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 얽힌 숨겨진 사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 상식 중에 광개토대왕비, 거북선 그리고 한글 창제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비는 일제가 조작한 비문이고, 거북선은 철갑선이며,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순수 창작품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다분히 편파적이던 학교에서 배웠던 것에서 벗어나 살펴본다면 어떨까?
광개토대왕비의 왜(倭)에 대한 언급은 조작된 게 아니었고, 거북선은 사실 목선(木船)이었으며, 훈민정음은 기존에 존재하던 문자를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재창조한 것이라는 사실은 도서관에서, 논문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일 것 같다.
창제과정을 비밀리에 진행한 걸출한 성군 세종대왕, 중국 사대주의에 목을 맨 반대론자들과 학술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창제과정의 비밀을 살펴보면 이 속엔 풀려지지 않은 많은 의문이 있다. 그리고 그 의문들은 양파의 속살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추론을 제공하며 탐구욕을 자극한다.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과정은 잘 짜여진 추리소설을 연상시킬 것 같을 정도다.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숨겨진 의문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 한글과 훈민정음은 같은 말인가?
우리는 한글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알고 있다. 정말 그럴까?
주시경이 만들어 1927년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한 한글이란 용어는 훈민정음을 낮추어 부르던 언문(言文)을 대체하기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여기서 반문해 보자. 한글은 문자와 소리 중 어느 것을 의미할까? 당연히 한글이라는 말 자체가 뜻하듯 문자를 의미한다.
유치원생이 벽에 붙여두고 외우는 한글 자음, 모음은 물론 소리이기도 하지만, 글씨를 읽고 쓰기위한 문자 학습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한글의 원형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문자와 소리 중 어느 것을 더 의미할까?
훈민정음의 한자를 풀어보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즉, 문자보다는 소리에 더 비중을 두고 뽑은 타이틀이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데 왜 한글은 문자를, 훈민정음은 소리를 강조할까?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28자의 글자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자’라는 뜻의 훈민정자(訓民正字)가 아닌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주시경은 그런 훈민정음을 대체할 근대어로 ‘한소리’가 아닌 ‘한글’이란 이름을 지었다.
훈민정음 속에 숨어있는 첫 번째 의문과 마주친다.
- 훈민정음 창제는 극비 사업이었다.
1443년 12월 30일 공표된 훈민정음은 세종의 최측근으로만 구성된 특수팀에 의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세종실록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가 세종에게 이렇게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글자를 만드는 것은 국가적 중대사라 많은 이들과 상의하고 오랫동안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데, 뜬금없이 관리 십여 명에게 지시해서 훈민정음을 가르쳐 익히게 하고 출판업자 몇몇에게 책을 발행케 해 신속히 새 글을 반포하시니 황당합니다.(세종26년 1444년 2월 20일 훈민정음 창제 두 달 후)"
상소문을 쓴 최만리는 당시 집현전 부제학으로 지금으로는 차관급 인사다. 즉, 집현전이라는 주요 부처의 고위직 인사인 셈이다. 그런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과정에서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집현전 학자라고 모두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건 아니라는 거다. 오로지 세종대왕이 선택한 극소수만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팀에는 세자였던 문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최만리는 역시 상소문에서 이렇게 지적 하고 있다. "세자가 비록 똑똑하다곤 해도 아직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은데 급한 일도 아닌 문자 창제에 시간을 뺏기는 바람에 세자의 학업이 부진할까 걱정됩니다."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자신은 배제되고 할 일 많은 세자는 훈민정음 창제팀에 포함된 사실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양 싶다.
세종은 소수정예 팀에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같은 집현전 학자들과 세자를 포함한 직계 자손 등의 극소수 인원만 포함시켰고, 훈민정음 반포 이전까지 활동내용은 철저히 숨겨졌다.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는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는지를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게 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세종대왕이 이렇게 극비리에 훈민정음 창제를 진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의 독창 품인가?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세종 25년, 1443년 12월 30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세종 26년, 1444년 9월 20일 최만리의 상소)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은 칠조에 합하여...(세종 28년, 1446년 9월 29일 예조 판서 정인지 서문)
훈민정음이 세종과 집현전 학자의 순수한 창작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세종실록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이는 세종의 특명으로 훈민정음을 보급하려던 파나 훈민정음을 반대한 파나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애플과 삼성의 특허 전에서 삼성이 애플의 특허를 베꼈다는 미국법원의 판결처럼 훈민정음 역시 유사한 원형이 존재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그럼 위에서 언급한 전자(篆字), 전문(篆文), 고전(古篆)등은 뭔가?
후대 학자들의 자의적 해석을 배제한 사전적 의미로만 보자면, 이들은 모두 한자의 서체중 하나인 전자(篆字)를 의미한다.
전자는 조선시대 도화서 벼슬중 하나로 전자관(篆字官)이 있었을 만큼 당시 조선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한자 서체로, 세종실록은 훈민정음이 이 전자(篆字)를 바탕으로 응용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그렇다.
훈민정음이 순수 창작품이 아니라는 것도 충격인데 중국 한자를 베꼈다니 자존심 상하는 얘기다. 이게 사실일까? 모양이 전혀 다른 한자가 어떻게 훈민정음의 원형이 될 수 있을까?
<< 한자 서체중 하나인 전서
- 훈민정음은 중국 전자(篆字)를 베낀 게 아니다.
“옛 부터 중국 각지 안의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이 다르다고 별도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고,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만이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므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던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하물며 언문(훈민정음)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스러운 말을 쓰는 것이 옵니다.(세종 26년, 1444년 9월 20일 최만리의 상소)”
“우리나라는 안팎 강산이 한 구역이 되어 풍습과 기질이 중국과 다르니, 호흡이 어찌 중국 음과 같겠는가? 세종대왕의 명령을 받고 세속의 습관을 두루 채집하고 전해오는 문서를 널리 참고하여....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이하여....옛 사람의 편성한 음운과 제정한 자모를 가지고 합쳐야 할 것은 합치고 나눠야 할 것은 나누되....우리 임금께서 소리와 음운에 마음을 두시고 옛 문헌을 참작하시어 지침을 만드셨으니 억만대 모든 후손들에게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세종 29년, 1447년 9월 29일 신숙주의 ‘동국정운’ 서문)”
훈민정음이 중국 한자를 베꼈는지 아닌지는 위의 신숙주, 최만리의 글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도 있다.
위의 글에서 훈민정음을 묘사한 단어들만 모아보자.
.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
. 시골의 상스러운 말
. 세속의 습관을 두루 채집, 전해오는 문서를 널리 참고
. 옛 사람의 편성한 음운과 제정한 자모
. 옛 문헌을 참작
이것을 짜깁기 해보면 훈민정음의 롤 모델이 된 문자는 자음과 모음이 존재했고, 음운이 있었으며, 옛 사람들이 사용하던 글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반대파로부터 상스럽고 무익하며 세속적이란 공격을 받을만한 문자였다.
결론부터 말해 이 묘사들을 참고로 보면 당시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었으며 형님네 나라 문자로 숭상 받던 중국 전자체가 주인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세종대왕이 참고했다는 옛날 글자의 정체는 뭘까? 그 글자는 훈민정음 28자 중 일부와 비슷한 모양을 가졌을 것이고, 양반 보다는 서민이 사용하던 글자였을 것이다.
중국 전자가 원형이 아님에도 왜 당시 문헌들은 다 같이 전자(篆字)를 언급했을까? 여기엔 무시할 수 없는 반전이 있다. 훈민정음의 원형은 바로 고대 한글이고 전자에 대한 언급은 반대론자들로부터 저속한 글로 무시 받던 원형을 숨기기위한 정치적 트릭이라는 것이다.
전서(篆書) : 고대 한자의 서체(書體)로서 중국 주(周)나라 의왕 때 태사(太史) 주(姝)는 갑골(甲骨)· 금석문(金石文)등의 고체(古體)를 정비하고 필획(筆畵)을 늘려 대전(大篆)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 후 진(秦)나라 시황제 때 재상 이사(李斯)가 대전을 간략한 문자로 만들어 황제에게 주청하여 이제까지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하고 통일하여 이것을 소전(小篆)이라 한다.
대전(大篆)의 예로는 춘추(春秋) 말기(BC 5세기경)의 ‘석고문(石鼓文)’이 있고, 소전의 예로는 진대(秦代 BC 219년)의 ‘태산각석(泰山刻石)’이 있다. 이들 전서는 다시 간략하게 쓰기 위해 예서(隸書)가 만들어지고, 빨리 쓰기 위한 필기체의 초서(草書)가 생겼다. 다시 해(楷)· 행(行)서가 생겨 일반적으로 해· 행· 초가 쓰였으나, 송, 원대에 복고풍이 생겨 주목되다가 청대에는 전· 예서의 연구가 왕성하기도 했다.
- 고대 한글이 존재했다.
역사학계는 이 주장에 대해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심란해하고 있다. 사실 부정 쪽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있는데 이유는 이렇다. “고대 한글이 존재했다면 왜 그 존재를 언급하는 역사서가 없는가?” 그리고 “고대 한글이 존재했다면 왜 고대 한글로 쓴 책이 단 한권도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학계에서 꽤나 유명하지만 무협지 취급을 받는 역사서로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1911년 ‘삼성기전’,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고대 역사서 4권을 정리해서 발간된 것으로, 그 중에 ‘가림토(加臨土)’로 불리는 고대 한글이 나온다. 무려 훈민정음 보다 3500년 앞선 BC 2181년 세계에서 문자다운 문자가 존재하지 않던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 고대 한글은 놀랍도록 훈민정음과 유사한 모양을 갖고 있다.
당연히 이 책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 위서(가짜) 논쟁에 휘말린 건 이 책이 근대 한자로 쓰였고, 내용이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이유 외에도, 이 책에 실린 고대 한글이 언어 발달사 측면에서 시대를 너무 앞서간다는 것이다. 당시의 문자로 보기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거다. 현재 이 책은 민족주의 정신을 부각하기 위해 독립 운동가들이 맞춤식으로 쓴 가짜 역사서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고대 한글은 당연히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대 한글은 정말 존재했을까? 그리고 세종대왕은 이 고대 한글을 토대로 훈민정음을 탄생시킨 걸까?
- 세종은 고대 한글을 보고 연구했나?
매월당 김시습은 그의 저서 ‘징심록추기’에서 훈민정음 28자는 신라 박재상이 쓴 ‘징심록’에 수록된 글자들을 참고해 만들었다고 했다.
김시습은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동시대 인물이고 세종의 아꼈던 신하였다. 그래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팀의 연구과정과 결과에 누구보다 가까이 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현재도 내용이 전하는 ‘징심록추기’는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훈민정음 원문 출처로 박제상의 ‘징심록’을 지목했다.
‘징심록’의 저자 박제상은 신라 박혁거세의 9세손으로 363년부터 418년간 살았음으로 세종보다 대략 천 년 앞선다. 목숨을 바쳐 왕자를 구한 신라의 충신으로 기억되는 그는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이 열람한 고 문서들과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비사를 토대로 총 15권에 달하는 ‘징심록’을 기술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음신지(音信誌)’라는 책이 있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음신(音信)이 소리와 뜻을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종대왕이 참고했다는 박제상의 저서는 ‘징심록’은 ‘음신지(音信誌)’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훈민정음의 원형이 신라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징심록’의 ‘음신지’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었을까? 그것이 한자라면 굳이 그렇게 오래된 문서까지 세종이 찾아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엔 신라 이전부터 전해오던 고대 한글의 원형이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것도 추정일 뿐 고대 한글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문서는 없다.
결론적으로 훈민정음 원형으로서의 고대 한글은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
혹시, 이런 일련의 의심들은 당시엔 숨길 수밖에 없었지만 후대에는 꼭 밝혀지길 바랬던 세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어쨌든 훈민정음 창제의 진실은 우리가 밝혀야 하는 한민족의 숙원사업이다.
기득권의 정점에 선 군주로서 자신의 존립기반인 기득권층과 대립하며 진행해야했던 훈민정음 창제 사업, 그 기원과 제작과정이 밝혀진다면 600년전 이 사회를 변혁시키고 싶었던 개혁군주 세종이 품었을 꿈과 희망, 고뇌와 좌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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