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중국 후한의 왕부가 씨성본결이라는 책을 쓴 것이 사실인가요?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4:45

제가 얼마전에 천년의 금서 라는 김진명님 소설을 읽었는데요.

도데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워 질문드립니다.

 

1.고조선 이후에 '한'이라는 나라가 정말 존재했나요?아니면 학설일 뿐인가요?

2.만약 '한'이 존재 하지 않았다면,대한민국의 '한'은 어디서 유래된 것이죠?

3.중국 후한의 왕부가 씨성본결이라는 책을 쓴 것이 사실인가요?

4.책에서는 '단군세기'는  위서가 아니라고 하는데요,위서로본다면 그 이유가 무었이죠?

5.우리의 역사가 감정기에 위조된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인가요?

6.고조선 이전의 나라 '한'은 오성취루와 남해조수간만을 기록한 문명국일 수도 있나요?

 

질문이 너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실수도 있으나 저로써는 판단이어려워 질문드립니다.

저는 아직 중학교 신입생에 불과하니 어려운 말은 자제해 주시거나 풀어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천년의 금서를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첫번째 질문인 고조선이후의 '한'의 존재는 중국사서인 [후한서] 동이열전의 한전이나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의 한전에 나와있는 사실입니다. 삼한의 유물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습니다. 백제나 신라도 '한'의 제후국이었다가 독립된 국가입니다.

 

두번째 대한민국의 '한'은 '한' 즉 삼한의 '한'에서 유래했습니다. 

 

세번째는 잘 모르겠습니다.

 

네번째는 '단군세기'에 관한 내용인데 '단군세기'는 '농상집요'를 보급한 고려말 학자 '이암'이 편찬한 것인데 이는 발해의 사서인 '조대기'를 보고 쓴것이라고 합니다.

옛날의 책들은 필사본이 많습니다. 필사하는 과정에서 가필 윤색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의 사서 '사기'나 한국의 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나 단군세기를 위서로 보는 사람들은 이 필사하는 과정의 '가필'이나 '윤색'을 가지고 문제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려내는 것은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서'라고 단정짓는 것은 '선입견'이며 '아집'일 뿐입니다.

 

다섯번째의 질문은 일제가 우리나라에 심어놓은 식민사관입니다. 

일본식민사학자가 한말을 님이 다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역사의식'입니다. 몽고의 침략기나 일본의 식민상태(강점기)에 놓였을때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나라를 회복하기위해 노력합니다. 무력으로 봉기도 하지만 국민들에게 역사적인 자각을 갖도록 합니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우리민족의 역사가 이렇다.'라는 역사에 대한 계몽을 평상시보다 더 활발하게 합니다.

그리고 침략자(조선사편수회)들은 이런 민중들의 역사의식을 소멸시키기위해 역사에 대한 왜곡을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탄생한것이 식민사관입니다. 

그 식민사관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해방된지 65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한반도안의 약소종족이며 중국의 식민지였고 '가르칩니다.

 

여섯번째 고조선 이전의 나라 '한'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질문은 좀 잘못된것 같습니다.

고조선 이전에 한이 있었던게 아니라 단군이 고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했다는게 맞습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멸망후에 성립된 삼한에 앞서 '전삼한'이 있었고

이는 고조선을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린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고조선은 중국동부와 만주 그리고 한반도의 넓은지역을 통치하기위해 중국동부지역은 번조선(번한) 만주지역은 진조선(진한=고조선) 그리고 한반도지역은 막조선(마한)으로 나누어 통치했다는 겁니다. 

조선중종때의 학자 이맥이 편찬한 '태백일사'를 보면 '번한세가와 마한세가'가 나와 있는데

'단군세기'가 고조선 왕조(진조선=진한)의 역사라면 '번한세가'는  고조선의 제후국인 '번한'의 역사서이며 '마한세가'는 고조선의 제후국인 '마한'의 역사서입니다.     

 

고조선이전에는 환웅이 세운 신시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환국이 있었구요!

 

1980년대 이후로 중국의 동북지역에서는 황하문명보다 1000년이상 빠른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만리장성 바깥쪽 요하유역에서 발견된 것이어서 요하문명의 주인공은 황하문명을 일으킨 중국인이 아닌 다른 종족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요하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이랄수 있는 홍산문화유적은 bc3800년경에 초기국가가 출현했음을 증명해주는 여러 유적들이 발견된 곳입니다. 이 유적은 곧 거대제단 여신전 적석총인데 거대제단은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지내는 환웅의 존재를 암시하고,여신전과 여신상,곰뼈,옥웅룡등은 단군신화의 웅녀를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적석총은 고구려와 초기백제의 무덤양식인데 이는 만리장성 안쪽의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우리민족이 요하문명 곧 홍산문화유적의 주인공임을 알수 있게 해줍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보면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건설했다고 되어있는데 이 신시가 바로 위에서 설명된 유적들이 발견된 요서지역의 우하량일것으로 추측됩니다. 신라 진평왕때의 승려인 안함노가 지은 [삼성기]와

[태백일사]에 따르면 이 신시시대는 약1000년간 지속되다가 bc2700년경 치우에 의해 도읍이 산동반도의'청구'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 때를 청구시대라 합니다.

 

산동반도에서는 '대문구문화'유적이 발견되었고 '치우'의 무덤이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에서 발견되는 등 청구시대를 뒷바침할수 있는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고 '사기'에는 중국의 시조 황제헌원과 치우의 탁록대전이 기록되어 있어 청구시대가 실존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는 우리민족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굳이 단군신화라고 해야 할 지는 의문입니다.

 

환인과 환웅과 단군은 단군신화의 이야기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이 아닙니다.

단군신화에서 이들을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표현한 것은 이들의 계승관계를 의미하는 것 일뿐 실질적인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활동한 시기와 활동한 지역 또는 종족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환인은 환국문명의 지도자였습니다.

 

환국문명은 bc8000~bc3800년경 중앙아시아의 천산과 파미르고원 그리고 바이칼호수 지역에 걸쳐 이룩한 인류최초의 문명이었으며 나중에 메소포타미아문명등 세계4대문명을 견인한 인류공동의 문명이었습니다.

따라서 환인과 환국을 우리민족의 직계조상이거나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볼 근거는 희박합니다.

 

다만 환국의 주도 세력이 환국을 떠나 요서지역에 정착했고, 환국의 전통과 신앙을 계승했으며, 요서지역의 토착민과 융화하는 과정에서도 후세에 환인과 환국을 전파했다는 점에서 우리민족이 환국문명을 계승했다는데는 이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환웅은 BC3800년경 환국의 지도자중 하나로 환국에서 무리 3000을 이끌고 요서지역에 정착한 사람입니다.

환웅은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배달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배달(=밝달=바이칼=발해)에서 배는 밝(발조선)의 한자식 표기이며 달은 땅의 고어로서 밝은땅을 의미하며 , 우리민족이 바이칼에서 이주해 왔고, 발해만 연안이 배달국 즉 환웅세력의 정착지임을 알수 있게 해줍니다.

 

단군신화에서는 환웅이 태백산(백두산) 정상에 내려와 신시를 세운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후에 환웅에 대한 신격화 또는 태백산에 대한 신성화에 따른 오해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백두산 정상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아니라 더욱이 도읍을 세울만한 장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성기에 보면 환웅이 백산(백두산)과 흑수(흑룡강)사이 즉 만주지역에 내려왔다는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유물과 유적들을 볼 때 요서의 적봉시 지역(우하량)이 환웅이 정착한 신시일 가능성이 큽니다. 더욱이 적봉은 붉은산으로 태백산(크게 밝은산,붉은과 밝은의 어원은 같다)과 의미가 서로 상통합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에게 마늘과 쑥을 주고 21일간 수련하게 한후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성기]에서는 환웅이 신시에 정착한 후 21일간 마음을 정결히 하고 하느님께 제사지냈으며 웅씨(곰족)의 딸을 맞아 황후로 삼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삼성기]와 [밀기]에서는 환웅이 신시에 정착하기 전 그곳의 원주민은 범족이었고 곰족은 이주민이었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교류가 없었고 융화되지 못했으며, 새로운 이주민인 환족이 신시에 정착하자 발달된 신시문명을 보고 곰족과 범족이 서로 신시의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신시에 살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최종적으로 곰족여자우두머리가 무리를 거느리고 신시에 와서 신시의 전통과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곰족이 신시에 살게 되었고 환족과 곰족이 서로 융화되어 한족속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신시의 백성이 되고 싶었으며.

곰과 호랑이가 아니라 곰족과 호랑이족이었으며,

곰과 호랑이가 21일간 수련한 것이 아니라 환웅이 곰족과 호랑이족을 받아들이기 위해 21일간 숙고했으며,

환웅이 인간이 된 곰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환웅이 신시의 백성이 되고자 요청한 곰족을 받아들여 웅씨의 딸을 맞아 황후로 삼고 환족과 곰족이 서로 통혼하여 한족속이 되었다는 것이며,

단군을 낳은 것이 아니라 1500전 환웅과 곰족의 연합을 계승한 단군의 정통성을 드러내기위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단군은 단국의 군주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태백일사]와 [단군세기]에 의하면 단군의 조상은 곰족여자우두머리였으며

환웅시대초 비서갑지방(태백산 북쪽)의 제후였습니다.

이후 곰족여자우두머리의 후손인 여(黎)가 bc2800년경 단허의 제후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곰족중 단국이 가장 강성해졌는데 이 단국의 군주 왕검이 bc2333년경 천하를 통일했으며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신시로 추정)에 이르러 도읍하고 조선을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군의 종족은 곰족으로 환웅과는 다른 종족이었으며, 단허지역(평양으로 추정)에 있었던 단국의 군주였습니다.

 

고조선 이전의 신시는 요하문명으로 황하문명을 선도한 선진문명이었고

고조선은 중국동부를 제후국으로 거느린 문명국가였습니다.

조공은 고조선에 바치는 공물이었고 조정은 고조선 당국 즉 고조선정부였습니다.

명도전은 연나라 화폐가 아닌 고조선의 화폐였고

다뉴세문경은 지금도 흉내내기 힘든 고도의 청동주조기술의 결정체이며 이역시 고조선의 문화였습니다.

 

고조선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정작 고조선에 대해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정말 충격적입니다.

 

이상으로 고조선 이전의 시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환국과 고조선에 대해서는 다음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부 족보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므로 참고로 보시면 됩니다.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의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奇)씨가 아니라 한(韓)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