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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만에 햇빛'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6:27
백제 황금사리병 '1400년만에 햇빛'
부여 왕흥사터서 발굴 … 국내最古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 유물
2007년 10월 25일 (목) 전자신문 |  1면 전진식 기자 sinmunman@cctoday.co.kr

전성기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1400여 년 전 황금사리병(사리기)이 충남 부여 왕흥사 터에서 발견됐다. 백제의 것으로는 처음이자 국내 최고인 황금사리병은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의 발굴이라는 평가다. 특히 청동외함 몸체에 새겨진 '정유년 2월 15일 백제 창왕'이란 왕흥사 창건 연대 등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창건연대 기록과 23년씩이나 차이를 보여 백제사를 다시 써야 하는 중요 자료가 될 전망이다.  ▶관련기사 2면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황금사리병 등 1400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출토유물 일체(왼쪽부터 금, 은, 동사리구)를 공개하고 있다. /부여=김대환 기자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부여 왕흥사터 목탑지 심초석 사리공에서 황금사리병을 봉안하고 있는 은제사리병 및 청동사리함과 다양한 종류의 백제 공예품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황금사리병은 목탑지 심초석 끝부분 가로 12㎝, 세로 16㎝, 높이 16㎝의 사리공 내부의 청동 사리함 및 은제 사리병에 차례로 봉안돼 있었다.

크기 4.6㎝에 지름 1.5㎝의 황금사리병은 바닥 면에 굽이 부착돼 있고, 아랫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양이다.

손잡이가 부착된 뚜껑은 6엽의 연화문이 음각돼 있었으며, 사리는 발견되지 않고 물 같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황금사리병을 담고 있던 은제 사리병은 높이 6.8㎝, 지름 4.4㎝로 황금사리병과 마찬가지로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고 아랫부분이 볼록하며, 병 내부에는 황금사리병이 넘어지지 않도록 받침대가 마련돼 있었다.

원통형인 청동 사리함은 앞쪽에 절 창건과 관련된 중요 기록이 새겨져 있었다.

기록은 4∼5자씩 여섯 행으로 '정유년이월 십오일백제 왕창위망왕 자입찰본사 리이매장시 신화위삼(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이 음각됐다.

청동 사리함의 글을 해석하면 '정유년(577) 2월 15일 백제 창왕이 죽은 아들(왕자)을 위해 사찰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위덕왕(창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577년(위덕왕 24년)에 왕흥사를 창건했다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확인해주고 있다.

그동안 왕흥사는 삼국사기의 '법왕 2년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인을 두었다'는 기록과 '무왕 35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는 기록으로 서기 600년에 축조해 634년에 낙성됐으며, 왕들이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제를 지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번 발굴에서는 또 목걸이와 팔찌, 비녀, 금제 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됐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에서 사용되었던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으며, 사찰 규모와 형태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석축 및 제방 등도 확인됐다.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금·은·동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장치가 사리봉안 기록과 함께 발견된 점 등에서 이번 발견은 백제사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심초석 밑에 또 하나의 석제를 깔고 사리함을 안치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독특한 방식이며, 중국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백제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소화한 형태"라고 덧붙였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 등 이날 발표현장에 참석한 인사들은 "황금사리병 발견은 백제 금동대향로 발견 이래 최대의 성과"라고 입을 모았다.

  /전진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