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진의 이순신 이야기(8): 창조경영편-염초(焰硝), 협력개발의 산물
가치창조, 협력개발의 산물, 염초(焰硝)
요즈음 젊은 세대 즉 20대의 인생을 장미빚 인생이라 한다. 장기간 미취업 된 빚쟁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20대는 모두가 이럴까? 아니다. 오히려 몇 군데씩 취업이 돼서 선택의 고민에 빠져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물론 극소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청년실업이 심각한가? 물론 경제 불황의 탓이 크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학력 쌓기, 스펙 쌓기에만 열중했지 특별히 잘할 줄 아는 것,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나친 이기주의와 경쟁심으로 남들과 더불어 협력하는 따뜻한 인성(人性) 마저 부족하다. 그야말로 차별화된 능력도, 남다른 아이디어도 없으면서 대졸이라는 간판 때문에 기대치만 높아져 있는 20대의 미래가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보라, Microsoft의 빌게이츠가, Apple의 고(故) 스티브잡스가 대학을 제대로 졸업했는가? 아니다. 그들에겐 대학졸업장이 없다. 스티브잡스는 리드대학을 중퇴했고 빌게이츠는 하바드대학을 중퇴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세계최고의 경영자, 세계최고의 부호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면 그들의 성공은 혼자의 힘으로 이룩한 것인가? 아니다. 애플에는 스티브 잡스와 함께한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이 있었고, 마이크로소프트에는 빌 게이츠와 함께한 공동창업자 폴 앨런이 있었다. Google은 어떤가? 현재의 CEO 래리 페이지와 공동창업자 세리게이 브린이 있다. 이들에겐 더불어 함께한 협력자이자 동업자가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의 결합으로, 서로가 부족한 부분의 보완으로 단시간에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기적에 가까운 시너지효과를 이루어 낸 것이다. 소위 아이디어와 기술의 융합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일, 남의 나라의 일만이 아니다. 이미 16세기의 조선에도 아이디어와 기술의 융합으로 가치창조를 실현했던 걸출한 CEO, 이순신이 있었다. 예컨대 이순신의 아이콘인 거북선 창제는 나대용과의 협력으로, 왜놈들의 조총에 맞선 정철총통 개발은 정사준과의 협력으로 가능했다. 이제 이순신의 또 다른 융합경영의 한 예를 화약의 원료인 염초개발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1592년 5월초부터 9월초까지 남해안 구석구석에 출몰하는 왜적들을 소탕하고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려 네 달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르다 보니 이순신 군영엔 이미 화약이 바닥나버린 것이다. 첫 출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부산포해전까지 치르는 동안 무섭게 뿜어대던 화약연기와 함께 그동안 비축했던 화약은 모두 소진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전라좌수영에 화약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도의 여러 군영에서 화약을 요청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모두 나누어준 탓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이순신은 1593年 1月 26日 장계(請賜硫黃狀)에서 토로하고 있다.
“본영과 각 진포에 있는 화약은 기본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전선에 나누어 싣고 다섯 번이나 영남해역으로 출전하여 거의 다 써버렸습니다. 더구나 본도 순찰사, 방어사, 소모사, 소모관 및 여러 의병장과 경상도 순찰사 및 수사들의 청구도 번거로운 정도로 많아서 달리 쌓아둔 것이 매우 적습니다.”
당연히 화약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선수군의 화기는 천자, 지자, 현자, 황자총통 등 대부분이 화약을 사용하는 대포였다. 그러니 조선수군에겐 화약전쟁이나 다름없는 해전에서 화약이 없으면 이 모든 무기들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당시에 화약조달은 어떻게 했는가? 오늘날과 같이 방위사업청에서 조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부대에서 자급자족으로 제조해서 써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이순신도 화약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화약을 제조하려면 염초, 목탄, 유황 이 세 가지 재료가 있어야 한다.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확보할 수 있고, 유황은 화산지대에서 채취할 수 있으나 전쟁 중에는 불가능 하므로 조정에 의뢰해서 조달받았다. 물론 조정에서 제 때에 유황을 보내주지 못해 임진장초에도 두 번씩이나 유황을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장계가 있다.
“신의 군관 훈련 주부 이봉수(李鳳壽)가 그 묘법(妙法)을 알아내어 3개월 동안에 염초 1천근을 끓여 내었으므로 그 염초를 조합하여 본영과 각 포구에 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석유황(石硫黃) 만은 달리 나올 곳이 없으니, 100여 근쯤 꺼내어 내려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請賜硫黃狀1593.1.26)
“사변이 발발한 이래 염초(焰硝)는 넉넉히 끓여 내었으나, 거기 넣을 석유황(石硫黃) 만은 어디서 나오는 곳이 없으므로 묵은 곡간에 있는 유황 200여근쯤 꺼내어 내려 보내주시기 바랍니다.”(請下納鐵公文兼賜硫黃狀 1593.11.17)
그러나 이 장계는 부족한 유황을 보내 달라기 이전에 이봉수가 염초를 개발했다는 사실, 염초를 넉넉히 끓여냈다는 사실을 먼저 피력하고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 중요한 화약을 만들기 위해 염초제조의 묘법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학지식이 있을 리 없는 이순신에게 염초제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염초는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라 화학적 처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하는 수없이 누군가에게 염초개발을 시켜야만 했다. 이때 발탁된 사람이 이봉수였다. 물론 이봉수 역시 화학이 무엇인지, 화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순신도 이봉수도 염초를 만들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고려 말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이 중국 원나라 이원(李元)으로부터 염초기술을 배워서 화약을 개발했고 화통도감(火熥都監,1377)을 설치하여 화약을 제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순신도 이봉수도 극비로 취급했던 최무선의 화약제조비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최무선이 저술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이나 화포법(火砲法) 또는 1448년(세종 30) 9월에 간행되었던 화포 및 화약사용법에 관한「총통등록 銃筒謄錄」등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봉수는 어떻게 화약을 만들었을까, 화약제조 책임을 맡게 된 그는 세종실록 등 몇 가지 군사기술서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을 샅샅이 뒤지고 심지어 구전들까지 수집한 결과 염초(질산칼륨, Potassium Nitrate, KNO3)가 지붕 처마 밑이나 화장실 주변의 흙 등 맵거나 짜거나 쓴 특수한 토양 즉 질소성분과 알카리성분을 채취해서 물에 녹인 후 끓여내면 채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침내 곳곳에서 긁어모은 흙들에 메모지를 붙이고 실험을 거듭한 결과 놀랍게도 염초를 만들 수 있는 흙들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염초로 화약을 제조한 결과, 화약을 매달고 심지에 불을 붙여 쏘아올린 신기전은 요란한 굉음과 함께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가 폭발했다. 드디어 화약제조에 성공한 것이다.
과연 이봉수는 누구였는가? 이순신은 1차 출전 승첩장계에서 “군관 정로위(定虜衛) 이봉수가 왜 대선 1척을 총통으로 쏘아 깨트리고 불살랐습니다.” 제2차 출전 승첩 장계에서는 “신의 군관인 정로위 이봉수 등은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역전(力戰)하였습니다.” 라며 이봉수를 역전의 맹장(猛將)으로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봉수의 이름을 난중일기가 처음 시작되는 임진일기 첫 페이지부터 만날 수 있다. 용맹한 군관으로서가 아니라 재주꾼 군관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임진년 정월 11일, 종일 가랑비가 내렸다. 늦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이봉수가 선생원 돌 뜨는 곳에 가보고 와서, “벌써 큰 돌 열일곱 덩어리에 구멍을 뚫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임진년 2월초4일,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뒤에 북봉 봉화대(烟臺)쌓는 곳에 오르니, 쌓은 곳이 매우 좋아 전혀 무너질 리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종일 구경하다가 저녁 무렵에 내려와서 해자(垓字) 구덩이를 둘러보았다.”
이봉수의 일하는 모습에 반해서 하루 종일 구경했다는 것인데 그날 이순신이 본 것은 단순한 봉수대가 아니라 이봉수의 놀라운 기술자적 재능 즉 기술이었다. 이러한 이봉수에게 이순신은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했다. 그것은 전선을 타고 나가 수십 척의 배를 무찌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 바로 화약원료인 염초를 만들어 내라는 명령이었다.
이봉수는 이순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집념과 의지로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염초제조의 묘법을 알아냈던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염초가 없었다면 화약전쟁이나 다름없는 임진전쟁에서 이순신의 백전백승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창의적 사고와 이봉수의 기술적 재능으로 만들어 낸 가치창조, 학문적 배경이나 기술적 지식이 없어도 화약을 만들어내는 가치창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청년실업, 장미빚 인생에 시름하는 젊은이들에게 장밋빛 희망을 안겨주는 이순신의 무중생유(無中生有) 창조경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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