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
조영복 지음|살림|439쪽|2만원
입력시간 : 2008.02.15 23:27
염상섭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김기림 채만식 한설야 김동환 이육사 이은상 윤석중 백석 노천명 계용묵 주요한 심훈 이태준…. 일제 강점기 활동한 근대 문학에 빛나는 시인·소설가·비평가 등을 열거하자면 숨이 찰 정도다. 지금까지 우리 문학이 이들을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을 만큼 이들 문인들이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일제시대 신문기자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인 기자'들은 193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신문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당대 문단을 이끌었다. 이들은 신문사에서 기자, 사회부장, 학예부장, 교정부장, 조사부장, 편집국장 등의 직책을 가지고 매일 신문을 만들면서 시와 소설, 수필과 기행문 등 문학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작품들을 지면에 발표했다.
모더니즘 시인으로 유명한 김기림(金起林·1908~?)은 1930년대 '문인 기자'를 말할 때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다른 '문인 기자'들이 문인으로 등단해서 나중에 기자가 된 반면, 김기림은 기자로 출발해서 문인으로 나아간 드문 경우다. 그는 1930년 4월 조선일보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공채 시험을 통해 같은 해 4월 20일 공채 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한다. 그는 사회부에서 기자 수업을 받은 뒤 학예부(현 문화부)를 거쳐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 학예부장을 지냈다.
김기림 입사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은 "일류라고 손꼽히는 인물들"('김기진 문학전집 2권')의 경연장이었다.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한기악, 정치부장 이선근, 교정부장 장지영, 학예부장 염상섭, 경제부장 정수일, 사회부장에는 화가 이쾌대의 친형인 이여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기림이 처음 배속된 사회부에는 홍종인 박윤석 양재하 신영우 이원용 등이 있었고, 정치부에는 한보용 함대훈 홍양명, 학예부에는 안석주 등이 있었다. 이원조 백석 박팔양 한설야 이석훈 등도 김기림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자로 활동했다. 이들은 서로 동료 기자이자 친구였으며, 내면의 소통이 가능한 문학적 동지들이었다.
- 그러나 김기림이 다른 문인 기자와 다른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문인'보다는 '기자'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문단에 나온 적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일찍이 문단에 나온 적이 없다.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히 신문기자였든(던) 까닭에 자기 신문 학예란에 출장 갔든(던) 기행문을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했고 별다른 동기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문학을 하겠다는 것만은 스스로 결심했고 무엇이고 값있는 것을 맨드러(만들어) 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문단불참기')
광운대 국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같은 발언은 그가 문인이기보다는 기자 혹은 한 시대 문학을 고민한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며 "모더니즘이나 '모더니스트 김기림'으로 김기림(문학)을 이해하는 것의 불충분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 연구가 '문인' 김기림에 지나치게 주목한 나머지 '기자' 김기림을 놓침으로써 김기림 문학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 김기림은 여느 문인들이 기자 생활을 호구지책으로 여겼던 것과는 달리, 기자라는 전문직업에 대한 인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신문기자가 된 첫날 느낀 신문사 편집국의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에게 비친 신문사 편집국은 근대 문명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고 마감을 하는 기자들의 손가락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고 있었으며, 한꺼번에 울리는 몇 대의 전화를 동시에 받으면서 기자들의 원고를 낚아채는 사회부장은 50개의 귀를 가진 '메두사형 인간'이었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후 윤전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감미로웠다. ('신문기자로서의 최초 인상')
김기림은 '편집국의 오후 한시 반'이란 시에서 이렇게 쓴다. '편집국의 오후/한시 반/모-든 손가락이 푸른 원고지에 육박한다/돌격한다//(…)//째륵/째륵/철걱/공장에서는/활자의 비명-/사회부장의 귀는 일흔 두 개다/젊은 견습기자의 손끗(손끝)은/조희(종이) 우흐로(위로) 만주의 전쟁을 달린다'
저자는 그동안 '문인'이라는 범주에서 단순히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규정된 김기림이 아니라 "기자 생활의 전선에 뛰어든 당대 지식인들의 치열한 삶의 리얼리티와 시대정신을 확인"하고자 한다. 저자는 김기림을 중심으로 그와 교유했던 동료 문인 기자들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고, 그가 꿈꾸었던 세계를 "신문이라는 근대적 매체를 통해 생산 유통되는 '활자-도서관'의 세계"였다고 진단한다. 김기림과 함께 구인회(九人會) 멤버로 활동한 시인 이상(李箱)을 비롯해 동료기자이자 문학 동지였던 백석 이원조 이여성 한설야 이석훈 등과의 관계를 서술한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문인'에 집착한 나머지 그동안 김기림의 작품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기자' 김기림의 글도 발굴해 부록으로 덧붙였다. 올해는 '바다와 나비'의 시인이자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인 김기림이 탄생한지 100년 되는 해다.
- 김기림의 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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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시비평집.
1947년 11월 백양당에서 펴냈다. 책머리에 자서가 있고 본문에 총 34편의 평론이 5부로 나뉘어 실려 있다. 제1부 '방법론 시론'에는 〈시학의 방법〉 등 4편, 제2부 '30년대의 소묘'에는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 등 4편, 제3부 '감상에의 반역'에는 〈시와 인식〉 등 13편, 제4부 '우리 시의 방향'에는 〈시와 민족〉 등 4편, 제5부 '오전의 시론'에는 〈의미와 주제〉 등 9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 1930년대 한국에 주지주의 이론을 도입·소개하는 글로서 한국시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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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 / 피아노 삼중주 1번 B♭장조 D.898 (Op.99,) - 스토로오니 피아노 삼중주단 - 음악출처 ; 닥터우리들 (http://blog.chosun.com/mjkcos)
보충 ~~~~~~~~~~~~~~~~~~~~~~~~ 바다와 나비-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원문출처 : 파랑새사랑 방^*^
감성과 지성을 뽐낸 시인, 기자 김기림~
시인 김기림은 익숙지만, 그가 1930년 조선일보 기자 공채1기로 입사해 현장을 누빈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같은해 5월의 <간도농민폭동> 당시 특파되어 생생한 "간도기행" 연재기사를 써댓던 것이다. 당연히 시를 좋아하던 그는 일제하 저항지 조선일보의 학예부장을 맡았다. 이후 신문이 폐간 되자 그는 함경북도 경성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6.25때 납북됐다고 기록돼 있다. 그의 시집 이름이기도 한 작품 '바다와 나비'에선 그때를 시린 초승달로 표현하고 있다.
왼쪽이 김기림, 오른쪽은 신석정. 젊은 그들이 새롭습니다.
시인 김기림의 신문기사가 위에 있습니다.1930년 6월 부터 11회 연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픔 많던 시대를 살다 간 그의 시어(詩語)- '절어서''서거픈''시린 초승달'엔
날개 꺽여 퍼덕이는 막돌길 위의 역사가 속 아리게 묻어 나온다.
<'조선일보 사람들' 전시회에서,3월4일~20일 조선일보 미술관>
<자료>間島 農民爆動- 1930년 반년사이에 600여차례 폭동 일으켜 봉건세력 타도 土地혁명 시도. 연변 각지에서 연이어 폭동이 일어남. 村마다 '폭동위원회'가 설립되고 농민들은 '폭동'의 구호를 부르면서 집단 행동. 폭동은 모두 中國共産黨의 지령하에 발생.목적은 토지혁명의 실현과 유격대와 유격근거지의 창건에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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