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만에 열린 블랙박스 …
다시 써야 할 정조 시대 역사 [중앙일보]
적대파로 알려진 노론 심환지와 밀서 교환
군왕의 ‘비밀 편지’는 아침 녘에만 세 차례나 전해졌다. 하루에 네 번 보낸 일도 있었다. 서찰은 은밀하게 오갔다. 관복을 입지 않은 승정원 심부름꾼은 자유롭게 궁을 출입했다. 수신자의 관직이 높아지자 남의 눈을 의식해 양반집 노복(奴僕)이 밀서(密書)를 품고 궁을 오갔다. 이렇게 전달된 임금의 편지는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4년간 299통. 임금은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열사흘 뒤 숨을 거뒀다.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면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고위 관료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서간 299건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새롭게 발굴한 ‘정조 어찰첩(御札帖)’의 실물 일부를 공개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역사가 비켜간 ‘블랙박스’=이번에 공개된 정조 어찰은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보낸 것이라 이례적이다. 또 날짜별로 일괄 정리돼 공식 사료와 대조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다량의 서신을 정기적으로 받은 인물이 심환지라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조에게 가장 적대적인 당파로 알려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였다. 이는 왕조의 공식 사료인 『정조실록』 『승정원 일기』와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서신에서 정조는 편지를 태우거나 찢어버리라고 계속 말하지만 심환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서간을 통째로 보관해 뒀다. 심환지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간직한 이 방대한 자료는 200년 뒤 정조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역사의 ‘블랙박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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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면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고위 관료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게 보낸 서간 299건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9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새롭게 발굴한 ‘정조 어찰첩(御札帖)’의 실물 일부를 공개하고 학술대회를 열었다.
◆역사가 비켜간 ‘블랙박스’=이번에 공개된 정조 어찰은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보낸 것이라 이례적이다. 또 날짜별로 일괄 정리돼 공식 사료와 대조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다량의 서신을 정기적으로 받은 인물이 심환지라는 점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정조에게 가장 적대적인 당파로 알려진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였다. 이는 왕조의 공식 사료인 『정조실록』 『승정원 일기』와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전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서신에서 정조는 편지를 태우거나 찢어버리라고 계속 말하지만 심환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서간을 통째로 보관해 뒀다. 심환지가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간직한 이 방대한 자료는 200년 뒤 정조와 그의 시대를 들여다볼 역사의 ‘블랙박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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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집요한 ‘서신 정치’=정조는 ‘서신 정치’를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개혁파 영수였던 남인의 채제공(1720~1799)에게도 개인 서신을 다수 보냈다. 이런 비밀 편지를 통해 공식 사료에선 알 수 없었던 정치 이면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먼저 노론 벽파와 심환지에 대한 재평가다. 지금까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최대 적대 세력으로 평가돼 왔다. 하지만 정조가 수년에 걸쳐 은밀하게 심환지를 통해 ‘대리인 정치’를 했을 가능성이 이번 서신에서 제기된다. 벽파는 정조가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국정 파트너’였고, 심환지는 정조의 ‘복심’을 펼치는 최측근 신료였을 거란 해석이다. 예컨대 1798년 7월 14일, 정조는 심환지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8월 28일에는 우의정에 임명했다. 우의정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심환지는 궁을 떠나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며 예조판서를 그만두는 사직소를 세 차례나 올린다. 공식 사료에는 이런 인사 발령 사항만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서 드러난 사실은 사직소를 올리는 횟수와 시기까지 정조가 지시했다는 것이다. 금강산 유람도 정조의 권유였다. 심환지를 우의정으로 삼아 국정운영을 하고자 하는 국왕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종의 정치적 속임수를 쓴 것이다. 공식 사료에는 심환지가 올린 것으로 돼 있는 상소문이 정조가 사전에 편지로 알려 준 문구 그대로 돼 있는 경우도 있다. 국왕이 의지를 직접 펴기 곤란할 때 측근의 신하를 통해 뜻을 펼친 것이다. 이날 토론에 참여한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이 서신만을 놓고 정조를 ‘벽파의 후견인’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곤란하다”며 “정조는 다른 당파에도 비슷한 ‘서신 정치’를 했을 것이며 이것들이 발굴돼야 종합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정조 독살설의 진실은?=정조는 1800년 6월 초 등창 때문에 앓기 시작해 20여 일 만에 급서했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현대 사극이나 작가들의 단순한 추리만은 아니다. 정조 사후에 남인 측이 제기하던 의혹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 강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는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 나온 내용을 더듬어볼 때 ‘독살설’은 단순한 ‘음모론’일 가능성이 커졌다. 정조는 수년에 걸쳐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렸다.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중략)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1800년 6월 15일)고 호소한다. 국왕의 병세는 국가의 일급기밀에 해당한다. 심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찰을 분석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서찰이 ‘독살설이 잘못됐다’고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환지가 음모에 관여됐다는 의혹은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시대 재해석 필요=이번 서신 공개로 인해 그간 공식적 사료에 의한 정조 시대 해석에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의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된다. 단국대 김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정조의 이면’이나 당시 정치의 ‘뒷모습’을 읽고 충격받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이 발굴을 ‘엄청난 선물이자 동시에 커다란 과제’라는 말로 표현한다. 300편에 이르는 정조 자신의 목소리를 공식 사료와 하나씩 대조해 가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 어찰 299편을 영인·탈초·번역하고 그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을 다음 달 중 발간할 계획이다. 이번 작업에는 한국고전번역원도 함께했다. 정조 어찰첩은 원래 심환지 가문에서 보관돼 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의 소장자는 심씨 가문과 무관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 공개를 꺼리는 이 소장자는 조만간 정조 어찰첩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기탁할 것이라고 전했다. 배노필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정조 독살설의 진실은?=정조는 1800년 6월 초 등창 때문에 앓기 시작해 20여 일 만에 급서했다. ‘독살설’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현대 사극이나 작가들의 단순한 추리만은 아니다. 정조 사후에 남인 측이 제기하던 의혹이기도 했다. 특히 보수 강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에게는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하지만 이번 서찰에 나온 내용을 더듬어볼 때 ‘독살설’은 단순한 ‘음모론’일 가능성이 커졌다. 정조는 수년에 걸쳐 심환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렸다.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져 그동안 차가운 약제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중략)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고생스럽다”(1800년 6월 15일)고 호소한다. 국왕의 병세는 국가의 일급기밀에 해당한다. 심환지에 대한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서찰을 분석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서찰이 ‘독살설이 잘못됐다’고 결정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심환지가 음모에 관여됐다는 의혹은 벗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시대 재해석 필요=이번 서신 공개로 인해 그간 공식적 사료에 의한 정조 시대 해석에 상당 부분 수정이 가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조가 화성 건설에 몰두하던 1795년 이후 심환지의 벽파 세력이 왜 약진했는지에 대한 해명이 된다. 단국대 김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정조의 이면’이나 당시 정치의 ‘뒷모습’을 읽고 충격받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는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알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이 발굴을 ‘엄청난 선물이자 동시에 커다란 과제’라는 말로 표현한다. 300편에 이르는 정조 자신의 목소리를 공식 사료와 하나씩 대조해 가며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정조 어찰 299편을 영인·탈초·번역하고 그 연구 결과를 담은 책을 다음 달 중 발간할 계획이다. 이번 작업에는 한국고전번역원도 함께했다. 정조 어찰첩은 원래 심환지 가문에서 보관돼 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의 소장자는 심씨 가문과 무관한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상 공개를 꺼리는 이 소장자는 조만간 정조 어찰첩을 공신력 있는 기관에 기탁할 것이라고 전했다. 배노필 기자
여론에 귀 열어놨지만 혼자 모든 걸 다 하려는 의욕 보여
어찰 처음 보고 '악'소리… 인간적 내면 들춰낸 귀중한 사료
國政 논의 위한 비밀편지라 정제되지 않은 표현 많아
![](http://image.chosun.com/cs/200708/images/author_icon.gif)
- ▲ 안대회 교수는“정조는 며칠 밤을 새울 만큼 일에 미친 워커홀릭이었 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정조가 '호로자식' '주둥아리' '젖비린내나는 놈' 같은 직설적 어휘를 썼다는 사실에 당혹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 ▲ 정조가 심환지 아들이 과거에 불합격한 것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편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제공
―"경은 나를 까맣게 잊었는가" "(채제공이 죽은 뒤) 밤마다 방안을 맴돈다"는 식의 애절한 표현도 나온다. 정적을 끌어안기 위한 군주의 노회함으로 봐야 하는가?
"심환지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외사촌 홍취영(洪就榮)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리움을 담은 대목이 있다. 정조는 다정다감하고 인간미 넘치는 군주였다. 이런 편지를 받는 사람은 정말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를 언제 처음 봤나?
"2006년 가을 수도권의 한 수집가가 정조 어찰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너무 놀라서 숨을 쉴 수 없었다. 고급 종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왕이 썼을 것으로 믿기지 않는 저급 종이인 피지(皮紙)까지 있었다.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니까,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개해달라고 부탁해서 1년 전부터 탈초(脫草)와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편지를 번역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정조와 심환지, 두 사람만 아는 내용이 많아 맥락을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예컨대 이서구의 이름을 '서(書)'라고 줄여 쓰는 식이어서 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을 뒤져야 겨우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정조어찰첩'의 탈초와 초벌 번역은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의 장유승·백승호씨가 맡았고, 최병준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과 고문서전문가 박철상씨가 교열을 봤다. 번역은 안 교수와 이상하 한국고전번역원 교수와 김문식 단국대 교수가 했다.
―정조 어찰이 다른 선비들의 간찰과 다른 점은 뭔가?
"비밀편지라는 점이다. 사대부의 편지는 학문적 토론을 많이 담고 있어서 서로 돌려보는 경우가 많다. 이런 편지들이 대개 문집에 실린다. 편지는 산문의 한 장르로 문학적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지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조의 편지는 좋은 글을 쓴다는 생각보다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컸다. 정조는 평소 쓰던 문체를 기본 삼아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간에 쫓겨 거칠게 쓴 것도 많다."
―정조가 편지를 꾸미지 않고 거칠게 썼기 때문에 도리어 그의 기질과 당대 사정을 더 속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다.
"연구자들에겐 좋은 자료다. 정조가 속어나 속담을 많이 쓰고 있는데, 그가 공격한 소품(小品)문학의 스타일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정조의 비밀편지를 보면서 그가 문체반정을 일으킨 진정한 의도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조는 1792년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사대부들이 중국의 패관소설류를 선호하는 것을 비판하고, 당송팔대가 같은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폈다.
―정조 편지의 특징으로 한글 발음 그대로 한자를 옮긴 사례를 들었다. '눈코 뜰 새 없다'를 '眼鼻莫開(안비막개)', '모쪼록'을 '某條(모조)'로 쓰는 식이다. 다른 편지도 그런가?
"당시 편지와 산문에서 그런 표현들이 종종 나온다. 18세기 문인들은 우리말 속담을 한문으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트렌드였다. 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이 그랬다. 이번에 공개된 비밀편지는 정조가 당시 문풍(文風)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조가 일으킨 '문체반정'의 대표적 표적이 박지원인데, 정조가 연암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임금이 '뒤죽박죽' 같은 한글을 섞어 편지를 썼다는 게 이채롭다.
"한문으로 쓴 어찰 가운데 한글이 섞인 것은 처음 봤다. 임금이 한글로 쓴 편지는 더러 있다. 사대부의 한문 편지 중에는 가끔 한글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뒤죽박죽이라는 표현은 한자로도 쓸 수 있으나, 그럴 경우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정조 어찰 가운데 한글을 섞어 쓴 편지로는, 평안도 관찰사 후보를 거론하면서 그 사람이 '만조하다'는 대목이 있다. 얼굴이나 모습이 초라하다는 우리말인데, 관찰사감이 아니라는 얘기다."
―껄껄·츳츳 같은 감탄사를 쓰고, '입이 시궁창처럼 더럽다'거나 '개에 물린 꿩 신세'같은 속담·속어를 쓰고 있다.
"사대부들도 그런 표현을 꽤 썼다. 그렇게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상대편의 심리를 장악하고 자기 의도대로 이끌어가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국왕이 요즘 우리도 많이 쓰는 표현을 썼다는 게 재미있다."
―편지를 통해 본 정조는 어떤 사람인가.
"정조 어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는 여론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정조는 여론 동향에 늘 눈과 귀를 열어놓았다. 국왕으로서의 책임의식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 모든 것을 다 하려는 의욕이 컸다. 의욕이 과하다 보니 거친 표현이 나온 게 아닐까. 정조는 학문이 대단히 뛰어나 신하들을 가르쳤고, 신하들보다 한 수 위에서 개혁을 이끌어나가는 군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찰첩을 통해 그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는다거나 화가 나서 밤을 새우고 새벽까지 편지를 썼다는 내용도 있다. 정조 스스로 자신을 '불 같은 기질'이라고 표현했다.
"정조는 박식하고 차분한 선비형 군주라고 알았다. 그러나 이번 편지를 보니 격정적인 로맨티스트였다. 일에 미친 워커홀릭이라는 느낌도 받는다. 농서(農書)를 올리라는 글을 내리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워 직접 쓰는 식이다. 그러다 정치가 마음에 안 들면 울화통이 터져 화기(火氣)가 치솟고…."
안대회 교수는…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한국 고전문학계의 소문난 글쟁이다. 18~19세기 문인들의 시와 산문을 쉽고 아름답게 소개해 우리 고전문학이 낡고 고루한 게 아니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박제가의 '북학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한글로 옮겼고, 18~19세기 문인 23명의 글을 옮긴 '고전산문산책'을 냈다. '조선의 프로페셔널'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조선 후기가 새로운 지식과 감각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시대였다는 것을 보여준 베스트셀러다. 연세대에서 조선 후기 한시(漢詩)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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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어찰첩을 공개한 주역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이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