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를 보다 보면 참 요즘과 다르고, 조선시대와도 또 다른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의 위험성 - 굳이 천추태후가 역사의 주역으로 나서야 하는가 - 등에 대해서는 심히 공감하고 있고, 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을 했지만 차후에 다시 모아서 포스팅할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먼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희한한 고려 왕조의 가족내 혼인상(사촌 정도는 근친혼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에 대해서 조금만 얘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근친혼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가 오늘날에 와서는 더없이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오래 전에는 이것이 상식인 시절도 있었다는 것을 그냥 알아 두는 선에서 그쳐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은 금물입니다.
11일 방송분에서 한 신하가 경종이 외사촌남매간인 황보씨의 두 자매(뒷날의 천추태후와 동생)와 혼인하겠다는 데 대해 '근친혼'이라면서 반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고려 초기의 신료라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외사촌남매간이라면 현대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끔찍한 근친혼이지만 당시 왕가의 혼인 습속을 살펴보면 거의 남남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도 외사촌간의 혼인은 일본이나 대만에서도 합법입니다. 친사촌이라고 해도 미국 절반 이상의 주에서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혈족 개념이 강한 한국이니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이죠. 그리고 내막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사촌간 혼인은 고려 초기라면 근친혼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 안에서 경종(최철호)은 신정황태후(반효정)에게 꼬박꼬박 '외할머니'라고 부르고 치(뒷날의 성종)이나 두 공주에게 '짐의 외사촌'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한국의 족보상으로 이들은 외할머니나 외사촌이 아닙니다. 그냥 할머니나 사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고려 태조 왕건은 6명의 황후를 비롯한 29명의 부인을 통해 수없이 많은 자손을 두었습니다. 모두 왕권 안정을 위한 노력이었죠. 신라 왕가를 비롯해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과 모두 혼인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자손들 사이에서 빽빽한 혼맥이 다시 형성됩니다. 즉, 똑같은 왕건의 소생인 형제 자매들끼리 어머니만 다르면 다시 혼인을 한 것입니다. 단지 남자는 아버지의 성대로 왕씨를 따랐지만 딸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 때문에 얼핏 봐서는 형제간 혼인이 아닌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고려 5대 왕인 경종은 4대 광종의 아들입니다. 광종은 태조의 제3 황후인 신명황후 유씨의 소생이죠. 그리고 광종의 아내인 경종의 어머니는 제4 황후인 신정황후 황보씨(드라마의 반효정)의 딸인 대목황후입니다. 대목황후도 황보씨로 설정되어 있지만 엄연히 왕건의 딸이죠. 어머니만 다른 남매끼리의 혼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광종의 어머니인 신명황후 유씨는 정종이 되는 요 왕자, 광종이 되는 소 왕자를 낳고 신정황후 황보씨는 뒷날 대종으로 추증되는 욱 왕자를 낳습니다. 이 욱 왕자가 제6 황후인 정덕황후 유씨의 딸(역시 어머니만 다른 남매입니다)과 결혼해서 낳는 것이 바로 뒷날의 성종인 황주원군 치, 그리고 천추태후 황보수와 황보설 자매입니다.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들이지만 위의 예에 따라 아들은 왕씨, 딸은 황보씨로 불립니다.
따라서 경종이 신정황태후를 가리켜 외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일면 맞는 얘기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황주원군이나 황보수-황보설 자매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의 동생인 대종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외사촌인 동시에 친사촌이 되는 셈이죠. 아울러 신정황태후 또한 할아버지의 여러 부인들 중 하나이니 그냥 할머니도 되는 셈입니다.
이처럼 거미줄같은 고려 왕조의 혼맥이 결정판을 이루는 것이 바로 8대 현종입니다. 현종의 아버지는 현재 출연하고 있는 경주원군 욱(대종 욱과 한자가 다릅니다. 드라마 속의 김호진). 왕건의 아들이며 제5황후인 신성황후 김씨의 소생입니다. 신성황후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사촌이니 신라 왕가를 외가로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신라계 중신들이 다음 왕으로 경주원군을 밀려 하죠.
경주원군은 나중에 경종의 아내였던 효숙왕태후(헌정왕후) 황보설(그러니까 뒷날의 신애)과 정분이 나서 그 사이에서 대량원군(뒷날의 현종)을 낳습니다. 엄연한 왕비가, 그것도 자신의 숙부이며 남편의 숙부가 되는 황실의 근친과 바람을 피운 셈입니다. 그런데도 왕족의 씨앗이기 때문에 아이는 대량원군이라는 엄연한 왕자의 칭호를 받고 자라나죠. 심지어 불륜의 주범인 경주원군까지도 사후에 안종이라는 이름으로 왕의 자리를 추증받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된 덕이죠.
그러니 뒷날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려 놓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닙니다. 천추태후 자신이 왕건의 친손녀이니 그 아들도 절반은 왕씨의 자손이니 말입니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자신의 친정 쪽으로 아예 왕가를 바꿔 놓으려 한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씨나 측천무후 무씨에 비하면 훨씬 양심적인 편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이런 식으로 살펴볼 때 고려 초기의 왕실 계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참 곱게 잘 갈린 콩 분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나름대로 다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오늘날의 도덕관념으로 재단해서는 안되겠죠. 왕가가 사방의 귀족들로부터 권위의 위협을 받던 시절, 조금이라도 왕가의 권위와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외성 귀족들이 외척으로 참여하는 것을 심각하게 제한해야 했고, 그 결과가 이런 심각한 족내혼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시청자들의 거부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그런 부분(예를 들면 남매간 혼인)은 살짝 가려 보려고 시도하고 있긴 합니다만.^
- [Why]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 목종을 폐립시킨 강조
- 천추태후의 반역음모 등 당시 어수선
'王씨의 고려' 지킨 그가 반역자인지 모호 - 천추태후의 반역음모 등 당시 어수선
그냥 둘 경우 왕씨 왕조(王朝)가 김씨 왕조로 바뀔 판이었다. 여기서 목종은 그보다는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자신에게는 숙부뻘인 대량원군(大良院君―훗날의 현종)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결심한다. 대량원군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견제를 받아 오랫동안 삼각산(북한산) 신혈사라는 절에 10년 이상 유폐되어 있었다.
문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반역음모를 분쇄할 수 있는 무력을 확보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로 나가 있던 강조(康兆)를 떠올렸다. 목종은 한편으로는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을 개경으로 불러 올림과 동시에 강조에게도 사람을 보내 즉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서북면 도순검사는 평안도 일대를 책임진 최정예 부대 총사령관이었다.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목종은 강조를 믿고서 불렀는데 강조는 목종을 믿지 않았다. 강조의 생각은 이랬다. '상감의 병환이 중한데 태자를 아직 세우지 않았으니 악당들이 왕위를 엿보고 있는데 주변에 아첨과 참소만을 일삼는 사람들을 두고서 그 사람들 말만 믿고서 상벌(賞罰)이 공정하지 못하여 이런 위험한 혼란을 초래했다.' 결국 5000명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군해 목종을 폐립(廢立)시키고 대량원군을 신왕으로 옹립(擁立)한다.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에서 강조는 열전의 '반역(反逆)'편에 실려 있다. 그러나 강조가 과연 반역자인지는 모호하다. 우선 그는 스스로 왕위에 오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사실 강조가 개경의 상황을 방관했으면 왕건의 고려는 끝나고 '김씨 고려'가 탄생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개경을 들이닥친 날의 상황을 보면 강조의 생각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천추태후와 목종을 축출한 강조는 무심코 건덕전(乾德殿) 앞에 왕이 앉는 탑(榻) 아래에 앉아 있었다. 이를 본 군사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에 깜짝 놀란 강조는 벌떡 일어서며 무릎을 꿇고서 이렇게 말한다. "후계 임금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왕씨 고려'의 신하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얼마 후 신혈사에 유폐됐던 대량원군이 개경으로 돌아오자 즉위를 하게 되고 강조는 양국공(讓國公)에 봉해진다.
실권을 장악한 양국공 강조는 목종과 천추태후를 충주 적성현으로 내쫓았다. 동시에 강조는 사람을 시켜 목종으로 하여금 독약을 먹고 자살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목종은 거부했다. 결국 목종은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다만 천추태후의 경우 이미 김치양과 아들까지 다 죽여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었다. 유배생활을 하던 태후는 현종20년(1029년) 65세를 일기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1년이 지난 1010년 거란의 성종(聖宗)이 뜬금없이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사실 침공 초기 강조의 탁월한 작전으로 거란의 침공은 좌절되는 듯했다. 이에 자신을 얻은 강조는 '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겨 사람을 데리고 바둑을 두었다.'
그는 적병이 몰려온다는 보고가 이어지자 "입 안의 음식과 같다. 적으면 안되니 많이 들어오게 하라"고 큰 소리를 치다가 결국 거란병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비참하게도 그는 담요 같은 데 둘둘 말려 거란의 성종 앞에 끌려갔다.
성종은 강조의 포박을 풀어주면서 "나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강조는 단호했다. "나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강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함께 거란군에 끌려온 그의 부하 이현운(李鉉雲)은 시(詩)까지 지어 바치며 거란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兩眼已瞻新日月(양안이첨신일월)/一心何憶舊山川(일심하억구산천)'
나라를 배반하는 내용만 아니라면 대조미가 돋보이는 시구라 할 수 있다. '두 눈으로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니/한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만을 생각하랴!' 이를 듣는 강조는 그만큼 속이 더 뒤집어져 이현운을 발로 걷어차버렸다. 그리고 강조는 처형됐다. 이런 인물이 '반역'편에서 김치양 바로 뒤에 실려 있다는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편찬했던 세종 때만 해도 훗날 반정(反正)이 일어나리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강조의 행위는 반역보다는 반정에 가깝다.
요즘 시각으론 '근친상간' 수두룩
인기 드라마 '천추태후'의 배경
조선의 경우 적자(嫡子)로 이어지던 왕통이 처음 방계로 이어진 것(傍系承統)은 선조 때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안씨의 손자였다. 그러면 고려에서 처음으로 방계승통한 임금은 누구일까? 고려의 왕통은 태조 왕건이 943년 세상을 떠나고 혜종(惠宗·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서 난 장남), 정종(定宗·왕건과 신명 왕태후 류씨 사이에서 난 둘째아들), 광종(光宗·정종의 동복 아우) 등 이복(異腹)과 동복(同腹) 형제로 이어지다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경종(景宗)으로 이어진다.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는 이복남매 간이었다. 아마도 이 혼인이 없었다면 요즘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천추태후'의 권력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종은 재위6년 만인 981년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태조 왕건 사후 38년이 흐르는 동안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등 4명의 국왕이 바뀌었다.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착한 사람을 멀리했다. 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는 사평(史評)을 듣는 경종은 죽음을 앞두고 사촌 동생 개령군 치(治)를 불러 선위(禪位) 의사를 밝힌다. 자기 아들(훗날의 목종)은 아직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종이 유일하게 평가를 받는 것은 이때 선위한 개령군이 왕위에 올라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베푼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조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왕욱은 이복누이인 선의태후(이것도 추봉) 류씨와 결혼해 아들 하나, 딸 둘을 두는데 그 아들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게 되는 개령군이고 딸 둘은 각각 경종을 모셨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이다. 경종이 미련 없이 개령군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바로 이처럼 겹처남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현대적 시각으로 봐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만큼 민망한 대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981년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하고서 3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성종은 사관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고려사'를 편찬한 유학자들로부터 종묘사직을 설치하고 효자 효부를 기리는 등 유학적 세계관을 펼친 국왕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 성종도 역시 '고려' 사람이었다. 그의 왕후 류씨는 광종의 딸로 다른 종친에게 시집을 갔다가 뒤에 성종의 배필이 되었다 하니….
경종의 죽음으로 일찍 과부가 된 성종의 큰 누이이자 경종비였던 헌애왕후가 드디어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미 경종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던 헌애왕후는 남편이 죽자 궁궐 내 천추궁(千秋宮)에 거처하면서 외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끌어들여 온갖 추문을 만들어낸다. 보다 못한 성종은 김치양을 외방(外方)으로 내쳤다. 997년 성종이 재위1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경종과 헌애왕후 사이에서 난 목종(穆宗)이 등극한다. 18세면 충분히 친정(親政)을 펼칠 수 있음에도 왕태후가 된 헌애는 천추궁에 자리잡고서 섭정을 한다. '천추태후'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돌아온 탕아' 김치양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심지어 목종 6년(1003년)에는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다.
천추태후와 같은 경종비였던 성종의 작은 누이 헌정왕후도 일찍 과부가 되자 왕건의 아들(이복 작은 아버지) 왕욱(王郁)과 통간하여 아들을 낳았다. 성종은 왕욱도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먼 지방(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보낸 바 있다. 성종 사후 세상을 거머쥔 천추태후는 주변을 둘러보니 김치양과의 사이에 난 아들이 목종의 뒤를 잇는 데 방해물이 될 유일한 인물은 바로 헌정왕후와 왕욱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뿐이었다. 목종 재위기간 동안 왕순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왕순은 목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22년간 재위하게 되는 현종(顯宗)이다. 그 바람에 왕욱은 안종(安宗)으로, 헌정왕후도 효숙 왕태후로 추존됐다. 다소 복잡하지만 고려 초 왕실 상황은 그랬다. 입력 : 2009.01.17 03:15 / 수정 : 2009.01.17 23:11
- [Why][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불세출의 '大政客' 강감찬
- 문과 장원급제한 전형적인 문신
귀주대첩후 영웅됐지만 공직서 물러나
'장군'칭호, 그의 다양한 면모 덮을 수도 - 문과 장원급제한 전형적인 문신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이 그를 보더니 소스라치게 뒤로 물러서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래 보이지 않더니 여기 와 있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고대 중국에서 별 점을 칠 때 문곡성은 큰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별로 전해진다. 그러나 '고려사'는 그의 용모에 대해 "체격이 작고 용모가 보잘 것 없었다"고 적고 있다. 고려의 개국공신이기도 했던 아버지 강궁진으로부터 학문과 무예를 익힌 강감찬은 남들보다 늦은 고려 성종2년(983년)인 36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해 탄탄대로를 달려 거란의 2차 침입이 있던 1010년 현종1년 예부시랑으로 있었다. 예부는 조선의 예조에 해당하며 시랑은 참판(차관) 내지 참의(차관보)의 고위직이었다.
993년(고려성종12년) 거란의 1차 침입은 서희의 탁월한 외교술로 거란병을 되돌렸지만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강조(康兆)를 단죄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한 제2차 거란 침입 때 조정 관리들은 하나같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했다. 이 때 유일하게 항복을 반대한 인물이 예부시랑 강감찬이었다.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해야 합니다."
현종은 결국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도로 몽진했고 얼마 후 국권을 다시 회복됐다. 현종은 무한한 총애로 강감찬의 지략에 보답했다. 훗날(현종9년) 현종이 강감찬을 서경유수(평양시장)로 제수하면서 내린 임명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경술년(1010년)에 오랑캐의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이 침입한 전란이 있었다. 그때 만약 강(姜)공의 전략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오랑캐 옷(左��)을 입을 뻔했다." 그는 전장의 장수가 아니라 불세출의 전략가였다. 이후 강감찬은 이조판서에 해당하는 이부상서에 오른다. 문신의 인사권을 다루는 핵심요직이었다. 1018년 거란이 10만의 병력을 보내 세 번째로 대규모 침략을 감행하자 현종이 강감찬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거란군 침입 소식을 접한 현종은 강감찬을 최고사령관인 상원수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20만8300명의 병력을 인솔케 했다. 압록강 쪽으로 나아간 고려군은 흥화진 인근 대천(大川)에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물을 막은 다음 거란군이 대천을 건너려 할 때 1만2000여명의 기병이 돌격해 거란군의 기세를 꺾어버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귀주대첩은 해가 바뀌어 거란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다. 도주하는 거란군에 맞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대항했으나 승부를 보지 못한 채 대치상태가 오래 가고 있었다. "때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녘으로부터 휩쓸려와서 깃발이 북으로 나부껴 고려군이 이 기세를 타고 맹렬히 공격해 거란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거란군 병사 중에서 살아돌아간 이는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0만 가까운 거란병사가 한반도에 들어와 다 죽었다는 말이다.
강감찬은 고려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조선 때도 강감찬은 마치 우리가 이순신을 기리듯이 최고의 충신으로 받들었다. 삼군을 거느리고 개선하는 상원수 강감찬을 현종은 교외까지 친히 나가 맞이했다. 여기서부터 강감찬의 행보는 눈길을 끈다. 개경으로 돌아온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현종은 만류했고 강감찬은 거듭 사의를 밝혀 마침내 1년후인 현종11년 공직에서 물러난다. 물론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030년 잠시나마 문하시중(조선의 영의정)을 맡기는 하지만 그는 사실상 10년 동안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아마 나라를 구한 영웅이 계속 조정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명목으로 비명횡사(非命橫死)를 당했을지 모른다. 강감찬은 대전략가임과 동시에 정치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던 대정객(大政客)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칫 '강감찬 장군'은 이런 강감찬의 다양한 면모를 덮을 수 있다.
이자연(李子淵·1003년 고려목종 6년~1061년 고려문종 15년)은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승승장구하여 인주(仁州·인천) 이씨가 일거에 고려중엽 최대 문벌로 떠오르게 만든 디딤돌이다. 조선시대 의정부 찬성(정2품)에 해당하는 내사시랑평장사로 있을 때인 문종 6년(1052년) 세 딸 중 첫째가 11대 왕 문종의 비(인예태후)가 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후 나머지 두 딸(인경현비·인절현비)도 차례로 문종의 후비가 되었다. 관리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강직한 성품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당연히 '고려사'에서도 이자연은 충신(忠臣)편에 올라 있다.
세도가 이자연의 손자 이자겸
인예태후는 문종과 30년 동안 해로하면서 12남 2녀를 낳았다. 그 아들 중 첫째 둘째 셋째가 차례로 순종(12대), 선종(13대), 숙종(15대)이며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년~1101)이 넷째아들이다. 참고로 14대 헌종은 이자연의 아들 이석(李碩)의 큰딸과 선종 사이에서 태어났다. 헌종은 외삼촌의 딸, 즉 외사촌과 결혼을 한 셈이다. 이자연은 세 딸 말고 8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에서 이정(李�p)은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하는 문하시중에 오르는데 그의 딸 하나도 선종의 후궁(원신궁주)으로 들어간다. 이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매형에 해당하는 문종에게 딸을 바친 셈이다. 이정의 동생인 이석(李碩)의 경우는 딸만 둘을 두었는데 큰딸이 선종의 정비(사숙태후)다. 이석과는 사촌관계인 이예(李預)의 딸은 선종의 후궁(정신현비)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자연의 아들들 중에서 그 후손들이 가장 크게 현달하게 되는 인물은 이호(李顥)였다. 이호는 역사책에도 등장하는 문제의 인물 이자겸(李資謙·?~1126년 고려인종 4년)의 아버지다. 이호의 딸, 즉 이자겸의 여동생이 순종의 후궁으로 들어간 데 이어 이자겸의 딸 3명이 각각 예종(16대)의 정비(문경태후)와 인종(17대)의 두 후궁으로 바쳤다. 인종이 예종과 문경태후 사이에서 났으니 인종은 친 이모 둘을 후궁으로 맞은 셈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자연은 불과 3대(代) 만에 10명의 태후(왕비)와 왕비(후궁)를 배출하면서 왕씨 왕가에 버금가는, 실은 왕실을 훨씬 뛰어넘는 권세를 장악하게 된다.
사위 예종 죽자 손자 인종 보위에
그런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은 적어도 이 무렵 이자연 집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멀리도 아니고 바로 손자 대에 이르러 두 명이나 반역을 꿈꾸다가 '고려사 반역(反逆)'편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문하시중 이정은 네 아들의 이름을 인의충효(仁義忠孝)를 써서 각각 이자인(李資仁), 이자의(李資義), 이자충(李資忠), 이자효(李資孝)라고 지었다. 그중 이자의는 자신의 누이가 선종의 후궁(원신궁주)이라는 것을 믿고 노골적으로 사병(私兵)을 모아 어리고 병약한 헌종을 몰아내려 하다가 헌종의 숙부 계림공(훗날의 숙종)의 역습을 받고 대패해 고려조 반역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자의의 이런 행적도 이자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자의가 의리(義)와 먼 행동을 했다면 이자겸 또한 겸손(謙)과는 전혀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집안 배경으로 관리의 길에 나선 이자겸은 순종의 후궁이었던 여동생이 순종이 죽자 궁노(宮奴)와 간통을 하는 바람에 한동안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예종이 자신의 둘째딸을 왕비(문경태후)로 맞아들이면서 국구(國舅·국왕의 장인)의 자리에 올라 정2품 중서문하성 평장사에까지 오르고 백(伯)의 작위까지 받는다. 1122년 예종이 죽었을 때 태자가 아직 13살로 어려 예종의 아우들이 왕위를 노리자 이자겸은 손자인 태자를 적극 보위해 왕위에 오르게 만든다. 그가 24년 동안 재위하며 고려를 혼란에 빠트리는 인종이다.
같은 仁州 이씨 6촌이 선위 막아
이자겸은 손자인 인종이 타성(他姓)을 왕위로 맞아들일 경우 왕의 총애와 권세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자기 셋째·넷째딸마저 후궁으로 밀어 넣었다. '고려사'는 이자겸이 강요했고 인종은 부득이 동의했다고 적고 있다. 1126년 2월 선수는 인종이 쳤다. 군사를 동원해 이자겸 세력에 공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이자겸은 반격에 성공했고 인종은 '할아버지'이자 '겹장인'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선위(禪位)의사까지 밝힌다. 이자겸이 왕위를 받을지 망설이고 있을 때 인종의 측근이자 이자겸과 6촌 형제 사이였던 이수(李壽)가 나서 불가론을 펼쳐 왕씨 왕조는 이어질 수 있었다. 그 후 측근 척준경의 배신으로 이자겸은 패퇴했고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가 곧 세상을 떠났다. 인주(仁州) 이씨(李氏) 왕조의 탄생을 같은 인주 이씨가 막은 것이다.
'17[sr]역사,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최초로 발견된 정몽주의 과거시험 문제 답안지 (0) | 2015.08.21 |
---|---|
[스크랩] 김일성과 周恩來<저우언라이>는 국경을 어떻게 나눴을까? (0) | 2015.08.21 |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시조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기원) (0) | 2015.08.21 |
[weekly chosun] "한민족은 단일민족 아니다!" (0) | 2015.08.21 |
[스크랩] 조선초 박석명은 '충직의 화신' 증손자 박원종은 '반정의 주역' (0) | 2015.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