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sr]산행,여행

영기로 본 산하기행(계룡산)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28. 14:57

 새 세상을 꿈꾸는 백성의 염원이 숨쉬는 곳

‘佛宗佛朴’의 비밀을 찾아서

 

1974년경부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제2국립묘지(대전 현충원) 건립지와 함께 은밀히 새로운 수도 이전지를 물색 중에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력한 곳이 일찍이 명당으로 꼽혀왔던 신도안(新都內·신도내)을 중심으로 한 계룡산(鷄龍山) 일대였다. 그 무렵 나는 초능력자로 알려지면서 여러 사람들이 조언을 청해왔다. 옛 사람이 쓴 글자를 감정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 소문이 최고권부에까지 알려져 신도안을 포함한 계룡산 일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서각자(書刻字)와 그곳이 과연 명당인지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받게 됐다. 신도안의 옛 궁궐터 어딘가에 써있다는 글자와 계룡산 오송대 계곡 너럭바위 글자, 그리고 연천봉 정상 바위에 있는 오래된 글자 등 모두 세 군데의 글자였다.

 

지금도 나는 계룡산을 찾을 적마다 늘 가슴이 설렌다. 지금은 서울에서 불과 두세 시간, 한 달이면 적어도 한두 번씩 가게 되는 산이면서도 설레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계룡산이 예로부터 풍수가들이 알아주는 신령스러운 명산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열한 살 되던 해(1957년) 봄이었다. 당시 진해 경찰서장에서 공주 경찰서장으로 전근가는 부친을 따라 대전역까지 마중나온 경무주임과 함께 지프를 타고 공주로 향했다. 그러나 내가 1년3개월 머물렀던 공주는 결국 비극적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는 곳이다. 부친을 따라 계룡산 일대의 많은 사찰과 명소를 찾아다니는 등 아름다운 추억도 많지만, 공주는 부친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58년 8월 초 계룡산 계곡에는 암용추와 숫용추라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다. 그 생김새가 각각 남녀의 생식기 형상을 하고 있어 계룡산의 심벌로 꼽히고 있었다. 그 중 숫용추 계곡 훼손사건이 생겨 공주 일대가 떠들썩했다. 그 무렵 계곡 인근에서는 길을 닦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워낙 험한 지역이어서 공사업체에서는 폭약을 터뜨려 길을 내려했는데 이 과정에서 숫용추 웅덩이까지 메워버리는 등 계곡을 크게 훼손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아신 부친은 현장을 다녀오신 후 매우 침울하시고 걱정에 잠기셨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인 8월 9일 부친은 비명에 가셨다. 부친의 장례는 공주 사람들의 애도 속에 5일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그날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훼손되었던 숫용추가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어 주민들이 기뻐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유년기에 있었던 부친의 죽음과 일련의 사건은 그후 필자의 인생역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상서로운 기운

해독 부탁을 받은 글자의 소재지를 찾아 먼저 신도안을 찾았다. 그곳 수양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글자의 소재지를 수소문했다. 이튿날 드디어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스승으로 알려진 무학대사가 썼다는 ‘佛宗佛朴’ 네 글자가 새겨진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신도안을 천도지로 정하고 10개월 동안 궁궐터를 닦는 과정에서 누군가 새겨놓은 글자로 여겨졌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혹세무민하기 위해 일부러 새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글자의 내용은 해석하기 애매했다. 불교와 박(朴)씨 성(姓)에 대한 찬양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아전인수 격이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신도안은 일찍이 천도지로 꼽혀온 천하명당으로 소문난 곳으로 이 터를 차지하고 싶은 이들의 심정과 연결해보면 그 글자의 뜻이 묘해진다. 공교롭게도 박씨 성과 관련해 신도안을 처음 천도지로 택하고자했던 주역 중 한 사람이 무학대사였고 그의 속성(俗姓)이 박씨였다는 것. 또 이곳에 종단건물을 지은 신흥종교의 교주도 박씨였으며,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 역시 같은 성씨였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문구에 대한 해석이 더욱 괴이쩍었다.

 

두 번째로 오성계곡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다는 ‘黃牛萬國活南朝鮮 文明開花三千里 領導 朴瞻濟’ ‘黃牛如正熙將守 道術運通九萬里’라는 글자를 찾아나섰다. 당시 동학사에서 갑사로 가는 산길을 따라 약 400m를 올라 나무다리를 건너 돌층계를 지나는 등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곳 너럭바위 여기저기에 잡다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그 중 박첨제라는 사람이 썼다는 서른네 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며 언제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판독해보니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상징인 황소와 같이 박정희 대통령의 운수가 오래가리라는 것과 영도자 박씨가 뜻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눈에도 오래된 글자는 아니었다. 조잡하게 쓴 글자인 데다 내용도 다분히 의도적인 글귀였다.

마지막으로 연천봉 석각(石刻)을 찾아 힘겨운 등반을 해야 했다. 연천봉 정상 바위에는 누구의 작품인지 알 수 없는 ‘方百馬角 口惑禾生’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글을 참자(讒字)라고 한다. 풀이하자면 ‘방(方)’은 ‘4(넷)’를 뜻하는 것으로, ‘방백(方百)’은 ‘사백(400)’이라는 숫자가 된다. 옛날에는 말 ‘마(馬)’자와 소 ‘우(牛)’자를 같이 쓰면서 ‘8(팔)’을 의미했고, 짐승의 뿔(각·角)은 두 개인지라 ‘각(角)’자는 ‘2(둘)’를 뜻했다. 따라서 ‘마각(馬角)’은 ‘82’를 일컫는다. ‘구혹(口惑)’은 나라 ‘국(國)’자, ‘화생(禾生)’은 ‘옮긴다’는 뜻의 ‘이(移)’자가 된다. 따라서 모두 합해보면 ‘482년 후에 나라를 옮긴다’는 뜻이다.

나라가 옮겨간다면 망한다는 뜻이다. 이를 테면 ‘조선이 망하고 새 시대가 계룡산에서 세워질 것’이라는 예언인 것이다. 조선은 이보다 37년을 더 지탱했으나 얼추 예언이 맞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굳이 첨언하자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염원하는 백성의 소망을 상징하는 글자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신도안에 ‘충효사(忠孝寺)라는 절 밖에 모신 부처님(石佛)의 얼굴이 흰색으로 변하면 정도령(鄭道令)이 와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풍설이 떠돌고 있었다. 즉 ‘계룡산 돌이 희게 변할 때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예언이었다. 이 역시 연천봉 정상 바위에 쓰여진 글씨에서 비롯된 것으로 예언서로 알려진 정감록의 예언과 연관이 있다.

나는 현장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용을 꿰뚫어 안다고 해도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인 것이다. 시간이 가면 바위도 마모돼 속살을 드러내듯이 비밀은 자루 속의 송곳처럼 솟아나게 마련이다.

내가 다녀가고 이듬해인 1978년에 신도안 지역을 재정비하기 위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1년 뒤 ‘최고지도자의 유고(有故)’라는 비극적 사건과 정권교체의 와중에서 이곳은 잠시 잊혀졌다. 그 후 이곳에 있던 잡다한 종교단체의 시설물이 철거된 것이 1983년 6월 20일경부터였고, 신도안에 계룡대 골프장이 건설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대전 현충원은 1979년에 착공해서 당초 예정대로 1985년에 마무리되었다.

계룡산은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을 품고 있다. 상서로운 기운이 신도안을 감싸고 있고, 그 터전에 옛 사람이 전해온 구세성인(救世聖人)의 궁궐을 짓기 위한 삼군의 건장한 건아들이 열심히 지신밟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살기 좋은 세상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백성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서.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태조 이성계의 못다 이룬 천도의 꿈
계룡산 영기의 정점인 신도안, 수도로 정한 후 대궐터까지 닦다 포기한 사연 들어보니...

 

계룡산(鷄龍山)’ 하면 단박에 ‘도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직접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코믹한 뉘앙스를 주는 산이다. ‘계룡산에서 몇 십 년을 수도한 뒤 하산한 도인’이라는 얼치기들이 잊을 만하면 사건·사고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탓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왜 하필 선무당이 계룡산을 들먹이는가?

 

그렇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계룡산은 어느덧 영산(靈山)으로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계룡산(845.1m)은 영적인 기운의 대표와도 같은 산이다. 산줄기와 물줄기가 묘하게도 태극의 형상을 이루는 중심에 계룡산이 서 있다. 계룡산 전체를 휘감고 도는 영기의 정점에는 신도안(新都內)이 있다. 신도안에 이르면 계룡산 이름의 유래가 드러난다. ‘닭벼슬을 쓴 용’(鷄龍)의 형상.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머리봉(혹은 부리봉)은 닭부리 모양에 다름아니다.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왕사인 무학(無學)대사가 ‘금닭이 알을 품었다’(金鷄抱卵), ‘용이 날아올라 하늘로 솟구친다’(飛龍昇天)고 했던 모습 그대로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은 요즘도 계룡산 신도안에 자주 들른다.

 

신도안이란 말 그대로 600여년 전 이성계가 일찌감치 조선의 수도로 점찍었던 곳이다. 그런데 10개월에 걸쳐 대궐 터까지 닦아놓은 상태에서 조선의 도읍은 갑작스레 한양으로 정해졌다. 무슨 사연이 숨어 있는가.

 

필자는 매월 16일 대전 유성(儒城)으로 내려간다. 국내외에서 찾아온 소중한 인연들과 좋은 얘기를 주고받는 모임이 유성의 후암정사에 마련되는 날이다. 그래서 이따금씩 계룡산에 들곤 한다. 이성계 일행과 자주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30년 전 당시 권부(權府)의 의뢰로 계룡산 일대의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처음 대면한 이래 그 어느 영가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존재가 태조다.

이성계는 왕이다. 절대 홀로 나타나는 법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혼(招魂)하려면 경호원들의 요란한 구둣발 소리를 감수해야 하듯, 태조 영혼의 행차에는 정도전(鄭道傳), 하륜(河崙), 무학대사 등 개국공신들과 국사(國師)가 동행한다.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필자에게 ‘~해라’체를 쓰고, 신하들은 ‘~하오’라고 한다.

“왜 계룡산을 포기하고 500리나 떨어진 한양으로 가셨습니까?”

 

좌중을 둘러본 태조가 털어놓는다. “이 사람들(정도전, 하륜)이 신도안은 너무 남쪽이고 또 근처에 큰 강이 없어서 경세(經世)에도 불리하고, 신도안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형국이라 천도지로는 흉하다기에….”

 

“그렇다면 사연봉(四連峰) 태조대왕 동굴은 무엇인가요?”

“궁을 짓는 동안 기도하던 곳이었지. 그런데 기도하다가 계룡산 할머니를 만났어. 할머니가 반대하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네.” 계룡산 산신은 여성이라는 세인들의 믿음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할머니 신령은 “계룡산의 임자는 당신이 아니라 다섯 가지 덕을 갖춘 선인”이라며 이성계에게 공사중단을 명했다고 했다. “계룡산의 정기를 타고 태어날 신인(神人)이 새 나라의 수도로 정해 800년간 쓸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 신인은 바로 언제나 숱한 추측이 끊이지 않아왔던 ‘정도령’이다. 할머니 산신이 이성계를 무작정 내몬 것은 아니었다. 한양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동시에 500년이라는 조선왕조의 수명도 예고했다고 한다.

무학대사도 한마디 귀띔했다. “대왕이 고려를 멸하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불렀다는 점도 할머니는 못마땅해 했다. 그래도 (태조와 나는) 아직까지 아쉬움이 남아 한양에서 달(月)을 바라보다 흥이 오르면 여기로 온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지리산 산신령도 여성인데, 계룡산 할머니의 딸이다. 딸이지만 어머니보다 몸집은 훨씬 크다. 지리산이 계룡산보다 훨씬 장대하듯이.

 

유성의 법당에는 할머니의 자리(목상)가 있다. 가끔씩 산을 내려와 쉬다가고는 한다. 할머니는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특히 외국인을 몹시 싫어한다. 과거 일본인들은 계룡산 구석구석의 혈맥만 정확히 골라 쇠말뚝을 박았다. 위로는 중국 대륙, 아래로는 동남아로 뻗어나가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탐을 낸 일제강점기 중 일본의 새 수도 최적 후보지 역시 계룡산이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겼고 부여에 자신들의 신궁을 만들었다. 경성(京城·현재의 서울) 남산에 이미 신궁이 있었건만 수도가 아닌 지역에 제2의 신궁을 건설하는 파격을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었다. 계룡산의 상서로운 기운이 일제 패망을 재촉했다.

 

계룡산은 미국도 배척했다. 광복 직후인 1948년, 미군은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 군용 통신탑을 세우려 했다. 건축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는 병사가 속출했다. 미군을 물리고 우리나라 군인이 공사를 전담한 다음에야 탑이 완공될 수 있었다. 이후 통신시설의 관리를 명분삼아 슬그머니 계룡산으로 돌아온 미군은 원인불명의 통신장애가 잇따르자 한국군에 모든 것을 넘긴 채 완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런 분이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인 23.5도와 딱 맞아떨어지는 세계의 핵심을 주관하는 여신답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계룡산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개발이 할퀴고 있는 상처들로 몸이 몹시 아프다. 아물만하면 또 파고든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성 후암정사와 국립현충원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성계를 비롯한 최고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 그리고 야욕을 숨기지 않은 외세를 물리쳐온 계룡산 할머니다.

유행하는 CF 노래의 가사를 빌려 계룡산의 심경을 전한다. ‘할머니는 말하셨지, 욕심을 버려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계룡산이다.’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할머니신(神)이 넉넉한 사랑으로 품은 산
옥녀봉에 앉아 잡귀 다스리며 개벽세상을 항햔 일성(一聲),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계룡산(鷄龍山·845.1m)은 여신(女神)이 관장하는 산이다. 그래서 계룡산의 주산(主山)도 옥녀봉, 즉 여성이다. 할머니 산신령이 옥녀봉에 앉은 채 왼쪽에 장군봉(將軍峰), 오른쪽으로 문필봉(文筆峰)을 거느리고 있다. 각각 무신(武臣), 문신(文臣)이다.

‘할머니’는 푸근한 호칭이다. 계룡산 할머니 신령도 인간세계의 할머니와 마찬가지다. 공포심이나 경외감을 자극해 인간 위에 군림하려드는 법이 없다. 치사랑은 바라지 않는다. 내리사랑에 만족할 따름이다.

사람이 죽은 게 신이라 이승에서의 품격과 습관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초혼하면 커뮤니케이션에 애를 먹는다. 사어(死語)와 고어(古語) 투성이라 이해하려면 진땀을 흘려야 한다.

계룡산 할머니의 인간시절 정체에 관해서는 모른다. 느릿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그런 것 알아서 뭣하게”라며 공(公)과 사(私)에 선을 분명히 긋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 산신(山神)은 요즘 인간보다 귀신을 돌보느라 더 바쁘다.

“꼭 20년 전(계룡산 아래 유성에) 국립현충원이 생긴 이후 산 사람 챙길 여유가 없어졌지. 나라 지키다 젊어서 죽은 혼들이 하도 많아서….” 호국 영령들은 탐욕스럽지 않아 한층 더 정이 간다는 것이다.

 

좌청룡(左靑龍)처럼 할머니를 보좌하는 무신은 신임이다. 270여년간 할머니를 모시던 장군봉의 전임 무골은 수년 전 천계로 축출됐다. 그때 일을 떠올리면 할머니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아, 그놈이 멀쩡한 사람을 스물다섯인가 죽였지 뭔가. 옥녀봉 아래 골프장이 들어설 때쯤 근처 마을 남자들을 죄다 없애버렸어. 좋은 땅 욕심이 많은 장군이었지. 제 명당이 파헤쳐지는 걸 보고 엉뚱한 데다 화풀이를 한 거야.” 문제의 골프장 마을에서 오랜 세월 구전돼온 화두와도 같은 암시의 실체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산에 불 들어오면 도망쳐라.’ 이 말에 숨은 뜻은 ‘골프장 공사가 시작되면 마을을 떠나라’는 예고였던 것이다. 비명횡사한 이들은 결국 장군신(將軍神)의 경고를 무시한 채 마을에 눌러 앉은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소름이 돋았다.

계룡산은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구, 오묘한 빛 등으로 인간을 시험하기도 한다. 연천봉(連天峰)에 새겨진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을 파자하면 ‘사백팔십이 국이(四百八十二 國移)’, 즉 ‘조선왕조의 명운은 482년’이라는 힌트다. (方=네모=四, 馬=牛=八十, 角=뿔=2개=二, 口+或=國, 禾+生=移)

갑사에서 금잔디 고개로 오르는 골짜기에 터를 잡은 신흥암에는 ‘천진보탑’이라는 바위기둥이 있다. 이 탑의 꼭대기에서 영롱한 빛이 나온다. 물론 아무나 볼 수 있는 빛은 아니다. 신흥암은 불상 대신 천진보탑을 모시고 있다. 영기(靈氣)가 발달한 불가(佛家)의 스님들이 빛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계룡산에서 언뜻 소울음 비슷한 소리를 듣거나 호랑이 기운을 느꼈다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다고 자부해도 좋다. 왜구의 노략질로 폐허가 됐던 갑사를 중창하는 과정에서 큰 몫을 하고 죽은 소가 이따금씩 할머니의 자가용 노릇을 하고 있다. 갑사 공우탑(功牛塔)의 주인공인 바로 그 소다. 풍운아 김시습(金時習)을 만나러 몸소 마곡사를 찾았다가 김시습이 자신을 피해 절을 떠났다는 사실을 안 세조(世祖)가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타고 내려온 소의 새끼다.

또 깊은 산속의 호랑이 눈빛과도 같은 ‘스기’를 감지하는 순간이라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이려니 짐작하면 옳다. 연천봉 중턱 오누이탑의 건립 모티브를 제공한 그 호랑이다. 목에 걸린 비녀를 빼준 스님에게 처녀를 물어다준 호랑이다. 물론 호랑이의 호의와 무관하게 스님과 처녀는 평생 의남매로 지내며 불도를 닦았다. 좀 멍청하지만 사기(邪氣)는 전무한 호랑이인 만큼 겁먹을 필요는 없다.

계룡산에는 할머니 산신 일행만 있는 게 아니다. 온갖 잡귀잡신들로 우글거린다. 1983년 국가 차원의 정화사업으로 신도안 등지에 뿌리내린 귀신들의 보금자리 620여곳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뿐, 이들 귀신은 슬그머니 국사봉(國師峰) 쪽으로 자리를 옮겨 눌러앉은 상태다.

 

신이 아니라 귀신이 절대다수다. 국사봉에서 산기도를 올리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체험담은 착각에서 비롯되는 수가 많다. 기도에 몰입, 뇌파를 한껏 끌어올려 일정단계에 도달하면 귀신이 머릿속으로 쏙 들어온다. 기도자와 귀신의 주파수가 일치하는 찰나를 노리는 것이다. 스스로 신의 대리인이 됐다고 오해하기 십상이다. 동자신(童子神)이 들었다는 사람 가운데는 “데리고 있는 동자신이 시원찮아 계룡산으로 가서 새 동자로 바꿔왔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다. 신이 아니라 잡귀를 떠받들고 있다는 고백에 다름아니다.

계룡산 할머니는 이따금씩 “일부가 천상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며 섭섭해 한다. 국사봉에서 정역(正易)에 천착,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이치를 깨친 반인반신(半人半神)급 학자 김일부(金一夫·1826~1898)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생전의 김일부를 상제(上帝)와 만나게 해주는 특혜를 베풀었을 정도로 할머니는 그를 아낀다. 계룡산은 이처럼 선비와 학자를 사랑한다. 계룡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대전 유성(儒城)을 우리말로 풀면 ‘선비재’다.

계룡산은 ‘정도령’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후천개벽의 세상은 아직도 요원할까. 할머니가 웃는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영안(靈眼)깨나 있다면서 청맹과니 같은 소리만 늘어놓는구나.”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대덕 연구단지, 계룡대, 정부 대전청사가 보였다. 동시에 국가의 미래가 오버랩 됐다. 어느새 개벽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글·사진=차길진 영기연구가(www.hooam.com)

 

 

 

 

金錡泰 처제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계룡시 두마면 엄사리인데 신도안이 바로 옆에 있더군요.
계룡산이 이토록 名山일 줄은 몰랐습니다. 글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과연 위 글 저자의 판단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 나는 현장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내용을 꿰뚫어 안다고 해도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人間事)인 것이다. 시간이 가면 바위도 마모돼 속살을 드러내듯이 비밀은 자루 속의 송곳처럼 솟아나게 마련이다. - 
2005/12/03 01:55:02  
풀뿌리 어제 또 계룡산을 갔었습니다. [암용추-상봉-머리봉-정도령바위-숫용추]코스였는데 정도령 바위는 저도 처음 봤습니다. 전구간이 입산금지구역이고 군사시설 보호구역이라 접근이 쉽지 않았지만 동지와 겨울초입의 뜻깊은 산행이었습니다. 곧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배달9202/개천5903/단기4338/서기2005/12/5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서)

 

'18[sr]산행,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운날의 삼각산  (0) 2015.08.28
진천 농다리  (0) 2015.08.28
티벳의 불가사의한 10대 현상  (0) 2015.08.28
화엄사의 아침  (0) 2015.08.28
북한산 호랑이굴에서 만난 풍경...  (0) 2015.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