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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고비사막에 로마군단의 후예들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3:58

 

[e칼럼] 중국 고비사막에 로마군단의 후예들-상 [조인스]

DNA로 풀어보는 고대 미스터리 <9>

 

“딸이 태어나서 조금 지나자 금발이었어요. 노랑머리를 자르고 나면 검은 머리가 날것이라고 기대했죠. 그런데 3개월이 지났는데도 다시 금발이었어요. 다시 한번 더 잘랐지요. 그러나 역시 다시 금발이었어요. 어른이 돼서도 금발이 되겠죠.”이 곳 주민들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를 위해 찾아간 한 학자에게 금발머리의 딸을 둔 한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다. 중국 북서부 고비사막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간쑤성 리치앤이라는 마을은 도심지에서 무려 3백20km나 떨어진 오지 가운데 오지다. 그러나 이곳 마을 주민들은 일반 중국인들과 달리 푸른 눈과 큰 코, 그리고 금발 머리를 갖고 있다.

‘잃어버린 로마군단의 도시’ 확인 돼

중국 고비사막 북부지역 간쑤성에 사는 로마인의 후예. 눈이 파랗고 코가 큰 것으로 보아 유럽인의 피가 섞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005년 한 고고학자가 중국에 로마인들이 사는 도시가 있다고 주장이 외신을 타고 흘러나왔다. 역사가들의 관심이 집중되자 일부 서양학자들은 성급한 판단을 내렸다. 로마제국의 세력이 비단 지중해 주변국가와 유럽남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다.

몽고 징기스칸에 의해 유린돼 자존심이 구겨 있던 유럽과 서양 역사가들은 로마가 한 때 중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을 통해 자존심을 만회해 보겠다는 야심에 찬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 학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세계를 호령했던 천년 로마의 후예들이 중국에까지 이주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주 척박한 고비사막의 오지에 자리를 틀어 무려 2천년 넘게 살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중국을 침략한 의기양양한 로마제국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싸움에 패해 이고 저곳으로 도망가고, 헤매다가 결국 황량한 모래바람이 가실 날이 없는 고비사막에 터전을 마련한 로마의 패잔병들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과학자들은 이 마을 주민들이 로마제국의 후예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역사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53년 로마 황실 군단의 병사들이 파르티아 왕국(이란, 이라크)과 전쟁 후 패해 도주하다가 중국군사들에 의해 포로로 잡힌 뒤 이 마을에 정착해 살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우선 로마인 정착에 대한 역사기록이 있고 둘째로 이 지역에 로마도시가 있었고. 셋째로 서양인처럼 생긴 주민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싸움에 져서 도주하던 로마 패잔병들의 정착지

과학자들은 이런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주민들 가운데 특히 유럽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혈액 샘플을 채취한 뒤 DNA 검사를 실시했다. 이 결과 이곳 사람들의 유전자 배열(염기서열)이 유럽인들과 비슷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을 주민들은 유전자 검사에 대한 결론이 나오기도 전에 로마인의 후예라고 믿기 시작했고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학자는 물론 주민들 사이에서도 진위 논쟁이 벌어지면서 마을 전체가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라진 미스터리 로마군단의 후예들’이 어떻게 해서 고비사막에 로마도시를 건설해 지금까지 2천여 년이 넘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잠시 접고 간단하지만 인종이란 무엇이며 인종과 DNA, 또는 유전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조그만 살펴보자.

인종은 보통 6가지로 분류해

인간게놈프로젝트(HGP)를 통해 사람의 유전자 비밀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인종 유전자도 발견됐다.
우리는 인종을 백인, 황인, 흑인종으로 구분하는데 익숙하다. 백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 즉 황인종과 흑인종을 유색인종이라고 부르는데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편견이 깔려 있다. 피부색은 멜라닌 색소에 의해 결정된다. 전통적인 구분법이지만 종(種)을 구분하는 방법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종의 구분은 원래 생물학적 근거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서 인종간의 DNA 유사성을 바탕으로 구분하는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피부색이 유전되는 것은 확실하다. 유전적 요소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현재 66억6천7백만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들은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나누어져 있다. 인종은 체질이나 유전적인 신체의 특징에 따라 구분된 것으로 그 분류방법은 형태적, 계측적,기준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형태적 기준은 피부의 빛깔 (백, 황, 흑), 머리털의 형태와 빛깔, 눈빛 (청, 흑, 회색), 그리고 생김새로 판단한다. ▲계측적 기준은 키, 머리모양, 코의 생김새에 따르며 혈액형이나 지문에 의해서도 구분한다. 또 ▲안면계수기준(Facial Index)이 있다. 이마넓이, 미간거리, 인중의 거리 등 얼굴형태를 갖고 분류하며 ▲편두지수기준(Cranial Index)으로 두개골형태에 따라 분류한다.

그러나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각 인종간에 혼혈이 많기 때문에 엄밀히 분류하기에 곤란한 점이 많다. 다만 고대 인류사를 연구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현재 세계의 인종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말레이 등 5대 인종으로 구별하고 있다. 그들의 주요 분포지역과 인종적 특징을 중심으로 분류한 구분이다.

백인을 통칭하는 코카시안(남부 러시아)이 있다. 이 지역에서 백인종이 유래됐다. 황인종을 대표하는 몽골리안, 그리고 흑인을 아우르는 니그로(Negro)가 있다. 또한 아메리카 인디언을 지칭하는 브라운(Brown),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구가의 말레이(Malay) 인종이 있으며 하와이, 뉴기니아, 서사모아, 괌도 등 태평양 도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안(Polynesian)이 있다.

인간게놈 프로젝트, “인종을 구분할 수 있는 유전자 있다”

DNA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해 생명과학발전의 단초를 마련한 제임스 왓슨이 흑인 비하발언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인간게놈 프로젝트 일환으로 진행된 DNA 분석 결과 인류는 공통된 특성을 갖는 5개 인종 집단으로 분류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또 이들 인종 집단의 지리적 기원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멜라네시아(호주 동북부의 태평양 도서 지역), 아메리카 등 5개 지역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계 52개 인간 그룹에 속하는 1천여 명의 혈액 샘플을 추출해서 범죄수사에 사용되는 DNA 지문조사법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소속 인종 집단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DNA에 따라 지리적 5대 인종구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미국 예일 대학 연구팀이 진행한 이 연구는 질병의 유형과 인종에 역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조상 계보를 알게 되면 의사가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질병은 인종적인 편향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돌연변이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겸상 적혈구성 빈혈증’은 아프리카 계통의 미국인(미국 흑인)에게서 많이 일어 나고 ‘혈색소증’은 스웨덴인에게 많다는 연구 따위다. 그러나 DNA를 통한 이러한 연구결과가 인종적 차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난이 많다. 2000년 인간 유전자 지도가 완성된 뒤 인종 간 차이점에 관한 연구가 진척됐다. 황인종이 땀을 적게 흘리고 서아프리카인이 풍토병에 잘 걸리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유전자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를 토대로 소위 맞춤형 의약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제임스 왓슨, “흑인은 유전적으로 지능이 낮다”

그러나 최근 인종 간 차이점을 이념적으로 악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한 블로그에서 지능이 높은 인간에게 발견되는 유전자가 흑인에게는 없다는 주장이 나와 물의를 일으켰다. 뿐만이 아니다. 생명과학의 단초라고 할 수 있는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해 노벨상을 받은 영국의 제임스 왓슨 박사는 공개적인 석상에서 “흑인은 유전적으로 지능이 낮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물론 흑인을 비하하기 위한 의도적인 발언은 아니라고 해명했고 공식 사과했지만 예정된 강연이 취소되는 등 온갖 불명예와 비난을 받았다. 20세기를 대표한 학자로 평가 받는 그는 인종주의자로 내몰릴 판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비밀은 DNA유전자 속에 꽈배기처럼 얽혀 있는 염기서열 속에 있다. 이를 통해 잔혹한 범인을 잡아 요절내는 것이 바로 요즘 안방극장을 차지하고 있는 CSI드라마다. 다시 말해서 사람마다 다 다른 DNA지문을 이용한 과학수사다.

이 DNA지문은 조상을 찾아내고, 친척을 찾아낸다. 또한 자유연애와 불륜(不倫)이 기승을 부리는 현대사회에서 친자확인 소송에도 이용된다. 심지어 DNA를 통해 연쇄살인범의 유전자도 추적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렇다면 중국 고비사막 오지에 사는 로마군단의 후예들이 정말로 로마제국의 피를 이어받은 로마인이었는지를 가려내는 일은 DNA과학으로 볼 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 다음 칼럼에 계속됩니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e칼럼] 중국 고비사막에 로마군단의 후예들-하 [조인스]

DNA로 풀어보는 고대 미스터리 <10>

 

사실 고비사막 간쑤성에 로마군 패잔병이 산다는 것은 기록에 관해서라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고전에도 언급돼 있다. 중국의 최고의 고대역사로 꼽히는 후한서 등에 따르면 한나라 원제의 명령으로 서역 지방 개척에 나섰던 서역 부도호 천탕(陳湯)이 기원전 36년 골칫거리이던 흉노를 대파시키는 가운데 머리가 노랗고, 코가 우뚝한 이상한 모습의 병사 1천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흉노와는 전혀 달랐다.

흉노족 밑에서 용병으로 살아

자신들을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해 온 리첸 농민들이 로마군사 복장을 한 채 관광객을 맞이 하고 있다.
후한서는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 ‘25사(史)’ 가운데에서 사마천의 (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히는 역사서다. 또한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사서다.

천탕 장군은 집단부락을 만들어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이름을 중국어로 로마를 뜻하는‘리첸(驪 革+干, 영어로는 Liquian)’현이라고 붙였다. 이곳 거주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의 포위망을 뚫었으나 다시는 서쪽 로마로 가지 못하고 추적을 피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해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로 옮겨왔다. 결국 이들이 흉노에 의지하면서 용병생활을 해온 로마의 후손들임이 판명된 셈이다. 그들은 흉노들에게 세계 최고의 군대로 자처했던 로마군대의 전쟁방식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1940년대부터 영국 학자들의 관심이 돼 계속 추적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서북민족대학 관이취안(關意權) 교수와 호주 애들레이드대학 데이비드 해리스 연구원 등은 파르티아와 벌인 ‘카래(Carre, 오늘날 Harran) 전투’에서 로마군단이 사라진 뒤 20년이 지나 리첸이라는 마을 이름이 나타났다는 데 착안해 연구를 본격화했다.

1955년 옥스퍼드 대학교 호머 H 더브스 교수는 기원전 36년 로마사절단이 중국 한나라에서 갖고 온 문서에서 기원전 53년 로마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도망간 로마 군사들이 중국 변방에서 훈족의 용병으로 일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문서를 찾아냈다.

더브스 교수는 이러한 이론을 정리해 <고대 중국의 로마인 도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나 학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와 작가들이 고대 중국의 로마인도시 리지엔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첸’은 로마의 중국식 옛날 지명

중국과학원 유전자 및 발육생물 연구소 소속 학자들과 공동으로 이들은 최근 지난 리첸현 주민들을 대상으로 DNA검사를 벌였으며 이 일대에서 유럽인의 체형 특징이 완연한 99개의 시신을 발굴해 이들이 로마 군단의 후예임을 확인했다고 문회보는 전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그 동안 중국인들과 비교해 피부 색깔이 붉고, 키가 크고, 코가 우뚝 솟고 갈색 머리여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차별을 받아왔다. 그러다 이번 학자들의 발견으로 자신들이 로마 집정관의 후예임이 밝혀지자 마을 전체는 경사분위기다. 융창현은 이에 따라 최근 리첸연구회와 로마군단 후예 전문 연구팀을 구성해 이 일대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방안에 착수했다.

간쑤(甘肅)성 융창(永昌)현의 한 마을에 사는 400여 명의 유럽인을 닮은 농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과의 전투 이후 행방이 끊어진 로마 집정관 크라수스의 아들을 비롯한 로마인의 후예들이다. 크라수스(기원전 115~53년)는 제1차 삼두(三頭)정치 당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던 로마의 정치인.

삼두정치를 벌인 크라수스의 군대

로마의 첫 삼두정치를 하게 된 크라수스는 당시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기원전 53년, 3만 명의 보병과 1만 명의 기병 등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왕국 원정에 나섰다가 ‘카래의 전투’에서 파르티아 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본인은 전사하고 병사들은 대부분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때 제1군단장으로 참전했던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당시 6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이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잠시 그때 로마의 상황을 보자. 당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던 카이사르는 당선되기 위해 두 가지가 부족했다. 지지자와 선거자금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도했다.

품페이우스는 동방정벌에 공훈을 세운 부하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목적으로 농지분배를 시도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혀 고심 중에 있었다. 또한 로마 제일의 부자인 크라수스는 자신의 최대 채무자인 카이사르를 저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

카이사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옛 부하들의 표를 몰아주면 그들에게 농지를 분배해 주겠다며 설득했다. 다시 크라수스에게는 선거자금을 대주면 한자리 주겠다고 약속했다.

크라수스는 이러한 제안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대 채무자인 카이사르가 파산이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입장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대단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품페이우스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던 관계로 카이사르의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카이사르는 그 후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그 유명한 갈리아 정복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로마의 최고의 장군으로 존경 받게 된다. 크라수스는 초조했다. 품페이우스는 이미 동방정벌로 많은 명성을 얻었던 상태이고 그에게 질투를 느끼던 크라수스의 업적이라고는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을 진압한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많은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어야겠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크라수스 역을 맡는다.

기원전 56년 삼두정치의 루카회담에서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취임한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유임되며, 품페이우스는 당시 에스파니아,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결정되었습니다.

“크라수스, 돈은 많았으나 戰備에는 허술”

로마군대의 핵은 중무장한 보병이다. 그러나 회전(평야전투)에서는 강하나 다른 지형이나 전투에서는 약점도 많다.
각자의 병력은 모두 10개 군단을 소유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1개 군단은 중무장한 6천명의 보병과 약간의 기병으로 각각 6만을 보유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크라수스는 55년 11월 시리아에 도착하여 전임총독 가니비우스에게 2개 군단을 인도받고 스스로 편성한 6개 군단을 합하여 8개 군단을 보유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로마군단은 보통 600명 정원의 1개 대대(코르호스) 10개가 모여 1개 군단을 이루는데 반해 크라수스의 군단은 8개 대대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8개 대대뿐이어서 8개 군단병력이 정원 4만 8천에 못 미치는 3만 8천명에 남짓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8개 군단이라 하더라도 1만 명이나 모자랐다. 더구나 한심스러웠던 것은 돈이 많아 자비로도 병력이 충실한 10개 군단 6만 명을 편성할 수도 있었지만 군자금 부족을 이유로 포기해 버렸다. 하여간 기원전 54년 크라수스는 1개 군단은 본진방어병력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7개 군단 2만9천600명의 중무장 보병과 경무장 보병 4천 기병 4천을 포함한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 정벌에 나선다.

파르티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신으로 로마와 인접하고 있었으며 카스피해, 흑해, 그리고 지중해를 인접한 강대국이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비옥한 땅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소위 안식국(安息國)으로 불렸으며 동과 서를 잇는 관문이자 비단길 통로였다.

중무장한 보병의 평야전투가 장기, 그러나 힘을 발휘 못해

현재로 치면 북부이라크 사막지대라고 할 수 있는 파르티아의 사막으로 진격한 크라수스는 수레나스라고 알려진 파르티아의 장수에게 농락을 완전히 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중무장 보병인 로마군단을 상대하기는 벅차다고 생각한 수레나스는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주력으로 계속 유격전을 벌이면서 로마군단을 내륙 깊은 곳까지 유인한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넌지 얼마 후 드디어 로마군대는 그들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중무장을 한 보병을 중심으로 한 평야전투(회전)에 돌입하려고 했지만 수레나스의 기병대는 계속 로마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직접 싸우지는 않고 화살만을 날린다.

로마병사들은 특유의 진형을 유지하고 적의 화살이 다 떨어져 자신들의 공격간격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수레나스의 기병대의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낙타에 화살을 가득싣고 대기하였다가 화살이 떨어지면 다시 보급을 받아 계속 공격했다.

계속되는 농락에 화가 난 젊은 크라수스는 휘하의 2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한 곳까지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파르티아 1만기의 기병에게 몰살당한다. 젊은 크라수스는 전선을 이탈했지만 포위망을 뚫을 가망성이 없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했다고 전한다.

흉노와 싸우다가 결국 흉노에 편입

크라수스는 아들이 죽자 시니카로 피신하여 전열을 재정비 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로마군대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레나스와 강화협정을 맺으러 갔다가 도중 수레나스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 시니카에 머물고 있던 로마병사들 중 도망친 일부를 제외하고는 1만병이 포로로 잡혔다.

기원전 50년경의 이야기다. 아마도 도망친 포로들은 중앙아시아에 강자였던 흉노족과 싸웠을 것이다. 또 파르티아와도 싸웠다. 그러나 로마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흉노에 편입되어 당시 중국의 지배자인 한나라와 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흉노의 용병으로 생활하면서 한나라와 싸웠던 이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된 곳이 고비사막의 오지 간쑤성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라진 미스터리 로마군단의 후예들이 역사와 DNA 과학을 통해 다시 발견됐다. 그러나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들의 피는 계속 중국에 동화됐기 때문에 ‘로마냄새’는 ‘중국냄새’에 거의 가릴 정도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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