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노무현 유서전문/각종조사 등

이름없는풀뿌리 2015. 10. 2. 10:13

 

노무현 유서 전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사는 것이 힘들고 감옥같다
나름대로 국정을 위해 열정을 다했는데 국정이 잘못됐다고 비판 받아 정말 괴로웠다
 지금 나를 마치 국정을 잘못 운영한 것처럼 비판하고 지인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부정부패를 한것처럼 비쳐지고,
가족 동료, 지인들까지 감옥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게 하고 있어 외롭고 답답하다
아들 딸과 지지자들에게도 정말 미안하다
퇴임후 농촌 마을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아 참으로 유감이다
돈 문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이 부분은 깨끗했다
나름대로 깨끗한 대통령이라고 자부 했는데 나에 대한 평가는 멋 훗날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이게 진짜 유서내용이랍니다.
http://news.cyworld.com/view/20090523n05672
언론은 하나같이 돈문제에 관해서는 빼고 말하고 있다

 


아고라에서 퍼온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2320314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언론에 호소합니다. 저의 집 안뜰을 돌려주세요.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부탁합니다. 그것은 제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의 권리입니다.

저의 집은 감옥입니다. 집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집에는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카메라와 기자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친척들도, 친구들도 아무도 올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방송에 대문짝만하게 나올 사진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상한 해설도 함께 붙겠지요.

오래 되었습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이런 상황을 불평할 처지는 아닙니다. 저의 불찰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생활은 또한 소중한 것입니다.

창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자유, 마당을 걸을 수 있는 자유, 이런 정도의 자유는 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지금 이만한 자유가 보장이 되지 않습니다.

카메라가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는 집 뒤쪽 화단에 나갔다가 사진에 찍혔습니다. 잠시 나갔다가 찍힌 것입니다.

24시간 들여다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제는 비가 오는데 아내가 우산을 쓰고 마당에 나갔다고 또 찍혔습니다. 비오는 날도 지키고 있는 모양입니다.

방 안에 있는 모습이 나온 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커튼을 내려놓고 살고 있습니다.

먼 산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보고 싶은 사자바위 위에서 카메라가 지키고 있으니 그 산봉우리를 바라볼 수조차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 너무 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언론에
부탁합니다.

제가 방안에서 비서들과 대화하는 모습, 안 뜰에서 나무를 보고 있는 모습, 마당을 서성거리는 모습, 이 모든 것이 다 국민의 알권리에 속하는 것일까요?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간곡히 호소합니다. 저의 안마당을 돌려주세요. 안마당에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자유, 걸으면서 먼 산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자유, 최소한의 사생활이라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조회수 : 264413
등록일 : 2009.04.22 17:23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했습니다.

설마 하던 기대가 무너진 다음에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용서 바랍니다.’ 이렇게 사과드리려고 했습니만, 적당한 계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형님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변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이미 밝혀진 사실 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의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정치를 떠난 몸이지만, 제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 지금까지 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계신 분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생각한 것은 피의자로서의 권리였습니다. 도덕적 파산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피의자의 권리는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라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가는 검찰과 언론의 추측과 단정에 반박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 상문 비서관이 ‘공금 횡령’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마당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면목도 없습니다. 그는 저의 오랜 친구입니다. 저는 그 인연보다 그의 자세와 역량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위해 한 일입니다. 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를 더욱 초라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욱 노엽게만 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 마당에 이상 더 사건에 관한 글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에게도 동의를 구합니다. 이 마당에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합시다. 제가 이미 인정한 사실 만으로도 저는 도덕적 명분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도덕적 명예가 아니라 피의자의 권리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것도 공감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저를 정치적 상징이나 구심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건 아니라도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방향전환을 모색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동안에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상 더 이대로 갈 수는 없는 사정이 되었습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적어도 한 발 물러서서 새로운 관점으로 저를 평가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이 홈페이지 관리자에게 이 사이트를 정리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관리자는 이 사이트는 개인 홈페이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회원 여러분과 협의를 하자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올립니다.

이제 ‘사람 세상’은 문을 닫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변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 표현

 

[스포츠서울닷컴ㅣ장 민기자] 지난해 7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보낸 유일무이한 서신이 화제다. 당시 청와대 기록물 유출과 관련 노 전 대통령측과 청와대 간의 공방이 벌어진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보냈던 이 서신은 노 전 대통령의 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6대 대통령' 명의의 이 서신은 기록물 유출을 둘러싼 경찰 수사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변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남 탓하지 않는 올곧은 성정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전화조차 안 받은 대통령" 질책

노 전 대통령은 특히 "(이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은 내가 잘 모시겠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만큼, 지금의 궁색한 내 처지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며 "내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며 이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국가기록 유출건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답신이 없었고 급기야 다시 전화를 했지만 통화조차 하지 못한 일을 공개하면서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며 기록물 반환의 뜻을 밝혔다.

국가기록물유출 수사는 노 전 대통령 귀향 4개월 후 중앙일보의 첫 보도로 촉발된 이후 검찰의 온세통신 등 서버 관련 업체에 대한 압수수색까지 벌이는 초강도 조사를 거쳐 노 전 대통령측이 결국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반환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당시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 조사하기도 했었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이명박 대통령님,
기록 사본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사리를 가지고 다투어 보고 싶었습니다.
법리를 가지고 다투어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람권을 보장 받기 위하여 협상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티었습니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내가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내가 잘 모시겠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만큼, 지금의 궁색한 내 처지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가다듬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가지러 오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기록관장과 상의할 일이나 그 사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국가기록원장은 스스로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 것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해 놓은 말도 뒤집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상의 드리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기록을 보고 싶을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천리길을 달려 국가기록원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 맞는 열람의 방법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직 대통령 문화에 맞는 방법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적절한 서비스가 될 때까지 기록 사본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맞습니까?

지금 대통령 기록관에는 서비스 준비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언제 쯤 서비스가 될 것인지 한 번 확인해 보셨습니까?

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나의 국정 기록을 내가 보는 것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 것입니까?

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 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상소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에 달려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는 글들은 읽고 계신지요?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섭니다.

하느님께서 큰 지혜를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7월 16일
16대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 전 대통령님께 드리는 편지

노무현 전 대통령님!

뒤늦게나마 가져가신 서류를 돌려주시기로 결심하신 것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궁색하게 토를 다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

한 국가를 운영했던 큰 지도자께서 재임 때 기록이 뭐가 그리 아쉽습니까?

혹시나 재임시절 기록 중에 부담스러운 내용이 있는 건 아닌지요, 아니면 그 기록이 쫓기듯 퇴임한 노전대통령님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발판이나 된단 말입니까?

그래서 법을 위반해가며 슬쩍하셨나요?

전직 대통령 예우, 네 해드려야지요.

그렇다고 국가기록을 슬쩍하신 범법행위까지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장물을 돌려달라고 하는 행위를 정치적 게임으로 몰아붙이는 것도 참 궁색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당한 법집행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지금 경제위기 맞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장물문제로 국력을 낭비케 하지 마시고 경제위기 극복에 전임대통령으로서 힘을 보태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무더위에 항상 건강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2008.7. 16 한나라당 대변인 차 명 진 

 

 
 
한명숙 전 총리 조사 전문
 

1.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2.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3.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4.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5.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6.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권 여사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아시아경제 | 김보경 | 입력 2009.05.29 10:36 

 
 
권양숙 여사가 2002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남편을 응원했던 편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먼 길을 떠난 29일 그의 홈페이지에 실렸다. 다음은 편지 전문이다.

건호 아버지!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써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이 나이에 당신한테 편지를 쓴다는 게 쑥스럽지만
마주보고 하지 못하는 말을 글로 대신합니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고 집을 나서는
당신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쳐다보았습니다.
그동안 당신과 제게 많은 시련과 역경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씩씩하던 그 걸음걸이는 여전하더군요

여보 힘드시죠?

항상 강한 줄만 알았던 당신이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금쪽 같은 희망돼지 저금통을 받고는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 날 당신 곁에 서 있는 동안
정치를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사랑하고 희망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힘들어도 그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대통령을 안 하겠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말하던 당신
무뚝뚝하기만 하던 당신의 속 깊은 사랑에
저는 말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30년 당신 곁을 지켜 온 바위같이
앞으로도 당신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여보, 끝가지 힘내세요.

-당신의 아내 권양숙-

2002.11.19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故 노무현 대통령 영전에 바침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무거운 권위주의 의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끝도 없는 지역주의 고압선 철탑에서
처절하게 버티다가 눈물이 되어

뛰어내렸어요, 당신은 편 가르고 삿대질하는 냉전주의 창끝에서
깃발로 펄럭이다가 찢겨진, 그리하여 끝내 허공으로 남은 사람

고마워요, 노무현
우리가 아무런 호칭 없이 노무현이라고 불러도
우리가 바보라고 불러도 기꺼이 바보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아, 그러다가 거꾸로 달리는 미친 민주주의 기관차에서
당신은 뛰어내렸어요, 뛰어내려 당신은 으깨진 꽃잎이 되었어요
꽃잎을 두 손으로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팔뚝으로 받쳐주지 못해 미안해요
꽃잎을 두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저 하이에나들이 밤낮으로 물어뜯은 게
한 장의 꽃잎이었다니요!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을래요  
억울해도 억울하다고 땅을 치지 않을래요  
복받쳐도 복받친다고 소리쳐 울지 않을래요
아아, 부디 편히 가시라는 말, 지금은 하지 않을래요
당신한테 고맙고 미안해서 이 나라 오월의 초록은 저리 푸르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잖아요
아무도 당신을 때리지 않잖아요
당신이 이겼어요, 당신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었어요
살아남은 우리는 당신한테 졌어요, 애초부터 이길 수 없었어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요, 당신
부서진 뼈를 맞추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흐트러진 대열을 가다듬고 일어나요
끊어진 핏줄을 한 가닥씩 이어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꾹꾹 눌러둔 분노를 붙잡고 일어나요
피멍든 살을 쓰다듬으며 당신이 일어나야
우리가 슬픔을 내던지고 두둥실 일어나요
당신이 일어나야 산하가 꿈틀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동해가 출렁거려요
당신이 일어나야 한반도가 일어나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아아, 노무현 당신!

안도현
 
 
 

김제동 '감동 어록', 네티즌 '읽고 또 읽고'

머니투데이 | 김수진 기자 | 입력 2009.05.29 21:00 [머니투데이 김수진기자]

"운명이라고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작은 비석만 남기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큰 비석 잊지 않고 세우겠다."

29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제 사전 추모행사에 사회를 본 방송인 김제동 어록이 수많은 네티즌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김제동은 이날 추모행사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를 되새기며 울먹이며 고인의 명목을 빌었다.

 

김제동은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유서 한 줄 한 줄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담아 고백했다. 김제동의 이 말들은 그가 방송생활을 하면서 탄생된 어록과 마찬가지로, 네티즌 사이에서 '읽고 또 읽고' 식으로 회자되고 있다.

김제동은 이날 "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하셨지만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크다 "며 "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하셨지만 우리가 기꺼이 나눠드려야겠다 "고 말했다.
이어 "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좀 슬퍼해야겠다 "며 "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심장이 뛸 때마다 잊지 않겠다 "고 말했다.
그는 또 " 미안해하지 말랐는데 좀 미안해하겠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며 " 누구도 원망하지 말랬는데 스스로를 원망하겠다 "고 전했다.
또 " 운명이라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작은 비석만 남기라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큰 비석 잊지 않고 세우겠다 "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김제동은 " 마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그 분을, 우리 가슴 속에 한 줌의 재가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있는 열정으로 대하겠다 "고 말했다.
한편 김제동의 사회를 진행된 이날 추모 공연에서는 윤도현, 양희은, 안치환 등이 참석해 현장에 모인 20만 명에 이르는 추모객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을 애도했다.
 
 

김병준 "노 전 대통령, 서거 전날 뒷뜰 풀 다 뽑아…

'우공이산' 액자도 치우라 지시"

  • 입력 : 2009.06.01 11:39 / 수정 : 2009.06.01 14:51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1일 “노 전 대통령이 본인이 지키고 싶은 소중한 가치들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을 던졌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노 전 대통령은 그냥 한 사람의 자연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혁과 통합, 남북평화, 수도권과 지역의 균형발전, 노와 사의 상생, 남녀 성별간의 상생 등 우리 사회에서 아주 소중히 여길만한 가치의 상징이었다”며 “그러나 본인도 모르게 가족들에 의해 이뤄진 사실이 드러나 본인의 상징이 훼손되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나름대로 그런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여러 집단들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부분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지난 4월 30일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직후 마지막으로 봤다고 소개한 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아차하는 기분이 드는데 (노 전대통령이) 말씀이 많이 줄었고, 무거운 기분이었다”며 “특히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구속된 후 그런 기분이 강했던 것 같다. 뇌종양을 앓고 계신 분이 구속이 돼 옥고를 치르고 있는 것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겠구나 이런 강한 분위기가 났냐’는 질문에는 “솔직히 그렇지는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보면 ‘아, 그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을 하셨구나’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날 (봉하마을 사저) 뒷뜰에 있는 풀을 다 뽑으셨다고 하고, 집에 있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액자를 보고 며칠전에 ‘저걸 떼라’고 얘기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개설한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에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뜻을 이룬다는 뜻의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성어와 자신의 성인 ‘노’를 합쳐 ‘노공이산’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해 왔다.

    김 전 실장은 또 “노 전 대통령이 재판과정에서 일어날 일을 많이 걱정했다”면서 “무슨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거나 본인이 부정했던것이 다시 증명되는 식의 고민이 아니라 본인이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들이 훼손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들에게 짐이 되고 하는 것이 재판 과정에서도 계속 될 것이라는 고민”이라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사실 검찰의 수사 과정이나 또 수사가 보도되는 과정에서 보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듯 했다”며 “한 편에서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예우를 갖춰주겠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무슨 시계를 받았다, 논두렁에 버렸다’고 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조롱이고 희롱”이라고 했다.

    김 전 실장은 향후 친노 진영의 활동에 대해서는 “결국은 평화와 상생의 철학, 민주주의의 완성, 이런 부분을 위해서 더욱더 열심히 일하는 도리 밖에 없지 않느냐”면서 “국민통합, 특히 지역감정 해소와 지역주의 타파에 우리가 좀 더 신경을 쓰고 유지를 받들어서 더 매진해야 될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친노 진영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서는 “함께 움직이는 것은 그저 노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서 기념 재단을 만든다든가 이런 정도 일 것”이라며 “집합적으로 정치세력이 된다는 것은 의미도 없고, 나는 오히려 ‘그런 일이 있을 까’하는 회의론이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친노진영이) 꼭 하나의 정치집단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정치권이 아니라도 언론이나 학계 등 각계에서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서 유지를 받들어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펌글] 노무현이 이런 사람이 였다는거 님들 아셨습니까?
 
고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청년
하지만, 이 청년은 본인의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사법고시에 합격 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라는 최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한 청년은 변호사가 되어 군부독재의 악랄한 학생탄압이었던
'부림사건'을 통하여 '인권변호사'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에 찌든 세상은 그의 청렴함에 돌팔매를 던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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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거들어 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혐의로 그는 구속됩니다

세상은 이토록 그에게 참기 힘든 굴욕과 고통을 주었지만
그는 그 어떤 강압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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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마이크 들고 있는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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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5월 부산 칠성시장 앞-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중>


그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지역 경찰서장은 노무현에게 혀를 내둘렀습니다
'최루탄이 터져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경찰들과 혼자서 대치하던 독종 노무현'

노무현의 힘은 이런 우직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바보같은 우직함 바보같은 미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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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람들은 노무현을 기억합니다
최루탄 파편이 튀어 피를 흘리면서도 당당해 하던 그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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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코 그른 것을 옳다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언제나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뜻 있는 사람들이 그를 외롭지 않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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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우리는 국민후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해장국 한 그릇 못 얻어 먹었지만
정성들여 자기 자식의 과자값을, 내일 아침 반찬값을, 어머니의 수술비를
'희망돼지' 라는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서 전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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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온갖 부정과 부패로 그를 막아서던 세력들과 당당하게 싸워 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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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정부패에 길들여진 세력들은 그를 ?아내기 위해 온간 수단 방법을 안가리고 흔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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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선거유세때 '국민에게만 빚진 대통령'이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국민에게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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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를 그리워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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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우리들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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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반세기동안 걸어서 넘지 못했던 그곳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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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한 핏줄임을 확인했고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확인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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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란 기간동안 그는 세계속의 대한민국 위상을 드높였으며
가장 평화로운 체제를 유지하여 외국인들이 투자를 하게 만듬으로
경제적으로도 부흥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5년이란 기간동안 맘에 안들때도 있었습니다
5년이란 기간동안 실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5천만명 모두에게 항상 충족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를 믿었고 우리는 그를 옹호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간다고 아주 가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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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맏기고 떠난답니다

언론은 이미 예전부터 '명비어천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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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당신께서 내려가 살게 될 조그만 시골집마저 아방궁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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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잡고 싶습니다
당신을 잡아 두고 '한번 더!!!' 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국민의 이름으로 당신께 휴식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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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고향에서 그리운 흙냄새 맡으시며 푸성귀 기르는 재미를 느끼셔도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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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동안 감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어느 누구도 반대세력에 그렇게 초연하게 견뎌내지 못했을텐데
당신이어서 가능 했을겁니다
당신이어서 참았을겁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그리고 사랑합니다

 

 

 

 

유시민 "내겐 영원한 대통령…그를 가슴에 묻는다"…자필 애도 편지

  •  입력 : 2009.05.25 14:59 / 수정 : 2009.05.25 15:27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편지를 썼다. 유 전 장관은 이날 서울역 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과 함께 상주로서 추모객들을 맞이했다. 유 전 장관은 오후 1시55분 자신의 팬사이트인 ‘시민광장’에 ‘서울역 분향소에서’라는 제목의 자필 편지를 올렸다.

유 전 장관은 편지에서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품었던 사람, 모두가 이로움을 좇을 때 홀로 의로움을 따랐던 사람, 시대가 짐지운 운명을 거절하지 않고, 자기 자신 밖에는 가진 것이 없이도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던 사람”이라며 “그가 떠났다”고 했다. 그는 “스무길 아래 바위덩이 온몸으로 때려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껴안고, 한 아내의 남편, 딸·아들의 아버지, 아이들의 할아버지, 나라의 대통령, 그 모두의 존엄을 지켜낸 남자”라며 “그를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유 전 장관은 “내게는 영원히 대통령일 세상에 단 하나였던 사람, 그 사람, 노무현”이라고 글을 맺었다. 앞서 유 전 장관은 지난 23일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회관 입구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노무현 정부 당시 각료들과 문상을 하면서 술잔이나 국화꽃을 올렸던 다른 조문객들과는 달리 담배에 불을 붙여 노 전 대통령의 영전에 바쳐 눈길을 끌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라고 불릴 만큼 끈끈한 관계였던 유 전 장관의 이런 행동은 노 전 대통령이 투신, 서거하기 직전 경호원과 나눈 마지막 대화 때문인 것으로 풀이됐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3일 오전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지기 직전 동행한 이병춘 경호과장에게 “담배가 있느냐”고 물었으나 이 과장이 “없습니다. 가져올까요”고 하자 “됐다”고 답하고는 잠시 뒤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추모행렬에서는 ‘담배 조문’이 잇따랐다.

 

김동길, “노무현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

  •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자살하거나 감옥에 가라”는 글을 써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네티즌들의 비난에 시달렸던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 명예교수는 2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지금은 할 말이 없습니다’ 글에서 “노무현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이라며 “이 비극의 책임은 노 씨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김동길 명예교수는 “‘검찰이 노무현을 잡았다’고 이렇게 몰고 가고 싶은 자들이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이라며 “이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가 왜 이렇게도 야단법석입니까. 노무현 씨가 산에서 투신자살했기 때문입니까”라고 했다. 또 “내가 노 씨 자살의 방조자인 것처럼 죽이고 싶어하는 “노사모님들”의 거센 항의의 글이 쇄도하여 나의 홈페이지는 한참 다운이 되어 있었다고 들었다”며 “나는 글을 써서 매일 올리기만 하지 내 글에 대한 댓글이 천이건 만이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사법부의 수사 종결 방침에 대해서 김 명예교수는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된 검찰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는 속셈이냐”며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있는 것은 감정과 동정뿐입니까”라고 반문했다.

    김동길 명예교수는 테러를 우려해 “외출을 자제하라는 지인들의 부탁을 받았다”며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다가 폭도들의 손에 매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라며 “어떤 위기에 처해도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김동길 명예교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전문이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여·야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어떤 “은퇴” 정치인은 자신의 반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비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청와대도 슬픔에 잠겼다고 들었습니다. 가게를 지키고 앉았던 사람들도, 길을 가던 사람들도 모두 슬픔을 금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임금님이, 예컨대 고종황제께서 붕어하셨을 때에도, 그 시대에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백성이 이렇게까지 슬퍼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장군이 현직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생각이 부족한 어느 한 측근에 의해 피살되었을 때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궁정동의 그 때 그 참사는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이기는 했지만 오늘과 같은 광경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든 언론매체가 왜 이렇게도 야단법석입니까. 노무현 씨가 산에서 투신자살했기 때문입니까. 그러나 설마 국민에게 자살을 미화시키거나 권장하는 뜻은 아니겠지요. 내가 4월에 띠운 홈페이지 어느 칼럼에서 “노무현 씨는 감옥에 가거나 자살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하여 이 노인을 매도하며, 마치 내가 노 씨 자살의 방조자인 것처럼 죽이고 싶어 하는 “노사모님들”의 거센 항의의 글이 쇄도하여 나의 홈페이지는 한참 다운이 되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나는 내 글을 써서 매일 올리기만 하지 내 글에 대한 댓글이 천이건 만이건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하도 험하게들 나오니까 내 주변의 가까운 이들은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으니 혼자서는 절대 집을 나가지 말고, 밤에는 더욱이 외출 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에 내 대답은 한결 같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늙어서 반드시 요를 깔고 누워서 앓다가 죽어야 한다는 법이 있나. 테러 맞아 죽으면 영광이지.” 아직은 단 한 번도 테러를 맞은 일이 없지만 앞으로도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다가 폭도들의 손에 매 맞아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위기에 처해도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이가 몇인데요. 여든 둘입니다.

    사법부는 노 씨에 대한 모든 수사는 이것으로 종결한다고 하니 이건 또 어찌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어렵게 된 검찰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려는 속셈입니까. 이 나라에는 법은 없고, 있는 것은 감정과 동정뿐입니까. “검찰이 노무현을 잡았다.” - 이렇게 몰고 가고 싶은 자들이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 노무현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뿐입니다. 이 비극의 책임은 노 씨 자신에게 있습니다.

 

< 앵커 >

“5년뒤에도 웃겠다”던 꿈 끝내…파란만장 63년 스스로 마침표

한겨레 | 입력 2009.05.23 21:50 | 수정 2009.05.24 04:20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제주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대통령 당선 되기까지

인권변호사→청문회 스타로
'지역주의 타파' 대통령 당선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이단아.'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 전까지의 삶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만큼 극적인 한편의 드라마였다.

'까마귀도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간다'는 봉하마을, 그 마을에서도 가난했던 농군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년'으로 자랐다. 학비가 없어 중학교는 4년 만에야 졸업했으며, 장학금이 없었더라면 고등학교(부산상고) 진학은 엄두도 못냈을 정도였다. 고교 졸업 뒤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망회사 취업과 막노동으로 가난을 벗을 수는 없었다. 절망한 노 전 대통령은 71년 군에서 제대한 뒤 본격 사법시험에 도전한다.

스물 아홉살이 되던 해인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평탄한 삶을 사는 듯했다. 대전지법 판사를 거쳐 조세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안온한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81년 민주화운동 사건인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는 시국사건과 노동 관련 사건 등을 주로 맡는 인권변호사 '노변'으로 거듭났다. 이후 송기인 신부 등과 함께 '부산민주시민협회'를 만들면서 아예 재야 운동가로 변신한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엔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5년뒤에도 웃겠다"던 꿈 끝내…

 

 

1988년 정치 입문 뒤에도 쉽지 않은 길만 걸었다. '5공비리조사특위'의 청문회 때 일약 스타로 부상했지만, 견고한 지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힘겨운 싸움에 나선다. 그는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뒤엎는 야합이라는 이유를 들어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해 민자당행을 포기하고 야권에 남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 1996년 서울 종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잇따라 고배를 마셨다. 1998년 7월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는 16대 총선에서 부산 출마를 감행했다가 또다시 지역주의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과감한 지역주의 도전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명예로 보답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그만둔 뒤 힘겨운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그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는 2002년 3월 시작된 당내 경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의 대안으로 평가받아, 이인제 후보를 누르고 집권 여당의 후보직을 거머쥐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지지도 추락으로 당내에서 후보사퇴 압력에 내몰렸으나, 정몽준 국민통합 21 대표와의 후보 단일화로 이를 극복하고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희망돼지 저금통 운동 등으로 60억원 이상의 국민성금을 모으는 등 국민참여형 선거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노 전대통령 재임 5년

권위와 거리두고 기득권구조 맞서
보수세력 공세에 '탄핵안' 위기도


정치개혁을 내세우며 당선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 5년은 탈권력, 탈권위를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는데도 검찰·국가정보원 등 사정기관과 거리를 뒀다. 또 기득권세력과 일부 보수 언론과의 싸움도 멈추지 않았다. 국민과의 직접적인 소통과 대화는 그의 무기였다.

2003년 2월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데 대해 검찰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자,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고 이는 텔레비전 생중계로 가감없이 보도됐다. 그는 임기 내내 사정기관에 대한 권력의 통제의 끈을 끊었다. 국정원장으로부터의 독대 보고도 받지 않았다. 수시로 "검찰 수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주변에선 "권력 기반이 취약한 소수파 정권엔 무리한 시도"라는 반론이 있었으나, 그는 "시대적 요구"라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인사도 파격적이었다. 남해군수 출신인 김두관, 영화감독 이창동씨를 각각 행정자치부 장관·문화부 장관에 임명했다. 광주 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 출신인 정찬용씨를 청와대 인사수석에 발탁하는 등 엘리트 사회에서 소외됐던 지방과 운동권 출신의 참신한 개혁인사들을 대거 핵심 요직에 기용했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비주류 대통령 흔들기'는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2004년 3월12일 한나라당 등 다수 야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기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5월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하기까지 63일 동안 직무정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는 탄핵이 발생한 이유에 대해 "우리 사회는 학벌사회, 연고사회"라며 "(나는) 일류학교 나온 사람들로 잘 짜인 우리 사회 각계의 판에 돛단배 하나 떠 있는 듯하다"고 비주류로서의 처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이 선출한 권력을 무시한 정치권의 오만은 역풍을 불러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탄핵바람을 타고 원내 152석을 차지해 명실공히 집권여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총선 두달 뒤 치러진 6·5재보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경남도지사와 전남도지사를 잃으며 패배했고, 2004년 10월엔 참여정부의 핵심 정책이었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렸다. 2005년 6·13 재보궐선거에서 6석을 잃으며 원내 과반수가 붕괴됐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는 그의 지지층이었던 진보 진영을 양분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보수-진보 모두로부터 고립된 섬으로 입지가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고, 2006년 5·31 지방선거 참패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결정타가 됐다.

대북송금 특검 등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이어받았다. 2007년 노 전 대통령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서해평화지대 설치 및 한반도 종전 선언 추진 등을 약속한 10·4정상선언을 채택했다.

정치를 바꾸려는 노 전 대통령의 노력과 투쟁은 계속됐으나, 동력을 이미 잃은 상태여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2006년 7월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2007년엔 대통령 연임제 개헌을 제안했지만 정치권과 국민의 반응은 냉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보수언론과 끈질긴 전쟁을 벌였다. '일제 36년도 견딘 우리는 참여정부에도 살아남아야 한다', '전체주의적 억압을 획책했다',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등의 독설을 펼치는 < 조선 > < 동아 > 에 맞서 노 전 대통령은 "불량식품만이 아니고 불량기사도 피해를 주게 된다"고 맞섰다. 청와대가 이들 언론의 취재를 거부하는 극렬한 대치도 빚어졌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정치학)은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실패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민주주의의 진전과 사회복지예산의 강화, 남북관계의 관리, 새로운 발전모델에 대한 고민에서 긍정적 기여도 부정하기 힘들다"며 "노무현 정부에 대한 보수언론들의 공격, 선전선동에 가까운 주장 등 보수의 공세와 불리한 정치적 환경에 노무현 정부가 정치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짚었다.

솔직하게, 또는 거칠게,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은 결국 추문에 맞선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를 극한의 선택으로 몰고간 것은 결국 견고한 주류의 성벽을 허물지 못한 후진적인 한국정치였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고향으로 돌아간 '서민대통령'

봉화마을서 퇴임뒤 새 전형 만들려해
인터넷 토론사이트 열어 소통 실험도


"대통령직을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떠냐. 야~ 기분 좋다." (2008년 2월25일, 봉하마을 귀향 첫 소감)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1년3개월여 봉하마을 생활은 그에게 또다른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62살의 '젊은' 전직 대통령이 된 그는 '생태 농촌 만들기'와 '시민 민주주의 발전'이란 새 화두를 안고 고향 마을에 돌아왔다. 그는 3만1873번째 진영읍민이 됐다. 퇴임 뒤 귀향한 첫 대통령이었다. '현직에서 좀 잘했으면 어떻고 못했으면 어떠냐'는 말엔 '새로운 전임 대통령의 전형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희망과 자신이 담겨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오리농법을 이용한 '친환경 봉하 오리쌀' 농사를 시작했다. 장군차를 심고, 마을 뒷산인 봉화산 나무 간벌에도 나섰다. 마을 앞 화포천의 습지 정화도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엔 8만1천㎡ 논에서 32t의 오리쌀을 거둬 들였다. 노 전 대통령은 "좁게는 제 고향, 넓게는 모든 농촌이 주말이면 손자, 손녀가 놀러올 수 있는 사람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내 밀집 모자와 점퍼 차림으로, 때때로 자전거를 타고 농촌마을을 도는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낯설지만 신선한 느낌'을 안겼다. 고즈넉했던 봉하마을엔 때 아니게 관광버스들이 몰렸다. 노 전 대통령은 따로 시간을 정해 관광객과 담너머 대화를 나눴다. 지난 달엔 방문객이 100만명을 넘겼다.

토론을 즐겼던 노 전 대통령은 인터넷에서 활발히 소통하려 했다. 지난해 9월엔 인터넷 토론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을 열었다. 우공이 산을 옮겼듯 끊질기게 '시민 민주주의'란 과제에 매달려보겠다는 듯, 그는 '노공이산'이란 필명으로 전직 대통령이란 권위와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속내를 쏟아냈다. "호남만의 단결로는 영원히 집권할 수 없다", "(촛불 시위의) 정권 퇴진 요구는 헌정질서에 어긋난다", "정치하지 마라, 쏟아야 하는 노력을 생각하면 권세와 명성은 실속이 없고 그나마 너무 짧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순탄치 않았다. 귀향 전부터 일부에선 그의 봉하마을 사저 규모를 두고 초호화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노방궁'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귀향 4달 만인 지난해 6~7월께엔 이명박 정부가 '노 전 대통령이 무단으로 국가 기록물을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갔다'고 주장해 신·구 권력이 감정싸움을 벌였다. 인터넷 글들은 '말로써 말 많았던' 그의 대통령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는 논란이 일었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켜 정치적 반목을 심화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은 지난해 12월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돼 실형을 받자 치명타를 입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즈음 관광객 인사도 중단하고 칩거하다시피 했다. 결국, 자신마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등과의 돈거래 의혹에 휩싸여 수사선상에 오르며 실험은 중단됐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구속 직후인 지난달 22일 "이제 저는 민주주의나 진보, 정의를 말할 자격을 잃었다. 더 이상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 없으며,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저를 여러분이 버리셔야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이 글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은 자신과 그런 자신이 추구하기엔 너무나 버거워져버린 '실험'을 향한 절규이자 종료선언이었던 셈이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길…왜 조문조차 못하게 하나"

사진설명: 2008년 2월 퇴임해 청와대를 떠나며 배웅나온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설명: 지난 4월30일 검찰에 출두하려고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떠나기에 앞서 "국민에게 죄송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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