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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흥선대원군에 대한 오해" 젊은 시절 난봉꾼? 쇄국정책 일변도?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0. 17:34

"흥선대원군에 대한 오해" 젊은 시절 난봉꾼? 쇄국정책 일변도?

연갑수 박사 '대원군 정권' 재조명 "고종 즉위 전에도 주목받는 정치적 역할 맡아
부국강병 통해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응 노력"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조선 말기의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서원 철폐나 세제개편 같은 그의 개혁적인 면모는 '쇄국으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인물'이라는 수구적인 이미지에 압도당해 왔다. 근대사 학자인 연갑수 박사(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가 최근 출간한 연구서 《고종(高宗)대 정치변동 연구》(일지사)는 대원군과 그의 정권에 대해 상당부분 재평가를 시도해 주목된다. 대원군 정권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대해 나름대로 대응하려 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파락호로 지냈던 건 아니었다.

아들 고종이 즉위하기 전 젊은 시절의 대원군은 일부러 난봉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었다. 기방에 출입하다가 욕을 당하기도 하고 '상갓집 개'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는 등 야사류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권력을 쥔 뒤의 모습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하지만 연 박사는 "당시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파락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흥선군은 27세 때인 1847년(헌종 13년)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임명돼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한 흔적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미 상당히 주목 받는 정치적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 조선일보 DB

◆무작정 문을 닫아걸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은 부국강병을 통해 외세로부터 자주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구미 제국이 주도권을 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응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연 박사의 해석이다. '부국강병'이라는 것 자체가 사림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조선 후기에는 이단시되고 있던 개념이었는데, 대원군이 전통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법가적(法家的)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그의 '복고정책'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였다는 독특한 해석도 내렸다. '조선왕조 개창기'를 내세워 개혁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을 뿐 실제로 '복고'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병인양요를 기점으로 해서 서양 군사기술의 도입을 시도하고, 1866년과 1868년에 각각 미국 함선이 나타나자 지방관을 통해 원만히 해결하는 등 대외관계의 유연한 측면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부국강병 추구 정책, 실각 뒤에도 계속돼

지금까지 '민씨 정권'이라 불렸던 1873년 대원군 실각 이후의 고종 친정기에서, 연 박사는 당시 고종의 역할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인 해석을 내린다.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개혁의 방향을 담은 〈선후사의(善後事宜) 6조〉를 마련하는 등 이 시기 정책의 중심에는 고종이 있었다는 것이다.

연 박사는 "세도정치 때와는 달리 이 시기의 외척인 민씨 일족은 국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이 같은 왕권 강화는 대원군이 이뤄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고종 친정기는 '부국강병 추구'라는 대원군 집권기의 기본적인 성격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연 박사의 분석에 대해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대원군의 군사개혁이 서양 세력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부국강병은 허장성세였다는 명백한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