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자점 [金自點]조선 문신 브리태니커 1588(선조 21)~ 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 을 주도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억령(億齡)이며, 아버지는 함( )이다. 성혼(成渾)이 그의 스승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1622년(광해군 14)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이괄(李适) 등과 함께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했다. 곧 동부승지가 되었고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이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서(功西)와 가담하지 않은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집권 공서파의 영수로서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를 탄압했다. 1633년 도원수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토산(兎山)싸움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1640년에 풀려나 강화부유수가 되고,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인조의 庶女)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1642년 병조판서,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고, 1644년에는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645년에는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를 죽게 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몰아냈다. 인조 말년에 공서(功西)가 분열하자 낙당(洛黨)의 영수가 되어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과 대립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김상헌(金尙憲)·송준길(宋浚吉) 등 청서파가 정권을 잡은 뒤, 탄핵을 받아 홍천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실패했고, 1651년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임경업(林慶業, 1594~1646)장군의 부친인 임황은 원주감영의 옥사장이었습니다.
비록 말단직에 있었으나 그의성품은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두터웠습니다.
어느날 살인혐의로 한 청년이 붙잡혀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살인할 것 같지 않은 지극히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애끓게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을 들어 보니 누명을 쓴것 같았습니다..
그대로 두면 살인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을것 같았기에 그는 한 계책을 일러주어 그를 도망가게 했습니다.
그후 임황은 옥사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손우 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중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기에 곡식을 주니그 스님은 "이 집이 임옥사장 집이 아니오?"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의 물음에 의아해진 임황이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하고 묻자 스님이 답하기를
"나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하며 고깔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 보아도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럴만도 하시리이다,, 소승은 십년전 원주 감영에 살인혐의로 붙들려 갔던 사람이올시다.
그때 옥사장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영낙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으신 인정으로 무리해서 제가 살아날 기회를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나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소승은 그간 뜻한바 있어 삭발을 하고 입산하여 수도에 힘썼으며 이미 부처님의 덕을 입어 명산 대찰의 자리를 잡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승이 옛날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묘자리나 하나 잡아드려 훌륭한 자손이나 보시게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임황은 자신이 살려준 사람이 무사히 스님이 된것도 기쁘지만 묘자리를 알아봐 준다니 너무가 기뻐 했습니다..
이리하여 그 스님은 지금 평촌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그의 조부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묘자리를 정하고 나서 경고 하기를..
"만약 상을 당하면 삼일장으로 하여 장사날에 광을 짓고 거적을 씌워 관을 모시십시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상주 혼자서 광을 지키는데 광속에서 혹시 어떤 소리가 들리거나 괴이한 일이 일어나도 절대 들여다보거나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그 뒤 부친상을 당한 임장군의 아버지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스님의 말대로 광을 짓고 그 위에 거적을 씌우고 밤샘을 시작했다.
그렇게 삼일장 마지막날 자정이 되었을 무렵 적막하기만 하던 광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나중에는 쨍그렁거리는 쇠소리마저 들렸습니다.
임황은 무의식중에 거적 한귀퉁이를 쳐들고 광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가 목격한 광속의 광경은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광속에서 두 사나이가 칼을 휘두르며 겨루고 있었는데 임황이 거적을 들추는 순간 한 사나이와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임황과 눈이 마주친 사나이가 한눈을 파는 순간 다른 사나이의 칼에 맞아 무참이 쓰러져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황급히 거적을 씌웠지만 이와 같은 두 사나이의 싸움이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하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채
스님이 정해준 묘자리에 묘를 썼습니다.
그리고 삼우제를 올리려고 묘에 가보니 누구의 짓 인지 관이 묘밖으로 튕겨져 나와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관을 묻고 그날밤은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덤곁에서 지키기로 했습니다.
한밤중이 되자 붉은옷을 입은 세사람의 무사가 나타나더니 임장군의 아버지를 보고 꾸짖었다.
"당신같은 비겁한 사람은 이 명당에는 묘를 모실수 없오. 이 자리는 따로 임자가 있는데 왜 여기다 묘를 & #50043;소"
하고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임황은 그들앞에 비는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중의 한사람이
"이왕 이리 되었으니 할수 없소"하고는
"그럼 김공의 자리는 저편으로 정합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이명당은 이 고을을 다스리는 김군수가 점한 땅으로 임홍이 본 무사들의 싸움은
가문의 수호신들의 대결 이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임 가문의 수호신이 승리했지만 임황이 금지 사항을 지키지 않았기에
토지신들이 이를 받아 들이지 않은 거였죠,,
하지만 이미 입관한 이상 토지신들은 임홍의 아버지의 관을 모십니다..
그리고 명당을 뺏긴 김군수의 아버지가 묻힌 땅 역시 명당이긴 하지만 사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명장 임경업 장군과 역모자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이었습니다..
임경업은 태어날때 흰 옥을 가지고 태어났고 김자점은 이마에 핏자국 같은 붉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임경업은 청나라 군을 막으면서 나라를 지키지만
긴자점은 청나라에게 의탁하여 영의정 벼슬까지 오른후 청나라 왕과 결탁하여 임경업에게
심기원과 한께 모반을 꽤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인조를 위협하여 임경업을 잡아들여 갖은 고문으로 죽게 만들었죠..
김자점은 예전부터 청나라에 나라의 기밀을 알려주는등 역적 이지만 영의정 벼슬까지 오른 인물이죠..
나중에 사형 당하긴 하지만 그는 젊을때부터 임경업에 대한 알수 없는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임경업과 김자점의 악연은 어쩌면 명당을 둘러싼 두 가문의 대립의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글; 김범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임경업 장군(林慶業, 1594∼1646)
“외교는 비단에 싼 칼”이라는 어느 외교관의 말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거의 모든 인간의 내면과 행동은 그 표리(表裏)가 부동(不同)하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어쩌면 숙명이다. 그 부동함을 최소화하거나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종교나 문명의 목표와 수준일 것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외교는 그런 표리의 불일치가 극도로 만연한 분야였다. 중화질서의 마지막 보루였던 명(明)이 ‘오랑캐’인 청(淸)에 속절없이 멸망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조선을 지탱하던 주요한 질서는 거대한 혼란에 휩싸였다. 그런 혼란은 수많은 모색과 반발과 수정을 거친 뒤에야 ‘소중화(小中華)’라는 개념을 찾아 일단 진정되었다.
‘오랑캐’에게 굴복해 사대할 수밖에 없는 대외적 현실이 자명할수록 ‘복수설치(復讎雪恥)’와 ‘재조보은(再造報恩)’의 이념과 지향은 강화되었다. 조정의 논의와 유자(儒者)들의 글에서 그런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투명하게 드러났고, 때로는 그만큼 공허하기도 했다.
임경업은 그런 괴리의 시대에 저항하다가 옥사한 비운의 무장이었다. 출전과 망명, 투옥과 비극적인 죽음으로 구성된 그의 삶은 그 뒤 안타까움과 분노의 큰 반향을 일으켰고, 문학 작품으로 재현되어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 순조로운 출세
임경업의 본관은 평택(平澤)으로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이다.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지 않았다가 그에 와서 비로소 현달했다”는 기록(이재, [밀암집(密菴集)] 권16, <임장군 경업전>)으로 볼 때, 그의 가문은 그리 융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임경업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24세 때인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후금이 건국되면서(1616년) 왕조 교체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임경업이 급제한 해에 명을 처음으로 공격했다.
임경업은 함경도에서 군직을 시작했다. 갑산(甲山)에서 2년 동안 근무한 뒤 같은 함경도의 삼수 소농보(小農堡) 권관(權管, 종9품)으로 옮겼다. 거기서 군량과 군기를 잘 구비한 공로로 절충장군(折衝將軍, 무반 정3품 당상관)에 임명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그는 1624년(인조 2) 이괄(李括)의 난에서도 전공을 세워 진무원종(振武原從) 1등공신에 책봉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올랐다. 30세의 나이에 이룬 빠르고 순조로운 관운이었다.
이듬해부터는 근무지가 전라도로 바뀌었다. 임경업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겸 우림위장(羽林衛將, 종2품)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 종3품. 방답은 현재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에 임명되었고, 1년 뒤에는 전라도 낙안(樂安)군수로 부임했다.
이때까지 임경업 개인의 삶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대륙에서 청은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그의 나머지 삶을 지배한 청과의 투쟁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 호란과 그 결과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임경업은 33세의 혈기 넘치는 나이였다. 낙안군수였던 그는 전라병사 신경인(申景禋)의 좌영장(左營將)으로 참전했지만, 두 달 만에 강화가 성립되는 바람에 다시 내려왔다.
그 뒤 임경업은 평안도에 배속되었다. 청의 주요한 공격로를 막을 수 있는 뛰어난 장수를 배치한 결과였다. 그는 1629년부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 종4품), 평양 중군(中軍, 종2품), 검산산성(劒山山城, 현재 평안도 선천) 방어사(防禦使, 종2품), 정주(定州)목사, 청북(淸北, 청천강 이북) 방어사, 안변부사, 의주부윤, 의주진 병마첨절제사 등을 겸직하거나 거쳤다. 그가 주둔한 거점은 최북방의 백마산성(白馬山城, 평안북도 의주 소재)이었다.
이때 임경업은 명에까지 이름을 알리는 전공을 세웠다. 1633년 4월 공유덕(孔有德)ㆍ경중명(耿仲明) 등이 명을 배반하고 후금과 내통하려고 하자 명의 장수 주문욱(朱文郁)과 협공해 섬멸한 것이었다. 이 공로로 임경업은 명에서 총병(摠兵)에 임명되었고, 그 뒤 ‘임총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임경업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경제적ㆍ군사적 상황을 개선시켰다. 조정의 재정 지원을 받아 중국과 무역해 자금을 축적하고 유민(流民)을 모아 둔전(屯田: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설치해 군량에 충당한 토지)을 개설해 상주 인구를 늘렸다.
그러나 조정은 현실보다 명분에 집착했다. 1636년 12월 청군은 재침했고, 보름 여 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런 빠른 승전의 요인은 조선이 설치한 주요 방어 거점을 그대로 통과해 수도를 직격(直擊)하는 전략이었다. 당연히 청군은 첫 걸림돌인 임경업의 백마산성을 그대로 지나쳤다. 임경업과 그의 정예병은 조국의 항복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강요된 참전
병자호란 이후 청은 대륙 정복을 본격화했다. 청은 조선에 군사와 물자를 요구했고, 조선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장수였던 임경업이 그럴 때마다 파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임경업은 나라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는 나아갔지만, 다양한 구실로 접전을 회피했고 명에 정보를 제공했다.
청의 첫 목표는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군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1637년 2월 임경업은 수군장(水軍將)으로 임명되어 출전했지만, 명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미리 정보를 주어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2년 뒤인 1639년 말부터 청은 명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 :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 일대)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다시 조선에 병력과 군량을 요구했다. 1640년 4월 임경업은 주사상장(舟師上將)에 임명되어 전선(戰船) 120척에 수군 6천여 명과 군량 2만 7천여 석을 싣고 참전했다. 그러나 이때도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 참전 사실을 미리 알렸으며, 힘껏 싸우지 않았다. 청은 심양에 볼모로 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임경업의 행동을 강력히 항의했다. 조정은 임경업의 귀국을 지시했고, 그는 1641년 1월에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청의 압력으로 일단 그의 관직을 삭탈했지만, 곧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임명했다. 그러나 참전 중 청에 협력하지 않았고, 승려 독보를 보내 정황을 명에 알린 사실이 발각되었다. 1642년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체포해 청으로 압송했다.
● 탈출과 망명
그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 4년 동안 임경업은 고난에 찬 역정(歷程)을 밟았다. 그는 압송되던 도중 11월 6일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서 탈출했다. 그는 그전에 심기원(沈器遠)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ㆍ체도(剃刀)를 얻어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는데, 그것을 이용해 승려로 변장했다. 그는 반년 정도 경기도와 강원도를 돌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金自點)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 일명 효원(孝元))의 주선으로 상선을 타고 명으로 망명했다.
그는 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없이 열악한 교통 수단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청은 임경업의 부인과 형제를 압송했고, 부인 이씨는 심양 감옥에서 자살했다. 임경업은 등주도독(登州都督) 황종예(黃宗裔)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갔다. 명은 그를 평로장군(平虜將軍 : 일설에는 부총병)에 임명했다.
그러나 형세는 이미 기울었다. 1644년 청은 북경을 함락했다. 명은 남경으로 천도했지만 곧 함락되었고, 마등고도 청에 항복하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무장의 결연한 의지는 거대한 현실 앞에서 결국 무너졌다.
● 압송과 옥사
임경업 장군 묘소. 그는 모진 고문 끝에 53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숙종 23년에 와서야 복관되었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묘는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풍동 소재.
그때 조선에서는 좌의정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났다(1644년). 앞서 말했듯이 심기원은 임경업의 망명을 도운 인물이었기 때문에 임경업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1645년 1월 임경업은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 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체포되었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1646년 6월 서울로 압송되었다.
인조는 그를 친국(親鞠: 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함)했고, 심기원과의 관련을 밝히려고 했다. 임경업은 망명할 때 심기원의 도움을 받은 것은 인정했지만, 역모 가담은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가장 강력한 실력자였던 김자점이 그의 처형을 주장했다. 그는 지난 날 임경업의 상관이자 친밀한 후원자였지만, 앞서 자신의 종 무금이 임경업의 망명을 도운 사실이 드러나면 자신도 역모에 연루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임경업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6월 20일 옥사하고 말았다. 53세의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는 1697년(숙종 23) 12월 복관되고, 충주의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으며,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명청 교체의 거대한 국제적 격변 속에서 대명(對明)의리의 이념을 실천하다가 비참하게 옥사한 명장의 생애는 그 뒤 깊은 애도와 공분(公憤)을 불러왔다. 그것은 [임경업전]이라는 소설로 재구성되어 널리 전파되었다. 송시열(宋時烈)ㆍ이재(李縡) 같은 조선 후기의 주요한 유학자들도 전기를 지어 그를 기렸다(<임장군 경업전>. 각각 [송자대전] 제213권, [밀암집] 제16권).
<참고문헌>
이복규, [임경업전 연구], 집문당, 1993; 이성무, <임경업-병자호란, 치욕과 맞서다>, [명장열전], 청아출판사, 2011; 장덕순, <임경업>, [한국의 인간상] 2, 신구문화사, 1980.
이 서인 세력 속 "무능한 무장"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자점이었고, 그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책록 된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1637년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임경업장군이 청군의 남침로인 압록강 부근 평안도의 의주산성과 백마산성을 굳게 지키며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자 도원수 김자점은 "청나라 군대를 먼길을 행군하게 하여 지치게 한 다음 때려잡아야 한다"는 핑계로 임경업 장군과 병사들을 의주산성에서 한참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황해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으로 후퇴하도록 명령하여 청군의 남하 길을 열어주었다
병자호란을 맞아 청나라와 내통을 하는 간자(간첩)여야만 할 수 있는 행동을 "조선의 도원수 김자점"은 한것이다
거칠것 없이 황해도 까지 밀고 내려온 청군에게 임경업장군의 조선방어군은 "임진강이 청군의 저지 최후의 보루다, 이곳이 뚫리면 한양이 무너지고 조선은 없다"라며 총력 방어전을 펼치려 했으나 "조선 도원수 권한"으로 김자점은 또 조선 방어군의 방어를 교묘히 무력화 시켰으며, 마침내 청군은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한양을 함락하게 된다
조선의 임금 인조는 한양을 함락한 청군에게 쫏겨 남한산성으로 도망쳤으나 조선 조정내 "친청파"의 청나라에 대한 항복 요구대로(명분은 화친이었으나 항복이다) 한강 송파 부근 삼전도에 나가 오랑캐 청군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세번 짖찧으며 절하면서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삼전도의 치욕"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방위를 책임진 도원수로써 김자점의 이러한 행동은 반역이다"라는 여론에 의하여 김자점은 유배에 처해졌으나,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를 왕위에 올린 김자점이라서 1640년 인조에 의하여 1월 강화유수로,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고,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하여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 후에도 인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조선의 권력을 주무르며 청(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임경업장군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인조 후,
병자호란때 볼모로 청국의 심양(현봉천)에 잡혀갔다 8년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국에 대한 복수심을 가진 인조의 아들 효종이 임금으로 등극했고, 이 효종은 청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비밀리에 "북벌"을 계획한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사림(士林) 세력들이 효종에 의하여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의 계획"이 기획되자 친청파 김자점은 위협을 느끼게 되며, 이에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등을 시켜 효종 및 신하들의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고, 이로인하여 효종의 북벌 계획은 수포가 되었으며 조선 조정은 더욱 강력한 청나라의 간섭과 감시를 받게 된다
김자점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조정 대신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된 처지에서도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아들 익(釴)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며 이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라 한다
김자점의 역모로 김자점 일가는 위로 삼대, 아래로 삼대에 거쳐 반역죄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돼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조정은 김자점이 태어난 집을 만고의 역적 집이라 하여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는데 현재는 저수지로 개축돼어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고 이 마을을 현재 "못등"이라고 하며 김자점이 태어난 집은 옛날에는 낙안땅이었으나 지금은 벌교읍에 속해 있다 정리하면,
김자점은 오랑캐 청에게 두번씩이나 자신이 대신으로 있는 조선왕조를 팔아먹었고(크게 보아서 두번이지 세세하게 보면 두번이 넘는다) 인조 반정으로 한번......청나라에게의 내통 그 죄를 묻는 조정에게 또 한번, 도합 두번의 역모를 저지른 "만고의 역적"이라는 칭호가 전혀 무거웁지 않은 자이다
*
조선시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역적의 대명사며 "천하 만고의 역적" 김자점에 대한 전설이 많으나 그 중 한편을 옮겨 본다
조선조 전라도 땅 낙안 고을에는 해마다 15살 가량의 숫처녀를 마을에 자리잡은 당집에 제물로 받쳐야만 낙안 고을이 무사하여 해마다 숫처녀를 제물로 하는 제를 지내 오고 있었다
제물로 바친 처녀가 숫처녀가 아니거나,아니면 제물로 처녀를 바치지 않거나, 제를 지내는데 있어 부정을 타면 어김없이 무었인가에 의하여 낙안고을은 무시 무시한 보복을 당했고,해서 낙안 고을의 딸자식 가진 주민들은 해마다 제물로 바쳐질 처녀를 제비뽑기로 선출하여 제를 지내게 됀다
이렇듯 못됀 풍습이 있는 낙안 고을에 모 사또가 부임하여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며 제를 지내던 당집을 헐어 버린다
사또가 친히 지휘하여 당집을 허물때 갑자기 일진광풍이 일어났고 당집의 대들보에는 커다란 지네란 놈이 매달려 당집 허무는 것을 방해를 했는데, 사또는 지금까지 숫처녀를 제물로 받아먹은 놈이 바로 이 지네구나 하여 장검을 빼어 지네를 마디 마디 토막을 내어 버렸다
본시 지네란 놈은 몸이 끊어져도 다시 살아나는 놈이라 하여 사또는 토막을 낸 거대한 지네를 후환을 없앨 요량으로 기름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끓이게 하여 완전히 죽여 버렸다
그런데 지네를 장검으로 토막 낼때 사또의 두 눈 사이에 지네의 붉은피가 튀어 빨간 얼룩이 져 있었는데, 아무리 씻어도 지워 지지 않아 몹시 불쾌하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사또의 양미간에 튄 지네 피의 붉은 얼룩이 자연이 없어졌고 지네 사건은 잊어버렷는데.......... 그런데 어느날 사또의 부인이 수태를 하게된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 아이였다
그런데.......태어난 아이의 양미간에는 피처럼 붉은 점이 진하게 하나 박혀 있었고, 그점은 사또가 당집 대들보에 매달려 있던 지네를 토막내 죽일때 튄 지네 핏자국의 얼룩 그대로 였으며 위치 또한 똑갇았다
사또는 불길한 징조라 전전긍긍 하면서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럭저럭 불길하다 느끼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지냈으며, 아이의 이마 붉은점은 스스로 생긴 점이라 하여 자점(自點).....또는 "붉은 점"이라는 뜻의 자점(紫點,자줏빛 자紫)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지네가 김자점 부친의 칼에 맞아 죽으면서 김자점 부친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가졌고, 지네의 그 원한은 김자점을 태어나게 하여 원한의 대상인 김자점 부친 가계를 몰살 시킴은 물론(김자점 포함)나아가 조선을 물말아 먹도록 하도록 하였다는 김자점 탄생의 야담이 있는데,
대한민국에도 그러한 원한을 가지고 어느자가 태어나 대한민국을 망치고자 작심을 한것은 혹 아닌지 하는..........그자의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노라니 이러한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이시간 대한민국,
김자점 같은 인간이 있다
김자점은 후에라도 그 죄를 추궁당해 능지처참이라도 당했지만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라서 그렇게 할 수 도 없고.........할 가능성도 전혀 없어 보이기에 그자는 오늘도 여전히 김자점 못지않은 짓거리를 공공연하게 해대고 있지만 무사하기만 하다
[김자점의 난] '간신 김자점'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아마도 '임경업전'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장이라면 이순신과 김유신을 벗어나지 못했던 소년 시절, 문득 '명장 임경업'이라는 이름을 듣게 됐습니다. 아울러 비운의 명장 임경업을 몰래 죽인 사람이 바로 간신 김자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죠.
희대의 간신이었던 김자점의 명성에 비해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의 존재감은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도 병자호란이라는 큰 사건을 방송 화면으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들인 돈에 비해서, 사람들이 과연 '조선 역사상 최대의 치욕'으로 꼽히는 삼전도의 굴욕을 보고 싶어 하겠느냐는 생각도 들 수가 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김자점 역시 대중의 관심 밖으로 스물스물 사라져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방송중인 '궁중잔혹사-꽃들의전쟁'이 아니었다면 아예 얘기될 일 조차 없었을지도.
드라마 '꽃들의 전쟁' 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당연히 소용 조씨(얌전이, 김현주)와 인조(이덕화), 그리고 세자빈 강씨(송선미)이지만 제게 가장 관심 가는 사람은 김자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글도 '매거진 M'에 실리는 '문화인물탐구' 란에 실리는 글인데, 사실 지면의 한계라는 것이 매우 크게 작용합니다. 김자점처럼 다각도에서 조명 가능한 인물을 원고지 11~12매에 압축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더군요.
아무튼 늘 하던대로, 원문을 전재하고 아쉬운 부분을 보충합니다.
김자점
조선 선조 때 전라도 낙안 땅, 천년 묵은 지네 귀신이 있어 주민들이 처녀를 바치고 복을 빌었다. 신관 사또가 어찌 벌레 따위를 신으로 모시냐며 군사를 풀어 지네를 잡아 토막 내 죽였다. 이때 단말마의 지네가 토한 핏방울이 사또의 미간에 튀었다. 그 직후 사또 부인이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놀랍게도 미간에 붉은 점이 있었다. 사또가 기이하게 여겨 처음에 붉은 점이라는 뜻으로 자점(紫點)이라 이름지었다가 뒷날 자점(自點)이라 고쳤다. 인조-효종 시대 매국노의 대명사로 불린 김자점(1588~1651)의 출생에 대한 전설이다. 지네의 저주로 태어난 괴물이었기에 희대의 간신이자 역적이 되어 마침내 집안을 멸문당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 부친인 김함이 벼슬을 산 적이 없으므로 지어낸 얘기임은 분명하지만, 500년 뒤까지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당시 김자점이 얼마나 큰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김자점이 영화나 드라마의 주역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최근에는 명종 때의 윤원형이나 연산군 때의 유자광에 비해 지명도에서도 뒤지는 분위기다. 1981년 컬러 TV 도입 기념으로 KBS가 큰 맘 먹고 제작한 대하 사극 ‘대명’에서 김순철이 김자점 역을 맡았고, 2009년 작 MBC TV ‘일지매’에서 박근형이 같은 역을 맡은 정도다. 2013년 JTBC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은 정성모가 연기하는 김자점을 전면에 내세워 눈길을 끈다. 각 드라마의 캐스팅은 김자점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반영한다. 김순철은 글자 그대로 원초적인 권력욕에 매달리는 저돌적인 간신의 모습을 연기했고, 박근형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당대 최고 세도가의 면모를 보였다. 한편 정성모는 왕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정권 탈취를 노리게 된 교활한 야수를 연기하고 있다. 김자점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조와의 인연에서 시작해야 한다. 광해군을 내몰고 인조를 왕위에 올려 놓은 반정 과정에서 김자점은 절대적인 역할을 해냈다. 사실 이 반정은 성공한 게 신기할 정도로 허술했다. 몇 차례나 음모가 새나갔지만 김자점이 광해군의 총희인 개시 김상궁에게 뇌물로 줄을 대고 있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김상궁은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김자점, 김류 따위는 그저 백면서생들인데 무슨 큰 일을 하겠습니까”라며 무마했다. 실제 반정 전날인 1623년 3월11일에도 고변이 들어왔지만 광해군은 김상궁과 술을 마시며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결국 김자점은 1등공신에 올랐다. 하지만 관료로서 김자점은 대단히 무능했다. 청의 군사적 위협 속에 도원수에 오른 김자점은 정예병을 큰 길에서 벗어난 산성에 주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그 결과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대로로 진격해 한양을 범했다. 심지어 김자점 본인도 황해도 토산에 정병을 주둔해 놓고 교전을 피한 죄로 죽을 위기에 몰렸다. 그래도 인조는 김자점을 외면하지 않았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권위를 잃은 인조에겐 김자점 처럼 ‘까라면 까는’ 저돌적인 충복이 필요했을 거란 해석이 일반적이다. 김자점은 재빠르게 친청파로 변신해 조정 중신들을 제압했고. 그가 후원하는 소용 조씨도 인조의 안방을 차지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1645), 세자빈 강씨의 사사(1646), 임경업의 주살(1646) 등 의혹 짙은 사건이 이어자자 김자점에 대한 여론은 악화됐다. 특히 임경업의 죽음은 치명적이었다. 당시 민심은 ‘군사력을 키워 청에게 복수하자’던 명장 임경업에게 극히 동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용 조씨의 딸 효명옹주를 손자며느리로 삼으며 권력은 더 강화됐지만 백성들의 지탄도 높아갔다.
(충민공 임경업 장군 영정)
결국 인조의 죽음과 함께 파국이 왔다. 소용 조씨가 낳은 숭선군에게 밀려나는게 아닐까 은인자중하던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자점에게 칼을 뽑았다. 삭탈관직에 이어 유배령이 떨어졌다. 때맞춰 효종은 ‘북벌’을 국시로 내세웠고, 김자점은 청과 내통하는 매국노의 표본이 됐다. 마침내 효종 2년. 숭선군을 앞세워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과 함께 김자점의 일족이 몰살당하는 옥사가 펼쳐졌다. 소용 조씨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불안한 임금 자리를 지키려는 인조의 속내는 누구보다 잘 읽었지만 여론의 흐름은 무시한 결과였다. 효종은 그를 잘라 냄으로써 민심을 얻는 동시에, 인조반정의 공신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사람들로 조정을 채울 수 있었다. 김자점은 정말 반란을 시도했을까. 최소한 효종이 그를 편치 않게 느낀 것은 분명하다. 인조는 죽기 두 달 전, 세자(효종) 앞에 김자점과 이시백을 불러 “네가 왕이 되어도 이 두 사람은 중용하라”고 당부했다. 명심하겠노라 대답했지만 효종의 속내는 달랐다. 즉위 후 김자점의 역모를 보고받은 효종은 “당시 시백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지만 자점은 오만했다. 그때 자점이 나를 섬길 뜻이 없음을 알았다”고 냉소했다. 자만이 재앙을 부른 셈이다. P.S. 김자점 일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자취를 감추지만 20세기에 이르러 그 후손 가운데 불멸의 거인이 태어난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 첫 문장에서 자신이 멸족을 피해 황해도로 이주한 김자점 가문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 (끝)
인조가 가장 신임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이시백(위 초상). 기억력 좋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핵심 인물인 이귀의 아들이며, 고전 소설 '박씨부인전'에 나오는 박씨부인의 남편입니다. 이시백이 치명적인 전란을 극복하고 복구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박씨부인의 지혜 때문이었다는 당시의 민심을 대변해주는 것이죠.
(박씨부인전이라면 또 잘 모르실 분도 있겠군요. 좀 나이드신 분들은 구 TBC 연속극인 '별당아씨'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별당아씨의 남편이 바로 이시백이라는 얘깁니다.)
어쨌든 인조 사후에도 이시백은 살아 남은 반면, 김자점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일족이 멸문당하는 대란을 겪습니다. 대체 왜 김자점은 몰락했을까요. 당연히 효종과의 관계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비명에 죽고,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다시 세자의 자리에 올랐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윗글에서 보듯 소용 조씨(이 무렵 귀인이 됩니다)와 김자점의 세상이었기 때문이죠. 어린 아이이긴 했지만 소용 조씨가 낳은 숭선군이 언제 자신을 대신해 세자가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세자(봉림대군 = 뒷날의 효종)는 철저한 몸조심에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세자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어떤 입장을 취할지에 대해 차곡차곡 게획을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살아서 왕위에 오른다면'이라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일단 형 소현세자가 심양에 머물며 청나라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고, 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다 반대 세력에게 제거의 명분을 제공했다는 점을 주목합니다.
한편으론 김자점의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누가 있을지를 찾아 봅니다.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선명한 입장을 갖고 있는 서인 재야 세력이죠.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망 있는 집단이고, 송시열은 한때 봉림대군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안 그래도 부국강병을 통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청에게 당한 치욕을 씻자고 주장하던 인물들이죠.
그렇게 해서 1649년 5월, 인조가 즉고 효종이 죽위하자 효종은 그 즉시 인조의 시호를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송시열 등을 불러 올립니다. 심지어 송시열은 상경한 뒤,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며 독대를 요청하고, 효종이 '몸이 불편하다'며 독대를 거절하자 그 즉시 짐을 싸서 귀향길에 오릅니다. 당황한 효종은 사람을 불러 송시열을 붙잡고 자신의 성의가 부족했음을 사과합니다. 이후에도 송시열은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이건 모두 제 덕이 부족한 탓이니 사직하겠습니다'를 되풀이하고, 그때마다 효종은 극구 만류합니다. 이런 사직 쇼(?)를 거쳐 전 조정이 송시열이야말로 효종 시대의 실세임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바로 알아차립니다. 송시열-송준길이 권력의 핵심이라면 과연 권력에서 소외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지.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제거되어야 할 것인지. 그 다음 수순은 알아서 돌아갑니다. 효종이 직접 누구를 지목해서 아니라, 수많은 선비들이 김자점 탄핵에 나섭니다.
결국 김자점은 1년 뒤인 1650년, 벼슬을 내놓고 귀양가는 몸이 되는데, 마침 청의 사신들이 '조선이 요즘 (우리와 가깝던)선왕의 대신들을 왜 이유 없이 내쫓는가. 혹시 우리와 적대하려는 뜻이 있는 것인가'를 추궁할 것이란 소문이 돕니다. 이 소문의 배경은 '(청와 가까운) 김자점이 위기에 몰리자 청의 힘을 업고 조정을 압박하려 한다'는 것이었죠.
효종이 왕위에 오른지 두달이 채 안된 1649년 6월22일, 실록의 기록입니다. 대신들이 처음으로 영의정 김자점이 불충하고 무능하니 관직을 빼앗아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을 때의 기록. 처음엔 듣기 싫은 척(?) 하던 효종도 끝내 벼슬에선 물러나게 합니다.
...탄핵하기를 더욱 강력히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경인년(1650년) 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도 부처(中道付處)를 명하여 홍천현(洪川縣)에 유배하였다. 이때 서울 안에는 자점이 죄를 입은 뒤로 노중(虜中)과 은밀히 내통하여 저들의 힘을 빌어 우리 조정을 위협할 계획을 한다는 등의 말들이 많이 나돌았다. 그런데 청나라 사신이 조사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세 무리가 잇따라 출발하여 압록강도 건너기 전에, 장차 즉위한 처음에 구신(舊臣)을 축출한 이유를 힐문(詰問)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먼저 퍼지니, 사태가 매우 위급하여 조야(朝野)가 흉흉해서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도 자점을 의심하였으나 다만 그의 두 자식 연(鍊)과 식(鉽)을 내쳐 외읍(外邑)에 보임해서 그 모계(謀計)를 막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는 단지 우리 나라가 성을 쌓은 일만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혹자는, 자점이 스스로 계획이 실패되어 탄로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도리어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 사신에게 미봉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름에 양사가 다시 자점의 죄를 탄핵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기를 청하며 누차 아뢰어 마지않으니 곧 멀리 귀양 보내라 명하여 광양현(光陽縣)에 유배하였다.
이쯤 되면 왕의 뜻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효종 즉위 2년째를 넘기지 못하고 누군가가 "김자점과 조인형(소용 조씨의 친척 오빠)이 서로 몰래 오가며 모의를 하고 있다"는 고변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김자점의 아들 김식과 손자 김세룡(소용 조씨가 낳은 옹주의 남편)을 지목합니다.
여기에 김자점의 역모가 보고됐을 때 효종의 반응이 널리 퍼집니다. 윗글에 있듯 효종은 인조가 이시백과 김자점을 불러 자신에게 "이 두 사람을 중용하라"고 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죠. 김자점이 얼마나 당시의 세자(효종)을 무시했는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황. 이건 "빨리 김자점을 잡아다 죽이지 않고 뭘 하느냐"고 직접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과정을 살펴 보자면 과연 김자점이, 혹은 김식이 난을 일으키려 하기는 했을까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김자점의 권세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인조가 죽기 전입니다. 김자점에게 가장 좋은 것은 세자를 폐하고 숭선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던 모양이고, 그 다음 방법은 효종이 즉위 후 일찍 죽고, 그 뒤를 이어 숭선군이 왕이 되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효종이 한발 빨랐습니다. 김자점의 예측에 비해 너무 손이 빨랐던 모양입니다. 1649년, 즉위 두달만에 벼슬을 빼앗고, 6개월만에 귀양을 보냅니다. 김자점에게 빌붙어 살던 사람들도 세상 판도를 파악하고 재빨리 등을 돌립니다. 마침내 난이 보고되고 김자점이 죽음을 맞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년6개월.
죽음을 맞은 김자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한비자에는 "미워할 사람을 미워하고, 미워하지 않을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것이 문제가 아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그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위험한 일"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효종은 이 교훈을 확실히 지켜 왕위에 올랐습니다. 김자점이 효종을 정말 위험한 인물로 생각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막았을테니 말입니다. 반면 김자점은 자만심에 빠져 이 교훈을 무시했던 셈이죠. 그것이 결국 김자점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권세에 빌붙어 악행을 저지른 김자점을 도끼로 처형하였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15] 반정공신 김자점의 기똥찬 처세술
입력 2020.06.02 03:13
서울 종로구에 있는 자하문은 창의문이라고도 한다. 창의문 문루에는 계해거의(癸亥擧義) 정사공신(靖社功臣)이라는 제목으로 공신 47명의 명단이 붙어 있다. 1623년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공신들 명단이다. '썩은 세상 뒤집고 정의를 세우겠다고 나선' 자들이다. 원래는 53명인데 6명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름이 사라지고 없다. 6명의 이름은 김자점, 심기원, 이흥립, 이괄, 김경징과 심기성이다. 왜 사라졌나? 알아본다. 특히 김자점, 일개 유생에서 영의정까지 올랐다가 '도끼로 목과 허리가 토막 나 죽은' 사내 이야기.
영조의 기우제와 창의문
서기 1743년 음력 5월 7일 가뭄이 한창인 그 여름날 영조가 창의문 문루에 올랐다. 인근 평창에 있는 북교단(北郊壇) 기우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침 광해군을 내쫓고 능양군 이종이 왕위를 차지한 인조반정 1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영조는 반정 공신 이름을 현판으로 걸라고 명한 뒤 소현세자 묘에 참배를 지시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가 인정문이 보일 무렵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1743년 5월 7일 '영조실록')
공작정치가 김자점, 일등공신이 되다
창의문은 1623년 3월 13일 새벽 능양군이 '義(의)' 자를 등에 붙인 반정 군사들을 지휘해 창덕궁으로 쳐들어가며 지나간 문이다. 이보다 3년 전 이들이 광해군 폐위 계획을 세운 곳은 창의문 바깥에 있는 세검정 계곡이었다. 김류, 이귀, 심기원, 신경진, 최명길, 구굉 등 전직 관리와 유생 김자점, 심명세가 그들이다.('계해정사록')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세검정(洗劍亭)은 인조반정 주동자들이 “검을 씻으며 정의를 세운다(洗劍立義·세검입의)”며 반정을 결의했다는 곳이다. 지금은 주택가로 변했지만 구한말까지 세검정 주변은 산자락 골짜기였다. 반정 공신 53명 가운데 6명은 역모와 부실한 국정 운영으로 공적이 박탈됐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김자점이다. 기가 막힌 처세술로 영의정까지 수직상승하며 권력과 금력을 누렸다가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해버린 인물이다.
그런데 1622년 이 모의가 들통났다. 광해군이 후원에서 애지중지하던 김 상궁과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첫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김 상궁이 놀란 광해군 손을 잡고 이리 말하는 것이다. "가소롭나이다. 김생원이 어찌 이러한 뜻이 있겠습니까. 충성스럽고 한미한 선비일 뿐."('연려실기술'23 '계해정사') 이후 여러 차례 보고가 올라갔지만 광해군은 이들을 파직했을 뿐 역모죄로 처벌하지 않았다. 뒤에는 김자점이 있었다. 김자점은 김 상궁을 뇌물로 매수해놓은 터였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상궁들은 김자점을 '성지(成之)'라고 부르며 허물없이 대했다. 성지는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자(字)다. 무산될 뻔한 쿠데타를 사전 공작(工作)을 통해 성공시킨 공로로 김자점은 일등공신으로 책록됐다. 별 벼슬 없던 유생(儒生), 인생 반전 시작이었다.
병자호란과 도원수 김자점
1627년 정묘호란이 터졌다. 김자점은 인조를 경호해 강화도로 도주했다. 김자점은 순검사 및 임진수어사에 임명됐다. 3년 뒤 한성부 판윤을 거쳐 1633년 조선군 도원수에 임명됐다. 총사령관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다. 초기 대응 실패로 조선이 청에 굴복하게 만든 장본인이 김자점이었다. 도원수 김자점은 "겨울에는 침략 없다"고 장담하다가 국경을 방치해버렸다. 한양까지 들어가는 봉화(烽火)를 막는가 하면, 침략 임박을 보고하는 부하를 '군기 문란'이라며 처형하려 했다. 휘하 병력이 궤멸한 황해도 토산 전투는 '좋은 장수가 없어서 패한' 대표적 전투였다.('효종실록' 효종대왕행장)
그를 처형하라는 대신들 요구가 빗발쳤다. 인조는 꿈쩍하지 않았다.(1636년 12월 15일 '인조실록') 김자점은 전쟁 후 유배형을 받았다가 왕명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40년 1월 27일 인조는 그를 강화유수에 임명했다. 한 달 뒤 인조는 김자점과 또 다른 공신 심기원을 호위대장으로 임명하고 옛 병졸들을 돌려줬다.(1640년 2월 2일 '인조실록') 오랑캐에게 고개 숙였다고 무시당한 왕에게 필요한 사람은 김자점 같은 인물이었다.
라이벌 심기원 역모와 김자점
화려하게 재기하고 보니, 옆에 라이벌 심기원이 있지 않은가. 복귀 후 4년이 지난 1644년 그 라이벌 심기원이 회은군 이덕인을 앞세워 반정을 기도하다가 발각됐다. 소현세자 부부가 강빈 부친상을 치르러 일시 귀국 후 돌아간 무렵이었다. 조사 결과 이들은 인조는 상왕(上王)으로 내쫓고, 소현세자가 불안하니 회은군을 왕으로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억울하다는 심기원과 그 무리들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모두가 죄를 자백했다.
인조는 사약을 내리는 걸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모두가 처형을 원했다. 심기원은 처형됐다.(1644년 3월 21일 '인조실록') 그때 좌의정 김자점이 처형 담당관을 따로 불러 말했다. "먼저 팔과 다리를 벤 뒤에 나중에 머리를 베라." 같은 반정공신 이시백이 다른 이에게 말했다. "어찌 저런 자가 제 명대로 살겠는가."('연려실기술'27 심기원의 옥사 '공사견문') 인조는 그에게 낙흥부원군 군호를 내렸다.
창의문(자하문) 문루에 걸린 반정 공신 명단. ‘계해거의 정사공신’이라는 제목으로 1등부터 3등까지 공신 47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반정 120주년인 1743년 영조가 명해 새겼다.
2년 뒤 청나라에 구금 중이던 임경업이 공모 혐의로 압송됐다. 임경업은 "내가 명나라로 망명한 사실을 김자점에게 알리라고 했다"고 자백했다. 임경업은 그날 고문으로 죽었다.(1646년 6월 17일 '인조실록') 연려실기술은 '김자점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죽였다'고 기록했다.('연려실기술'27 심기원의 옥사 '조야첨재') 이듬해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인조 후궁 조씨의 딸 효명옹주가 혼인했다. 옹주와 부마는 옷과 기물이 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1647년 8월 16일 '인조실록') 김자점은 이제 왕과 사돈이 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봉림대군
1645년 2월 심양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죽었다. 그리고 인조는 서둘러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선정했다. 원손(세자의 아들) 대신 차남을 세자로 봉하겠다는 인조의 결정에 모두가 반대했다. 김자점은 인조의 결정을 "종사를 위해 내놓으신 깊고 원대한 계획"이라고 찬양했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결정하겠다고 인조가 결론을 내렸다. 그러자 김자점이 "곧바로 왕명을 받들겠다"고 아뢰었다. 오히려 인조가 당황해서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고 말릴 정도였다. 사관은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임금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경우는 소인일 뿐이니, 낱낱이 기록해둔다.'(1645년 윤6월 2일 '인조실록')
강빈 옥사와 김자점
질투심과 권력 찬탈의 공포심에서 인조는 후계자로 앉힌 차남을 보호하려 했다. 그 보호책 가운데 가장 강경한 방안이 소현세자 주변 인물 제거였다. 가장 가까운 인물은 며느리 강빈이었다. 제거 작업에 가장 강력한 장치는 역모(逆謀)였다. 이듬해 강빈 역모 사건이 터졌다.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고 죽이려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강빈 사사(賜死)를 작심했다.
조선 말 도화원 화가 유숙(劉淑·1827~1873)이 그린 ‘세검정’. 인왕산 골짜기 개울가 한가운데에 정자가 서 있다. 세찬 물소리 덕에 도청당할 염려 없이 모의를 꾸미기 딱 좋다.
1646년 2월 7일 인조는 김자점을 내의원 도제조에 임명했다. 최측근이다. 실록에 따르면 인조는 '대신들이 강빈 사사를 반대하는 보고서를 올릴 때마다 김자점이 병을 핑계로 불참하자 김자점은 부리기 쉽다는 것을 알고는 끌어다 쓴 것이다.'(1646년 2월 7일 '인조실록') 최측근으로 임명된 그날, 김자점이 인조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개 부모에게 불순한 자에 대해서는 선대에서도 이미 벌을 시행한 일이 있나이다. 사람들이 소현세자 잘못한 점을 많이 말하는데, 이는 다 강씨 짓입니다. 신하들이 어찌 이 사람을 위해서 비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근래에 사대부들이 세상에 명예를 구하고자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나이다." 회의 끝에 김자점이 또 말했다. "다른 대신들은 괘념치 마소서." 김자점은 영의정에 올랐다. 벼슬 없는 유생으로 반정에 참가한 지 23년 만이었다.
도끼에 잘려 죽다
3년 뒤 인조가 죽었다. 그때까지 부귀영화란 부귀영화는 다 누리던 김자점에게 재앙이 닥쳤다. 효종이 즉위하고 한 달 뒤 김자점을 탄핵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사헌부에서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은 김자점을 탄핵했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그의 사치와 불의, 교만과 방자를 성토했다.(1649년 6월 22일 등 '효종실록') 그러자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통해 청나라에 '조선이 명나라 연호를 쓰고 있다'고 고자질했다. 청나라 압력을 통해 권력 회복을 노린 것이다. 이듬해 3월 김자점은 광양으로 유배됐다. 순식간에 김자점은 허물어졌다. 1651년 마침내 아들 김식을 포함한 역모가 적발됐다. 정적들이 벌인 공작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댈 언덕은 인조밖에 없던 김자점이었으니까. 김자점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고문은 그의 입을 열고야 말았다.
1651년 12월 17일 효종이 인정문 앞에서 김자점을 친국했다. 김자점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죄를 자백했다. 그 자리에서 김자점은 처형됐다. 사흘 뒤 효종이 잡범 사면령을 발표하고 백성에게 이렇게 일렀다. "(김자점은) 권세를 등에 업고 악행을 저질렀고, 안팎을 연결해 간계를 길렀다.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려도 속죄하기 어렵다. 하여 죽어 마땅한 자들을 모조리 가마솥에 넣고 도끼로 자르는 극형에 처했다(妖腰亂領 咸就釜鑕之膏·요요란령 함취부질지고)."(1651년 12월 20일 '효종실록') 김자점처럼 "머리를 맨 끝에 자르라"는 사람은 없었을 터이니, 진짜 가마솥에 끓이고 도끼를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똥찬 처세술의 종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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