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시대 승승장구하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후견인 정조가 타계한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휘말려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를 떠난다. 다산 자신은 내심 얼마 뒤 풀려나겠거니 기대했겠지만 설마하던 유배생활은 무려 18년이나 이어졌다. 그가 복귀한 것은 1819년. 다산은 어떻게 유배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아무도 명쾌하게 해명할 수 없던 이런 의문이 경기도박물관이 최근 전면 공개한 조선 순조 때 관리 신현(申絢.1764-1827)의 일기 성도일록(成都日錄)을 통해 밝혀졌다.
전체 분량 15권 15책. 1808년(순조 8) 11월11일부터 1821년(순조 21) 12월30일까지 장장 13년에 걸쳐 쓴 신현의 친필로 필사본인 이 일기 중 기묘년(己卯年. 1819년) 8월16일자에는 이런 증언이 보인다.
“정승지(丁承旨) 약용(若鏞)이 가까운 여점(旅店.일종의 여관)에 왔다기에 둘째형님을 모시고 가서 만나보고 함께 집으로 왔다. 정승지는 여러 해를 귀양가 있다가 이제야 풀려서 돌아왔다.”
신현은 다산이 승지를 역임한 까닭에 그를 정승지라 부르고 있다. 이로부터 보름 가량이 지난 같은 해 9월1일자 일기에 다시 다산이 등장한다.
“정아사(丁雅士) 후상(厚祥)이 찾아왔는데 그는 승지를 지낸 약용(若鏞)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사옥(邪獄.신유사옥)에 걸려 숱한 세월을 귀양살이로 보냈는데 후상이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권세를 잡은 사람과 사귀어 마침내 죄에서 풀려 돌아오게 하였으니 가히 효(孝)라고 할 만하겠다.”
그의 아들 후상은 누구일까?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장남 정학연(丁學淵)을 말한다”면서 “학연이 의술에 뛰어났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이는데, 그가 이런 의술을 무기로 아버지의 해배(解配)를 위한 일종의 ’로비’ 활동을 벌였다는 기록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현 자신은 다산의 해배를 위해 모종의 역할을 하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해서는 신현이 명확한 언급을 하진 않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증거가 성도일록 곳곳에서 포착된다.
같은 해 10월25일자에는 “정승지 약용이 찾아와서 자고 이튿날 돌아갔다”고 하는가 하면, 이듬해 2월6일자 일기에는 “정승지 약용이 와서 여승지(인명)와 함께 잤다”고 하고, 같은 해 8월15일자에도 “겸생(謙甥)과 정승지 약용(若鏞)이 와서 이틀 뒤에 돌아갔다”고 적고있다. 다산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정학연 또한 신현의 집에 자주 들렀으니, 1819년 11월25일자에 “정아사 후상 형제가 와서 자고 이튿날 돌아갔다”, 이듬해 2월14일자에도 “정아사 후상이 다녀갔다”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이는 정다산 부자가 신현과 보통 관계가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성도일록에는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종래 역사에서는 맛보기 힘든 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21년(순조 21) 조선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한 콜레라 창궐이다. 이 일은 실록에도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지만 일기에는 수시로 날아드는 희생자 속출 소식이 더욱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이 해 8월15일자에는 “올 여름에는 비가 오래 내려 40-50일 그치지 아니하니 습기와 재앙이 뭉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의원의 말을 채록하는가 하면, 이 때문에 민심이 동요되어 “서울 사방에 있는 산의 소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 나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8월25일)는 묘사도 보인다. 아마도 소나무를 태워 낸 연기가 콜레라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 콜레라에 대한 신현 자신의 현상 분석도 엿보인다. 8월27일자에는 “이 병으로 죽은 사람은 여자가 남자보다 갑절이 많고, 천한 사람이 벼슬하지 않는 선비보다 갑절이 많으며, 이런 선비가 관리보다 갑절이나 많다”고 하는가 하면, 이로 인한 희생자 수를 10만 명 이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더불어 성도일록에는 초상화를 어떻게 제작하고 관리했는지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1813년 7-8월치 일기에는 신현이 그 전에 타계한 부친의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당대 최고 화가들인 이명기(李命基)와 김건종(金建鐘), 그리고 건종의 아버지인 김득신(金得臣) 등을 동원해 작업한 과정을 상세히 담았다. 한데 신현은 정조와 순조의 어진을 그린 어진 화가인 이명기의 실력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혹평했다.
어떻든 이렇게 제작한 초상화는 집안 사당에 안치됐으며, 1년에 대체로 1차례 햇볕을 쬐어 말렸던 것으로 일기에는 적혀있다. 홍경래의 난과 같은 전란은 사람 몸값을 폭락시킨다. 유랑민이 늘면서 인력 공급이 많아진 까닭이다.
1811년 9월30일자 일기에 25냥을 주고 여자노비 1명과 그 딸린 아이 3명을 한꺼번에 구입했다고 썼는데 이듬해 2월21일자 일기에는 무려 90냥을 주고 말 1마리를 산 것으로 나온다. 노비 1명은 대량 상등마 1필의 가격과 같다는 것이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이었다.
일기의 이 대목을 통해 전란 때는 사람 값이 그야말로 폭락했다는 사실이 생생히 입증된 셈이다. 이 홍경래의 난과 관련해 신현이 취한 행동 중에서 매우 독특한 대목은 그가 이 기간에 병법서인 손자(孫子)를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에는 손자 중 어떤 편을 하룻밤에 무려 30번을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조정에서 언제건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을 부를 것을 대비해 부친상 중임에도 신현은 이렇게 치밀하게 미래를 대비한 것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입력 : 2008.05.14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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