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 암행어사 한번도 한 적 없다
심재우 교수, 논문 ‘역사 속 박문수와…’서 밝혀 |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기사 게재 일자 : 2010-05-11 11:31 |
조선시대 왕의 특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인 어사(御史) 또는 암행어사(暗行御史)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이 하나 있다. 영조(재위 1724~1776) 때 활약한 온건파 소론계 관료인 박문수(朴文秀·1691∼1756)가 바로 그다. 박문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해결사였던 어사, 특히 암행어사의 전형으로 각인돼 있다. 상대를 기죽이는 관복 대신 남루한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며 백성들과 함께 호흡한 정의의 심판자로 묘사된 ‘암행어사 박문수’는 현재 ‘위인전’ 등 아동을 대상으로 한 각종 출판물의 단골 메뉴 중 하나다. 하지만 박문수에 대한 연구 결과, 그가 실제 어사로 활약한 횟수와 기간은 모두 4차례, 1년여에 불과하며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조선후기 사회사를 전공한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오는 17일쯤 발간될 학술저널인 ‘역사와 실학’ 41집에 기고한 ‘역사 속의 박문수와 암행어사로의 형상화’라는 논문에서 “실제 역사 속의 박문수와 오늘날의 박문수 이미지에는 차이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조선시대에도 박문수를 어사 또는 암행어사로 주목하는 분위기가 있긴 했지만 그가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의 일이라는 것. 심 교수는 “일제강점기 초기 영웅·위인을 필요로 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1915년 발간된 작자 미상의 소설 ‘박문수전’과 광복 이후 군사독재 시절인 1970∼1980년대 위인전집의 성행이 박문수가 전설적인 암행어사, 이상적 관리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역설했다. 조선시대 어사는 관리의 득실과 민정을 비밀리에 조사하는 ‘암행어사’와 감진(監賑)·순무(巡撫) 등 특별한 임무를 띠고 별도로 파견되는 ‘별견어사(別遣御史)’로 나뉜다. 심 교수가 ‘조선왕조실록’과 고령박씨 후손이 소장한 ‘박충헌공(박문수)연보’, 최근 연구 성과 등을 토대로 박문수의 어사 이력을 분석한 결과 그는 ▲1727년 영남안집어사(嶺南安集御史) ▲1731년 영남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 ▲1741년 북도진휼사(北道賑恤使) ▲1750년 관동영남균세사(關東嶺南均稅使) 등 모두 4차례 별견어사로 파견됐을 뿐이다. 앞의 3차례는 모두 흉년에 기민 구제 등 진휼을 감독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며 마지막은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고 세금을 정하는 법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어사 시절 활약상을 생동감 있게 보여 주는 관찬기록도 많지 않은 박문수가 여러 문헌 및 구전설화를 통해 어사의 대명사가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심 교수는 어사 박문수 이야기 속에는 관찰사 등 지방관으로 활약한 그의 정치 행적이 반영돼 있다고 추정한다. 병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낸 박문수는 군정(軍政)과 세정(稅政)에 밝은 ‘행정의 달인’이었으며 1729년 여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난 사실을 간파한 뒤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도내 제민창(濟民倉)의 곡식을 함경도에 보낼 정도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는 데 힘썼다. 1732년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들었을 때도 진휼을 담당하는 관리였던 그는 서울로 몰려든 백성들의 구제에 힘써 수많은 기민들을 살리기도 했다. 이 같은 배경에 정조 때 지방에 활발히 파견된 암행어사 관련 일화들이 박문수 이야기로 수렴됐다는 게 심 교수의 설명이다. 심 교수가 당대 민중의 박문수상(像)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임하필기(林下筆記)’ 등 18~19세기 야담집을 검토해 본 결과 그는 19세기 당시에도 암행어사로 활약한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어사의 대명사로 민중에게 확고하게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청구야담(靑邱野談)’ 등 조선후기 야담집에 박문수 관련 설화가 17편이나 수록돼 있지만 이들 야담집에선 박문수 이외의 어사에 관한 이야기도 10편이나 확인된다. 197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구전설화를 모은 ‘구비문학대계’에 210여 개의 박문수 설화가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 심 교수는 “조선후기 당대만 해도 어사 이야기의 주인공을 박문수 혼자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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