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와 디카를 챙기고 혹시라도 일행중 준비가 소홀할까봐 김밥 3줄, 오이 5개, 참외 2개, 초콜릿 4개 등 넉넉히 베낭에 넣으니 의외로 버겁다. 홀로산행이라면 김밥 1줄에 생수 2통, 오이 2개로 가볍게 출발할 수 있는데 산행을 주도하자니 책임이 따르는 탓이리라.
08:55경 산행인파가 북적이는 구파발 전철역 인공폭포 부근에 도착하니 문자가 들어와 있다. 개인 사정으로 참가 못한다는 1명의 문자가 들어왔고, 곧 2명은 서로 확인하여 만나게 되었고, 나머지 1명은 연락이 없다. 나는 연락처를 모르고 상대방은 내 연락처를 알고 있기에 10분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자 우리끼리 출발하기로 판단하였다. 개인 사정이 있으리라 이해를 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행이 일기예보와 달리 구름이 잔뜩 끼고 기온이 선선하여 산행하기가 좋은 편이며 3명 모두 산행에 자신이 있어 하기에 오늘은 순항을 할 것 같다. 성벽을 따라 한바퀴 돈다는 뜻에서 '12성문 순례'라고도 불리우는 삼각산 12성문 종주산행은 북문∼백운대와 용암문∼위문의 위험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을 따라 산행하는 것이 애초의 취지에 맞는 것 같다.
■ 스러진 성벽을 지나며(의상능선 4성문)
1門 : 대서문(산성매표소 09:30 - 대서문 09:36 - 초입 09:40 - 의상봉 10:16)
09:30경 산성매표소를 지나 대서문까지 포장도로를 걸어 올라간다. 주로 북한산성계곡의 식당과 사찰의 승합차가 왕복하는 대서문이다. 09:36경 대서문에서 본격적으로 허리가방에 넣어둔 디카를 꺼내들고 기록을 담아 본다. 대서문을 지나 약200m쯤 가면 도로 우측에 셔틀버스 정류소가 있는데, 09:40경 내가 자주 이용하는 정류소 뒷편길로 오르기 시작한다. 의상봉 오르는 최단 코스인데 의상봉까지의 산행 거리가 짧기에 그만큼 경사가 심한 편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내가 앞장 서서 계속 가니 뒤에서 따라 올 수 밖에 없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씨인지라 땀이 많이 나고 힘이 들어 잠시 쉬면서 뒤돌아보니 원효봉과 계곡이 무척 가까이 느껴진다. 중턱에서 좌측으로 난 등산로에 궁금증이 있어 따라 가자 슬랩이 나오고 작지만 위험한 릿지가 있는데 등산로는 보이지 않아 되돌아 나온다. 7∼8분쯤 허비하였지만 안전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땐 돌아 서는게 최선이다. 드디어 10:16경 의상봉에 올라 잠시 쉬면서 다음 고지인 용출봉을 바라 본다.
산성매표소에서 출발하여 의상능선을 오르는 코스는 몇 군데가 있지만, 대서문을 지난 후에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어느 코스로 오르더라도 의상봉에 올라 탁 트인 삼각산 전경 속에 백운대 바라보며 땀 식히는 맛이 일품이기에 의상봉을 통해 의상능선을 타보기 바란다. 삼각산 산행의 진미를 느낄 것이다.
(사진: 대서문<좌측>과 의상봉에서 바라본 원효봉<우측>)
2門 : 가사당암문 (가사당암문 10:24 - 용출봉 10:38 - 용혈봉 10:49- 증취봉 10:56)
의상봉에서 바라보는 용출봉은 우뚝 솟아 보인다. 용출봉과 용혈봉, 증취봉이 나란히 붙어 있어 부담이 적지만 의상봉을 완만하게 내려간 후 일단 용출봉을 한창 올라야 맞이할 수는 혜택이기에 다시 땀깨나 흘려야 한다. 의상봉에서 어렵지 않게 내려가면 가사동암문을 만날 수 있다. 암문 위로 산행로가 되면서 성벽이 파손되기에 돌아 가도록 밧줄로 허술하게 막아 놓았다. 의상봉을 피하여 중성문이나 백화사를 통해 의상능선을 탈 때의 갈림길이지만 산행객이 많지 않은 코스이다. 다시 용출봉 향하는 오르막을 제법 올라 가다가 중간의 와이어를 타고 오른 후 숨이 차다. 일행이 쉬는 사이 나는 백운대를 중심으로 부지런히 사진을 찍는다. 용출봉에 오르자 무난하게 용혈봉과 증취봉으로 이어지고 지루하지 않게 부왕동암문으로 내려갈 수 있다.
(사진 : 가사당암문<좌측>과 암문 앞 산행 표지판<우측>)
(사진 : 용출봉 오르며 뒤 돌아본 의상봉)
3門 : 부왕동암문 (부왕동암문 11:08 - 나월봉 11:20 - 나한봉 11:40)
부왕동암문에 도착하면 북한산성의 과거와 현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암문에서 의상봉방향은 낡고 오래된 성벽이 스러진 모양이요 대남문방향으로는 새롭게 보수하여 아직 흰빛이 남아도는 성벽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연간 450만명이 찾는다는 삼각산 국립공원의 성인 1600원, 어린이 300원의 입장료 수입은 문화재관리청과 무관하기에 이런 것일까. 삼각산이라는 무상의 자연을 통해 별 하는일 없이 거두어 들이는 엄청난 재원은 삼각산과 그가 품고 있는 문화재와 사람들에게 오롯이 쓰야 되는 것은 아닌지...
(사진 : 삼천사매표소 방향에서 올라온 산행객이 쉬고 있는 부왕동암문)
(사진 : 부왕동암문 윗부분 성벽의 과거와 현재 - 新舊 부조화)
(사진 : 부왕동암문 부근 대남문방향의 보수된 성벽<좌측>과 낡고 오래된 성벽<우측>)
(사진 : 나월봉에서 바라본 의상능선)
4門 : 청수동암문 (청수동암문 11:43 - 문수봉 11:48)
의상봉에서 대남문까지 이르는 산성은 성문 주변을 제외하고는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고풍을 느낄 수 있는 돌담처럼 이어지다 끊어지다를 반복하며, 드디어 나한봉 오르기 전 부분에서는 오래전 폭우에 휩쓸여 무너져 내렸지만 아무런 대응이 없는 것 같다. 사람의 발길이 가장 많은 대남문∼용암문 구간의 주능선 성벽 보수만 이루어진 것도 일종의 전시 행정일까...
의상능선의 막바지인 나한봉을 오르기 위해 와이어에 매달린다. 잠시 팔 힘과 다리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오르노라면 드디어 완만한 능선이요 곧이어 낡은 성벽길이 나온다. 그리고 청수동암문을 향하노라면 눈앞에 문수봉의 암봉들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폭의 그림이지만 경치 좋은 바위마다 산행객이 붙어 있다. 청수동암문에 도착하면 항상 비봉쪽에서 힘겹게 오르는 산행객들을 보게 된다. 비봉에서 대남문을 향하다 보면 문수봉의 릿지구간을 우회하여 안전하게 오르는 긴 산행로가 나오는데, 완만하지만 대부분 산행객들은 두세번 쉬어야 청수동암문을 볼 수가 있다. 암문에서 문수봉을 지나면 많은 산행객들의 휴식처인 대남문에 이르게 되는데, 청수동암문은 대남문 및 비봉과 의상능선의 갈림길이기에 항시 사람이 붐비는 곳이다.
(사진 : 나한봉 오르기 전에 방치되어 있는 무너진 성벽)
(사진 : 청수동암문 직전에서 바라본 문수봉 우측 암봉들)
■ 잘못된 성벽 보수(주능선 6성문)
5門 : 대남문 (대남문 11:53)
대남문 바로 옆에 위치한 문수봉에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아마 삼각산에서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곳은 백운대와 문수봉일게다. 문수봉과 보현봉은 삼각산 남쪽 산릉에서 700m가 넘는 산봉이다. 보현봉은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가 있지만 구기동이나 대동문 방향, 또는 비봉과 의상능선 방면에서 오르는 많은 산행객들이 문수봉을 거치게 된다. 멀리 백운대도 보이고 서쪽의 비봉과 수리봉, 그리고 발아래 놓여 있는 문수봉 암릉들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대남문은 항상 사람으로 넘쳐 난다. 어린 아이부터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에 이르기 까지 많은 서울 시민들이 찾는 산행지이다. 아마도 구기동이나 정릉 등 비교적 산행하기가 쉬운 코스와 접해 있기에 아이마저 걸리고 업고하여 오를 수 있는 대남문인 것 같다. 짙은 원색빛 감도는 대남문 단청과 주능선을 따라 흰빛으로 자태를 뽐내는 현대적인 성벽은 마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예인 같다. 화려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문화재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잣대에 따라 상당한 이견이 생길 수 있는 주능선의 문화재 보수 현장이다.
(사진 : 문수봉에서 Zoom으로 잡은 수리봉<좌측>과 비봉<우측>)
(사진 : 대남문에서의 천진난만한 아이 모습)
(사진 : 대남문<좌측>과 대남문에서 대성문으로 이어지는 성벽<우측>)
6門 : 대성문 (대성문 12:04)
대남문에서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은 완만한 성벽길을 따라 주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삼각산을 자주 찾지 않은 산행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 백운대 또는 백운대에서 대남문에 이르는 주능선이다. 능선 이름에 딱 맞는 구간이며, 일요일이나 휴일엔 양방향 수많은 산행객이 줄을 잇는 곳이다. 오면서 틈틈히 쉴때 마다 오이와 참외를 먹었지만 슬슬 배가 고프다. 하지만 공간이 넓은 대동문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발길을 재촉해 본다.
(사진 : 대남문과 비슷한 대성문 현판<좌측>과 대성문 안쪽의 산행 표지판<우측>)
7門 : 보국문 ( 보국문 12:18 - 칼바위능선 갈림길 12:23)
주능선 따라 보국문을 향하노라면 어느 순간엔가 수목으로 가려지던 시야가 탁 트이며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우측 뒷편으로 오봉과 도봉산의 모습이 보인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디카로 풍광을 담아 본다. 아무리 카메라로 아름다움을 복제해 보지만 나 같은 일반인은 눈으로 보는 이상의 풍경을 담지 못해 안타깝다. 능숙한 사진사들이야 실상(實像) 이상의 과장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기에 차후에 산행이 깊어지면 사진술도 배워야 할까 보다.
보국문에서는 아름다운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정릉 숲길로 내려 갈 수 있다. 가을이 깊어갈 때 하늘 향해 투명한 색채를 발하는 정릉 계곡을 찾아 보기 바란다. 지금은 신록이 깊어가는 삼각산이지만 시간따라 4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진 : 서울 시내 스모그를 배경 삼은 좌측 아래 형제봉, 그 뒷편 북악산 능선<좌측>과 보국문<우측>)
(사진 : 칼바위능선<좌측>과 멀리 보이는 오봉, 도봉산 풍경<우측>)
8門 : 대동문 (대동문 12:28 - 동장대 12:53)
평탄하게 주능선을 걸어 오니 어느새 대동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며 식사 또는 간식을 하는 장소이다. 비어 있는 성벽 아래 자리를 잡고 각자 준비해온 김밥을 꺼내 식사를 한다. 각자 먹을 것을 적당량 가져 왔나보다. 내가 준비한 김밥 2줄이 남았고 참외와 오이도 풍성하다. 식사후 나는 기록사진(?) 찍기에 바쁘고 두 사람은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여 동장대를 지나 용암문으로 향한다. 이제 12성문 종주산행이 후반부로 가고 있음을 느끼며...
(사진 : 산성 바깥 쪽에서 바라본 대동문<좌측>과 동장대<우측>)
9門 : 용암문 (북한산대피소 13:05 - 용암문 13:12)
북한산대피소에는 간이 화장실이 있기에 볼 일도 보고 샘터에서 빈 물통에 물을 채운다. 점점 여성들의 산행이 증가하고 있지만 화장실 등 이에 대한 편의시설이 부족하여 불편할 것 같다. 편의시설이 있는 곳에서 개인들이 미리 볼일을 챙겨야 할 삼각산이다. 이제 용암문을 지나면 노적봉과 만경대 사이로 만경대의 허리를 끼고 돌아야 한다. 약간의 경사와 암릉이 위문까지 이어지기에 다소 체력 소모가 따른다. 특히 위문 아래 짧은 계단에서는 쉬지 않고 오르기가 어렵다.
만경대는 위험구간이라 아예 피해서 다니지만 노적봉은 어렵지 않은데도 갈길에 쫓겨 항상 지나치기만 한다. 암튼 노적봉을 지나치며 위문 가면서 바라보는 풍광이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노적봉의 우뚝 솟은 모습과 의상봉, 원효봉, 염초봉이 눈 앞에 장관으로 다가오고 백운대의 태극기 펄럭이는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보인다. 그냥 갈수가 없어 펼쳐진 풍경들을 두루 디카에 넣어 본다.
(사진 : 용암문<좌측>과 위문 가며 Zom으로 잡아본 백운대 정상<우측>)
10門 : 위문 (13:43)
드디어 위문이 보인다. 우이동이나 북한산성계곡 또는 대동문 방면에서 무수히 넘나드는 암문이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위해 깊은 위치에 만든 초기 암문의 목적을 오늘날 가장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성문이다. 위문 바깥쪽으로 나가 인수봉과 백운대 오르는 광경을 바라본 후 다시 북한산성계곡 방향으로 가기 위해 위문 안쪽으로 되돌아오니 그 사이 만경대 오르는 릿지에 사람이 붙어 있다. 염초봉, 숨은벽 릿지와 함께 위험 구간중의 하나인데 능숙하게 올라가 버린다. 약간의 부러운 마음을 안고서 이제 북문을 향해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힘은 덜 들지만 하산길은 오르막보다 더욱 조심해야한다. 지루한 느낌을 주는 하산길에 잠시 약수암 뒷편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왁자하게 식사하는 산행팀 뒤에 앉아 있는 홀로 산행객이 담배를 꺼내 들고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유혹을 견디지 못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산에 오르면 항상 버려진 담배 꽁초를 발견하게 되고 이렇게 용감한 흡연가를 만나게 된다. 뭔가 개선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진 : 인파의 왕래가 잦은 위문<좌측>과 위문 부근에서 만경대 오르는 사람들<우측>)
■ 아- 상장, 숨은벽과 염초, 백운이여 (원효능선 2성문)
11門 : 북문 (약수암 14:07 - 북문 갈림길 - 북문 14:46 - 원효봉 14:58)
대동사를 지나 북문 갈림길까지 내려 간 다음 북문을 오르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다. 차가운 계곡물에 얼굴도 씻고 심기일전하여 천천히 북문을 향한다. 상운사 갈림길 지나 한번 쉬고는 조금 더 오르면 한적한 북문이 나타난다. 염초봉 구간의 위험한 릿지를 타는 산행객들이 지나가는 길이기에 고개를 들어 염초봉을 바라본다. 염초봉 릿지를 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백운대까지 이어져 눈에 들어온다. 릿지를 즐기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사고가 빈발한 지역이라 염초봉 아래쪽 상운사 한켠에는 부상자를 이송하기 위한 모노레일이 있다. 삼각산에는 부상자를 이송하기 위한 119 헬기가 자주 출현하고 있는데, 이와 병행하여 상운사에는 북한산성계곡 도로변으로 내려가는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일전에 우연히 상운사에 들렀다가 목격하여 알게된 사실이다.
북문에서 조금가면 원효봉이 나온다. 원효봉에서 바라보는 염초봉 릿지의 위용은 대단하다. 그리고 계곡을 향해 원효봉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원효봉 대슬랩은 원시적인 느낌마저 준다. 북으로는 상장능선과 숨은벽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만경대에서 동장대를 거쳐 문수봉까지 뻗어 가는 완만한 주능선의 신록도 한눈에 잡힌다. 또한 12성문 산행을 시작했던 의상봉 북쪽능선이 바로 앞에 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시구문을 향해 앞장을 선다.
(사진 : 누각이 복원되지 않은 한적한 북문<좌측>과 위험을 알리는 염초봉 우회 안내문<우측>)
12門 : 서암문(시구문) (시구문 15:33 - 수문지 15:52 - 북한산성매표소 16:00)
원효봉에서는 대부분 서암문을 거쳐 효자리 방면으로 하산하지만 12성문 순례 완결을 위해서는 성벽의 끝자락까지 가야한다. 서쪽의 암문인 서암문은 성내에서 죽은 시체를 운구하는 성문이었기에 시구문이라고도 불리운다. 수문지 가는 길을 모르기에 시구문매표소 근무자에게 물어보니 시구문 나가서 왼편 등산로를 따라 북한산수영장까지 줄곧 내려가면 된다고 한다. 시구문을 나가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이제까지 11성문을 순례하면서 산성의 안쪽으로 돌았기에 다시 돌아와 시구문 왼편의 성벽 안쪽 길을 따라 내려 간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고서 그냥 성벽 따라 내려가 보니 드디어 성벽의 끝이다. 계곡 물가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물위로 나온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가니 산성매표소로 이어지는 북한산계곡 탐방로가 나타난다. 조계종 경국지사였다가 서암사로 개명하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암자의 플래카드가 붙어있고 주변에 음식점이 있는 곳에서 산성이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서문 방면의 성벽 끝을 찾아보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으니 이렇게 하여 대서문에서 시작한 12성문 순례를 완결하게 된 것이다.
(사진 : 산성 바깥쪽에서 바라본 시구문)
(사진 : 시구문 방면에서 내려와 끝나는 성벽 끝자락<좌측>과 대서문 방면의 성벽 끝<우측>)
(사진 : 포석정이 연상되는 수문지의 현주소. 왼편 바위 위가 시구문에서 내려 오는 성벽 끝이다.)
■ 찾지 못한 자성문(自省門)
삼각산을 비롯한 여러 국립공원 안에는 오래 전의 점유권으로 인해 법으로 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음식점들이 다수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지만 행정당국 조차 수십년간 풀지 못하고 있는 현안일 것이다. 삼각산 계곡물로 인해 성벽이 끊어지는 수문지에도 과거 유적의 흔적은 보호 받지 못한 채 음식점 등 사적 소유지가 되어 있어 안타깝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던 삼각산 12성문 순례를 통해 뼈아픈 외침의 역사를 느껴보고 안이한 우리 민족과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으나 삼각산 어디에도 자기 성찰의 자성문(自省門)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철옹성의 산성과 12성문을 쌓아 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삼각산이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 치우친 난공불락의 요새이기에 산(生)城이 아닌 死城에 그친 삼각산 12성문이다. 12성문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 보면 지금도 자기 성찰이 없는 12성문이 우리 사회 곳곳에 구축되고 있다. 정치, 경제, 교육, 노동 각 부문에 있어 이기적인 이상에 치우쳐 역사 속에서 死城으로 남을 12성문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문은 나를 지키는 성문(自城門)이요 나를 되돌아 보는 성문(自省門)이거늘 삼각산 12성문을 순례하여도 자성문은 찾을 수가 없다. 자성문은 山에 있지 아니하며 내 마음 속에 있기에...
언젠가는 꼭 한번 오르고 싶었던 계획을 옮기기로 결정하고나니 전날 부터 마음이 설렌다.북한산이래야 그냥
수박 겉핱기 식으로 다녀 본 기억 밖에 없지만 이번 계획을 세우면서 "그래 요번만은 북한산을 디벼주마"라는 생각에
많은 웹싸이트를 뒤져보지만 그러나 막상 원하는 해답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확인 해 보는 수 밖에...
새벽 4시에 잠을 깨고 전날 준비 하였던 짐을 다시 정리한다.
물3000cc 우유 500cc 그리고 도시락,그외 행동식,여분의 옷,카메라..스틱 장장 무게만 10kg를 넘는다.
5시 20분 집을 나서 첫 전철인 5시 43분 차로 구파발로 향한다.
약 30분 뒤 구파발 도착 바로 북한산성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지난 4월 중순까지만 하여도 가게가 즐비했었는데 은평구 재개발 계획으로 모든 상점은 철시 된 상태... 6시 30분 경
목적지에 도착한다.
서둘러 매표소를 통과하려는데 빨리 올라가라는 매표원의 말에 앞서가던 노인네 몇분 왈
'어버이날이라고 봐주는 감'...그러니 매표소 직원이 대답하기를 "7시까지는 무료입장"이란다.....
4월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갈려다 그냥 계곡 탐방길로 들어선다.전날 비가 온 탓인지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오르다 보니 첫 문이며 북한산성 대문 중 가장 크다는 대서문을 지나쳐 온 결과로 다시 되돌아 내려가 사진 한컷...
대서문 도착 07:00
북한산성 축성 다음해에 지형이 평탄하고 취약한 대서문이 뚫리더라도 성내 시설물과 인명을
구하기 위해 지었다는 중성문을 향해 걷는다.
중성문 도착 07:30
중성문을 돌아보고 가사동암문을 오르기 위해 오던 길로 되돌아 가서 법용사 경내를 거쳐 금녕사 쪽으로 향한다.
금녕사 도착(07:54)
너무 어마어마한 청동불상에 놀라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구심부터 앞선다.대웅전 뒤 등산길로 오르면
가사당암문으로 오른다.원래는 의상봉 능선을 오르는 것이 옳으나 지난 4월에도 올랐고 중성문을 거쳐
오를려고 가장 가까운 이 코스를 택했다.
가사당암문 도착(08:20)
날씨가 흐리고 아직 이른 시간이라 등산객은 없고 한가롭다.멀리 백운대는 구름 속에 감춰져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용출봉(571M) 도착 (08:45)
용혈봉(581M) 도착(08:56)
마치 발발이 모양을 한 암벽 일명 북한산 발발이 모습이 보인다.
증취봉(593M) 도착(09:05)
부왕동암문 도착 (09:15)
가다보면 대남문 우회로가 나온다.이 코스를 택하면 편하지만
청수동암문을 지나치기 쉽다.반드시 확인해야 할 포인트....
청수동암문 도착(10:04)
이 문은 성곽에서 후미지고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구로서
그외에도 서암문,동암문,백운동암문.용암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등이 있다
대남문 도착(10:13)
고려시대부터 불려 내려온 삼각산이란 백운대,만경대,인수봉 세개의 봉우리로 그 중 백운대(836M)가
제일 높다는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성북구,종로구,고양시 경계석이 보인다(10:27)
대성문 도착(10:38)
목도 축일 겸 잠시 휴식....(10:42)..여름의 별식으로 우유를 얼려오면 3-4시간이 지나면 시원한
샤베트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성곽을 따라 서울 시내를 쳐다보며 걷는 맛 또한 일품이다...
보국문 도착(11:17)
칼바위 능선길로 갈리는 길이 나온다. 항시 지나 칠 때 마다 한번은 가고 싶은 길로서 아쉬움만 남기는 길이다.
대동문 도착(11:32)
동장대 도착(11:45)
東將臺는 그 아래쪽 산성계곡 맞은편에 자리한 행궁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장소에 설치된 지휘소다.
북한산 대피소 샘 도착(12:06)
시원한 약수 한모금 마시고 뒤돌아 나오는 순간 담배를 피우는 사람 발견...언젠부터인지 이럴 경우 담뱃불을 꺼달라고 명(?) 한다.희끗 희끗한 백발 탓에 대부분 응해주는데 오늘은 영 아니 올시다...빤히 쳐다 보고 있길래 떠나지 않고 기다린다. 마지 못해 담배 끄는 시늉을 한다.계속 버티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끈다.확인 후 떠났지만 아마도 곧 다시 피울거라는.....
매번 혼동한다.용암문으로 갈려면 대피소 윗쪽 우측길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용암문 도착 (12:15)
여태껏 산행길은 비단길이었는데 갑자기 운무가 끼기 시작하며 위문까지의 산행은 고행길로 변한다.
우이동에서 올라와 하산하는 등산객과 위문으로 오르는 등산객이 서로 맞 부딪치며
또 오전 내내 깔려 있던 운무 탓으로 마치 바윗길은 살얼음과도 같은 미끄럼판...
그리고 경남에서 왔다는 단체팀은 동서남북도 구분 못한 채 우왕좌왕...--우리의 산악회 가이드의 문제점.,..
안타까울 뿐이다.용암문에서 위문까지 가는 길은, 백운대, 인수봉과 함께 삼각산의 한 축을 이루는 만경대와
또 하나의 대형 암봉인 노적봉 사이에 끼어서, 완전히 바위 위로만 길이 나 있으며 철제 난간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안전에는 문제가 없지만, 걷기에 몹시 부담스러운 데다가
특히 휴일에는 정체까지 빚어져, 북한산에서 최악의 구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등산로 약간 벗어나 길을 뒤로 한 채 나무에 걸친 배낭 뒤로 악보를 걸쳐 놓고 보며
흘러간 유행가를 구성지게 하모니카를 부는 싸나이...즉석 신청곡도 받아주고....
박수와 앵콜송까지...북한산 노란샤쓰 사나이로 칭하고 싶다....
위문 도착(13:19)
衛門은 본래는 북암문에 해당하는 자리인데, 이 문은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 바로 아래에 위치하여 백운대 등정의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휴일에는 항상 인파로 붐빈다.그리고 오늘은 한치 앞도 분간치 못하는 상황에 백운대 오름은 뒤로 미룬채 지금 부터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북문,시구문을 찾아서....
어느 누구도 북문 가는 길 질문에 시원한 답을 해 주는 이 없으니 나 홀로 찾을 수 밖에....허기진 배를 마눌님께서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꺼내 요기를 하며 새삼 가족의 소중함을 진실로 깨닫는다...
하산 도중 암자를 만나지만 산행금지... 더 내려 가 보는 수 밖에 어느 누구도 시원한 대답은 없고 나 자신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웹상 보아 둔 북문 오름 코스 인
대동사 도착(14:28)
입구에는 등산길이 없다고 표시되어있다.그러면 더 내려가야하나....
한번 올라가 보는 수 밖에....올라가 보니 북문으로 올라 가는 표시가 있다. 등산길은 없으나 하산길은 표시가 되어있고....또 상운사로 올라오는 모노레일....자기네 법당의 혼잡은 피하고 다른 등산객의 편의는 철저히 무시하는...아이러니칼하다....
등산로 화살표 위로 가파른 언덕길로,"토사유출이 심해 다친 사람이 많다는 위협성 글로 우회"를 강요한다...그러나 너무나도 편안한 호젓한 등반길
북문 도착(14:51)
덮개없는 성문...왤까....
서울 도성에서도 동,서,남 쪽의 문들은 다 대문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유독 북쪽의 문은 그런 대접을 못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북쪽 방위를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생각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성곽 돌 틈 사이로 병꽃이 피어있다...생명의 끈질김인가....
아직도 백운대와 염초봉은 왜 나에게 고개를 드밀지 않고 수줍어 하는가....다시 한번 대면하자는 뜻일까
원효봉 가는 길에 새롭게 축성된 성곽을 보고 한 단위(?)에 문은 세군데...그중 가운데 문은 아래로 향하고 양쪽 두문은 수평으로...가운데 문으로는 사격 나머지 두문으로는 관측용인가...옛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할 뿐...
원효봉 도착(505M-15:16)
지나다 생면 부지의 지인을 만나 회포....
원효암을 거쳐
시구문 도착(16:10)
시구문은 본래 이름이 西暗門(암문이란 누각은 없이 문만 설치된 것을 말한다)인데, 북한산성 내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신을 이 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운반하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란다
나무 옷 입고 들것에 실려 나간다는 문을 걸어서 오간다...인생무상
날씨가 개이기 시작한다.그러나 끝까지 백운대는 다음을 기억하고
수문지에 도착(16:28)
60대 초로의 수구산장 주인도 옛말로 전한다.을축년 홍수로 유실되고 두개의 집채 만한 바위가 그때 밀려내려와 저기에 멈췄다며 가리킨다...양쪽 성곽의 흔적이 있으나 성문은 간데없고...1915년 8월 홍수로 유실된 수문은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안내 글귀가 생각난다
북한산성 초입 입구비가 보인다(16:52)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당초 조선 19대 숙종 임금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역부족으로 청태종에게 송파의 三田渡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한 것을 교훈삼아, 유사시 강이나(남한산성) 바다를(강화도) 건널 필요가 없고, 서울 도성에서 빠른 시간 내에 이동할 수 있으며, 천연적인 要塞와 같은 지형을 가진 북한산에 築城한 것이다.
축성 당시에 신하들은 맹렬히 반대했다는데, 반대 사유 중에서 숙종 임금까지도 망설이게 한 것은 風水地理說이었다는군요. 즉,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에서 공사를 벌이다가 잘못해서 地氣를 다치면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했다나요.
결국 숙종 임금의 강력한 의지로 축성이 완료된 당시의 북한산성에는, 먼저 산성 내부에 임금이 머무를 行宮을 중심으로 각종 官衙와 倉庫 및 군대의 宿營地, 여러 개의 寺刹과 산성 내에 거주할 민간인들의 주택 등이 들어서서 하나의 山中都市를 형성하였고, 다음으로 성벽을 따라서는 오늘 일주할 12개의 문(屍柩門, 北門, 衛門, 龍岩門, 大東門, 輔國門, 大成門, 大南門, 淸水洞暗門, 扶王洞暗門, 袈裟堂暗門, 大西門)에 더하여 산성계곡의 수로를 방어하는 水門과 내성의 관문인 中城門 등 총 14개의 문과 함께 동,서,남,북의 각 방향의 고지대에 지휘소 겸 관측소인 將臺가 설치되어 있었다 합니다.
이런 시설물들의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것은 日帝 强占期인 1915년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겨우 살아남은 일부 시설물마저 6.25 전쟁 당시 산성계곡 안으로 유인된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미군이 감행한 집중폭격과 포격으로 깡그리 폐허가 되었단다.
약 9시간의 산행 14Km 사진 700장...
나 홀로 기나 긴 산행이었다...
올 가을에는 이번 코스의 반대로 다시 한번 오르고 싶다.
북한산성 12 대문 종주팀이 늘어나고 있다.....
북한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북한산 신도가 된다지만 나는 그냥 求道入山하는 자세로 찾고 싶을 뿐....
산의 아름다움과 유명세 탓인지 또 서울 시내에 위치한 탓인지는 몰라도 너무나도 많은 산악인구 그리고 너무나도 가볍게 보는 듯한 산행 태도.. 혼란스럽다.기네스 북에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산악 인구라고 올라 있다는 말을 믿거나 말거나...
간단한 기록장치를 부탁하고 싶다,오르고 내리는 것 만이 산행이 아닐진데 앞의 그리고 뒤돌아 본 또 스쳐지나가는 한포기의 야생화....그리고 능선...
지난 일요일 서의산 훈련팀은 북한산 의상봉 능선을 다녀왔습니다.
북한산성 매표소-대서문-의상봉-가사동암문-용출봉-증취봉-북한동암문-나월봉-나한봉-청수동암문-문수봉-대남문-비봉-사모바위-구기동...으로 하산하였습니다,
이날도 어김없이 헬기는 뜨고.....항시 안전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는.....
남한의 수많은 산중에 설악산이 가장 岳山이고 그 다음이 북한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서울에 있어 오히려 멀리하였으며 주로 주중에 우이동,정릉에서 많이 오른 탓에 이쪽 의상봉 능선은 오르지 않다가 처음 의상봉 능선을 오르고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느꼈습니다.
북한산성 매표소에 도달하니 양쪽 봉우리 원효봉과 의상봉...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들과 산봉우리들의 이름은 불교에서 연원된 것이 많은데 북한산의 경우에는 元曉峰과 義湘峰, 普賢峰과 文殊峰이 각각 우리 역사상 신라시대의 2대 高僧과 대표적인 협시보살(脇侍菩薩)들을 대칭시켜 놓은 구도가 재미있었습니다.
악산의 지기(地氣)와 골기(骨氣)는 서로 비례한다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岳山이 아닌 肉山을 선호합니다.
5월중 13+1 북한산 대문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대서문-중성문-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청수동암문-대남문-대성문-보국문-대 동문-용암문-위문-백운대-북문-시구문-수문지
[코리아루트] 조선 숙종은 왜 북한산에 '성(城)'을 쌓았나
라영철 입력 2022. 01. 23. 07:00 댓글 36개
37년간의 축성 찬·반 논쟁.. '도성 수축' vs '산성 축성'
산성 품은 성곽 지대.. 도읍의 진산(鎭山) 북한산
[아시아경제 라영철 기자] 북한산은 삼국시대 이래, 군사 요충지로서 수도 방어기지의 면모를 갖춘 도읍을 품은 산이다.
도성을 방어하고 왕실과 도성 안 백성을 지켜 줄 명실공히 도읍의 진산(鎭山)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왜 수십 년간 논쟁을 벌여 가면서까지 북한산에 산성을 쌓기로 결정한 것일까. 요약하자면 숙종 재위 당시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대규모 해적 무리의 침입에 한양 도성이 늘 위험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1637년,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재위: 1623~1649)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짐작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끊임없는 북핵 위협이 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기록에 의하면 북한산성 축성은 단순히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외세로부터 왕실과 조정(朝廷), 도성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성이 외세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대비책의 하나라고 마음속 깊이 굳혔다.
그는 당시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유사시 오래 머물지 못하는 곳인데 비해 북한산성은 이동이 쉽고, 산세가 험준해 적의 접근이 어려우니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천연의 요새로 판단했다.
사실 북한산성 축성 계획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재위: 1567~1608) 때도 제기된 바 있다.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한양으로 돌아온 뒤 전란 시 방비책으로 북한산에 산성을 쌓자는 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축성의 장·단점을 논의했지만, 당시 국방 요충지 여러 곳에서 보수 중이던 성곽 공사를 끝내지 못하는 실정에다 재정과 인력마저 부족한 상태여서 선조 대의 축성은 더는 진척하지 못했다.
이후 효종(재위: 1649~1659) 때도 국방강화책으로 북한산성 축성이 제기됐다.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겪은 효종은 북벌 정책을 추진했으나, 역시 재정난과 집권층의 반대에 부딪혀 북한산성 축성 계획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북한산성 축성은 현종(재위: 1659~1674) 대를 지나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 무렵 중국대륙의 정세가 조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데다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컸다.
그래서 북한산성 축성이 제기됐던 것이다.
북한산성 성곽과 시설물 [고양시]■ 북한산성 '축성 논쟁'
숙종과 조정 대신(大臣)들은 북한산성 축성을 두고 연일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론화했다.
축성 논쟁의 발단은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해적 떼가 조선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부터다.
강화도와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경비를 강화하고 조총과 화약, 산성 전투용 수레 등 무기 확보에 총력을 쏟았다.
지역별 방어 전략과 효율적인 군사 운용 안까지 제시됐는데 그중 하나가 북한산성 축성이었다.
조정에서는 조속히 북한산성을 쌓자는 의견과 축성보다는 도성 방비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상소(上疏)했다. "북한산에 성을 쌓는다면 내성(內城)을 조성해 (유사시) 종묘와 사직을 옮길 수 있습니다. 또한 인근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종이 제조를 관할하던 관청) 어귀를 막아 한강 변의 세곡(稅穀) 창고를 옮겨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공사(公私)의 비축 물량을 모두 옮겨 들여갈 수 있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0월 26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이 의견을 제시했다. "의논하는 자들은 북한산에 성을 쌓는 것이 도성을 보전하고 지키는 바탕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성을 지키려면 북한산에 성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북한산에 성을 쌓는다면 도성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1월 10일
또 다른 절충안도 나왔다. ‘도읍 지역의 축성과 수성(守成) 방안을 서두를 필요 없으며, 군사 조련과 요충지역 방비가 우선’이라는 의견과 ‘도성 정비와 함께 북한산성을 새로 쌓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진사(進士) 허극이 상소해 도성 수축을 청했다. 이에 숙종이 "(도성은) 넓고 큰데다가 견고하지 못한 결점이 있어 그곳에서 지키고자 한다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밤낮으로 (성 쌓을 곳을) 생각하고 있다. 여러 신하들과 논의해 특별한 곳을 정하면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0월 20일
시간이 흐를수록 해적 침입의 가능성을 낮았지만, 해적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을 보완한다는 구실로 성을 쌓는다면 청나라의 간섭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게 숙종의 생각이다. 성을 쌓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37년,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병자호란)에 패한 뒤 강화를 맺으면서 “성곽 수축과 축성을 금한다”는 규약을 맺은 바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성 축성 반대파는 도성 주민 대부분이 도성 지키기를 원하며, 10만 명의 장정이 구역을 나눠 성곽을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도성을 근거로 삼아 군량미와 무기 보급을 하는 게 더 유리하며, 도성을 버리면 종묘과 사직도 옮겨야 하는 굴욕을 또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배치도 [고양시]숙종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내린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는 북한산 지형의 단점으로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제기됐다.
북한산 성곽 공사로 도읍인 한양의 지맥(地脈)이 손상되며, 청나라와의 조약을 어겨 외교관계 악화를 부르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을 소홀히 하게 돼 수도권 방어에 허점이 노출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밖에 굶주린 백성이 많고 도적이 횡행하는 시기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축성 공사는 무리라는 의견도 나왔다.
반면, 북한산성 축성 찬성파는 국가 위기 시 도성을 방어하기에는 도성이 너무 넓기 때문에 북한산성을 축성하면 도성 백성이 함께 들어가 지키기에도 용이하며, 기존의 남한산성은 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다.
축성에 쌀 1만석과 면포 1천 동(同), 역군(役軍) 1만 여 명이면 2~3개월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있다며 축성 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의 군사를 교대로 투입하고 빈민을 축성인력으로 동원하는 인력 활용 방안까지 내놨다. 특히 남한산성과 강화성은 병자호란 때 함락된 전례가 있어 새로운 보장 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축성 논쟁은 해적 침입 방어보다는 국가 전란 시 방비책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부응교(副應敎) 이세최가 숙종에 아뢰길 "만약 북한산에 성을 쌓고 겸해서 도성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좋으나, 북한산성을 쌓은 뒤에 도성을 지킬 수 없다면 이는 적절한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숙종은 "북한산성을 쌓자는 지금의 의논이 청나라에서 해적을 주의하라는 문서가 전달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이 축성 안을 이들 해적을 막으려는 계책으로 여기는데, 나의 뜻은 천혜의 지세를 이용한 성을 쌓아 장래의 구원(久遠)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2월 1일
숙종은 임진왜란 때 조정이 의주로 피난해야 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군수품과 물자를 비축해 전란 때 도성 백성들이 함께 들어가 항전 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산은 산세가 험해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축성에도 공력이 덜 들 것으로 판단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머물만한 장소가 있어 북한산성이 왕실의 안녕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며, 도성 백성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요새로 여겼다.
축성 논쟁 한 때 도성 수축론에 힘이 실려 실제 공사를 수년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인력 동원의 어려움으로 여러 차례 공사가 중단되면서 도성 수축은 마무리도 못한 채 사실상 실패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처음 북한산성 축성 제안이 나온 이후 세 번 씩의 축성 논쟁 끝에 1711년 2월, 숙종은 마침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아서 만일 여러 의논이 반드시 합치되기를 기다려 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성취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는 이른바 ‘너희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자면 적은 이미 강을 건너게 된다’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비변사등록』 숙종 37년(1711년) 2월 9일
대청터 현황(2020년 시굴조사) [고양시]■ 37년간의 결실 '북한산성' 축성
숙종은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하고 책임자를 임명해 구체적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축성은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등 삼군문(三軍門)에서 구역을 나눠 맡기로 했다.
축성 기술자를 전국에 공모하고, 일반 역부는 도성 주민을 동원하기로 했다. 재원 마련은 삼군문에서 맡았지만, 비변사(備邊司)·호조(戶曹)·병조(兵曹)·진휼청(賑恤廳) 등 중앙기관에서도 지원하도록 했다.
성곽 공사는 1711년 4월에 시작해 그해 10월에 마무리했다. 산성 전체 둘레는 약 13km에 달했다.
성 내부 시설 공사를 거쳐 1714년에 내성(內城)에 해당하는 중성(重城) 축조를 마쳤다. 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성문(城門)을 설치했으며, 동서남북에 대문을 뒀다.
행궁(行宮)과 내전(內殿)과 업무공간인 외전(外殿)을 중심으로 모두 124칸이다. 비밀 출입구와 물을 외부로 내보내는 수문(水門), 병사들의 초소이자, 거처인 성랑(城廊) 143채를 지었다.
산성 관리를 맡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산성 내 지휘부인 유영(留營) 3개소도 마련했다.
무기와 군량미, 관리용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倉庫) 8개와 우물(井) 99개소와 저수지(池) 26개소를 조성했다. 그 외 누각(樓閣) 3개, 다리(橋梁) 7개, 11개의 사찰 등이다.
이로써 북한산은 대규모 산성을 품은 성곽 지대로 거듭나게 됐다.
조선 개국 이래 300년이 흐른 뒤 도성을 방어하고 왕실과 도성 백성을 지켜줄 도읍의 진산(鎭山)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인용: 『성(城)과 왕국』, 조윤민, -주류성-
사진: 문화재청·경기도 박물관·고양시
라영철 기자 ktvko258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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