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 김정희가 한국의 고비문(古碑文) 7점을 옮겨 적고 이를 분석한 논문집 ’해동비고(海東碑攷)’가 발견됐다.
고문서 연구가 박철상(41)씨는 분석 결과 이 책은 ▲평백제비(平百濟碑. 660년) ▲당유인원비(唐劉仁願碑. 663년) ▲경주 문무왕비(文武王碑. 687년. 김정희의 건립연대 추정임) ▲진주 진감선사비(眞鑒禪師碑. 887년) ▲문경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 924년) ▲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 923년) ▲경주 무장사비(무<務밑에 金>藏寺碑. 800년)를 분석한 결과물로 밝혀졌다고 8일 말했다.
- ▲ 고문서 연구가 박철상씨가 발굴한 추사의 금석학 논문집 '해동비고(海東碑攷)'. ▲평백제비(平百濟碑) ▲당유인원비(唐劉仁願碑) ▲경주 문무왕비(慶州文武王碑) ▲진주 진감선사비(晉州 眞鑑禪師碑) ▲문경지증대사비(聞慶 智證大師碑) ▲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 ▲경주 무장사비(慶州 무<務밑에 力을 빼고 金>藏寺碑)의 비문과 고증이 실려있다. /연합
- 박씨는 2년 전 고서점에서 입수한 1책 필사본인 해동비고(본문 총 56쪽)가 추사 저작이라는 근거로 비문의 내용을 고증한 부분마다 ’김정희가 생각하기에’라는 뜻의 ’정희안(正喜案)’이라는 문구가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점을 들었다.
또 ’완당의 책을 베꼈다’는 뜻의 ’완당등본(阮堂謄本)’이 적혀 있어 후대의 필사자가 김정희 책을 복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필사 시기는 책의 장정 형태 등으로 보아 1850년 무렵일 것으로 박씨는 예상했다.
추사는 이 책의 ’경주 문무왕비’ 편에서 1817년 경주 어느 밭의 돌을 쌓은 둑을 파헤쳐 문무왕비의 하단을 찾았다고 밝혔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문무왕비는 상하 두 조각으로 깨져 있는데 추사가 발견했을 당시에도 윗부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비문에 신문왕 ’이십오일경진건(二十五日景辰建)’이라고 적혀있는 점을 들어 문무왕비가 682년 7월25일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했으나, 추사는 문무왕비가 설립된 일시를 687년 8월25일 혹은 그 직후인 9월쯤으로 추정했다.
비문에 ’천황대제(天皇大帝)’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당 고종(唐高宗)의 시호이므로 그가 죽은 683년 이후라야 한다는 것.
따라서 추사는 문무왕비가 고종이 사망한 683년 이후부터 신문왕 재위(692년 7월) 사이의 기간 중 경진(景辰=昞辰) 25일을 만족시키는 날짜를 추적해 687년 8-9월 무렵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추사는 또 문무왕비를 재발견할 당시 문무왕비 하단을 경주 낭산 남쪽 신문왕릉 앞 빗돌받침에 꽂았더니 딱 맞아 떨어졌다고 적었다. 추사가 주장한 이와 똑같은 근거로써 신문왕릉 인근 현재의 사천왕사에 존재하는 귀부가 실제 문무왕릉비의 일부분이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씨는 추사특별전 개최에 즈음해, 그 전시장소인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7일 ’해동비고의 출현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서울=연합뉴스)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서책 고문서연구가 박철상씨가 입수 국내 대표적 비 7개 분석 문무왕비 건립 687年으로 입증
학계 ‘682年說’ 수정될듯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입력 : 2007.01.07 23:37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금석학 연구의 내용과 수준을 총체적으로 입증하는 서책 ‘海東碑攷(해동비고)’가 발굴됐다. 지금까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해동비고’의 발굴로 학계와 전문가들은 19세기 조선 금석학과 추사 연구에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됐다며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비에 대한 고찰’이라는 뜻을 지닌 이 책은 신라 문무왕의 업적을 기록한 문무왕비,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정림사터 5층 석탑에 새긴 비문(일명 ‘平百濟碑〈평백제비〉’)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 7개의 원문을 적고 이를 분석한, 일종의 ‘논문집’이다.
이 책에서 추사는 문무왕비를 자신이 ‘재(再)발굴’했음을 상세히 기록했으며, 이 비가 세워진 시기도 서기 687년임을 꼼꼼하게 고증했다. 국내 학계는 문무왕비 건립 연대를 서기 682년으로 추정해 왔는데, 건립 시기는 수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추사의 금석학(金石學·쇠나 돌에 새긴 글귀를 연구하는 학문) 저작은 북한산과 황초령에 있는 진흥왕비 2기를 분석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만이 전부로 알려져 있었다.
- ‘해동비고’가 김정희의 저작임을 알려주는 증거들.책 앞 부분에 적힌‘阮堂謄本(완당등본·왼쪽)’은‘완당의 책을 그대로 베껴 적었다’는 뜻이다. 오른쪽‘正喜案(정희안)’은 이 책의 고증편에 자주 등장하는데, ‘김정희가 생각하기에…’라는 뜻이다/전기병기자
이 책은 고문서연구가 박철상씨(광주은행 여의도점 차장)가 2년 전 고서점에서 입수했다. 책 앞에 적힌 목차는 ▲‘평백제비’, ▲‘唐劉仁願碑(당유인원비)’, ▲‘경주 문무왕비’, ▲‘晉州 眞鑑禪師碑(진주 진감선사비)’, ▲‘聞慶 智證大師碑(문경 지증대사비)’, ▲'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 ▲‘慶州 ▲藏寺碑(경주 무장사비)’ 순서이다. 각 논문은 비문 내용을 옮겨 적은 뒤, 이를 설명하고 고증하는 순서로 기록했다.
이 서책이 추사의 저작이라는 근거는 각 ‘논문’의 고증 부문에서 ‘김정희가 생각하기에’라는 뜻의 ‘正喜案(정희안)’이라는 문구가 여러 번 적혀 있다는 점이다. 책 앞에 ‘완당의 책을 베꼈다’는 의미의 ‘阮堂謄本(완당등본)’도 적혀 있어, 후대에 추사의 책을 베낀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사자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 책의 내용을 종합하면, ‘원본’은 추사가 경주에서 문무왕비를 ‘재발굴’한 1817년 이후~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된 1840년 사이에 쓴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함께 발굴된 ‘古冊目錄(고책목록·1860년대 추정)’에 ‘해동비고’가 적혀 있기 때문에, 필사본은 1850년대쯤 추사 저작을 직접 보고 베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 박철상씨
추사는 생전 그의 책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그의 사후 ‘완당척독’(1867년)과 ‘완당집’(1868년)으로 간행됐지만, ‘해동비고’와 ‘예당…’은 두 책에 실려 있지 않았다. 박씨는 오는 27일 예술의 전당에서 ‘해동비고의 출현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발견 의의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고서 연구가 박철상씨가 8일 공개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해동비고’(海東碑攷)라는 한국 금석문 관련 논문집은 지금 보아도 경탄을 자아낼 만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현지답사는 기본이고 이를 토대로 한 실험정신, 나아가 치열한 논증방식은 현재의 학계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물론 이런 학문 자세가 새롭다고는 하기 힘들다. 예컨대 추사가 종래에는 무학대사비 정도로만 알려진 북한산 비봉비를 두 차례 현장 답사와 탁본조사, 그리고 삼국사기를 비롯한 관련 문헌과의 교차검증을 거쳐 이것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번에 발굴된 해동비고는 그의 고증학풍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런 면모는 게재 논문 7편 중에도 신라 문무왕릉비를 고증하는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글에 의하면 추사는 종래에는 그 존재가 잠깐 보고됐다가 한동안 실물이 사라진 문무왕릉비를 경주 답사를 통해 직접 발굴했다. 논문에는 당시 정황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 위치는 “지금의 경주 동북쪽 9리 낭산(朗山) 남쪽 기슭 선덕왕릉(善德王陵) 아래이며 신문왕릉(神文王陵) 앞”이라고 하는가 하면, 1817년에는 직접 “경주에 가서 고적(古跡)을 찾아다니다가 백성들이 밭가에 쌓아놓은 돌 두둑을 파헤쳐” 마침내 비를 발굴했다는 것이다.
문무왕릉비는 그의 발견 당시 이미 파편 상태였다. 이 때 찾은 비석은 하단부였다. 그 원래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추사는 그 비편을 가져다가 “옛날 귀부(碑趺)에 꽂았더니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문무왕릉 귀부는 지금도 사천왕사 터 앞에 남아있다.
나아가 추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귀부 자리 주변을 뒤져 문무왕릉비 상단 부분을 찾아냈다. 한데 이같은 추사의 증명 방식이 놀라운 것은 1980년대에 와서야 한국고대사학계는 이런 주장을 비로소 내놓았기 때문이다.
추사는 원래의 문무왕릉비는 전면이 28행에 매행 38자(없어진 상단 제외)이며, 뒷면은 22행에 매행 33자라고 주장했다. 이 중 뒷면의 경우 현재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매행 37자였다고 추정한다.
어느 쪽이 더 타당할까?
자료 발굴자인 박철상씨는 추사 쪽에 무게감을 둔다. 왜냐하면 추사는 명사(銘辭)의 압운(押韻)에 주목해 글자의 위치와 숫자를 추정했기 때문이다. 명사(銘辭)란 비문 마지막에서 해당 인물을 칭송하는 운문체 시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마다 운율이 같은 글자를 사용한다.
박씨에 의하면 뒷면 각행이 37자였다고 하면, 비석이 깨져 누락된 글자가 8자가 되며, 나아가 이런 경우에는 비문은 운이 맞지 않게 된다. 추사는 문무왕릉비가 건립된 시기에 대해서도 현재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 현재는 문무왕이 681년 7월1일에 사망했음을 근거로 681년, 혹은 그 이듬해인 682년일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추사는 비문에 ’천황대제’(天皇大帝)라는 말이 보이는 점 등을 들어 687년설을 제시한다. 나아가 추사는 비문에서 발견되는 ’초상화가 빛이 바래고 죽백(竹帛. 글을 쓴 대나무와 비단)이 훼손됐다’는 요지의 문구를 “문무왕이 죽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687년 건립설을 더욱 보강했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모두 합리적일까?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추사는 천황대제가 당 고종의 시호라고 확신했으나, 이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다. 당고종이라는 특정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일 수도 있지만, 천상(天上)을 지배하는 최고신격이라는 뜻도 있다. 지금의 일본왕을 지칭하는 천황(天皇)은 바로 천황대제를 줄인 말이다.
또한 초상화라든가 죽백이 낡았다는 문구를 근거로 문무왕릉비가 687년에 건립됐다는 근거로 삼은 것도 언뜻 동의가 힘들다. 설혹 그의 주장대로 이 때 문무왕릉비가 건립되었다고 해도, 그의 죽음에서 불과 6년이 지난 뒤인데, 이 짧은 기간에 초상화와 죽백이 낡게 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더불어 초상화나 죽백이 낡았다는 문구 자체가 문무왕릉비의 건립시기와 과연 직접 관련이 있는 주장인지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하지만 이번 해동비고 논문집은 박철상씨가 강조하듯이 금석학으로 대표되는 그의 고증학이 지금의 학자들과 견주어 도리어 높은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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