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숭례문(崇禮門) 화재

이름없는풀뿌리 2015. 10. 1. 14:04

숭례문(崇禮門)

 

 

 

 

우리의 국보 1호를 잃어버렸습니다.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참담한 화재중계를 지켜보며 불을 끄지 못한 책임을 누구에게 따져 묻기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앞으로 더는 소중한 문화재가 불타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화재시 잘 대응할 수 있는 특별소방훈련도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언제 다시 숭례문의 모습을 볼 수 있을런지... 

 

 

 

 

백과사전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함.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에 위치한 조선 초기 한양의 성문.

 

서울 숭례문의 전경, 조선 시대 한양의 성문으로 남대문이라고도 ...
국보 제1호.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48년(세종 30) 개축했다.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뒤, 정궁인 경복궁의 방향에 의해 남문인 숭례문이 정문이 되었다. 풍수지리에 의해 편액도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졌다. 이는 서울 남쪽에 있는 조산(祖山)인 관악산이 북쪽의 조산인 북한산보다 높고 산의 모양도 불꽃이 일렁이는 듯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맞불로서 꺾기 위한 것이며, 오행에서 남쪽을 가리키는 예(禮)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숭례문이라 이름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건물인 이 문은 화강석의 무지개문을 중앙에 둔 거대한 석축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상하층 모두가 겹처마로 되어 있고 사래 끝에 토수(吐首)를 달았다.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두(龍頭)를 두고, 양성한 용마루에는 취두(鷲頭)를 두었다. 2층인 이 문의 구조는 위층의 4모서리 기둥이 아래층까지 내려와 견고하게 결구되었으며, 위층 중앙에는 4개의 고주를 두었다. 다포계 형식의 공포를 얹은 이 문의 위층은 외삼출목, 아래층은 외이출목으로 구성되어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다포계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조선 초기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 1962년 해체복원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은 당시의 건축생산체계와 장인조직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조선 초기 다포계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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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화재가 난 숭례문(崇禮門)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선왕조가 수립된 직후인 1395년(태조 4년)에 한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됐으며 이후 500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447년(세종 29년)에 고쳐 지은 것이며,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규모 해체·보수 과정을 거쳤다.

숭례문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지만 도성 남쪽에 있는 문이어서 사람들은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렀다. 1406년(태종 6년)에는 명 사신 황엄이 나주 지역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숭례문 밖에서 영접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 현판 글씨는 태종의 큰 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인터넷조선 기사 발췌)

 

 

 

 

 원문출처 : [사설] 4800만 국민 지켜보는 가운데 불타 무너진 숭례문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1/2008021101668.html

입력 : 2008.02.11 22:43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하룻밤 새 잿더미가 됐다.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거쳐 6·25까지 갖은 전란(戰亂)도 견뎌내며 600년 세월을 견뎌온 서울의 큰 대문이 숯덩이로 무너지는 모습을 국민은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민족의 얼이 담긴 나라의 상징이 소방관 330명, 소방차량 95대가 동원되고도 속수무책으로 불타버린 5시간 사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뽐내던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가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다. 양녕대군이 썼다는 '숭례문(崇禮門)' 현판이 매트리스도 받치지 않은 맨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추락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서울 중부소방서에 들어온 것이 10일 밤 8시50분, 소방관들이 처음 출동해 불을 끄기 시작한 것은 3분 뒤인 8시53분이었다. 발화 시점이 밤 8시48분쯤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불이 난 지 불과 5분 만에 불 끄기가 시작된 셈이다. 그러고도 결국 숭례문을 몽땅 태워먹고 마는 거짓말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접근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소방인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 수도 한복판,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소방당국은 밤 9시30분쯤 불길이 잦아들고 연기만 나자 다 꺼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남은 불길이 건물 안쪽에 숨어 있는 것을 몰랐다. 소방관들은 옛 목조건물의 복잡한 내부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고, 지붕에 방수 장치가 돼 있어 밖에서 퍼붓는 물이 안으로 배어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몰랐다. 10시40분 불길이 다시 치솟은 다음에야 기와지붕을 뜯고 물을 퍼부어 불을 끄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4800만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은 불'을 '큰 불'로 키워 대한민국 국보 1호를 불태워 버린 것이다.

소방당국은 2005년과 2006년 양양 낙산사와 수원 화성 서장대가 각기 산불과 방화로 타버린 뒤로 문화재 소방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흘러 넘쳤는데도 겉핥기 대책과 남의 눈을 의식한 형식적 훈련으로 그쳐왔다. 서울 중부소방서는 숭례문 내부 도면(圖面)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매년 되풀이한 가상훈련도 건물을 둘러보고 소화전(消火栓)이나 점검하는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숭례문 방화 설비는 수동식 소화기 8대와 상수도 소화전이 전부였다. 화재에 특히 약한 목조건축물인데도 요즘 웬만한 건물이면 다 갖고 있는 화재 경보기나 스프링클러도 없었다.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防火)의 날'로 정해 지방자치단체들이 소방훈련과 문화재 긴급피난, 소방장비 점검 등을 한다. 이 날은 1949년 1월 26일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에 있는 국보 벽화가 화재로 크게 손상되고, 이어 교토 긴카구지(金閣寺)까지 방화로 소실된 뒤 제정됐다. "문화재를 화마(火魔)에서 지키자"는 구호를 내건 훈련에는 각 지역마다 소방대원과 주민, 사찰 승려 등 수백 명이 참가한다.

국보 1호 관리를 위임 받은 서울시는 2005년 "숭례문을 시민에게 돌려준다"며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2006년 중앙통로까지 일반에 개방했다. 숭례문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됐지만 중구청 직원이 평일 3명, 휴일 1명씩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근무한다. 이들이 퇴근한 밤 시간엔 무인경비업체의 CCTV와 적외선 감지기에만 감시를 맡겨놓았다. 개방한 만큼 더 엄격한 보호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상식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문화재청은 불이 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대전 문화재청에 있는 숭례문 도면을 갖고 왔다. 지난해 5월 발간한 '화재 위기대응 현장조치 매뉴얼'에는 문화재에 불이 났을 때 어떻게 불을 꺼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하나도 없다. 2006년에야 124개 중요 목조문화재에 방재시스템 구축을 시작했지만 해인사 등 4곳에만 설치공사를 했을 뿐 우선순위 48위인 숭례문 차례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 놓고는 11일 아침 일찍 흉물이 돼버린 숭례문에 가림막을 세워 국민의 눈으로부터 감추는 공사부터 서둘렀다.

소방당국은 "화재 초기 문화재청이 '문화재가 손실되지 않게 신중하게 불을 꺼 달라'고 해 적극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밤 9시35분쯤에야 문화재청으로부터 "진화가 우선이니 숭례문 일부를 부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이미 불길을 잡기엔 늦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진화는 현장의 진화책임자가 상황을 판단, 결정하는 것"이라고 소방당국 쪽으로 책임을 미뤘다.

문화재청은 "200억원을 들여 2~3년이면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문화와 문화재의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조선 태조 7년(1398년) 세우고, 세종 29년(1447년) 고쳐지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견뎌내고, 6·25전쟁의 민족비극을 지켜봐 왔던 우리 역사의 증인인 숭례문은 영원히 사라졌다. 새로 세워지는 숭례문은 원래 것과 모양만 비슷한 21세기 건축물일 뿐이다.

국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 역시 쉽게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나라의 얼굴이 어이없게 타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경제대국이라고 거들먹거렸던 이 나라가 사실은 모래 위에 세워진 허상(虛像)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뼈에 저미듯이 절절이 느꼈다. 서울 사는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뭐라 부르며 어떻게 이 나라를 믿을 수 있겠는가.

 

 

 

원문출처 : 교도통신 "밤에는 경비도 없는 국보 1호"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20.html
도쿄=정권현 특파원 khjung@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이태훈 기자 libr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8.02.12 00:55외신들은 '600년 풍상을 견뎌온 한국의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이 단 5시간의 화재로 하룻밤 새 무너져 내렸다'며 주요 뉴스로 전했다.

NHK 등 일본 방송들은 남대문이 화염에 휩싸여 있는 장면을 현장 리포트로 전하면서, 화재 현장 주변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진화 장면을 지켜보던 시민들의 반응을 보도했다.

일본 언론들은 불타버린 남대문이 지어진 지 600년이 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고 소개하면서 주변에 대규모 남대문시장이 있어 일본 관광객들의 명소라고 전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남대문의 전소(全燒) 붕괴에 한국 사회가 강한 충격을 받고 있다고 전하면서, 남대문을 복원하는 데는 적어도 2년 이상이 걸릴 것이며, 200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고 추정했다. 교도통신은 남대문은 국보 1호인데 소화기 이외의 소방설비가 없고, 심야에서 아침까지는 경비원도 없다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어린 학생부터 평범한 서민들까지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국가적 상징을 전율하며 바라봤다"고 전했다. 통신은 또 "남대문은 매일 외국인을 태운 수십 대의 관광버스가 와서 서는 명소였으며, 인근에 같은 이름의 전통 시장으로 연결되는 한국 관광산업의 중심이었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남대문은 일본의 잔인한 식민 통치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역사적 건축물이었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 국영 베르나마 통신은 11일 '한국인들이 국보 1호 남대문의 붕괴를 애도하다'는 제목의 서울발 기사에서 "음력설 이후 첫 월요일 아침, 깊은 슬픔이 서울의 거리를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아랍어 위성뉴스 채널 알자지라는 "화재가 서울의 역사적 건축물 남대문을 파괴했다"며 "많은 방문객이 검게 타버린 잔해 앞에서 슬퍼했다"고 전했다.

 

 

 

 

원문출처 : 정도전이 지은 이름… 태조실록 '속칭 남대문'이라 적어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05.html
이덕일 역사평론가
입력 : 2008.02.12 00:51숭례문이란 이름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이 지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서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지은 것이다. '태조실록' 5년 9월조는 '속칭 남대문'이라고 적어 남대문이 일제의 비칭(卑稱)이 아님을 말해준다. 세종 29년(1447)과 성종 10년(1479)에 중수했는데, 중종 31년(1536)에는 문신 김안로(金安老)의 건의로 종을 달아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 종은 곧 울리지 않게 되었다. 폐사(廢寺)에 방치되었던 종을 가져다 달았는데, 종소리가 동남쪽의 지맥(地脈)을 제압해 국가 운수에 불리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 종은 명종 18년(1563)에 사라진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의 분부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졌다가 어느 사찰에 전해진 뒤로는 행방을 알 수 없다.
  • ▲ 펜화 작가 김영택씨가 그린‘숭례문’(2007년작). 김씨는 구한말 사진과 현장 답사를 바탕으로 서울에 전차와 전봇대가 들어서기 직전인 1900년의 남대문을 정밀하게 재현했다. /김영택씨 제공

숭례문은 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이 음방(陰方)으로 여자의 방위라면 남문인 숭례문은 양방(陽方)으로 남자의 방위였고, 8괘로 숙청문은 '감(坎)'괘로서 물을 뜻하고 숭례문은 '리(離)' 괘로서 불을 뜻했다. 양방의 숭례문은 늘 개방한 반면 음방의 숙청문은 가뭄 때만 열었다. 실록에서 "날이 가물어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문 남쪽에 만든 연못이 남지(南池), 또는 연지(蓮池)였다. 숙종 32년(1706)에는 연못의 물빛이 푸르다가 붉게 변하면서 끓는 물처럼 뜨거워져 고기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다른 대문의 편액이 모두 가로로 썼지만 숭례문만 세로로 쓴 것도 불이 타오르는 형상을 나타낸 것인데, 사신을 맞는 장소이므로 서서 맞는 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 명작으로 유명한 숭례문 편액을 쓴 이는 아직 논란거리다. 오세창(吳世昌)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유진동(柳辰仝:1497~1561)의 글씨라고 말했지만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고 전하고 있는데,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崇禮門(숭례문)' 탁본이 남아 있다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편액을 잃어버렸는데 남지에서 밤마다 빛이 나 파보니 숭례문 액판이 묻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편액은 조선 전기 명필인 정난종(鄭蘭宗:1433∼1489)의 글씨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정난종의 글씨라면 3년 전 화재 때 녹아버린 낙산사의 종명(鐘銘)도 그의 글씨이니 우리 시대와는 악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건재했던 숭례문이 우리 시대에 타버린 것은 선조들은 물론 후손들에게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 중의 수치이다. 번드르르한 외양만 추구할 뿐 기본에는 허술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다시 보여준 것이다. 세종 15년(1433)에 숭례문 밖에 군포(軍鋪)를 지어 순라군들을 상주시켰다. 복원하는 숭례문에는 연못도 만들고 군포도 지어 사람이라도 상주시켜야겠다. 현판이라도 건진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원문출처 : 실측도면 있어 희망적… 복원 2~3년 걸릴 듯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02.html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8.02.12 00:46

화재로 무너져 내린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의 복원 공사는 어떻게 진행될까. 전문가들은 대체로 "자료가 보존돼 있기 때문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보(國寶) 지위는 일단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문화재청의 방침과는 달리 원형대로 복원하더라도 국보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거의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지정 해제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3년 동안 200억원 들여 복원

문화재청은 11일 오전 숭례문 현장에서 문화재위원회 긴급회의를 열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내놓지 못한 채 '숭례문 복구 기본방침'을 발표했다. ▲남아 있는 부재(部材)를 최대한 다시 사용해 숭례문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이를 위해 문화재위원과 소방관계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복원자문위원회를 만들며 ▲기존 부재의 구체적인 사용범위는 현장 확인조사와 자문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추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김상구 문화재청 건축문화재과장은 "대체로 원형을 복원하는 데 2~3년, 예산은 200억원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또 일제강점기에 변형됐던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도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초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내놓은 주먹구구식 방침에 이미 2년 전부터 계획된 성벽 복원 내용을 슬쩍 끼워 넣은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 10일 화재 때 바닥으로 떨어진 숭례문 현판이 고궁박물관에 임시로 보관돼 있다. 형체는 겨우 보존됐지만 곳곳에 금이 가고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현판을 박물관 직원이 살펴보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쓸 수 있는 부재, 10%도 안 될 것"

남은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현 상황대로라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김동현 문화재위원은 "(숭례문 누각의) 1층에는 그런대로 화재에서 살아남은 부재들이 많이 있고, 2층에서도 일부 포부재(包部材)는 화를 면했다"고 말했다. 포부재는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맞춰 댄 나무쪽인 공포(?包)를 구성하는 부재다. 그는 "겉만 조금 그을린 나무라도 최대한 복원에 활용하기로 했지만, 그게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타지 않은 부재들도 물에 너무 많이 젖었기 때문에 다시 쓰기 어려울 것이고, 활용할 수 있는 부재는 10% 미만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무거운 부재가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기 때문에 석축도 구조안전진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옛 숭례문 부재 중 2005년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옮겨져 보존된 서까래·포부재·기와 등 350여 점이 있지만, 부러지거나 부식돼 복원 작업에는 쓸 수 없는 상태다.

◆실측 도면으로 복원한다고 국보 유지?

숭례문의 원형 복원 과정에서 기본이 되는 자료는 지난 2006년에 나온 182장 분량의 정밀 실측 도면이며, 참고자료로는 1965년에 발간된 수리보고서가 활용될 계획이다. 정밀 실측 도면은 당시 숭례문의 모형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후대에 숭례문이 파괴될 경우라도 복원을 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리보고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원하기 위해 1961~1963년 이뤄진 대규모 보수공사의 보고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실측 도면을 통해 원형대로 복원하게 되면 국보 지위에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5년 산불로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이 복원을 했는데도 보물에서 해제된 등의 전례를 볼 때 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원문출처 : 천장 속으로 번진 불길, 지붕구조 몰라 놓쳤다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2/2008021200187.html
이재준 기자 promeju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8.02.12 01:44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남대문)은 수십 대의 소방차와 소방대원들이 동원됐고, 불을 진압할 시간이 충분했음에도 왜 불길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까. 11일 숯덩이처럼 변해버린 숭례문을 둘러본 전문가들은 초기대응에 실패했기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 국보 1호인 숭례문의 구조와 특징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통 지붕 양식 몰랐다


불을 끄기 위해 숭례문 2층에 들어간 소방대원들은 연기만 나는 것을 보고 불길이 어느 정도 잡힌 것으로 간주했다. 결국 다시 불길이 점화되는 것을 막지 못해 숭례문이 전소(全燒)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경원대 박형주 교수(소방방재공학과)는“소방대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내용이 노란색 연기가 나는데, 붉은 불씨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며“이는‘적심목’이란 우리나라 전통적인 지붕 양식을 소방대원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남대문 2층 지붕은 전통 건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기와·보토(30~60㎝ 진흙층)·적심목(지붕에 넣은 원목)·개판·회반죽(1㎝ 두께)·서까래’인 6겹으로 되어 있다. 지붕에 들어가 있는 나무 구조물인 적심은 밑에선 개판·회반죽에 가려 보이지 않고, 위에서도 지붕과 진흙층에 가려져 있다. 박 교수는“소방관들이 보았다는 노란색이나 검은색 연기는 적심목이 타 발생한 것”이라며“지붕 내부에서 타고 있더라도 밖에선 불길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보통 나무가 탈 때엔 흰색 등의 연기가 나지만 진흙 등에 덮여 있는 적심목은 산소가 부족해 불완전 연소하면서 노란색 등의 연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 그래픽=신용선 기자 ysshin@chosun.com, 송윤혜 기자 ssong@chosun.com

한국 전통 건축 전문가인 고려대 주남철 명예교수(건축공학)는 때문에“적심목에 옮아 붙은 불을 끄려면 지붕 가장 밑부분인 1㎝ 두께의 개판·회반죽 부분을 완전히 들어내고 밑에서 물을 쏘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소방관들이 회반죽과 기와에 가려 있는 적심목의 존재를 몰라 불길을 일찍 차단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기와·진흙층 먼저 걷어냈어야


문화재 전문가들은 “지난 1961~63년 숭례문 보수공사를 할 때, 기와 바로 밑에 있는 진흙층인 보토에 석회 성분을 많이 넣었다”고 말했다. 진흙에 석회를 섞은 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습기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소방관들이 외부에서 엄청나게 물을 뿌려 댔지만, 내부에선 오히려 불길이 활활 번져나갔다. 전문가들은 숭례문 지붕으로 번진 화재를 잡기 위해서는 지붕 맨 윗부분인 기와·보토 부분을 먼저 걷어낸 뒤 물을 뿌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소방당국 말이 안 통했다


숭례문이 잿더미가 되기까지 5시간17분 동안 문화재 보존 책임이 있는 문화재청과 화재 진압 책임이 있는 소방당국의 의사 소통은 꽉 막혀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지, 책임자가 언제 현장에 도착했는지조차 서로 말이 다르다.


본지가 입수한 소방당국의 화재 당일 일지에 따르면 문화재청(대전광역시)에 숭례문 화재 발생이라는 비상연락이 간 것은 오후 8시56분. 문화재청 담당자가 화재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10시4분이다. 불이 난 지 1시간8분이 지나서야 현장에서 소방당국과 문화재청의 공조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현장 소방관은“숭례문은 문화재여서 우리 마음대로 판단해 진화작업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화재 초기 소방당국에 “국보 1호이기 때문에 조심스럽 게 화 재 를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불길이 커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문화재청은 불이 난 지 47분여가 지난 오후 9시35분이 돼서야“남대문이 훼손돼도 상관없으니 적극적으로 불을 꺼달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소방당국은 문화재청의 통보를 받고도 2시간5분이나 지난 11시40분에서야 지붕 기와 일부를 들어내는 작업을 벌였다.


한국화재소방학회 손봉세(경원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학회장은“화재초기에 처음부터 두 기관이 화재현장에서 도면과 진압방식에 대해 실시간으로 교환하고 대화했다면 이처럼 문화재 전체를 태워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문출처 : '국보 1호' 남대문 전소
 원문링크 : 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1/2008021100315.html
연합뉴스 입력 : 2008.02.11 02:32 / 수정 : 2008.02.11 16:44
▲ 10일 밤 숭례문에 화재가 난 가운데 긴급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재를 진압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대문은 목조 기와집 구조여서 화재가 발생하면 먼저 기와부터 깨면서 진압을 시도해야 하는데도, 국보 1호 문화재라는 이유 때문에 소방 당국이 주춤거리며 적극적으로 화재 진압에 나서지 않아 결국 전소·붕괴 사태를 야기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남대문을 비롯한 기와지붕 구조 건축물의 경우, 기와 아래에 황토 층이 있고, 그 아래에 대들보와 기둥 등 목조 구조물이 있다. 때문에 기와집에 불이 나면 기와 아래에서 나무들이 타기 때문에 지붕 위와 아래에서 아무리 물을 쏴도 기와 바로 아래의 불은 잘 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는 게 소방 및 건축 전문가들 설명이다. 특히 목조 건물은 불이 꺼진 듯 해도 다시 살아나는 특성이 있어 진압이 더 어렵다고 한다. 소방방재청 고덕근 소방경은 "그렇기 때문에 소방관들은 일반 기와집에 불이 나면 기와지붕부터 뚫어놓고 소방호스를 집어넣어 물을 쏟아 붓는 작전을 쓴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방당국은 남대문이 국보 1호 문화재여서 섣불리 기와를 깨고 소방호스를 집어넣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출처 : 무너지고 불탄게 너뿐이랴… 역사 홀대한 우리의 업보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1/2008021101756.html
김병종 서울대 교수·화가
입력 : 2008.02.11 23:15 / 수정 : 2008.02.12 02:35
  • 오, 숭례문이여. 이 죄를 어찌할꼬. 대체 어찌할꼬. 600년의 세월을 민족과 함께했던 그 문은 무너져 버렸다. 검은 연기와 불길 사이로 그렇게 내려앉았다. 호기롭던 양녕대군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곱고 단아하던 단청들은 불길의 혀가 삼켜버렸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던 누각은 검은 그림자처럼 흔들리다 사라져 갔다. 임진왜란의 전화 속에서도, 6·25의 포화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민족과 명운을 함께했던 그 역사의 문은 처연하게 무너졌다. 무너지고 불탄 것이 어찌 집뿐이랴. 불탄 기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때 우리의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세계에 나가 높은 집을 짓는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는 다만 부끄럽다.

    숭례문. 애초에 그것은 세월을 이고 선 왕조의 집 한 채만은 아니었다. 그저 숨결 없이 서 있는 흙과 나무로 된 누각일 뿐이었다면 이 억장 무너지는 슬픔을 설명할 길이 없다. 차마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흐린 구름이라도 겹겹이 드리워 동터 오는 하늘빛을 막아주었으면 싶었던 참담한 마음 또한 설명할 길이 없다. 국보 1호라서, 2호보다 더 소중하다는 그런 숫자놀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혈육이었고 숨결이었음을 차마 뉘라서 부인할 수 있으랴.

  • 숭례문이 시커먼 잔해만 남은 모습을 드러내자, 11일 많은 시민들이 마치‘숭례문의 죽음’을 애도하듯이 숭례문 잔해 앞에 조화를 놓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1398년 조선왕조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이후, 숭례문은 늘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공사를 통해 상처와 흉터들을 제 안에 간직한 채로, 한민족의 영광과 고난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함께해 왔다. 이 땅과 백성들이 찢기고 아파하고 울부짖던 순간순간을 같이 견뎌내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했던 시절에도, 기적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던 시절에도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고 달랑 가방 하나 들고 서울역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에게는, 설렘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민초들의 발길과 숨결이 닿는 바로 곁에서 한 식구처럼 볼 것, 못 볼 것 죄다 보아오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 장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수더분한 낯빛으로 우리와 눈을 맞추어왔다. 민족의 자랑이자 상징으로서, 역사의 증언자로서 언제까지나 함께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라져 버렸다. 말없는 것들은 이렇게 사라지고 나서야, 남은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는가.

    오늘 숭례문을 불태워버린 것은 바로 우리다. 역사의 유물로만 밀쳐두고 진정 가슴에 담아 귀히 간직할 줄 몰랐던 우리의 업보이다.

    재난의 기억은 유난히 빨리 잊혀진다. 불길에 휩싸이던 낙산사의 기억도, 수원 화성의 화재도 우리는 잊어버렸다. 숭례문의 불길은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내린 아픈 채찍이다.

  • 김병종 서울대 교수
  • 더 이상은 부끄러운 일들을 잊지 말자. 무너진 자리에 숭례문의 역사를 다시 세우자. 우리의 부끄럽고 아픈 오늘을 후손들에게 낱낱이 전하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복원하자. 이것이 그나마 역사 앞에 속죄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우리 곁을 떠나간 숭례문이여.

    하늘은 잔뜩 흐리고 차마 나는 얼굴 들고 조사(弔辭)나마 읽을 수가 없구나.

    용서하라 숭례문이여. 미안하다 숭례문이여.

 

 

는 국민의 피눈물을 먹고 사는가.   아! 숭례문.

 

 

386 세대이던지 457세대이던지 그들은 민방위 훈련을 알고 있다.
물론 예비군 훈련도 거쳐간 그들이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과도 같은 행태로 남아있지만 무지한 인내력과 한심한 작태의 분노를 함께한 시간들 이었다.
그렇게 국가는 국민들의 애닮은 시간을 빼앗아 갔으며

당장이라도 북한군이 쳐들어 올것 같은 교육들을 한심한 강사들을 통해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화염방사능 훈련, 화재훈련 등도 간간히 실시 됐는데 대기업 공장이나 큰 건물에서도 실시 됐었다.

 

 

                 남대문1.jpg

 

 

 

                            아. 우리의 남대문.


썩어빠진 그 민방위 합동훈련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해 그렇게 남대문을 화마속에 사라지게 하다니....

남대문 화재진압 훈련만 제대로 연습했더라도 그 지경은 안됐을것을....

 

두 기관 공무원들이 조그만 똑똑했더라도...   조금 부서지더라도 적어도 불은 꺼야 된다는 사고를 가진

공무원...   너무나 평범한 공무원 한명만 있었더라도....

 
너무나 분통이 터지고 울분만이 가득할 뿐이다.

 

미국의 한인 언론들도 하루종일 특별방송 등을 급편성하고 여러 의견들을 수렴하는가 하면 발빠른 곳에서는

벌써 남대문 건축기금 마련 행사에 나서기도 했다.


많은 미국의 한인들은 9.11을 다시 보는것 같아 끔찍했다고 한다.

파리의 개선문, 로마...  영국... 미국... 중국 ....

 세계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귀한 유물을 우리는 오늘 잃었다 영원히....

 

인재, 그것은 화재도 아니고 지변도 아닌 인재 바로 그것이었다.
그나마 소방대의 빠른 ? 출동으로 어지간한 불도 진압할수 있을 그런 상황이었다.
화재 발생 30분....  1시간...  긴급뉴스 화면으로 보여진 남대문은 좌즉 지붕위에서 연기가 조금 스며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이미 건물내부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을 뿜어대고...  뭔가 조사를 하기도 하고....

그러나 끝내 우리의 남대문은 무너져 내렸다.

 

 * 인재의 문제점

 

1.문화재청과 소방서 간 대화가 길어져 시간을 놓쳤고 (지붕을 뜯고 물을 부을것인가의...)
2.구조를 몰라 지붕위와 처마에 물을 한없이 부었지만 바람만 부은 격이 되어 불난곳에 부채질 하는 꼴이 되었고
3.문화재청과 소방서에 한 사람의 현명한 판단을 할 인재가 없어 방법과 결단의 시기를 놓쳤으며
4.국가 상징물에 단 한번의 민방위 훈련만 제대로 했었어도 (화재를 대비한)
우리의 국보 1호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 사후 약방문

 

1.범인을 잡는것은 별의미가 없다. 어떤 미친자의 소행에 불과 하거늘...
2.예산과 인력이 부족했다는것도 공무원들의 후렴 구절에 불과하고
3.보험료가 적다는것도...
4.스프링클러가 없다,  cctv가 없다, 경비가 없다는 등의 말은 한국의 문화재 관리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고 역사를 중요시 않는 정부의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의 냄비언론 그만 떠들기를...)

5.유홍준청장이 호화관광을 다녀왔든,  이명박 서울시장의 밀어붙이기식의 남대문 개방이 문제이든

 그런것조차 국민들에게 관심도 없다. 이제와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가....

 

그러나 국민들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야 했고 눈물속에 우리의 자존심도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어느 나라가 이런 치욕을 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가.

 

그리고 또한번 국민들은 국화를 헌화하고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제 또다시 국가는 국민들에게 성금모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고 한다.

결국 위정자 몇몇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국민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멍울진 가슴으로

모금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정녕 언제까지 국민의 피눈물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고은 시인은 이렇게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머리 풀고 울어에야 하리

옷 찢어 던지며 분해야 하리

오호 통재

이 하루아침 남대문 폐허를

어찌 내 몸서리쳐 울부짖지 않으랴

돌아보라

6백년 연월 내내 한결이었다

이 도성 남녀노소들 우마들

이 나라

이 겨레붙이 모진 삶과 함께였다

혹은 청운의 꿈 안고 설레어 여기 이르면

어서 오게 어서 오시게

두 팔 벌려 맞이해 온 가슴인

나의 남대문이었다

혹은 산전수전의 나날 떠돌이 하다

여기 이르면

어디 갔다 이제 오느뇨

활짝 연 가슴 밑창으로 안아줄

너의 남대문이었다

단 하루도 마다하지 않고

단 하룻밤도 거르지 않고 지켜서서

숙연히

감연히

의연히

나라의 기품이던

저 조선 5백년

저 한민족 1백년의 얼굴이었다

온 세계 누구라도 다 오는 문 없는 문

온 세계 그 누구라도 다 아는

만방 개항의 문

정녕 코리아나의 숨결

서울 사람의 눈빛 아니었던가

이 무슨 청천벽력의 재앙이냐

이 무슨 역적의 악행이냐

왜란에도 호란에도

어제런듯 그 동란에도

끄떡없다가

이 무슨 허망의 잿더미냐

여기 폐허 땅바닥에 엎드려 곡하노니

여기서 주저앉지 말고 멈추지 말고

떨쳐 일어나

다시 바람 찬 천년의 남대문 일으켜낼지어다

여봐란듯이

저봐란듯이

만년의 내일 내 조국의 긍지 우뚝 세워낼지어다


                                -  남대문 폐허를 곡함  -

 

 

 

무너지고 불탄게 너뿐이랴  역사 홀대한 우리의 업보


"용서하라 숭례문이여"… 김병종 교수가 바치는 弔辭 도 함께 올립니다.


오, 숭례문이여. 이 죄를 어찌할꼬. 대체 어찌할꼬.

600년의 세월을 민족과 함께했던 그 문은 무너져 버렸다.

검은 연기와 불길 사이로 그렇게 내려앉았다. 호기롭던

양녕대군의 글씨가 새겨진 현판은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곱고 단아하던 단청들은 불길의 혀가 삼켜버렸다.

 

하늘을 향해 날렵하던 누각은 검은 그림자처럼 흔들리다 사라져 갔다.

임진왜란의 전화 속에서도, 6·25의 포화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아 민족과 명운을 함께했던

그 역사의 문은 처연하게 무너졌다. 무너지고 불탄 것이 어찌 집뿐이랴. 불탄 기와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릴 때 우리의 마음도 함께 무너지고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세계에 나가 높은 집을 짓는다고 자랑하지 말아라. 오늘 우리는 다만 부끄럽다.


숭례문.

애초에 그것은 세월을 이고 선 왕조의 집 한 채만은 아니었다.

그저 숨결 없이 서 있는 흙과 나무로 된 누각일 뿐이었다면 이 억장 무너지는 슬픔을 설명할 길이 없다.

 

차마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워 흐린 구름이라도 겹겹이 드리워 동터 오는 하늘빛을 막아주었으면

싶었던 참담한 마음 또한 설명할 길이 없다.

국보 1호라서, 2호보다 더 소중하다는 그런 숫자놀음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혈육이었고 숨결이었음을 차마 뉘라서 부인할 수 있으랴. 

 

 

            남대2.jpg

 

 

 

1910년_사진_033.jpg

1920년대 남대문

 

1933사진_015.jpg

1933년에 찍은 사진.  

일제가 도로 확장을 하고 전차 선로도 놓고

성을 헐어내고 남대문을 현재 모양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읍니다.

 

2008년.jpg

1970년대 모습.

 

쌘프란시스코 동포사회에도 충격. 충격.

우리가 느낀 충격은 미국인에게 있었던 9.11충격에 버금갑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미국뉴스에서 언급할때 마다 자존심 상하고, 상처입고.

그렇게도 잘 보존해 오던 남대문이 개방 수년만에 사라지다니.

아무 예방책도 없이 일반에게 개방해 놓은 정책이 원망스럽습니다.

복원, 복원들 하지만 이제 다시 짖는다면 재현 이겠지요.

동포사회 라디오에서 뉴스를 전하면서  

모금운동이 시작 되었읍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생긴 건축물

아! 남대문

 

 

 

민족사관 정립한 朴正熙대통령 


박대통령, 문화재 보호와 민족문화창달
 
(문화재보호와 민족문화창달**
이 글은 2000년 6월 8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鄭在훈 교수의 증언 녹취록임.)

- 필자 정재훈 -

 

 

저는 전통문화(傳統文化) 부분을 담당하는 문화재관리국의 공무원으로서
1963년부터 근무를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현충사(顯忠祠)를 보수 확장하여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유적을 정화(淨化)하라는 지시에 따라
문화재 관련사업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때 처음 지시한 것을 보면 국난극복(國難克服)의 정신(精神)을 고취(鼓吹)할 수 있는
민족교육(民族敎育)의 도장(道場)을 만드는 데 굉장히 많은 비중을 두었고,
그 다음에는 임진왜란 때의 항일유적(抗日遺蹟) 그리고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유적,
예를 들면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유적이라든지, 3.1 운동의 유적 등
이런 유적의 현장을 잘 정비하라는 지시들이
1966, 67, 68, 69년에서 70년대 초반까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했어요. 
“우리가 경제적인 부흥을 하려면 일본하고 경제적인 여러 가지 유대를 가져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의식(意識)을 가지고 일본을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사상 일본과 우리,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임진왜란 관련 여러 지역의 정화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閑山大捷)을 비롯하여
해전(海戰)에서 이긴 여러 지역의 유적으로서,
그 중에 아산 현충사가 서울에서 가깝고 일제시대 동아일보사가 거기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자” 하여 사당을 지어주고 정화한 게 있습니다. 
원래 아산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외갓집이고 가묘(家廟)가 있었던 곳인데
가묘는 집안의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곳(현충사)을 크게 확장을 했고
성역이라는 말까지 붙여서 정화를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일제식민지(日帝植民地) 사관(史觀)의 치욕을 극복하고자 하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국민정신(國民精神) 함양(涵養)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우리가 일본과 경제적으로 기계를 사온다거나
서로 교역을 해야 하고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정신적 바탕 위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시각(관점)에서 굉장히 여러 번 말씀을 하셨어요.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 유적지 시찰(77.4.29) 충의사


그 뒤 70년대 초반부터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 민족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思想家)의 유적을 현창(顯彰)하는 데 주력합니다. 
불교 쪽에서는 원효(元曉), 그리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고려의 대외 항쟁(對外抗爭)의 상징적인 것으로서,
그것이 세계적인 문화재인 동시에 인쇄문화의 기본적인 틀이며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쭉 내려오는 불교와 접합된
정신문화(精神文化)의 구심점(求心點)이라고 보시는 겁니다. 


그리고 조선에 와서는 주자학(朱子學)을 조선의 성리학(性理學)으로
그리고 조선의 철학(哲學)으로 발전시킨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 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 등을 기리기 위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 오죽헌(烏竹軒), 자운서원(紫雲書院),
원래 해주의 석담구곡에 은병정사를 지었던 유적인 율곡 선생의 서원이 있는데
이북에 있으니까 보수정비사업을 못하고….
그리고 필암서원(筆巖書院:전남 장성, 하서 김인후 선생) 등 정신사에 중요한 위인이나
사상적 체계를 유학적(儒學的),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하는 유적이라든지
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실학(實學), 추사의 글씨체라든지
한국(韓國)의 자주적(自主的)인 예술문화(藝術文化)의 근본(根本)이 되는
그런 유적도 정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전통문화를 제대로 계승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사업으로서는 대표적인 것이
1971년 ‘경주 개발(慶州開發)’이라는 큰 명제를 가지고
경주의 신라 문화 유적을 총괄 정리하는 사업을 전개한 겁니다. 
1971년부터 5개년 계획, 그 다음 5개년 계획, 1차 5개년, 2차 5개년 이렇게 했는데,
그 중에 굉장히 중요한 것은 그때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경주의 유적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때 청와대 정보비서관 권상하 씨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
대구사범에 다닐 때, 대구사범은 일제 때 관비(官費)를 주었기 때문에 여행비를 적립해서
일본의 경도(京都)나 나라(奈良)에 꼭 수학여행을 가야 되는 때가 되었는데 안 가고,
한국의 학생들만 빠져 가지고 경주의 유적을 쭉 답사하고 신라 문화 유적에 대한 체득과
화랑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경주 유적을 답사했던 사진을 보여준 일이 있어요.
그 사진을 보면 각반(脚絆)도 치고 학생모를 쓰고
김유신(金庾信) 장군묘 앞에서 찍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한 유적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우리의 문화 유적을 통해서 일본을 이기려면
우리의 정신문화나 문화 유적의 그 뿌리를 잘 알아야 되겠다는 의식이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진도 보여주었는데 아마 그 사진도 남아 있을 겁니다. 구미나 대통령 유족의 집안에….


박 대통령은 경주의 문화 유적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 당시 경주 문화 유적 개발을 담당하여 입안하는 실무자로서 참여를 했는데,
제가 13개 지역에 대한 경주의 유적을 설명하면 박 대통령께서는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체질적으로 어릴 때부터 체득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경주하고 대구가 가깝기도 하고….
박 대통령은 고고미술이나 고고학을 전공한 분이 아닌데,
일제시대 때 일본사관(日本史觀)으로 쓴 신라사나 한국의 전통미술사나 고고학에 대해서,
실지로 경주의 천마총(天馬塚), 98호고분, 안압지(雁鴨池), 월성(月城), 왕경지(王京地),
황룡사지(皇龍寺址) 등을 발굴하게 해서 전부 다시 쓰게 하여
자주적인 사관(史觀)으로 우리의 문화사(文化史)를 새로 정립하게 했습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신라 금관의 경우,
외관(外冠), 내관(內冠), 조익형 관식(鳥翼型 冠式)의 3가지를
금관총의 금관을 발굴하고 난 뒤에 꿰맞췄습니다. 
유물들은 일본 경찰관이 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때 그 발굴은 학술적인 계획 발굴이 아니고
집 짓다가 유물이 출토되어 긴급히 수습 발굴을 한 것입니다.

그 후 1926년 서봉총 금관을 발굴할 때는 계획 발굴을 한 것입니다. 
서봉총 금관은 금관 위에 십자로 투구처럼 돼 가지고 그 위에 봉황이 있습니다. 
그러면 신라 금관은 조익형 관식과 내관이 들어가는 금관이 아니라는 것을
서봉총 발굴결과로 이미 알았어요.

그런 것을 1926년 일제시대 때 발굴하고 난 이후
우리가 1973년 천마총을 발굴하기 전까지는 신라 금관의 형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신라 금관의 잘못된 형태를 가르쳤습니다.
이런 것을 전부 바로잡게 된 것은 경주의 유적에 대하여
고고학적 연구와 과학적 검증을 거쳐서 발굴을 했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유적, 발굴물)에 대한 보고서를 세계에 다 내놓았습니다. 

천마총 발굴 과정의 영화는 불어, 영어, 일어, 중국어로 온 세계에 상세하게
각 나라의 말로 더빙(dubbing)해 가지고 보냈습니다.
지금 소련 국립박물관이나 평양 박물관에도 천마총 발굴 과정의 (기록)영화는 있을 겁니다. 

그와 같은 것을 종합 정리해서 한국 미술 5000년 전(展)을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 독일 등
전 구라파에서 개최하여 한국문화가 일본문화 그리고 중국문화와 어떻게 다른가를
실증적(實證的)인 유물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그것을 부각시키고 선양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발굴유물 전시사업은
경제적 교역활동을 함에 있어 한국 상품이 전통성을 가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오랜 기술, 예술, 학술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군인이기보다는….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교육이 대단히 완벽한 교육(전인교육)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역사의식 같은 게….
왜 그러냐 하면, 박정희 대통령께서 1960년대에 고속도로(高速道路)를 낼 때,
대구에서 경주 구간에 고분(古墳)이 많이 걸렸습니다. 
‘방내리에 고분’이 64기를 발굴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건설부장관이나 건설부 쪽의 사람들은 보이는 모든 것은 그냥 고속도로뿐이고
그날 그날의 사업 진척만 눈에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 건설부 쪽 사람들은 그대로 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문화재를 담당하는 계장(문화재관리국)인데,
대통령께 그대로 밀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을 보고드렸습니다.

보고드린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한림(李翰林) 건설부장관한테
“다 발굴하여 조사하고 난 후에 공사를 진행하라”고 했습니다. 
건설부에서는 깜짝 놀랬어요. 
그 당시 제일 우선 순위가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京釜高速道路)를 만드는 것인데,
그보다 더 귀중한 우선 순위의 사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6개월이나 그 공기(工期)가 지연되었어요.
경주에서 대구간의 고속도로 공사가 그 당시에 6개월을 지연할 경우
그때 건설부가 계산한 것을 보면,
중기 손료(重機損料)만 하루 4,000만 원이라고 계산돼 있었어요.
그 구간에 투입된 모든 중장비라든지 토목공사를 맡은 회사가 놀게 된다 말이죠. 
발굴하는 기간 동안… 그 기간이 6개월인데….

이 일이 있은 후에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을 개정하여
고속도로나 모든 국토개발 과정에서 문화유산이 있으면
시공자가 부담을 하여 모두 발굴한 다음 공사를 하라는 것이었고,
이것이 대통령의 지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높은 곳에(제일 높은 가치) 민족문화유산(民族文化遺産)을 두었습니다.
즉 민족문화사업(民族文化事業)은 어떠한 사업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정립한 겁니다.


광화문 준공식(68.12.11)


그러한 것 중에 또 하나는 창원 공업단지를 만들 때입니다. 
거기에 성산 패총(貝塚)이라는 큰 산이 하나 있습니다. 
패총(조개무지), 옛날에 그게 초기 철기 시대의 쓰레기통입니다.
그걸 발굴 조사했는데 거기에서 칼도 많이 나오고 성곽(城郭) 유적이 나왔습니다.

원래 그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서 ‘창원 공업단지’를 만들려고 한 겁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현장에 오셔서 보고,
그 산을 깎아 뭉개지 말고 그 산을 사적(史蹟)으로 지정해서 잘 보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산을 깎아서 매립하려고 했던 흙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전부 다른 곳에서 흙을 갖다가 메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창원 공업단지의 조성이 1년 이상 늦어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도 그것(패총)을 보존했습니다. 
지금도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존되고 있어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은
안압지(雁鴨池), 불국사, 월성(月城), 천마총(天馬塚), 98호고분(古墳), 이런 발굴 현장은 물론
성산 패총 발굴 현장에도 오셔서 우리를 많이 격려해 주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는 대통령이면 누구나 발굴 현장에 와서 격려해 주시는 것이
하나의 관례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사실은… 그 뒤에 여러 대통령을 모시게 되면서 발굴 현장에 대통령이 와서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고고학이나 미술사 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박 대통령은 역사의식이나 민족문화에 대한 열정이 있고
그것을 잘 보존해야 된다는 마음이 굉장했어요. 

+++
1970년대 초반에는
“전국의 모든 문화유산을 조사해라, 그것을 가지고 문화재 관리행정의 체계를 잡아라.” 
그래서 우리 나라의 모든 문화 유적을 조사하게 된 겁니다. 
지금 문화재관리청의 모든 관리행정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게
 ‘전국 유적 총람(全國遺蹟總覽)’입니다. 
그걸 박 대통령이 지시해서 한 거예요.

그때 보면 대통령은 그런 일을 그냥 자기가 책도 안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대통령 집무실에 공사투시도(工事透視圖)를 가지고
여러 번 보고하러 간 그때의 실무자인데,
집무실에 가면 컴컴한 방에 아주 지방학교의 교장선생님실 같이 그렇게 돼 있어요. 
그 방이… 그 방에 깔린 마루가 있는데 디디면 삐걱삐걱했어요. 
그게… 못이 오래 돼 가지고 사람이 디디면 푹 내려가고 올라오고….
대통령 집무실은 그저 한 8평 정도? 내 눈짐작으로는….
그리고 옆의 벽에 서가가 있는데 한 벽에 보니까
우리 나라 문화유산, 문화재에 관한 책이 제일 많이 꽂혀 있었어요. 
그걸 늘 빼 보시기 때문에 거기 손때가 제일 많이 묻어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 저는
‘아! 우리 나라 대통령이 우리 나라 문화유산에 관한 책을 읽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고…
그리고 삐걱삐걱하는 그 마루를 안 고치고 있더라구요. 
<

저는 1973년부터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소장으로서
경주에 있는 문화 유적의 발굴과 정비하는 때에 책임자로 있었는데,
그때도 경주 오시면 저는 소장이니까 점심시간에 끼여 들어 멤버가 돼 가지고
점심을 먹기도 했는데, 보면 굉장히 검소합니다. 
꼬리곰탕 같은 것 좋아하시고, 그리고 번거롭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시는 게 아니고….

그전에도 한번은 대통령께서 국립중앙박물관 건립, 경복궁의 지금 박물관이
중앙박물관으로 건립된 거요. 
그때 투시도를 그려 가지고 가서 공사계획을 설명하니까
그 투시도가 굉장히 좋다고 하시면서 집무실에 못을 박고 걸라고 하시더라구요.
집무실에 못을 박고 걸었어요. 그 뒤에 떼어 왔지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이 왜 투시도를 대통령 집무실에 거느냐 하지만,
물론 미술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거는 기준으로 볼 때 투시도를 걸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분은
‘우리 나라의 문화유산을 보존 전시할 국립박물관의 건립공사 투시도가
아름다운 경관을 그린 화가의 그림보다 훨씬 실질적이고 그게 꼭 필요한 것이다’
라는
대통령의 정책적 측면이 있었어요. 


그때 대통령께서 우리 나라 건축양식으로 좀 지으라는 말씀도 있어서
그 뒤에 박물관을 우리 나라 건축양식으로 짓다보니까 기둥도 많이 걸리고
문제가 되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는 굉장히 강했습니다. 
그런데 전통조경(傳統造景), 그때는 조경하라는 지시가 많았어요. 
산이 헐벗어 있으면 난리가 났습니다.

+++
사적지 정비사업은, 처음에 많이 추진한 사업은
현충사(顯忠祠), 제승당(制勝堂), 임진왜란(壬辰倭亂)의 3대첩지인 진주성(晋州城),
행주산성(幸州山城) 등 이런 유적지들입니다. 
서울성(城)도 75년에 복원 정비한 겁니다.
서울성이 다 허물어졌던 거지요. 위의 여담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걸 할 때, 대통령은 꼭 자기가 지시한 사항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설계도를 보자고 그러신다고요. 간단한 설계도를….
그러면 우리가 설계도를 30장, 40장 가지고 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여러 장의 투시도를 그립니다. 
그때 내가 그 시대를 ‘투시도 시대’라고 했는데,
투시도를 가지고 가면 그게 단면, 측면, 평면… 군대에서 지도를 읽는다든지
도면을 보는 수준이 굉장히 높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설명하면 딱 알아요. 
아, 이게 길이가 얼마구나, 넓이가 얼마구나, 어떤 집을 짓는구나, 성을 어떻게 쌓는구나.
투시도를 쭉 보면서 대통령이 지시한 사항을 철저히 이행하는가, 안 하는가를 검증을 해요. 
그 다음 공사하는 과정에 현장을 꼭 보십니다.
아니면 청와대 수석비서관이라도 꼭 내보내요. 
현장에 가서 공사진행사항이 원래 설계도대로 잘 되는지?
그 일을 하는 데 무엇이 걸림돌이 되는지? 예산이 부족하지 않은지?
이런 걸 전부 해결해 줍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탄신 422주년 기념식 및 충무로 계통식 1967. 4. 28


70년대 언젠가 한번은 경제기획원에서 예산 편성을 해서 대통령께 최종보고를 하였는데
경제기획원장관한테 1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조정하게 하였어요.
그때 우리 문화재관리국의 총 예산이 100억 원이 안 될 때인데,
민족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수십억 원의 사업 예산을 증액하여 추진한 일이 있어요.

요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경주의 많은 들판을 1973년부터 사들여 가지고 사업을 했는데,
5년 동안 사들인 게 26억 원밖에 안 들었습니다. 수십만 평을 사들였는데도 말이죠. 
지금 황룡사지 그런 데가 다 그때 도시였습니다.
지금 100여 동의 민가를 철거하고 그것을 다 사들이려면 몇 조 원이 들 거예요. 
민족유산의 보존을 위해 사적지로 지정된 유적지를 가장 많이 국유지로 사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민족문화유산을 보전하기 위해서
굉장히 멀리 내다보는 정책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물론 강화유적(江華遺蹟)과 같이
국난 극복이나 대외 항쟁, 이런 것은 군사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제주도에 가면 ‘황바두리성’ 같은 것을
삼별초의 대몽(對蒙) 항쟁(抗爭)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한다든지,
고려궁지(高麗宮址) 이런 것도 우리가 몽고(蒙古)하고 싸웠다.
소위 말하는 그 당시 전세계를 제패한 ‘징기스칸’의 군대하고 싸웠다.
그런 기백은 위대한 것이다. 이런 시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사상적 체계를 세운다든지
또는 우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근간을 만든다든지,
문화유산 보존의 근간을 만들었습니다.


‘정신문화원(精神文化院)’도 만들어 가지고
그때 만들어 놓은 민족문화백과사전(民族文化百科事典)이,
지금 사실은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정립시킨 중요한 역사적 사업입니다. 
그게 만일 없었다면 정말 지금 세계화 전략에 있어서
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데 굉장한 문제가 왔을 거예요. 
그런 측면의 일들을 차근차근히 굉장히 많이 했고, 그런 일 하는 사람들을 존중했어요. 
왜냐하면 국무회의를 하고 난 뒤에 대통령이 장관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이선근(李瑄根) 박사한테 그때 문화재 위원장인데,
맨날(항상) 강의하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장관들이 한 시간씩 강의를 듣는 거예요. 문화사하고 역사를….
그리고 대통령 자신도 김재원(金載元) 박사라고 국립박물관장한테
한국미술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어요. 대통령 내외께서….
그런 것을 듣고 5대궁(五大宮)의 비원 같은 것을 정비하는 것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한 겁니다. 처음에… 5대궁에…. 
왜냐하면 그때는 우리의 한 해 예산이, 내가 1963년에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가니까
전국 문화재에 대한 연간 보수비가 총 1,300만 원이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때 대통령이 그러한 지시를 안 한다거나 정책적인 배려를 안 하면
돈이 많이 드는 문화유산의 한 부분을 보수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입장이었습니다.

6.25 전란이 일어난 이후 우리가 처음으로 61년, 62년에 고친 것이
강진의 ‘무의사 극락전’이고 두 번째 고친 게 서울의 ‘남대문(南大門)’이에요. 
6.25 때 부서진 남대문을 언제 고쳤느냐 하면 60년대 초에 고쳤습니다. 돈이 없으니까….
그 다음 ‘석굴암(石窟庵)’을 보수했어요. 1962년, 1963년에….
그러니까 1967년부터 문화 유적에 대한 철저한 정비를 하게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화하라고 지시한) 이러한 항일(抗日) 유적이나 문화 유적을 보면
어떤 전통의 정신이 있어요. 
도산서원에 가면 ‘퇴계 선생’을 제사 지내는 ‘상덕사’라는 사당이 제일 중심입니다.
서원에 가면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칠백의총(義塚) 하면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나
영규(靈圭) 대사(大師)의 항일 의병 정신이 있는 사당이 있습니다. 
그런 거에 대해서 박정희 대통령을 가만히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종교는
‘국가(國家)’인 것 같아요. 
어디 가서 고개를 숙이느냐 하면 사당에 고개를 숙인다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다른 곳에서 머리 숙이는 것이 아니라,
충무공의 현충사 사당에 가서 대통령이 절을 한다 말이죠. 
그와 같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사상가인 퇴계 도산서원의 상덕사에 가서 절을 한다든지….
오죽헌에도 율곡 사당을 다시 지었어요. 그런데 가서 절을 한다 말이죠. 
그런 곳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나 문화 유적으로서
국가라는 개념의 정신적인 실체를 구성(형성)하고 있어요. 
그러한 유적이 1개 도 단위 거의 하나씩 있어요. 어떤 곳은 1개 도에 두 곳도 있지만….
부산을 보면 충열사(忠烈祠)가 있고,
경상남도에는 진주성, 의령에는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의병 유적,
경상북도에는 통일전의 ‘신라 화랑정신(新羅 花郞精神)’을 구현하는 곳,
충남의 현충사, 칠백의총,
전라남도에는 포충사(襃忠祠)의 고경명(高敬命) 선생의 유적,
광주에는 충장사(忠壯祠)의 김덕령(金德齡) 장군,
경기도의 강화 전적지(江華 戰跡地),
충청북도에는 충민사(忠敏祠)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대외 항쟁,
강원도에는 오죽헌(烏竹軒)의 율곡 선생 등. 


각 지역마다 그 지역 특성의 대외 항쟁사라든지,
우리 민족 문화사라든지 어떤 실체의 정신적 주체를 중심으로
아주 철저한 고증(考證)을 통해서 국민교육(國民敎育)의 장(場)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21세기 정보문화 시대에 걸맞게 세계화하더라도
세계화 전략상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없으면 우리가 외환위기, IMF 위기가 오듯이
문화적으로 자기 것을 가지지 않으면 나중에 문화적으로 공허한 것이 되고
아무 것도 아닌 사이버 공간 속에 헤매다가 마는 것이 된다
(민족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기 생명력이 상실됨).


 수로작업(의정부 근교) 1965. 6. 20

 

전통문화는 정체성(正體性) 확인, 사회통합(社會統合)의 기능,
문화창조력(文化創造力)을 제고하고
한국문화로 하여금 계속 개성적인 면을 지니게 하고,
국제화 시대에 ‘이미지 제고’의 중추적 역할, 남북한 통일에 대비
양측 문화간의 이질화된 부분을 극복하고 문화융합 등에 기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의 기반, 우리의 정체성 확립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세계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 대해서 아주 철저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다른 곳에서도 나타났지만….
자주(自主), 
자립(自立), 
자존(自尊)….
새마을운동에도 그러한 정신이 나옵니다. 
실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러한 정신이 있는 곳을 정비 정화함으로써,
예를 들어 포충사의 고경명 선생 경우를 보면
그 지역과 그 지역의 씨족적인 관계하고도 연결이 됩니다. 
그 정신이… 굉장히… 자기 혈통, 혈관에 스며들게 한다 말이죠.
그런 부분을 철저히 했어요.

그 뒤에 여러 대통령이 지나갔는데 비교해 보면,
그때 한 일들이 지금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언젠가는 다시 우리의 것을 재발견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뒤 현충사 이 충무공의 제사를 4월 28일 지내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거른 일이 없어요. 그 제사에….
대통령은 외국 대사도 만나야 하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데도 그런 일에 철저했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 교육적으로도 그렇고…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도 다 그러한 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부분에 너무 자유 방임상태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한 체제 구축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우리는
한번은 일본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된다는 노력을 했어요. 
광복의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광화문(光化門)’을 복원하는 것을 보게 되면….
대통령 지시로 광화문을 복원했어요. 
광화문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상징적인 의미이지,
문화유산적으로는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이에요. 
조선총독부 건물을 못 뜯어내니까, 예산 관계로….
우선 광화문을 건립하여 극일(克日)하고자 하는,
일본으로 인한 우리 역사의 상처와 치욕을 딛고 일어서고자 하는 굉장한 의지였다구요.

돈도 없는 그때에….
1969년 그때, 광화문을 복원하라는 지시에 의해 복원을 했거든요. 
지금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왜 그것을 콘크리트로 했느냐? 나무로 하지,
또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대통령, 한 나라의 통치자가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거는 군사적인 것도 아니에요. 광화문 하나 복원하는 것은….
그러나 그게 일제가 1916년에 조선의 정궁(正宮)을 허물고
조선총독부를 건립한 것에 대한 정신적으로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의식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그런 의지였습니다.

국어교과서에서 옛날에 우리가 배웠지만 역사 속에 있는 사실 등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은….
그래서 자기가 지시한 것은 설계도를 검토하고 추진사항을 보고 받고
준공식에는 꼭 본인이 참석하고 종결까지 확인하고 관리상태에 대해서도
수석비서관을 보내서 점검하고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인 책(사료)에 정리되게 하는 등
굉장히 철저했습니다


'윤봉길'의사 의거 기념 유적지 시찰(77.4.29) 충의사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장관이라든지, 계급(지위)을 중시하지 않고
아주 전문가(專門家)를 굉장히 존중했습니다. 
발굴 현장에 와서도 그때 발굴을 하는데 김정기(金正基)라는 사람이 경주 발굴의 단장인데,
한번은 “내가 맨날 김정기(金正基) 박사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사람이다.” 

그때는 따님 두 분하고 아들하고 다 데리고 오셨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평상시에도 저 어디 유적을 발굴하는 한 자연인의 이름까지도 가족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또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한번은 진해 갔다 오시면서
우리가 불국사를 복원하고 있는데… 여름에는 진해의 별장에 갔다가 오실 때면
경주를 꼭 들리세요.

육영수 여사는 불국사 복원한 것이 대통령이 하신 일 중에서 제일 자기 마음에 들고
제일 위대한 일 하나를 했다고 하더라구요. 불국사를….
우리는 불국사를 복원하는 이유가
박정희 대통령은 그냥 한 종교의 터전인 절을 복원하는 데 끝나지 않고
불국사라고 하는 것이 통일신라의 절로서 호국불교 정신의 구심점이면서
문화적으로 제일 정교하고 잘된 절이라는 것을 살리는 데 있었습니다.

거기에 다보탑(多寶塔:국보20號), 석가탑(釋迦塔:국보21號)이 있고
국보(國寶)로 지정된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국보23號), 연화교(蓮花橋),
칠보교(七寶橋:국보22號), 불국사 금동비로사나불좌상(佛國寺金銅毘盧舍那佛坐像:국보26號),
조각예술을 보면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국보27號)이라든지 그런 것이 있고,
그게 조경(造景)을 보면 구품연지(九品蓮池)에 그림자가 연못 속에 드리워져 가지고
2배로 보이게 하는 조영(照影)의 효과라든지, 청운교 백운교의 계단이라든지….
그런 계단의 잘된 것을 건설부에 이야기해 가지고 지하철 계단 조성에 원용하게도 했습니다. 
지하철 계단을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의 계단을 본떠서 만들게 한다든지…. 


지금 서울 지하철의 내려가는 계단은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딛고 걸어가는 데
보폭이 한 자 정도의 길이가 된다든지…. 
불국사의 청운교 높이가 19cm인데 지금 계단의 높이가 18cm 정도로 유지하게 했습니다.
늘(항상) 그런 것을 절대로 함부로 보지 않고
우리의 전통에 있어서 정교하거나 우리의 정신이 들어 있는 문물에 대해서는
이 시대에 재활용, 재창조하는 데 철저하게 대통령이 이용하라고 지시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인네(원로)들도 많이 만나고….
그때 보면 박종홍(朴鍾鴻) 특보 같은 사람을 옆에 두고 늘 이야기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

+++
도산서원(陶山書院)이나 율곡의 유적을 정리하는 것은…
철학을 전공한 박종홍(朴鍾鴻) 특보(교수)가 대통령에게 잘 설명도 하고,
그런 거에 대해서 대통령이 잘 교육받은 거예요. 
청와대 안에 대통령의 선생이 있게 하는 거예요. 
수석비서관 회의할 때 보면 박 대통령이 박종홍 교수 보고
“선생님은 그냥 들으십시오.”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박종홍 교수는 옆에서 듣고 있고. 
그 다음 동주(東洲 李用熙) 선생, 이갑성(李甲成) 선생의 아들, 국제정치학 교수도
나중에 대통령 특보를 했잖아요.

그분은 추사(秋史)나 한국의 글씨나 미술사에 아주 능통한 분이에요. 동주 선생은….
그런 걸 대통령에게 늘 교육한다 말이죠. 
그 안에서 대통령을 가만히 보면 자기보다 더 어른, 원로를 모시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저녁에 술을 먹어도 이은상(李殷相) 선생이나 이선근(李瑄根) 박사 이런 사람들,
문화재 위원이나 원로들하고 자리를 같이합니다.
공식적으로 점심 한끼 먹자고 해서 와 모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저녁에는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십시오” 이렇게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이선근 박사한테 여러 번 들었어요.
어제는 누가, 대통령하고 저녁을 먹었다든지 그런 식으로 만나서 대화를 하기 때문에
민족문화의 어디가 막히고, 보존하는 것에 대해서 가장 권위자이고 전문가의 이야기가
대통령한테 전달되는 겁니다. 
자기는 들은 것을 행정적으로 다시 물어본다구요. 
법률적, 현실적, 국가예산 측면에서 검토해 가지고 지시하기 때문에 지시한 것은
법률보다 무서운 꼭 실천을 해야 되는 그런 분위기가 됩니다.

그렇게 하고 대통령은 자기의 노트에 적고 그랬습니다.
지금 그 노트나 수첩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시를 받아서 보고를 할 때 그 내용에 대해서 전부 대통령이 알고 있으니까
그런 것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고 전문가가 되어가는 거예요.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관리나 기술자가 모든 사람이 전문인이 되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가 길고 통치 기간이 길어서
그런 것도 가능했는지 몰라도 좌우간 전문가가 아니면 말할 수 없게 합니다.

 
그만큼 대통령도 공부한 상태이고 행정(실무자)도 그러한 상태이고
그냥 잠시 자리를 맡았다든지 아무나 데려다 놓고 일을 했다가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국가경영에 굉장한 철학이 있었습니다. 


저는 문화 관계에 대해서 다른 것은 모릅니다. 
예술이나 일반적인 것은 모르지만 내가 맡고 있는 전통문화의 분야에는….
그래서 저는 전통 조경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었는데….
그것도 대통령께서 조경에 대해서 너무 많이 챙기고 하시니까…
그때 하버드 대학이나 일본 동경 대학 등에는 조경학과가 있는데
우리 나라의 대학에는 조경학과가 없었어요. 
대통령한테 전문적인 조경에 관한 것을 설명해야 하니까
일반조경이론을 다 번역해 가지고 마스터한 전문가가 아니면 가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또 대통령은 그림을 쪽지에 잘 그려 주신다고요.
그런데 어떤 때는 그 그림대로 수행할 수 없는 것도 있어요. 
사실은… 예를 들면 불국사의 담〔墻垣:장원〕을 사고석 담(궁담)으로 하라 했을 때 저는
그것을 자연석으로 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중국의 담부터 일본의 담, 우리 나라의 담,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있는 옛 건축법을 다 연구해 가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얼마나 전문가가 되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대통령의 말씀을 다시 시정을 해서 추진할 때는
그 사람을 훨씬 몇 배의 전문가를 만들게 합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크게 지시하는 것보다
어떤 경우에는 전문적인 입장에서 마찰이 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나중에는 대통령이 감안한다 말이죠.
“괜찮다. 그게 좋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사람이 상당한 전문가라고 인정하기 전에는 안 바꿉니다. 
그런 면에서는 대단한 사람을 길렀다. 
어떤 면에서는 문화면의 전문가를 길렀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국난 극복을 위한 대외 항쟁의 유적을 잘 정리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어떤 정신적인 지주를 형성해서 자주, 자립하는 정신으로 가겠다는
기본적인 목표가 있었고 그런 것이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인 입장 같이 그런 곳에 가서 정신적으로 우리가 사당을 지어 놓고 고개를 숙이듯이
그런 것도 하고 대통령 스스로가 제일 앞장서서 했고. 
그 다음에 우리 민족의 사상사(思想史)를 정립해 가지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터전으로 하자. 
예를 들면 퇴계 선생, 율곡 선생 등의 성리학 그리고 실학까지 다 정리해서….
실학의 대표적인 고대 도시가 화성(華城)이요, 수원성(水原城)….

수원성도 대통령이 지시해서 새로 다 쌓은 겁니다.
이와 같이 한 일이 굉장히 많은데, 직접 지시하고 준공식에도 참석한 사업들은
칠백의총(1970년), 제승당(制勝堂, 1975년), 현충사(1967년 4월),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서울의 낙성대(1973년), 광주의 충장사(김덕령 장군, 1974년),
항일 투쟁을 했던 윤봉길 의사의 유적(1972년), 행주산성(1969년~1970년),
진주성(晋州城), 강화유적(江華遺蹟, 1969년~1970년), 강화의 초지진(草芝鎭),
갑곶진(甲串鎭), 광성보(廣城堡), 고려궁지(高麗宮址), 강화행궁, 정족산성(鼎足山城),
마니산 참성단(摩尼山 塹星壇), 남한산성(南韓山城, 1970년), 서울성(1975~1978년),
수원성(水原城, 1975년), 고창읍성(高敞邑城), 홍성의 홍주성(洪州城),
서산시(瑞山市) 해미읍성, 문경관문(聞慶關門), 추사 고택(秋史古宅, 1976년).
그 다음 새로 건립한 국립박물관(1966)이나 경주 박물관(1975), 공주 박물관, 광주 박물관 등….
그리고 전통문화의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 소위 전시해 가지고….
그때 보면 1개 도에 국립박물관을 하나 정도 둔다는 원칙으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슨 군사 유적(軍事遺蹟)만 관리해 나간 것 아니냐 하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경주 유적의 발굴도 앞에서 말했듯이
한국의 민족사관(民族史觀)의 정립(定立)과 사상사적(思想史的)인 체계(體系)를
완전히 자주적(自主的)으로 쓰게 하는 데 기여한 것입니다.

한국 미술 5000년 전(展) 그리고 경주 천마총이나 능(陵)에서 발굴한 유물을 정리해서
전부 우리의 문화사를 새로 쓰게 했습니다. 
일본 사람이 쓴 한국사에 대해서 다 새롭게 쓰게 해서 교과서도 다 고치고
그런 후에 그것을 전세계에 알리고 구라파, 미국, 일본 등에 전시하게 함으로써
한국문화가 중국문화와 일본문화와 어떻게 다른가를 알렸습니다.

사실 미국에 가면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한 아류(亞流)
또는 일본문화와 한국문화는 비슷한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양문화에 대해서 이해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게 정립시켜주고….
그때에 미술사, 고고학, 한국 조경학 등 이런 학과가 많이 만들어지고
교육적으로도 그러한 것을 뒷받침하도록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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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때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 같은 것도 처음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1962년에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이 처음 제정되면서
우리 나라의 춤, 노래, 의식(儀式) 이런 게 문화재로 만들어집니다.

이런 것(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의식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
정신적 문화유산이라고 함 : 문화재보호법 제2조)을 무형문화재라고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이런 분들,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소위 말하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나 음악 하는 사람들, 공예기술의 장인 등….
옛날에는 이런 사람들을 하층계급으로 업신여겼습니다. 
이런 분야를 숭상하고 보존해 나갔습니다.

서울 음대 안에 전통음악인 국악과가 설치된다든지,
무용학과에 한국의 전통무용학과가 생긴다든지
우리 나라의 교육과정(敎育課程) 중에 우리 문화를, 우리 예술을 강조한다든지….
그러한 것이 만일에 보존 조치가 안 되었다면 서양화 물결 속에서
우리 음악이나 그런 게 설자리가 없어졌을 겁니다. 
지금은… 그런데 전통문화재인 인간문화재가 한 180~200명 지정되어 있는데
이런 게 1962년부터 만들어집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부터….


무형문화재를 보존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 일본, 대만밖에 없습니다.
다른 나라는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자기 문화가 계속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문화가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도 실지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부분에 구체적으로 지시한 거냐?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국가의 운영체제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제가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가기 전에는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이라는
일본법(日本法)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보존 관리하는 체제인
중앙의 ‘국(局)’ 단위가 만들어진 것이 1961년입니다.
그러니까 516 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겁니다. 
그전에는 ‘국립박물관 유물과(고고과)’의 한 사람이 전국의 유적을 관리할 정도였으며
또는 문교부 문화과 안의 ‘문화보존계(文化保存係)’가 그걸 했습니다. 
그러니까 문화재를 주체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구를 만든 것도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만들어진 겁니다. 지금은 문화재청(文化財廳)까지 승격했지만….

남북이 통일되면 금강산이나 백두산은 천연보호구역이나 명승지가 되어
문화재로 관리되야 하거든요.
금강산이나 백두산을 산림청이 무슨 임목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문화적으로 생태학적으로 관리를 하려면 문화재 보호구역의 천연기념물로 관리되어야 합니다.
이런 체제는 우리가 지금 금강산이나 백두산을 관리하는 게
국보나 보물의 동산문화재 하나를 지정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가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문에도 설악산, 한라산, 홍도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천연보호구역으로, 또는 명승으로….


이런 부분에 대한 관리체제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업적으로서
총체적, 제도적으로 정부 차원에서 전통문화의 보존과
우리 국토의 원 모습을 보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산림녹화(山林綠化)하는 정신하고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산맥이 단절되고 나지(裸地)가 되면(산이 헐벗으면) 해당 군수를 불러서,
“왜, 산림녹화를 안 하느냐? 왜, 산이 저렇게 깎여 있느냐?” 추궁하면서 아주 철저했습니다. 

후 기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이루어진 전통문화의 보존 계승 창달의 정책과 사업은 다음과 같은 문건과 책자로 세부사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1961年 10月 2日, 舊皇室財産事務總局을 폐지하고 文化財管理局을 文敎部外局으로 新設하여 民族文化遺産의 保存, 硏究, 창달의 전담 정부 기구를 만듦.
2.1962年 1月 10日, 文化財保護法을 제정 공포하여 文化財의 보존관리에 대한 기본법을 확립함(1933년 日帝가 만든 朝鮮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이 폐지됨).
文化財保護法에 처음으로 無形文化財(음악, 연극, 춤, 놀이, 의식 등)와 民俗文化財(의, 식, 주)가 文化財의 범주에 들게 되어 민족 고유의 예술과 공예기술과 살림집과 음식과 옷이 문화재로 지정, 보호 받게 됨.
3.1966年, 정부는 古典國譯事業과 국학연구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民族文化推進會 구성하여 추진하였다.
4.1971年, 大統領 秘書室에 慶州觀光綜合開發計劃團 구성 운영
5.1974年 4月 17日, 文化財管理局 산하에 文化財硏究所를 新設하였다.
6.1978年 12月 5日, 韓國精神文化硏究院育成法 제정 공포, 韓國精神文化硏究院이 설립되었다.
7.1979年, 韓國文化의 海外 선양 보급을 위해서 海外 公報館 산하 海外 韓國文化院 설치(日本 東京, 美國 뉴욕, 로스엔젤레스, 프랑스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