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종 황제의 국새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던 고종 황제의 국새(國璽)를 100년 만에 되찾았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고종이 1903년 이후 러시아·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보낸 친서(親書)에 사용한 '황제어새(皇帝御璽)'를 지난해 12월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다"며 공개했다.
고종의 국새는 외함(보록)은 분실됐고 내함(보통·寶筒)만 남아 있으며, 높이 4.8㎝,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보뉴·寶紐)는 거북이 모양이고, 붉은 비단실로 짜인 끈(보수·寶綬)이 달려 있다. 한 변이 5.3㎝인 정사각형 인장면(印章面)에는 '皇帝御璽(황제어새)'라고 돋을새김(양각)돼 있다. 조선왕조 500여년간 수많은 국새를 사용했지만 실제 사용한 국새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러·이(伊)에 도움 요청하는 친서에 찍어
고종황제 국새 '황제어새' 발견
1901~1903년 제작된 듯 국새 13개중 3개만 찾아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17일 공개한 '황제어새(皇帝御璽)'는 조선왕조의 임금 혹은 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것이 확인된 유일한 국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고종의 다른 국새 3개가 소장돼 있지만, 이들이 실제 사용된 문건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 확인된 고종의 국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으며, 박물관은 작년 12월 유물을 구입한 이후 3개월간 조사한 끝에 사진 속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901~1903년 사이에 제작
"가까운 시일 내에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는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 국력은 이에 못 미치므로, 이 전쟁을 예방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전적으로 중립에 설 것입니다. 폐하께 이 사실을 낱낱이 적으니 서로 상조하여 깊은 배려를 해 줄 것을 바랍니다. 광무 7년 11월. 폐하의 좋은 형제."
고종 황제는 1903년 친서를 작성한 후 국새를 찍어 이탈리아 황제 앞으로 보냈다. 이번에 확인된 '황제어새(皇帝御璽)'가 바로 여기에 찍혀있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 황제의 절박한 심정이 묻어난다.
이번에 확인된 고종의 국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으며, 박물관은 작년 12월 유물을 구입한 이후 3개월간 조사한 끝에 사진 속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901~1903년 사이에 제작
"가까운 시일 내에 극동 만주지역에서 러일전쟁이 일어나려는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는 휘말리게 됩니다. 우리 국력은 이에 못 미치므로, 이 전쟁을 예방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전적으로 중립에 설 것입니다. 폐하께 이 사실을 낱낱이 적으니 서로 상조하여 깊은 배려를 해 줄 것을 바랍니다. 광무 7년 11월. 폐하의 좋은 형제."
고종 황제는 1903년 친서를 작성한 후 국새를 찍어 이탈리아 황제 앞으로 보냈다. 이번에 확인된 '황제어새(皇帝御璽)'가 바로 여기에 찍혀있다. 국운이 기울어가는 위급한 상황에서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 황제의 절박한 심정이 묻어난다.
- ▲ 고종 황제가 외국 정상들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한 국새인‘황제어새’./문화재청 제공
- ▲ 광무 7년(1903)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의 말미에‘황제어새’가 찍혀 있는 모습이다./문화재청 제공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주로 친서에 사용된 것으로 보아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이 직접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고종의 친서에 사용된 '황제어새'는 두 종류다. 이번에 확인된 것은 제1형으로, 글자가 둥글고 부드러운 느낌이 특징이다. 1903년 이탈리아 황제와 1904~1905년 러시아 황제에 보낸 친서에 사용됐다.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한 제2형은 1905~1906년에 독일 황제와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확인된다.
특이하게도 국새의 글씨 '황제어새' 중 '황(皇)'자는 '백(白)'자의 아래에 '왕(王)'자를 둔 것이 아니라 가로획이 하나 더 있는 '자(自)+왕(王)'으로 표기돼 있다. 이 청장은 "고종 친필의 비석이나 당시 제작된 각종 어보(御寶)나 의궤(儀軌)에도 '황'자가 모두 이렇게 표기돼 있다"고 말했다.
국새의 성분 분석 결과, 거북이 모양 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대 18, 몸체(보신·寶身)는 57대 41의 비율이어서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그 많던 국새는 다 어디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 혹은 황제가 수많은 국새를 만들어 사용했는데도 대한제국 이전의 국새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여러 차례 왕궁의 화재로 소실된 데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관리 소홀을 틈타 빼앗기거나 분실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례의궤》에 전하는 고종의 국새들도 1910년 일제가 나라를 합병하면서 강탈해 갔던 것을 광복 후 돌려받았으나, 6·25 전란 통에 분실했다가 3개만 되찾았다.
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고종의 손때가 묻은 국새를 100년 만에 되찾은 만큼 곧바로 국보 지정 절차를 밟겠다"며 "빠른 시일 내에 일반에 공개하고, 덕수궁 석조전의 대한제국실이 복원되면 전시에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국새는 국사(國事) 결재용… 어보는 종묘 안치 의례용
조선왕조 국왕의 도장은 국사(國事)에 직접 사용하는 국새(國璽)와 의례용인 어보(御寶)로 구분된다.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의 징표로 사용됐다. 국새는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등으로 명칭이 다양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일반적으로 국새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보관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황제어새'는 고종이 직접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만큼 당시 정치적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된 '의례용' 도장이다. 왕이나 왕비의 존호·시호·휘호 등을 새겼는데, 국새에 비해 크기가 크고 조각선의 정교함이 떨어진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320여개가 남아 있다.
조선왕조 국왕의 도장은 국사(國事)에 직접 사용하는 국새(國璽)와 의례용인 어보(御寶)로 구분된다.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의 징표로 사용됐다. 국새는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등으로 명칭이 다양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일반적으로 국새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보관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황제어새'는 고종이 직접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만큼 당시 정치적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된 '의례용' 도장이다. 왕이나 왕비의 존호·시호·휘호 등을 새겼는데, 국새에 비해 크기가 크고 조각선의 정교함이 떨어진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320여개가 남아 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은 친서를 독일황제 앞으로 보냈다.
“짐은 대덕국(大德國.독일)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께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종의 절절한 위기감이 묻어난다.
“짐은 대덕국(大德國.독일)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께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종의 절절한 위기감이 묻어난다.
이 친서는 희한하게도 두 종류가 전한다. 하나는 초고본인데, 실물은 행방이 묘연하고 그것을 찍은 사진만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유리원판에 남아있다.
이 초고를 토대로 고종황제는 일부 문구를 손질해 독일황제에게 친서를 발송했다. 이 최종 완성본 고종의 친서는 현재 독일에 소장돼 있으며, 최근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원본을 촬영해 왔다.
이 두 종류의 친서에는 모두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국새가 찍혀있다. 이를 감정한 한국서예사 연구자이자 인장 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는 “두 국새는 같은 종류”라고 말했다.
고종황제가 독일황제를 비롯한 외국 군주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국새가 찍힌 것으로는 현재까지 10여 통이 발견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 친서들에 사용한 국새를 판별한 결과 2종류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것을 박물관은 ’제1 국새’와 ’제2 국새’라는 명칭을 부여해 구별했다. 이 두 국새에는 모두 ’황제어새’라는 문구를 새겼다.
독일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은 ’제2 국새’에 속한다. 하지만 이 제2 국새는 아직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궁박물관이 지난해 12월 해외에서 구입한 고종황제의 국새는 ’제1 국새’에 속한다.
이 ’제1 국새’가 사용된 고종황제의 문서로는 현재까지 이탈리아 군주에게 보낸 친서(1903.11) 1통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1904년 9월자와 같은 해 11월자 및 이듬해 4월자 친서 3통, 그리고 영국인 허치슨(Hutchison)에게 무슨 일을 재가한 문서(1906.10)가 파악됐다.
이번에 확보된 제1 국새는 물론이고 아직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제2 국새는 기존 문헌에는 보고가 되지 않는 고종황제의 도장이다.
제1 국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에 그 실물 사진 몇 장이 남아 있어 국새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제1 국새는 그것을 보관하던 전체 상자인 외함은 소실되고 없으며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이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다.
이는 이 국새가 고종이 언제건 실무에 사용할 수 있게끔 제작한 ’휴대용 국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조선의 임금이 사용한 ’국새’(國璽) 실물이 처음으로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임금의 도장은 보통 국새 혹은 어보(御寶)라 칭한다.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도장은 어보가 아닌 국새다.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이라는 차이를 갖고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국새도 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보낸 서찰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금의 도장은 보통 국새 혹은 어보(御寶)라 칭한다.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도장은 어보가 아닌 국새다.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이라는 차이를 갖고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국새도 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보낸 서찰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의 임금들이 문서에 도장을 찍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국새의 활용도는 매우 높았다.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상서원’이라는 관청에서 보관했다.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 또는 국가 권력 이양의 징표로서 사용됐다. 도장에는 성격에 따라 ’조선왕보’(朝鮮王寶),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어새’(皇帝御璽), ’시명지보’(施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라는 글씨를 새겼다.
손잡이의 형태는 거북이나 용모양이고,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금과 은의 성분은 41:57. 무게는 실무용이기 때문에 높이 4.6㎝, 무게 794g이었다.
반면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이기 때문에 왕이 생전에 사용한 도장은 아니다.
의례용으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별다른 별칭도 없으며 상서원이 아닌 종묘 신실에 보관됐다. 또한 왕실의 영원한 대를 이어간다는 영속성을 담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도장에는 왕이나 왕비의 존호(尊號), 시호(諡號), 휘호(徽號) 등을 새겼다.
손잡이의 형태는 용이나 거북을 사용했으며 실제로 왕이 사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할 정도로 매우 컸다. 주요성분은 금 대신 구리와 은을 54:23으로 혼합했다. 국새에 비해 크기가 커 조각선이 굵고 덜 정교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국새는 주로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어보가 아닌 국새”라며 “국새는 공문서에 사용할 때 ’대한국새’ 혹은 ’황제지보’ 등으로 불리웠고, 친서에 사용할 때는 ’황제어새’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등 사용처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어보는 어보로만 불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국새에 ’황제어새’라는 글씨가 새겨진 점으로 미뤄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래 국새는 상서원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고종 재위 13년째인 1876년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이 화재로 소실됐다. 이 화재로 이곳에 보관하던 국새(國璽)와 같은 ’임금님 도장’ 또한 대부분 소실되거나 손상됐다.
이에 고종은 나흘 뒤에 “화재로 소실한 옥새(玉璽)와 인장(印章)을 새로 만들도록 하라 ”는 지시와 내린다. 이때 고종은 옥새와 인장을 “다시 주조하고 만들되 수리하는 일은 본소(本所. 무위소 武衛所 )와 호조(戶曹)에서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첨부했다.
보인(寶印) 즉, 임금이 사용하는 각종 도장은 원래 호조에서 제작을 담당했으나, 고종은 재위 11년(1874)에 이르러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이 일을 자신이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武衛所)에 맡겼던 것이다.
교태전 화재와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보인 제작의 상세한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라는 기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보인은 그 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 만든 ’임금님 도장’을 보인소의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에 고종은 나흘 뒤에 “화재로 소실한 옥새(玉璽)와 인장(印章)을 새로 만들도록 하라 ”는 지시와 내린다. 이때 고종은 옥새와 인장을 “다시 주조하고 만들되 수리하는 일은 본소(本所. 무위소 武衛所 )와 호조(戶曹)에서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첨부했다.
보인(寶印) 즉, 임금이 사용하는 각종 도장은 원래 호조에서 제작을 담당했으나, 고종은 재위 11년(1874)에 이르러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이 일을 자신이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武衛所)에 맡겼던 것이다.
교태전 화재와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보인 제작의 상세한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라는 기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보인은 그 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 만든 ’임금님 도장’을 보인소의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보(大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궁옥인(世子宮玉印) ▲조선왕보(朝鮮王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이덕보(以德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무위소(武衛所).
이때는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이었으므로 황제가 아닌 ’조선왕’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각종 도장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고종은 1897년에 이르러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가 사용하는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새로 제작한 ’황제 도장’은 모두 13과였음이 그의 황제 즉위과정을 파노라마처럼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1897)라는 문헌에 보인다.
그 13과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이었다.
이 중 고종황제가 외국 원수에게 친서 등을 보낼 때 직접 사용한 국새는 대한국새와 황제지새, 황제지보 등 3과였으며, 나머지는 황제가 국내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통수권을 행사할 때 사용한 도장이었다.
고종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신분이 ’조선왕’이건 대한제국 ’황제’건 관계없이 조선시대 군주는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많은 국새를 제작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기간에 27명의 왕이 사용한 국새는 그 정확한 통계수치는 없지만 엄청나게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지금까지 조선시대 국새는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관련해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상설전시품으로 내놓은 ’임금님 도장’은 도대체 뭐냐는 의문을 표시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도장들은 ’어보’(御寶)라고 해서 종묘의 신실(神室), 즉, 각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공간에 안치한 의례용 도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어보는 실무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어보 무게가 대체로 4㎏ 안팎에 이르는 대형인 까닭은 이런 비실용성에 기인한다.
그 많던 국새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의문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혹여 각 왕릉에 매장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다만 고종의 국새가 어디로 갔는지는 그 단서를 포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순종실록 1910년 3월3일(양력)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차관(次官)인 고미야 사보마쓰(小宮三保松)라는 사람이 “옛 국새(國璽)와 보새(寶璽)를 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이 순종실록은 대한국새 1과, 황제지세 1과, 대원수보(大元帥) 1과, 제고지보 1과, 칙명지보 1과, 칙령지보(勅令之寶) 1과로 적었다.
이 국새들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때문에 국새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심지어 고종의 잃어버린 국새 찾기를 소재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고종황제의 국새를 입수한 것이다.
박물관은 그 입수 경로를 해외문화재 환수 일환이라고만 밝히고 그 자세한 사정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지난해 12월 재미교포에게서 구입하고 지금까지 약 3개월 동안 그 진위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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