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세상을 꿈꾸는 백성의 염원이 숨쉬는 곳 | ||||||||||||||||||||||
‘佛宗佛朴’의 비밀을 찾아서 1974년경부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제2국립묘지(대전 현충원) 건립지와 함께 은밀히 새로운 수도 이전지를 물색 중에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곳이 일찍이 명당으로 꼽혀왔던 신도안(新都內·신도내)을 중심으로 한 계룡산(鷄龍山) 일대였다. 그 무렵 나는 초능력자로 알려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조언을 청해왔다. 옛 사람이 쓴 글자를 감정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소문이 최고권부에까지 알려져 신도안을 포함한 계룡산 일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서각자(書刻字)와 그곳이 과연 명당인지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신도안의 옛 궁궐터 어딘가에 써있다는 글자와 계룡산 오송대 계곡 너럭바위 글자, 그리고 연천봉 정상 바위에 있는 오래된 글자 등 모두 세 군데의 글자였다.
지금도 나는 계룡산을 찾을 적마다 늘 가슴이 설렌다. 지금은 서울에서 불과 두세 시간, 한 달이면 적어도 한두 번씩 가게 되는 산이면서도 설레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계룡산이 예로부터 풍수가들이 알아주는 신령스러운 명산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열한 살 되던 해(1957년) 봄이었다. 당시 진해 경찰서장에서 공주 경찰서장으로 전근가는 부친을 따라 대전역까지 마중나온 경무주임과 함께 지프를 타고 공주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1년3개월 머물렀던 공주는 결국 비극적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는 곳이다. 부친을 따라 계룡산 일대의 많은 사찰과 명소를 찾아다니는 등 아름다운 추억도 많지만, 공주는 부친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58년 8월 초 계룡산 계곡에는 암용추와 숫용추라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그 생김새가 각각 남녀의 생식기 형상을 하고 있어 계룡산의 심벌로 꼽히고 있었다. 그 중 숫용추 계곡 훼손사건이 생겨 공주 일대가 떠들썩했다. 그 무렵 계곡 인근에서는 길을 닦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워낙 험한 지역이어서 공사업체에서는 폭약을 터뜨려 길을 내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숫용추 웅덩이까지 메워버리는 등 계곡을 크게 훼손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아신 부친은 현장을 다녀오신 후 매우 침울하시고 걱정에 잠기셨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인 8월 9일 부친은 비명에 가셨다. 부친의 장례는 공주 사람들의 애도 속에 5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훼손되었던 숫용추가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어 주민들이 기뻐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유년기에 있었던 부친의 죽음과 일련의 사건은 그후 필자의 인생역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상서로운 기운 해독 부탁을 받은 글자의 소재지를 찾아 먼저 신도안을 찾았다. 그곳 수양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글자의 소재지를 수소문했다. 이튿날 드디어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스승으로 알려진 무학대사가 썼다는 ‘佛宗佛朴’ 네 글자가 새겨진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신도안을 천도지로 정하고 10개월 동안 궁궐터를 닦는 과정에서 누군가 새겨놓은 글자로 여겨졌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혹세무민하기 위해 일부러 새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글자의 내용은 해석하기 애매했다. 불교와 박(朴)씨 성(姓)에 대한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아전인수 격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도안은 일찍이 천도지로 꼽혀온 천하명당으로 소문난 곳으로 이 터를 차지하고 싶은 이들의 심정과 연결해보면 그 글자의 뜻이 묘해진다. 공교롭게도 박씨 성과 관련해 신도안을 처음 천도지로 택하고자했던 주역 중 한 사람이 무학대사였고 그의 속성(俗姓)이 박씨였다는 것. 또 이곳에 종단건물을 지은 신흥종교의 교주도 박씨였으며,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역시 같은 성씨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구에 대한 해석이 더욱 괴이쩍었다. 두 번째로 오성계곡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黃牛萬國活南朝鮮 文明開花三千里 領導 朴瞻濟’ ‘黃牛如正熙將守 道術運通九萬里’라는 글자를 찾아나섰다. 당시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산길을 따라 약 400m를 올라 나무다리를 건너 돌층계를 지나는 등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곳 너럭바위 여기저기에 잡다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그 중 박첨제라는 사람이 썼다는 서른네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며 언제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판독해보니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상징인 황소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운수가 오래가리라는 것과 영도자 박씨가 뜻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눈에도 오래된 글자는 아니었다. 조잡하게 쓴 글자인 데다 내용도 다분히 의도적인 글귀였다. 마지막으로 연천봉 석각(石刻)을 찾아 힘겨운 등반을 해야 했다. 연천봉 정상 바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方百馬角 口惑禾生’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글을 참자(讒字)라고 한다. 풀이하자면 ‘방(方)’은 ‘4(넷)’를 뜻하는 것으로, ‘방백(方百)’은 ‘사백(400)’이라는 숫자가 된다. 옛날에는 말 ‘마(馬)’자와 소 ‘우(牛)’자를 같이 쓰면서 ‘8(팔)’을 의미했고, 짐승의 뿔(각·角)은 두 개인지라 ‘각(角)’자는 ‘2(둘)’를 뜻했다. 따라서 ‘마각(馬角)’은 ‘82’를 일컫는다. ‘구혹(口惑)’은 나라 ‘국(國)’자, ‘화생(禾生)’은 ‘옮긴다’는 뜻의 ‘이(移)’자가 된다. 따라서 모두 합해보면 ‘482년 후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이다. 나라가 옮겨간다면 망한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조선이 망하고 새 시대가 계룡산에서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인 것이다. 조선은 이보다 37년을 더 지탱했으나 얼추 예언이 맞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굳이 첨언하자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백성의 소망을 상징하는 글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도안에 ‘충효사(忠孝寺)라는 절 밖에 모신 부처님(石佛)의 얼굴이 흰색으로 변하면 정도령(鄭道令)이 와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풍설이 떠돌고 있었다. 즉 ‘계룡산 돌이 희게 변할 때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예언이었다. 이 역시 연천봉 정상 바위에 쓰여진 글씨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언서로 알려진 정감록의 예언과 연관이 있다. 나는 현장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용을 꿰뚫어 안다고 해도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인 것이다. 시간이 가면 바위도 마모돼 속살을 드러내듯이 비밀은 자루 속의 송곳처럼 솟아나게 마련이다. 내가 다녀가고 이듬해인 1978년에 신도안 지역을 재정비하기 위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년 뒤 ‘최고지도자의 유고(有故)’라는 비극적 사건과 정권교체의 와중에서 이곳은 잠시 잊혀졌다. 그 후 이곳에 있던 잡다한 종교단체의 시설물이 철거된 것이 1983년 6월 20일경부터였고, 신도안에 계룡대 골프장이 건설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대전 현충원은 1979년에 착공해서 당초 예정대로 1985년에 마무리되었다. 계룡산은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을 품고 있다. 상서로운 기운이 신도안을 감싸고 있고, 그 터전에 옛 사람이 전해온 구세성인(救世聖人)의 궁궐을 짓기 위한 삼군의 건장한 건아들이 열심히 지신밟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살기 좋은 세상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백성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서.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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