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기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2:55

고구려의 기원

 

Ⅰ.序     論

 

해방후 1980년대 초까지 國內 및 日本에서의 韓國古代史 硏究는 절대 다수가 新羅史 硏究에 치우쳐 있다. 그런데 韓國史 중에서도 高句麗史가 가장 부진한 실정이다. 그런데 특히 三國史 硏究중에서도 高句麗史 연구가 가장 부진한 실정이다. 더욱이 新羅史와 百濟史硏究가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量的 팽창을 거듭하는 데 반해 高句麗史는 커다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침체되있던 고구려사 연구에 잠시나마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은 1979년 檀國大學校팀에 의해 발견된 中原高句麗碑였다. 이 비의 발견은 史科부족에 허덕이던 고구려사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준 것으로 廣開土大王碑 발견 후 약 1世紀만의 成果라고 평가된다. 또한 高句麗史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韓國古代史 硏究 전반에 있어 매우 주목되는 현상으로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불기 시작한  國家起原論에 관한 硏究를 들 수 있다. 國家 基源에 대한 연구가 그 이전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970년대에 美國 人類學界에서 일기 시작한 국가에 관한 연구가 國內 學界에 소개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또 『三國史記』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國家起原硏究의 활성화에 일익을 담담하였다. 여하튼 西洋으로부터 소개된 國家起原論이 韓國古代史硏究에 큰 進展을 가지고 왔지만 高句麗 成立이 관한 硏究는 아직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1930년대에 행해졌던 金洸鎭의 연구는 高句麗社會를 엥겔스의 『家族·私有財産 및 國家의 起源』에 나타난 假說에 입각하여 고찰한 社會經濟史的 硏究였다. 이런 연구방법은 최근 鬼頭淸明에 의해서도 고구려사연구에 이용되었다. 반면 李龍範은 鐵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茂山地域의 鐵器文化가 고구려 성립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고 李玉은 考古學的 硏究成果와 神話의 分析 등을 통하여 고구려의 民族形成科程과 사회상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또 金光洙는 文獻資料의 분석을 통해 고구려가 太祖王代를 거치면서 新大王代에 이르러 古代集權國家를 형성하였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諸見解는 나름대로 고구려의 성립에 관해 새로운 방법론과 사료들을 이용하여 고찰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國內學界의 연구이외에 北韓에서도 그 地理的인 利點으로 고구려에 대한 유적발굴과 역사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나 다분히 自的意識을 지니고 행해지기 때문에 큰 성과는 찾기 힘든 것 같다. 南韓의 경우는 歷史學界 전체로 크게 보아 日帝 植民史家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역사연구의 경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北韓의 경우는 主體史觀이라는 큰 틀 속에서 역사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고구려 역사연구도 그 일맥선상에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北方史라면 中國의 長成 밖에서 이루어진 이민족의 역사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었는데 이제 우리는 북방사의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바로 세워야할 北方史란 무엇일까. 바로 渤海國이 멸망한 이후 韓半島로 고정되어버린 우리의 역사무대를 만주땅의 회복이라는 民族的 念願을 반영하여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되돌아 보건데 고구려의 역사는 中國人과 日本人에 의해 심한 상처를 받았다. 고대 중국인은 고구려에 대한 勝戰國으로서 中華史觀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中原政權의 지방정부로 둔갑시키는 등 고구려의 영광을 축소시켰다. 일본인들은 만주지배와 관련하여 역사를 다시 짓밟아 만주사의 한 부분으로 급조하였다. 특히 만주땅을 淸나라의 중국지배에 대한 응분의 배상으로 고집하고 있는 오늘의 중국인들은 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高句麗를 중국의 지방정부 또는 諸侯國家라고 자리매김하는 등 만주에서 부침했던 여러 이민족 국가의 文明史的 뿌리였던 高句麗를 최대한 비하시키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토록 고구려는 중국이나 일본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막강한 국가였던 것이다. 자신들의 歷史가 더욱 빛나기 위해서 우리의 역사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우리의 고구려를 바로 알고 최근 진위여부의 논란이 일고 있는 建國神話인 晝夢神話와 B.C3세기∼B.C2세기의 주변 상황과 고구려의 建國科程에 대해서 알아보며 아직도 논란이 분분한 고구려의 建國年代에 대해서도 알아보겠다.

 

 

Ⅱ.高句麗의 起源

1)建國說話

한 나라의 建國神話에는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高句麗의 建國神話에서 구 神話的인 要所를 걷어내면 그 속에서 高句麗의 여러 특성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高句麗의 建國 起源問題 또한 建國 이전에 살았던 高句麗族의 生活 모습을 전해주고 있는 關聯紀錄과 起源에 관한 建國說話를 다각도로 살펴봄으로서 밝혀질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까지 나타난 큰 흐름을 보면 대표적인 建國設 하나에만 매달리거나 일부 편중된 자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 여러 자료에 대한 만족할 만한 종합적인 검토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이다. 여기에서는 高句麗의 起源問題에서 絶對的 가치를 지닌 建國說話를 먼저 검토해 보기로 한다.

 

建國說話의 檢討

고구려의 建國說話는 韓國과 中國의 여러 역사책에 실려있어 누구나 언제든지 접해볼 수 있다. 한국의 歷史文獻으로는 『三國史記』를 비롯하여 『三國遺事』『東明王篇』등이 있으며 『東明王篇』의 주석에 실려있는 『舊三國史』에서도 고구려의 建國說話가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의 歷史文獻으로는 『魏書』,『量書』,『周書』,『隨書』,『北史』등을 들 수 있다. 아들 역사책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의 기원을 각기 달리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기원여부를 夫餘·北夫餘·東夫餘 등 세 갈래에서 찾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이들 여러 자료들 가운데 高句麗의 起源을 볼 때 가장 많이 참고하는 것이 『三國史記』인데 여기에 실린 高句麗의 建國說話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은 아버지가 없으나 어머니는 하백의 딸 유화이다. 부여에서 동부여의 우발수로 귀양을 간 유화는 동부여의 왕 금와의 왕궁으로 들어와 알을 낳았는데 주몽은 이 알을 깨고 나왔다. 주몽은 동부여 왕실에서 7명의 왕자와 함께 성장하였다. 동부여의 왕태자 대소는 주몽의 비범함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주몽을 죽일 것을 권유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사육을 시켰다. 유화는 이를 눈치채고 주몽에게 동부여 왕궁에서 즉시 떠날 것을 권하였다. 주몽은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신하 세사람을 거느리고 왕궁을 도망쳐 나와 엄사수를 건너 모둔곡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주몽은 세 사람을 만나 이들을 신하로 삼고 졸본천에 이르러 비류수가에 고구려를 세웠다. 나라를 세울 때 주몽의 나이 22세로 한나라 건소 2년이었다.  

 

 위의 건국설화는 『東明王篇』주석에 인용된 『舊三國史』의 건국설화에서 내용면으로 일치한다. 따라서 『三國史記』등 한국의 문헌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舊三國史』나 이와 같은 옛 문헌을 기본으로 했다고 하겠다. 『三國史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동부여 왕실과 성장인연을 맺어 그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 동부여의 왕실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舊三國史』보다 앞선 자료인 414년에 세워진 「光開土大王陵碑文」을 비롯한 『魏書』등의 기록은 이것과 차이를 보여준다. 우선 「光開土大王陵碑文」에는 북부여의 천제(하느님) 의 아들인 주몽은 북부여의 왕실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수레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부여의 奄利大水를 건너 沸流國의 忽本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都邑을 정했다고 되어있다. 아무래도 이 비문은 광개토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록하는데 비중을 두다 보니 주몽의 건국설화를 간단히 처리한 듯 하다. 어쨌든 이 비문은 주몽이 건넜다는 강이름과 도착한 땅이름만은 『舊三國史』와 일치하나 주몽을 북부여 出身이라고 말하고 있어 동부여 出身이라고한 『舊三國史』와 차이를 보여준다.

이렇듯 주몽의 出身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다. 다음으로는 주몽의 出自地에 대한 각기 다른 학설에 대해서 검토해 보겠다.

 

주몽의 出自地에 대한 기록들

 고구려 계루부왕실의 始祖라는 주몽의 출신지에 대한 기록은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光開土大王陵碑와 모두루 묘지 등 5세기 초에 쓰여진 高句麗 金石文에서 전하는 북부여 출자설이다. 다른 하나는 『舊三國史記』와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 등에 전하는 동부여 출자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魏書』고구려전과 『周書』 및 『隨書』고려전 등에서 전하는 부여출자설이 있다. 『梁書』고구려전도 여기에 속한다. 주몽의 출자지에 대한 이러한 세가지 전승에서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들은 이들 기록에서 말하는 북부여, 동부여, 부여의 위치 및 實體 및 그 상호 관계다. 우선 부여 출자설의 경우를 살펴보면 가장 이른 시기에 쓰여졌고 그 내용이 자세한 것은 『魏書』고구려전의 기사다. 거기에서 435년 무렵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문하였던 北魏의 使臣 李傲가 전해들은 바를 시술하여 당시 고구려의 영역이

   

 東으로는 柵城에, 南으로는 소해에, 北으로는 舊夫餘에 이르고 民戶가 煎魏때보다 3배가 되며, 그 땅은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리가 된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魏書』高句麗傳에서 고구려의 起源이 夫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이어 주몽과 그의 아들이라는 '閭達'의 出自地를 부여라 하였다. 그리고 '閭達'의 손자라는 '莫來'때 부여를 攻破하여 복속시켰다고 기술한 후 뒷부분에 위의 인용문이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舊夫餘는 곧 주몽의 출생지라는 '夫餘'와 동일처임을 말해준다. 한편 『魏書』高句麗傳과 그것을 이은 『周書』 및 『隨書』高句麗傳에서는 東夫餘 지역을 柵城이라고 기술하였다. 이는 곧 夫餘出自設을 담은 『魏書』등의 '夫餘'는 東夫餘와 무관한 것임을 말해준다. 나아가 5세기 전반까지는 주몽의 東夫餘出自設이 형성되지 않았거나 적어도 당시고구려사회에서 유력한 전승이 되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東夫餘의 成立科程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三國志』에서 전하는, 지금 길림시 일대에 그 중심지를 두었던 原夫餘國은 285년 貌容鮮卑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그 왕이 자살하는 등의 큰 타격을 받았다. 그때 王族등 부여국의 일부 집단이 北沃沮方面으로 피난을 하였다. 이들 亡命 集團은 곧이어 晉의 지원을 받아 貌容鮮卑의 군대를 물리치고 복국을 하여 길림지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런에 그때 亡命集團의 일부는 계속 두만강 유역에 머물렀다. 이들 집단은 그 뒤 본국이 貌容鮮卑의 공세로 약세를 면하지 못함에 따라 점차 자립적인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이 집단과 길림지역을 중심으로 한 夫餘는 高句麗人의 입장에서 보면 각각 東과 北에 있는 두 개의 부여로 여겨졌을 것이고 그에 따라 이들 두 집단과 그 지역을 각각 東夫餘와 北夫餘라고 구분해 명명케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전반 고구려가 북진하여 鹿山 즉 吉林地域을 장악하자 北夫餘는 서쪽의 農安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북옥저 방면의 동부여는 본국과 차단되었으며 그 결과 자립하여 독자적으로 국가를 영위케 되었던 것이다. 즉 東夫餘는 3세기 말∼4세기 초 이후 성립되었다. 한편 북부여는 동부여의 존재를 전제로 할 때에 가능한 명칭이다. 떠한 동부여가 실재하였을 때에도 그에 대한 인식이 없을 경우 北夫餘는 그냥 夫餘로 인식되고 그렇게 불리웠다. 실제 中國 史書에는 동부여라는 명칭의 실체에 대한 기사가 전혀 없다. 자연히 부여만이 언급되었고 그 부여는 『三國志』단계의 吉林 지역에 중심을 둔 原 夫餘國과 그것을 직접 계승한 農安 지역의 부여국이었다. 그리고 『魏書』고구려 전에서는 부여국이 농안으로 그 중심지를 옮긴 뒤 원 부여국 지역을 '舊夫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주몽의 출생지에 대한 세갈래 전승 중 '夫餘出自設'은 '北夫餘出自設'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부여출자설과 동부여 출자설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출자 전승이 실린 각 사서간의 차이점을 알아보자. 먼저 동일하게 동부여 출자설을 담은 『舊三國史記』의 전승과 『三國史記』의 그것을 대비해보면 前者가 보다 신화적인 수사와 내용이 풍성함을 알 수 있다. 이규보의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記』에서는 '天帝之子'인 해모수의 神話가 길게 서술되어 있으나 『三國史記』에서는 '그 내력을 알 수 없는 자칭 天帝子라는 해모수'에 대해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舊三國史記』에서는 주몽이 떠날 때 그 어머니인 河伯女가 주었다는 곡식알과 관계된 穀種說話가 더 있다. 그러나 주몽의 出自 전승에서 핵심인 동부여에서 하백녀가 일정을 받아 알을 낳고 거기서 주몽이 태어났으며 주몽이 박해를 받자 졸본 지역으로 가 고구려를 세웠다는 내용의 기본 줄기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三國遺事』의 경우 주몽의 出自에 관계된 내용이 北夫餘, 東夫餘, 高句麗 등 3개조에 나뉘어 언급되어 있는데 『三國史記』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그럼 두 設을 각각 대표하는 『三國史記』와 『魏書』의 주몽설화를 비교하여 보자. 이 둘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다음부분이다. 즉 『三國史記』의 전승에서는 ①夫餘王 解夫婁가 그의 재상이 꿈에서 들은 천제의 명을 쫓아 동해안의 迦葉原으로 천도하였고 그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②해부루왕이 곤연이란 못의 바위아래에서 금빛개구리 모양의 남아를 얻었고 이 아이가 자라 동부여왕이 되었다. 이 두기사에서 하백녀가 주몽이 관계된 왕을 『魏書』에서는 '부여왕'이라 한 데 비해 『三國史記』에서는 '동부여왕'인 金蛙王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실려있는 부여관계기사를 보면 주몽의 출자에 관한 부분과 주몽이 졸본에 가 입국한 다음 '동부여'에 남아 있다가 죽은 하백녀를 위해 부여왕이 神廟를 세웠다는 기사 외에는 유리왕대 이후 부여와의 교섭관계를 서술한 기사 중 부여의 소재처를 나타낸 기록은 모두 그 방향이 고구려의 북쪽으로 되어있다.  이런 점은 곧 『三國史記』고구려본기의 부여관계기사에 바탕을 둔 어떤 史乘은 원래 주몽의 북부여출자설이 더 첨가되었고 그것이 현전 『三國史記』와 『舊三國史記』가 의거한 또 다른 고전이었음을 뜻한다. 첨가된 주요부분이 앞에서 말한 동부여천도설화와 金蛙王 전설이다. 자연 동부여출자설이 북부여 출자설보다 후기에 정립된 것이며 그 면은 현전하는 역사기록중 陵碑나 모두루묘지 및 『魏書』등 북부여 출자설을 담은 기록이 시기적으로 먼저 등장하였다는 점과도 부합한다.  

 

 이렇듯 동부여 出自設이 늦은 시기에 등장하였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에 나타났는지 알아보자. 동부여가 성립된 것은 3세기 말∼4세기 초 이후이므로 이런 동부여 건국 설화가 형성된 것도 이 무렵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아가 이런 설화를 그 일부로 담은 주몽의 東夫餘出自設은 그보다 후대에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성립된 시기를 알아볼 때 陵碑에서 "동부여는 추모왕의 俗民이었는데 그 후 反하여 朝貢하지 않았다."고 한 기사가 일단 유의된다. 이 구절이 사실일 수는 없다. 단, 이런 표현을 낳게 된 데에는 어느 시기에 있었던 동부여나 두만강 유역의 주민과 고구려간의 어떤 역사적 사실이 투영이 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이 구절의 표현자체는 동부여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服屬되어야 할 존재였다는, 당시고구려 지배층의 天下觀을 담고 있다.그런데 百濟와 新羅에 대해서도 그런 의미를 담아 "예로부터 高句麗의 俗民으로서 조공을 해왔다"고 하였지만 동부여의 경우에는 구체적으로 "추모왕의 신민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5세기 초에 주몽의 동부여 出自設이 고구려에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던져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일단 상정할 수 있다. 하나는 高句麗 存立당시 어느 시기에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668년 이후 신라인이나 고려인에 의해 바뀌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금와왕 전설이 김알지설화에서 파생된 것으로 신라인의 조작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특정한 개구리를 샤먼의 靈이나 조상의 영혼으로 숭앙하는 예는 흑룡강 하류지역의 혁철족 등에서 보이는 바로서 소박한 신앙 형태의 일면을 지닌 것이며 두만강 유역에는 그 뒤에도 금와왕 전설과 연관성을 지닌 설화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 만큼 이 전설은 그 說話的 要所나 분포를 볼 때, 신라인이나 고려인에 의해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 물론 금와왕 전설이 668년 이전에 형성되어 있었더라도 그것이 朱夢說話에 삽입되어 동부여출자설로 정립된 것은 고구려 멸망뒤였을 가능성은 남는다. 그런데 고구려 말기에는 『三國史記』의 그것과 사실상 동일한 왕계와 건국기년을 지닌 전승이 성립되어 있었다. 만약 高句麗 末期의 史書에 北夫餘出自設로 되어 있었다면 그 뒤 신라인이나 고려인이 기존의 그것을 굳이 새로 동부여출자설로 바꾸어야할 이유를 상정하기 어렵다. 여기서 잠깐 王朝時代에 한나라 시조의 출자설화가 지닌 의미를 생각해보자. 출자설화는 특히, 古代國家에서는 王室의 正統性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주몽설화가 지니는 핵심요소는 고구려왕실의 정통성의 근저가 하늘님[天帝]의 핏줄을 이은 天孫이요, 풍요를 약속해줄 수 있는 농업신[하백녀]의 자손이라는데 두고 있다. 따라서 고대 국가에서 왕실의 시조의 출자에 관한 설화의 부분적인 수식은 계속 가감될 수 있지만 그 기본틀에서 변화가 있었다면 그것은 매우 큰 政治的 意味이며 동시에 큰 정치적 변화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새로이 동부여 출자설이 정립된 데에는 일단 두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5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 정계에 큰 변화가 있었느냐 하는 면이고 다른 하나는 동부여출자설의 정립에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닌 세력이 대두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 두 측면은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北夫餘出自設의 定立과 부여

다음으로 주몽의 북부여 出自設이 언제 성립되었는가 알아보자. 북부여 출자설의 정립시기를 볼 때 유의되는 것은 북부여출자설을 담은 기록들에서의 고구려와 북부여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다. 『魏書』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의 기원에 대해서 주몽이 부여에서 탄생한 뒤 남주로 입국하였고 이어 부여로부터 온 주몽의 아들 '閭達'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莫來'때에는 부여를 정벌하여 복속시켰다고 하였다. '여달'과 '막래'사이에 '여울'이라는 왕이 더 있어 왕계상으로는 『三國史記』와 차이를 보이지만 여울의 사적에 대한 언급이 없어 고구려의 건국과 부여와의 관계에서의 주요맥락을 주몽-여달-막래로 이어지는 3단계로 파악하였음은 『三國史記』와 동일하다. 『위서』고구려전의 기사를 이은 『주서』와『수서』고려전에서는 '여울'의 존재가 빠지고 주몽의 손자인 막래때부터 부여를 '신속','병합'했다하여 그런 면을 더욱 더 표출하고 있다. 능비에서도 그 첫머리에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서 남쪽으로 내려와 입국한 과정을 서술하고 이어

 

   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儒留王은 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17세손인 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儒留王과 大朱留王의 治積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초기의 왕계를 추모-유류-대주류 3대만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거기에는 고구려국의 확립과정에 대해 『三國史記』나 『魏書』의 그것과 같은 인식이 깔려있다고 여겨진다. 특히 제3대왕을 大朱留王이라고 한 데에서 그런 면이 나타난다. 여기서 부여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吉林市 일대에 중심을 둔 부여는 3세기말 模龍鮮碑의 공격을 받아 일시 그 왕실이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곧 복국하였다. 그러나 부여는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그 중심지인 鹿山을 상실하고 서쪽으로 옮겼다가 재차 346년 모용선비의 기습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부여는 5세기 말 새로 발흥한 물길의 초략을 받자 그 왕실이 고구려 내지로 옮겨오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러한 부여국의 역사를 볼 때 고구려에 종속된 부여상을 담은 建國說話를 공식화하려면 4세기 전반 이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부여가 현실에서 고구려왕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면 부여의 동명설화를 대폭 차용한 형태인 『魏書』고구려전에서 전하는 바와 같은 주몽의 北夫餘出自設을 고구려 조정이 공식적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상전하기 어렵다는 면에서도 그러하다. 414년에 쓰여진 陵碑에는 北夫餘 出自設이 기술되어있다. 자연 4세기 전반과 5세기 초 사이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조정의 공식적인 始祖에 관한 說話로서 北夫餘出自設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시기를 생각할 때 유의해야하는 것은 위에서 살핀 3단계로 구성된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보이는 대무신왕에 대한 강조이다. 즉 『三國史記』에서는 대무신왕대에 부여를 종속시켰다고 하고 능비에서는 3대 대주류왕에 大자를 붙여 그를 위대한 왕으로 여기는 의식을 담았다.  『魏書』고구려전에서도 '막래'때 부여를 복속 시켰다고 하였으며 "막래의 자손이 想傳하여 그 裔孫宮에 이르렀다."고 하여 그 후 다음 대의 왕들과의 연결점으로 기술하였다. 이 막래는 대무신왕이다.

 

 그간 막래에 대해서는 그 字形이나 模本이 유사함을 들어 그리고 如栗은 그 음이 儒留와 相似함을 들어 각기 모본왕과 유류왕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정에선 막래의 경우 이런 문제점이 제기 될 수 있다. 『魏書』에서 전하는 高句麗王 諱나 字에서 같은 시기 陵碑의 왕명과 字形이 상사한 것이 하나도 없다. 시조조차도 주몽과 추모라 하며 그 음은 통하지만 字形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三國史記』에서 전하는 왕들의 휘에서도 주몽과 논의의 대상인 막래를 제외하고는 始閭諧, 여달, 여율과 상사한 자형을 지닌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유독 막래만이 모본의 異寫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魏書』고구려전에서 전하는 각 왕의 사적을 보면 막래는 대무신왕의 그것과 같다. 그리고 『魏書』고구려전에서 고구려의 기원과 국가의 확립과정을 부여와의 관계 하에서 주몽, 여달, 막래로 이어지는 3단계로 파악하였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三國史記』와 陵碑의 그것과 공통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비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이렇듯 4세기 후반에 시조의 北夫餘出字說話를 포함해 대무신왕대까지 이르는 건국설화가 정립되었다면 이때 고구려 초기의왕계도 함께 정립되었을 것이라고 상정된다.

 

북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 유사성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표현상 다소 다르긴 하나 줄거리가 같아 두 설화는 어떤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상식적으로 부여의 건국설화가 있고 난 다음에 고구려 건국설화가 변형된 것이 고구려의 건국설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보통 교과서의 고구려 왕계 서술을 보면 1대왕에는 동명성왕이라 기재되어 있다. 그러면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 있었을까? 즉 주몽과 동명이라는 이름은 모두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주몽이란 활 잘 쏘는 사람으로 밝혀졌으니 만큼 문제될 것이 없다 하겠으나 동명을 주몽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은 무리인 듯 하다. 특히 고구려전에서 건국자의 이름이 동명으로 불린 적이 없었던 데서 더욱더 그러하다. 「廣開土大王陵碑文」을 보면 고구려의 건국자는 추모로 되어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0년조는 '中牟'라했고 중국의 역사문헌은 주몽 또는 추모라 했다. 관련된 기록을 더 보면 『唐書』고구려전에 실린 정관 19년(645)태종의 고구려 침공 기사에는 요동성에 주몽의 사당이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본의 『新撰姓氏錄』도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라 했다. 또한 高句麗傳을 가지고 있는 『魏書』, 『周書』, 『隨書』 등 중국의 역사책도 모두 주몽을 고구려의 시조라 말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고구려 사람들이 시조의 이름을 주몽 혹은 추모와 비슷한 음으로 불렀지 동명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음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三國史記』高句麗本紀 동명왕 즉위년조를 보면 주몽의 휘(죽은 사람의 이름)가 동명으로 되어있다. 고구려의 건국 초부터 산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다면 「廣開土大王陵碑文」도 시조의 휘를 썼어야 하는데 쓰지 않았다. 따라서 『三國史記』의 기록은 다른 각도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실 동명이란 이름은 고구려 왕실을 포함하여 부여와 백제의 시조에서도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부여의 시조를 동명이라고 불렀음을 부여의 건국설화에서 이미 확인이 됐으며 백제에서 시조의 묘를 동명묘라고 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동명이란 말은 사람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풀이하는 것이 온당하다. 특히 고구려 사람들이 주몽을 계통상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성시한 사실로 보아 주몽이 동명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고 부여와 백제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동명과 관련하여 『三國志』위지고구려전을 보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중대회를 동맹이라고 불렀다 하는데 『梁書』고구려전은 동명으로 전하고 있다. 동명은 동맹을 잘못 쓴 것이 아니고 동맹과 동명이 같은 뜻을 가진 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명이란 말은 국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그 자체를 뜻하면서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주제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경우에서와 같이 각 시조는 天帝(하느님)의 아들로 인식되었으니 만큼 천제가 주재하는 하늘에 지내는 제사는 시조가 주재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동명은 제사의 주재자로 통용되고 각 시조는 똑같이 동명이란 칭호를 갖게 된 듯하다. 특히 백제의 경우 같은 맥족계통이므로 그 시조 온조를 신성시하여 동명으로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설화에서 보듯이 같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두 나라의 건국 설화는 차이가 나야 한다. 그럼에도 그 내용상 줄거리가 왜 같은 것일까? 이는 부여와 고구려가 똑같이 맥족에 의해 세워진 고리국에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2)周邊情勢

B.C2세기 경의 周邊情勢의 변화

-漢四郡-

高句麗라는 명칭은 『漢書』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漢이 衛氏朝鮮을 멸망시키고 나서 설치했던 4郡중에 하나인 玄 郡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高句麗의 성립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衛氏朝鮮의 영역을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漢의 4郡이 어떻게 설치되었고, 그 속에서 原高句麗社會는 어떤 역사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가에 관해 고찰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漢의 4郡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衛氏朝鮮에 대한 연구가 만족할 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고 영역문제에도 많은 異說이 있는 실정이다. 漢의 4郡중 3郡은 武帝元封 3年(B.C108)에 설치되었고 나머지 1郡은(玄 郡) 1년 후인 元封4年(B.C107)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漢書』武帝本紀에는 元封3年에 4郡이 설치된 것으로 나타나 있고 同書 五行志에는 3郡만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같은 책에도 4郡의 設置에 관한 기사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이 漢4郡문제를 연구하는데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때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고조선의 멸망은 동방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이전에도 중국쪽의 세력이 동방으로 밀려온 적이 있었다. 첫째는 기원전 3세기 초 燕나라의 동방침입이었다. 秦開라는 장군을 앞세워 무려 2천여리나 되는 고조선의 땅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侵入으로 고조선의 영토가 많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조선의 붕괴는 아니었다. 두번째는 秦·漢교체기에 衛滿을 비롯한 사람들이 대거 동쪽으로 밀려온 일이다. 그러나 古朝鮮의 멸망으로 이어진 본격적인 무력침략은 이전의 것과 달랐다. 古朝鮮을 멸망시킨 한나라는 고조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하여 4개의 군을 두려고 계획한다. 樂浪, 玄 , 眞番, 臨屯 등 소위 한사군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사군중 진번, 임둔은 기원전 82년에 없어졌는데 설치 여부도 의심스러워 이제는 그것이 계획만 있고 실제로는 없었던 군현으로 보고 있다. 현도군도 기원전 107년에 세워졌다가 기원전 75년에 본래의 지역에서 물러나와 요하일대로 후퇴하였고 고조선이 아닌 중국인을 다스리는 행정기관으로 여겨진다. 다만 낙랑군은 오늘날 평양일대에 세워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데 큰 지역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지역사회에 영향을 준 것도 아니었다. 낙랑군의 경우에는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에 의해 다시 세워져 동방무역의 전진기지가 되었는데 중국의 일반적인 지방 통치 기관처럼 어떤 영역을 통치하기 보다 무역과 外交關係에 역점을 두고 있는 行政機關이었다. 낙랑군의 등장은 그 규모야 어쨌든 간에 中國세력이 동방사회에 영향을 미침으로서 저들의 문물이 빠르게 전파되었고 얼마간 문명의 충격을 준 것 같다. 한나라는 古朝鮮을 멸망 시켰지만 처음부터 이 지역을 다스릴만한 역량이 없었다. 무제를 끝으로 팽창정책도 중지가 되었고 중국내부지역에 대한 統制權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한 것도 이유겠지만 당시 동방은 그들에게 너무나 먼 지역이었다. 동방사회가 힘의 중심지가 없어짐으로써 약화되는 것, 그것이 한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한 목적이자 성과였다. 그것은 뒷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목표와도 같았다. 고조선의 멸망은 많은 유민을 낳았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의 반란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와 목지국의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유민들도 신라를 비롯한 남쪽의 여러 나라로 흩어져 내려와 남쪽사회에 다양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古朝鮮 멸망이 가져다준 충격은 동방사회의 중심국가가 사라진 것이다. 동방사회에서 힘의 공백은 한동안 작은 小國들이 난립하는 상황을 낳는다. 소국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우리 역사의 기원을 찾으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동방사회의 역사적 전통에서는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夫餘-

고조선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세워지기까지 동방을 이끈 나라는 부여였다. 하지만 부여는 동방의 중심위치에 있지 않았다. 비옥한 농경지대에 기반을 둔 농경국가가 아니라 그보다 북쪽에 위치한 반농반목국가였다. 다라서 동방의 여러 국가들을 통제하고 문명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여는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있었다. 남만주를 가로지르는 吉林合達領북쪽에서부터 북류 송화강을 따라서 동쪽으로는 張廣才領, 서쪽으로는 요하에서 대안을 잇는 선을 따라 만주일대에서 가장 평평하고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부여는 高句麗의 선조가 된 나라로 『三國史記』에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서기 1세기 초반까지는 高句麗를 능가하는 강력한 국가였다. 부여국을 건국한 동명왕은 기원전후 시기 만주와 韓半島 北部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영웅으로 불려 지고 있었다. 또 발해에 이르기까지 부여란 이름이 지속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볼 때 동방사회에서 부여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는 한나라의 침입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최소한 600년에서 700년 정도의 역사를 유지하였다. 부여는 고조선 멸망이후 고구려 대무신왕과의 전쟁 이전까지 만주일대에서 최강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방사회에서 교역의 중개, 주변세력의 통제와 같은 중심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부여가 고조선과 같이 동방사회의 중심국가가 되려 했다면 문명의 중심지가 될 지역, 즉 보다 생산성이 높은 요동과 평안도 지역으로 남하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개마국-

개마국은 기원26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이에 대하여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서는

 

"(대무신왕9년)겨울 10월에 왕이 …개마국을 쳐서 …그 지역을 군, 현으로 만들었다."

 

고 전하고 있다. 이 개마국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 지명으로는 한의 현도군에 속한 현인 서개마현과 고구려의 큰산인 개마대산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다같이 '개마'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러한 지명들과 연관시켜서 개마국의 위치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개마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後漢書』東沃沮傳에서는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 동옥저가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동옥저의 서쪽에 개마대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종래에 일부 학자들이 동옥저를 함경도의 해안지대에 있었다고 정하였다. 그것은 함경도 동해안 일대에 서쪽에서 가장 큰산을 개마대산으로 보았고 그러한 산으로는 백두산 이외에 다른 산은 들 수 없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정다산은 선행한 개마대산-백두산설을 긍정하였다. 그는 개마의 개(蓋)는 그 첫소리가 해(奚)와 같고 우리나라 음으로 '희다(白)'를 해(奚)라고 이르며 마(馬)를 마니(摩尼)라고 이르는데 머리(頭)를 역시 마니(摩尼)라고 하므로 개마라는 것은 해마니이며 해마니(奚摩尼)는 白頭라고 해석하였다. 개마대산을 오늘의 백두산으로 인정한다면 개마대산에서 그 명칭이 나왔다고 보여지는 개마국의 위치는 개마대산 즉, 백두산을 끼고있는 오늘의 양강도와 그 이북지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옥저-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태조대왕 4년)가을 7월에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 읍으로 만들고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남으로는 살수에까지 국경을 확장하였다."

 

고구려는 기원56년(태조대왕4년)에 동옥저를 병합함으로써 동해지역까지 확장하였으며 이 해에 그 남변은 살수까지 이르렀다. 동옥저의 위치에 대하여 『後漢書』동옥저 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동으로는 큰 바다에 면하여 있으며 북으로는 읍루, 부여와 접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예맥과 접하였다. 그 땅은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다." 高句麗의 개마대산은 우에서 말한바와 같이 백두산이며 그 이동에서 바다에 면하면서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은 지역은 오늘날의 함경북도에 걸지는 해안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백모봉, 후치령, 희사봉 등 높은 산들로 연결된 부전령산맥과 이 이북에 연달려있는 함경산맥을 등지고 바다로 향한 지역이므로 『後漢書』에서 전하는 동옥저의 위치에 부합된다. 동옥저와 예맥은 대체로 오늘의 함경남도 영흥만계선에서 서로 접경하였던 것 같다. 동옥저는 북으로 읍루, 부여와 접하였다고 하였는데 같은 『後漢書』읍루전에서는 읍루가 "南으로는 북옥저와 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북옥저와 동옥저가 고구려 초기에 서로 다른 세력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동옥저전에서 "北으로 읍루, 부여와 접하였다는 기록은 동옥저의 북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북옥저까지를 포괄하는 지역의 북변을 가리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동옥저의 북변은 북옥저와 동옥저의 사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계선은 명백히 그을 수 없으나 아무튼 동옥저는 오늘의 함경남도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위치하였음은 거의 명백한 사실이다. 고구려는 기원56년 이 동옥저를 병합함으로써 그 동변이 바다에까지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동옥저를 정복한 해에 고구려의 남변은 살수에까지 미치었다. 살수는 여러곳으로 보이나 기원 56년경의 고구려의 남단 살수는 오늘의 청천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인정한다.

 

-北沃沮-

『三國史記』고구려본기 동명왕 10년조에는 고구려가 북옥저를 치고 성, 읍으로 만들었다고 씌어있다. 『三國志』읍루전에는 "읍루는 부여 동북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면하여 남으로는 북옥저와 접한다."고 전하였다. 이에 의하면 북옥저는 읍루의 남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後漢書』동옥저전에서는 "북옥저는 남으로 읍루와 접해있다."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은 서로 모순된다. 『三國志』읍루전에서는 읍루의 북쪽끝이 어디에 미치었는가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만일 북옥저가 남으로 읍루와 접하였다면 읍루의 북쪽은 북옥저일 것이며 따라서 읍루전에서 그렇게 막연히 기록할 리 없다. 따라서 북옥저는 남으로 읍루와 접하였다고 한 『後漢書』의 기록은 부정확하며 읍루 남쪽에 북옥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三國志』옥저전에서는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라고 하는데 남옥저에서 800여리 상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치구루는 매구루라고도 부르는 성인데 북옥저가 고구려에 병합된 후 고구려의 동북변경의 유명한 요새로 알려진 북옥저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남옥저는 북옥저의 남쪽에 있는 東沃沮의 별칭이고 따로 南沃沮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북옥저와 남옥저 사이에 800여리 된다는 것은 두 옥저간의 중심지간의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오늘 동옥저의 중심지를 명확히 알 수가 없으나 영흥만 이북의 해안지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에서 북쪽으로 800여리를 계산하면 북옥저의 중심이 함경북도 북쪽 해안지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북옥저의 중심지인 치구루는 함경북도 동북쪽제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북옥저 지역은 연해주일대까지 포괄하였으리라고 인정된다.

 

 이상에서 양맥과 개마, 동옥저, 북옥저 등 소국들의 위치를 추정해보았다. 그 밖의 소국의 위치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위에서 고찰한 소국들의 지역만을 보아도 고구려의 영역이 동족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태자하 상류(양맥), 동북쪽으로는 연해주일대(북옥저), 남쪽으로는 청천강(살수)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이러한 넓은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다수의 주민과 방대한 물적 재부를 동원하여 한나라의 침략세력을 반대하는 투쟁을 성과적으로 벌일 수 있게 되었다.

 

 

Ⅲ.高句麗의 建國

 

 高句麗의 建國傳說에 반영된 建國科程과 建國年代에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대로 인정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에 의해서 단시일 안에 졸본땅에 세워졌다고는 어려운 점이 많다.

 

1)建國科程

 고구려를 세운 맥족이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살펴보았는데 이들은 언제, 어디서 이동했던 것일까. 고구려의 건국자가 북부여의 왕자 출신이라는 기록과 관련지어 그 시기를 보면 북부여(맥국)가 하나의 自主國家로서 존재했다가 멸망하여 맥족의 집단적인 종족이동이 있었던 기원전 3세기 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들 맥족 집단은 어디로 이동했을까. 다음 자료는 간략하기는 하나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단서가 될 듯하다. 중국 후한 시대의 학자 應 는 『史記』「조선열전」에 대한 주석에서 "현도군은 본래 진반국이었다"고 썼으며 『漢書』지리지 현도군 고구려현에 대한 주석에서는 "고구려현은 옛 고구려 오랑캐(胡)이다."라는 말을 응소는 인용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도군이 예전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살았던 거주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로서 보면 후한시대 현도군 지역은 고구려족의 거주지이며 본래 고조선의 진반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진반국은 어느 곳에 자리잡고 있었을까. 먼저 『史記』조선전을 보면 기원전 3세기초에 고조선을 침략한 연나라가 점령한 진반땅에 그들의 관리를 두고 現地人을 다스렸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한 이 기록에 따르면 진반국은 古朝鮮의 서쪽변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관련내용을 더듬어보면 연나라 사람 위만은 국경선 패수를 건너 조선 땅에 들어와 전에 연나라가 침략하여 관리를 두고 지배했다가 그 후 진나라때 빈터로 되었던 고조선의 서쪽변경에 살면서 진반·조선 사람들을 다스리고 이들의 힘을 이용하여 古朝鮮의 준왕조를 뒤집어엎는 정변을 일으켰다고 한다.

 眞番國은 제2현도군, 즉 오늘날 혼하 상류지방에 있었다. 그렇다면 고조선시대 진반국은 혼하 상류에서 古朝鮮의 西邊, 즉 대능하유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고구려족의 송양국과 관련을 지어 본다면 高句麗族은 혼강(동가강)상류에서 진반국의 드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따라서 맥국은 이 지역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맥국이 멸망하자 그 유민이 맥국과 남쪽으로 인접한 고조선의 진반땅으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위의 관련자료로도 알 수 있듯이 고조선의 여러 후국가운데서 그 이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진반국이다. 侯國이란 北韓의 고대사 연구에서 정해진 것으로서 "그 지배자가 고조선 왕에게 신하로 종속되어 있으나 일정한 독자성을 가진 하나의 政治 單位이며 고조선의 일개 지방 小國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고조선의 후국체제를 말하지 않고 있다.

 『史記』등 중국의 관련문헌은 진반국이 고조선의 전 지역을 통해 볼 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게 표현하고 있다.

 먼저 정치면에서 보면 위만은 진반 사람의 도움을 받아 고조선의 준왕조를 뒤집어엎고 정권을 빼앗았다. 지반 사람이 위만의 고조선 왕권 탈취에 가담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북한의 고대사가는 진반사람이 고조선의 낡은 노예소유자 귀족계급의 통치를 반대하고 있었다는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아 이는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위만이 진반사람의 힘을 빌어 준왕조를 넘어뜨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진반국이 고조선의 侯國가운데 정치적으로 앞서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史記』화식전과 『漢書』식화지를 보면 한나라 상인들이 진반지역에 자주 드나들면서 장사를 하여 이득을 많이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 지방의 경제발전이 다른 지역보다 앞서 있었음을 말해준다.  

 진반지역에 살고 있던 맥족[고구려족]이 자의건 타의건 위만에 도움을 주었어야 또한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언젠가 새로운 세력을 이룰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진반국의 핵심 세력을 이룬 고구려 족은 고조선이 기원전 108년에 망하고 새로 나타난 한나라의 침략세력을 몰아내는 투쟁에 앞장을 섰다.

 고조선의 진반국 어느 지역엔가 설치된 한나라의 진반군은 25년 만에 망했으나 『後漢書』예전에는 한나라 昭帝 始元 5년 (기원전 82) 임둔·진반군을 폐지하고 낙랑·현도군에 합쳐졌다고 적혀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알다시피 고구려족[맥족]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설치한 4군 중에 진반·임둔 2군을 기원전 82년에 쫓아낸 데 이어 기원전 75년경에는 현도군을 서북쪽으로 몰아냄으로써 혼하 상류동쪽에서 압록강 중류지방에 이르는 땅을 차지했다.

이는 高句麗族이 기원전 1세기경부터 강력한 政治的 組織을 가지고 급격하게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진반군을 몰아낸 후에는 더욱 강대해졌다. 이는 한나라의 또 다른 침략세력의 거점인 현도군을 내쫓고 그 땅을 되찾은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렇듯 高句麗族이 한나라의 침략 세력과 맞서 싸운 것이 분명한데도 중국의 고대 역사문헌은 高句麗族의 철저한 투쟁의식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이는 『三國志』위지동이전에 "한나라가 고조선을 치고 그 땅을 4개의 군으로 만들었는데……현도군은 후에 이맥[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갔다."고 기록이나 『後漢書』沃沮傳이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으면서도 현도군이나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겨갔다고 적고있는 데서도 나타난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에 의해 쫓겨간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쫓겨난 기원전 75년경에 고구려가 이미 하나의 국가 형태로서 태동하고 있음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다. 한나라의 침략세력에 맞서 이길 수 있을 정도라면 적어도 국가체제의 조직을 갖춘 존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적 조직이 없다고 해도 전혀 반침략투쟁을 벌일 수는 있다하겠으나 이럴 경우 실패만 보기 일쑤이다. 아무튼 고구려는 현도군을 몰아냄으로서 그 영토와 주민을 되찾을 수 있었고 이는 국가라는 가장 강력한 추진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2)세워진 年代

 이미 보았듯이 『三國史記』에 실린 고구려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한나라 효원제 건소2년(기원전 37년)으로 되어있다. 이 연대가 설화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하여 건국연대를 내려잡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일찍이 일제 식민사가들은 그 역사성을 부정하고 건국연대를 설화에서 보다 100여년 심지어 수백년까지 내려잡았다. 남한의 사가들까지 이를 맹종하거나 의견을 같이 하는 경우가 있으니 한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신화나 설화 가운데는 반드시 역사성, 다시 말해 주인공인 실존인물이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설화에서 나오는 주몽이 실존인물임이 분명하다 하여 그 건국연대를 움직일 수 없는 절대연대로 단정짓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 밝혀져 있는 기원전 37년이라는 연대에도 의심이 가는 이유는 같은 해에 이미 고구려족의 소국인 송양국이 있었다는 기록이 같은 『三國史記』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찾아내야 할 역사적 사실이 또 있다면 주몽의 남하는 개별적 이동이 아니라 고구려족의 집단적 이동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집단적 이동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 졌다. 그렇다면 건국설화에서 전하는 기원전 37년의 건국연대는 고구려 사람들이 전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廣開土王陵碑文』을 보면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으로 내려와 건국한 연대를 정확히 꼬집어 말하지 않고 단지 옛날이라고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이 자국의 건국연대를 건소2년으로 믿고 있었다면 『廣開土王陵碑文』도 그 연대를 밝혔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三國史記』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0)조를 보면 문무왕이 고구려사람 안승에게 준 책명문에 고구려가 800년동안 유지되어 오다가 망했다는 기사를 보게 된다. 고구려가 망한 668년에서 8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132년이 되는데 이는 고조선이 망하기 이전이다.

 또한 『唐書』고려전을 보면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 900년설'을 만나게 된다. 당나라 때의 시어사인 賈言忠은 당 태종에게 이런 말을 보고하고 있다. 즉 고구려는 900년이 되기 전에 80살 먹은 대장이 나타나 멸망하게 될텐데 고씨가 한나라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이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는 80살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가 된 것은 『高麗秘記』였다. 『高麗秘記』는 일종의 참위서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高句麗의 건국연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겠으나 당나라 사람들조차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건소 2년보다 올려 잡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건소 2년으로 잡은 김부식의 설은 완전히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고구려사람 高慈의 묘지명을 보면 고구려가 708년 동안 유지되었다고 하는 기사가 눈에 띄게 된다.

이 묘지명에 따르면 고자의 조상은 주몽의 건국 대열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그 자손들이 대대로 공후재상이 되었다. 건국연대의 경우 고구려가 망한 668년에서 708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40년이 되는데 『三國史記』에 나오는 기원전 37년과는 3년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 금석문 자료를 절대적으로 믿어도 좋은 것일까. 이 묘지명은 고구려가 망한 지 32년이 지난 700년에 당나라 땅인 洛州 合宮縣 平樂鄕에서 만들어진데다가 묘지명을 쓴 사람의 이름조차도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체로 미루어보아 당나라 사람이 지은 듯 하다. 묘지명에 고자의 행적을 보면 그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땅으로 들어가 여러 장군직을 거쳐 '유성군 개국공'이란 작위에다 400호의 식읍을 받았으며 696년 거란침공전쟁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33살 나이로 사망하자 측천무후는 그를 애도하여 左金吾衛大將軍 幽州都督이란 벼슬을 추서하였다.

고자의 묘지명을 쓴 사람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묘지명에서 고구려를 구려라고 쓴 것을 보아 당나라 사람이 틀림없다.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려라고 부르거나 쓰지를 않았다. 구려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는 중국의 역사책은 『後漢書』인데 여기서는 고구려전과 구려전을 따로 두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사람들은 일찍이 고구려를 구려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고구려가 망한 지 32년이 지난 후 당나라 사람들이 쓴 묘지명에 적힌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추산한 것이 정확하겠는가에 관한 것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조차 건국연대가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구려 왕실도 이를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당나라에서 성장한 고자가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언충이 『고려비기』를 들추어 고구려가 900년이나 나라를 유지해 왔다고 태종에게 말한 것 등을 미루어 보아 고구려의 멸망시까지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의 정확한 건국연대를 모르고 있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三國史記』의 고구려 건국설화에 나온 건국연대와 고자의 묘지명에 기록된 건국연대가 거의 일치하는 것은 왜일까. 이는 같은 자료를 인용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구려 멸망 후에 신라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연대를 당나라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이야기를 돌려 『後漢書』고구려전을 보면 소노부가 원래 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 등 5부의 왕노릇을 해오다가 계루부가 소노부를 대신하여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 자료는 우선 계루부가 왕권을 차지하기 전에 소노부가 왕권을 쥐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계루부가 왕권을 쥐기 전에 이미 소노부가 왕권을 장악한 고구려족 전체의 통합국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다.

『後漢書』보다 먼저 편찬된 『三國志』고구려전은 같은 사실을 놀고 달리 말하고 있다. 즉,  

 

고구려에는 … 본래 5족이 있어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차 미약하여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 하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연노부는 소노부를 잘못 쓴 것이 분명하여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위 『三國志』기사는『後漢書』의 기사와 다른 점을 보여준다. 즉 『後漢書』에서는 "후에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로 되어있다는 것이며 『三國志』에서는 "지금은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둘 다 문제 될 것이 없는 듯하나 그렇지 않다. 과거 일제사가들이 『三國志』의 "지금은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고 있다."라는 기사에 매력을 느낀 까닭은 무엇일까. 이들은 『三國志』의 '지금'이란 시간을 『三國志』고구려전을 쓴 陳壽가 살았던 3세기로 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 왕실이 속한 계루부가 왕권을 잡은 것은 『三國志』의 기사대로 3세기가 되고 따라서 주몽이 시조로 되어있는 고구려는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三國志』의 기사를 즐긴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지금'이란 시간이 3세기가 틀림이 없다면 주몽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 왕실의 시초는 3세기로 잡아야 할 것이나 시간적 개념은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後漢書』는 1세기에서 3세기 초에 걸친 후한의 역사를 위주로 다룬 것이므로 고구려전의 기사는 1∼3세기 초와 그 이전의 고구려 역사를 다루었고 따라서 3세기 이후의 역사까지 다루었다고 볼 수 없다. 결국 '지금'을 뜻하는 3세기는 계루부가 왕권을 쥐게 된 그 처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계속 왕권을 쥐고 있는 상태를 말 한 것이다. 그러므로 『三國志』고구려전의 기사만을 앞세워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3세기로 잡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한편 『後漢書』와 『三國志』의 고구려전이 말하고 있듯이 계루부가 소노부를 대신하여 왕권을 잡았다는 것은 어떤 정치적 상황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어떤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3세기의 정치적 변혁의 흔적을 찾아 『三國史記』고구려본기와 『광개토왕릉비문』을 면밀히 검토해보았지만 주몽을 시조로 하는 고구려의 건국이후 고구려 왕실에서 변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계루부가 소노부를 대신하여 왕권을 잡았다는 것은 주몽이 송양국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왕권을 빼앗은 사건말고는 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면 주몽은 언제 고구려의 왕권을 잡았을까. 『삼국사기』에 적힌 고구려의 건국시기보다 앞선 시기, 즉 기원전 시기에 고구려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기사가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後漢書』고구려전을 보면 전한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나서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도군에 속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고구려가 현도군의 하나의 현이 되었다는 것은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잃고 전한의 영토가 되었음을 뜻한다. 고구려족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던 고조선의 진반국을 생활 터전으로 삼고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현도군은 처음에 설치될 때 당시 압록강 유역에 위치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족이 거주한 넓은 땅이 압록강 유역에 설치된 현도군의 한 개 현으로 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후한서』고구려전이 전하는 기사가 맞다고 하면 여기에 걸맞는 의견이 나올 수 있다. 즉 무제에 의해 설치된 고구려현의 고구려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망할 당시의 고구려가 아니고 후한 당시 고구려 지역을 말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 그것이다. 풀어 말하면 후한시대의 고구려 지역이 무제에 의해 설치된 현도군의 한 개 현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고구려 현의 고구려는 무엇을 말하는가. 흔히 고대중국 사람들은 행정구역을 바꿀 때 옛 지명을 새로운 행정구역 이름으로 사용하였는데 마찬가지로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지방으로 옮긴 기원전75년경에 그 전의 현 이름이었던 고구려라는 명칭을 그대로 쓴 사실이 있다. 이런 근거에서 무제가 현도군을 설치할 당시 고구려가 분명히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를 세운 맥족이 한 걸음 앞서 맥국을 유지해온 사실을 부정할 만한 확증을 제시할 수 없다면 고구려의 건국시기는 기원전 37년 이전으로 올려 잡는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초기에 『留記』라는 역사책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내용은 밝혀져 있지 않다. 고구려의 건국 시기를 기원전 37년 이전으로 잡는다면 이 역사책은 주몽의 고구려가 나오기 이전에 있었던 고구려의 역사, 즉 소노부의 귀족집단에 의해 세워진 고구려 역사를 엮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처음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소노부 집단에 의해 존재하였고 기원전 37년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전왕조의 역사를 다음 왕조에서 엮는 것이 역사편찬의 기본 정신임을 생각해 보더라도 주몽의 고구려가 국초에 소노부 중심의 고구려 역사를 엮은 것은 당연하다.

 결국 고구려의 건국은 두시기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즉 이전의 고구려는 기원전 108년 이전 소노부 귀족집단에 의해 세워졌으며 이루의 고구려는 계루부 출신의 주몽이 소노부왕권을 차지하여 왕권을 교체한 다음의 고씨 신왕조인 것이다.

 

3)高句麗의 5部問題

 고구려의 5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고구려 역사의 특성을 파악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건국 기원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종전에 고구려의 5부를 5개의 혈연집단으로 해석함으로써 건국초기의 고구려를 아직 원시사회를 벗어나지 못한 부족들의 연합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부당한 것으로 보이며 5부는 정치적, 지역적 단위였다고 보면서 이제 그 근거를 들어보기로 한다.

 『三國志』와 『後漢書』고구려전들에는 고구려의 5부를 5개의 혈연적인 부족인 것처럼 해석할 수 있게 씌어 있다.

 

"高句麗는 본래 다섯 개의 족이 있는데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가 있다."(『三國志』위지고구려전)

"高句麗는 … 무릇 다섯 개의 족이 있다. …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가 있다."(『後漢書』고구려전)

 

종전에 고구려의 5부에 대해 말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자료들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5부를 5부족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문장 해석에서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족의 기원이 유구하고 계급사회에로 이행한 지도 수백년을 경과한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구려건국 이후의 5부를 5개의 부족으로 해석하고 고구려 국가를 5개 부족국가로 볼 수 는 없을 것이다.

 5부를 5개의 혈연적인 부족으로 볼 수 없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5부의 명칭 자체의 해석을 가지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연나부', '관나부', '조나부', '주나부', '비류나부', '제나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에서 5부가운데서 계루부만은 '나(那)'자를 쓰지 않았고 중국사서들에서는 '노'자를 쓰지 않았다. 『三國史記』에서 5부의 명칭 가운데 글자를 '나'자로 쓰고 중국문헌들에서 그것을 '노'자로 쓴 것은 이 두 개 글자의 음이 비슷함으로 해서 대용한 글자들이며 그것은 본래 고구려말로 '나' 또는 '노'와 비슷한 음을 가진 말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나'자의 용례를 살펴보고 그것이 무슨 뜻으로 씌어져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5부의 명칭이 어떤 뜻을 가지는가를 추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나'자를 지역적 단위의 정치세력으로 쓴 용례를 찾아보자.

①『三國史記』고구려본기 대무신왕 5년7월 조에 의하면 부여왕의 사촌아우가 1만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해 왔는데 고구려에서는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안치시켰다고 써있다. 이것은 부여왕의 사촌아우가 연나부지방의 왕으로 봉을 받았으며 연나부지방의 원래의 주민과 새로 들어간 부여사람 1만여명이 '왕'으로 봉을 받은 부여왕족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실을 놓고 볼 때 '연나부'의 '나'자는 결코 혈연적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지역적 단위 또는 지역적 정치단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②『三國史記』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3월조에는 비류부의 부장이었던 구도, 일구, 번구 등 세사람이 쫓겨나고 남부의 사자벼슬을 하는 추발소라는 사람이 비류부장으로 되었다고 씌어있다. 남부의 사자벼슬을 하는 우발소가 비류나부 출신이 아닌 것은 명백한 것이다. 따라서 비류나부를 혈연적인 부족이라고 볼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③'나'자를 나라와 같은 개념으로 쓴 것도 있다. 태조왕은 주나와 조나를 통합하고 그 왕과 왕자를 포로로 하였다는 기사가 고구려본기 태조왕 20년 22년조에 각각 보인다. 이것을 보면 주나, 조나 등은 왕이 지배한 소국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자는 혈연적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한 나라를 의미함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둘째로 '나'자를 사람이름 위에 쓴 경우를 들어보자.

①'나'자만 씌어 진 것

  관나태우 미유, 환나태우 어지류, 비류나조의 양신, 연나조의 명림답부

②'나'자 밑에 '부'자가 첨가 된 것

  관나부패자 단가, 환나부패자 선유 등

③'나'자도 '부'자도 쓰지 않은 실례

  비류패자 음우

위와 같은 경우 '나'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명백치 않으나 앞에 든 용례를 미루어 보아서 그것을 소왕국으로 해석해도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관나우태 미유'를 관나국의 우태인 미유, 혹은 관나국 출신의 미유 등으로 해석해도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나' 혹은 '나부'를 혈연집단이라고 해석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게 될 바와 같이 '우태'나 '조의' 등은 고구려의 관직명인 것만큼 관직명 위에 붙은 '관나', '환나', '연나' 등을 혈연적 부족 집단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역시 소왕국이나 지역적 정치단위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셋째로 '나'자를 지명으로 쓴 용례를 살펴보자.

고구려의 지명에 흔히 씌어진 글자로서 那자와 壤자가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을 대신해서 쓴 글자로서 川, 買자가 씌어진 경우가 흔히 있다. 예컨대 알려진 바와 같이 松壤國은 消那國과 통하여 중천왕을 中壤으로 불렀다는 『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해당기사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那', '奴', '壤', '川', '買' 등은 모두 '나' 혹은 '내'음을 내는 통용글자로서 고구려 지명에 흔히 보인다.

「廣開土王陵碑文」에 '豆奴城', '買奴城', '邑奴城'등이 보인다. 그리고 『三國史記』지리지에는 '今勿奴' '仍伐奴' 骨衣奴' 등이 보이고 金壤 등 壤자가 붙은 지명도 적지 않다.

이상과 같은 용례들을 간단히 살펴본 바에 의하면 那, 奴자는 지명에 쓰는 글자들이며 그 어떤 지역을 가리킨 명사임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5부의 명칭에 那자와 奴자를 쓴 것으로 보아 그 5부를 5개의 혈연적 부족으로가 아니라 지역적 단위이며 정치적 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근거를 가지게 된다.

 高句麗에는 이미 紀元前 37년 이전에 적지 않은 소왕국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족 가운데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는 5개부가 고구려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왕권은 소노부의 정치세력이 쥐고 있었던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족의 소국들은 이미 고조선 시기 고조선의 진반국영역에서 형성되었고 그 가운데서 5부의 정치세력은 벌써 고조선 말기에 고구려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이 망한 후 한나라 침략세력을 내몰아야 할 역사적 요구는 그 통합과정을 빠르게 촉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5부의 정치집단들은 각각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을 다투게 되었으며 그 결과 기원전 37년경에는 계루부 세력이 소노부의 왕권을 탈취하고 왕실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몽의 건국설화는 계루부가 왕권을 탈취한 사실을 신비화하여 만든 것이며 주몽이 결코 고구려왕조의 건립자는 아니었다. 주몽이후 고구려 왕실에서는 주몽이전의 고구려 왕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구려 건국전설을 꾸며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Ⅳ.結     論

 

 지금까지 미약하게나마 高句麗의 起源과 建國 說話, 建國科程 그리고 5부의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20세기에 日本이 아무리 中國을 능가할 힘을 발휘하고 있다하더라도 동아시아의 역사는 분명 중국중심의 역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리 고구려 문명이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은 역시 중국문명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적인 시각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각 시대마다 중국문명이 동아시아의 중심에 있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의 거의 대부분의 종족들은 황하유역의 농경지대를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을 벌였으며 그것은 原住民이라 할 수 있는 화하족-한족과 다른 여러 종족과의 싸움으로 나타났다. 특히 북방과 동북방지역의 종족들이 주로 한족을 이기고 이 지역을 차지한 사례가 많았다. 그런데 북위·요·금·원·청 등 숱한 이민족이 만리장성을 넘어 들어가 한족을 지배하며 한 시대를 호령했지만 결국 그들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정착농경민의 문화에 유목민족들이 당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달랐다. 고구려는 동방에서 중원지역과 비교할만한 농경지대를 확보하고서 농경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고서 동방지역에서 최고의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동방지역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문명을 형성함 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중원지역과 별개의 또 하나의 농경문명을 형성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중원지역과 별개의 문명을 형성하였던 동방지역의 문명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고구려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찾았기 때문에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4세기 말부터 6세기 말까지 고대 신석기 시대로부터 존재했던 4대 동아시아문화권 지대에 4대강국의 하나로 고구려가 자리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대에 고구려는 안정적인 정치를 기반으로 가장 수준 높은 문명을 형성하고 발전시켰다.

 하지만 남북조시대의 한족들은 과거 한나라 시대의 통일된 중국문명과 그 시대의 천하관 부흥을 꿈꾸었다. 결국 중국지역을 統一하면서 등장한 수나라는 과거 시대의 부흥을 바라는 한족의 열망을 담아 고구려와 文明戰爭을 일으켰다. 70년 이상의 전쟁 끝에 당 문명과 이를 도운 신라의 협공, 내부 분란 등의 이유로 高句麗는 滅亡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4세기부터 형성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종말이었다. 아울러 중국문명은 고구려 문명과 전쟁에서 현실적인 수모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자신들의 문화적 우위와 자존적인 명분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역사책을 집중적으로 저술함으로써 중국문명은 역사서의 승리를 얻게 된다.  그것은 한나라 시대에 형성된 한족중심의 중국문명이 남북조시대의 위축에서 벗어나 새롭게 더 큰 세계문명으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반면 고구려 멸망으로 야기된 국제질서의 변호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다시는 동방문명이 문명적으로 中國文明에게 대항할 수 없는 열악한 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 요동과 한반도북서부지역의 농업적 생산기반이 붕괴된 이후 동방에서 일어난 어떤 나라도 동방지역에서 독자적인 문명권을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더 큰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지역으로 진출해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결국 자기 종족의 정체성마저 상실하게 했다. 오로지 고구려의 직계혈통을 지하는 한국인만이 韓半島에 남아서 자기 종족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했지만 고구려가 가졌던 문명권형성에는 실패하였다. 고려시대 윤관의 9성실패, 묘청의 난 실패, 위화도 회군 등으로 만주지역을 차지하여 동방의 독자문명권을 형성할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중국문명의 위성문명으로 그 위상이 떨어지고 말았다.

 高句麗의 滅亡은 결국 中國文明이 동아시아사에서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며 동방지역의 자생적 문명권의 실질적인 終焉이 된 셈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중국문명의 독주를 가져와 동아시아의 競爭的 發展을 저해하게 된 원인이었다. 결국 고구려의 멸망은 韓國史의 불행인 동시에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생명의 힘을 와해시키는 동아시아사의 불행이었다. 

 

◇참 고  문 헌◇

 

-圖書-

서병국, 『高句麗帝國史』, 혜안출판사, 1997

노태돈, 『高句麗史 硏究』, 사계절, 1999

김용만, 『高句麗의 發見』, 바다출판사, 1999

이옥, 『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 교보문고, 1984

이기동 외,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1988

이지린, 강숙자, 『高句麗 歷史』, 논장, 1988

 

-論文-

지병목, 「高句麗 成立科程에 대한 考察」

홍정우, 「高句麗 建國始祖 追慕王에 대한 一考」漢陽大 碩士 論文, 1989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의 기원

고구려 건국설화인 朱蒙說話는1)
백제나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복잡할 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전 주몽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廣開土王陵碑〉의 서두 부분이고,〈牟頭婁墓誌〉와《魏書》고구려전의 주몽설화도 5세기경의 기록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나《三國遺事》 , 〈東明王篇〉 등 국내문헌은 5세기경의 기록에 후대적 윤색이 가해진 것을 전하고 있다.2)


주몽설화는 부여의 東明說話에 바탕을 두고,3) 4세기 후반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건국설화로 확립되었다.4) 그리하여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한 주몽설화의 경우, 주몽의 出自를 비롯하여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전승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 줄거리는 대체로 비슷하다.5) 이들은 대체로 “天帝와 水神(河伯)의 혈통을 이어받은 朱蒙이 하늘신과 地母神으로부터 부여받은 神的 權能을 가지고 여러 곤경을 극복하고, 卒本地域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구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고구려왕들의 통치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주몽의 신적 권능 또는 주몽집단의 독자적 힘으로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 건국설화 서두 부분의 주몽설화는 매우 주목된다.

㉠ 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에 도착한 鄒牟(朱蒙)는 後嗣가 없던 졸본부여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시조
온조왕 즉위년조 서두 축약).6)

㉡ 백제 시조 沸流王의 아버지 優台는 북부여왕 解扶婁의 庶孫이고 어머니 召西奴는 졸본인의 딸이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은 뒤 과부로 지냈다. 扶餘에서 남하한 주몽이 건국한 뒤 소서노를 妃로 맞아들여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비류와 온조를 아들처럼 대하다가, 부여에서 孺留가 내려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위와 같음).

위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방면에서 남하하기 이전부터 졸본지역에는 卒本扶餘나 召西奴集團 등 선주토착집단이 있었고, 주몽은 이들과 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고 한다.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일찍부터 토착세력의 성장, 이주민집단의 유입, 토착세력과 이주민집단의 결합이라는 정치적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주몽의 신적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건국된 것이다.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하는 주몽설화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시조의 신적 권능으로 신비화하였지만,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주체는 주몽집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압록강 중류일대 각지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선주토착집단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중류일대 토착집단의 성장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지역은 서북으로 요동지역, 동으로 동해안으로 통하는 동서 교통로상의 중간지점이다. 그리고 서남으로 황해, 남쪽으로
대동강 , 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 북쪽으로 松花江유역의 대평원지대나 遼河 상류방면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고구려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이 지역은 흔히 “큰 산과 깊은 골짜기는 많고 넓은 들은 없어” 고구려인들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다”고 하지만,7) 압록강과 그 지류 禿魯江 , 慈城江 , 渾江 유역에는 충적지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특히 國內城이 있는 通溝地域이나 五女山城이 위치한 桓仁縣 소재지는 상당히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기후는 만주일대에서 가장 온난하며 강수량도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한다.8)

이러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청동기시대 이래 이 지역 주민들은 강 연안의 충적대지를 배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가축기르기 , 사냥 , 물고기잡이 등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9) 신석기시대 유적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나10) 청동기시대 주민과 동일 계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바닥이 편평한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돌도끼나 돌괭이 등의 농공구, 그물추, 돌활촉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생활양식은 청동기시대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두께가 얇은 돌괭이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신석기시대에도 농업의 비중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토기와 석기 제작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혼강 지류인 大葦沙河 연안의 二道崴子유적처럼11) 한곳에서 대량으로 토기와 석기를 제작하게 된다. 다양한 용도의 석기를 대량 생산함으로써 농업이 발전하였고 주민집단 상호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지역 청동기문화는 遼東~淸川江의 古朝鮮文化나 송화강유역의 西團山文化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시대적 지역적 특성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토기의 모양새에 있어 양 지역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꼭지 달린 바리모양 단지는 서단산자형 토기의 그것과 비슷하며,12) 고조선지역의 美松里型 土器가
중강군 토성리와 通化市 王八悖子에서 발견되었다.13)
이 지역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고조선 주민이나 부여를 이룬 송화강유역의 주민과 활발히 교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4 , 3세기경 중국 戰國 , 秦 , 漢 교체기에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전국 燕과 대립하다가 기원전 3세기초 연의 공격을 받고 요동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14) 이에 따라 전기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세형동검문화로 변화하였고, 철기문화가 요동과 한반도 서북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유이민 파동이 요동과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밀려왔다.15)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이러한 정세변화는 압록강 중류일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丹東地區와 桓仁 , 集安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 세형동검 과도기 형식의 銅劍이나16) 철제농공구와 무기류를 공반하는 明刀錢유적을17)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 주민집단은 이러한 정세변화와 유이민 파동의 영향 아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독특한 묘제인 積石墓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적석묘의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는 압록강 중 , 상류와 대동강 , 청천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초기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18) 적석묘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매우 다양하지만,19) 단동지구와 집안 , 환인의 청동단검묘와 연결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20) 그 중 集安 五道嶺溝門의 청동단검묘는 계단적석묘로 보고된 이래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21) 일반적으로 적석묘에서는 청동제 장식품과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철제 농기구 , 무기 ,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었고,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에서는 전국 , 진 , 한 시기의 화폐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석묘는 대체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 과도기의 청동단검묘에서 기원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전국말~진한초(기원전 3세기 중엽~기원전 2세기초)로 추정된다.22)

또한 독로강과 압록강 연안에는 적석묘 축조집단과 관련된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독로강변의 노남리유적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기철기시대층에서 冶鐵址와 온돌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었고 도끼 , 손칼 , 활촉 , 낚시 등의 철기와 함께 明刀錢 , 五銖錢이 출토되었다. 압록강변의 토성리에서도 신석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집자리가 발견되었다.23)

이처럼 이 지역 주민집단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적석묘를 축조하면서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문헌상 늦어도 기원전 2세기 후반경에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24)


종래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관련하여 濊 , 貊 , 穢貊 등의 명칭을 주목하여 왔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정설이 없는 형편이고, 특히 고구려의 종족기원에 대해서는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모두 제시되었다.25)
그러므로 현재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고 대체적인 상황만 파악할 수 있다.

예 , 맥 , 예맥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고구려를 ‘貊’이라 표현한 것은 기원 이후의 중국사서에 집중되어 있다.《漢書》王莽傳에서 ‘高句驪侯 騶’의 집단을 ‘貊’ 혹은 ‘穢貊’이라 칭한 이래,《三國志》 , 《後漢書》등에서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퇴축을 ‘夷貊의 공격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여26) 句驪와 貊을 관련시키고 있다.《三國志》에는 “大水 유역에 나라를 세운 句麗는 大水貊, 서안평으로 흘러드는 小水에 사는 句麗別種은 小水貊”이라 하여27) 고구려를 명확하게 貊族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북방의 돌궐인도 고구려를 ‘매크리(Mokli)’ 곧 貊句麗라고 불렀다.28) 이처럼 기원 이후에 저술된 대다수 중국문헌이나 북방 유목민은 고구려를 貊族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貊’은 원래 중국북방에 거주하던 종족에 대한 명칭이었다. 이에 비해 발해만 동부지역은 先秦 시기에 대체로 ‘夷穢之鄕’ 곧 穢族의
거주지역으로 인식되었다.29) 예족 가운데 朝鮮이 가장 일찍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30) 그 뒤 夫餘 , 眞番 , 臨屯 등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史記》에서는 조선을 둘러싼 주변 정치세력과 주민집단을 통칭할 때 ‘穢貊’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31) 원래 중국의 북방종족에 대한 명칭이던 貊이《史記》 이후로 ‘예’라는 명칭과 결합하여 중국 동북방에 거주하던 예족 일반에 대한 표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32)

따라서
고고학 및 문헌자료상 중국 북방의 맥족과 압록강 중류지역의 주민집단을 직접 연결시킬 수 없는 한, 고구려가 처음부터 예족 혹은 예맥족으로 불린 주민집단과 종족적으로 구분되는 ‘맥족’이었다고 볼 수 없다. 고구려를 이룬 주민집단은 원래 예족 혹은 예맥족의 일원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2세기초경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주변 예맥사회와 구별되는 주민집단을 형성하였고, 기원전 2세기 후반경부터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 주민집단은 처음에는 ‘句驪’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이것이 高句麗라는 국가명으로 고정되면서,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貊’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렸던 것이다.

고구려를 형성한 주민집단이 예맥족에서 분화하였다는 것은 3세기경 고구려의 언어와 법속이 부여 , 옥저 , 동예와 비슷하였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33) 그러므로 이 주민집단의 사회상태는 원래 예맥족의 일원인 동예나 옥저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3세기경 동예와 옥저는 각 邑落 長帥가 개별적으로 邑落民을 통제하였고, 동예는 生口 , 牛 , 馬 등의 부가 축적되었으나 ‘山川이 각 읍락별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를 받았다. 이는
생산력 발달이 상대적으로 낮고, 고조선 이래 한군현과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 원래의 사회상태가 존속된 결과이다. 고구려를 형성한 주민집단 역시 처음에는 이와 비슷하거나 읍락별 공동체적 규제가 더 강한 상태에서 사회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余昊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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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 건국설화를 東明說話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朱蒙과 東明은 별개의 인물이고 고구려 건국설화와 부여 건국설화는 성립배경이 다르므로 이 글에서는 양자를 ‘朱蒙說話’와 ‘東明說話’로 구분한다. 1) 고구려 건국설화를 東明說話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朱蒙과 東明은 별개의 인물이고 고구려 건국설화와 부여 건국설화는 성립배경이 다르므로 이 글에서는 양자를 ‘朱蒙說話’와 ‘東明說話’로 구분한다.
   李弘稙,〈高句麗의 興起〉(《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84~99쪽.


2) 특히《三國史記》高句麗本紀 및〈東明王篇〉의 주몽설화에 나오는 북부여의 解慕漱說話와
동부여의 金蛙說話는 5세기 이후에 첨가되었다고 이해된다(島田好,〈東夫餘の位置と高句麗の開國傳說〉,《靑丘學叢》16, 1934, 91~94쪽).

3)《梁書》고구려전과《隋書》백제전 등은 동명설화와 주몽설화를 혼동하였다. 또 양자를 모두 고구려 건국설화로 보는 설, 동명설화는 주몽설화의 誤傳이라는 견해도 있다(리준영,〈고구려의 국가기원에 대하여〉,《력사과학》1964-4 및 李丙燾,〈夫餘考〉,《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4)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Ⅹ, 全南大, 1981). 4) 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Ⅹ, 全南大, 1981).
   徐永大,《한국고대 神觀念의 社會的 의미》(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213~214쪽.


5) 5세기의 기록은 (북)부여출자설이며, 국내문헌은 동부여출자설이다. 5) 5세기의 기록은 (북)부여출자설이며, 국내문헌은 동부여출자설이다.
   盧泰敦,〈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起源〉(《韓國古代史論叢》5,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3), 38~43쪽.


6)《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즉위년조 割註에도 나옴.

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8) 吉林省文物志編委會,《集安縣文物志》(長春;1983), 1~4쪽.


9) 리병선,〈압록강 중 , 상류 및
송화강 유역 청동기시대 주민의 경제생활〉(《고고민속》1966-1), 8~15쪽.

10) 陳大爲,〈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1960-1). 10) 陳大爲,〈桓仁縣考古調査發掘簡報〉(《考古》1960-1).
   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吉林通化市江口村和東江村考古發掘簡報〉(《考古》1960-7).    吉林省文物管理委員會,〈吉林通化市江口村和東江村考古發掘簡報〉(《考古》1960-7).
   陳相偉,〈吉林集安渾江中游的三處新石器時代遺址〉(《考古》1965-1).    陳相偉,〈吉林集安渾江中游的三處新石器時代遺址〉(《考古》1965-1).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 集安縣文物管理所,〈吉林集安大朱仙溝新石器時代遺址〉    (《考古》1977-6).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 集安縣文物管理所,〈吉林集安大朱仙溝新石器時代遺址〉    (《考古》1977-6).
   정찬영,《압록강 , 독로강유역 고구려 유적발굴보고》(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3).

11) 吉林省文物志編委會, 앞의 책, 32~37쪽.


12) 리병선,〈압록강류역의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들과 그 분포정형〉(《고고민속》1963-1), 25~36쪽.


13) 宋鎬晸,〈遼東地域 靑銅器文化와 美松里型土器에 관한 考察〉(《韓國史論》24, 서울大 國史學科, 1991), 43~46쪽.


14) 盧泰敦,〈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관한 연구〉(《韓國史論》23, 1990), 31~54쪽.


15)《史記》권 115, 列傳 55, 朝鮮.


16) 桓仁 大甸子 동검은
명도전 및 쇠칼과 함께 석곽묘에서 출토되었고, 丹東地區의 동검은 돌무지 중의 석관묘에서 발견되었다. 集安 五道嶺溝門의 동검은 계단적석묘에서 다량의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16) 桓仁 大甸子 동검은 명도전 및 쇠칼과 함께 석곽묘에서 출토되었고, 丹東地區의 동검은 돌무지 중의 석관묘에서 발견되었다. 集安 五道嶺溝門의 동검은 계단적석묘에서 다량의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다고 한다.
  曾昭藏 , 齊俊,〈桓仁大甸子發現靑銅短劍墓〉(《遼寧文物》1981-1).   曾昭藏 , 齊俊,〈桓仁大甸子發現靑銅短劍墓〉(《遼寧文物》1981-1).
  許玉林 , 王連春,〈丹東地區出土的靑銅短劍〉(《考古》1984-8).   許玉林 , 王連春,〈丹東地區出土的靑銅短劍〉(《考古》1984-8).
  集安縣文物保管所,〈集安發現靑銅短劍墓〉(《考古》1981-5).


17) 池炳穆,〈高句麗 成立過程考〉(《白山學報》34, 1987), 57~60쪽. 17) 池炳穆,〈高句麗 成立過程考〉(《白山學報》34, 1987), 57~60쪽.
  손량구,〈료동지방과 서북조선에서 드러난 명도전에 대하여〉(《고고민속론문집》    12, 1990).   손량구,〈료동지방과 서북조선에서 드러난 명도전에 대하여〉(《고고민속론문집》    12, 1990).
  田村晃一,〈樂浪郡設置前夜の考古學〉(《東アジア世界史の展開》, 汲古書院, 1994).


18) 余昊奎,〈高句麗 초기 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韓國史論》27, 서울大 國史    學科, 1992), 31~34쪽의 도표와 지도. 18) 余昊奎,〈高句麗 초기 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韓國史論》27, 서울大 國史    學科, 1992), 31~34쪽의 도표와 지도.
  田中俊明 , 東潮,〈積石塚の成立と發展〉(《高句麗の歷史と遺跡》, 東京;中央公論    社, 1995).

19) 정찬영,〈기원 4세기까지의 고구려묘제에 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5, 1973), 47~54쪽.

20) 박진욱,〈초기 좁은놋단검문화의 내용과 발전과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87-1), 6~9쪽. 20) 박진욱,〈초기 좁은놋단검문화의 내용과 발전과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87-1), 6~9쪽. 田村晃一,〈高句麗の積石墓〉(《東北アジアの考古學》, 六興出版, 1990), 151~155쪽.


21) 북한에서는 이 무덤을 근거로 고구려에 선행한 노예제국가인 구려국이 기원전 5~3세기경에 존재하였다고 상정하기도 한다(손영종,《고구려사 Ⅰ》,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90, 13~20쪽). 한편 이 무덤은 내부구조가 명확하지 않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고, 계단적석묘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魏存誠,〈高句麗積石墓的類型和演變〉,《考古學報》1987-3, 328쪽).


22) 적석묘에 대한 대표적 견해는 林永珍,〈高句麗 考古學〉(《國史館論叢》33, 國史編纂委員會, 1992), 110~115쪽에 소개되어 있으며, 적석묘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22) 적석묘에 대한 대표적 견해는 林永珍,〈高句麗 考古學〉(《國史館論叢》33, 國史編纂委員會, 1992), 110~115쪽에 소개되어 있으며, 적석묘에 관한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주영헌,〈고구려 적석무덤에 관한 연구〉(《
문화유산》1962-2).   주영헌,〈고구려 적석무덤에 관한 연구〉(《문화유산》1962-2).
  정찬영, 앞의 글(1973).   정찬영, 앞의 글(1973).
  李殿福,〈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1980-2).   李殿福,〈集安高句麗墓硏究〉(《考古學報》1980-2).
  魏存誠, 위의 글.   魏存誠, 위의 글.
  田村晃一,〈高句麗積石塚の構造と分類について〉(《考古學雜誌》62-2, 1982).


23) 정찬영, 앞의 책(1983).


24) 이 책 제2장 1절 참조.


25) 盧泰敦,〈高句麗史 硏究의 現況과 課題〉(《東方學志》52, 1986), 195~196쪽.


2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26)《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東沃沮.
   《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東沃沮.


27)《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高句麗.


28) 盧泰敦,〈高句麗 , 渤海人과 內陸아시아 주민과의 교섭에 관한 일고찰〉(《大東文化硏究》23, 1989), 239~243쪽.


29)《呂氏春秋》恃君覽篇.


30)《管子》권 23, 輕重甲篇 및 揆度篇.


31)《史記》권 110, 列傳 50, 匈奴.


32) 三品彰英,〈濊貊族小考〉(《朝鮮學報》4, 1953). 32) 三品彰英,〈濊貊族小考〉(《朝鮮學報》4, 1953).
  황철산,〈예맥족에 대하여〉(《고고민속》1963-1 , 2).


3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 濊 , 東沃沮. 33)《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夫餘 , 濊 , 東沃沮.

 

 

 

제 1대 

동명성제 본기


1.주몽의 출생과 성장


삼국사를 다룬 대표적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름은 주몽(또는 추모。중해라고도 함)이며 해모수와 유화가 그의 부모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를 북부여의 시조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딸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 해모수에게는 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주몽과 부루는 이복형제라고 해석하고 있다.이는 유화가 해모수의 두 번째 아내가 되며,주몽은 그의 서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해모수와 유화의 만남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거의 동일한데,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백의 맏딸인 유화가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천제의 아들(곧 천자이므로 왕)이라고 자칭하는 해모수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온다.그리고 그는 유화를 압록강(요하) 가에 있는 어떤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떠나버린다.그 후 유화는 임신을 하게 되고,이 때문에 해모수와 관계한 사실이 탄로난다.이에 유화의 부모는 그녀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것을 질책하며 그녀를 우발수에 귀양 보내버린다. 유화를 임신케 한 해모수는 이 무렵 이미 늙은 몸이었다.그에게는 해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금와라는 손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더구나 그의 손자인 금와 역시 장성하여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해모수가 유화를 취한 일은 유화가 북부여왕 해모수의 눈에 들어 수청을 강요당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가능케 한다. 어쨌든 아이를 밴 몸으로 집에서 쫓겨난 유화는 해모수를 찾기 위해 부여 왕궁으로 향했을 것이고,그 과정에서 금와를 만나게 된다. 당시 금와는 동부여의 왕이었다.그는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유화는 그에게 할머니뻘 되었다.따라서 금와는 유화를 왕궁으로 데려와 보살피게  된다(유화가 금와의 할머니뻘 된다는 사실은 동명성제 14년인 서기전 24년에 유화가 죽자,금와가 태후의 예에 준하여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동부여의 왕궁에 거처하게 된 유화는 얼마 뒤에 아이를 낳게 되는데,그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때가 서기전 58년이다. 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쏘기에 능했는데,'주몽'이라는 이름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한다. 주몽이 활을 잘 쏘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금와의 아들들에겐 위협적인 일이었다.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특히 왕위계승권자인 대소는 위협적인 인물인 주몽을 몹시 싫어하였고,그 때문에 누차에 걸쳐 금와에게 주몽을 없애버릴 것을 간언한다.하지만 금와는 대서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주몽을 마구간에서 일하게 하여 되도록 대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였다.하지만 주몽이 자람에 따라 대소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다.비록 서자라고는 하지만 국조인 해모수의 아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대소에겐 크나큰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주몽의 모친 유화는 아들을 도피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여기서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해를 당하기 십상이니 차라리  멀리 떠나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유화의 이 같은 당부를 받아들인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졸본 땅으로 건너간다('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제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 참조).
 주몽이 태어난 연대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서기전 58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서기전 48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서기전 37년의 나이를 고려해볼 때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설득력이 있다.'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나라를 세운 시기가 22세 때이고,'삼국유사'에 따르면 12세 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12세의 어린 소년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2.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과 고구려의 개국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망명한 졸본부여는 일명 '구려국'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구려국은 흔히 '고리'。'구리'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으며,부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려는 부여,한 등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말기에 형성된 국가로 볼 수 있다. 구려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의 통화와 집안,자성강。장자강,요하 유역 일대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등 일부 사서를 바탕으로 구려가 요동 지역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비정하는 학자들도 있고, 또 당시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이 같은 곳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 구려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구려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주몽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의 탈출 사실을 알게 된 대소는 병졸을 보내 추격전을 벌였으나 주몽을 잡지는 못했다. 사서에서는 주몽이 추격당하던 중에 엄호수라는 큰 강을 만나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이는 그를 신비로운 인물로 만들기 위한 극적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대소의 군사들을 따돌린 주몽은 모둔곡이라는 계곡에서 3명의 동지를 만난다. 모둔곡에서 주몽이 만난 3명의 동지는 재사,무골,묵거 등이었다. 재사는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무골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묵거는 수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종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 등의 성을 내리게 된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서는 주몽이 이때 만난 세 친구를 신하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으며,졸본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또한 그들은 비류수 가에 포막을 짓고 살며 세력을 넓힌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단지 홀홀단신으로 이국 땅에 와서 세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전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삼국사기'의 편자들은 참고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그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만난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고,그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백제 본기' 온조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3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 보냈다.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백제 본기'에서는 이 같은 내용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그리고 이 내용은 주몽이 3명의 동지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즉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갔고, 졸본부여왕에게 자신이 해모수의 아들이자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의 이복동생임을 밝혀 졸본부여의 부마가 되었던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서는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간 것이 아니라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 본기'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참고적인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해부루는 북부여왕이 아니라 동부여왕이었다).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둘째는 온조였다.그들의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서한 건소 2년(서기전 37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한 후 도읍을 정하고,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소서노에게 장가 들어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대했고,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 그러나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또는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이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로 돌아갔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데없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그래서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로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몽에게 시집 온 졸본 여자가 이미 2명의 아이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몽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졸본 여자 소서노의 경제력에 바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이 이야기대로라면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부마가 된 것이 아니라 졸본 지방 유력자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했으며, 그녀의 가문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 된다. 이 이야기는 연노부 중심의 고구려가 계루부 중심으로 바뀐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 등 다섯 종족으로 이뤄져 있었으며,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을 배출했으나 차츰 힘이 미약해져 나중에는 계루부에서 왕이 나왔다고 씌어 있다. 이 기록과 소서노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즉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이 계루부의 족장 연타취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계루부의 세력 확장에 기여하고 마침내 연노부를 누르고 왕이 됨으로써 계루부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노부를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의 국호는 '구려'였는데,계루부를 일으킨 주몽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위대한','숭고한' 등의 뜻을 가진 고를 덧붙여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부족연맹체 성격이 강했던 구려는 중앙집권적 국가인 고구려로 재탄생했던 것이다.따라서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처음으로 개국된 나라가 아니라 적어도 고조선 말기부터 구려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오다가 주몽에 의해서 좀더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몽은 이렇게 고구려를 건국한 다음에 자신의 해씨 성을 버리고 고구려에서 고자를 따서 고씨 성을 취하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해서는 '서기전 37년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권22 -고구려 본기-끝에 실린 사론에는 "고구려는 진나라,한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데,이는 고구려가 진나라 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 또 보장왕 27년 2월 기사에는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는 기록도 있다.이 같은 두 기록에 따라 '고구려 900년설'이 대두하여 개국연대를 서기전 277년 또는 217년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다. 이 같은 견해에 바탕하여 일각에서는 김부식이 고구려의 역사를 고의로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즉 신라 호족 출신인 김부식이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고구려의 개국연대를 신라보다 뒤에 두었으며,그러기 위해서 동명성제 이후 다섯 또는 여섯 황제에 대한 기사를 삭제했다는 것이다.하지만 이 같은 주장을 증명할 뚜렷한 증거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비약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이 기록들은 고구려의 역사에 '구려'의 역사를 합친 것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즉 고구려는 구려의 역사 위에서 재탄생한 국가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를 구려의 개국 시점부터 계산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권13 유리명왕 31년 기록에 서한의 왕망이 고구려를 낮춰 부르며 '하구려',즉 '비천한 구려'라고 칭한 바 있는데,이를 보아도 고구려의 역사는 구려를 빼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즉 고구려는 '위대한 구려'라는 뜻으로 이해되고,당연히 고구려의 역사에 구려의 역사를 포함시켰을 것이다.고구려 900년설은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했을 때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은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쓰고 있는데,이는 고려에 대한 영어식 표기인 Korea의 어원이다.흔히 Korea라는 말이 왕건이 세운 고려에서 연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왕건이 세운 고려조차도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 그 명칭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코리아'가 왕건이 세운 고려에 어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의 영어식 국명인 Korea의 역사를 1천 년 이상 앞당기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 될 것이다).

             
3.동명성제의 영토확장전쟁과 고구려의 성장
  (서기전 58년~서기전 19년,재위기간:서기전 37년~서기전 19년,약 18년)
 동명성제가 왕위에 오르면서 구려는 국호를 고구려로 개칭하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정책을 실시한다. 동명성제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이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또한 고구려가 개국된 서기전 37년에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을 고구려에 복속시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비류국왕인 송양을 찾아가 담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동명성제가 비류국을 찾아가 송양과 담판을 벌이는 장면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향해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구석에 외따로 살았기 때문에 한번도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소.그러나 과인은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러자 왕이 대답했다.
 "나는 모처에 도읍을 정한 천제의 아들이오."
 이에 송양이 다시 말했다.
 "우리 가문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이 지낼 수 없소. 그대가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하겠소?"
 송양의 이 말에 왕이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활쏘기로 기예를 겨루기로 하였다. 하지만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단지 동명성제 혼자 비류국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했을 것이다.또한 활쏘기 경쟁을 했다는 것은 비류와 고구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이는 송양이 이듬해(서기전 36년) 6월에야 항복을 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류국과 고구려의 전쟁을 동명성제와 송양의 활쏘기 경쟁으로 미화시켜놓은 것은 나중에 제2대 유리명제가 송양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송양이 항복하자 동명성제는 비류국을 '옛땅을 회복하다'라는 뜻의 고구려어인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 왕으로 봉했다. 비류국을 정복한 동명성제는 서기전 34년 7월에 마침내 졸본성을 완성하여 국가의 위상을 한층 높이고 지속적으로 영토확장전쟁을 수행한다.그래서 서기전 32년 10월에는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정복했으며,서기전 28년에는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를 치게 하여 멸망시킨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명실공히 대국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으며 동북지역의 강국으로 성장해 있던 동부여와 대등한 입장이 되었다.  이처럼 영토확장을 통해 고구려를 대국으로 성장시키고 있던 동명성제는  서기전 24년 8월 동부여에서 날아온 비보를 접하게 된다. 동부여 궁궐에 남아 있던 모친 유화 부인이 사망한 것이다. 유화 부인이 사망하자 동부여왕 금와는 할머니뻘 되는 그녀의 장례를 태후의 예로 치른 후 그 사실을 고구려에 통보하였다.이에 동명성제는 동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태후의 예로 거행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이는 동부여왕 금와가 고구려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다.하지만 금와가 죽고 그의 장자 대소가 왕위에 오르면 동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다.

  대소가 언제 왕위에 올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서기전 19년 4월에 동명성제의 첫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로 온 것을 볼 때,이 무렵에 대소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즉 금와가 죽고 동명성제에 대하여 악감정을 품고 있던 대소가 왕위를 이어받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했거나 아니면 대소의 즉위로 아내와 아들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동명성제가 사람을 시켜 그들을 고구려로 데려오도록 조처했을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어쩌면 동명성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유리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부여에서 데려왔을 가능성도 있다.유리가 고구려에 오자 동명성제는 그를 곧 태자로 삼았으며,5개월 뒤에 40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능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동명성제,즉 '동방을 밝힌 성스러운 임금'이라 하였다.졸본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능이 현재 어느 곳에 있는지도 단언할 수 없다(졸본의 위치에 관한 내용은 '첫 도읍지 졸본의 위치'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고구려의 개국조인 주몽과 나머지 임금들의 묘호에 '왕'이 아닌 '제'를 붙인다.묘호에 '왕'을 붙이는 것은 그 나라가 제후국임을 의미하고,'제'를 붙이는 것은 그 나라가 자주적인 종주국임을 의미한다.따라서 당시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이는'삼국유사'에서 '동명성제'라 표기하고 있고,제 6대 태조대에 칭제건원(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함)의 흔적이 있으며,'광개토제 능비문'에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게다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땅을 차지한 요나라의 칭제건원과 요나라를 무너뜨린 금나라의 칭제건원 역시고구려의 칭제건원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이에 따라 비의 칭호도 '황후'로 표기한다.물론 동명성제 때부터 고구려가 종주국으로 군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묘호는 후대를 기준으로 소급 적용되는 것이 관례이기에 동명성제부터 '제'로 표기하고,그의 아내들의 칭호도 황후로 표기한다. 

'삼국사기'이후 줄곧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묘호를 '왕'으로 칭했는데,이는 '삼국사기'가 갖는 한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즉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임을 밝힌 바 있지만,한편으론 송과 금의 틈바구니에 끼인 약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붙이지 못하고 '왕'을 붙였다는 것이다.만약 '삼국사기'의 고구려조 묘호에 '제'를 붙였다면 당연히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조의 묘호에도 '제'를 붙여야 했을 것이다.하지만 고려는 그럴 입장이 못 됐다.고려는 송。거란 등과 조공외교를 하고 있었고,거란을 멸망시키고 힘을 팽창시키고 있던 금과도 그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고려가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쓰고,또 고구려를 계승한 자신들의 묘호에도 '제'를 쓴다면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묘호에 '제'를 붙인다는 것은 곧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으로 칭제건원의 의미이다.고려가 칭제건원할 경우 심각한 외교적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위협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왜냐 하면 연호는 당시 동북아 사회의 외교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그 같은 외교관계의 틀 속에서 무역과 전쟁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 각국의 역사를 '고구려 본기','백제 본기','신라 본기'로 쓰고 있다.당시 역사서 서술에서 황제국의 역사는 '본기'라 하고 제후국의 역사는 '세가'라 했던 점에 비춰볼 때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비록 삼국의 묘호에 '제'를 붙이지는 못했지만 삼국의 역사서를 세가가 아닌 본기라고 칭함으로써 '삼국사기'편찬자들은 삼국이 제후국이 아닌 자주적인 종주국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삼국사기'와는 달리 조선 문종대에 완성된 '고려사'에서는 고려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로 처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확인된다. 하지만 고려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붙이지는 못하고 '왕'을 붙였을 것이고,고구려보다 약자였던 신라와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신라와 백제의 묘호에 대해서는 각국의 본기에서 별도로 언급하도록 하겠다.아울러 참고로 고려조 제10대 정종,제11대 문종 등은 '제#임금 제#'대신 '제#억제할 제#'를 사용하여 '왕'이라는 호칭을 피하고 '제'를 칭한 사실이 있음을 밝혀둔다).

         '삼국사기'는 편찬된 이후에 송나라에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고,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금나라에도 보냈을 것이다.이는 '삼국사기'가 단순히 국내 보관용이 아니라 대외 홍보용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유난히 '조공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고려는 예로부터 외교관례를 잘 지켜온 국가임을 송이나 금에 강조하여 외교상의 대의 명분을 얻고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조공 기록이 많다 하여 지금껏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몰아가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는데,이는 근본적으로 당시의 외교관습을 전혀 모른 데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임을 알아야 한다.또한 '삼국사기'를 단순히 김부식 개인이 작성했다고 보는 시각도 문제이다. '삼국사기'편찬에 있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김부식이 모든 자료를 모으고 기록한 것은 아니다.김부식 이외에도 10명의 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했으며,작업에 참여한 10명의 학자는 모두 국가의 관리들이었다.말하자면 '삼국사기'는 국가적 차원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김부식 개인의 판단에 의해 편찬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따라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김부식 개인의 사상으로 몰아가는 시각은 사라져야 한다.

4.동명성제의 가족들
                   제 1대 동명성제 가계도

   해모수
 북부여의 시조
     │
     ├────────── 제 1대 동명성제
     │                      。주몽,B.C.58년~B.C.19년
    유화                     。재위:B.C.37년~B.C.19년,약 18년
  하백의 딸                  。부인:2명
                             。자녀:3남
                                │
                                │
                                │       1남
                            황후 예씨 ───── 제 2대 유리명제
                                │
                                │     2남
                                │     양자 ┌─ 비류
                            황후 연씨 ───┤
                                            └─ 온조


 동명성제는 부여 출신 황후 예씨와 졸본 출신 황후 연씨(소서노) 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이들에게서 3명의 아들을 얻었다.예씨 소생으로는 유리명제가 있으며, 연씨 소생으로는 비류와 온조가 있다.여기에서는 이들 중 예씨와 연씨의 삶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한다(유리명제는 유리명제본기에서 언급하기로 하고,비류와 온조에 관한 내용은 '신삼국사기-백제 본기-''제 1대 온조'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황후 예씨(생몰년 미상)
 제 1황후 예씨는 부여 여자로 동명성제가 동부여에 머무를 때 시집왔다.그녀가 언제 결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 유리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혼시점이 주몽의 망명시기와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하던 시기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쯤인 서기전 38년경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주몽과 예씨의 결혼시기는 서기전 38년 또는 39년일 것이다. 주몽이 떠난 후에 그녀는 계속 동부여에 머물러 있었다.아마 이때 그녀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함께 지냈을 것이다.그리고 주몽이 떠난 지 몇 개월 후 유리를 낳아 혼자 길렀으며,서기전 19년 5월에 유리와 함께 고구려
로 와 황후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유리명제 1명뿐이며,능과 죽음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황후 연씨(서기전 66년~서기전 6년)

제 2황후 연씨는 구려국(졸본부여) 계루부 족장 연타취발의 둘째 딸로 이름은 소서노이며 서기전 66년에 태어났다.연타취발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었다.그는 동부여를 탈출하여 자신을 찾아온 주몽을 대한 후,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둘째 딸 소서노를 그에게 시집 보낸다.이때가 서기전 38년경으로 소서노의 나이 29세 때쯤의 일이다.
일설에는 그녀가 주몽에게 시집 오기 전에 우태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고 한다.그래서 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며,우태가 죽은 후에 졸본에서 혼자 살다가 동부여에서 도망온 주몽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서노의 나이가 주몽보다 여덟 살이나 많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준다.즉 소서노가 서른이 다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있다가 21세의 주몽과 결혼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대개 10대 후반이면 남녀가 결혼을 하였다.그런데 부족장의 딸인 소서노가 서른이 가깝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따라서 소서노가 시집을 갔다가 남편과 사별하여 아이들을 키우며 혼자 살다가 주몽과 재혼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설에는 주몽이 서기전 58년 태생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태어났다는 말도 있는 것을 고려할 때,소서노가 서른이 넘어서 주몽과 결혼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주몽이 여덟 살이나 위인 여자와 결혼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국 땅에서 주몽이 연타취발의 사위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겠지만 부족장인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가 주몽보다 여덟 살이나 많고 아이도 둘씩이나 딸려 있는 경우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더구나 주몽은 지략과 무술을 겸비한 유능한 젊은이였기에 소서노와 연타취발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주몽은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 정치。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던 소서노와 결혼하여 그녀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돌봤다는 뜻이다. 이를 증명하듯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함으로써 계루부의 중요 인물로 부상한다.그리고 이때 주몽은 능력을 발휘하여 계루부의 힘을 강화시킨다. 당시까지만 해도 구려의 정치는 연노부 중심으로 이뤄졌고,왕도 연노부에서 세웠다.하지만 주몽에 의해 계루부가 막강해지면서 연노부는 밀려나고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주몽은 바로 계루부가 배출한 첫 번째 왕이었던 것이다. 연씨는 주몽이 이처럼 고구려를 개국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치。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고구려 개국에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녀는주몽이 죽은 뒤에 고구려를 떠나야만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 살고 있던 주몽의 첫 부인 예씨와 원자 유류(유리)가 고구려에 오고,유류가 태자로 책봉되면서 연씨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그래서 그녀는 주몽이 죽자 자신의 족속들과 함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난다. 남쪽으로 떠난 소서노 일행은 다시 두 파로 갈라진다.비류가 한 무리를 형성하여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고,온조가 나머지 무리들과 함께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소서노는 온조 일행과 함께 위례에 머무른다.그리고 그곳에서 13년을 더 살다가 서기전 6년에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백제본기 서설에 인용된 이설(異說)에 소서노(召西奴)는 처음 우이(優怡)에게 시집가서 비류(沸流)와 온조(溫祖)를 낳았다가 우이가 죽자 졸본으로 되돌아와 과부로 지내다가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주몽과 재혼 하였다. 소서노가 첫 남편인 우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름이 '비류'였다는 것은 소서노가 집안(輯安) 비류국(沸流國)으루 출가 했음을 말한다. 드라마에서 나오듯이 연타발의 행수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첫 남편인 우이는 비류국 송양왕(松壤王)의 아들이므로 우이의 아들인 비류는 자연 송양왕의 손자 즉 오족왜인(吳族倭人) 진(眞)씨였다는 결과가 된다. 다만 백제본기 <이설>은 비류, 온조를 모두 우이의 아들이라 하고 <본문>은 두 형제를 모두 주몽의 아들이라 하여 서로 엇물렸지만, <이설>은 비류측 기록이고 <본문>은 온조측 기록이기 때문에 양측 주장을 중용적 입장에서 볼 때 비류는 첫 남편인 우이의 아들이고 온조는 두번째 남편인 주몽의 아들이었다. 이 점은 <삼국유사> 남부여전에 전하듯이 온조만이 해(解)씨였음에서 확인된다. 주몽은 그가 즉위한 BC 37년에 22세 였고 소서노는 그가 사망한 BC 6년에 61세 였으므로 이 것을 역산하면 당시 22세였던 주몽보다 무려 8살이나 많았던 30세의 과부였다. 그리고 주몽이 19년간 재위했으므로, 주몽 말년에 온조의 나이는 많아야 고작 10여세에 불과한 정도였다.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는 모두 일제시대에 조선사 편수회의 담당관이었던 이마니시(今西龍)씨가 그를 도와 고대사 변조에 역할을 담당한 고 이병도 박사에 의해 변조된 것을 다시 일본에서 역 수입된 역사이므로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복원하자면 중국측의 사료를 반드시 비교하여야 한다. (수서, 산해경,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독사방여기요, 회남자, 사기등등..) 백제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는 김성호 선생님의 주장이 학계에서 빨리 인정이 되어 우리의 고대가 하루빨리 올바로 복원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참고서적 :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김성호 1982 지문사)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1500년 상, 하(김성호 1996 맑은소리) 씨성으로 본 한일 민족의 기원(김성호 2000 푸른숲)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김성호 2002 조선일보사)

 

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13년 (서기전 6년) : 봄 2월에 왕도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섯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17년 (서기전 2년) : 여름 4월에 사당을 세우고 국모에게 제사지냈다.소서노는 공교롭게도 금와왕과 같은 해에 죽었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14년(서기전 2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
○ 19년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왕은 기뻐하여 태자를 삼았다. ○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요, 龍山(용산)에 장사하고 東明聖王(동명성왕)이라 諡號(시호)하였다.
2세 금와 - 41년간 재위
41년(갑인)에 임금이 세상을 뜨자 태자 대소가 임금이 되었다. 서기전 6년 주몽은 서기전 17년에 죽었는데 주몽보다도 오래 살았네요...이 기록에 따른다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편>
○ 大輔[대보:職名(직명)] 陜父(협부)가 왕에게 간하기를, "왕께서 새로 國都(국도)를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심치 못하니, 의당히 政法(정법)에 마음을 부지런히 쓰실 일이온대, 이는 생각지 아니하시고 사냥에만 몰두하시여 오래도록 환궁하지 아니하시니 만일 이를 고치지 아니하시면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이 散亡(산망)하여 선왕의 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듣고 진노하여 협부의 벼슬을 파하고 (대신) 官園[관원:公家(공가)의 莊園(장원)]의 사무를 보게 하였더니 협부가 분하여 南韓(남한)으로 달아났다.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즉위조
어머니(예소야)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적에 나에게 말하기를...(중략)"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 구추, 도조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始祖 溫祚王(시조 온조왕)
○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가 鄒牟(추모)니 혹은 朱蒙(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왔는데,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다.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둘째딸로 아내를 삼았다. 얼마 아니하여 졸본부여왕이 죽으니 주몽이 그 位(위)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沸流(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은 溫祚(온조)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와서 건너편 고을 越郡(월군)의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琉璃)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烏干(오간)·馬黎(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南行(남행)하였는데,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漢山(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가히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건대 이 河南(하남)의 땅은 북은 漢水(한수)를 띠고, 동은 高岳(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沃澤(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大海(대해)를 격하였으니, 그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이에) 온조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輔翼(보익)을 삼아 국호를 十濟(십제)라 하니, 이 때가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安居(안거)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慰禮(위례)를 보았는데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 돌아왔다. 올 때에 백성이 (모두)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百濟(백제)라고 고쳤다. 그 世系(세계)가 고구려와 한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扶餘(부여)로써 姓氏(성씨)를 삼았다. 혹은 이르기를, 시조는 沸流王(비류왕)으로서, 아버지는 優台(우태)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庶孫(서손)이며, 어머니는 召西奴(소서노)니 졸본인 延陀勃(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었다. 뒤에 주몽이 북부여에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서기전 37) 2월에 남으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妃(비)로 삼았다. 그(소서노)가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주몽의 총애가 특히 두터웠고,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禮氏(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孺留(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고 (드디어) 位(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가재를 기울여서 도와 邦業(방업)을 이룩해 그 근로가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자[昇天(승천)], 나라는 유류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붙어) 있어 혹과 같아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溫祚)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浿水(패수)와 帶水(대수)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한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이르기를 '東明(동명)의 후손에 仇台(구태)란 이가 있어 仁信(인신)에 돈독하였다. 처음 帶方故地(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는데 漢(한)의 요동태수 公孫度(공손도)가 딸을 맞이하여 그 아내를 삼았다. 드디어 東夷(동이)의 强國(강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 건국설에 있어) 어느 편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 원년 5월에 東明王廟(동명왕묘)를 세웠다.

○『책부원귀』에 이르기를
"백제는 매년 四仲月(4중월:2, 5, 8, 11)에 왕이 하늘과 5帝(제)의 신을 제사한다. 그 시조 仇台(구이-우태)의 묘를 나라 도성에 세우고 4계절로 제사한다"고 하였다[생각건대 『해동고기』에는 혹은 시조 동명(왕)이라 하고, 혹은 시조 優台(우이-우태)라 하였으며, 『북사』 및 『수서』에는 모두 동명(왕)의 후손으로 구이라는 이가 있어 나라를 대방에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시조를 구이라 하였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인 것은 사적이 명백한데, 기타의 것은 믿을 수 없다].

삼국사기 권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대소의 최후)
○ 5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종군하였다. 그 곳에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평지를 가리어 진영을 구축하고 무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여, 경계함이 전혀 없었다. ○ (이 때) 부여왕은 전국을 들어 나와 싸우니, 고구려군의 방심을 엄습하려 하여 말을 몰아 전진해 왔다. (그러나) 진흙 수렁에 빠져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므로, 고구려왕은 이에 怪由(괴유)를 지휘하였다. 괴유가 칼을 빼어 고함을 지르며 돌격하니, 적의 萬軍(만군)이 이리저리 밀려 쓰러지며 능히 버티지 못하는지라 괴유가 직진하여 부여왕을 잡아 머리를 베었다. 

소서노의 최후 설화
백제건국 초기에 형인 비류와 헤어져서 산 위에 나라를 세운 온조는 동쪽으로 내려가서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키우는 방법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사냥을 다녔으나 밤에는 잠자리에 들어가면은 새벽까지 일체 바깥에 몸을 나타내지를 않았다. 위례성 우물은 온조가 잠자는 움막의 바로 옆에 있었다. 밤이 되면 온조는 움막에서 나와서는 샘으로 들어가서 용이 되어 북쪽으로 뚫린 한강으로 나갔다. 위례성 우물을 중심으로 땅속으로는 한강과 금강으로 통하는 강줄기가 있었다. 북쪽에서 떠나올 때 틀림없이 자기가 나라를 세우면 그들이 침범해 올 것을 예상했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올라와서 한강가에 나와서는 북쪽하늘을 살피고는 적의 침범이 없을 것 같으면 곧장 물줄기를 타고 위례성 우물로 돌아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는 금강쪽으로 내려갔다. 온조는 매일 같이 이와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가 용이 되어 북쪽으로 남쪽으로 드나드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하루는 그날 저녁도 일찍 움막으로 들어 온 온조는 평상시대로 용이 되어 북쪽으로 올라갔다. 위례성 우물로 들어가서 물줄기를 타고 땅속으로 한참 올라가는데 평상시 깨끗한 물내음이 나면 맑은 물은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틀림없이 한강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급히 물줄기를 헤치고 올라가서는 살짝 얼굴을 내밀었을 때 건너편 강변에 많은 군사들이 말을 타고 건너편 쪽을 바라 보고 있었다. 지금 군사들이 쳐들어 오면 큰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파도를 일으키며 물살이 강하게 급류로 흐르게 하여 그들이 돌아가게 하고는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온조가 북쪽 한강변에서 용이 되어 물살을 헤치고 있을 때 때마침 그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큰 아들 비류가 고생을 하는 것을 보고 작은 아들 온조와 합작을 권하기 위해서 위례성에 왔다. 소서노가 위례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온조가 있는 움막에 안내를 받았으나 온조는 없었고 아무도 그의 거처를 몰랐다. 소서노는 즉각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서 자기 아들을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데리고 온 비류의 부하로 하여금 그들을 쳐부수게 하였다. 위례성 온조의 부하들은 비류가 이 나라를 쳐부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힘껏 싸워 온조의 어머니 소서노까지 죽이고 말았다. 새벽녘 동이 틀때 위례성 우물을 통해 우물밖으로 나온 온조는 먼저 피비린내 먼저 맡고는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와 보았다. 거기엔 많은 시체가 있었으며 시체 가운데에는 자기 어머니의 시체도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싸우게 된 동기를 듣고는 자기 때문에 어머니 소서노가 죽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는 다시는 용이 되지 않겠다고 하늘에 맹세를 했다. 그리고 부하들로 하여금 돌을 날라오게 하고 위례성 우물에 돌을 던져서 아래쪽에 있는 북쪽과 남쪽으로 통하는 물줄기를 막아버렸다 한다. 온조는 그 후 사람으로서 임금이 되어 한강변 광주땅에서 다시 위례성을 세웠다하는데 위례산의 위례성 우물은 그 후부터는 흙탕물만 고인다고 한다.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백제

백제의 건국 기원

 

1. 백제의 건국시조

현재 우리의
역사교육에서는 온조가 백제의 건국시조라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하지만 백제의 건국설화는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설화를 두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온조백제와 온조의 형 비류를 시조로 하는 비류백제설화가 그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본문에 시려 있는 백제 건국설화를 살펴보자.

백제의 시조를 온조왕인데, 그의 부친은 추모, 또는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박해를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당시 졸본부여왕에게는 딸만 셋이 있을 뿐 아들이 없어 걱정스러워하던 차에 주몽의 인물됨이 비범함을 보고 둘째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부여왕이 죽었고, 주몽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였고 둘째아들은 온조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해 월군(越君)이란 마을의 여자에게 장가를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결국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은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기 좋은 터를 살폈다. 비류가 바닷가에 터를 잡자고 주장하자 열 명의 신하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고려해보건대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가 띠를 둘렀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습니다. 이러한 천연적인 지리의 이점을 가진 곳은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터를 잡고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의 보필을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가 터를 잡은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비류가 위례성을 방문해 보니 그곳 도읍이 잘 정비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비류는 이것을 보고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다가 죽으니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뒤부터 나날이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夫餘)로 성씨를 삼았다.


2. 온조건국설화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이 부분이 온조를 중심으로 한 백제의 건국설화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요약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과 졸본부여왕의 둘째왕녀 사이에 태어난 차남이다. 온조는 아버지 주몽의 첫부인에게서 난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여 십제라는 나라를 건국했다. 그 얼마 뒤 형인 비류는 미추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으며 온조는 형을 따르던 무리까지 모아서 몸집을 부풀려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고구려 왕위계승 싸움에서의 패배이다. 온조의 아버지인 주몽 역시 정적인 북부여왕자 대소의 박해를 피해 졸본부여로 탈출했다. 주몽은 뛰어난 정치력으로 처가의 권력을 등에 업고 졸본부여의 실세가 된 다음, 장인이 죽자 아예 나라를 통째로 차지해 고구려를 건국했다. 비류와 온조는 다음 왕위는 당연히 자신들 중 한 명이 차지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북부여에서 유이라는 이복형이 나타난다. 이때부터 고구려에서는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된다. 승자의 선택은 주몽이 쥐고 있는데, 결국 첫째부인에게서 난 유리의 손을 들어준다. 백제의 건국신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주몽은 왜 유리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로라면 첫부인 예씨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약속 때문인 듯하다. 사실 주몽은 대소의 박해를 피해 야밤 도주했고, 당시 그의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탈출하면서 아내에게 "그대가 남자를 낳거든 그 아이에게 이르되 내가 유물을 칠릉석(七稜石 : 일곱 모가 난 돌) 위 소나무 밑에 감추어 두었으니 능히 이것을 찾는 자가 나의 아들이라고 전해 주오"라고 약속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뒤 과연 유리와 첫부인이 징표를 들고 타나났고, 주몽은 유리를 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약속 또는 정 때문에 후계자를 유리로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인의 나라를 받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아마도 재위기간 내내 토착세력들의 도전을 받았을 것이다. 부여라는 나라는 각기 독자적인 부족세력의 정치연합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부족장들이 모여 왕을 세운다. 처가쪽 부족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20년 동안 이들 부족들과 때로는 타협하며 때로는 회유와 강압의 수단으로 통치기반을 닦았을 것이다. 이제 그 기반을 자신의 독자세력으로 대체할 시기가 되었을 때쯤 북부여에서 유리가 왔다. 아니면 주몽이 은밀히 유리를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주몽의 입장에서 보면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원래 부족을 끌어들이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시조
동명성왕 19년(기원전 19년)조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에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더불어 도망하여 왔으므로 왕은 기뻐하여 유리를 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와 온조는 두려워하여 고구려를 떠난다. 비류와 온조는 왜 두려워했을까? 『삼국사기』「백제본기」는 비류와 온조가 "태자인 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북만주에서 한반도로의 기나긴 고난의 길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류와 온조측으로서는 유리의 태자책봉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태자 자리를 놓고 고구려 지배층은 유리세력과 비류·온조 지지세력으로 양분되어 유·무형의 충돌을 했을 것이다. 결국 치고권력자인 주몽이 유리세력 편에 가세함으로써 비류와 온조세력은 패배했고, 유리세력의 보복이 두려워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남하했을 것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는 유리가 태자로 책봉되고 나서 5개월 뒤엔 그해 9월에 주몽이 40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가 75세, 백제의 건국시조 온조가 65세로 사망한 것이 비해 주몽의 40세는 너무 짧다. 더구나 태자 자리를 놓고 양측이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벌인 상황에서 왕의 사망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후에도 왕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외부세력에게 권력을 빼앗긴 토착세력의 반발은 격렬했을 것이다. 토책세력인 비류 및 온조세력과 외부세력인 유리 및 그를 옹호하는 주몽세력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그것이 무력충돌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와중에서 주몽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또한 유리측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비류와 온조세력이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추측할 수 있다.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의 근처가 아니라 아예 머나먼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내려온다. 만일 줌오에서 유리에게로의 권력이양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면 비류와 온조의 머나먼 남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 것이고, 권력투쟁에서의 패배의 결과로 본다면 그만큼 유리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상대 나라의 왕을 서로 죽고 죽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원한은 이때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회한을 품고 고구려를 떠난 비류와 온조일행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이 있는 한강 유역에 도착한다. 일행은 한산의 부아악이라는 곳에 올라 주변 지리를 살피며 어느 곳에 정착할지를 논의한다. 형인 비류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있는 미추홀이라는 곳에 터를 잡는다. 형 비류와는 달리 온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한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미추홀에 살던 비류는 동생이 도읍한 위례성을 방문한다. 동생 온조가 세운 십제라는 국가가 번성하고 있는 모습을 본 비류는 자신의 선택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자 비류를 따랐던 백성들이 모두 미추홀을 떠나 위례성으로 모여든다. 위례성은 비류세력이 합세하자 더욱 번창하였고, 온조는 이를 기쁘게 생각하여 국호를 비로서 백제라고 고친다. 이때부터 온조는 백제의 건국시조로 역사에 등장한다.


3. 비류건국설화


비류중신의 건국설화는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본문 말미에 할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이런 말도 있다.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을 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비류이고 둘째가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그녀는 졸본으로 돌아와 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기원전 37년) 봄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고구려라 하였다. 이어 주몽은 소서노를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았다. 그가 나라를 세울 때 자못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은 그녀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했으며, 비류 등도 친자식처럼 여겼다.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난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아우인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뜨신 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들은 여기 헛되이 있으면서 몸에 붙은 혹처럼 우울해 하느니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비류는 아우 온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그곳에 살게 되었다.

『북사』와 『수서』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에 구태(仇台 : 구이로도 읽음)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하였다. 그가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우니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그 나라가 드디어 동이의 강국으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 건국실화를 간단하게 분석해 보자.

우선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고 북부여의 왕자인 우태의 자식이라고 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온조시조설에서는 백제의 역사적
정통성이 부여 → 고구려 → 백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자식이 아니라 부여왕자의 친자식이라고 할 때의 백제건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부여에서 곧바고 백제로 이어진다. 즉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사실 백제와 고구려는서로의 정통성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다. 고구려의 주몽이 동명성왕을 지칭한 것이나, 백제의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자마자 동명왕 사당을 건립하고 그곳에 참배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맥을 잇기 위해 서로 싸웠다. 이것이 건국설화에 투영되고 있는 비류시조설의 진상이다.

다음으로 이 설화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은근히 배은망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이미지는 소서노라는 여인을 통해 나타난다. 소서노는 자기 재산을 털어가면서 주몽을 도왔다. 주몽은 소서노라는 여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도 졸본부여의 권력핵심으로 진입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주몽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친자식이 아닌 비류와 온조를 친자식처럼 돌봤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주몽의 마음을 변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친자식인 유리가 북부여에서 자신을 찾아와 고구려로 오자 그를 태자로 삼고 나라를 물려줬다. 왕권을 차지한 유리와 첫째부인 예씨는 노골적으로 소서노와 비류, 온조 형제를 탄압했을 것이다. 소서노 입장에서 보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주몽은 배은망덕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는 것이다.

또한 이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일행이 남하한 경로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있다. 즉 비류일행은 패수와 대수라는 강을 건너 미추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당시 패수와 대수가 지금의 어느 강인가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패수(浿水)는 글자 그대로 조개껍질이 물가에 많이 모여 있는 강이고, 대수(帶水)는 강물이 마치 허리띠처럼 생긴 강이다. 패수란 강의 위치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무제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할 당시의 경계가 바로 패수였기 땜문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조선열전」에 보면, 한나라 육군은 패수를 건너 왕검성으로 쳐들어온다. 이때가 기원전 108년인데 50년 뒤에 신라가 건국되고 다시 20년의 시차를 두고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된다. 아직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패수란 강 이름이 엉뚱한 것으로 바뀌었을 확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패수란 강의 위치가 오늘의 어디인가에 따라 비류일행의 이동경로가 밝혀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패수는 중국 요서에 있는 대릉하라는 설부터 한반도 황해도에 있는 예성강이라는 설까지 다양하게 주장된다. 여기서는 일단 패수는 청천강, 대수를 대동강이라 추정한다. 그렇다면 비류일행은 동가강을 따라 압록강 하류를 나와서 서해안을 끼고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 해변을 따라 최종적으로는 미추홀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온조시조설이 그냥 남하했다고 하여 육로이동을 암시한 것가는 차이가 있아. 온조시조설에 따르면 온조일행은 동가강 지류를 타고 압록강에 도착하여경계를 지나 함흥을 거쳐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여 소양강 상류에 도착했고, 다시 북간강 수계를 따라 한강 유역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4. 비류·온조 건국설화 혼용의 의미


백제는 이런 두 개의 건국설화 때문에 과연 온조와 비류 중 누구를 백제의 건국시조로 볼 것이냐는 항시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백제의 건국은 아주 먼 선조시절 이야기라 우리는 어느것이 맞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두 설화를 종합하여 백제의 건국과정을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가야 건국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시조형제설화는 상징성이 강하다. 이런 설화에 나타나는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라 일정한 세력집단의 긴밀한 결합을 상징한다. 설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백제는 부여족계통으로서 고구려를 구성하고 있던 두 부족세력이 남하하여 건국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즉 고구려 건국초기 왕권을 둘러싼 일련의 권력투쟁이 있었고, 그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부족이 한반도를 남하하여 한강 유욕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백제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남하한 부족이 하나가 아니라 비류로 대표되는 미추홀세력과 온조로 대표되는 하남위례성 세력이었기 때문에 건국설화 자체도 두 가지로 전승되었다. 사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비류로 대표되는 미추홀 세력은 한반도 압록강을 거쳐 서해를 타고 한강 하류에 정착했고, 온조로 대표되는 세력은 압록강을 건너 함흥지방으로 나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추가령지구대와 철원을 거쳐
임진강 수계와 한탄강 수계를 이용하여 각각 한강 하류와 중량천 부근인 한강 중류에 도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구려에서 남하해 온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은 각기 한강 하류(미추홀)와 한강 중류(하남위례성)에 터전을 잡고 세력을 확대하다가 어느 시기에 두 세력이 합쳐져서 부족연맹체를 결성하고, 그 뒤 온조세력이 비류세력을 제압하면서 그 부족연맹체를 백제로 바꿨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고구려에서 두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한 시기도 각각 달리 본다. 그 이유는 건국설화에서 비류측이 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친형제가 아니라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라고 한다. 즉,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우태와의 사이에서 비류를 낳았고, 주몽에게 개가하여 온조를 낳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주몽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비류와 유리와 온조가 권력투쟁을 했을 것이다. 이 투쟁에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던 비류세력이 소서노의 인솔하에 먼저 남하를 했고, 이어서 최종적으로 패배한 온조세력이 고구려를 떠났을 것이다.

온조세력이 비류세력을 제압한 시기는 온조와 비류가 남하한 한참 뒤의 일로 추측된다.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세력은 초기에는 왕성한 해상무역활동으로 온조세력을 압도했다. 그러나 비옥한 한강 유역의 경제적 생산문에 힘입어 온조세력은 어느 시기에 비류세력을 제압했다. 『삼국사기』의 비류가 위례성을 방문하고 부끄러워 자살했다는 기사는 이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류세력과 온조세력은 평화적으로 통합하였을까, 아니면 무력충돌을 거쳐 통합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도 엇갈린다. 『삼국사기』온조시조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두 세력의 통합이 평화적이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해상세력인 비류와 농경세력인 온조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상호보완적이고, 두 세력이 통합하는 것이 북쪽에 있던 낙랑세력과 남쪽에 있던 마한세력의 압력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이해와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비류와 온조가 합쳤다는 것이다. 일단 백제의 주도권을 장악한 온조세력은 당연히 자신들의 건국시조로서 온조를 세웠는데, 이것은 대체로
고이왕 때의 일로 본다. 고이왕 이전까지는 해상무역으로 세력확장이 빨랐던 비류계가 백제의 지배권을 잡았고, 그 뒤 풍부한 한강 중류의 생산력으로 주변부족을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한 온조계가 백제의 지배권을 잡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의 건국시조는 온조로 정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통합에는 의문이 있다.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정복국가이다. 당연히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온 세력집단도 정복국가의 성격을 띤다. 주몽은 건국하자마자 비류국행인국 등 주변소국을 정복하여 복속시킨다. 『삼국사기』「백제본기」'시조조'에도 두 세력이 평화적으로 통합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전반의 온조시조설화에서 비류는 온조가 세운 위례성이 번창한 것을 보고, '그만 부끄럽고 후회사다가 죽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후반의 비류시조설화에서 소서노와 비류일행은 '미추홀에 도착하여 거기에 거주하였다'고만 했지 나라를 세웠다는 표현은 없다. 기록대로라면, 온조는 처음에 십제라는 국가를 세웠다. 온조보다 먼저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집단도 나라를 세웠을 것이다. 후반 비류시조설화에서는 국명이 없지만 아마도 백제였을 것이다. 건국설화는 그것이 씌어지기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원형이 윤색·가공된다. 이 설화에서 핵심은 '미추홀에 살던 비류가 어느 날 위례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죽었다'는 대목이다. 설화에서는 비류가 동생이 잘된 것을 보고 부끄러워 뉘우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설득력이 별로 없다. 죽지 않고 동생과 힘을 합해 나라를 더욱 튼튼히 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바로 비류가 위례성에서 죽었다는 표현 때문에 두 세력이 통합이 평화적이지 못했을 것이란 의구심이 든다. 비류측이 날로 번창하며 세력을 넓히고 있던 온조측을 공격했다가 몽땅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다. 비류측을 제압한 온조측은 미추홀에 남아 있던 비류의 잔여세력을 끌어들이고, 해상활동으로 주변 여러 나라에게 널리 알려진 비류의 백제란 국호로 자기 나라 이름을 고쳤을 것이다.

이상이 백제 건국시조설화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물론 『삼국사기』의 온조왕 기록 중 몇 부분은 후대에 백제가
고대국가로 성장하면서 일어난 일을 온조왕대로 소급해 기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를테면 『삼국사기』는 온조왕 시기에 마한 전체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훨씬 뒤인 근초고왕 때의 일이고, 백제를 구성하고 있던 연맹체의 주도권이 미추홀 세력에서 위례성 세력으로 넘어간 것도 고이왕 때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온조왕조는 역사적인 기록이라기보다 백제의 성립경로를 설화화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사학계에서도 『삼국사기』「백제본기」초기 기록의 신방성에 대해 의견이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설화의 해석이야 어쨌든, 백제의 뿌리는 부여와 고구려다. 백제와 고구려, 부여는 모두 동일한 시조인 동명을 숭배했다. 온조의 아버지가 동명이었다는 설화도 건국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류와 온조가 친형제라는 설화 역시 백제를 구성했던 부족연맹체의 친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두 설화 모두 비류가 온조의 형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초기 백제에서 온조집단보다는 비류집단의 세력이 우월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신라의 건국신화

이 신화가 수록된 문헌에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왕운기(帝王韻紀)》가 있는데, 《제왕운기》에는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어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삼국사기》에 실린 내용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따라 기록한 것이므로 이에 관한 주요한 문헌은 역시 《삼국유사》를 제일로 칠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따르면, 옛날 진한(辰韓) 땅에 여섯 마을이 있었는데, 어느날 고허촌(高墟村)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밑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곁에서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 보았더니, 말은 간 곳 없고 불그스럼한 알이 하나 있었다. 깨 보니 아기가 있어 소벌공이 데려가 정성껏 길렀다. 이 아기는 점점 준수하여져 나이 열세 살에 뛰어난 젊은이가 되었다. 이에 여섯 마을 촌장들이 모여 이 아이를 임금으로 삼고, 박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박(朴)이라 하였으며,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고 한다.
이 신화의 특색은, 첫째로 씨족사회가 연합하여 하나의 왕국을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둘째로 탄생지역이 산기슭이 아닌 우물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건국신화 중 석탈해왕의 신화
《삼국유사》에 따르면 용성국(龍城國)의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7년간 기도한 끝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이 불길한 조짐이라 하여 내다 버리게 하였는데, 왕비는 알을 비단으로 싸고 궤짝에 넣어 흐르는 물에 띄웠다. 표류하던 궤짝을 신라 아진포(阿珍浦:迎日)의 한 노파가 건져 보니 옥동자가 있었으므로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날로 지용(智勇)이 뛰어났는데, 성명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鵲)의 한 쪽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라고 이름지었다. 남해왕(南解王)의 사위가 되었는데, 뒤에 선왕(先王)인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곧 석씨 왕조(昔氏王朝)의 시조이다.

고구려의 건국신화

주몽의 설화는 3가지 설이 있다. ① 광개토왕 비문(碑文)과 《위서(魏書)》 <고구려전>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河伯)의 딸이었다. 방안에서 이상한 햇빛을 받은 후 알을 낳았는데, 그 알을 깨고 나온 것이 주몽이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巡狩)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奄利水)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룻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 ②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주몽은 북부여 사람으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왔는데,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는 부여왕이 주몽의 비범함을 알고 둘째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고, 뒤에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설화이다. ③ 《삼국사기》의 <고구려기(高句麗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주(東明王篇註)> 등에 의하면 주몽의 어머니가 유화(柳花)이며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점과 졸본에서 건국하였다는 내용은 ①의 기록과 같으나, 주몽의 어머니가 햇빛을 받기 전에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에게 유인되어 욕을 당하였다는 점과 유화를 방에 가둔 것이 동부여 금와왕(金蛙王)이라는 점, 그리고 주몽이 자란 곳과 죄를 지은 곳이 동부여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이 다르다.

백제의 건국신화

백제의 시조는 온조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 또는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화난을 피해 도망해 나와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졸본주의 왕에겐 왕자는 없고 다만 딸 셋만 있었다. 졸본주의 왕은 주몽을 보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서 그의 둘째딸을 시집 보내어 그를 사위로 맞았다. 그뒤, 오래지 않아 졸본주의 왕은 죽고 주몽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주몽은 그 졸본주 왕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이 비류요, 둘째 아들이 온조다. 이들 비류와 온조는 나중에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것을 우려하여 마침내 오간과 마려등 열사람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드을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부아악에 올라가 근거지가 될만한 땅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근거지를 잡으려고 했다. 열사람의 그 부하들은 비류에게 간했다.


"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그리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어 그 천연으로 이룩된 요새의 이로움으로 보아 얻기가 어려운 지세이온데 이곳에서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비류는 부하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따라온 백성들을 아우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가서 자리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서 그 열사람의 신하들을 그의 보익으로 하여 국호를 <십제>라 했다. 그것은 한나라 성제 15년(BC 18)의 일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짠 때문으로 하여 안거할 수가 없어 되돌아왔다. 돌아와, 위례에 도읍이 바야흐로 자리 잡히고 인민들이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마침내 부끄러움과 후회로 하여 죽고 말았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 백성들이 즐거워했다고 해서 그뒤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백제의 세계는 고구려와 함께 다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씨(氏)>를 <해(解)>라고 했다.


가야의 건국신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실려 있는 수로왕의 탄생부터 즉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말한다. 건국신화의 표본인 단군(檀君)신화 ·동명왕(東明王)신화 ·혁거세(爀居世)신화 등과 맥락을 같이하나 신이 준 신탁(神託)에 의한 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인간은 그것을 받아 쓴 것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3월의 재계일(齋戒日)에 구지봉(龜旨峰)에 9간(干:족장)들이 203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모였을 때, 하늘로부터 “하늘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새로 나라를 세워 다스리라 명하므로, 내가 거기로 내려가고자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합(金盒)을 받았는데, 몇 시간 뒤 그 알 속에서 나온 아기들이 6가야국의 왕이 되었으며, 그 중 가장 먼저 나와 ‘수로’라는 이름으로 불린 키가 가장 큰 인물이 김해김씨의 시조이자 금관가야의 건국자라는 줄거리이다. 이 신화는 하늘의 신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족장들이 부족을 다스리는 부족(9간) 연합사회의 통치자로서 인간사회에 내려왔다는 것과, 인간사회가 그를 환영의 극치인 ‘춤과 노래’로 스스럼없이 맞아들여 왕으로 삼은 영신(迎神)신화라는 데 특색이 있다.

건국신화의 같은점과 다른점

박혁거세와 고주몽 그리고 석탈해와 수로왕의 신화는 모두 난생설화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반면 백제의 건국신화는 고구려의 고주몽 신화의 연장선상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동일한 핏줄(형제국)이라는 관계를 갖는다. 또 혁거세와 주몽의 신화는 단순 난생설화이지만 수로왕의 설화는 신이 직접 인간세상에 내려와 신탁을 하는영신설화라는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