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탈레반 (중앙일보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 2006.03.02 20:54 입력)
1994년 봄 아프가니스탄 남부 상헤사르 마을에 총을 든 무자헤딘(이슬람 전사)10여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위세가 당당했다. 무자헤딘은 10년 넘는 게릴라전 끝에 소련 침략군을 몰아낸 주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을을 접수한 뒤 소녀 두 명을 납치해 성폭행했다.
인근 칸다하르의 이슬람 학교 교사인 물라 오마르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30여 명의 동료.학생을 모아 무기를 들고 달려갔다. 치열한 전투 끝에 소녀들을 구출했으며, 사로잡은 무자헤딘들은 그 자리에서 목을 매달아 응징했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알려져 무자헤딘의 횡포에 지친 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영웅들은 현지어로 '코란을 읽는 이슬람 학생'이라는 뜻의 '탈레반'으로 불렸으며 정의의 상징이 됐다. 탈레반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오마르는 이 사건 직후 보복을 피해 이웃 파키스탄으로 옮겼다. 영웅담이 널리 알려지면서 후원금이 이어졌으며 많은 젊은이가 부하를 자원했다. 힘을 기른 오마르는 칸다하르로 돌아가 세력을 잡았고, 아프가니스탄 각지의 무자헤딘 근거지를 하나하나 점령해 나간다. 96년에는 거의 전국을 장악했다.
탈레반은 역사의 산물이다. 80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적지 않은 주민들이 난민이 됐다. 힘든 난민촌 생활을 하면서도 이들은 자녀 교육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드라샤라는 이슬람 학교를 세워 소년들을 가르쳤다. 이곳 학생들이 탈레반의 기반이 된다.
문제는 이들 학교가 코란 암송만 가르치는 이슬람 학교라는 점이다. 다른 것은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 모든 진리가 코란에 들어 있는데 왜 다른 것을 배우느냐는 것이다. 사실 난민촌 생활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이들이 기댈 곳은 유일신인 알라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탈레반은 정권을 잡은 다음에도 현실감을 찾지 못했다. 음악.영화.스포츠 등 모든 세속적인 즐거움을 금지했으며 국민의 인권을 무시했다. 여성을 천대하고 박해하기도 했다. 이슬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무조건 적용한 것이다. 이런 통치는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됐다.
한때 탈레반 대변인을 하던 사예드 라마툴라 하셰미라는 인물이 올 봄 학기에 미 예일대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방과 이슬람을 잇는 가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새로운 공부를 통해 경전 속의 이상과 눈앞의 현실을 잇는 다리 역할도 함께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