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김대중의 정체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12년전 일본 월간지, 『政界』(Siekai), 1996년 2월호(pp.114-118)에 山崎 一이 쓴 김대중관련 기사, <김대중은 공산주의 활동가였다> 전문을 싣기로 했다. 이 기사는 김대중의 과거 좌익 행적과 한국전쟁 직후 총살형 위기에 처한 김대중의 목숨을 살려준 그의 절친한 친구 金鎭夏씨의 생생한 증언이 담겨있다. 이 기사가 한국 주요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지 않은 이유가 밝혀져야한다. 왜, 어떤 이유로 97년 대선때 한국 언론은 김대중의 좌익행적과 사상검증을 회피했나? 이제는 사회적 공기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한국 언론이 양심고백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이주천>
盧泰愚 全斗煥 전 대통령의 연이은 체포로 韓國政界는 風雲을 고하고 있다. 金永三 現 大通領은 바야흐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金” 金大中씨는 스스로 92年의 대통령 선거에서 前 大統領으로부터 秘蜜資金의 提供을 받았다고 是認하고 「金大統領도 選擧資金을 명백히 밝히라」고 金泳三씨와 對決姿勢를 분명히 했다. 이런 와중에 金大中씨의 “숨겨진 經歷”을 暴露하는 충격적인 뉴스가 미국으로부터 날아왔다.
◆ 銃殺寸前 金鎭夏와의 運命的인 만남
한국의 民主化 투쟁가로서 알려지고 또 야당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金大中씨는 19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金泳三씨에게 패한 후 정계 은퇴를 표명하고 많은 한국민으로부터 그 용기를 칭찬받고 국민의 박수속에 일단은 정계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金大中씨는 2년이 채 안되어서 국민과의 약속을 내팽개 치고 95년 여름 당돌하게 정계에 되돌아와 「新政治 國民會議」라는 新黨을 결성하고 스스로 總裁에 취임함으로써 이번에는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그 행위는 경멸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大中씨는 盧泰愚 전 대통령이 不正蓄財 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6억5천만 달러 中에서 250만 달라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新黨結成 후 정치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金大中씨가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국민을 우롱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판세력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金大中씨에게 정치적 致命傷이 될 새로운 사실이 폭로되었다.
金大中씨는 50년의 한국전쟁시에 共産黨員이었던 사실과 당시 체포되어 美海軍艦艇에서 銃殺刑 직전 美軍情報部에 있던 金大中씨와 同鄕의 친구의 助言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실이 46년 만에 미국에서 알려진 것이다.
한국전쟁은 50년 6월 25일(일요일) 아침 5시 북조선 人民軍이 38도선을 돌파하여 한국을 기습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同 人民軍은 침공 삼일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다. 한국군은 주말휴가중이어서 交戰體制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하는 人民軍에 밀려 후퇴하면서 체제를 정비하였다. 후퇴하는 중에 경찰과 국군은 후퇴지역에 있던 共産黨員과 親共 또는 동조세력이 同 地域에 남아 人民軍과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共産黨員들을 체포, 살해하였던 바, 그 수는 각지역을 하여 십수만명에 이른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서울에서의 전투가 치열함에 따라, 한국정부와 美軍은 서울을 버리고 大田地方 以南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6月 27日 全羅南道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에게도 부산으로의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목포를 본부로 하여 近隣海域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과 海兵隊는 부산으로 후퇴를 준비하던 중 본부의 지시에 따라 경찰이 체포한 목포지역의 共産黨 勢力 약 450명을 海軍艦艇에 태우고 있었다. 艦艇에 실린 共産黨員과 그 지지자들은 부산으로 가는 도중 남해안의 해상에서 총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위 체포자 속에 金大中씨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銃殺刑直前의 金大中씨를 발견하여 목숨을 살린 사람은 金大中씨의 보통학교 때부터 고향의 학우로 舊制 5年 과정의 상업학교까지 함께 공부하고 형제와 같이 지내던 金鎭夏라는 인물이었다. 이때 金大中씨는 金鎭夏씨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바다의 풀덩쿨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비밀이 한국동란 후 46년간이나 알려지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튀어나온 것은 건강을 해친 金鎭夏씨가 교회의 친한 목사에게 신앙고백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金鎭夏씨가 그 숨겨왔던 가슴속을 털어놓은 것은 미국 와싱턴 D.C에서 한국어로 발행되고 있는 주간지 「Washington Today」의 95년 8월 24일자 一面에 크게 보도되었다.
지금까지도 金大中씨의 政敵은 金大中씨가 청년시절에 共産黨 활동가였다고 공격은 해오지만 戰中戰後의 혼란기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지적할 수 없어 소문의 영역에 머물렀다. 한편, 金大中씨는 이것을 中傷이라고 否認하고 「戰爭詩 北朝鮮 人民軍에 체포되어 죽을 뻔했다고」 주장하고 역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메카시즘 수법이라고 반격해왔다.
하지만 金大中씨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총살 직전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냈다는 새로운 사실이 명백해지고, 현장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당시의 자세한 경위를 증언한 것이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이 증언 사실을 한국민이 알게 될 때, 어떠한 반응을 할 것인가 큰 관심거리이다.
◆ 지속적으로 國民을 우롱해온 金大中씨
「Washington Today」砥는 1페이지 반에 거쳐 “金大中은 행동하는 野心家인가? 행동하는 良心家인가?” 과거의 경력의혹을 꼭 밝혀라“ 라는 표제로 K씨의 증언고백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이 기사는 美國安保(ANSC) 韓半島安保硏究所의 所長인 金映勳 博士의 서명(署名)이 들어간 특별기사이지만 증언자를 K씨라고만 밝히고, 그 K씨는 와싱턴 근교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K씨는 金大中씨가 共産主義 활동을 한 까닭에 美海軍艦艇上에서 총살형의 위기에 있었음을 발견하고 美軍將校에게 자기의 친한 친구임을 보증하여 金大中씨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K씨는 金大中씨와 동향으로 보통학교와 목포상업학교의 동창이며 당시 K씨는 미군정보기기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후 쭉 2,3년 전까지 金大中씨와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K씨의 생생한 증언에 의하면,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에 부산으로 후퇴 명령이 내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후인 6월 27일 오전이었다. 그 때 共産主義者나 同調者 등 수백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美軍艦艇에 수용되었다. 그 중에 K씨는 金大中을 발견하고 자기가 갖고 있던 메달을 건네면서 “金大中의 이름을 호명하더라도 절대 대답을 하지마라 대답을 하게 되면 총살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후 美海軍 장교가 체포자 명부를 갖고 확인작업에 들어갔으나, 金大中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장교는 이름이 호명되지 않은 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지시하였으며, 金大中은 K씨로부터 받은 메달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왔다.
메달에는 美軍情報部所屬要員을 증명하는 K씨의 이름이 들어있었고, K씨는 그 장교에게 “이 사람은 나의 친구로 정보수집을 위해 메달을 건네주었다. 이 사람은 金大中이 아니다”라고 가짜로 신분보증을 했기 때문에 金大中은 총살을 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大中씨는 “내가 젊었을 때는 民族主義 運動에 참가한 일은 있으나 共産主義 運動에는 참가한 일이 없다. 경찰을 돕기 위하여 民間海上警備隊를 조직하여 정부에 협력했다.”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著書에도 이와 같은 것을 기술하고 있다. 金大中씨는 共産主義에 가담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韓國戰爭이 발생한 50년 6월 25일에는 사업관계로 서울에 있었는데 결국 피난은 가지 못하고 北朝鮮軍이 점령한 서울에 숨어있다가 수일 후 서울을 탈출하여 20일간을 걸어서 400킬로나 되는 목포에 도착했다”고 당시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K씨 증언에 의하여, 金大中씨의 지금까지의 주장은 虛僞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 證言者 K씨와 워싱턴에서 만나다.
필자는 「Washington Today」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자 급거 워싱턴으로 비행하여 증언자 K씨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첫째 K氏의 증언을 기사화한 金映勳 박사를 만나 증언자 K씨의 소재지를 확인, K씨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Washington Today」지에 보도된 기사의 뒷받침이 되는 증언자는 앞서 소개한 金大中씨와는 옛 친우인 金鎭夏씨이다. 그는 70년대 후반에 미국으로 옮겨 美情報機關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80년대 후반에 퇴직하여 현재는 딴 美國機關에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金鎭夏씨는 수 시간에 걸친 취재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를 바로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진실한 증언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니겠냐”고 간절히 요망한 결과 金鎭夏씨는 「Washington Today」지에 실린 金映勳 博士의 기사내용에 대하여 “확실히 틀림없다”고 확인하면서 말문을 열고 자상하게 이야기 하였다. 또 金鎭夏氏는 “金映勳 博士 이외에도 워싱턴에 사는 언론인 두 사람에게 金大中氏에 관한 취재에 응한 바 있으므로 그 두 사람을 만나보면 증언의 신빙성은 명확해질 것이며, 金大中씨의 과거의 증언 이야기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두 사람의 저널리스트를 만나보기를 권했다.
물론 필자는 그 중 한사람을 만나서 金鎭夏氏의 증언과 「Washington Today」의 기사내용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金鎭夏씨는 金大中씨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金大中氏의 출생지는 한반도의 서해안 최남단 전라남도 新安郡 荷衣面 後光里이다. 荷衣面은 인구 1만 5천명이 사는 荷衣島라는 작은 섬이다. 그 하의도에서 1924년 1월 6일에 섬에서 출생한 金大中은 33년 4월 1일 하의도에 처음으로 신설된 荷衣普通學校 2학년에 입학했다.
한편 金鎭夏氏의 출생지는 同 荷衣面의 安佐里이다. 安佐里도 安佐島라는 섬으로서 인구 천명도 안되는 작은 섬이다. 하의도와 安佐里의 거리는 500m 정도로 큰소리로 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이 두 사람은 5학년(1937년)때의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본토의 목포 제일보통학교에 轉學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두 김씨가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한 두 사람은 명문의 木浦商業學校에 진학, 43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金鎭夏氏는 만주의 建國大學校에 적을 두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편입하였고 金大中氏는 목포에 있던 일본인 해운 회사에 취직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은 독립했고, 金鎭夏氏는 와세다를 졸업, 한국에 진주한 美軍政廳에 通譯官으로 취직했다.
독립된 한국에는 많은 정당이 생겼는데 그중에서 제일 먼저 탄생된 정당은 民族主義者인 呂運亨이 주도하는 建國準備委員會로서 동년 8월 17일에 발족하였다. 金大中은 동월 26일 同會 全南支部에 입회하여 木浦市支部靑年 同盟宣傳部長으로 임명되어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은 극히 혼란한 상태였고, 美軍政은 동년 9월 建國準備委員會를 左翼으로 단정하고 해산을 명했기 때문에 同會 그리고 靑年同盟도 해산되었다.
金大中氏은 46년 3월 목포에서 결성된 新民黨에 참가하여 組織部長이 되었다. 동시에 北朝鮮의 지원으로 창설된 南勞黨(南韓國共産黨) 行動前衛部隊인 民主靑年同盟 木浦支部 副委員長을 맡아 활동했다. 金大中氏은 47년 6월 목포시내에 있는 大成, 南橋, 西橋 派出所 放火事件의 主犯으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때부터 金大中氏은 美軍政廳과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추적 당했다. 金大中은 48년 여름에도 전남 寶城 警察署 放火事件에 관여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내의 共産黨 소탕작전이 전개 되면서 共産黨에 가담한 자나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保導聯盟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한국정부와 미군정보 기관은 保導聯盟이 관리하고 있던 자들을 특별관리 하에 두었으나, 한국전쟁 발발시 北朝鮮軍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는 도중에 그 관리 하에 있던 자들을 체포하여 수만명을 총살했다. 그 중에 한사람이 金大中으로, 그 위기를 앞에 말한 바와 같이 金鎭夏氏가 구하였던 것이다.
◆ 金大中은 어떻게 책임을 질 작정인가?
당시 서울 美軍情報機關의 근무하고 있던 金鎭夏氏는 좌익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진 全羅南道에 파견되어 木浦地區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部隊에 배속되었다. 金鎭夏氏는 그곳에서 조사과정을 통하여 金大中氏가 左翼活動家로써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金鎭夏氏는 목포의 유력자이기도 한 김대중씨의 당시의 처 차용애(車容愛)의 아버지인 車寶輪씨를 만나 金大中씨에게 左翼運動에서 손을 떼도록 설득을 한 적도 있었다.
이때 마침 金大中氏가 共産主義者 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49년 2월 20일, 金大中씨가 태어난 고향 근처의 新安郡 荏子面 출신의 北朝鮮 스파이며 南勞黨 民族戰線 副委員長인 兪在埴이 체포되었다. 그가 털어놓은 바에 의하여, 北朝鮮 왕래때마다 金大中씨에게 활동자금이 제공되었던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金大中씨는 광주의 全南警察局에 체포되었다.
이때에도 장인 車寶輪氏가 相當한 로비資金을 사용하는 한편, 金鎭夏氏는 목포지구 韓國海軍隊長이던 朴城哲氏에게 金大中씨의 보석 협력을 의뢰하는 동시에, 미해군 대장에게 설득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한 보람이 있어 金大中氏는 朴城哲氏의 신원보증을 얻어서 保釋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金大中씨는 韓國戰爭 休戰 후 정치가로 변신하여 어떤 뜻에서는 金鎭夏씨에게 은혜를 갚게 되었다.
60年 4月「4.19 學生革命」이 성공하여 民主黨이 탄생했다. 金大中氏는 생명의 恩人으로써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金鎭夏氏를 찾아내어 金大中氏의 정치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張勉 총리에게 부탁하여 金鎭夏氏를 外務部에 課長으로 기용했다.
그 후 金鎭夏氏는 외무부 아시아 담당 副局張까지 승진했는데 61년 5월의 「5.16軍事革命」으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는 바람에 정계를 떠났다. 그 뒤 일본에서 직업을 얻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영주했다.
金鎭夏氏가 金大中氏의 생명을 구한 기록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맥아더 사령부에 소속된 情報部隊(GHQ)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또 月刊志 「中央公論」의 80年 7月호에 시바다 미노로(故人)씨가 「光州市 X란의 背景의 사람들」이란 제하에 기사속에 GHQ 의 정보를 인용하여 “金大中氏는 木浦地區의 海軍憲兵隊에 自首 직후 保導聯盟에 검거, 구속되었다. 그 때 美軍 CIC의 기록에 의하면 철수시 射殺對象者로 지명되어 있으나 목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事實에 대하여 金大中氏도 일부는 인정하고 있지만, 이번 金鎭夏氏의 證言에서 새로 명백해진 사실이 많다.
김대중씨는 한국국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해온 것을 자뭇 사실인 것 같이 주장해 왔다. 金鎭夏氏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銃殺 直前에 구출된 사실 등을 어둠속에 영원히 묻어둘 생각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金鎭夏氏의 金大中氏 구출에 관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한사람으로 현재 일본이나 미국 및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孫忠武氏가 있다. 孫氏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경향신문의 특파원으로 동경에서 생활을 한 경험도 있는 인물로서 그와 金大中氏와의 관계는 67年 6月의 韓國 總選擧때부터 약 30년간이나 밀접한 인간관계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孫氏는 별도로 金大中氏에 관한 미공개 사실을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 金鎭夏氏의 證言內容이 널리 報道되었을 때, 言論界에 연줄이 많은 孫氏가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궁금하다. 지금 한국에서는 8년 5월에 일어난 광주사건의 책임자에 대해서 全斗煥, 盧泰愚 두 前職 대통령에 관한 特別法을 제정하고 또 책임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金大中氏는 피해를 입은 지지자를 속여 問責을 당하게 될 盧泰愚 前 大統領으로부터 不正한 政治資金을 받는 등 스스로의 경력으로 국민들을 계속 몰아부친 責任을 어떻게 질 것인가? 국민들의 김대중씨에 대한 관심은 내년의 대통령 선거와는 별도로 高調되기만 할 뿐이다.
Written by 山崎 一 <일본 월간지, 『政界』, 1996년 2월호(pp.114-119)에서 발췌>
‘DJ 햇볕’ 때문에 북한 6% 경제성장 |
손충무 제1차 미주순회 강연회 (3)… 2억 달러 금강산 개발권을 10억달러에 지불한 現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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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국제저널리스트 손충무 (INSIDE the WORLD 편집인) 발행인이 지난 2001년 8월 1일부터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며 ‘제1차 손충무 순회 시국강연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손 발행인의 순회 강연 당시 김대중은 청와대에 앉아 김정일과 손 잡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획책, 자유대한민국을 침몰시키려던 때였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대중의 정체를 거침없이 파헤치며 그는 대한민국에 음습한 위기를 알렸다. 당시 손 발행인의 강연은 캐나다 코리아 뉴스, 필라델피아 선데이토픽, LA 코리아나 뉴스,워싱턴 선데이타임스 등 4곳의 현지 신문에 중점 보도되기도 했다. 美 연방 국회 도서관에서 보도된 신문들을 찾아 정리한 이 강연을 본사는 3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註>
신사 숙녀 여러분....
김대중은 그것도 모자라 미국과 일본에게 김정일과 대화를 하라고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유럽 정상들을 서울에 초청하여 아셈총회를 하면서 유럽 정상들에게도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라고 설득했습니다.
E.U 여러나라 대표단들이 평양을 가서 김정일을 만나고 유럽이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여러분 김대중은 도대체 어느나라 인물입니까?
부시를 만났을 때 그가 대한민국 대통령이면 먼저 대한민국이 잘 살도록 도와달라고 해야하며 무역 마찰외교 현안 문제를 협의하고 한국군의 현대화 계획과 중국 땅에서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고 중국이 그들을 체포해 다시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는 일이 없도록 미국이 앞장서서 유엔이 난민으로 분류하도록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부시 대통령에게 제일 먼저 “미국이 김정일과 대화를 해야하며 클린턴 정권때 맺은 미국 북한 사이 제네바협정은 지켜져야 한다. 김정일은 지성적이고 신뢰할 수 있고 북한을 장악하고 있는 지도자다” 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한참이나 인내심을 갖고 듣고 있던 부시 대통령이 “그것은 김대통령의 희망사항이다. 북한 지도자는 제네바 협정이후 지난 4년 동안 계속 미국을 속여왔으며 지금도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제조, 위험 국가에 팔고 있다. 김정일이 미국과 대화를 원한다면 핵 개발과 미사일 생산 판매를 중지하고 이를 국제사회가 믿도록 해야하며 미국의 철저한 검증을 필요로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오죽하면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상호주의 원칙을 지키며 철저한 검증을 말하며 ”Tish Men"이라고 비아냥거렸겠습니까? 또 “미국은 북한과 상호주의 원칙 아래 철저한 검증을 거쳐 확인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말은 대단히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그 말은 김대중에게 들으라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도 김대중이나 그 참모들 한국에서 따라온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그 말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은 바로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속마음을 드러낸 소리입니다. 김대중 정권이 햇볕정책 이라는 미명아래 북한에 마구 퍼부어 주고 있는 경제지원 정책을 스톱하라는 신호입니다. 세계를 리드하고 세계 무역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는 미국이 하품을 하면 유럽과 일본이 기침을 하고 일본이 기침을 하면 한국과 대만 아시아 여러나라의 경제가 몸살을 앓는 경제대국 미국도 북한과 하나 하나를 따지며 국회 동의를 받아서 경제지원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버지니아주 보다도 작은 한국이 지난 3년 사이 10억 달러의 돈을 북한에 마구 퍼부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미국이 볼 때 얼마나 어처구니 없고 웃기는 이야기 입니까? 그래서 김대중에게 자신의 돈이 아니라고 마구 퍼부어 주지 말라는 충고를 한 것입니다.
김대중 정권의 어느 누구 한 명도 부시 대통령의 단수 높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멍청한 정권입니다.
금강산 관광사업 처음 2억 달러가 김대중 정권 들어 10억 달러로
김대중 정권이 “민족 사업” 운운하며 자랑하는 금강산 사업만 해도 내용을 알고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것이 김대중 정권인 줄 알게 됩니다.
애당초 금강산관광 사업은 죽은 독재자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2억 달러에 개발 허가권을 국제사회에 내 놓은 사업입니다. 북한이 관광사업이 무엇인지도 모를때 재미교포 여성 사업가인 박경윤이라는 여인이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평양을 내집 같이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 무역이 무엇이며 수출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며 금강산관광 개발사업을 하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김일성으로부터 금강산에 호텔을 짓고 골프장을 만들고 카지노를 만들어 홍콩 일본 싱가포르 손님들을 금강산으로 불러들인다는 청사진을 만들고는 2억달러에 김일성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박경윤 여인은 그 청사진을 가지고 도쿄에 일본 사무실을 내고 투자가를 찾고 있으면서 기자들과 접촉했습니다. 본인도 몇 번 만났습니다.
박경윤이 2억 달러에 금강산 개발권을 따냈다는 소식을 들은 통일교가 평양을 분주히 드나들며 박경윤과 비슷한 금강산 개발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그럴 즈음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박경윤과 접촉하면서 허가권을 양도하도록 설득하였으나 박경윤은 자신이 개발 한다는 욕심 때문에 현대에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화가 난 왕회장이 일본측 인사를 통해 김일성과 접촉을 시도했으며 그 방법의 하나로 강원도 통천 고향 방문을 했습니다. 고향 방문을 핑계로 북한을 방문한 정주영은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나 큰 절 하고는 그 큰 돈을 갖다 바쳤던 것입니다.
김일성의 입을 찢어지도록 즐겁게 만든 정주영이 북한에 대대적인 투자를 하고자 했으나 김영삼 정권은 허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정주영은 그때부터 김대중이 정권을 잡는 날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주영과 김대중은 깊은 묵계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1992년 대통령 선거때 정주영씨는 70대 후반 노구를 이끌고 대통령 선거에 나섰습니다. 정주영 노인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것은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당하고 많은 돈을 빼앗긴데 대한 보복으로 노태우 후계자로 지명된 김영삼을 떨어뜨리기 위한 전략이였습니다. 엄청난 돈을 뿌리며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경제 대통령을 만들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80대 가까운 노인이 전국을 돌면서 무리한 선거 운동을 하는 바람에 후반에는 기력이 없어서 연설 연단을 부축없이는 올라다니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번은 연단에서 연설을 하다가 바지에 오줌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기력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돈을 쏟아 넣으며 연단에서 바지에 오줌을 싸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결과는 3등으로 낙선한 정주영이 개표하는 날 밤 자신의 표가 3등으로 추락하자 “내표....내표.... 내돈 .... 다 어디 갔어” 하면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김영삼씨가 당선되자 정치 보복이 두려워진 정주영 노인이 서산농장에서 두문불출 하다가 어느날 밤 돈을 한 빽에 가득히 넣어 가지고 동교동 김대중이를 찾아갔습니다. 돈 좋아하는 김대중에게 돈가방을 밀어주며 김영삼이 정치 보복을 할지 모르니 도와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금은 얼마든지 댈 테니 차기정권을 차지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대신 세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김영삼 정권의 보복으로부터 현대를 지켜주고 차기 당선 후 북한 사업은 현대에 독점권을 주어야 하며 김대중 후계자로 자신의 아들 정몽준 의원을 키워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여의도 정가와 언론계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후 김대중이 당선되자 정주영은 소떼를 몰고 평양으로 갔으며 박경윤과 통일교가 김일성으로부터 2억 달러에 허가 받은 금강산 개발권을 10억 달러를 주겠다고 오퍼를 해서 따 냈던 것입니다.
2억 달러 짜리를 10억 달러를 내겠다고 했으니 북한이야 얼마나 좋은 제안입니까? 그후 현대는 무려 4억 달러의 돈을 북한에 전달했으며 아직도 6억 달러 가까이 더 퍼 주어야 합니다.
현대가 김대중 정권의 묵인아래 금강산 관광이라는 미명 아래 지난 2년 동안 4억 달러 가까운 돈을 북한에 퍼부어 주는 바람에 현대는 거지가 됐습니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에 주름살이 갔으며 대학을 나온 실업자가 수만명 빈둥대고 있습니다.
현대가 거덜나서 2천 200만 달러의 돈을 내지 못하자 북한은 금강산관광 사업을 중지한다고 했습니다. 현대는 금강산 사업도 중단 당하고 알거지가 되자 이번에는 김대중 정부에 큰 소리를 치고 나왔습니다.
현대가 김대중 정권의 심부름으로 북한에 4억 달러의 돈을 마구 퍼부어 주었으니 정부가 금강산관광 사업을 하든지 아니면 정부가 현대에 자금을 융자해 달라는 큰 목소리를 내고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습니다.
그 기미를 알아차린 북한이 중단된 남.북 대화를 하려고 하면 현대가 밀린 2천 200만 달러를 내라고 하면서 그 돈을 내면 육로로 금강산과 개성을 연결하는 관광사업을 허가하겠다고 추파를 보냈습니다.
이에 놀아난 김대중 정권은 국영 기업체인 관광공사에 현대와 합작으로 금강산관광 사업을 하라고 지시하고 은행에서 마구 돈을 대 주도록 명령했습니다.
청와대의 지시에 놀란 관광공사가 번개불에 콩구어 먹듯이 허겁지겁 2천 200만 달러를 만들어 북한에 전달하는 쇼를 연출했습니다. 그런 행동을 야당과 언론이 비판하자 “민족 사업을 방해하는 반 통일세력”운운하며 갖은 거짓말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IMF파동으로 국내 경제가 밑바닥으로 침몰했습니다. 수 십만 명의 실업자가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수출이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증권시장은 IMF때보다도 더 아래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IMF때 보다도 살기가 더 어렵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런 때에 배부른 소리로 들리는 것이 금강산관광입니다. 지금 우리 살기도 어렵고 가정주부들이 먹고 살기가 어려워 몸을 팔러 다니는 판에 속편한 금강산관광 타령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김대중 정권에 빌붙어서 떼돈을 벌고 엄청난 재미를 본 정권 모리배들과 톡톡히 한평생 먹을 것을 챙긴 DJ측근들이나 그 사돈의 8촌들, 정부 예산을 받아 “양키고홈 주한미군 철수하라” 외치는 단체 간부들이나 언론개혁 외치며 정부예산과 방송진흥공사 자금 받아 챙긴 시민단체 간부들은 몰라도 일반 서민들은 배부른 자들의 돈 지랄병쯤으로 들리는 소리일 뿐입니다.
금강산관광 못하면 나라가 망합니까? 집안이 망합니까? 왜들 그럽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금강산관광 사업뿐만 아니라 북한에 마구 퍼 주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국회 동의없는 국민의 승낙없는 북한 지원은 중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가 북한에 마구 퍼부어 주어 현대가 망하도록 만들고 국민이 낸 세금을 관광공사가 마음대로 북한에 갔다준 자들의 행동을 철저히 조사해 엄벌해야 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1995년경 김일성이 죽기 전 부터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과 전기 부족으로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져 몇 년째 마이너스 성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이 탄생한 지난 98년부터 플러스로 올라서더니 99년부터는 6%의 성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는 6%의 마이너스로 돌아섰습니다. 북한이 마니너스 경제에서 6%의 성장으로 돌아선 것은 무엇입니까? 김대중 정권이 국민의 동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북한에 퍼 부어준 경제지원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북한은 러시아로부터 40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무기를 수입하고 있다는 미국의 군사 정보가 있습니다. 또 몇 년째 전기 부족으로 문이 닫혀있던 각종 군사무기 공장이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남한국민 1人당 北에 보낸돈 1년에 2,080원 Y.S 때는 1,690원
신사 숙녀 여러분......
김대중이 햇볕정책을 하면서 북한에 갔다준 돈이 얼만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지난 3년반 동안 그 허울 좋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이 북한에 퍼 부어준 돈은 자그마치 국민의 세금인 정부지원 2,345억원, 또 차관 지원 명목으로 1,055억 원 등 총 3,444억원을 주었습니다.
북한에 차관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빌려준 돈이지만 북한한테 언제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공짜로 준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이 액수는 통일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나타난 숫자일 뿐 사실은 자료에 나타나지 검은돈이 얼마나 갔는지는 모릅니다.
이는 국민 1인당 7,280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면 김대중이 주장하고 있는 북한이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외투를 벗기는 커녕 오히려 더 두터운 털옷을 껴 입으며 김대중에게 더 많고 센 햇볕을 보내라고 아우성입니다.
여러분..... 이솝우화에 나오는 햇볕은 길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 아닙니까? 김대중이 북한에 그만큼 강한 햇볕을 쨍쨍하게 내려 쪼였으면 김정일이 지금쯤 외투를 벗고서 서울답방을 하고 세계속에 남.북대화를 하며 미사일를 개발하지 않고 미국이나 일본과 손을 잡고 대화해야 합니다.
공산주의 외투를 벗고 최소한 중국식 사회주의 정도로는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김정일과 그 추종 세력들은 지금 까지 햇볕정책을 감사하며 지지한다는 소리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식 공산주의 사회”를 외치며 선군정치를 주장하고 군사 제1주의 국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햇볕정책 이라는 것은 꾀 많은 김대중이 김정일을 꼬드겨 노벨평화상을 함께 받자고 한후 자기 혼자만 받은 것에 보상을 해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또 김정일의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1964년 목포선거 때 부터 받은 천문학적인 돈을 갚아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이자까지 계산해서 돌려주어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절대다수 남한 국민들이 반대하는 햇볕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과 같은 햇볕정책은 중지돼야 하며 허구투성이의 대북정책은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북한을 도와주고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도와주는 일에 남한 국민들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김대중의 햇볕정책 시스템은 바꾸어야 합니다. 대북정책은 거울 같이 투명해야 하며 국민들의 박수와 지지와 받으며 진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도록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미국과 캐나다 친구들, 정치인들 언론인들에게 김대중이 과거에 공산당 중앙위원 감찰위원을 지낸 공산주의자이며 북한으로부터 오래전부터 자금을 받고 있었으며 시민단체에 돈을 주고 양키고홈 미군철수를 외치는 반미데모를 시키고 있다고 바로 알려줘야 합니다.
그리고 개값 보다 못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을 빙자로 6개 언론사 발행인을 구속한 언론탄압 말살자라는 그의 정체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아직도 준비된 연설은 더 많습니다만 시간 관계상 오늘은 여기서 줄이고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한편, 이 연설 후 황장엽 미국 의회증언 문제, 김정일 서울 답방문제, 일본 총리 해임문제, 8.15 평양축전 참가자 문제, 임동원 햇볕정책 전도사 문제 등의 질문이 1시간 여 진행됐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손충무씨 초청강연을 듣기 원하는 단체나 모임, 또 신앙간증을 듣기 원하는 교회에서는 선데이타임스 편집국으로 연락하시면 스케줄을 조정해 알려드립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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