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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초 박석명은 '충직의 화신' 증손자 박원종은 '반정의 주역'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3:28

 

[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조선초 박석명은 '충직의 화신' 증손자 박원종은 '반정의 주역'

 

태종 최측근으로 주요 정사 깊이 관여
아들 작명 때 "낮추며 살라"는 뜻 담아
박원종, 반정 이후 영의정까지 올라

 

조선에는 왕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 집안이 여럿 있다. 그중 조선 초에 가장 두드러진 집안의 하나가 박석명(朴錫命·1370년 고려공민왕 19년~1406년 태종6년)집안이다. 태종 때 황희를 자신의 후임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로 천거해 훗날 명(名)정승의 길을 열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람을 쓰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태종은 박석명의 강력한 추천이 아니었으면 황희를 중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석명은 열여섯 살 때인 1385년(고려 우왕11년) 문과에 급제했다. 전형적인 소년등과(少年登科)였다. 일처리 능력이 뛰어났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비범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래서 공양왕의 아우인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박석명은 불우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평소 가까웠던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1399년(정종1년) 복직돼 태종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태종의 가장 가까운 복심(腹心)으로 주요 정사에 깊이 관여했다. 태종은 1401년 그를 평양군(平壤君)에 봉했다. 일종의 귀족작위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박석명에 대한 실록의 평은 양면적이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종일 거나하게 마셨으나, 일을 결단하는 것이 물 흐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절조가 없어 여색(女色)에 빠지고, 뜻이 높아 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전단(專斷)하니, 사람들이 매우 꺼리었다.'

박석명에게는 박거비(朴巨非) 박거완(朴巨頑) 박거소(朴巨疎) 세 아들이 있었다. 왜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뛰어났던 박석명이 아들들의 이름을 이처럼 특이하게 지었을까? 이름 가운데 자(字) '거(巨)'도 눈에 띄지만 아니다(非), 무디다·미련하다(頑), 드물다·거칠다(疎)도 이름에서 쉽게 보기 힘든 글자들이다.

권력 바로 곁에 다가가 보았던 박석명으로서는 경계(警戒)의 뜻을 자식들에게 심어주려 했던 것 같다. 스스로 낮추며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공신(功臣)아닌 공신'이었던 박석명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들 셋은 세종 때 요직은 아니어도 나름대로 무관이나 지방관 등의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셋 중에서는 막내 박거소가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의 동생과 결혼함으로써 돈녕부 부지사(종2품)에까지 오르게 된다. 태종이 가장 총애했던 박석명의 아들이라는 점이 고려된 혼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거소는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임금의 동서(同壻)라는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박거소에게는 박중선(朴仲善·1435년 세종17년~1481년 성종12년)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세종의 또 다른 동서이자, 박중선에게는 이모부인 강석덕의 집에서 성장해야 했다. 일찍부터 공부보다는 무예(武藝)에 소질이 있던 박중선은 1460년(세조6년)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당대의 실력자 한명회의 눈에 들면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1467년(세조13년)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할아버지의 작호(爵號)를 되찾은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병조판서에 오른다. 30대 초반에 병권(兵權)을 틀어쥔 것이다. 이후 예종 때는 남이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고 성종9년(1478년)에는 무인으로는 드물게 이조판서를 지내기도 했다. 아마 이듬해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정승의 자리에도 올랐을 인물이다. 실록의 평이다.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고 위엄이 있어 모범이 될 만했다.'

박중선에게는 외아들과 딸들이 있었다. 그 외아들이 중종반정의 주역 박원종(朴元宗·1467년 세조13년~1510년 중종5년)이다. 박원종도 아버지를 닮아 무신(武臣)의 길을 걷는다. 누이들은 각각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과 혼인을 할 정도로 성종 때의 왕실과 밀접했고 연산군 때에도 왕실의 가까운 외척으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아내를 늘 궁궐에 두고서 간통'을 하는 등 개인적 원한까지 겹치면서 성희안 유순정 등과 힘을 합쳐 반정(反正)을 일으켜 성공을 거둔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등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晋城大君)을 왕으로 추대했다. 중종(中宗)이다.

이후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는 박원종에 대한 실록 사관의 평은 곱지 않다. '연산이 쫓겨나자 궁중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여 비(婢)를 삼고 별실을 지어 살게 했으며, 거처와 음식이 참람하기가 한도가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르게 여기었다.' 충직(忠直)의 화신이었던 박석명은 증손(曾孫)이 반정의 주역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