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석주 시인
- [문화비전] 성북동 예찬
서울 강북의 삼청동 가회동 계동 옥인동 누상동 효자동 혜화동 동숭동 성북동 등은 오래되어 아름다운 동네다. 그중에서도 성북동 하면 그리움과 설렘으로 마음에 파문이 진다. 반세기 전에는 늑대가, 더 전에는 호랑이도 내려오고, 구름도 내려앉아 탁족을 하던 성북동 계곡 일대엔 집들이 들어찼다. 내 부모들은 말년을 성북동에서 지냈다. 남의 집 뒷방 윗목에 자개 장롱을 놓고 구한말 같은 살림을 꾸리던 늙은 내외를 나는 주말마다 자선가처럼 고등어 한 손을 사 들고 찾아갔다. 적십자 병원으로 혈액 투석 다니던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뜨고, 성북구청에 나가 유행가를 배우던 어머니도 늙어 기운이 쇠잔해졌다. 고등어 조림을 침침한 불빛 아래 식탁에 올리던 쓸쓸한 가계(家系)는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그 동네를 지금도 즐겨 찾는다. 편의점과 돈가스집과 기사식당이 들어서고, 개발과 재건축 바람이 불어 옛집들이 밀려나고 계통 불명의 양옥과 시멘트 건물들이 들어서도 겉멋 부림으로 되바라지지 않은 옛 삶의 물증과 그윽한 정취가 있는 곳이 성북동이다. 성북동은 도심의 적요에 감싸인 별서(別墅)요, 숨어 사는 서늘한 미인 같은 동네다.
사대문 안을 감싸고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북동 옛 성곽 아랫마을에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이 있다.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방 두 칸짜리 한옥이 나오는데, 이곳이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심우장이다. 이 집은 만해가 일제와 마주하기 싫다 해서 북향을 하고 돌아앉았다. 변절한 육당을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싸늘한 눈빛 한번 보내곤 쌩 하니 되돌아서는 데서, 일제의 권세 앞에 굽실굽실 고개를 잘도 조아리던 종단 스님들에게 악취가 난다고 호랑이 같이 포효할 때 만해의 고고함은 벼락 치듯 작렬한다. 일찍이 우리 고고미술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썰미를 가졌던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옛집도 성북동에 있다. 우물과 각종 석물, 키가 큰 향나무 한 그루와 소나무, 관목과 화초로 어우러진 이 옛집 안마당은 한국의 전통 조경의 꾸밈이 없는 원형이다. 소나무와 대나무, 문신석과 동물 형상의 석물들이 어우러진 그 옛집은 소담하고 정갈하다. 하마터면 이 아름다운 옛집도 헐리고 다세대주택이 들어설 뻔했다. 최순우의 뜻과 안목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헐릴 위기에 있던 이 옛집을 구했다. 선비의 기상과 갸륵한 뜻이 깃든 이 옛집은 '시민문화유산 1호'로 지정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이 동네에는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 전형필은 1936년 11월 22일 퇴계로 경성미술구락부에서 있었던 경매에서 청화백자 한 점을 기와집 일곱 채 값을 치르고 사들였다. 나는 수만 점의 국보급 고미술품들이 있는 간송미술관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안복을 누렸다. 봄에는 추사의 글씨를 보러 가고, 가을에는 겸재의 그림을 보러 다녔다. 어느 해 봄에는 미술관 뜰에 핀 모란꽃의 자태에 홀려 한나절을 빈둥거리다 온 적도 있다. 여기서 몇 걸음 더 내려오면 이태준 일가가 월북 전에 산 옛집이 나온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된 수연산방이 바로 그 집이다. 수연산방은 옛것 그대로 좁아서 정겹고 낡아서 그윽한 한옥이다. 유리창 너머로 비쳐 드는 햇살이 무릎 위에 살랑거리는 일요일 오후 이곳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그윽했다.
여기 앞서 살았던 이들의 내력과 청아한 격조를 품으며 성북동은 심미적인 랜드마크로 거듭난다. 성북동에서 만해의 곧은 절의와 지조를, 아담한 한옥에서 이태준 일가가 누렸을 조촐한 행복을, 최순우의 돌과 나무와 물이 한데 어우러진 한옥에서의 고졸한 생활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화는 예(禮)요, 율(律)이요, 격(格)이고, 모심이요, 품음이요, 누림이다. 해와 그늘과 구름과 맨드라미와 옛길, 가는 사람 오는 사람과 더불어 문화는 세월을 삼키고 두터워지며 깊어진다. 옛것과 새것이 뒤섞이면 새것이 능히 옛것을 더럽혀서 옛것이 새것을 가리지 못한다. 그러나 새것은 옛것과 통하고 이어져야 온전한 문화로 구실을 한다. 옛것과의 조화로 새것은 그 조악함과 거침을 눅일 수 있으니 새것만을 섬겨 옛것을 헐고 부수는 어리석은 짓은 부디 피해야 한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 1751년, 종이에 수묵, 79.2 cm × 138.2 cm, 국보216호, 호암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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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장석주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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