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스크랩] 우당 이회영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1. 14:57

 

이회영과 형제들 5. 형제들의 운명   네이버 블로그 | 2009.05.02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사회의 지도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회영과 형제들은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KBS 역사스페셜 '어느 육형제의 독립전쟁' 2003.03.01 방송분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항일 아나키스트’ 이회영 무대서 부활하다    2008.12.16 | 한겨레 | 미디어다음 [한겨레]연극 '인간의 시간'일제때 신민회 등 창설이회영과 형제들 삶 다뤄이호재 등 연기파 총출동1932년 11월 <중앙일보>(1933년 조선중앙일보로 개명 뒤 1937년 폐간) 사회면에 한 노인의...
  • [SBS스페셜]②신흥무관학교, 독립의 역사를 새로 쓰다    2009.03.02 | SBS | 미디어다음 불구하고 1910년, 조선은 일본에 병합된다.나라의 주권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회영과 형제들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난다. 서간도에 정착한 이회영 일가는 신흥무관학교를...

     

      이회영 [우당 이회영,우당]   위키백과   백과사전 더보기
    이회영(李會榮, 1867년 3월 17일[1] ~ 1932년 11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우당(友堂). 종교는 감리교로서, 대한민국 1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이 비석은 독립기념관에 세워진 이회영의 어록비다. 이 내용을 보면 1920년대 이회영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제를 확립하면서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써 중앙정치기구를 구성하며, 경제 건설에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추어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숨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운영의 합리화를 꾀하여야 한다"

     이회영은 독립된 조국을 이런 세상으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아나키즘은 사유재산도, 공산주의의 일당독재도 부정했다.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독립운동의 커다란 줄기였던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양쪽으로부터 모두 배척을 당했다. 이회영처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결연한 의지로 망명을 택했던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운명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창 옹은 가족 중에서 아버지 이회영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 지낸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규창은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규창 옹 : 가난해서 밥을 못 얻어먹은 것이 하루에 한끼를 먹을까 말까 했다. 내가 배가 고프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거고, 그렇다고 아버지가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도 아무 것도 없으시니까‥.

     

     독립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회영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회영은 빈민가를 전전하며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 시절 이회영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한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하루는 내가 우당을 집으로 찾아가 함께 공원에 나가 바람이나 쏘이자고 청하였더니 거절하였다. 그의 얼굴을 살펴보니 자못 초췌한 빛이 역력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의 아들 규학에게 물었더니 "이틀동안 밥을 짓지 못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했다.

     

     

     

     이미 예순이 가까워진 나이, 이회영은 퉁소를 불며 배고픔을 잊었다고 한다. 생활비조차 없던 시절 독립자금을 구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회영은 난을 쳤다. 생활비를 덜기 위해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아내 이은숙은 홀로 서울에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두 딸이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비참한 소식이 들려 왔다. 서울에 돌아온 이은숙은 남의 집 침모노릇까지 하며 모은 돈을 중국으로 부쳤다.

     

     이회영은 상해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상해에는 아들 규학이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932년 11월. 이회영은 최후의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행을 결심한다. 예순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로 향한 이회영은 당시 심정을 시사여귀(視死如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듯이 여긴다)로 표현했다. 죽음을 맞이할 땅을 찾아갈 만큼 그는 비장했다. 그것이 아들 이규창이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정문경 여사 (이규창 부인) : 상해부두에서 아버님 가실 때 배웅하고, 마지막 길이 되는 것 같아서 거기서 눈물이 많이 났는지 많이 울었다고 한다.

     

     대련항에 도착한 이회영은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기다리던 일제경찰에 붙들린다. 그리고 일제 경찰서 차디찬 감옥에서 치열했던 독립투사의 생을 마감했다.

     

     만석꾼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모두 내놓은 이석영 역시 오랜 세월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동생 이회영이 옥사한지 2년 후, 이석영은 상해에서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그 분(이석영)이 30년대 죽을 때까지 존경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말년기록이 없는 것은, 그 분이 은둔 생활을 주로 했다. 말하자면 표면에 나서는 것은 자기 아우들 회영이라든가 시영이라든가 "너희들이 해라. 나는 뒤에서 뒷받침 해준다." 계속 그분은 그러 태도로 움직였다. 더더군다나 30년대에 들어가서는 굉장한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럼에 따라서 사람들 이목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은둔생활을 했다.

     

     

     

     그후 막내 이호영도 가족과 함께 몰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만주로 떠난 6형제중 먼저 고국으로 돌아온 건영과 철영은 해방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중국에서 생을 마친 3형제 중 석영과 호영은 대 까지 끊기고 말았다. 결국 6형제 중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서중석 교수 : 조선왕조를 이끌어 왔던 지배층 벌열가문에서 독립운동에 그렇게까지 무관했다라고 한다면 나는 그것처럼 큰 수치도 없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이회영 형제가 권문세가 집안인데도 불구하고 그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것은 큰 의의가 있는다.

     

     

     

     1945년 9월, 임정요인들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벅찬 감격과 환희의 순간,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고 있다.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사람. 이시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프랑스 남부 해안 도시 칼레를 점령한 영국군은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만약 칼레 시를 대표하는 여섯 명이 목숨을 내놓으면 나머지 모든 시민을 살려주겠다. 이런 조건에 대해서 칼레 시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러 나섰던 그 여섯 명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당대 칼레시를 대표하는 귀족이들었다.

     

     

     

    이후 칼레시민들은 여섯 명을 기리기 위해 로뎅에게 조각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유명한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이다. 사회 지배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흔히 이 칼레의 시민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백년 전 우리에게도 칼레의 시민상을 떠올릴 만한 일가족이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돈과 권력을 모두 버리고 망명길을 택했던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다. 전 재산을 독립투쟁에 바치고 그들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견디며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다. 그중 3형제가 중국 땅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 자녀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사회의 지도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회영과 형제들은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KBS 역사스페셜 '어느 육형제의 독립전쟁' 2003.03.01 방송분을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