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낙서장(잡)

박근혜 요약 / 최진실을 보며 박근혜를 생각한다

이름없는풀뿌리 2015. 10. 2. 09:22

 

원문출처 : [박근혜 대통령 당선] 한때 "외국 가서 살지 그래?" 그 말에 박근혜는… 33년 만에 대통령 돼 청와대로 귀환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2/20/2012122000219.html
입력 : 2012.12.20 03:02 | 수정 : 2012.12.20 04:44  

[박근혜가 걸어온 길]
中2때 청와대 들어가 전차통학, 어머니 저격당해 숨진 뒤 22세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
10·26 뒤 신당동 집에 돌아와 아버지 10주기 맞춰 기념사업
2년 3개월간 당대표 지내며 사실상 모든 선거 승리 이끌어, 유세 중 면도칼 테러 당하기도
올해 박前대통령 추모 행사서 "이제 아버지 놓아드렸으면…"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은 내년 2월 청와대에 돌아간다. 33년 3개월 만이다. 신분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으로 바뀌게 된다.

◇학창 시절

그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대령 박정희육영수의 첫딸로 태어났다. 1961년 5·16 때 서울 장충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그는 다음 해 아버지가 제5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서울 신당동 외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사진 왼쪽)중학교 2학년 때 산정호수로 소풍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하얀 점선으로 표시된 여학생이 박 당선인. (사진 오른쪽)고교 시절인 1960년대 말 야외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박 당선인.“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기타 치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는데,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 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2007년 실패 후 재도전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패했다. "저 박근혜,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고 했다. 이명박 후보는 그를 '국정의 동반자'라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됐다. '박근혜 총리 카드'를 둘러싸고 혼선을 빚더니, 2008년 4월 총선 때 김무성 의원 등 친박(親朴)계 인사가 대거 공천 탈락하자 그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은 무소속 또는 '친박연대'로 출마해 상당수 국회로 재입성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2009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반대 연설까지 하며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0년 8월 만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그는 2011년 가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후 흔들리자 2011년 12월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 개혁을 주도했다. 4·11 총선에서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했고,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득표율 84%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는 이어 과거사 문제로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9월 24일 기자회견에서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10월 22일에는 정수장학회의 명칭 변경과 이사진 사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33주기 추모 행사에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 이제 (사람들이)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중도 사퇴한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 심상정 진보정의당 의원의 지원과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사퇴를 발판으로 막판까지 추격했지만, 박 당선인은 국민 대통합과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내세우며 승리했다.

 원문출처 : [박근혜 당선] 박근혜 청와대 나올때, 트렁크 6개가 짐 전부 - Chosunbiz - 프리미엄 경제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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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은 1979년 11월 28살 당시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를 나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33년이 지난 2012년 12월 19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다시 청와대의 주인자리를 예약했다. 대통령의 큰 딸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20대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으나 부모를 잃었던 집으로 대통령의 신분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것이다.


 

1969년 1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의 세 자녀 근혜(현 한나라당 대표), 근영(현재 이름은 서영), 지만씨(오른쪽부터) 남매가 눈이 쌓인 청와대 뒤뜰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놀면서 사진을 찍었다.<조선DB>

◆ 냉정하고 위엄이 엿보인 아이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박정희와 부인 육영수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박근혜 가족은 서울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의 셋집을 옮겨다니다 1958년 신당동에 있는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했다. 박 당선인은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1학년 생활기록부를 보면 ‘온순하고 침착하나 차근차근하며 실수가 별로 없음. 남에게 호감을 받으나 특정한 아동들과만 노는 습관이 있음’이라고 적혀있다. 또 4학년때는 ‘약간 냉정한 감이 흐르는 편이며 굳게 다물어진 입가에는 위엄이 엿보임’이라고 평가됐다.

박 당선인이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1년 아버지인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박 당선인과 동생 근령(박서영으로 개명)은 신당동 집에 따로 살았다.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자동차로 통학하면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염려했던 어머니 육영수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1학년 때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지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2학년부터는 청와대에서 전차로 통학했다. 그는 1학년 2학기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반장을 맡았고 줄곧 반에서 1등을 했다. 당시 검사한 지능지수는 127이다. 박 당선인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대통령의 딸이 전차를 타고 통학한다는 소문이 돌자 전차 차장이 성신여중 배지를 단 박근혜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라고 묻자 “글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성심여중에 이어 성심여고에 진학한 박 당선인은 줄곧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1970년 박 당선인은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 육영수는 역사학과를 희망했지만 본인이 ‘산업 역군이 되고 싶다’며 전자공학과에 지원했다고 한다. 박 당선인은 올해 초 출연한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서 "대학교 때 본받고 싶은,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서강대에 재학중이던 1972년 박 전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추진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반 정부 시위가 한창이었다. 그 와중에 데모하다 퇴교당한 과 친구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들은 박 당선인은 어머니에게 부탁해 취직하고 복교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대학 4년 성적은 4점 만점에 3.82로 수석을 차지했다. 


자서전에 담긴 박 후보의 예전모습. "한 나라의 외교력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맺은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조선DB>

◆ 20대 퍼스트레이디와 은둔생활

대학 졸업 후 박 당선인은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 6개월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어머니 육영수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중앙극장 단상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서거했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22세의 박근혜는 어머니를 대신해 5년동안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맡아 공식 행사에 참석하고 외국사절을 영접했다. 당시 박 당선인의 일기에는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고 적혀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그는 아침식사 때 중앙정보부의 일일 특별보고를 아버지와 함께 읽으며 현안에 대해 아버지와 토론했다. 박 당선인은 당시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3분쯤 박 당선인은 전화 한통을 받는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 만찬석상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저격으로 서거했다. 9일간의 국상을 치룬 그는 1979년11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당시 짐은 트렁크 6개가 전부였다.

이때부터 박 당선인의 은둔과 인고의 세월이 시작된다. 박 당선인은 1981년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다. 마음을 잡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한 학기만에 그만둔다. 그는 5공화국 시절 영남대재단 이사(1980~1988년)와 육영재단 이사장(1982~1990년)을 맡았지만 사실상 은둔의 시기를 보냈다. 당시 5공화국은 박정희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을 펼쳤고 그는 아버지와 가까웠던 인사들이 등을 돌리는 모습을 봐야 했다.

은둔의 시절을 보내던 박 당선인은 5공이 끝나자 19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1989년엔 박정희 1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치르기도 했다. 그해 박 당선인은 일기에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라고 썼다. 그러나 1990년부터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어린이 회관 고문인 최태민 목사가 각종 전횡을 일삼는다”며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내놓으라고 하자 이사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줬다.

40대로 접어들면서 박 당선인은 정치권으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조용히 사는 것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1997년 대선 때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지원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 박근혜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2004년 3월 25일 공동선대위원장에 내정된 박세일 교수의 입당환영식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조선DB>

◆ 보수정당 최고의 소방수

1998년 4월 재보선 때 대구 달성에서 당선된 박 당선인은 15년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구원투수로 나서며 최고의 ‘소방수’ 역할을 했다.

2004년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 대표가 돼 총선을 지휘한다. 당시 한나라당은 ‘차떼기’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50석도 힘들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표가 되자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는 등 승부수를 던지며 121석을 얻어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는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당시 의사는 “1cm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지만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은 그의 첫 말은 “대전은요?”였다. 그는 2006년 6월까지 한나라당 대표로 있으면서 모든 선거에 승리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기간 동안 당시 여당은 8명의 대표를 갈아치워야 했다.

그러나 2007년 대선 도전에서는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밀리며 고배를 마셨다. 당시 박 당선인은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5년 후를 약속하게 된다. 이 때부터 5년 넘게 일명 박근혜 대세론을 끌어왔다. 대통령이 된 이명박 후보는 박 당선자를 "국정의 동반자로 대우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당 운영은 친이계가 독점했고 결국 5년내내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했다.

이 대통령과 박 당선인의 갈등은 세종시 수정안 논란에서 폭발했다. 그는 정치 시작 후 처음으로 국회에서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반대 연설까지 하며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켰다. 이 때부터 박 당선자 앞에 신뢰와 약속이라는 키워드가 붙기 시작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제18대 대통령선거 이틀을 앞둔 17일 오후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거리 유세에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전기병기자

2011년 12월 박 당선인은 다시 한번 소방수로 올라선다. 그해 10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14년 3개월동안 유지하던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지난 4월 총선에서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면서 다시 한번 선거의 여왕임을 입증했다. 지난 8월 주요 정당 최초로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된 박근혜는 2012년 12월 19일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동북아 정세 급변과 세계 경제 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여성 최초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게 됐다.

 

 

최진실을 보며 박근혜를 생각한다

2008년 10월 07일 (화) 14:51:30 이진우 정치 칼럼니스트

 

 

최진실씨의 죽음에 대해 국민적 동정과 관심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인한 학업포기, 소녀가장으로서의 처절한 삶, 조성민과의 불화 및 이혼, 육아 스트레스 및 우울증, 끊이지 않는 루머와 악플... 이 모든 것들이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서 감당하기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살'이라는 그녀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모성애'를 생각할 때에 그녀의 결정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이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는 결코 찬동할 수 없습니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주장대로 악플러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갔다면 대한민국 연예인의 절반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부분은 한결같이 그녀의 어두운 부분 뿐이지만, 밝은 면을 들여다보자면 그녀는 많은 것을 가진 '행복한 여자'인 것도 사실입니다. 국민 여동생, CF퀸, 저축여왕, 똑순이, 국민아줌마, 만인의 연인 등 그녀를 수식하는 표현은 지난 20년 동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그만큼 오랜기간 동안 정상급 연예인으로 자리매김해왔으며, 영화면 영화, 드라마면 드라마, CF면 CF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흥행 보증수표'로 통해왔고, 이로 인해 많은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녀에게는 다정다감한 어머니가 계시고, 알토란 같은 남매가 있으며, 가족보다 더 큰 힘이 되는 친구(정선희, 이영자, 최화정, 홍진경 등)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안위와 성공을 진심으로 걱정해줄 수많은 열성 팬들을 갖고 있습니다. 정말로 최진실씨가 악플러와 루머 때문에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녀보다 못한 처지에서 더 많은 악플과 루머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에 최진실씨 죽음의 중대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번 최진실씨의 죽음을 보면서 저는 박근혜의 아픔과 시련에 대해 재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암살범의 저격에 의해 잃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수년간 권력의 칼끝을 피해 은둔과 인고의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박정희 일가를 이용하려는 세력들의 농간에 의해 친동생인 박근영과 육영재단 운영을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상황까지 초래되어 결국은 모든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플과 루머로 말하자면 박근혜를 능가할 여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퍼스트레이디 당시 20대의 나이였음에도 70세가 넘은 목사와의 염문설, 유산설, 낙태설, 출산설, 혼외자식 등 여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수많은 루머가 난무했습니다. 심지어는 대통령후보 경선 검증위원회에서도 이와같은 루머들이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사채설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아프고 힘들었겠습니까?

여기에 덧붙여 지난 수년간을 되돌아보면 그녀는 자신이 붕대투혼을 발휘하며 살려놓은 한나라당으로부터 버림받는 최대의 시련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주대낮에 살인테러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그녀는 부모도 없이, 친구도 없이 묵묵히 혼자서 견뎌냈습니다. 최진실씨가 '절대 고독'에 대해 언급했는데 과연 박근혜 만큼 '절대 고독'을 실감한 사람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좌절하고 포기하기 보다는 시련을 발판으로 더욱 강해지고 믿음직스러워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 때문에 김대중-노무현-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정치 암흑기 속에서도 국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박근혜의 선택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박근혜가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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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⑤"근혜언니도 수석졸업, 외국행 허락받아"

▶ ⑥"지만이 장교일때 언니가 콩나물국 끓여줘"

▶ ⑦박근령 남편 "前대통령 딸이 한푼도 없다면 믿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