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을 만든 사람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까닭 이순신(李舜臣)의 척근에서 그를 도와 전쟁을 이끈 7인의 숨은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일곱 명의 숨은 영웅 이야기
●나대용(羅大用:1556~1612): 조선 과학기술의 꽃인 거북선을 만든사람
본관은 금성(錦城).자는 시망(時望).전라 나주출생.
일찍이 문장이 뛰어났으나,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여 무예수업에 전념하여 28세 때 훈련원 별시(別試)에 병과로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1년전인 1591년(선조24)에 전라좌수영수사(全羅左水營水使)로 있는 이순신장군을 찾아가 그동안 연구한 거북선의 설계도를 보이는 한편 국방에 대한 계책을 아뢰었다.임진왜란 하면 이순신, 이순신 하면 거북선이 떠오르지만 실제 거북선을 설계하고, 제작을 총지휘한 사람은 나대용 장군이다. 나대용은 어린 시절부터 천하무적의 배를 만들겠다는 열망으로 한길을 걸었으나 아무도 그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았다. 마지막을 각오하고, 찾아간 이순신 장군은 설계도의 의도를 한눈에 파악하고, 곧바로 나대용으로 하여금 거북선 제작을 책임지는 직책을 맡게 했다. 나대용과 이순신(李舜臣) 아래의 병사들이 배 만드는 일에 매달린지 1년 만에 마침내 ‘거북선’이 탄생한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은 나라를 구하는 비밀 병기가 된다. 조선 과학기술의 꽃이라 할 만큼 대단히 과학적으로 설계된 거북선은 바로 나대용의 과학기술과 이순신의 전술이 합쳐진 두 사람의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해현감(南海懸監)으로 있을 때는 쾌속정인 해추선(海鰌船)을 발명하였다.
●정걸(丁傑:1514~1597): 조선 최고의 해전 전문가
본관은 영광(靈光),자는 영중(英中),호는 송정(松亭)이다. 1514년(중종9)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浦頭面)에서 태어났다. 1544년 무과에 급제하였다.무관 정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40년 전, 배 위에서 대포를 쏠 수 있도록 설계된 ‘판옥선’을 개발한 사람이다. 거북선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단 3척뿐이던 거북선과 함께, 해전을 이끌었던 배가 바로 판옥선으로,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싸움배이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무기를 개발해 꾀돌이 발명왕으로 불리던 정걸은 거급 해전을 치르며,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된다. 북방 여진족을 몰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던 조선이 육지전을 중시하면서 정걸의 이름이 잊혀지는 듯 했으나,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이순신을 만나면서 그 명성을 되찾게 된다. 자신보다 나이가 서른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이순신(李舜臣)의 열린 마음과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준 정걸 장군으로 인해 조선 수군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1592년 5월 이순신 함대의 첫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전공을 세운 이래, 7월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9월 부산포해전에서도 큰공을 세웠다.
그후 행주대첩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한다. 1595년 관직에서 물러난 뒤,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여름 83살 나이로 죽었다.포두면 안동사(安洞祠)에 배향되었다.
●어영담(魚泳潭:1532~1594): 평생 물길을 연구한 물길 전문가
본관은 함종(咸從). 자(字)는 경유(景遊). 그러나 고향이 어데인지 자세히 알려진게 없으나 경상도 함안(咸安)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무예에 능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나 일찍이 여도만호(呂島萬戶)에 특채되고, 1564년 식년무과에서 병과 제3인(전체 제11인)으로 합격했다. 해전에서 승리의 관건은 바닷물의 흐름을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느냐에 있다. 출세 길을 마다하고 평생 물길 연구에 삶을 바친 어영담도 이순신을 만든 숨은 영웅이다. 그렇잖아도 물길 전문가를 찾고 있던 이순신은 어영담을 찾아내 물귀신의 눈을 얻음으로써 바다 싸움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다. 어영담은 이후 31인의 특공대를 조직해 당항포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1594년 전염병에 걸려 한산 통제영에서 세상을 떠났다.묘소는 경남 함안에 있다.
●이봉수: 화약은 내게 맡겨라 화약전문가
그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성암공(誠庵公) 이인정(李仁挺)의 후손이다.임진왜란은 화약 전쟁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될 무렵 조선 수군에 화약이 떨어지자 이순신은 급히 이봉수를 찾는다. 이봉수는 바다 속에 철쇄를 심을 때 나무 도르래를 이용하는 발상을 하기도 하고, 봉수대를 마치 예술품처럼 완벽하게 설치할 만큼 과학자다운 역량을 보였던 인물이다. 이순신은 이봉수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위기 상황이 닥치자 이봉수를 찾은 것이다. 이봉수는 애매한 기록 하나를 근거로 수없이 많은 실험을 거듭한 끝에 화약의 재료인 염초 제조에 성공하고, 따라서 조선은 승리의 폭죽을 다시 쏠 수 있었다.
●정사준(鄭思竣:1553~?):일본의 조총을 뛰어넘은 정철통총을 만든사람
본관은 경주(慶州). 호(號)는 성은(城隱)이고 자는 근초(謹初)이다.경상도수군우후를 지낸 정승복(鄭承福)의 셋째아들로 전라도 순천(順天)에 태어났다. 1584년(선조17)별시무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선전관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훈련주부(訓鍊主簿)가 되어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의 휘하에 활약하였다.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최대 무기는 조총이었다. 우리의 승자총통과 비교하면 방아쇠가 있다는 점이 다른데, 그 결정적 차이가 임진왜란 초기, 조선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제의 몸으로 이순신을 찾아 간 정사준, 그는 조총에 버금가는 총을 만들어보겠다는 열정을 밝혔고, 이순신은 그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과학기술에 열정을 품었던 이필종, 안성, 동지, 언복 등과 팀을 이뤄 마침내 조총에 버금가는 정철총통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 양반 정사준과 함께 한 이들은 평민이거나 당시 백성의 대접을 받지 못했던 노비들이다. 이순신은 이렇듯 신분과 상관없이 그들의 능력과 열정을 샀으며, 결국 조선의 과학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순천의 옥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운룡: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천재 전략가 이순신은 자신의 후계자로 이운룡 장군을 꼽았다. 이운룡은 다름아닌 경쟁자 원균의 부하이다. 1587년 여진족을 상대로 한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과 이운룡은 서로의 자질과 됨됨이를 알아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운룡은 자신의 상관인 원균을 설득해 어려운 시기에 이순신의 출전을 끌어내도록 하고, 이순신도 비록 경쟁자의 부하이지만, 이운룡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도와준다. 이후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이 구상한 학익진이 성공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유인 작전을 펼친 장수가 바로 이운룡이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두 장수의 합심으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을 이끌어 냈으며, 이후 일본이 다시는 조선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억기: 이순신이 빚진 장수 전라우수사 이억기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발벗고 나서서 이순신을 도와준 장수가 이억기이다. 명문가 자손이었던 이억기는 자칫 이순신과 경쟁 관계에 설 수 있었으나 이순신의 실력을 인정하고, 2인자로서 숨은 도우미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전쟁 막바지 일본의 계략으로 이순신이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조정 대신들에게 이의 부당함을 알려 이순신을 또 한번 구해낸다. 서로를 진심으로 아꼈던 두 영웅은 지금 여수 충민사에 나란히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영웅, 이순신이렇듯 자신의 꿈을 소중히 여겼던 숨은 영웅들은 실력만을 존중했던 이순신 장군을 만나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조총으로 무장하고, 수년 간 준비 끝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이 단 한 사람, 이순신 앞에 무릎꿇은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끝으로 이순신 장군이 일생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켰던 몇 가지 신념을 중심으로 진정한 영웅의 면모를 낱낱이 볼 수 있다. 이순신은 어릴 적 골목대장 시절부터 ‘싸움은 힘이 아니라 과학’임을 몸소 깨닫는다. 이때의 깨달음이 훗날 최고의 전술가요, 지장(智將)의 명성을 그에게 선물한다. 이순신은 실력과 상관없이 정쟁의 소용돌이에 좌우되는 문관보다는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평가받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 무관의 길을 선택할 만큼 다른 어떤 것보다 실력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다. ‘어떤 경우에도 실력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 철저한 유비무환의 자세,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바로 이러한 점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를,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영웅으로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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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준(鄭思竣)
(옥계공 셋째아들)
자 : 근초
호 : 성은
본관 : 경주 (순천 출생)
출생/사망일 ?
젊어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선전관이 되었다.
전 훈련원봉사 정사준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제의 몸으로 기복된 사람인데 형제들과 함께 통곡하며, 가산을 정리하여 군량미를 확보하여 이순신의 막하로 간다.
충성심이 분발 하였으며 경상도와 접경한 요충지인 광양현 전탄의 복병장으로 매복하여 적을 막는 일에 있어서 계책을 써 적들로 하여금 감히 경계선에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다.
난중일기 1592년(임진)9월 25일 (장계) 에서 이순신은 "정사준은 순천부의 의로운 선비이며 전훈련원봉사였던 이의남과 약속하고 각각 의연곡식을 모아 모두 한배에 싣고 임금의 행제소로 향 하였다"고 적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최대 무기는 조총 이었다. 조선군의 총통과 비교하면 방아쇠가 있어 임란 초기 조선군은 벼랑에 몰렸었다.
정사준은 왜군 조총에 버금가는 총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여 백성들중 솜씨있는 대장장이들과 적의 조총보다 더 우수한 총통을 만들어 생산을 하였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조정으로 건의(장계)하면서 널리 보급케 하고, 수군의 화력 증강에 크게 기여 하였다.
"신의 군관 훈련 주부 정사준이 묘법을 생각해 내어 대장장이 낙안수군 이필종, 순천 사삿집 종
안성, 김해 절의 종 동지, 거제 절의 종 언복등을 데리고 正鐵을 두드려 만들었는데 총신도 잘 되었고 총알이 나가는 힘이 조총과 같습니다........ 정철로 만든 조총 5 자루를 보내니 .........." (장계)
양반 정사준과 함께 한 이 들은 평민 이거나 노비들 이었다. 이순신과 정사준은 신분과 상관없이 그 들의 능력 믿었고, 그 들은 열정으로 정철총통을 만드는데 성공을 하여다.
결국 조선의 과학 기술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효과를 얻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동력이
되었다.
난중일기 1593년 (계사) 5 월 12 일에 - 새로 만든 정철 총통을 비변사에 보냈다 -
난중일기 같은해 9 월 14일에는 - 정철 총통은 전쟁에서 매우 긴요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잘 알지 못하였다. 이제야 온갖 연구를 하여 조총을 만들어 내니, 왜의 총보다도
나았다. 명나라 사람이 진주에서 시험 사격을 하고는 잘 되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에서 같은 모양으로 넉넉히 만들어 내도록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려 알게 했다.- 고 기록 되어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정사준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에도 충의심이 계속 발휘 되었으며, 칠천량 패전후 이순신이 임지로 가는 중 순천 부근에서(옥과현) 그 를 마중했다.<난중일기 정유(1597)년 8 월 5일> 정유재란때 에도 많은 군량을 조달하는 큰 공을 세워다.
그에게 결성현감을 제수하고, 이후 가선대부병조참판에 추증하였으며, 옥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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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준(鄭思竣)1553~1604
(55세,13대조)
♠.성은공파(城隱公派)
자(字)는 근초(謹初), 호는 성은(城隱),병조판서 옥계공 정승복(鄭承復의 셋째 아들이다. 공(公)은 1553년(명종8년)에 태어났으며, 등략(謄略)과 도량(度量)이 있었고 무예(武藝)가
절륜(絶輪)하여,1584년 (선조17)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봉사(奉事)를 거쳐 선전관(宣傳官)으로 재임중인 1590년(선조23년)에 모친상(母親喪)을 당(當)하여 여묘(廬墓) 중 임진왜란(任辰倭亂)의 돌발(突發)로 조명(朝命)에 의하여 묵리(墨裏)로 본부주사(本府主事)로 기복(起復)하여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막하(幕下)에서 복병장(伏兵將)으로 광양(光陽)의 전탄(錢灘)을 지키며 기묘(奇妙)한 작전을 펴서 적을 막았으므로, 적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행재소(行在所)에 군량(軍糧)이 없고 길이 끊어졌다고 듣자, 아우인 매헌공(梅軒公) 사횡(思竑)과 조카 곡구공(谷口公) 빈(賓)과 더불어 가산(家産)을 기우려 의곡천석(義穀千石)을 모아서 발선(發船) 하였으나 중병(重病)에 눕고 그 아우와 조카로 하여금 수양헌상(輸糧獻上)케 하였다.
1593년(선조26)에 예빈사주박(禮賓寺主薄)을 거쳐 다시 선전관(宣傳官)에 복귀 되였고 왜군(倭軍)의 화포원리(火砲原理)를 해득(解得)하는 사람이 없었음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공(公)에게 의논(議論)하여 그 원리를 구득(究得)하여 치장(治匠)4명을 지휘(指揮)하여 주조(鑄造) 하였든 바, 왜총(倭銃)과 틀림이 없음에 신제대포(新製大砲) 오병(五柄)을 조정(朝廷)에 봉상(封上) 하였고 또 거북선의 조선(造船)에도 적극 참여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충무공은 그 공(公)을 논상상계(論賞狀啓) 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에는 모속관(募粟官)으로 종사(從事)하고 1599년(선조32)에 결성현감(結城縣監)을 역임(歷任)하였다.
공(公)은 질만(秩滿)에 환향(還鄕)하여 다시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1604년(선조37) 졸(卒)하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부(父)는 현감잠(縣監潛)이다.
묘(墓)는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西面) 동산리(東山里) 탑현산(塔縣山)의 신원(辛原)에 합부(合祔)되였다.
공(公)은 1802년(순조1)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겸(兼) 겸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증직(贈職) 되었고, 1812년(순조11)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曺參判)에 가증(加贈) 되었으며, 묘표(墓表)는 대제학(大提學) 홍양호(洪良浩)가 지었고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그리고 1823(순조23)에 순천(順天)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고, 광주(光州)에 창의비(倡義碑)와 금산(錦山)에 대첩비(大捷碑)가 있다.
참고문헌(參考文獻): 문헌록(文獻錄) 충무전서(忠武全書) 임진동사록승평지(任辰同事錄昇平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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