52년 만에 북악(백악)산 길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1993년에는 인왕산이 2007년에는 서울의 소중한 역사를 시민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북악산의 구간별 개방이 시작되었다. 지난해 11월 1일에는 청와대 뒤편 북악산 북측 면이 둘레길로 조성돼 52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 많은 시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

창의문 입구/ 창의문 위 문루에는 인조반정 공신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1등 공신과 2등 공신 그리고 3등 공신까지 영조가 창의문에 문루를 짓고 현판에 새겼다.


- 사소문 중 가장 오래된 성문,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의(義)를 드러내는 문이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를 잇는 성문으로 평지 보다 높은 언덕에 있다. 창의문은 궁 안과 궁 밖의 경계이며, 도성 안을 흐르는 청계천이 시작하는 곳이다. 도성 밖 홍제천은 백악산 빗물이 흘러 만든 역사의 현장이다. 400여 년 전 인조 반정군은 홍제원에서 말을 타고 홍제천 물을 거슬러 세검정에 모였다. 말을 탄 능양군은 병사 700명을 이끌고 출전해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을 불태웠다. 마침내 광해군을 경운궁 석어당에서 무릎 꿇렸다. 인조대비의 윤허를 받아 즉조당에서 인조로 즉위하였다. 가슴 아픈 역사의 시작점이 바로 창의문(彰義門)이다.

창의문 옛 사진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는 창의문은 한양도성 안 사대문과 사소문 중 가장 오래된 성문과 문루이다.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백악마루 백악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언제나 힘들다. 가파른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왼편에 삼각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족두리봉에서 향로봉과 비봉 그리고 보현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초록이 물든 5월에 백악을 오르는 길은 예로부터 순성 길의 시작이다. 지친 몸을 잠시 성벽에 기대어 뒤돌아보면 인왕산 기차바위와 정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백악산 정상


한양도성 내사산 중 가장 높은 백악산(白嶽山, 342m)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다. 구름 걷힌 백악마루 정상에 서니 발아래 경복궁과 광화문 지나 숭례문까지 일직선상에 들어온다. 남쪽에 산이 있으니 봉수대가 있는 목멱산(남산)이다. 빌딩 숲 사이로 좌청룡 낙타산과 우백호 인왕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성벽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한양도성은 우리는 물론 세계인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 분단의 아픔 간직한 1.21사태 소나무
백악산 정상에서 백악곡장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성곽 길에 아픈 상처를 드러낸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원이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는 서부전선을 넘어 삼각산 진관사를 거쳐 백악산까지 내려왔다. 53년 전 청와대 습격 직전 우리 군경과 교전이 있었다. 백악구간 성곽 옆에서 벌어졌다. 총탄을 온 몸으로 받아 낸 소나무만 그날을 웅변하고 있다. 15발의 탄흔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서 있다.


- 한양도성 성곽 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청운대
보안상의 이유 등으로 백악마루에서 볼 수 없는 사방의 풍경이 마침내 청운대에서 열렸다. 백악산 아래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 따라 종묘까지 사방이 탁 트인 풍경이다. 청운대(靑雲臺)는 한양도성 성곽길 18.627km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공간이다. 눈앞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과 정문인 광화문 지나 육조거리인 광화문 광장이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면 삼각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대와 만경대, 인수봉이 보인다. 이곳은 백악산에서 가장 평평한 언덕이 있는 서울의 경관 명소이자, 한양도성의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쉼터이다.

백악곡장 전경


- 백악 곡장 ‘성안으로 갈까, 성 밖으로 걸을까’
잠시 청운대에서 숨을 돌렸다면 다시 순성 길에 나서보자. 어디로 갈 것인가? 도성 안으로 걸어도 도성 밖으로 걸어도 백악곡장(曲墻)을 만날 수 있다. 곡성(曲城)으로도 불리는 곡장은 성벽의 일부를 둥글게 돌출시켜 쌓은 성을 말한다. 성 밖을 더 잘 살피고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구조물이다.

위 각자성석에는 “순조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공사감독은 이동한 전문 석수 용성휘가 참여해 성벽을 보수했다”고 새겨져 있다.


도성 안을 걷는다면 성벽에 쓰여진 글자를 볼 수 있다. 도성을 쌓은 사람의 지역과 감독관까지 실명으로 적어 놓았다. 각자성석(刻字成石)이다. 조상의 숨결과 역사의 순간이 적혀있다. 정으로 다듬고, 여럿이 힘을 합쳐 목도로 운반하는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순성 길을 안내한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은 “백악산을 기준으로 한양도성 97구간 곳곳에 각자성석이 남아 있다. 현재까지 274개 이상이 발견되었는데 각자의 시기별 특징과 구간별 축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으니 한양도성은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강조한다.


도성 밖을 걷는다면 높은 성벽과 성을 쌓은 시기에 따라 달라진 성벽의 성돌들을 볼 수 있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쌓은 성벽과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옥수수 같은 성돌 그리고 정방형돌을 사용한 흔적이 도성 밖 성벽에 남아 있다. 정확한 크기로 깎고 다듬어 정교한 성벽으로 맞춰지고 쌓아져 장벽이 되고 경계가 되었다. 시간의 흐름과 축성기술의 변천과정이 백악산 도성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양재동에서 부인과 함께 순성길에 나선 성용무 씨는 “북악산의 새 구간이 개방되고 대통령도 다녀갔다고 해서 들렸다”면서“한양도성의 대단한 규모에 놀랐다. 도심에서는 잘 보이지않아 몰랐는데 이렇게 산에 올라와서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도성 안과 도성 밖으로 걸어도 백악 곡장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바로 이곳이 한양도성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을 유지한 순성길, 백악구간 역사길이다.

600여 년 한양도성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백악산 곡장 아래 성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직벽을 오르는 것 같은 45도 기울기의 지형에 성곽을 쌓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다.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듯 성곽 바위틈을 비집고 노란 민들레가 새 생명을 피어냈다.

숙정문 전경


- 문을 닫아 음기를 막아라, 숙정문
백악산에서 낙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한양의 북쪽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이 보인다.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처마 끝으로 솟아있는 소나무의 그늘 옆, 숙정문 홍예 안으로 들어간다.
숙정문은 조선시대 대부분 폐쇄되어 있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이곳은 시체나 죄인을 압송하던 길로 쓰였으며 또 이곳의 문을 열어 두면 한양의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 하여 문을 거의 닫아 두었는데 가뭄이 들면 남대문을 닫고 이곳의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말바위 전경


- ‘말(馬)일까, 말(末)일까’ 전설 속 말바위
말바위는 삼청공원 안에 있는 바위이다. 말바위는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이곳에서 말을 묶어놓고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하여 말(馬)바위라 불렀다는 설과 백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는 설도 있다. 예전에는 바위에 벼락이 많이 친다 해서 벼락바위라고도 했다. 이곳 주변으로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말바위 바로 아래 경관 명소


숙정문에서 창의문을 지나 말바위안내소에서 패찰을 반납하고 말바위 경관 명소를 지나 경사길을 20여분 내려가면 삼청공원에 도달한다. 역시 숙정문에서 성곽을 따라 혜화문이 있는 왼쪽으로 내려가면 와룡공원이 나온다. 모두 숙정문에서 20여분 거리지만 와룡공원 방향이 조금 걷기 편하다. 삼청공원 아래 삼청동이나 와룡공원 아래 성북동 모두 먹거리, 볼거리가 풍부하다. 숙정문에서 최종 목적지를 정해 4번째 순성길을 마치면 된다.

광화문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백악산 전경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 ‘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한양도성 박물관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흥인지문에서 장충단까지)
⑦ 일제가 사랑(?)한 남산, 원래 모습을 찾아가다.
(정각원(경희궁 숭정전)에서 남산골한옥마을까지)
⑧ 돌담길이 아닌 궁담길
(백범광장에서 대한문까지)
⑨ 서대문구에는 서대문이 없다?
(돈의문에서 홍난파 가옥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