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과 함께 발굴된 ‘허난성 무덤’ 진위 논란 속 장하 수장설 제기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9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지난해 12월 27일 중국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 안펑(安豊)현 시가오쉐(西高穴)촌에서 발견된 조조(曹操) 무덤에 대한 진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조조는 중국의 유명 역사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주역 중 한 명으로 위나라를 세운 인물. 이번 조조의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250여점의 유물 가운데 ‘위무왕(魏武王·조조)’이라 새겨진 글자를 근거로 허난성 문물고고연구소 판웨이빈(潘偉斌) 발굴팀장은 “조조의 무덤이 확실하다”며 언론에 발표했다. 이에 중국인민대 국학원 위안지시(袁濟喜) 부원장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이 “조조의 무덤으로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논란의 와중에 “조조의 진짜 무덤은 땅 위가 아닌 물 속에 있다”는 주장도 세간에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 ▲ 허난성 안양시 조조 무덤(추정) 발굴현장 입구. / photo 바이두
그 근거는 조조의 큰아들 조비(曹丕)가 황위에 오른 직후 남겼다는 “강가에서 제사를 지내려 한다”는 글귀다. 조비는 조조의 뒤를 이어 위나라의 초대 황제(위문제)에 오른 인물. “강가에서 선왕(조조)의 제사를 지내려 위아래를 둘러보니 슬픔이 뼈에 스며드는구나”라는 글귀를 남겼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 글귀를 바탕으로 “조조의 무덤이 (땅 속이 아닌) 강물 아래 수중무덤 형태로 있을 것”이란 추측을 줄곧 제기해 오던 터였다. 수중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조조 무덤 발굴로 논란이 되고 있는 허난성 안양시 북쪽에 있는 장하(?河) 아래다. 길이 466㎞에 달하는 장하는 허난성 안양시와 허베이성 한단시를 남북으로 나눈다. 장하 북쪽의 허베이성 한단에는 과거 조조가 정치·군사적 세력기반으로 삼았던 업성(?城)이 있었다. 삼국지를 비롯한 사서들은 “조조의 근거지 업성은 황제가 머물던 도읍 허창(현 허난성 쉬창)보다 더 크고 번성하다”고 전한다.
미스터리의 시작 “나를 박장하라”
전문가들은 “조조 무덤을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조조 무덤의 미스터리가 시작된 것은 조조가 ‘박장(薄葬)’을 명하면서부터다. 박장은 흙을 쌓아올려 주변 지형보다 높게 봉분을 올리는 ‘후장(厚葬)’과 달리 봉분 높이를 주변의 땅 높이와 같이 평평하게 다지는 것을 말한다. 박장은 ‘간소한 장례’라는 뜻도 있다. 조조는 죽기 2년 전인 218년 반포한 종령(終令)을 통해 “(나의 무덤을 만들 때) 원래의 높이 그대로를 기반으로 해 봉분을 올리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박장을 할 경우 외관상 봉분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아 도굴꾼의 침입을 방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시신과 함께 값비싼 귀금속을 함께 매장하는 역대 황제나 제왕의 무덤은 늘 도굴꾼의 표적이 됐다. 조조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박장을 명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당 태종 이세민, 몽골의 칭기즈칸 등은 조조의 전례를 본받아 박장을 했다. 조조가 자신의 무덤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인 이유는 따로 있다. 조조 자신이 도굴을 통해 군자금을 조달했던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가 원소, 여포, 유비, 손권 등 당대의 군벌들과 맞서 끊임없는 전쟁을 수행하며 중원(中原·북중국 일대)을 평정하고 최후의 승자로 등극한 배경에는 군사력 외에도 군자금 조달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국 역사학계의 일반적 평가다.
- ▲ 조조 무덤(추정) 발굴 현장.
군사와 병기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군자금이 소요된다. 고대의 전쟁 역시 현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쟁 수행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다. 군자금 조달을 위해 역대 제왕들은 ‘특수한 방법(도굴)’을 동원했다. 조조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유방과 항우는 물론 1949년까지 국·공내전을 벌이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도 능묘를 파헤쳐 군자금을 충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조조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업성 서쪽에 72개의 가묘 만들라”
심지어 조조는 ‘모금교위(摸金校尉)’ ‘발구중랑장(發丘中郞將)’ 같은 자리까지 설치해 도굴을 공개적으로 장려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모금교위란 ‘군자금(金)을 모으는(摸)’ 직책이고, 발구중랑장은 ‘무덤(丘)을 발굴하는(發)’ 군대 내 직책이다. 일반적인 무덤은 ‘묘(墓)’로 불리지만, 제왕의 무덤과 같이 덩치가 큰 봉분들은 ‘구(丘)’또는 ‘능(陵)’으로 부른다. 이는 군대에 의한 도굴이 공공연히 이뤄졌단 뜻이기도 하다. 조조의 초기 라이벌이던 원소 휘하의 문사(文士) 진림(陳琳)은 조조와의 전쟁(관도대전)을 앞두고 쓴 격문을 통해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능묘를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을 들어내 보물을 훔쳐갔다”며 “(조조는) 게다가 ‘발구중랑장’이란 관직까지 설치해 가는 곳마다 무덤을 훼손해 해골이 드러났다”고 조조의 죄상을 성토한 바 있다. 진림의 이같은 주장에 조조도 “진림이 글 하나는 잘 쓴다”며 특별한 해명을 하지 않았다.
- ▲ 허난성 안양시 조조 무덤(추정)에서 출토된 유물.
조조는 이 같은 전과 때문에 자신의 무덤에 상당한 신경을 기울였다고 알려진다. 정작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조조는 한발 더 나아가 “업성 서쪽 언덕(현 허베이성 한단 일대)에 자신을 박장하라”는 유언과 함께 “72개의 의총(疑塚)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의총은 남이 파헤칠 염려가 있는 묘를 보호하기 위해 진짜 무덤과 비슷하게 만든 가짜 무덤을 뜻한다. 가짜 무덤이란 뜻에서 ‘가묘(假墓)’라고도 불린다. 서기 220년 조조가 죽은 다음 업성의 동서남북 4대문이 활짝 열리며 72개의 관을 실은 72대의 마차가 일제히 도성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얘기가 민간에 전해진다. 송나라 시인 유응부(兪應符)는 ‘생전에는 하늘을 속이고 한(漢) 황실의 적통을 끊더니/죽어서는 사람을 속이고 의총을 세웠네/살아 생전 지혜를 썼으면 죽어서는 쉬어야지/ 무슨 계략이 있어 무덤까지 가져가는가’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물줄기 바뀌면서 수중무덤 은폐됐다”
서기 220년 조조가 죽은 다음 1800년 가까이 조조의 무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중국 역사학계에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역사학자들을 비롯해 전문 도굴꾼과 심지어 외국 군인들까지 조조가 남겼다는 “업성 서쪽 일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근거로 업성 일대의 무덤들을 샅샅이 뒤져왔기 때문이다. 실제 허베이성 한단시 일대는 72개의 의총으로 보이는 대규모 무덤군이 있기도 하다. 수천 년간의 발굴 결과 이 일대의 무덤들은 72개가 아닌 모두 134개에 달한다고 확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조조의 진짜 무덤을 발견하는 데는 실패해 일각에서는 “72라는 숫자 자체가 조조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가공의 숫자”라며 “조조는 72개의 무덤 중 하나가 아닌, 다른 곳에 묻혀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현재 이 무덤군은 중국 정부가 지정한 전국중점문물보호구역(문화재 보호구역에 해당)으로 지정된 상태다.
- ▲ 조조 무덤(추정)에서 같이 출토된 석상. / photo 바이두
“조조의 무덤이 물 속에 있을 것”이란 추정도 이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강 아래에 있어서 도굴꾼들이 여태껏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은 “인공적으로 강 아래 수중무덤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물줄기가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무덤이 은폐됐다”는 것이다. 조조의 수중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하는 강줄기가 과거 수차례 바뀐 적이 있다고 한다. 조조가 장하변에 세웠다는 동작대(銅雀臺)란 누각을 찾을 수 없는 것도 강줄기가 바뀌는 통에 동작대가 무너졌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장하의 흐름을 통제하기 위해 1966년에는 20억㎥의 물을 가둘 수 있는 대형댐이 들어서기도 했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아들(조비)이 ‘슬픔이 뼈에 스며드는구나’라고 말한 것은 강줄기가 바뀌어 아버지(조조)의 무덤을 돌볼 방법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란 그럴 듯한 해석을 내린다. 청나라 시인 유정기(劉廷琦)도 “위주(魏主·조조)의 능원(무덤)은 장수(장하) 물가에 있네”라며 조조의 무덤이 장하에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민간고사에도 수중무덤說 등장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몇 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도 ‘조조의 수중무덤 설(說)’을 뒷받침한다. 중국 청나라 때 한 민간고사에 따르면 청나라 초기 장하의 강물이 말라 강바닥이 드러났는데 한 어부가 강바닥에서 큰 석판을 발견했다고 한다. 어부가 석판을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조맹덕(조조)’이란 글자가 새겨진 큰 비석과 함께 한 구의 멀쩡한 시신이 누워 있었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청나라 소설가 포송령(蒲松齡)이 지은 괴담 소설집 ‘요재지이(聊齋志異)’의 조조총(曹操塚·조조의 무덤) 편에도 이와 거의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다만 묻힌 장소가 장하 아래가 아닌 당시 도읍이던 허창(현 허난성 쉬창시) 일대의 강바닥 아래로 차이가 날 뿐이다. 만약 이 같은 민간의 이야기와 소설이 일정 부분 사실에 기초한다면 조조의 무덤은 이미 세상에 공개됐거나 도굴을 당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조조 무덤이 진짜인지를 단정하기는 아직 조심스럽다. 이번 발표를 두고 ‘관광 수입을 노린 자작극’이란 소문도 돈다. 60대 남성 유골(조조로 추정)과 함께 나온 20대와 50대 여성 유골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무덤 발굴팀의 숙제다. 66세로 사망한 조조는 생전에 남긴 유령(遺令)을 통해 “나의 비첩(婢妾)과 가기(家妓)는 고생이 많았다”며 “그들을 동작대에 편히 머물게 하고 잘 대우해 주라”고 순장(산 사람을 죽여 망자와 함께 매장하는 장묘법)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생전 15명의 처첩을 거느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조 무덤에 대한 진위 논란은 유골의 유전자(DNA) 검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각계의 관심이 쏟아지자 발굴을 주도한 허난성 문물고고연구소 판웨이빈 발굴팀장은 “무덤에서 나온 60대 남성 유골의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진위 여부를 판명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