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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 / 미륵사 금동사리항아리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3:44

백제 무왕-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은 전설로만 남나

헤럴드경제 | 기사입력 2009.01.19 09:13 | 최종수정 2009.01.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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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는 백제 서동왕자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기록을 통해 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도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시기와 목적 등은 언급돼 있지 않다.

그동안 설화로 전해져온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의 사실 여부를 유추, 해석해볼 수 있는 주요 유물들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대거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국보 11호이자 '백제 문화유산의 진수'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무려 500여점에 달하는 국보급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고 19일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지난 14일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하던 중 1층 심주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가 무왕 재위 기해년(639년)에 조성했다는 기록이 담긴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사리장엄을 통해 그동안 창건시기와 내력이 삼국유사 등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전설'로 널리 전해져온 익산 미륵사가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무왕의 지원 아래 백제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확실히 규명됐다. 그동안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리장엄 발굴로 무왕 재위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확인됐다.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金製 舍利壺)와 석탑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 등 다양한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이중 금제사리호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여실히 입증해주는 병 모양의 사리호.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던 금제사리호는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여 있었다. X선으로 사리호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번 발굴에서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출신으로 추정할 수 있는 명문이 나와 설화로 널리 전파돼온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간 사랑'이 단지 '전설'로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향후 명문을 정확히 해석해봐야 하나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발견돼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백제 왕후를 백제 고관의 딸로 파악할 수 있는 것. '사택'은 당시 백제의 8대 성(姓) 중 하나다.

이처럼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유물은 매우 귀중한 금석문(金石文) 자료로 평가된다.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건무 청장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 출토됐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아울러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견이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서동요 의미 퇴색될 것 없다>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1.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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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일각 "가짜 단정 짓기에 이르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로 인해 서동요 자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의 명문이 미륵사는 "639년 좌평 사탁적덕(沙탁 < 宅에서 갓머리 없는 글자 > 積德)의 딸인 백제왕후가 세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경을 넘나든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미륵사 창건 설화는 모두 거짓일까.

서동요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데,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이 밤마다 선화공주가 서동 방을 드나든다는 '서동요'를 퍼뜨려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역시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 설화는 무왕이 왕후와 함께 용화산 못가를 걷고 있을 때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자 왕후가 큰 사찰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을 무왕이 들어줬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가짜라고 단정짓기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명문을 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명문은 오히려 '삼국유사'의 내용을 대부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무왕대(재위 600~641년)인 639년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점, 또 왕후가 절의 창건을 주도했다는 명문 내용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삼국유사라는 것 자체가 역사와 설화가 혼재된 기록물"이라며 "선화공주 부분은 틀리 수도 있지만 나머지 역사적 부분은 사리봉안기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미륵사지가 '3금당3탑'이라는 독특한 가람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삼국유사 내용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고 말하는데 미륵삼존이 바로 미륵사의 3가람 구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백제사를 전공한 노중국 계명대 교수는 "선화공주가 발원하여 세운 곳은 서탑이 아니라 바로 중원(中院 중앙목탑+금당)일 가능성이 있다"며 "절의 조성이 중원에서 시작해 서원과 동원으로 이어지는 등 시간차를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노 교수는 또 "무왕의 재위 연수가 41년인데다가 절이 완성된 639년 이듬해인 640년에 왕이 사망한 점에 비춰 사탁적덕의 딸이 선화공주에 이어 후비였을 가능성도 있다"며 "고구려의 경우는 왕비가 3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절을 발원한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라고 단정하기에는 현 시점에서 너무 이르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 가사문학의 대가인 임기중 동국대 교수는 아예 서동요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이유가 전혀없다는 입장이다.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을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며 "설화를 소재로 한 서동요의 선화공주 이야기는 사리봉안기 내용과 관계없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서동요는 그 본질이 허구성을 띤 설화"라며 "따라서 새삼 서동요가 허구라는 지적은 논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미륵사 유물과 설화로서의 서동요는 별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buff27@yna.co.kr (끝)
 
 
"서동요, 사실 아니다" 학계서 계속 제기
"당시 백제·신라 관계로 볼 때 가능성 희박"
김태훈 기자 scoop87@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백제 서동(薯童·훗날 30대 무왕·재위 600~641)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로맨스는 허구였을까.

미륵사지 석탑 보수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표현이 등장함에 따라 서동과 선화공주 두 사람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담은 향가 〈서동요(薯童謠)〉도 허구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사택씨는 백제의 8대 귀족에 속하는 유력한 집안이다.

〈서동요〉는 백제의 서동(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신라 26대 진평왕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실려 있다.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이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에 잠입한 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부르게 했다는 노래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남 몰래 시집가 놓고)/ 薯童房乙(맛둥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遺去如(밤에 몰래 안고 간다)'
진평왕은 이 노래를 전해 듣고 진노해 선화공주를 내쫓았으며 이에 서동이 그녀를 백제로 데려가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은 뒤 사자사(師子寺)로 가던 중 미륵삼존을 만나게 되고, 그 영험에 감복해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서동요와 미륵사 창건 연기(緣起) 설화 등은, 당시 신라와 백제 양국 관계로 미루어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주장이 일찌감치 제기돼 왔다. 18세기 실학자 안정복은 삼국유사에 소개된 서동설화에 대해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고, 본사(本史)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취하지 않는다"고 《동사강목》에 썼다. 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논문〈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1976)에서 이 이야기가 서기 493년 백제 동성왕이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설화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따라서 이번 발굴은 기왕에 있었던 서동설화 진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화공주의 '로맨스' 역사의 미궁속으로…
백제 미륵사지 유물 505점 발굴
'서동요'는 허구 가능성 높아져
익산=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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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왕자'로 알려진 백제 제30대 왕 무왕(武王·재위 600~641)과 신라 선화공주의 설화가 깃든 전북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佐平·백제 관등의 하나) 사택적덕(沙 積德)의 딸인 백제왕후에 의해 창건됐음이 19일 확인됐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서동요'가 전하는, 서동왕자(백제)·선화공주(신라)의 국경을 넘은 로맨스가 사실이었을까 의심하게 만든다. '서동요'는 백제의 서동(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신라 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향가다. 진평왕의 셋째 딸이 절색이라는 소문을 들은 서동이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에 잠입한 뒤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맛둥 도련님을…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어 삼국유사는 무왕·선화 커플이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1400년을 이어온 '그들의 로맨스'는 이번 주 월요일에 금이 갔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19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를 담은 용기)를 1370년 만에 발굴했다"며 현장에서 유물 505점을 공개한 것이다.
▲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금제사리 호. 높이 13cm 어 깨 폭 7.7cm로 아담 한 크기에 전체적으로 황 금빛이 감돈다. 뚜껑과 목, 바닥 은 연꽃 잎을, 몸체는 인동 당초 를 형상화했다. 우아하면서도 정밀한 세공기법을 자랑하는 이 사리호는 찬란했던 백제 후기 문화를 보여주는 국 보급 유물이다. 게재 된 사진의 높 이는 17cm. /문화재청 제공

김 소장은 "지난 14일 석탑 1층 심주(心柱·중심 기둥)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舍利孔·사리장엄을 안치하는 공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금으로 된 사리호(舍利壺·사리를 담은 병)와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金板)인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 원형 사리합 6개, 장식용 칼로 보이는 단도 2점, 은으로 된 관식(冠飾), 유리구슬 등 총 505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 등 전문가들은 "이 중 사리호와 사리봉안기는 국보 중의 국보"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리봉안기는 15.5㎝×10.5㎝ 크기의 금판에 한자 194자를 새겼는데, "백제 무왕의 왕후(사택씨의 딸)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절)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내용이다. 선화가 미륵사를 지었다고 쓴 일연은 삼국유사를 집필할 때 무슨 근거를 갖고 있었을까. 백제의 마지막 왕이자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은 선화공주의 아들인가, 사택씨의 손자인가.
 

 

서동요 설화 무너지나
금제사리봉안기 발견으로 서동요 존립 위태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는 결혼한 게 사실일까.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가 국경을 넘어 사랑했다는 내용의 서동요는 TV 드라마로 각색될 정도로 인기있는 사랑 이야기다. 삼국유사 제2권에 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밤이 되면 남몰래 서동 방을 드나든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학계를 중심으로 삼국 통일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백제의 왕과 신라의 왕이 사돈관계를 맺는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됐던 게 사실이다. 일단 고려후기 고승 일연(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삼국 통일 후 수백 년 뒤에 쓰여졌고, 통일을 이뤄낸 신라의 역사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 정사라기 보다는 고려시대 때 스님이 지은 야사인 설화풍인데다가 격전 중인 신라와 백제 사이에 결혼이 성립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혹이 이런 의심의 골자를 이루고 있었다. 이 같은 학계의 의심은 19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공개한 미륵사지 석탑내 ’금제사리봉안기’로 인해 한층 더 증폭될 전망이다.

조사 결과,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백제 말기 시대 상황에서 볼 때 적국인 신라의 공주가 무왕의 왕비가 될 수 있었을지에 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문서에 대한 판독 결과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의 딸인 것으로 나타난 점에 비춰 설화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백제 성왕(554년)이 신라군에 붙잡혀 살해당한 후 더욱 격하게 전개되는 백제-신라간 전투 상황에서 과연 양국간의 결혼이 가능하겠냐”는 말도 곁들였다.

물론 ’금제사리봉안기’에 적시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기에 서동요의 내용이 실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형국이다.
입력 : 2009.01.19 16:46

 

 

 

"서동요는 성행위 묘사 향가"
동국대 정우영 교수 주장
연합뉴스

 

삼국유사에 수록된 신라 향가 14수 중 하나인 서동요(薯童謠)는 여성 상위 성행위를 묘사한 가요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어학 전공인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정우영(鄭宇永.53) 교수는 16-17일 경북 안동 소수서원에서 열리는 2007년 여름 구결학회 제35회 전국학술대회 발표논문 ’서동요 해독의 두어 문제’에서 이 같은 견해를 밝혔다.

정 교수는 이 논문에서 신라 진평왕 딸인 선화공주(善化公主)가 밤마다 남몰래 ’안고 가는’ 물건으로 가사에 보이는 ’?’이라는 글자를 ’알’을 의미하는 ’卵’(란)이라는 글자의 이체자(異體字)로 해석하면서, 이 경우 알은 “불알”이라고 주장했다. 이체자란 모양은 다르지만 발음과 뜻이 같은 글자를 말한다.

그는 각 판본이나 연구자에 따라 극심한 견해 차이를 보이는 ’?’이라는 글자가 卵에 대한 이체자일 가능성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에 의하면 현재 관련 연구자와 일반에 가장 널리 통용되는 조선 중종 7년(1512) 경주부(慶州府) 발간 이른바 정덕본(正德本) 삼국유사에는 卵에 해당하는 이체자가 일부 마모되는 바람에 확실히 자형(字形)을 알 수 없으나 최근 공개된 조선 초기 삼국유사 판본에서는 글자가 완연하며, 나아가 같은 텍스트에 사용된 같은 글자의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卵의 다른 글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어 정 교수는 서동요가 이런 ’알’을 선화공주가 ’안는’(抱) 행위는 여성이 남성 위에 올라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암탉이 알을 품는 형상에 비유해 남녀간 성행위 장면을 묘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 교수는 서동요를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시집가 두고) 밤에 닭이 알을 품듯이 서동 서방의 불알을 안고 나서 궁궐로 돌아간다”는 정도로 해독할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입력 : 2007.08.16 15:33 / 수정 : 2007.08.16 16:33 

 

신라향가 서동요 '알'의 정체는?
연합뉴스
입력 : 2007.08.16 16:31

▲ 신라 향가 서동요가 여성 상위 성행위를 묘사한 가요라는 주장이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정우영 교수에 의해 제기됐다. 삼국유사는 선화공주가 밤에 안고 간 대상에 해당하는 글자(○)가 판본마다 다른데, 조선 중종 때 판본인 정덕본(왼쪽)에서는 이 글자가 확연치 않은 반면, 조선초기 고판본(오른쪽)은 분명히 나타난다. 정 교수는 이 글자를 卵으로 보고, 그 의미를 불알로 해석했다. /연합뉴스

 

<미륵사, 석탑 세운 639년 창건됐을까?>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1.27 07:03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에서 사찰 및 석탑 창건 내력을 담은 금판(金版)을 비롯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됨으로써 미륵사 창건을 둘러싼 새로운 사실이 해명되는 길을 열었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왕후(王后)가 자기 재산을 희사함으로써 세웠으며, 그 일환으로 기해년(己亥年.639) 1월29일에는 동ㆍ서탑 중 적어도 서탑을 세웠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리장엄구 일부로 출토된 금판 사리 봉안기에서는 "우리 백제왕후(我百濟王后)께서…깨끗한 재산을 희사하시어 가람을 세우시고, 기축년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고 맞아들이시니"(我百濟王后…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年, 正月卄九日, 奉迎舍利)라는 구절이 발견된다.

이를 근거로, 석탑뿐만 아니라 이를 포함한 미륵사라는 가람 전체도 이 무렵에 적어도 창건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실정이다. 나아가 이 때문에 종래 이보다 빠른 시기에 미륵사가 창건됐을 것으로 보던 일부 연구자는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 구절이 미륵사라는 사찰 자체의 창건시기를 639년으로 확정하는 근거일까? 이 구절을 세밀히 검토하면, 전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구절은 첫째, 백제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 둘째, 그것을 토대로 가람을 세운 일, 셋째, 기해년 정월에 사리를 석탑에 안치한 일의 세 가지 사건을 기술한다.

이 금판 어디에도 기해년 정월에 가람을 세웠다는 언급은 없다. 어느 때인가 백제왕후가 재산을 희사하고, 그것을 토대로 사찰을 창건한 다음에 기해년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리를 봉안한 사건을 시간 순서를 따라 차례로 기술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백제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과 사리를 봉안한 일이 결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 두 사건만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백제 왕후가 재산을 기부하고, 그런 다음에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비로소 탑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금판 사리봉안기는 사리를 봉안한 일이 639년에 있었지, 결코 백제왕후가 재산을 희사하거나, 가람을 만들기 시작한 시점이 이때라고 하지 않았다. 백제 불교사 전공인 길기태 국가기록원 박사는 미륵사 창건과 석탑 창건 시점을 달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 "사찰 창건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이 남은 고대 일본의 경우를 보아도, 사찰 창건과 탑 건축은 시기를 달리했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한 고대 일본의 사례로 법흥사(法興寺)가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법흥사는 숭준천황(崇峻天皇) 즉위 원년(588), 백제에서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오자, 이를 안치할 사찰로 법흥사를 건립키로 하고 같은 해에 "법흥사를 짓기 시작"(始作法興寺)하고, 2년 뒤인 590년에는 산에 들어가 사찰 건축에 소요되는 목재를 벌채했다.

이어 다시 2년 뒤인 숭준(崇峻) 5년(592) 10월에는 불당(佛堂)과 보랑(步廊.회랑) 공사를 시작하고, 이듬해인 추고천황(推古天皇) 원년(593)에 마침내 "불사리를 법흥사 찰주(刹柱) 심초석에 안치"했으며, 이를 거쳐 마침내 추고(推古) 4년(596) 11월에 모든 사찰 조성 사업이 대단원을 고하게 된다. 이에 대비할 때, 미륵사 또한 어느 때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왕후가 먼저 재산을 희사하고, 금당이나 회랑과 같은 건축물들을 먼저 세웠다가 639년 1월에 이르러 석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사탁씨' 출신인 백제왕후가 '희사한 재산'이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의 미륵사 부지를 포함하는 이 일대 토지가 포함됐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만큼, 무왕시대 사탁씨의 근거지 중 하나가 지금의 익산 일대일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됐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견은 그런 점에서 사비시대 백제사의 판도라 상자에 비유될 수 있다.
 
 
 
 
 
미륵사 금동사리항아리 열어보니…
 
 

더 작은 항아리… 그 안에 사리 12과

전북 익산시 미륵사 터 석탑(국보 11호)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항아리(높이 13cm) 안에 숨어 있던 작은 금제사리항아리(높이 5.9cm)가 공개됐다. 작은 금제사리항아리 안에서는 사리 12과(·사리를 세는 단위)도 나왔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일 “몸체를 위아래로 따로 제작한 이중구조인 금동사리항아리를 분리해 사리항아리 안에서 작은 금제사리항아리를 꺼냈다”며 “이 금제사리항아리는 금동사리항아리 발견 당시 X선 촬영으로 존재만 확인됐던 것”이라고 밝혔다.

1월 미륵사 터에서는 미륵사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인 백제 왕후가 창건한 사실이 담긴 금제사리봉안기() 등 국보급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본보 1월 20일자 A1·14면 참조

▶선화공주 미륵사 창건’ 사실 아니다


▶1370년만에 깨어난 ‘국보 중의 국보’


작은 금제사리항아리는 어자(·물고기 알)무늬나 연주(·구슬)무늬로 불리는 동글동글한 무늬가 표면에 촘촘히 새겨져 있으며 연꽃무늬, 세잎넝쿨무늬가 장식돼 있다. 국제적 수준의 백제 공예 기술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된 금동사리항아리와 거의 유사하다. 몸체는 위아래가 따로 제작됐다.

김봉건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이번에 나온 사리에 대해 “성분 분석을 하지 않았지만 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부처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로 여긴다”고 말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금동사리항아리 안에서 다량의 구슬과 성분이 확인되지 않은 유기질 분말도 발견했다고 밝혔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