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시조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기원)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3:31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시조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기원)

여러분은 늘상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가 유대민족의 시조라고 알고들있다. 그러나 정작 신학교에서 아브라함이 신화적 인물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역사적으로 히브리민족의 이집트로의 이주은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이삭의 손자 요셉의 부족이 이집트로 이주한 것이 아니다.

이집트 왕조를 구분할 때, 고대왕조와 중간왕조, 신왕조로 구분하는데, 중간왕조와 신왕조 사이에 즉 대략 BC 18C 즈음에 이집트를 비롯한 시리아 팔레스틴 전 지역을 통치했던 족속이 바로 이 "힉소스족"이었다.

히브리인들(하피루인들,혹은 아피루인들)에 대해서 이집트역사에 첫번째 언급은 기원전 3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호전적인 힉소스(Hyksos)인들을 포함한 유목민족들이 노략질을 하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중해 지역으로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그들은 서쪽의 다양한 셈어를 사용했으며, 대부분 셈족이었으며 일부가 인도·유럽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는 이집트에는 도입되지 않았던 말과 전차를 타고 질풍과 같이 이집트에 침입하여 삼각주 동쪽을 200년동안 점령하였다.

그러나 힉소스인들은 이집트 전 국토를 점령하지 않고 이집트 남쪽만 직접 통치하고 이집트 북쪽은 방임하였다. 이 시기에 히브리민족의 시조인 셈족계열의 "아피루"(apiru)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아피루"라는 단어는 이집트뿐만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도 등장하는데, 그뜻은 "먼지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유목민족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학교에서는 아피루의 뜻을 "배고픈, 목마른, 맨발의, 먼지의, 말고삐를 잡은 하인" 등의 의미에서 추출한 헐벗고 굶주린 노예계층으로 해석 하는데, 서구의 신학계는 다르게 본다.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기간 동안의 아마르나 서신들(Amarna letters. 시리아-팔레스틴의 군소국왕들이 이집트왕궁에 보낸 외교 서신. 히브리민족의 이집트 거주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신학생이라면 당연히 공부해야한다)에서 하비루(Habiru)의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에 대처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그들 하비루를,"부족적, 가족적 유대가 없고, 국가 조직에 군인으로 고용되어 얽매이거나 제 스스로 행동하는, 다양한 기원을 가진 비정착인들"로 묘사한다.(아마르나 서신에서는 '하비루'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우가릿문서의 발견으로 인해, 하비루가 이집트 기록에 나오는 아피루('Apiru)에 대한 언급과 동일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했다. '하비루'란 말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가리키는 "히브리"란 말의 세 자음( )과 같은 어원의 단어이다. 그리하여 이 두 단어가 동일시된다.)

아피루들은 이스라엘 지역에서 잦은 가뭄 등으로 식량을 제때에 구할 수 없게 되자 비옥한 이집트 땅을 항상 동경하였을 것이다. 또, 유목민들이 이집트의 델타지역에 이주한 것을 그림으로 설명한 이집트 12왕조의 고급 관료의 무덤인 Beni Hasan(기원전 19세기 초)의 벽화에는 왕의 대로를 거쳐 이집트에 도착한 일련의 무리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 벽화에는 37명의 아시아인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는데,그들의 지도자 이름은 셈어인 Ibsha(ruler of a foreign country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청동시대 말기 즉,기원전 2천년 초기(고대이집트 12왕조 치하)에 이집트문서들은 그들을 "아피루"라고 지칭한다. 흔히 알려진 대로 "베두인"이 아니다.

베두인들의 이주는 규칙적이 었던데 반면,히브리인들은 이주는 그렇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은 2천명 정도의 무리로 조직되었으며,각 전쟁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었다. 아브라함도 그런 지도자가운데 한명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씨족들로 나뉘어 있었으며, 그중에는 신의 이름의 약자인 YWH라는 이름의 씨족도 있었는데, 라틴어로 "YHWH"-야훼와 발음상 비슷하다.

아브라함과 요셉 시대의 파라오들은 필시 제12왕조와 제 13/15왕조에 각각 속하였을 것이다(중간 왕조와 그후시대).그때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애굽에서 종으로부터 대신에 이르기까지 (보디발 수하에 있던 요셉처럼.창39:1-4) 각계 각층에 진출해 있었다. 그리고 요셉과 같이(창 41:45)당시의 많은 외국인들이 이집트식 이름을 받고 출세 하기도 했다.

그 시기부터 이집트왕권이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힉소스인들이 이집트의 왕위를 찬탈하여 2대왕조를(15대와 16대 왕조.기원전 1790~1580년)를 지배하고 있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로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이집트 정부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인들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페피 2세 때에는 이스라엘인들이 배를 건설하는 노동자들을 학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첫 번째 중간기(기원전 2000년경)에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야만인이란 약한 아시아인을 말하는데, 그들은 집이 없고 갈증으로 고통을 받고 나무가 없으며 산을 고통스럽게 걸어다녀야 한다. ……그들은 도둑놈들처럼 침입하여 분쟁을 벌인다. 나는 하 이집트에서 그들을 격퇴하고 목을 베었다. 그들을 걱정하지 말아라. 아시아인들은 강가에 있는 악어와 같다. 그들은 낙오된 먹이를 잡지만 사람들이 많은 마을은 공격하지 않는다."


 

▲루벤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1625


다른 자료에서는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이집트로 들어오는 아시아인들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아야 한다고 하였고 수많은 베두인 포로가 국경에서 석방되었다고 하였다. 기원전 1429년에 아멘호테프 2세는 3,600명의 셈계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자유민으로 이집트에 들어온 사람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전쟁의 포로들은 마을이나 건물을 세우는데 주로 동원되었지만 직업이나 식량을 얻기 위해 자유 의지로 이집트에 온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고용되거나 관청에서도 일할 수 있었다. 18왕조의 한 리스트에는 위대한 주인 세네브티시의 하인들로 95명이 있었는데 그중 48명이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고 하였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라 함은 베두인을 포함하여 주로 아피루인을 뜻한다. 그러나 힉소스인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즉, 아피루들에게 "고센땅"인 델타에 정착하게 허락한 파라오는 힉소스사람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은 그들 왕조와 동맹관계를 취하였다.

성서에도 요셉의 경우 타지에서온 자 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최고의 나라의 총리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한 일화는 아피루들이 힉소스왕들 치하에서 큰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는것의 암시일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15세기 투트모시스 3세 치하에서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지배하의 영토들(팔레스타인 포함)에 파라오 왕권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정치에 간섭한다.

그들세력을 포용하기 위해서 위해 파라오는 그들을 용병으로,혹은 신전업무를 돕도록 고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라오 아모시스(기원전 1552년~1526년 통치)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민족이 다시 왕권을 되찾은후 힉소스인들은 이집트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 치하에서 권력을 잡은,힉소스인들과 같은 계열의 민족인 히브리인들도 이집트인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2류 일꾼집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점령하였을 때 그들과 함께 유입되었거나 또는 이전부터 정착하고 있던 이스라엘인들이 힉소스인들에게 협조하여 이집트인들을 학대하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힉소스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해방 운동을 할 때에도 이스라엘인들은 소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방임하였다. 이집트인들은 힉소스인들을 마을과 신전을 태운 야만인들로 기록하였고 문둥병자로 명명하였는데 힉소스인들과 같은 셈족인 아피루들도 경멸해야 할 민족으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요셉을 알지못하는 왕이라는 것은 이집트 신왕조를 뜻하는 것이며, 아피루들은 비롬, 람셋 성을 건축하는데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특히 제국 시대라고 불리던 기원전 13∼14세기는 이집트에서 엄청나게 많은 기념물들이 건립되던 시기였고 이 당시 삼각주 지역의 아바리스에서 피-람세스 왕궁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안에 있었다면 이집트 각지에서 건설되던 신전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더욱이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적국에 동조하고 협조하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예를들면, 멤피스의 아나스타시라는 파피루스에는 노동자의 벽돌 만드는 할당량이 적혀 있는데 노동자 40인의 대장은 80,000개의 벽돌을 하루에 바쳐야 했다. 그것은 노동자 한 명당 하루에 2,000개씩을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이 숫자는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당시의 노동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될 수 있다. 그후, 주로 이집트 18왕조시대, 특히 기원전 1450∼1150년 사이 300년 간의 기록에 "아피루"란 말이 아주 활발히 언급되는데,이 시기에는 이 '아피루'들은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붙잡혀 온 전쟁 포로, 혹은 건축 사업 채석장 같은 곳에 동원된 강제 노동자들 또는 노예의 의미로 변하였다.

이들 아피루인들은 이집트에 이주해온 다양한 씨족의 셈족 유목민이였고, 야훼를 숭배하는 부족도 그 씨족중에 끼어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람세스와 세티 파라오의 조각상 뒤에 아피루인들의 신을 놓는 것도 허락하였다.

심지어 누비아에 있는 신전에는 야훼라는 베두인들이 믿는 신의 이름도 적혀 있을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출애굽한 사람들이 주로 람세스 2세 통치하에 건축공사장에서 노예로서 노역을 당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하비루"또는 "아피루"라 불리우는 일단의 노예집단이 출애굽을 하였던 것이다.

'아피루'는 하나의 종족이나 민족적 개념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었으며, 이집트에서 같은 셈족혈통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는 이주민이라는 공감대만이 형성되어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12지파는, 그들의 유목민적 기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들의 종교관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고(할례등은 이집트의 풍습임), 또 이집트에 그들의 종교성을 반영하면서 뒤섞여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면서 다양한 씨족의 셈족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이상스럽게 유일신 사상이 주입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거대한 무리를 이끄는데 다신교는 방해가 되고 하나의 목소리를 지닌 강력한 독재가 필요했으므로 유일신 사상이 정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된 것은 엑소더스이후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터이지, 그 이전에 그들은 이집트로 이주해온 다양한 출신의 셈족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학계에선 "유대교"가 형성된 것은 모세로부터 약 1600년 후인 에스라, 느헤미야 때로 보고 있다.

아울러 1929년 셰프로를 단장으로 한 프랑스의 고고학자들이 우가릿에서 발굴한 점토판에서 아카드와 케레트의 서사시가 나왔답니다.

아카드서사시에는 다니엘과 그의 처 사이에는 딸만 하나 있고 아들이 없었는데 다니엘은 시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얻게 되는데, 그후 본부인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면 시녀사이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겠다고 신에게 약속하고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속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난 아들 이삭의 이야기의 원형이지요.

케레트 서사시는 왕비 프로티를 다른 왕에게 빼앗긴 케레트왕이 그녀를 되찾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도 아브라함 이야기와 같습니다.

구약성서가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이며 우가릿 문서가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1400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