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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왕조 창업의 숙명적 맞수 정도전과 하륜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6:49

 역사인물 재조명 (신동아 97. 11) 조선왕조 창업의 숙명적 맞수 정도전과 하륜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륜.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金 九 鎭 홍익대 교수·동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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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나라를 세울 때에 일등공신 장량이 유방을 만나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사를 인용하여,  나라를 창업할 때에는 임금이 신하를 발탁해서 쓸 수도 있으나, 신하가 오히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만약 정도전이란 인물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결코 조선 왕조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자기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돌아간 뒤에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도리어 실권자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영주·단양 등지에서 유배, 혹은 유랑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초라한 초가에서 살기도 하고,   가난한 농부에게서 밥을 얻어 먹기도 하고,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갈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을 할 때에 아내 최씨와 정도전이 주고받은 편지가 『삼봉집(三峰集)』의 「가난(家難)」에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 없는 구설수에 올랐는지를 알 수 있다. 아내 최씨는 이렇게 불평했다.

 

   『당신은 평상시에 부지런히 글을 읽느라고 아침에 밥이
   끓는지 저녁에 죽이 끓는지를 알지도 못하시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곳간이 텅 비어서 한 톨의 식량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아이들이 춥다고 보채고 배고프다고 울었으나, 제가
   끼니를 도맡아서 그때 그때 꾸려나가면서도, 오직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뒷날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시면,
   처자(妻子)들을 남이 우러러 보도록 만들고, 가문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라의 법을
   어겨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어, 몸은 남쪽 지방에
   귀양가서 지독한 풍토병을 앓으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家門)이 여지없이 망하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정도전이 아내에게 답장을 쓰기를,

   『당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에게 친구들이 있어서 그
   정의가 형제보다 나았으나, 내가 패망한 것을 보고서 그들은
   뜬구름처럼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본래 권력으로 맺어진 것이지 은의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도리는 한번 맺어지면 일생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원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이치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각기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할 뿐입니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영예와
   치욕, 그리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얼마나 가난에 쪼들리고, 또 홀로 낙담하고 절망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성계 찾아간 정도전

 

   그러나 나이 40대가 되자, 정도전은 가만히 앉아서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 가을에 정도전은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말하자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에 한계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당시 왜구를 소탕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성계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군영으로 찾아간 정도전은 이성계 군영의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군사 조직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만한 군대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니, 이성계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정도전은 짐짓 핑계대기를 『이만한 군대라면 동남방의 근심거리인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군영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성계에게 시를 한 수 지어서 바치겠다고 청했다. 그는 즉석에서 나무를 하얗게 깎아서 그 위에 시를 썼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滄茫歲月一株松]

   몇 만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다가 다음해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人間俯仰便陳踵]』

 

   이 시는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또 자기와 손을 잡고 큰 일을 하여   인간 세상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1383년(우왕 9년) 8월에 정도전은 「변방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安邊之策)」이라 하여 국방에 관한 문제를 이성계에게 건의했다고 하는데, 정도전이 함주의 군영을 찾아갔던 까닭은 이러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성계에게 진언(進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때 이성계는 정도전이 제시한 계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이듬해인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도전은 이성계와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맺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를 섬겨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다.


   당시 정도전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의 힘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모시고 큰 일을 도모할 사람으로서 이성계라는 인물을 선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의 창업을 위하여 한쪽은 지략으로써, 한쪽은 군사의 힘으로써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륜

 

   하륜(河倫)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륜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륜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륜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륜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륜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륜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륜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륜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륜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륜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륜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렇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륜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륜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륜(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륜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정몽주를 무척 어려워 했다. 하륜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륜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 횡사하자 하륜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정도전은 자가 종지(宗之)이고 본관이 경상도 봉화(奉化)인데, 아버지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우씨(禹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태조 5년(1396년)에 그의 나이 55세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생연도는 1342년이 틀림없다. 당시 본가는 영주(榮州)에 있었지만 그는 외가가 있던 단양(丹陽) 삼봉(三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서 그의 호가 삼봉이 됐으며, 그의 유저로서 『삼봉집(三峰集)』이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말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3품의 형부상서·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유명한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 문하의 젊은 유학자들과 교우할 수가 있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했다고 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구가 되어 쉬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여 높은 학식을 쌓아나갔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의 위치를 보면 경학에서는 정몽주 권근 등과 비길 만큼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장에서는 이숭인 등과 앞뒤를 다툴 만큼 내용이 호방하고 글이 유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켜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숭인과의 경쟁   의식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 그를 참혹하게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1362년(공민왕 11년) 10월, 약관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 12년)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고,
   1364년(공민왕 13년)에 전교주부(典校主簿)에 제수되고,
   1365년(공민왕 14년)에 통례문(通禮門) 지후(祗侯)에 전보되었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1366년(공민왕 15년)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고향 영주에 내려가서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무덤을 지켰다.

 

   그후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0년(공민왕 19년) 여름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비로소 마음에 맞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때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朴尙衷)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敎官)을 맡았는데, 이들이 정도전을 추천하여 박사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나가 앉아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스스로 깨닫게 했다. 이때부터 고려의 성리학이 비로소 크게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정도전은 매일 그 『맹자』를 한장씩, 혹은 반장씩   읽고 철저히 연구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상시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존경하고 그의 학풍을 추종했다. 후일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정도전은 그의 유학 체계를 조선왕조에  계승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가끔씩 자기만이 정몽주의 심오한 유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유학의 보수파로서 정통 본류를 형성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애썼고, 정도전은 유학의 좌파로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 정도전의 혈통 문제를 시비하는 과정에 우현보(禹玄寶)와  이숭인 김진양 등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은 대개 고려 말엽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의 어머니 우씨(禹氏)가 우현보의 집안이었는데 그 혈통에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이 세상에 퍼뜨렸다. 집안 혈통이 미천하다고 하여 정도전은 동문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정도전이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임명장에 서경(署經,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정도전을 괴롭혔다. 이러한 시비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이색 문하의 다정했던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결과 고민을 거듭하던 정도전은 신흥 군벌인 이성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의 막료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명(親明) 주장하다 유배 당해

 

   고려 말에 정도전의 일관된 주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친명정책(親明政策)을 고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왕 창왕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유학자들은 몽고의 원(元)나라를 배척하고 중국의 명(明)나라와 가까이 하는 공민왕(恭愍王)의 배원정책과 친명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 정권을 잡은 이인임 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을 취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젊은 신진 유학자들은 이에 반대했다. 1375년(우왕 1년)에 몽고 본토로 쫓겨간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인하여 정도전은 배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친원파 이인임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이때 정도전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소박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촌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했다. 거평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정도전을 위로했고, 그가 거처할 초가를 짓는 일도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그 농민들의 온정에 감격했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농민들이 유식한 데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가 36세 되던 1377년(우왕 3년)에 귀양지가 고향땅으로 옮겨져서 영주와 단양의 삼봉 사이를 오가면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뒤에 거주지 제한이 풀려서 서울 삼각산 아래   초가를 짓고 「삼봉재(三峰齎)」라고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다시 부평의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정도전은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았다.


   1388년(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 등의 친원파를 숙청하게 되자 정도전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이 직접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울 때에 정도전과 윤소종은 창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골라서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신돈의 피를 받았고, 고려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에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서 이성계에게 협력한 조민수(曺敏修)가 창왕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리하여 당시 명망이 높은 대유학자 이색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이색은 그의 제자 정도전과 윤소종의 주장을 묵살하고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판정했다.   목은(牧隱) 이색 같은 사람이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후손이다』라고 단정한 것을 보면 정도전과 윤소종이 『그들은 왕씨가 아니고 신씨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날조된 논리임에   틀림없다.

 

  

   고려말 위기 모면한 정도전

 

   그러나 1388년(창왕 1년) 11월에 정도전의 주장에 의하여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 등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므로 마땅히 가짜 왕씨를 폐지하고 진짜 왕씨를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 하고 창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계획대로 고려의 왕실이 혈통문제로 말미암아 점차 권위를 잃어가고, 그대신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주장은 나중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씨왕조 건국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씨(辛氏)로 몰아붙여서 세가(世家)의 고려 제왕(諸王)에서 제외하여 열전(列傳)에 편입했던 것이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 김진양(金震陽) 등 유학자들은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오른팔인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다음이라야 이성계 제거를 도모할 수가 있다』 하고,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정도전 등을 처형하도록 상소하게 했다.


   간관(諫官) 김진양도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풀을 뽑을 때에는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결국 다시 싹이 나오며, 악(惡)을 없앨 때에는 그 근본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악은 더 자란다」고 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이고, 남은과 윤소종 등은 악의 뿌리를 북돋워서 덩굴로 자라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라면서,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 등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먼저 남은 등을 심문한 다음에 조준과 정도전이 관련이 있으면 그때에 가서 그들을 아울러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위기를 모면하여 보주(예천)에 귀양가는 데에 그쳤다. 정몽주 등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 직후 정몽주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의 나이가 51세였다. 정도전은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다. 그는 개국공신 중 태조 이성계로부터 가장 높은 신임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도평의사사 판사(都評議使司 判事) 호조(戶曹)판사 등의 문관직과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와 같은 무관직을 아울러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조선 도읍 정한 정도전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정도전은 하륜의 주장을 물리치고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오늘날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정했다. 그 다음해 10월에 새 서울 한양의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정도전이 새로 지은 궁전과 누각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도 사용되는 경복궁(景福宮)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등의 이름은 그 당시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 도성(都城)이 완성되자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는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안 5부(部) 49방(坊)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조선왕조 창업 당시에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정도전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1393년(태조 2년) 7월에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함경도) 일대에 살던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편호(編戶)로 편입시켜 우리 백성으로 동화시켰으며, 1397년(태조 6년) 12월에 동북면 도선무사(東北面都宣撫使)로 나가서 동북 지방의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주군(州郡)의 경계를 정했다.
 

 

   고려 때에는 여진족이 동북면 일대에 내려와서 농경생활을 했다. 이성계는 함주(함흥)의 대토호로서 그 세력이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을 통솔할 만큼 막강했다. 이성계는 길주(吉州) 출신인 여진족 대토호 이지란(李之蘭, 퉁두란)과 손을 잡고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이 조선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이 건국하자 정도전을 도안무사로 보내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우리나라 백성들과 여진족의 혼인을 장려했다.


   4년 뒤에 정도전은 다시 도선무사로 나가서 동북면의 주(州) 군(郡) 현(縣)의 구획을 정하고 성(城)과 보(堡)를 쌓아 함경도 일대의 땅을 우리나라의 국토로 완전히 편입하는 작업을 했다. 후일 세종시대에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鎭)의 땅은 수복하지 못한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1396년(태조 5년)부터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이 죽을 때까지 중국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트집삼아 정도전을 중국으로 압송하라고 강요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입지가 정부 안에서 아주 어려워졌고, 이 틈을 타서 정적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일찍이 정도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다 온 적이 있었다.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몽주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적에 정도전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했는데, 당시 명나라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명 태조를 만나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받고 공민왕의 시호를 받았다.

 

 

   제1차 왕자의 난

 

   1390년(공양왕 2년) 6월에 정도전은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 태조를 만나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를 명나라에 고발한 사건을 변명했다. 정도전은 명   태조에게 황제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였으므로 명 태조는 요동 정벌군을 돌이킨 이성계를 두둔했고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로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그대 나라의 국사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짐은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니 그대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리하여 윤이 ·이초의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또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겨울에 정도전은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를 만나 하례를 드렸다. 이처럼 명 태조는 정도전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1396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을 협박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던 외교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과 경박한 문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실제 문제의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탁(鄭擢)이었고, 교정한 사람은 정총(鄭摠)과 권근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까지 몰아붙이면서 중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명 태조의 무리한 압력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그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 하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욕을 참다 못하여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만들어 지휘관과 각 도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방의 성보(城堡)를 축성하고 군량미를 저축했다. 그러나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일이었다. 일찍이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여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던가. 그가 다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를 설득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항상 정도전의 독주에 반감을 가졌던 조준은 『새로 창업한 나라로서 명분이 없는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리하여 요동을 정벌하는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1397년(태조 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세 사람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나라에서 형벌을 받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예문관 학사 권근 등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가 표전문을 지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전문 내용을 해명하는 한편,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명 태조의 환심을 사고 중국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정도전의 송환 여부는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는 중대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정도전 반대파인 이방원 일파는 표전문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륜은 정도전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명나라와 악화된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방원 일파가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사한 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제 일차 왕자의 난은  단순히 세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기보다 는 대명관계를 개선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혁명파의 실권자기리 벌인 세력다툼이었다. 


   1398년(태조 7년) 8월에 이방원 일파의 하륜과 이숙번이 동원한 군사들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정도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붙잡혀 무참히 죽었다. 그때 정도전의 나이 57세였다. 그와 함께 화를 당한 사람은 남은 심효생(沈孝生) 박위(朴威)등이었고, 정도전의 두 아들도 같이 참변을 당했다. 

 

 

  하륜은 고려대토호 출신

 

  하륜은 진주(晉州)출신으로서 자가 대림(大臨)이고 호가 호정(浩亭), 시호가 문충공(文忠公)이었다. 그는 1357년(충목왕 3년)에 아버지 하윤린(河允麟)과 어머니 강씨(姜氏) 사이에 태어났다. 하윤린은 진주 하씨로서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냈고, 종2품의 봉익대부(奉翊大夫)에까지 올랐다. 하륜의 외가는 진주 강씨로서 진주의 토착세력이었는데 그의 외삼촌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냈다. 하륜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진주의 대토호(大土豪)로서 고려 때에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벼슬한 사람도 있었다.


   하륜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민하여 10세에 서당에 나가서 글을 배우고, 14세에 이미 감시(監試)에 합격하여 정식으로 진주 향교에 입학했다. 그는 진주 향교에서 수학한지 5년만인 1365년(공민왕 14년)에 갓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때 과거의 좌주(座主)는 이색과 이인복(李仁復) 두사람이었다. 과거를 볼 때에 시험관을 좌주라고 하고 과거의 응시생을 문생(門生)이라 하여 평생토록 문생은 좌주를 스승으로 섬기소 좌주는 문생을 문하생으로 돌보았다. 하륜과 이색은 이러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하륜은 이색의 문생으로 이색 문하의 젊은 유학자 정몽주 박상충 김구용 이숭인 박의중 등과 교유했다. 또 자기보다 5년 아래인 권근과도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고, 이색과 이인복 두사람을 평생토록 스승으로 섬겼다.


   하륜의 『호정집(浩亭集)』을 보면, 『이숭인이 이색 정몽주 두 선생과 이집(李集)을 초대하여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고 그 앞에 화분에 심은 매화를 갖다 놓고 매화에 대한 시(詩)의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나도 또한 그 말석에 앉아서 그분들이 지은 훌륭한 문장의 시구를 듣게 되었다. (중략) 얼마 안가서 이집이 병으로 돌아갔고 그뒤에 10여년 사이에 정몽주, 이숭인 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고, 이색 선생 또한 새상을 떠나갔으므로 나만 홀로 남게 되었다. 지금 와서 그들과 같이 교우하던 즐거운 때를 생각하면 아득하기가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 아아! 이 슬픔을 어찌 이길 수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 글로 미루어 보면, 후일 발간된 이색 정몽주 이집 김구용의 유고집에 하륜이 서문을 쓸 정도로 가까이 지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색의 유학 사상은 정몽주 이숭인 등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키다가 죽음으로써 단절된 것이 아니라, 정도전 하륜 권근 등에 의하여 조선왕조의 정통 유학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계룡산 도읍 반대한 하륜

 

   좌주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그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혼인케 해 조카 사위로 삼았다. 하륜의 처가는 성주 이씨로서 이인복의 조부는 이조년(李兆年)이었다. 이조년의 손자 중에 이인임과 같은 권신(權臣)이 나오면서 성주 이씨는 고려 말에 극성기를 맞이했다. 

 

   하륜의 나이 21세가 되던 1367년(공민왕 16년)에 처음으로 춘추관에 임명되었고, 1369년 (공민왕 18년)에 감찰 규정이 되었다. 25세가 되던 1371년 (공민왕 20년)에 지영주군사(知榮州郡事)로 나가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므로,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일 높이 평가하여 보고한 결과, 1372년(공민왕 21년)에 중앙에 소환되어 고공 좌랑(考功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뒤에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5년(우왕 1년)에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고, 1377년(우왕 3년)에 전법 총랑(典法摠郞)이 되었다. 그의 나이 33세가 되던 1379년(우왕 5년)에 3품의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드디어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그 뒤에 36세가 되던 1382년(우왕 8년)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1384년 (우왕 10년)에 밀직제학이 되었다.


   하륜의 나이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 최영이 요동정벌을 단행할 때에 하륜은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양주로 쫓겨났다. 이리하여 4년동안 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 성공한 후 소환되어, 45세가 되던 1391년(공양왕 3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조선 개국 후인 1393년(태조 2년)에 경기좌도 관찰사(京畿左道 觀察使)로 전임되고, 51세가 되던 1397년 (태조 6년)에 계림부사(鷄林府使)가 되고, 1398년 (태조 7년)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임용되었다. 이처럼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지방 수령관으로 떠돌아다녔다.


   1393년(태조 2년) 12월에 하륜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충청도 계룡산이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될 뻔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無學) 대사를 데리고 계룡산의 지세를 직접 살펴본 다음에 이곳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하고, 그 터를 닦는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그로나 하륜은 태조에게 상언(上言)하기를 『도읍지는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두어야 하는데 계룡산이란 땅은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동북면, 서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시키면서 풍수학에 대한 여러 서적들을 대강 읽어보았는데, 지금 계룡산의 지세를 본다면 산은 서북쪽으로 내려오고, 물은 동남쪽으로 흘러가니, 물이 장생(長生)하는 방향을 깨뜨리고 있으므로 앞으로 쇠퇴하여 패망할 땅이니, 도읍지를 건설할 땅으로는 결코 적당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태조는 마음이  개운치 않아 권중화(權仲和) 정도전 등을 불러서 이것을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게 했다. 그 결과 하륜의 주장대로 계룡산은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계룡산으로 천도하려는 당초의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에 조선이 서울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적에 한양을 넓은 땅 가운데 하륜은 무악(毋岳, 신촌일대)이 길지라고 주장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으나, 정도전은 무악이 너무 비좁다고 반대하고, 오늘날의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 하륜은 주장하기를 『한양의 무악은 지리설에도 맞는 길지이니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제일 좋습니다』하고 무악을 명당이라고 고집하였다. 이리하여 조정에서 권중화 조준을 보내 그 지세를 조사하게 했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한양의 무악이 비록 명당이라고 하더라도 그 땅은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업습니다』라고 반대하였다.

 

 

   이방원 배경으로 중앙정계 진출

 

   태조 이성계는 직접 한양을 돌아보고 정도전이 주장한 땅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 원래 이곳은 고려 숙종(肅宗)때에 남경이었는데, 고려 때에 만들어 놓은 터가 너무 좁았기 때문에 그 남쪽으로 터를 더 넓혀서 잡았던 것이다. 한양 천도를 계기로 하륜은 정도전과 한 차례 충돌했으나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하륜은 정도전 남은 일당과 대적하기 위해서 정안군 이방원을 찾아가서 그의 참모가 되었던 것 같다.


   하륜은 이방원의 배경 아래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도전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1396년(태조 5년) 12월에 예문 춘추관 학사가 되고, 1398년(태조 7년) 9월에 정당 문학에 임명되었다. 그 사이에 박자안(朴子安) 사건에 연루돼 수원에 유배당했으나, 이방원이 구원하여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1396년에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자,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할지 여부를 묻기 위하여 비밀히 중긴들을 모아놓고 그 의견을 물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말이 없었는데, 정도전 일파는 주장하기를 『정도전을 곡 보낼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때에 하륜이 홀로 주장하기를 『지금 나라가 건국 초창기를 당하여 여러 가지 제도가 아직 정비되지 못했는데 중국으로부터 이와 같은 문책을 받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니 그들의 요구에 따라서 정도전을 압송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고 양국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려면 정도전 한 사람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주장은 정도전 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이방원 일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양국의 비꼬인 외교관계를 한시 빨리 풀기 위해서 당사잔인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세자 이방석의 후견인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을 명나라로 보내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도전- 남은 일파와 이방원-하륜 일파가 다시 한번 팽팽히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정도전은 하륜에게 극도의 원한을 품게 되었다.

 

 

   정도전 제거를 위한 하륜의 계획

 

   이처럼 나라가 곤란해지자 1396년 7월에 태조 이성계는 하륜을 계품사(啓稟使)로 임명하여 명나라로 가서 정도전이 중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입조할 수 없다고 변명하게 하였다. 계품사란 외교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자세히 설명하고 서로 오해를 풀도록 특별히 보내던 사신이었다. 이때에 표전문을 지은 정탁, 그리고 그것을 교정한 권근과 노인도 등을 같이 보냈는데 하륜으로 하여금 명 태조에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게 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의 반대파인 하륜을 계품사로 임명한 까닭은 무었인가? 중국은 조선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므로 하륜이 정도전의 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므로 그가 가서 설명을 한다면 명 태조가 오해를 적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왕위에 오르는 사람은 중국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였다.  이방원 일파가 중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애쓴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당시 이방원 일파가 중국의 집권자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는 중국 고나계를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했던 결과 명나라의 고명(誥命, 왕위 즉위 승인장)과 옥새를 받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표전문 사건이 발생하여 최악의 관계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륜은 표전문 작성 경위를 해명하고 정도전의 입장을 변명하여 명태조의 양해를 얻어내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계비(繼妃) 강씨(姜氏) 소생의 제8왕자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과 남은 등으로 하여금 보호하게 했다. 이에 대하여 한씨(韓氏) 소생의 여러 왕자가 불평을 품었는데, 특히 정안대군 이방원이 가장 심했다. 정도전과 알력이 심했던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느날 하륜이 이방원의 집으로 찾아가니 이방원이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세자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은 없고, 다만 선수를 쳐서 정도전 무리를 쳐없애는 것뿐입니다』하니 이방원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고 한다.


   1398년(태조 7년) 7월에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송별연이 열렸는데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연회석에서 여러번 술잔이 돌았는데 하륜은 술에 취한체 하면서 갑자기 술주정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일부러 주안상을 뒤엎어 음식들이 이방원의 옷자락에 엎질러지게 하였다. 이방원이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자 하륜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이방원의 집에 이르러 하륜은 이방원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나서 다급히 말하기를 『대군, 일이 급합니다. 장차 이 나라에서 오늘 밤 술상이 엎질러졌던 것과 같은 사건이 생길 것 입니다』하고 이방원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재촉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하륜을 안내하여 함께 밀실로 들어가서 난을 꾸미게 되었고 이것이 제 1차 왕자의 난이다. 그리고 하륜은 이방원에게 부탁하기를  『저는 왕명을 받고 곧 임지에 가야 할 몸입니다. 안산군수(安山郡守) 이숙번(李叔蕃)이 멀지 않아 정릉(貞陵)으로 이장할 때에 동원할 역군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도착할 테니 그 사람을 불러서 큰일을 맡기십시오. 저는 이 길로 내려가서 진천(鎭川)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거든 곧 저를 불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직후 이방원은 거사를 준비했다. 이방원의 심복으로 군사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숙번은 이때에 하륜이 소개했던 것이다. 그해 8월에 이숙번이 역군들을 거느리고 상경했다. 계획한대로 이숙번은 먼저 군기감(軍器監)을 점령, 무기를 탈취하여 역군들을 무장시킨 뒤 궁궐과 도성을 철통같이 포위했다. 남문(南門)밖에 지휘본부가 마련되었는데 그 중앙에는 이방원이 앉고 그 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날 연락을 받고 서을로 급히 돌아온 하륜이 그 자리에 앉아서 거사를 직접 지휘했다. 마침내 반란군은 정도전의 소재를 찾아내 포위했다. 담장을 넘어 옆집으로 도망치는 정도전을 잡아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이처럼 정도전, 남은 일파는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하륜 이숙번이 거느린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비명에 죽었다.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 그리고 매형 이제(李濟)등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세자의 자리는 제 2왕자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에게 넘어갔다. 

                   

 

   하륜의 개혁정책 추진

 

   1400년 (정종 2년) 1월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하륜과 이숙번은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체포하고 박포(朴苞)일당을 소탕하였다. 하륜은 이방원의 위치가 불안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중신을 거느리고 정종에게 가서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강요했다. 정종은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방원을 세자로 삼았다가 그해 11월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1401년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즉위했는데, 이 때에 하륜의 나이 55세였다.


   그 이후 하륜은 태종의 가장 아끼는 신하로서 1416년(태종 16년) 11월에 70세의 나이로 공무를 수행하다가 정평(定平)에서 갑자기 병사할 때까지 태종 시대의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기반을 다져나갔다. 하륜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모두 새로운 제도로 바꾸었다. 하륜이 보필하던 태종시대는 고려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로운 제도로 개혁한 시기였다. 이 시대야말로 조선왕조 5백년의 터전을 마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관제(官制)를 개혁하여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를 만들고 6조에 사무를 분장했으며, 백관의 녹과(祿科)를 정하고 관등에 따라 관리들의 관복(冠服)을 제정하였다. 관리를 임용하는 전선법(銓選法)과 그 치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시키는 고적 출척법(考積黜陟法)을 만들어 시행하고, 70세에 정년퇴직하는 70세 치사법(致仕法)을 만들어 스스로 실천하였다. 또 각 도 군, 현의 구획을 다시 정하고 고을 이름을 바꾸었는데 예를 들면 완주를 전주로, 계림을 경주로, 서북면을 평안도로, 동북면을 영안도(永安道)로 바꾸었다.


   경제적으로 각 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여 조세와 공부(貢賦)를 상세히 정했다. 특히 종이 화폐인 저화(楮貨)를 통용시키려고 저화 통행법을 만들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물물 교환하거나 포화(布貨: 삼베)를 사용했다. 사회적으로 여말선초에 많은 노비들이 해방되어 양인(良人) 신분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노비에 대한 소송 사건이 상당히 많았는데,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을 두어서 그 신분을 가려내도록 하고 공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제정하였다. 이리하여 그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號牌)를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착용케 하고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을 발급했다.


   이처럼 조선조 5백년 동안의 기틀은 하륜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태종시대 18년동안 숱하게 많은 공신들이 제거되어으나 그는 한번도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난 적이 없었다. 태종이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집안을 몰락시킬 적에 왕후의 동생 민무회(閔無悔)등을  감싸다가 같이 연루될 뻔했다. 또 오랫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가끔 뇌물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몸가짐이 한결같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친척에게는 어질게 대하고 친구들에게는 믿음성이 있었다.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사람의 조그만 장점이라도 반드시 취하고 작은 허물은 덮어주었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가 원만하여 오랫동안 정계에 있었으나 정적이 없었다. 도 태종도 말하기를, 『하륜이 나에게 공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그를 버릴 수가 없다』라며 끝까지 감싸 주었다.

 

   그는 천성이 중후하고 온화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위급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다. 제 1,2차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큰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어려운 문제를 결단할 때에는 남이 자기를 헐뜯거나 비난한다고 하여 그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1396년부터 1398년 사이에 표전문 사건으로 정도전 일파와 다툴 때에도 정도전과 남은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는 정도전을 압송해야 한다고 홀로 주쟝했다. 그는 소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정치가였다. 1398년부터 1416년까지 19년동안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네 차례나 정승을 지냈으나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 훌륭한 정책을 거침없이 태종에게 제시했다. 조정에 물러 나와서도 그는 조정에서 논의된 비밀을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집이나 옷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했다. 또 연회나 오락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가 죽자 태종은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나라에서 큰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결정할 적에 조금도 당황하는 빛이 없이 결단하여 나라를 편안한 반석 위에 둘 사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히 여겨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다면 이 제사를 흠향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왕권 중심과 재상 중심     

 

   정도전과 하륜은 모두 조선왕조를 창업하는데 기여한 일등 공신들이었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왕조를 창업했고, 하륜은 태종 이방원을 도와서 조선왕조의 문물제도를 완성했다. 정도전과 하륜은 다같이 고려말 유명한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유학자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고, 하륜은 피비린내나는 양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들은 우학자로서 보수파에 반대하는 개혁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도 고려말 이색과 정몽주의 유학사상이 이 두 사람을 통하여 조선왕조로 제대로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전과 하륜은 조선 개국공신 가운데에서 서로 비교해서 평가해야 그 비중을 제대로 알 수가 있다. 정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이래에 태조시대 7년동안 정권을 담당했고, 하륜은 태종시대에 17년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태종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개혁정치는 그들의 사상에서 보면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심기리편(心氣理篇)』『경제문감(經濟文鑑)』『불씨잡변(佛氏雜辨)』등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본사상에 입각해서 덕치를 베푸는 인정(仁政)을 주장했다. 민심은 천심인데 민심을 잃을 때는 혁명이 온다고 믿었다. 토지 사유를 억제하여 부자의 토지겸병을 막아서 가난한 농민을 보호하고, 부세는 1/10세를 표준으로 공정하게 부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의 사상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재상 중심제, 감찰제도 강화, 부국강병, 전제 개혁 등을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적극적으로해결하려는 진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또 주자학의 무신론에 입각하여 불교를 철저히 배척했지만,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세속화하는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고려의 역사를 최초로 정리하여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했으나 후일 몇차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완전히 고쳐지고 말았다. 하륜은 조준이 편찬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수정 보완하여 『속육전(續六典)』을 완성했고 『경제육전(經濟六典)』의 내용을 충실히 보충하여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續集祥節)』을 저술했다. 이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필요한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를 체계적으로 논한 것이다. 하륜은 정치적으로 최고의 통치자는 왕인 만큼 오아이 덕을 닦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재상은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생민(生民)들의 이해관개를 왕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정도전의 재상 중심제와 다른 견해다. 이리하여 태종이 즉위한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7월에 그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민의(民意)를 상달할 수 있게 했다. 결국 정치는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신문고 설치 주장 

 

   경제적으로 그는 국가의 백년 대계를 위해서 현재는 어렵더라도 앞으로 나라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실례로 그라 적극적으로 추진한 저화(楮貨)와 운하를 들 수 있다. 1401년(태종 1년) 4월에 사섬서(司贍署)를 두고 저화라는 지폐를 만들어 사용하게 했으나 백성들은  이것을 사용하기 싫어했다. 그는 저화 통행법을 만들어 포전을 금지하고 저화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 그는 저화가 동전(銅錢)보다 훨씬 사용하기 편리한 화폐라 믿었다. 그러나 태종시대 이후 일반 민중은 저화를 위면하여 쓰지 않게 되었다.


   또 충청도 지역에 운하를 파고 3남 지방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물화를 바다로 통하지 않고 내지의 운하를 통해서 수송하려고 계획했다. 왜냐하면 물자를 운반하는 배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서 전복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1413년 (태종 13년)8월에 순제(蓴堤)에 제방을 쌓고 운하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여러 차례 현지 조사를 했으나 워낙 큰 공사여서 수만명의 인력을 동원해야 했으므로 결국 실행하지 못했다. 만약 이 운하가 만들어졌다면,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 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을 잇는 대운하가만들어져 역사적으로 남북 문화의 교류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413년 7월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용산강을 잇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다.


    하륜은 역사에 많은 흥미를 갖고 『태조실록(太祖實錄)』『편년 삼국사(編年三國史)』『고려사(高麗史)』『동국사략(東國史略)』등을 편찬했다. 그는 단군(檀君)을 나라의 조상으로 높이고 기자(箕子)와 같이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정도전이 편찬한 역사 기록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도전, 남은 일파의 치적을 깎아내리고, 이방원, 하륜 일파의 행위를 미화하고 합리화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밖에도 『사서절요(四書節要)』『동국략운(東國略韻)』『비록촬요(秘錄撮要)』등을 편찬했는데 그가 유학의 경전뿐만이 아니라 운학(韻學), 음양지리 등 다방면에 두루 정통했음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하륜은 경륜이 있는 정치가로 추앙받았으나 정도전은 나라에 반역한 역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히려 정도전의 개혁사상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후세 사람들은 각자 그들이 처한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 역사의 인물을 달리 평가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태종의 총애 한몸에 받은 최고 실세 하륜 운하 건설에 집착하다

한양 재천도·청계천 공사 등 대형 사업 뚝심으로 밀어붙여

백성들 반발 우려로 운하는 무산

 

태종 10년(1410년) 10월 13일 태종은 느닷없이 "전국의 기생들을 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아마도 세자의 기생 탐닉이 심해지니 그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보자는 발상이었던 것 같다. 이 황당한 명에 거의 모든 신하들이 경쟁적으로 "지당하신 분부"라고 맞장구를 쳤다. 오직 한 사람, 영의정 하륜(河崙 1347년 고려 충목왕 3년~1416년 태종 16년)만이 절대 불가하다고 맞섰다.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태종도 웃으며 자신의 기생 철폐안을 철회했다. 하륜에 대한 태종의 총애는 그만큼 깊었다.

태종과 하륜의 인연은 하륜의 계산된 도발로 맺어졌다. 성현의 '용재총화'가 전하는 일화다. 정도전의 미움을 받던 하륜이 충청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아 외지로 나가게 됐다. 하륜 집에서 환송연이 열렸을 때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정안공 이방원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이방원이 하륜에게 술을 부어주려는데 하륜이 취한 척하며 상을 엎어버렸다. 옷이 더러워진 이방원은 크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륜은 곧바로 "왕자에게 사죄를 해야겠다"며 자리에서 나와 이방원을 집까지 따라갔다. 이방원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하륜은 곧 나라에 위태로운 환란이 있을 것이니 선수를 쳐야 한다고 아뢰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렇게 해서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이후 태종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관상에 뛰어난 하륜이 일찍부터 이방원에게서 왕기(王氣)를 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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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은 풍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끝내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그는 한양 천도 및 모악산 궁궐수축론의 주창자였다. 태조가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고수했지만 태종은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일단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한 바 있다. 이때 하륜은 줄기차게 한양 재천도를 주장했고 궁궐도 지금의 연세대 인근 모악산 아래로 해야 한다고 보았다. 논란이 끝없이 이어지자 태종은 개경과 현재의 북악산 아래, 그리고 하륜이 내세우는 모악산 아래 등 3가지 안을 놓고서 동전점을 친다. 점이라고 할 것도 없고 각각에 대해 삼세번 동전을 던져 앞면이 세 번 중 두 번으로 가장 많이 나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본궁을 완성하고 한양으로 재천도키로 결정이 됐다. 하륜은 국운(國運)의 융성과 관련해 모악산 궁궐론이 관철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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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태종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권력을 누린 '천하의 하륜'이었지만 그는 '운하'문제에서도 제대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 태종 12년 지금의 청계천 공사를 관철한 하륜은 곧바로 충청도 태안군 순제라는 곳에 운하건설을 추진했다. 태안반도 주변은 암초가 많은 바다였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안전항해를 위해 반도를 가로지르는 운하건설이 여러 차례 추진됐던 곳이다. 조선이 들어서자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 운하건설을 검토했다. 그러나 현지를 돌아보고 온 중추원 지사 최유경이 "바위가 많아 갑자기 팔 수 없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무산된 바 있다. 그리고 이 때 하륜이 밀어붙여 3개월 만에 5000명의 병사들이 동원돼 태안반도를 가로지르는 소형 운하가 태종 13년 2월 완성됐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실록의 평은 부정적이다. "헛되이 민력(民力)만 썼지 반드시 이용되지 못하여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은 결국 통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한 달 후 충청도 관찰사 이안우는 큰 배들은 제대로 통과하기 어려워 바닥이 평평한 소형 선박을 만들어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후 '순제 운하'는 수심 및 폭 확대를 둘러싸고 격론이 제기됐지만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한 태종의 의중 때문에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런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륜은 태종 13년 7월 20일 이번에는 숭례문(일명 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운하를 파서 배를 통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원래 지방에서 올라오던 공물이 용산에 집결했기 때문에 바로 숭례문 앞까지 조운선을 끌어들이자는 구상이었다. 다른 신하들도 하륜의 눈치를 보느라 모두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동조했다. 그러나 태종은 숭례문에서 용산까지는 모래땅이라 운하를 파기에 적절치 않고 또 1만 명 이상의 백성을 동원해야 하는 대역사(大役事)라 곤란하다며 하륜의 안을 윤허하지 않았다. 결국 하륜의 다양한 국토개조 구상은 그의 머릿속에 머물러야 했다.

입력 : 2008.04.11 14:38 / 수정 : 2008.04.12 10:20



삼봉 정도전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

유학과 박사1기 나대용

목차
1. 서론
2. 정도전과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
3. 유교국가 건설의 초석 - 민본사상
4.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1) - 혁명론
5.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2) - 闢佛論
6.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1) -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7.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2) - 관료선발제도, 교육
8. 결어



1. 서론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서 조선의 건국이념과 정치, 경제제도를 만드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조선 500년 동안 정도전이 틀을 잡은 조선의 정치, 경제제도는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실천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정도전이 정비하고 만든 정치, 경제제도가 어떻게 500년의 세월 속에서도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을까? 특히 조선조 정치제도에 나타난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오늘날 민주화의 격랑 속에 시달리는 현대 한국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의 근본 사상은 유학, 특히 주자학이다. 정도전은 중국의 주자학을 이용하여 조선조 건국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업적은 전 세계를 통 털어서 전무후무한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고려 말기에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조선 유학의 비조라고 불리는 정몽주 까지도 당시에 배불소(排佛疏)를 올린 글에서 ‘佛은 夷狄之敎이다. 無父無君, 潔身亂倫의 敎이다. 화복.윤회설이 무근하다.’는 등등일 뿐이고 참으로 이론적, 학술적으로 불교를 타도할 만한 논증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의 질긴 고리를 끊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를 건설한 정도전은 조선유학사에서 제일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되고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2. 정도전과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

정도전은 불교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의 당시 성리학자들처럼 불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정도전이 당시 융성하던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고 중국에서도 전혀 전례가 없는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꿈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몽주로부터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학통은 오히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그 만큼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당시의 순수 성리학자들 조차도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이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정도전은 개인의 출세와 영화를 위하여 불가능한 유교국가의 건설을 억지로 조장하고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500년의 역사는 정도전의 판단(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아울러 정도전의 이러한 판단은 개인의 출세와 영화를 위해서 생각해 낸 작은 술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판단은 국가의 500년 大計를 내다본 절묘한 선견지명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유교국가 건설의 초석 - 민본사상

정도전은 여말의 철학, 정치, 경제의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확신은 정몽주를 비롯한 당대의 성리학자들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들과 다른 점은 어떻게 누구와 철저한 유교 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서 있었다는 점에 있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철저한 유교국가의 신왕조를 열 적임자로 판단하였고 그 판단이 적중하였다는 것은 조선 50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정도전은 어떻게 철저한 유교 국가 건설의 초석을 놓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도 이미 서 있었다. 그것은 유교의 핵심사상인 민본사상이다. 정도전은 <<조선 경국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민은 국가의 근본 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유교의 민본사상은 정도전에 의해서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명확한 지침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군주가 백성을 하늘로 떠받드는 나라. 이런 나라의 군주를 聖君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민본사상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당연히 聖君만들기로 이어진다.

4.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1) - 혁명론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지침은 <<경국 대전>>에 그대로 옮겨졌는데,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침은 그냥 보아 넘길 글귀가 아닐 것이다. 이 지침은 군주가 민을 하늘로 섬기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침은 조선왕조의 모든 군주가 명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실질적인 하늘의 명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이러한 내용을 <<조선 경국전>>에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人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 만일 천하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군주가 통치하는 나라의 헌법에 ‘민은 군주의 하늘이다’,‘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라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헌법을 가지고 있는 조선을 과연 전제주의 국가로만 치부할 수 있는지 자못 의문이 든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을 조선의 헌법에 명기함으로서 구체적 실현의 틀을 갖추게 된다.

5. 유교국가 건설의 기둥 (2) - 闢佛論

정도전은 <<心問天答>> <<心氣理篇>>과 <<佛氏雜辨>> 세 편의 논문으로 당시 성행하던 불교를 철학적으로 공격하였다. 정도전의 위 闢佛논문들에 대해서는 ‘철학적으로 볼 때 불교를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사회, 정치혁명의 한 수단으로 볼 때는 시대적 요청으로서 불가피한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오늘날의 평가가 내려져 있다. 불교의 철학적 이론구조에 대한 평가가 오늘날에도 이러한 것을 보면, 고려 말기에는 불교철학이론에 대한 신뢰가 지금보다 훨씬 농도가 짙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예로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이색은 불교를 공공연히 신봉하였고, 東方理學元祖로 추앙받던 정몽주마저도 斥佛에 온건적이었다.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군주들도 불교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신봉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해 보면 조선이라는 철저한 유교국가의 건설은 정도전을 비롯한 소수의 闢佛論者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평가가 어찌하던 정도전의 위 闢佛논문들은 당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그 이유는 정도전의 闢佛논리가 ‘유불도 삼교를 원리적으로 파헤치어 유가의 천인성명, 이기오행의 철리로써 釋老 양가의 교의가 근본적으로 그릇된 것’이라 만인 앞에 설파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도전의 이 闢佛論이 세상에 발표된 지 5백 수 십년이 지났지만 그의 이론을 시비하거나 비판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정도전의 벽불논리는 비판되고 있지만, 불교이론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보다 당시가 훨씬 더 깊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의 벽불논리가 당대에 비판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벽불논리에 탁월한 철학적 기반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근거로 정도전이 벽불론을 주장했다는 오늘날의 연구는 다시 정밀히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쨋튼, 당대의 수많은 불교인들에 의해서도 반박되지 못할 정도의 깊이 있는 정도전의 벽불론은 혁명론과 더불어 유교국가 건설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1) -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중앙정부의 행정체제론과 관료선발제도에서 완성된다. 귀족이나 호족 등의 폐해가 심각했던 고려 말의 정치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중앙정부가 필요했다.
중앙정부의 수장은 군주이다. ‘군주는 종묘와 사직이 의지하여 돌아가는 곳이며 자손과 臣庶가 우러러 의뢰하는 존재’ 로서 국가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구심체인 ‘元首’이다. 따라서 군주는 가장 존귀하고 천하의 인민과 천하의 토지를 소유하는 막강한 권력자인 동시에 최대의 부의 소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군주의 이러한 막강한 권한은 실질적으로는 두 가지로 제한된다. 첫째는 ‘재상을 선택하는데 있다.’(人主之職, 在擇一相) 둘째는 ‘재상과 政事를 협의. 결정하는데 있다.’(人主之職, 在論一相) 그러나 政事를 협의하는데 있어서도 모든 문제를 재상과 협의. 처결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문제에 관해서만 협의할 권한이 있는 것이며, 작은 일들은 재상의 독자적인 처리에 맡겨져야 한다.
이제 유교국가 건설의 초점은 어떤 사람이 재상이 되어야 하며, 그 재상은 어떻게 국정을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모아진다. 재상의 자질에 대해서 정도전은 <<경제문감>>(상) 재상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재상의 권한과 국정처리 방식에 대해서는 <<조선 경국전>> (상) 치전과 <<경제문감>>(상) 재상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유교국가 조선에 있어서 재상은 군주와 쌍벽을 이루는 실질적인 수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여러 왕조들도 왕과 재상이라는 중앙행정체제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재상처럼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 받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대 조선의 재상들이 실질적으로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역사적 고증을 거쳐 연구되어야 할 것이나, 정도전의 이런 재상중심론이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 그대로 기록되었고, 조선이 議政府제도에 의해서 국정이 처리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재상중심론이 조선조 중앙행정체제의 이론적 중심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유교국가 건설의 지붕(2) - 관료선발제도, 교육

정도전은 관료선발제도에 대해서 <<조선 경국전>> (상) 치전, 예전과 <<경제문감>>(하) 등에서 자세히 명기하고 있다. 정도전의 관료선발제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眞儒에 의한 士. 官일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周禮>>에서 취한 것이다. 眞儒에 의한 士. 官일치란 ‘잘 교육시킨 선비(士)를 관료로 뽑는다’는 것이다. 이때 교육의 전적인 내용은 유교이므로, ‘유교로 교육받아 유교의 근본원리를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는 자(眞儒)가 정치를 담당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교는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자학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주자학을 참된 인간 교육의 학문으로 확신하고 있었으며, 이런 참된 인간에 의해서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의 이와 같은 주자학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관료선발제도와 교육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주자학이 관학화된 것을 의미한다. 조선조 500년의 세월동안 관학화된 주자학이 유지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주자학의 효용가치가 당대인들에 의해서 인정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주자학은 조선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엘리트 양산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충분히 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8. 결어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유교국가 건설의 설계자이자 현장지휘감독이었다. 즉 그는 유교의 근본원리를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유교의 사회적 효용가치를 꿰뚫고 있었고, 이런 통찰력에 의해서 멸사봉공의 자세로 유교국가 건설에 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周代이래로 한번도 현실화되지 못한 이상적인 유교국가(민본주의)를 건설코자 하였으며, 혁명론, 벽불론, 중앙집권적 재상중심론, 관료선발제도 등을 통해서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도전의 유교국가 건설은 오늘날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늘날의 민주자본주의가 이상적인 체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민주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설득력있게 내 놓는 사람도 없다. 이런 상황은 고려 말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즉 고려 말기에도 불교의 병폐를 직시하고 있었으나, 이를 일소하고 새로운 이상적 모델을 제시하고 실행하는 것은 누구도 하지 못하는 과업이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국가의 요체가 관료에 있다고 본 것이다. 어떻게 진정으로 민에 봉사하는 관료를 안정적으로 영입할 것인가? 이것은 인간을 참되게 육성할 수 있는 학문이 존재하고, 이 학문이 국가적으로 적극 교육됨으로서 가능하다. 불교는 그런 학문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학문은 주자학이어야 한다는 것이 정도전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것은 조선조 500년이라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민주자본주의체제의 진정한 문제점도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체제하에서는 참된 인간 육성의 길이 막혀 있다는 데에 있다. 조선 500년 동안 관학으로서 인재를 양성해온 유교, 주자학이 오늘날 주목받아야 하는 근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유교, 주자학은 서양철학에 의해서 정당한 학문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유교, 주자학의 근본원리들은 오늘날의 서양 철학적 학문경향에 의해 대부분 비학문적 위치로 밀려 난 상태이다. 오늘날의 서양 철학적 학문경향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증명, 증거 없이는 진리도 없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오늘날의 유교, 주자학은 서양철학의 근본경향과 일대 접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서양철학과의 끈질긴 투쟁을 통해서 현대의 진정한 학문적 지위를 회복함으로서, 유교. 주자학은 자신의 진정한 가치 즉 참된 인간 육성의 유일한 길을 이 세상에 밝게 드리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