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李麟佐)의 亂
“내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나의 선행을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 나오는 명대사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은 이처럼 자신의 무책임한 조치를 불가피한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포장한다. 이에 대하여 정적들은 정의를 바로세우겠다는 거창한 기치를 내걸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권력을 움켜쥐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일어난 무신란 역시 노론과 소론, 남인이라는 정파로 갈려 한 시대를 주도하던 양반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고 벌인 일전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종실의 일원이었지만 치열한 정쟁에 떠밀려 권력계층에서 소외되었던 이인좌는 정희량, 박필현 등과 함께 영조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무신란를 주도했다가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배하면서 초라한 역신의 이름으로 역사에 새겨졌다.
무신년에 반란을 일으키다
이인좌(李麟佐)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이다. 본명은 현좌(玄佐)이다. 그의 출생지나 관직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남인이었던 그는 북벌정책을 주도했던 대학자 윤휴의 손녀사위로서 당파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할아버지 이운징이 파직되고 큰할아버지 이의징까지 사사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경종의 등극과 동시에 정권을 잡은 소론은 1721년(경종 1년)부터 벌어진 신임옥사를 통해 노론을 궤멸지경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경종이 1724년(경종 4년) 8월 25일 돌연 승하하고 왕세제였던 영조가 즉위하자 상황이 일변했다. 핍박받던 노론계 인사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그 동안 영조를 위협했던 김일경과 목호룡 등이 처형당하는 등 신임옥사를 일으켰던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그때부터 위기의식에 빠진 소론 박필현과 이유익은 가산을 털어 삼남을 돌면서 팔도의 저명인사 규합에 나섰다.
그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고, 그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널리 퍼뜨리면서 영조에 대한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당시 소론은 매파인 준소(峻少)와 비둘기파인 완소(緩少)로 갈려있었지만 영조의 정통성 의혹에는 의견을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노론의 공세가 끊이지 않자 그들은 경종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반란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충청도, 호남, 영남에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한양으로 진격하고 조정 내 동조세력의 호응을 받아 도성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는 이하·양명하·윤덕유 등이, 지방에서는 안음 정준유, 은진 나만치, 여주 조덕규, 이천 임서호, 안성 정세윤, 진위 이호, 충주 민원보, 청주 이인좌와 신천영, 상주 김홍수, 과천 이일좌 등이 반란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은 평양병사 이사성과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거사시기를 저울질했다.
1727년(영조 3년)부터 영조는 노론의 전횡에 경각심을 품고 일부 완소 계열의 인사를 조정에 입각시켰다. 이른 바 정미환국이었다. 그로 인해 굳이 성사 가능성이 희박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진 완소 계열 인사들이 반란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분개한 준소 계열 인사들은 그들도 노론과 함께 척결해야 할 적당으로 상정하고 모의를 구체화하기에 이른다. 영남에서는 정희량, 호남은 박필현, 호서는 이인좌, 경기는 권서린이 주도하여 병사를 동원하고, 평안병사 이사성은 관서에서 호응하기로 했다. 이에 총융사 김중기와 금군별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충청감사 권첨, 담양부사이자 경종의 처남 심유현 등이 동참했다. 그들은 거사가 성공하면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 이탄을 추대하기로 했다.
1728년(영조 4년) 2월 이인좌는 권설, 나만치, 박진영과 함께 괘서를 내걸으며 “우리들이 어찌 경종 임금의 신하가 아니더냐.”라며 반란의 명분을 내세웠다. 그는 또 권서봉에게 “영남에서 올린 상소문에 이름을 올린 자가 만여 명이니 각자 가정(家丁)을 끌고 나오면 12만 명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병력 동원에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들의 반란 계획은 항간에 파다하게 퍼졌지만 영조는 일부 불만세력의 허세로 치부하면서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해 3월 14일 안성에서 급히 상경한 봉조하 최규서의 고변과 양성 사람 김중만의 고변이 이어지자 깜짝 놀랐다.
반란계획이 예상보다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 영조는 즉시 성문을 폐쇄한 다음 도성 밖의 관군들을 동원해 수도 방비를 강화했다. 영의정 이광좌는 평안 감사 이사성과 금군별장 남태징을 체포함으로써 평안도와 서울의 내응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그로 인해 애초의 계획이 뒤틀리자 이인좌는 이튿날인 3월 15일 급거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당쟁으로 비롯된 이 반란은 대원수로 추대된 이인좌가 중심이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청주성을 함락하여 개가를 올리다
1728년(영조 4년) 3월 15일, 이인좌는 정행민·이계윤 등과 함께 장례 행렬로 위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청주성으로 잠입한 다음 야음을 틈타 병영을 공격하여 삽시간에 성을 점령했다. 병영 문은 기생 월례와 비장 양덕부가 내통하여 활짝 열린 상태였다.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이었는데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군관 홍림과 함께 대나무 숲으로 피신했지만 생포되어 반란군 장수 이배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의 숙부인 이홍무도 반란군에 사로잡혔다가 순절함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이때 청주영장 남연년 역시 반란군 장수 목함경에게 참살당했다.
이봉상은 본래 형조참판에 어영대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한 뒤 충청병사로 좌천되어 현지에 부임했다가 불과 4개월 만에 변을 당한 것이었다. 실록에는 “당시 적이 이봉상을 끌어내 칼로 위협하자 크게 꾸짖기를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듯 불시에 청주성을 장악하고 성내에서 다량의 무기를 확보한 이인좌는 권서봉을 청주 목사, 신천영을 병사로 임명했다.
이어서 주변 고을에 종사관 유급이 작성한 격문을 돌려 병사들을 모집하는 한편 창고를 풀어 백성들에게 관곡을 나누어주었다. 이때 반란군은 군문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한 다음 아침저녁으로 곡배함으로써 자신들의 거사가 선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과시했다. 그처럼 반란군의 기세가 드높자 인근 청안과 진천, 회인 등지의 수령들이 죄다 도망쳤지만 일부 장교들은 군사들을 이끌고 투항해 왔다. 용기백배한 이인좌는 군사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안성으로, 부원수 정세윤은 죽산 방면으로 진공하게 했다.
안성 전투에서 관군에 대패하다
1728년(영조 4년) 3월 17일, 급보에 접한 영조는 병조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삼고 박찬신을 도순무중군,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그들은 모두 소론 완소 계열 인사들이었으니 곧 소론으로 소론을 치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이었다. 어명이 떨어지자 도성의 각 병영에서 군사들이 급히 차출되었다. 그리하여 3월 18일, 1차로 훈련도감 군사 386명, 금위영 군사 1065명이 출정했다. 이어서 3월 22일 어영청 군사 572명과 개성군 군사 200명이 합세했다.여기에는 당시 일당백을 자랑하는 훈련도감의 마병이 포함되었다.
인편을 통해 토벌군의 출정 소식을 들은 이인좌는 이배에게 50여 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도순무사 오명항을 척살하게 했다. 관군이 고된 행군 끝에 진위(평택)에 다다라 야영하자 그들은 한밤중에 진영을 급습했다. 갑작스런 반란군의 출현에 깜짝 놀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이배의 정예병 예닐곱이 오명항이 있는 중앙 진지까지 돌진했다. 위기의 순간 전열을 재정비한 군사들이 반격하고 선전관이 부상을 무릅쓰고 분전하면서 간신히 적을 물리쳤다. 그때 이배는 관군에 생포되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쳤다.
그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심상찮다고 여긴 오명항은 군중에 토벌군이 직산으로 간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3월 23일, 안성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인좌는 일단의 관군이 나타나자 소규모의 지방군이라 여기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런데 상대 진영에서 갑자기 신기전을 비롯한 각종 화포가 불을 뿜고, 뒤이어 훈련도감의 마병들의 출동하여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그 서슬에 수백 명의 반란군 병사들이 고혼이 되고 말았다. 그제야 그들이 직산으로 갔다던 관군의 주력임을 알게 된 이인좌는 급히 병사들을 물려 서남쪽에 있는 청룡산 꼭대기에 진을 쳤다.
이튿날 새벽 동북풍이 불어 관군에게 이로운 형세가 되자 오명항은 마병 1백 명과 보군 3백 명을 청룡산으로 올려 보냈다. 바람을 등에 업은 관군이 사납게 달려들자 반란군은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또 다시 1백여 명의 반란군이 희생되었다. 그때 마병 임필위는 반란군 병사 한 명을 사로잡아 겨드랑이에 끼고 달리는 등 자신의 재주를 뽐내기까지 했다. 이윽고 양군은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재차 자웅을 겨루었는데 처음에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승리는 병력과 장비 면에서 우수한 관군에게 돌아갔다. 시름에 빠진 이인좌는 잔병을 이끌고 정세윤이 있는 죽산으로 도주했다.
영조의 면전에서 불귀의 객이 되다
안성의 일전에서 대승을 거둔 관군은 패주하는 적의 뒤를 쫓아 죽산 방면으로 진격했다. 도중에 험준한 장항령의 지세를 보고 매복을 의심한 오명항은 마보군을 출동시켜 산속에 웅크리고 있던 일단의 반란군을 사살했다. 그때 이인좌는 정세윤과 조우한 뒤 반란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들판 한 가운데 진을 친 다음 소를 잡고 술을 마시게 했다. 치열한 산악전을 염려했던 오명항은 쾌재를 부르며 바람을 등지고 맹공격을 가했다. 연이은 패전에 지친 반란군은 우왕좌왕하다가 곧 흩어졌고, 이만빈과 이우석에게 사로집힌 정세윤은 사지가 잘린 뒤 참수되었다. 며칠 동안 죽산부사 행세를 하던 그의 동생 정계윤 역시 도주하다가 참살당했다.
관군들은 적이 물러나자 그 뒤를 쫓으며 잔적들의 소탕에 나섰다. 한데 그 동안의 고생에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조금이라도 의심스런 자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 때문에 무고한 백성 1000여 명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희생당했다. 이에 민심의 이반을 염려한 오명항은 적을 생포하는 사람에게만 전공을 인정하겠다고 군사들을 다그침으로써 불필요한 살육을 막았다. 아울러 종사관 박문수와 조현명에게 생포된 반란군 병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하게 한 다음 흉악한 사람만 죽이고 나머지는 곤장을 쳐서 방면했다. 건곤일척의 대결에서 패배한 이인좌는 수하들과 함께 산사로 피했다가 농민 신길만과 승려들에 의해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권서봉, 이지경, 목함경, 박상, 곽장 등 반란군의 주력 장수들이 차례차례 생포되었다.
이인좌가 진문 앞에 끌려오자 종사관과 장수들은 그의 살점을 떼어서 죽이는 연살(臠殺)을 행하려 했다. 하지만 오명항은 그들을 제지한 다음 함거에 실어 한양으로 압송했다. 3월 26일 이인좌가 도성에 다다르자 영조는 인정문 앞에서 그를 친국한 다음 참수형에 처했다. 이인좌는 반란의 기치를 높이 올린 지 불과 12일 만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 안성과 죽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신천영은 상당성에서 농성하면서 관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관군의 장교가 성문을 지키던 반란군을 설득하여 문을 열게 했다. 곧 성내에 진입한 관군은 총공격을 펼쳐 신천영과 이기좌,하홍점, 박만겸 등을 생포한 다음 참수했다. 그렇게 해서 무신란의 주력이었던 안성 지역의 반란 세력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승전보에 접한 영조는 오명항에게 ‘지확공고(志確功高. 의지가 굳세고 전공이 높다.)’란 어필을 하사하면서 호서와 영남에서 준동하고 있는 잔당을 완전히 평정하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오명항은 3월 28일부터 영호남의 수령들을 지휘하여 함양과 거창, 안음 등지에서 준동하고 있는 반란군 정벌에 나섰다.
영남과 호남의 반군도 진압되다
한편 영남에서 거병한 정희량은 3월 20일, 조상묘의 이장을 구실로 장정들을 모집한 뒤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함께 봉기했다. 그는 안음과 거창의 현감을 위협하여 두 지역을 장악한 다음 합천에 있는 인척 조성좌의 도움을 받아 합천과 함양까지 석권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경상감사 황선과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임명하고 주변의 관군을 총동원하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그때 정희량은 청주로 진격하여 충청도의 반군과 합세한 다음 서울로 진군하고자 했다. 하지만 관군이 안동, 상주에서 진로를 가로막자 거창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했지만 결국 관군에게 사로잡혀 목숨을 잃었다.
호남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무장에 유배 중인 형 박필몽과 합세하여 군사를 모으려 했다. 하지만 태인의 군사들이 그의 본심을 알아채고 대거 도주했으며, 내응을 약속했던 전라감사 정사효가 전주성문을 걸어 닫고 외면하는 바람에 봉기 자체가 수포로 돌아갔다. 박필몽은 상주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고, 박필현도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로 도망쳤다가 역시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해 4월 초순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이 청주를 거쳐 추풍령을 넘었을 때는 영호남의 반군들 대부분이 소탕된 뒤였다. 이윽고 난이 종식되었음을 확인한 관군은 거창에서 회군하여 4월 19일 한양으로 개선했다.
정벌군이 남쪽 한성 밖에 나타나자 영조는 백관들과 함께 숭례문 문루에 올라가 그들을 환영했다. 이어서 반적들의 머리를 바치는 헌괵례(獻馘禮)를 거행되었다. 최고지휘관이었던 오명항은 영조에게 반란군의 수괴인 이웅보·정희량·나숭곤의 수급을 바침으로써 반란군 정벌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알렸다. 그 후 영조는 끝까지 자신을 적대시했던 소론과 남인의 본향 영남 지방을 고깝게 여기고 대구 입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운 다음 영남 인사들의 출사 자체를 금지해버렸다. 한편 반란군에 의해 추대될 예정이었던 밀풍군 이탄은 그들의 제의를 수락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옥에 갇혔다가 왕명에 의해 자결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죄목은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소론의 와해를 불러오다
이인좌의 난은 그때까지 조정에서 노론과 힘겨루기를 해왔던 소론 당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난을 획책한 것도 소론이고 난을 평정한 것도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소론 중신들은 숨을 죽이고 영조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는 기막힌 현실을 목도한 영조는, 과거 숙종의 환국정치 형태로 붕당의 폐해를 조율하는 것보다는 조정에서 양자를 공평하게 대우하는 탕평책을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1729년(영조 5년)부터 영조는 노·소론 인사들에게 골고루 관직을 배분함으로써 양측이 모두 벼슬길에 나올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분등설(分等說), 노·소론 중에 어느 한쪽을 벌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의 죄를 찾아 함께 벌함으로써 공평성을 유지한다는 양치양해(兩治兩解), 노·소론 간에 서로를 견제할 수 있도록 관직을 배려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 등의 인사정책을 적용했다. 아울러 노·소론의 시비가 상반되는 경종 대의 신임옥사를 절충하는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렸고,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다음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을 임명했다. 또 이조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임명한 다음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을 임명했다. 그렇듯 영조는 쌍거호대를 통해 노·소론을 망라한 연립정권을 구성함으로써 회심의 탕평정국을 실현시켰다.
이와 같은 영조의 조율에도 불구하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치달았다. 준소의 지속적인 반역과 임금에 대한 마타도어로 인해 완소 인사들도 차츰 힘을 잃어갔다. 오명항은 우의정까지 올랐지만 수시로 노론의 탄핵을 받으며 고초를 겪다가 일찍 병사했다. 무신란 당시 마병에 의해 씌어진 〈난리가〉에서 군사를 자식같이 사랑한 인물로 칭송받았던 박문수는 경상도관찰사, 삼남암행어사로 임명되면서 민심의 수습에 열중했고 고른 인재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지만 노론의 견제 때문에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 후에도 무신난의 잔여 세력인 박세만, 주노미, 권첨, 정사효 등이 남인 세력을 끌어들여 역모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피바람을 맞았고, 나주에 유배된 윤취상의 아들 윤지가 괘서를 돌린 나주괘서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소론과 남인들이 재차 희생되었다. 그처럼 이인좌의 난은 영조 치세 내내 소론의 와해를 재촉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조의 혜안을 흐리게 하는 단초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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