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donga.com/3/all/20110511/37126353/1) 등록 일자 : 2011/05/11 10:08:05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제기한다.
이 대통령은 회견에서 "대일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하여야 한다"며
"특히 대마도는 별개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마도가 우리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하여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이 비석도 찾아올 생각이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1949년 12월 31일 대통령 연말기자회견에서
거듭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대일 강화회의 석상에서 해결할 수 있으며,
일본이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역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라고 강력히 대마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 같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와 함께 한일회담 협상과 맞물리면서
60여 차례나 이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보도된 국내외 기사들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 반환 받는 것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함께 중국 여론도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이를 지원하는 대규모 시위를 했던 사실 역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어떤 근거로 대마도가 한국 땅이고
해방-건국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실지(失地)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
김상훈 대령(육군사관학교 군사훈련처장)은
2008년 미국 조지 워싱턴대에 정책 연수를 위해 1년간 머물렀다.
조지 워싱턴대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부를 마친 곳.
건국대통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조지 워싱턴대에서
1907년 청년 이승만의 흔적을 찾던 김 대령은
우연히 조지워싱턴대 도서관에서 이승만의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을 발견하고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책의 내용 중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오래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발견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나라가 시끄럽던 시절,
김 대령은 이 '한-일 간의 오래 된 명확한 해상경계'가 어디를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승만이 건국대통령에 오른 뒤 기회만 주어지면
"대마도를 불법 점거한 일본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수십 차례나 주장한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 년 간의 집요한 연구와 추적 끝에
김 대령은 이승만의 '대마도가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명백한 근거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도 밝혀냈다.
김 대령은 1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리는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의 제3회 '이승만 포럼'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이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그 명쾌한 근거를 제시한다.
디지털뉴스팀
[인보길 칼럼] 日, 대마도 지키려고 독도를 공격?
'대마도 반환' 이승만 요구, 김일성이 막다!
조선국토는 대마도-탐라가 양발..."잃어버린 왼발을 다시 찾자!"
"조선 국토는 대마도-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우리나라 지형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
1750년대 영조시대 제작한 <해동지도>에 기록된 말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부터 우리 땅, 고려-조선의 왜구정벌이후 구한말까지 대대로 이어진 영토인식이다.
이런 기록은 너무나 많다.
“잃어버린 우리 왼발을 다시 찾자!”
일본의 ‘독도 강탈’ 공세가 노골화하면서 대마도 반환운동을 벌이는 목소리가 뜨겁다.
임진년의 악운! 올해는 임진왜란 420주년, 일본은 독도를 끝내 침공할 것인가.
독도보다 더 크고 억울한 대마도는 다시 찾아 올 길이 없는가.
이승만 “대마도 반환하라” 60여차례 요구
대마도 반환을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1948년 8월18일, 대한민국 건국 사흘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대마도를 한국에 즉각 반환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를 섬긴 우리 땅이다. 임진왜란때 일본이 무력강점했지만 의병들이 일어나 이를 격퇴했고, 도처에 그 전적비가 남아있다. 한국과 일본의 전통적인 경계선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구한말에 대마도를 강점한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국제적으로 약속했다. 따라서 지체 없이 한국에 돌려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국회에서는 ‘대마도반환’ 결의안을 만들었고, 이승만은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법적조치’를 취하면서
수시로 “대마도 내놔라”고 요구한 것이 6.25때까지 무려 60여차례나 이어졌다.
일본 “김일성이 우리를 살려준다” 환호
당황한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회피하다가 북한의 6.25 남침전쟁이 나자 쾌재를 불렀다. “김일성이 일본을 살려준다”며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이승만의 ‘대마도 요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전쟁특수로 경제대국 발판까지 거머쥐게 된 일본. 김일성과 소련이 얼마나 고마웠을까. 소련 공산당 앞잡이 김일성이야말로 ‘친일파 왕초’라 할만하다.
1952년 1월18일 이승만은 ‘평화선’을 선포한다. 6.25전쟁중 독도를 괴롭히는 일본에 대하여 ‘독도와 이어도’를 주권수역 울타리로 쳐서 확보했다. 대마도까지 평화선 안에 넣고 싶었지만 어쩔 것인가. 대마도 해방전쟁을 각오해야 한다. 일본이 강점한지 80여년이 지난 그때, 공산당과의 전쟁에 일본군이 지원하겠다는 말을 듣자 “총뿌리를 돌려대겠다”며 반대한 이승만도 수륙 양면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제법전문가(프린스턴대 박사) 이승만이 ‘실효지배’의 힘을 모르겠는가. 대마도를 도둑맞은 고종 때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싸우다가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대마도는 식민지 그대로다. 6.25가 그의 숙원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속방’ 대마도주에 관직...‘군신지간’
부산에서 45㎞ 큐슈에서 150㎞-거리만 봐도 우리 땅인 대마도!
1592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가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요시시게(宗義調)를 앞세워 조선을 침략한 전쟁 임진왜란. 왜국의 강압에 굴복하여 본의 아닌 용역을 맡았던 대마도는 조선의 엄벌을 받아 굶어죽기 직전에 다시 조선이 곡식과 면포 공급을 재개하여 살아났다.
삼국시대엔 각국세력이 혼재했으나 통일신라때부터 고려와 조선 말까지 대마도는 <계림(鷄林=신라) 관할도서> <고려사 '고려의 목(牧)'><동래부(東萊府) 부속 도서>로서 경상도 관찰사의 관할이었다. 한중일(韓中日) 3국의 사서(史書)들과 지도들, 구미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땅, 코리아 땅이다.
◆ 조선 왕조 5백년간 대마도주는 대대로 조선의 관직을 받았다. 한 예로 세조가 대마도주에게 내린 직명은 '숭정대부 판중추원사 대마주 병마도절제사'(崇政大夫判中樞院事對馬主兵馬都節制使)였다. 조선왕조의 대마도 인식은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성종, 연산, 광해, 영조, 순조등이 내린 ‘대마도 교지’를 비롯, 빈번한 교류기록에 <대마도는 조선의 속방, 군신지간(君臣之間>이란 표현은 한곁 같다.
◆ 1750년대 영조때 <해동지도>의 <대동총도(大東總圖)>설명문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이 척추가 되며, 영남의 대마도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는다"라는 말은 수천년 내려오는 우리의 국토인식, 주권의식에 다름 아니다. 해좌전도(海左全圖),팔도천하지도(八道天下地圖), 동국조선총도(東國朝鮮總圖), 조선방역지도, 동국도, 천하대총일람지도, 조선전도, 강원도도(江原道圖), 경상도도(慶尙道圖)등등 대마도 지도가 많기도 하다.
또한 퇴계 이황(李晃)의 문서, 실증사학자 안정복(安鼎福)의 '동사외전'(東史外傳)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물론, 특히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비어고'(備禦考)에서 대마도현장 사료 및 주민의 언어, 복식, 풍습등을 종합하여 '일본 왜'와 다른 대마 조선인의 문화인류학적 특징을 고증해 놓았다.
◆ 이승만이 말한 '전통적 경계선'이란 현해탄(玄海灘)을 가리킨다. '현해탄'은 '현해'의 잘못된 표기(일본사전)라는 이 해역은 큐슈의 북쪽 연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듯이 대마도 해협이나 대한해협과는 전혀 무관하다. 큐슈의 북쪽이래서 북현무(北玄武)의 ‘현해’인 것이다.
명치유신→지도 변조→대마도를 훔치다
1868년 명치유신 혁명에 성공하자 일본에 불어닥친 정한론(征韓論)의 열풍은 대마도부터 탐냈다.
구한말 약해질대로 약해진 조선의 혼란기를 틈탄 일본은 식민열강의 남의 땅 빼앗아먹기 수법부터 흉내낸 것이었다.
미국 페리제독의 흑선(黑船) 공격에 놀라 막부(幕府)를 무너뜨린 사무라이들은 조선식민화로 치달았다.
우선 대마도를 이즈하라번(嚴原藩)으로 만들었다가, 1877년 나가사키현(長崎縣)에 편입시켜 버린다.
그러면서 동시에 진행한 것이 <지도 변조>! 절도 사기꾼 행각이었다.
최근 나온 책 <일본이 숨겨오는 대마도-독도의 비밀>을 보면,
독도보다 대마도에 관한 ‘한국소유권’ 자료가 무수히 넘쳐난다.
대마도 연구가인 저자 김상훈씨의 연구 결과를 요점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1786년 일본인 하야시(林子平)가 만든 지도<삼국접양지도>에서 ‘대마도는 조선땅’이다.
▶ 1861년 일본정부는 이 지도를 열강에 제시, 일본영토의 경계를 국제 공인 받는다.(삼국접양지도의 프랑스어-독일어 번역판).
일본은 이 지도 제작때부터 80여년간 공식 국가용으로 사용했다.
▶ 1855년 영국지도, 1865년 미국지도 모두 ‘대마도는 코리아’ 영토다.
▶ 미국지도에 대한해협(Strait of Korea)은 대마도 남쪽 바다로 표시되어있다.
▶ 1868년 미국 페리제독 (삼국접양지도 공인 당사자) 자서전에 나온 지도 역시 대한해협은 대마도 남쪽.
▶ 1873년 일본해군이 만든 지도부터 대마도 색깔을 일본 땅색깔과 일치시켜 변조한다.
▶ 1878년 프랑스 주재대사 다나베 타이치(田邊太一)에게 훈령, 프랑스어판등 삼양접양지도를 모두 수거한다.
대신 대마도-일본 색깔을 일치시킨 ‘필사본’을 각국에 보급시킨다.
▶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일본학자들은 조선의 대마도 기록 문서를 재정리한다.
▶ 1923년 조선사편찬위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일당은 대마도에 건너가, 한국관련 문서 66,469매,
고기록 3,576권, 고지도 36건, 고서 18점, 그림 53점등을 수거 은폐, 변조하고 불태웠다. 유적도 파괴했다.
“日, 대마도 안내놓으려 독도 싸움 계속한다”
“일본이 왜 저러는지 아십니까? 대마도 때문입니다. 대마도를 잃을까봐 독도 시비에 매달립니다. 한국이 대마도에 눈을 돌리면 돌려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https://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0607
건국 3일째 되는날(48.8.18)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을 일본에 요구하는 폭탄선언을 한다
전후 일본 재건의 영웅 요시다 내각은 이승만의 대일 폭탄선언에 경악했다
6,25 전까지 60여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요구했고 대마도 반환에 자신감을 보였다
625남침이 터지자 일본은 김일성이 대마도 반환을 막았다면 환호작약했다
일본이 김대중 노무현의 제2한일 어업협정으로 독도가 중간수역이 되자 독도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
일본의 독도 공격은 대마도 반환을 못하게 하기위한 전략인데 한국은 좌빨들이 반일 선동으로 독도문제 올인
지금이라도 한반도의 왼발인 대마도 반환을 일본에 요구해야 한다 - 옮긴글
‘동해’ 표기 古지도 최초 공개
서울신문 | 입력 2010.02.18 03:16
호사카 교수는 "메이지시대 가장 먼저 완성된 '대일본전도'에서 독도는 제외됐다."며 "이 지도를 보면 1905년 이전에도 독도를 영유했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허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관허대일본사신전도'는 지도제작자 하시모토 교큐란사이가 1868년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제작한 것으로 한국의 동해안을 따라 '조선해(朝鮮海)', 일본 본토의 서측에는 '일본서해(日本西海)'로 표기했다."며 "일본에서 '일본해'라는 명칭이 정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동해 해역의 명칭을 병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역사재단은 3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동해·독도 옛 지도 전시회'를 연다. 호사카 교수가 소장한 지도와 재단이 지난해 구입한 동해·독도 관련 지도 등 40점이 전시된다. 이번에 전시될 프랑스와 독일, 영국 등의 서양 고지도들은 대부분 한국의 고지도보다 이른 시기에 '동해' 지명을 표기하고 있다.
정재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이번 전시회가 유럽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바다라는 의미로 동해 지명이 널리 사용됐다는 점과 지난날 일본에서도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재단은 '동해 표기' 문제와 관련, 올 6월께 모나코나 동남아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수로기구(IHO) 제2차 워킹그룹 회의에 신길수(54) 표기명칭대사를 파견한다. 회의 일정 조정 등이 목적이었던 1차회의에 견줘 동해·일본해 병기 문제를 집중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될 전망이다. 우리나라는 IHO가 1929년 첫 발간한 '해양과 바다의 경계(S23)'가 37년, 53년 개정판을 내는 동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한번도 참여하지 못했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조선해·일본해 병기' 日지도 공개
한국일보 | 입력 2010.02.17 20:41
가로 59.3㎝, 세로 83.3㎝ 크기의 이 지도는 일본의 화가이자 지도제작자인 하시모토 교큐란사이가 1868년 제작했다.
동북아역사재단 관계자는 "동해를 '일본해'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에 맞서 전략적으로 '한국해'와 '일본해' 병기라는 타협책을 추진하고 있는 우리의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호사카 교수는 또 일본 육군참모국이 1877년 제작한, 독도가 표시돼 있지 않은 일본지도인 '대일본전도'도 공개했다. 그는 "이 지도를 보면 1905년 이전에도 일본이 독도를 영유했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허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들을 비롯한 독도 관련 고지도 40점을 3월 2~9일 국회 도서관에서 전시한다.
19세기 일본지도엔 ‘독도’ 없었다
‘17세기 중반부터 일 영토’ 주장 뒤집는 자료
호사카 교수 7점 공개… 한국해·일본해 병기
경향신문 | 손제민 기자 | 입력 2010.02.17 18:16 | 수정 2010.02.18 02:00
신길수 동북아역사재단 표기명칭대사는 "유럽에서 쓴 동해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바다라는 의미로 2000년 전부터 동쪽 연안을 '동해'로 불러온 한국과는 다르지만 동해라는 명칭이 국제적으로 쓰인 것은 맞다"고 말했다.
독도와 관련, 일본 육군 참모국이 내무성 지리국과 함께 1877년 만든 '대일본전도'에는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17세기 중반부터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였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는 또 하나의 자료인 셈이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새로 발굴한 이 지도들을 포함, 40점의 독도·동해 관련 고지도를 3월2~9일 국회도서관에서 전시한다. 지난해부터 독도·동해 관련 고지도들을 수집해온 호사카 교수는 가수 김장훈씨에게서 받은 지원금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독도는 우리땅' 증거, 관허 대일본 사신전도
뉴시스 | 진현철 | 입력 2010.02.17 18:15
3월 2일부터 9일까지 국회 도서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는 재단을 비롯해 국내외 기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동해 관련 고지도 25점과 독도 관련 고지도 15점 등 40점이 전시된다.
[종합]옛날 서양·일본 지도, 일본해? 동해!
뉴시스 | 진현철 | 입력 2010.02.17 18:12
3월 2일부터 9일까지 국회 도서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는 재단을 비롯해 국내외 기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동해 관련 고지도 25점과 독도 관련 고지도 15점 등 40점이 전시된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17일 "대일본전도는 1877년 당시 육군참모국을 통해 일본의 영토 전체를 자세하게 나타냈지만 독도는 제외했다"며 "일본은 역사적으로 독도를 계속 일본의 영토로 영유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지도는 이를 부정하는 증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또 "1868년 화가이자 지도제작자였던 하시모토 교큐란사이가 관허로 제작한 일본과 그 주변 지도인 관허대일본사신전도를 통해 일본에서 일본해 지명이 정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동북아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지도'와 '일본왕국도', '강릉' 등이 전시된다.
동북아역사재단 정재정 이사장은 "이번 전시회가 예로부터 한국 이외에 유럽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바다라는 의미로 동해 지명이 널리 사용됐다는 점과 지난날 일본에서도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동북아역사재단은 2010년 주요사업으로 독도 관련 교육·홍보를 강화하고 관련 연구조사를 심화한다는 방침이다.
고지도 전시회를 시작으로 6월 동해·독도 명칭 표기오류 시정활동과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민간 지도제작사 초청 세미나를 마련한다. 8월에는 동해 명칭 국제 세미나와 독도 연구소 개소 2주년 국제학술회의,10월에는 한·미 지리교사 워크숍이 기다리고 있다.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7월 한국병합 과정의 불법·강제성 규명을 위한 조약자료집도 발간한다. 8월24일부터 3일 간은 강제병합 재조명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6·25 동란 발발 60주년을 맞이해 '한국전쟁이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에 미친 영향과 교훈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6월에 국제학술회의를 연다.
'조선해' 표기 사용 19세기 일본 지도
연합뉴스 | 입력 2010.02.17 16:41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충청
(끝)
'독도는 한국땅'..19세기 일본 지도 공개
연합뉴스 | 입력 2010.02.17 16:41
대마도 지키려 독도를 공격? -
`대마도 반환` 이승만 요구, 김일성이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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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일본 공문서가 밝힌 '한국의 섬' 독도
입력 : 2016.08.17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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