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김대중 (2)

이름없는풀뿌리 2015. 10. 1. 13:48

김대중의 출생


김대중은 1926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1924년생이라는 주장들이 많다. 소위 “김대중의 출생비밀”에는 생년월일과 아버지의 성씨에 대해서도 불분명하다는 의혹들이 들어 있다.

1980.5.18일자 경향신문에 나타난 출생비밀은 아래와 같다.

김대중의 생모는 장오도 여인(71년5월9일 사망), 1911년 제갈성조와 결혼했다가 사별했고, 1920년에 윤창언의 셋째 첩으로 입적했으나 역시 사별했다. 그 후 본 남편 제갈성조의 친형인 시숙 제갈성복의 도움으로 주점을 경영하다가 김대중을 임신한 상태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 사는 김운식의 첩으로 들어가 1924년 11월 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김대중을 낳았다.

김대중은 김운식의 서자로 자라면서 국민학교와 목포상업을 졸업한 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해운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다가 해방을 맞자 그 해운회사를 일본인으로부터 인수했다. 이때 그는 22세였다.

              
                                                           청년기


한편으로는 해운업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 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파출소를 공격하는 등 공산계 파괴활동에 참가했다.

27세 때, 6·25가 발발하여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했다는 죄목으로 전남도경에 검거됐었다. 한편 50-56년 사이의 목포해운회사를 경영하던 중 선원봉급과 배를 판돈 1억 5천만원을 횡령하여 도주했다.

1956년, 33세가 된 김대중은 이 일로 해운회사 부사장인 나상수로부터 고발당해 강원도로 피신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빚을 지고 생활고에 허덕였다. 이때의 김대중의 처는 차용수, 현재 생존해 있는 차 모 목사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빚에 시달리고 계까지 깨지는 바람에 세상을 비관하고 음독자살을 했다.

    
                                                     정치꾼-사기꾼 시절


1959년 6월, 36세가 된 김대중은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바로 이 때 또 다른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중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文壽龍)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서 처우하고, 당중앙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씨를 통해 유족에게 건네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이중 12만원만을 유족에게 건넸을 뿐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했다. 이 사실을 안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이 김대중씨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해 버렸다.

김대중씨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전해지자, 당내는 물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씨는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 등 네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고발당한 네 명은 김대중씨를 횡령과 무고(허위신고)로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지만 그 후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한다.

1960년, 37가 된 김대중은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가, 전적했다.

1960년 7월29일, 4․19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4․19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됐다. 이 때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한 후,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해 상대방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낙선 당하자 김대중은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개표소에 난입, 투표한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후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1961년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은 1961년 7월부터 민주당 선전부장이 됐다. 이 때에도 김대중은 또 다른  횡령사건을 저질렀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 자금 3천7백만 원 중 7백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됐다.

1962년 10월, 39세가 된 김대중은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시절에 처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반정부 활동


1971년 49세가 된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유세도중 자기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당했던 교통사고를 박대통령 측이 저지른 암살음모라고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의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켜놓고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7대의원 당시에는 8대 국회의원 당 공천을 해준다고 속여 박종태로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부터 3천8백50만원, 이원형으로부터 1백만원 등 4천4백50만원을 사취했던 기록도 있다. 그 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그는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도쿄 플라자 호텔에서 김병식 부주석으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1972년10월 유신 계엄령이 선포됐고, 선포됐고 국회가 해산됐다. 이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등 반국가적 행위를 감행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 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괴 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조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1973년 8월 8일, 그는 도쿄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됐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의 방일 사과 등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 됐다.


                                                       선동과 내란 음모의 시절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에 있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 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한 후 가택연금으로 전환시켰다.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1979년 3월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동년 12월에 그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이어서 최규하 권한대행은 1980년 2월, 그를 사면복권시켜 주었다.

1980년 초 '서울의 봄' 시기에 그는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가벼운 몸으로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고, 학원소요사태를 배후 주동하고, 학원소요의 위력을 과시하면서 최규하 정권의 즉각퇴진을 압박하다가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불러왔다.

이로 인해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어 광주소요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9월에 그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그를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파들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전두환은 1980년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다는 조건으로 1982년 12월, 그를 석방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

 

 

 

김대중과 전라도   

 

전남 광주에 초현대식-초맘모스급의 화려한 시설, ‘김대중컨벤션센터’가 개관되었다.  9.6일 김대중이 개관식에 참석하여 호남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는 소식이다. 그는 여기에서 미래를 향한 어떤 연설을 한 것이 아니라 “호남인들이 사랑해 줘서 고맙다.” “부동산에 투기하는 돈이 북으로 가서 북도 살고 우리도 살았으면 한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에 수많은 국민이 분노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남인들은 김대중이 무슨 말을 하던  “위대하신 슨상님”으로 모신다.  

여기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예전에 호남인들이 김대중을 지지한 것은 그가 '호남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지역 정서상 그럴 수 있다고 인정을 했다.

그러나 지금의 김대중은 국민을 속여 가며 적장에 군자금을 대준 뺄갱이다. 그는 혼외의 딸을 낳았고, 출세를 위해, 한 때 사랑했던 모녀를 수십년간 사회 한 구석에 맷돌로 눌러놓았다. 사랑을 속삭였던 옛 연인은 정신적으로 시달리다 자살했고, 사랑의 열매라던 딸은 입이 철저히 봉쇄당한 채,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고 있다. 당시 경향신문과 조서들을 보면 그는 천하의 사기꾼이며,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인간 이하의 존재다. 다른 지역 국민들의 대부분이 증오하고 침을 뱉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실들에 대해서는 호남사람들이 늘 주장하듯이 군사정권이 뒤집어씌운 모함이라 치더라도, 23세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적장에 군자금을 준 빨갱이라는 사실, 혼외의 모녀를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시달리게 해온 냉혈한이라는 사실, 입만 열면 거짓말 하는 사람으로 멸시받는다는 사실만큼은 지식인들이라면 호남인들도  알 것이다.

김대중이 욕하는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부분의 국민들 가슴 속에 가난한 애국자로 각인돼 있지만, 이완용보다 더 매국적인 김대중은 대한민국 최상의 돈부자로 회자되고, 대궐보다 더 호화로운 아방궁에서 살고 있다 회자된다.  

이승만!

김대중 패들이 욕하는 것처럼, 그가 독재자였다면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는 단 한마디로 깨끗하게 경무대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면서도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나갔다.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차량을 더 이상 탈 수 없다며 극구 사양했다.

김대중은 천문학적인 돈을  챙겼다지만 이승만은 아무런 재산이 없다. 그가 무슨 재산을 남겼는지 김대중 패들은 말해보라.

6.25 때, 이승만이 부산에 피란했을 때였다. 미국 대사가 소갈비 열 근을 사서 선물로 보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낼 수 있다는 간곡한 편지와 함께. 이승만은 그 고기를 되돌려 보냈다. 국민이 모두 못 먹고 고생하는데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혼자 고기를 먹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3년6월13일, 그는 미국이 한국정부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하고, 포로석방에 대해서도 북한 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함에 따라, 미군이 억류하고 있던 인민군포로 중 북으로 가기를 원치 않는 2만7천명을 반공포로를 탈출시켰다. 미군이 지키고 있던 포로수용소를 한국군이 기습하여 포로를 석방시킨 것이다.

이에 미국이 화를 단단히 냈다. 미국무장관 딘 러스크가 이승만에게 달려왔다. 이승만은 참새 몇 마리를 잡아다 새장에 넣고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성질 급한 새들이 나가려고 발광을 했다. 이 새들의 몸부림을 본 러스크 장관이 새들을 풀어주지 왜 가두어 두느냐고 했다. 이승만이 그러면 풀어주겠다고 순순히 대답했다. 이에 러스크가 ‘기르는 새일 텐데 아주 도망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저 새들은 훈련이 돼 있어서 금방 돌아 올 것’이라 답하면서 새장 문을 열어 주었다.

참새들이 신이 나서 날아가 버렸다. 아주 멀리. 한 동안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러스크가 걱정을 했다. 새가 왜 안 돌아오느냐고. 이에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 “저 새들은 길이 잘 들여졌지만, 먹을 게 많이 있는 새장보다는 자유가 더 좋은 모양이다”

반공포로 석방을 항의하러 왔던 러스크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 후 그는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려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단독 북진을 하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이승만의 엉뚱함에 기가 질린 미국은 그래서 1953년 10월 1일에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와 김대중을 비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박정희에 대한 모독이다. 박정희가 김대중처럼 모략전을 쓰고, 속이고, 사기치고, 부자 되고, 부인-아들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정현준-진승현-윤태식-이용호 게이트 등을 주도하면서 돈 빨아먹기에  혈안돼 본 적이 있었던가?

대한민국 국민 70% 이상이 이승만-박정희를 존경하는 반면 김대중을 멸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호남사람들만 빼면 거의 100%가 이승만-박정희를 존경하고 김대중을 멸시-증오하는 셈이다.

타 지역 국민들이라면 “김대중 컨벤션센터”가 자기지역에 지어지는 것을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봉이 김선달보다 더 황당한 금강산 사업을 벌여 놓고 1년에 1억 5천만 달러를 자동현금인출기처럼 돈을 뽑아 북에 보내주고,

몰래 5억 달러 이상을 주고,

2조 규모의 쌀과 비료를 주고,

남한에 있는 결핵백신 전량을 공무원 입단속 시키면서 걷어다가 북에 주고,

화장실 한번 가는데 4달러씩 주도록 만든 김대중,

그런 김대중을 아직도 슨상님으로 모시는 호남인들, 술좌석에서도 김대중을 욕하면 싸우려 덤비는 호남인들에 대해, 타 지역 국민들이 무슨 감정을 가질 것인지 호남인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호남인들이 얼마나 더 지금의 억지 세도를 누릴 수 있을 것인지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모른다 해도, 빨갱이인줄 뻔히 알면서 그를 감싸는 호남인들의 행동은 분명 이질적이요 이방인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이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선거의 지역구도를 허물자며 연정을 부르짖는다. 이는 헛 소리다.

김대중 이전의 지역감정은 영-호남간의 감정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이후의 지역감정은 호남-비호남간의 감정으로 악화됐다. 지역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파고 있는 것은 95.2%의 노무현 지지율을 보일만큼 똘똘 뭉쳐 벌이는 호남인들의 이런 이질적인 행동, 어딜 가도 "티를 내는"  특이한 행동이지, 타지역 사람들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는 호남인들이 알아야 하는 주제이며, 호남 지역의 지도적 인사들이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전라공화국으로 독립하지 않고, 대한민국에서 70%의 비호남인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면!

호화로운 '김대중 컨벤션센타'를 볼 때마다 비 호남인들은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이승만 동상 끌어 내리고, 박정희 동상 끌어내리고, 맥아더 동상까지 끌어내리려 하면서, 온 국민을 향해 보란 듯이 광주에 초 호화판 초맘모스 '김대중센타"가 세워지다니 이 무슨 위세란 말인가! 대한민국이 전라공화국의 속국이라도 됐다는 말인가?  어느 날 그 건물은 호남인 전체에게 치욕의 모뉴멘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치욕의 김대중 컨벤션센타"


마지막으로 호남 지도층에 부탁한다.

"부동산에 투기하는 돈이 북으로 가서 북도 살고 우리도 살았으면 한다 -2005.9.6. 김대중-”

이 김대중의 말을 '김대중 컨벤션센타'에 크게 새겨줄 것을!

 

                           천황폐하, 인사받으십시오. 와다시와 도요타상데스

                                        친일파의 거두 김대중!

                          김대중을 말하지 않고서는 친일파를 말 할 수 없다.



히로히또 일왕은 한국을 침략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실제의 전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