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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구려 언어는 현대 한국어의 원형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3:09

고구려 언어는 현대 한국어의 원형

 

현재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는 역사서들 속에서는, 고구려 언어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그것을 그 동시대의 한국인이 기록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아, 결국 추론할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 측의 정사들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남사」에도 같은 내용 )

“(고구려는)… 동이족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
“동이의 옛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해서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많이 같다.” )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많이 같은데, 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 데가 있다.” )


言語食飮居處衣服有似句驪.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그 언어는 고구려와 더불어 대부분 같고 때때로 약간 다르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예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서로 유사하다.” )
(“언어와 법속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 )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산다. 성곽과 의복은 다 같은데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사는데. 또한 성곽이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더불어 같고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다.” )


語言待百濟而後通焉.(「남사」에도 같은 내용)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言語服章略與高麗同.
(“(신라의)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뒤에야 (중국과) 통한다” )
(“지금에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 )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挹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 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勿吉國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 言語獨異.
勿吉國在高句麗北, 一曰靺鞨. … 言語獨異.
(“그 사람 생김새는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부여, 고구려와 더불어 같지 않다.” )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의 동북 천여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 옥저와 인접해 있는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토지는 험준한 산이 많고 사람 생김새는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각각 다르다.” )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 숙신국이다. … 언어는 유독 (고구려와) 다르다.” )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 언어가 유독 (고구려와) 다르다.” )

이상이 중국 측의 기록들이다.

위와 같은 문헌들에 나름대로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일제 침략통치 당시 한 일본의 역사학자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지배층은 몽고족(蒙古族)에 가깝고, 그들은 부여족(夫餘族)이며, 그 부여족은 지금 부리야트(Buriat)족으로서, 동몽고족에 속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최근 한국의 어느 서강대학
역사학 교수가 그 일본학자의 시각을 이어받아{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며 비하해서 한민족의 민족적 자부심을 짓밟고 열등감 속에 살게 하려던 일제 식민사학의 전통을 이토록 충실히 재현하려는 역사학자가 한국에서는 명문대의 교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고구려는 요동국으로서 제3국이며, 한민족과는 다르다는 책을 펴 내려고 한다는 것 같다.

과연 그러할까?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필자는 고구려가 한국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선, 읍루(邑婁), 숙신(肅愼), 물길(勿吉), 말갈(靺鞨)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어떤 종족일까를 생각해 보자. 중국 측 사서에서, 유일하게 언어가 다르다고 명시되어 있는 동이족이다. 논란이 있지만, 역사상으로 볼 때 가장 그 표현에 들어맞는 민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고, 즉 만주족, 퉁구스족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어와
일본어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배워 왔을 것이다. 특히 한국어는 퉁구스어(만주어)와 비슷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언젠가 만주어에 대해 나름대로 찾아 본 적이 있다. 차라리 한국어와 일본어가 같은 계통이라고 말하면 믿겠는데, 퉁구스어는 전혀 한국어와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먼저, 퉁구스어에는 주격조사가 없다. 1인칭
대명사부터 시작해서, 도저히 기초어휘상 공통성을 찾기 힘들고 문법적으로도 그다지 공통적이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퉁구스어는
몽고어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퉁구스어로도 소유격이 '이'라는 것은 한국어와 비슷한 점이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퉁구스어, 몽고어, 투르크어 등의 알타이 제어와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물론, 그래도 알타이어든 한국어든,
중국어와는 어순 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를 중국의 한족(漢族)과 같은 계통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러한 것이 중국인들이 볼 때에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동이족들한테 전문해서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들만이 언어에 있어 별종이라는 식으로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신라본기(新羅本記) 제일 첫머리에서 신라를 세우게 되는 6촌의 구성원들이 조선의 유민(遺民)들이라고 했다.

流民이 아니다.

즉,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생각된다.

김부식(金富軾)이 굳이 조선의 유민임을 기록한 저의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지하듯이, 김부식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직계 후손으로서, 철저히 신라 계승 의식 하에
삼국사기를 집필한 듯하다.

삼국사기의 첫머리에서, 민족사의 전사(前史)로서, '조선(朝鮮)'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기록이 졸렬하다면서 굳이 역사의 기록을
삼국시대부터 한다.

중화(中華)의 맥이 섞인 자들만이 살아 남는다는 철저한 당대적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이 볼 때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역사라고 한다면, 그것은 중화와 전혀 다른 독자적인 역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김부식은 굳이 신라에 대해서만 조선의 유민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정통성고조선에서 신라로 왔고 신라가 별종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민족사학자들은 민족사의 정통성이 고조선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로, 그 다음에는
남북국시대로, 그 다음에는 고려로, 그 다음에는 조선으로...하는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어원학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조예가 깊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김부식은 이두식 표기법을 전혀 이해 못했다고 평가되고 있기도 하지만,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동명성왕조(東明聖王祖)에서 '다물'이란 고구려어로 '되찾는다'는 뜻이라며 주몽이 최초로 통합한 땅을 다물도(多勿都)라고 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즉, 고구려는 그 시초부터 '잃어버린 고토(古土)를 되찾는다'는 정신을 갖고 있었음이 암시되고 있다.

필자는 '되물린다'는 말에서 어간인 '되물'을 소리나는 대로 쓴 게 '다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헌상, 지명 등을 통해 추정되는 고구려의 단어는 70개 정도가 조금 넘는다고 한다. 그 중에 수사(數辭)가 현대 일본어와 비슷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백제 언어로도 비슷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령 '3'을 '미'라고 하는 것 같은 것. 그래서, 어떤 미국 학자는 일본어가 고구려 언어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그 또한 추정일 뿐이다.

오히려,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溫祚)가 실은 한자로 百濟로 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백(百)'의 순 우리말인 '온'. 그리고, 부여인과 백제인을 중국측에서 기록한 것 중에 체격이 크다든가 키가 크다든가 하는 것이 있는데, 현대를 제외하고는{20세기 들어서 일본인들은 급격히 키가 커지고 두상에 있어서도 단두화경향이 일어나, 한국인과 큰 차이가 없게 되었다만, 여전히 한국인들이 좀 더 크다고 한다.} 대대로 체격이 작고 키가 작았던 일본인을 종족적으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고구려와 백제에 연결지음은 상당히 무리가 있을 것 같다. 19세기에 조선에 왔던 서양인들의 기록을 봐도,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키가 훨씬 크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지금도 한국인은 동양에서 가장 평균신장이 크다.{북한은 오랜 경제적 빈곤으로 주민들 전반이 왜소해지고, 청소년들의 경우 남한 청소년들에 비해 평균 10cm 이상 작다고 보기도 한다. 같은 민족이라도 어떤
사회체제와 지도자를 맞느냐에 따라,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무척 안타깝게 생각된다. 원래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보다 더 키가 컸고,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을 앞섰다고 한다.}

다만, 일본의 지배층들은 한민족 계통임을 암시하는 여러 기록들과 증거들을 통해, 예외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치마저고리를 입는 민족은 한민족(韓民族)밖에 없다고 하는데(고구려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도 치마저고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일본의 스이코여왕[推古女王]이 즉위시 입었다는 옷이 한복이었고, 또한 수저와 젓가락을 모두 쓰는 민족이 또한 한민족밖에는 없다는데(물론 중국도 일본도 모두 수저와 젓가락이 있기는 하지만 양자를 병행해서 많이 쓰는 것), 일본 지배층들(왕실 사람들을 포함)이 수저와 젓가락을 같이 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은 그 한 증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축제를 '마쯔리'라 하고, 쿄토[京都]의 기원제(祇園祭:기온마쯔리에서 가마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왔소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한국어라고 생각해 보면,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천황가의 제사에서 쓰는 축문이라든가 일본의 고대 가요집인
만엽집의 언어를 한국어라고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쉽게 풀린다는 것 같은 것도, 일본의 지배층이 어디에서 왔고, 그 지배층의 언어는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만일, 고구려의 유민들이 현재까지 고립되어 살고 있다면, 그들의 언어를 통해 그들이 속한 계통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이 중국 남서부
윈난성동남아시아에 걸쳐 살고 있는 라후(Lahu)족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記) 보장왕조(寶臧王祖)에서 보면,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 중 일부가 중국의 오지, 농우(현재의 靑海省 右)라는 곳에 강제이주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라후족(拉祜族)이 말하는 그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과 유사한 것이 많이 발견되어{우리 식 김치와 비슷한 와찌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부터, 명절이면 무지개 같은 색동옷을 입는 것이라든가, 아기가 태어나면 새끼줄로 인줄을 친다든가, 된장이 있다든가, 조상숭배의식이 강하다든가, 고구려의 벽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씨름을 한다든가, 매년마다
활쏘기 대회를 연다든가, 지게가 있다든가 하는 것들} 놀라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언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라후족의 언어가 중국어와 같은 계통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라후어는 고립언어인 중국어와 전혀 다른
교착어라고 한다. 어순 등의 문법이 중국어와는 전혀 다르고, 한국어와는 거의 동일하다고도 한다. 라후어로 1인칭 대명사는 '냐' 또는 '나', 2인칭 대명사는 '너'라고 하며, 그 복수형은 '나흐', '너흐'라고 한다고 한다. 주격조사가 있고(세계적으로 주격조사가 있는 언어는 대단히 희소하다고 하다. 한국어, 일본어, 수메르어, 인더스문명을 세운 드라비다족의 언어 등을 제외하고는), 그 주격조사는 '래'라고 한다고 한다. 소유격조사는 '베' 또는 '웨', 향진격 조사는 '로'. '나도 너도'라고 할 때는, '나터 너터'라고 하고, '내게'라고 할 때는 '나게'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외의 어휘는 대체로는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중국어가 많이 차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 같고, 성조가 있으며, 한 음절이 하나의 단어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어보다는 미얀마어와 같은 계통이라고 보기도 한다. 라후족이 고구려인들의 후예라는 주장을 먼저 한 것은 라후족 출신의 역사학자인 호례극이라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밖에 한국어와 아주 비슷하다고 알려진 언어(아주 비슷하다고 해도, 서로 통역없이 통할 정도일 리는 전혀 없다. 다만 문법적으로나 기초어휘적으로 비슷한 면이 특히 많다는 것뿐이다.)로는 길리약어가 있다.
아무르강에서 사할린에 걸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길리약족은, 그래서 옥저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다만, 길리약족은 고아시아족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바, 그 외형상 한민족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라후족 역시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시아에 걸쳐 살다 보니 혼혈이 많이 되어 그럴지는 모르지만 길리약족과는 반대의 방향에서 한민족과 외형상 차이가 어느 정도 있을지 모른다는 감이 있다.

언어의 사용자와 인종적 특성이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유태인들인데(백인부터 시작해서, 동양인, 흑인 등으로 다양하다. 주류는 백인종적인 유태인들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 한민족에게도 비슷한 일이 어느 정도는 일어났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국 딱잘라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구려 언어는 지금의 한국어와 같은 계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퉁구스어(만주어)와는 별종이라는 것이 중국의 정사들에 나와 있고, 백제와 신라와 간접적으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는 것으로 볼 때, 중국계라거나 퉁구스계라는 주장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가 인용한 중국 고대 사서들의 문헌들을 통해서 이미 고구려어가 퉁구스계와는 별종이었다는 명백하다고 생각된다! 퉁구스어는 알타이어계의 대표적 언어 중 하나다. 한국어와는 같은 계통으로 보기 곤란하다. 다만,
퉁구스족(만주족, 여진족)이 다른 몽고계 민족들과는 달리, 기나긴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온 것은 사실일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과 일본에서 고구려 언어를 퉁구스계로 집어 넣고자 하는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고구려가 한민족 집단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중국 측의 정사들의 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볼 소지가 매우 크다! 중국 측 정사들에서는 동이족의 언어와 풍습을 논하다가 읍루(말갈, 물길 ; 여진족으로 추정됨)에 대해서만 별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언어상으로 아무래도 한국어와 일본어가 비슷하지만, 일본어는 남방민족들과의 혼혈(혈연적, 문화적)이 있어서였는지, 그 언어가 모음이 단순하고{'어' 발음조차 없다. 그래서, '서울[Seoul]'을 '소우루[Sousu]'라고 발음한다}, 받침의 발달이 대단히 미약하다는 점, 그리고 문법적인 놀라운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기초어휘는 그에 비해 또 놀라울 정도로 공통된 게 적다는 점에서, 기이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코오라 루미코라는 일본 여류시인이 일본어는 언어로서의 유용성이나 도구성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 어떤 쓸쓸함 같은 것이 묻어 있는 언어인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런 면도 있을지 모른다.

고구려 유민들이 살았다는 일본의 사이타마[埼玉縣]{국내에서 활동중인 일본 출신의 텔런트 후에키 유코와 친한 일본 연예인으로 알려진 구나사키 츠요시도 이곳이 고향이라고 한다.} 혹시 고구려의 종족과 언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까? 장수태왕의 후손들이 중국
요녕성 쪽에 살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은 있다. 자신들의 족보를 비밀에 부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중국 한족인 줄 알고 있었는데, 족보를 열어 보니 조선 민족이었다면서, 지금은 장수태왕(長壽太王)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출처; 최진 著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백산출판사 編 (2003년)

내용출처 : [기타] 최진 著 '한국 고대사, 다시 쓰여져야 한다' 백산출판사 編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