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훈민정음 또 있다, 제3의 원본 발견"
입력 : 2015.10.16 08:48
서울 간송미술관에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도, 어쨌든 1000억·1조원을 호가하는 경북 상주의 훈민정음 해례본도 아니다. 고서화 수집가 편영우(75)씨가 1986년 7월 일본 오사카 재판소(법원) 뒷골목의 골동품 상가에서 구입, 보관해 온 것이다. 간송본, 상주본과 달리 1쪽도 낙장이 없는 완전한 훈민정음이다.
“간송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1997)되며 가치를 인정받았기에 남몰래 소장하고 있었는데, 상주본이 일으킨 작금의 사태를 보다 못해 세상에 공개하기로 했다”는 편씨는 이 훈민정음을 편의상 ‘왕실본’이라고 부른다. “29년 전 일본에서 훈민정음과 함께 다른 고서, 유물을 한꺼번에 여럿 구했다. 예외없이 문화재 수준이다. 개중에는 멸실된 것으로 알려진 국보급 물건들도 있다. 추측컨대, 일제강점기 조선의 왕실에서 통째로 유출된 듯하다”는 이유에서다. “왕실본의 종이는 명나라 수입품이고, 목판에 찍어낼 때 사용한 먹물 역시 최고급 당먹(唐墨)”이라는 방증도 제시했다. 특히 “훈민정음, 기타 조선의 고서들 속에 섞여 있던 규장각 직인인 거북형 규장지보도 같이 샀다. 규장각은 조선왕실의 도서관이다. 이 훈민정음이 왕실본이라는 확실한 증거”라고 강조했다.
편씨의 왕실본은 기존의 간송·상주본과 일부 다르다. 글자의 획이나 삐침 등이 간송·상주본보다 덜 거칠다. 미려하고 세련된 편이다. ‘용자례(用字例)’에서는 한 곳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 조선어학회가 간송본을 베껴 1946년에 펴낸 훈민정음과 비교하면 ‘ㅁ’자가 다르다. 간송본에는 ㅁ아래에 。이 있지만, 왕실본에는 ㅁ만 있다.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52) 소장은 “용자례, 즉 훈민정음 해례본 24쪽 뒷면~25쪽 앞면은 초성 ㄱ, ㆁ, ㄷ, ㅌ, ㄴ, ㅂ, ㅁ, ㅸ, ㅈ, ㅊ, ㅅ, ㅎ, ㅇ, ㄹ, ㅿ을 쓰는 예를 설명한 부분이다. 간송본에서는 모두 위 글자들 밑에 중간쉼표 권점(圈點; 。)을 찍었는데, 유독 ㅁ자 하나만 빠져 있다. 아마도 현대인이 원본을 보고 쓰는 과정에서 실수한 탈자로 보인다”고 짚었다.
박 소장은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각 문장의 중간이나 끝부분에 둥근 권점의 구두점이 쓰였다. 구두점은 구점(句點)과 두점(讀點)으로 나뉜다. 구점은 마침표, 두점은 쉼표다. 해례본에서는 마침표 권점은 문장 끝글자 오른쪽 아래부분에 썼고, 쉼표 권점은 글자와 글자 가운데 부분에 썼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간송본은 1940년대 발견 당시 ‘國之語音異乎中國’(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으로 시작되는 세종대왕의 서문 두 장이 없는 상태였으므로, 조선어학회가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마침표 권점과 쉼표 권점을 구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오른쪽 아래에 찍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권점이 구별되지 않고 조선어학회본과 똑같으니, 잘못 고증된 후대의 조선어학회본을 보고 쓴 것이며, 1차 오류에 이은 2차 오류라는 주장이다.
왕실본의 자형과 서체 등 글자체도 문제 삼았다. “최초 훈민정음의 서체는 마치 막대기처럼 반듯반듯한 고딕체다. 이와 달리 ‘왕실본’의 ㅂ자를 보면 수직선의 시작 부분이 약간 구부러진 해서체다. ‘러울’의 ‘ㅜ’ 수평선 부분도 ”고딕체가 아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동일본인 간송·상주본이 아닌 또 다른 판본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박 소장의 감정은 “진본으로 판정된 간송본”을 근거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왕실본을 찾아낸 편씨의 이력도 위작과는 거리가 멀다. 편씨는 서울시립남산도서관 사서과장 출신이다. 선지식(善知識) 유묵관(遺墨館)을 세우려고 지난 45년 간 국내는 당연하고 일본, 중국, 대만, 프랑스, 영국 등지의 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지고 다녔다. 대만 푸런(輔仁)대학과 중국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국제정치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옌볜대 객좌교수를 지냈다. 런민르바오(人民日報)와 신화사 계열 한국지사에서 저널리스트로도 활약했다.
편영우씨는 “나는 사서다. 서책 감별이 일이다. 고서화에도 전문적 식견을 갖췄다. 이제 문화재청 등 중앙행정기관이 나서서 왕실본이 진본임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①'반갑도다! 훈민정음의 나타남이여!' 1940년 <간송본>의 출현에 외솔이 외쳤다
경향신문 선임 기자 입력 2019.11.05. 05:00
최근 문화재위원회는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을 보관할 간송미술관 보호각의 청사진을 조건부 가결했다. 2021년 완공될 보호각에 들어설 문화유산은 국보 12건, 보물 32건, 시도지정문화재 4건 등이다. 이중 최고의 문화유산은 뭐니뭐니해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일제강점기인 1940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보호각 설립 계획안의 가결을 계기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최근 말썽을 빚고 있는 <상주본>과 <간송본>을 2회에 걸쳐 비교해보고자 한다. ①은 간송본의 출현에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가 “반갑도다!”라 감탄사를 외친 이유, ②는 <간송본>과 <상주본>과의 비교가 어림없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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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뜻하였으랴. 수개월전 (훈민정음) 원본(이하 해례본)은 경북의 어떤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 모씨의 소유로 돌아갔다…단지 책을 입수한 지 겨우 열흘도 넘지 못하여 그 번역문이 정리되지 않은 원고상태로 연재하는 것임을….”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는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신문은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소식과 함께 훈민정음 한문본 해례본의 핵심내용인 ‘훈민정음 해례(보기를 들어 풀어줌)’의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와 방법)를 일부 번역해서 실었다. 당시 국어학자인 방종현(1905~1952)과 홍기문(1903~1992)은 해례본을 번역하여 8월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다. 그런데 연재가 끝난지 불과 6일 뒤인 8월10일 조선일보는 강제폐간됐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년)을 일으킨 뒤 우리말·글의 교육과 사용을 금하고(1938년), 창씨개명을 단행(1940년)하면서 소통과 지식의 매개체였던 전국종합신문 폐간까지 강행한 것이다. 신문 폐간을 불과 10여 일 앞둔 암흑기 조선에서 한줄기 빛처럼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 소식이 전해졌으니 얼마나 극적인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1894~1970)는 훈민정음 원본(해례본)의 발견을 두고 “경북 안동에서 이런 진본이 발견됐다니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면서 이렇게 외쳤다. “아! 반갑도다! 훈민정음 원본의 나타남이여!”
■외솔 최현배가 비명을 지른 이유
그렇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이 어떤 의미를 갖기에 외솔이 비명을 질렀을까. 훈민정음 원본 혹은 해례본은 세종의 한글 창제 원리를 설명한 책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뉜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예의’는 한글을 만든 이유(서문)와 사용법을 간략하게 한문으로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세종의 명을 받들어 한글을 만든 집현전 ‘8학사’가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하지만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8세기 실학자들은 해례본의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문만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을 찾기는 했다. 이것이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익숙한 <언해본>인데, 세종의 한문 서문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서문을 포함한 ‘예의’는 <세종실록>과 <월인석보> 등에도 실려있다. 하지만 해례가 빠진 <언해본>으로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알 수 없었다. 외솔 최현배는 이를 두고 “훈민정음(한글) 반포 뒤 훈민정음(해례본)을 찍어 폈다는 기록이 없었다”면서 “최세진(1468~1542)·신경준(1712~1781)·유희(1773~1837) 같은 한글 학자도 그 원본을 보지 못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화장실 창살론까지
그런 <해례본>이 조선일보의 보도 전까지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글창제의 원리를 두고 온갖 억측이 나왔다. 급기야 ‘화장실 창살설’까지 등장했다. 화장실에 앉아 새 문자 창제를 고심하던 세종대왕이 화장실 창살 모양을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설이었다. 대부분은 일제강점이 일본 어용학자들의 한글폄훼론이다. 일제 관학자들은 <언해본> 마저도 위작이라고 깔아 뭉갰다.
끝내 해례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그저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우연히 만든 글자’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고 신문까지 강제폐간하던 바로 그 암흑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홀연히 나타났으니 외솔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주신 것”이라고 외친 것이다. 한글반포(1446년) 이후 무려 494년만의 일이었다.
■기와집 10채 가격으로 구입한 <훈민정음 해례본>
그렇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해례본>을 처음 소개한 방종현은 ‘수개월전 경북(안동)의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의 모씨 소유가 됐다’고 했다. ‘시내의 모씨’는 당대의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그러나 원소장자 및 매각자와 관련된 정보는 1950년대 경북 안동고 국어교사였던 정철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정철은 1950년과 54년 국어국문학회가 내는 학술지 <국어국문학>에 ‘원본 훈민정음의 보존 경위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 정철은 이 글에서 10여년간 베일에 싸였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소장자는 ‘경북 안동 와룡면 주하동에 사는 진성 이씨 가문의 후촌 이한걸(1880~1950)’이라 소개했다.
“이한걸 선생의 3남인 이용준이 서울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공부했는데…이용준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 김모(국어학자 김태준)에게 자기 고향 안동에 훈민정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김모는 곧 전형필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얻어 가지고 안동으로 내려와서 현물(훈민정음 해례본)을 보게 되었습니다…김모는 사례금으로 3000원을 책주인인 후촌 선생에게 치르고….”
정철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진성 이씨 가문이 소장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일찍이 진성 이씨의 선조가 여진정벌의 공이 있어 세종대왕으로부터 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상으로 받아 늘 상자 속에 감추어 보존했고, 연산군(재위 1494~1506)의 한글 탄압 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첫머리 두 장을 뜯어버리고 둘둘 말아서….”
아닌게 아니라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으니, 바로 첫머리 두 장(4쪽)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을 서예가이기도 한 이용준이 안타깝게 여겨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의 서문 등을 참고해서 안평대군 글씨체를 모방하여 채워넣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편하게 쓰고자 한다(便於日用耳)’에서 ‘이(耳)’자를 ‘의(矣)’자로 잘못 쓰는 등의 오류가 생겼다. 이 오류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은 외솔 최현배였다.
“어쨌든 김모(김태준)는 ‘국어학계의 연구자료로 이 책을 서울로 가져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후촌 선생은 김모의 소원을 승락하고 동시에 500여년 전해오던 국보 원본 훈민정음을 김모(김용준)의 수중으로(결국 전형필님) 인도하게 되었습니다.”(정철)
우여곡절 끝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쥔 간송 전형필은 1958년 소장 경위를 직접 밝혔다. “친한 서적상이 ‘시골에 훈민정음 원본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틀림없이 원본이면 무슨 노력을 해서라도 살테니 가져오라’고 했어요…1년 후 그 사람이 와서 ‘오늘 저녁 가져오겠다’고 했어요. 초조하게 그 사람을 기다렸는데 밤중에 온 그 사람이 개선장군처럼 위세당당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전형필은 “그때 속심으로 ‘가져왔나보다’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헌 종이에 아무렇게나 돌돌말아 쥔 구겨진 종이를 가져왔다”고 전했다. 당시 간송 전형필은 <해례본>의 가격으로 1만원(기와집 10채값)을 군말없이 내줬고, 거기에 수고비라며 1000원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 귀한 문화유산은 귀한만큼 대접 받아야 한다는 간송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이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훈민정음 간송본>(이하 간송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진성 이씨냐, 광산 김씨냐…원 소장처의 논란
최근에는 훗날 <훈민정음 간송본>의 원소장처를 둘러싸고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나왔다. 즉 <간송본>은 이용준(이한걸의 3남)이 처가(광산 김씨 안동 종가 ‘긍구당’)에서 유출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긍구당설’을 주장하는 이들 가운데는 이용준이 광산 김씨 안동종가의 종손이자 이용준의 장인인 김응수(1880~1957)에게 보낸 편지를 증거로 내밀었다. 즉 “(긍구당에서) 가려뽑은 책은 몇 분의 1에 불과하여 서가에 영향은 깊지 않으며…값을 90원으로 결정했다”는 편지와, “(긍구당에서) <매월집>을 가져온 일은 송구하옵고 범한 행동은 스스로 큰 죄라 여겨 할 말이 없지만…용서하심이 어떠냐”는 편지 등이 그것이다.
<간송본>이 긍구당에서 유출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용준이 처가인 광산 김씨 안동 종가인 긍구당에서 <매월집> 등을 빼돌렸을 때 <훈민정음 해례본>까지 유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훗날 김응수의 손자(김대중)가 “고모부(이용준)가 긍구당의 책방에서 <훈민정음 원본>과 <매월당집>을 유출해서 조부(김응수)가 고모부에게 ‘공부한 선비가 남몰래 책을 춤치다니 다시는 내 집에 발걸음 하지 말라!’고 꾸지람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단다.
이들은 연산군 때 한글(언문) 탄압을 피하려고 세종의 어제 서문 2장(4쪽)을 뜯어냈다는 주장 역시 근거가 없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어제 서문은 한문으로 적혀있기 때문에 떼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의 한글탄압이 아무리 극심하다 한들 임금(세종)이 하사한 내린 책, 그것도 ‘어제 서문’을 뜯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해례본의 낙장 2장은 ‘원소유자인 광산 김씨 집안이 대대로 찍었던 장서인, 즉 증거를 없애려고 이용준이 찢은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전히 <간송본>의 원소장처가 전성 이씨 가문이라는 견해를 굽히지 않는 이들도 있다. <매월당집> 만으로는 <간송본> 유출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가치를 알아본…
원소장처가 어디이든 <간송본>의 가치는 값으로 칠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할 수 있다. 어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문화유산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문화유산을 많은 이들에게 공개하여 연구토록 하는 것은 더더욱 평가받아야 한다.
사실 <간송본>이 이용준 친가인 진성 이씨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인지 혹은 아니면 처가인 광산 김씨 집안에서 보존해온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당시 24살인 이용준은 아마도 친가나 처가 어른의 동의없이 <간송본>을 팔아넘긴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 과정에서 증거를 없애려고 앞 두 장을 뜯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또한 명백한 과오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과오를 감안하더라도 이용준은 <간송본>의 가치를 알아본 인물이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다. 이용준의 조카이자 광산 김씨 문중 인물인 김대중은 “일부 학자들이 고모부를 도둑이라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훈민정음 보존에 공을 세운 셈”이라면서 평가했단다.
“고모부가 똑똑해서 훈민정음을 알아보고 훔쳐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벽지로 쓰였을 지도 모르는 입니다.”(최기호의 ‘훈민정음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에서) 이용준이 아니었다면 ‘무가지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한낱 벽지로 썼을 수도 있었다는 모골 송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일본학자에게 넘어갔다면…
이용준과 함께 해례본을 간송에게 넘기는데 핵심역할을 한 김태준(1906~1950)은 사회주의 국어학자이다. 당시 경성제대와 경학원(성균관대 전신)에서 강사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고, 재직 중 경성콤그룹에 참가해서 인민전선부를 담당했다. 김태준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주하·김삼룡 등과 함께 한국군에게 총살 당했다. 국어학자 안병희(1933~2066)는 바로 김태준의 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김태준씨가 해례본(간송본)을 전형필씨가 아니라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에게 가져갔다면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다. 김태준씨의 그때 일이 얼마나 휼룽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김슬옹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전문위원은 “안병희가 말하는 일본인 교수는 1940년 당시 경성제대 우리말글 연구 교수인 고노 로쿠로(河野六郞·1912~1998)였다”고 밝힌다. 바로 그 고노가 1947년 발표한 논문에서 “1940년 당시 경성에 머무르고 있었을 때 원본을 볼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국어학자인 김태준이 일본인 교수에게 <해례본>을 넘길리 없었겠다. 그렇지만 순수 학문 연구자의 입장에서 같은 경성제대 강단에 섰던 고노에게 <해례본>을 보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골이 송연하다.
■영인본 출간의 의미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공로야말로 첫손가락에 꼽혀야 한다. 한글학회장을 지낸 김계곤(1926~2014)은 “아무리 가산이 넉넉하다한들 돈을 보람있게 쓸 줄 아는 이가 얼마나 몇사람이나 되겠냐”면서 “간송의 공로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극찬했다.
간송이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시절인 1940년대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와집 10채값을 주고 사들여 지켜냈다. 이것만으로도 천고에 길이 빛날 업적이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 해례본을 영인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간송은 훗날(1959년) 영인본 출간과 관련해서 “마음이 홀가분하다”고 밝혔다.
“이 책은 오랫동안 서고 깊이 넣어두었다가 해방 이후…널리 세상에 내놓았습니다…영인본이 나와 널리 책으로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적이 안심이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소장자의 입장에서는 꽁꽁 숨겨놓고 혼자만 감상해야 박물관적인 희소가치가 생기고, 그 가치도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가치있는 문헌을 오래 보존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공유’라 여겨 영인본 출간을 허락한 것이다. <한글학회 100년사>는 영인본 출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간송본>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민족적인 경사였다. 그러나 손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영인본이 나옴으로써 누구나 쉽게 해례본을 대하게 됐고 신진들의 날카로운 분석도 뒤따랐다.” 이렇게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은 국보 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전세계가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참고자료>
김슬옹,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한말연구학회, 2015
이상규, ‘잔엽 상주본 훈민정음 분석’, <한글> 298, 한글학회, 2012
최기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와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 <나라사랑> 126, 외솔회, 2017
박종덕, ‘훈민정음 해례본의 유출과정 연구-학게에서 바라본 발견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한국어회>, 31, 한국어학회, 2006
박영진,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 경위에 대한 재고’, <한글새소식> 395, 한글학회, 2005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 66쪽 중 18쪽 없는 <훈민정음 상주본>의 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이유(2019. 11. 08 11:11)
- ....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역사와 평가’, <한말연구> 제37호,... 기사는 지난 5일 인터넷 판에 2회에 걸쳐 연재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팟캐스트’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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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사>는 영인본 출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간송본>의 발견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민족적인 경사였다. 그러나 손쉽게 접할 수 없었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마침내 영인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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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접 지은 어제 서문과 예의까지 완벽하게 남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출현을 기대하면서 영국의 역사가 존 맨의 훈민정음 찬양을 인용해본다. “한글은 단순하고 효율적이며 일파벳의 대표적인 전형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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