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박근혜1]최순실은 누구인가? / 김재규의 증언 / 최태민은 누구인가?

이름없는풀뿌리 2016. 10. 26. 14:29

최순실은 누구인가…박 대통령과는 40년 인연

       이정국  기자 작성  2016.10.26 07:36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25일) 최순실 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에 받아봤다는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까지 하면서 '비선실세 의혹' 당사자인 최 씨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최 씨는 박 대통령의 '정신적 멘토'로 알려진 고(故) 최태민 목사의 다섯 번째 딸입니다. 박 대통령과 최 목사의 관계는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 대통령은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뒤 영부인 역할을 하게 됐는데, 당시 최 목사가 상심에 빠진 박 대통령에게 '위로 편지'를 보내면서 급속하게 가까워졌습니다.


최 목사는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를 맡고, 박 대통령이 명예총재를 맡기도 했습니다. 최 목사는 지난 1990년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을 때 또다시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박 대통령의 동생 근령 씨는 최 목사의 전횡을 비난하며 "최태민 씨에게 포위당한 언니 박근혜를 구출해달라"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최 목사는 1994년 지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최 목사가 숨진 이후 최순실 씨는 항상 박 대통령 곁을 지켰습니다.


1952년생으로 박 대통령보다 네 살이 어린 최 씨는 1975년 단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이어 같은 대학원 영문학과를 수료했으며, 최근 최서원으로 개명했습니다. 최 씨는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 원장을 지냈고, 1990년대에는 강남구 신사동에 몬테소리 교육으로 유명한 초이유치원을 열었습니다. 최 씨는 정윤회 씨와 결혼해 딸 정유라를 뒀으며 2014년 5월에 정 씨와 이혼했습니다. 최 씨는 박 대통령이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에도 박 대통령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지난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당시 습격을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에는 최 씨의 언니가 병실에서 박 대통령을 간호한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 친박(친박근혜계)계 의원들 조차 사석에서 최 씨를 만나거나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최 씨가 주도해 설립한 미르재단의 이성한 전 사무총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 씨가 대통령에게 시키는 구조"라며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없다. 최 씨한테 물어보고 승인이 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폭로성 주장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최 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 씨 역시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습니다. 정 씨는 지난 2002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에는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공개적으로 박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또 '문고리 3인방'으로 통하는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도 정 씨가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 씨 일가는 박 대통령 취임 이후 '비선 실세'라는 단골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지난 2014년 11월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 씨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검찰은 당시 정 씨를 수사한 뒤 국정 개입 의혹은 허위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청와대 감찰보고서'를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며 "최순실 씨가 1위, 정 씨 2위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때까지 공식캠프 외에 '삼성동팀', '논현동팀' 등의 비선 조직을 가동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 가운데 최 씨가 삼성동팀의 몸통이라는 설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관계에 대해 "아는 사이인 건 분명하지만, 절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라면서 "(최 씨가)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고 40년간 절친은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제 박 대통령이 "최순실 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며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 있다"고 밝히면서 박 대통령이 최 씨의 조력을 받았다는 점은 사실로 드러나게 됐습니다.  출처 : SBS 뉴스
원본 링크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855453&plink=STAND&cooper=NAVER&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권력서열 1위 최순실, 2위 정윤회... 박 대통령 최순실 관계 '복선' 있었다

         

등록 : 2016.10.26 04:40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60ㆍ최서원으로 개명)씨. 한겨레 제공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최순실씨와의 관계를 일부 인정하는 대국민사과에 나서면서 과거 두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증언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사실 확인이 어려운 다소 허황된 내용이어서 당시엔 일방적인 주장으로 치부됐지만 최근 의혹을 입증하는 근거가 속속 등장해 “복선은 있었다”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고 최태민 목사와 그의 다섯째 딸 최씨, 그리고 박 대통령의 관계는 1990년 박 대통령의 동생들인 박근령ㆍ박지만씨의 편지로 일부 세상에 알려졌다. 둘은 수신인을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 한 일종의 탄원서를 A4용지 12장 분량으로 썼고 “저희 언니와 저희들을 최태민 목사의 손아귀에서 건져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박근령씨가 자필로 쓴 탄원서에는 최 목사의 비리와 재산 축적 내용을 고발하는 내용과 함께 “이번 기회에 언니가 구출되지 못하면 언니와 저희들은 영원히 최 목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장난에 희생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최 목사는 그로부터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당시 최 목사가 유언으로 최씨에게 “박근혜를 잘 모시라”고 당부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명박, 박근혜가 2007년 7월 13일 안양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합동연설회에 참석, 각각 얼굴을 만지며 연설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장광근 대변인은 육영재단, 영남대, 정수장학회 등을 검증한 내용을 밝히며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최씨 일가에 의한 국정농단의 개연성은 없겠는가”라고 공격했다. 이후 최 목사 일가와 박 대통령을 둘러싼 이야기는 묻히는 듯 했으나, 17년 뒤인 2007년 6월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17대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경선 상대였던 이명박 후보 캠프의 장광근 대변인은 육영재단, 영남대, 정수장학회 등을 검증한 내용을 밝히며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최씨 일가에 의한 국정농단의 개연성은 없겠는가”라고 공격했다. 


비슷한 주장은 박 대통령 집권 2년 차인 2014년 일명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때도 나왔다. 문건 유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박관천 전 경정은 담당 검사와 수사관에게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은 최순실씨가 1위, 정윤회씨가 2위, 박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 재직 시절 박 전 경정의 상관이었던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지난 9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비슷한 암시를 자락에 깔았다. 당시 그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과거) 민정비서관으로의 발탁과 윤전추 행정관의 청와대 입성도 최순실씨와의 인연이 작용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해당 주장들은 모두 발언 당시에는 근거가 없어 큰 힘을 받지 못했다. 특히 이원종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과 최씨가) 아는 사이는 분명하지만 절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다”고 국정감사장에서 발언하면서 허위 의혹제기가 될 뻔했다. 하지만 이날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최씨로부터 대선 때는 물론이고 취임 이후에도 조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함에 따라, 해당 주장들 모두 의혹 규명 차원에서 정밀 재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재규 "10.26 동기 중 하나는 박근혜-최태민 때문"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밝혀... "박정희, 최태민 부정행위 파악하고도 조치 안 해"

16.10.26 10:42l최종 업데이트 16.10.26 14:20  글: 임병도(impeter)  편집: 손지은(93388030)     오마이뉴스  

    

오늘은 10.26 사건 3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합니다. 김재규는 항소이유서에서 10.26을 "5·16과 10월유신을 거쳐 완전하게 말살시켜놓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기 위한 혁명"이라고 밝혔습니다. 왜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를 암살했느냐에 대해서는 "유신체제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의 한계점에 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정희,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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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는 10.26 사건의 동기로 부마사태가 악화되면 박정희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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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부마항쟁이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시민에 의한 민중봉기"라고 박정희에게 말했지만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라며 역정을 냈다고 밝혔습니다.

옆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보면, 어쩌면 10.26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끔찍한 학살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발포명령 발언이 단순히 말에만 그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더구나 10월유신 이후 집권욕이 애국심보다 훨씬 강하여져서 심지어 국가의 안보조차도 집권욕의 아래에 두고 있던 분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교도 하여보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박사와는 달라서 물러설 줄을 모르고 어떠한 저항이 있더라도 기필코 방어해내고 말 분입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국제적으로도 고립되고, 특히 미국은 대한정책을 바꾸게 될 충분한 가능성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본인은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도저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어서 10·26 혁명을 결행하였던 것입니다." (김재규 항소이유보충서 중에서)

"10.26 혁명 동기 중의 하나는 박근혜 때문"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를 통해 10.26이 혁명이었고 정당하다는 사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항소이유보충서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의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김재규는 '10.26 혁명 동기의 보충' 부분에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라며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라며 박근혜와 박지만, 두 사람을 거론합니다.

"3. 10·26 혁명동기의 보충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이나 유신체제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

① 구국여성봉사단과 관련한 큰영애의 문제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② 지만군의 문제
육군사관학교는 전통적으로 honor system이 확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육사에 입학한 지만군은 2학년 때부터 서울 시내에 외출하여 여의도 반도호텔 등지에서 육사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오입을 하고 다녔읍니다. 그래서 본인이 박 대통령에게 육사의 명예나 본인의 장래를 위하여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유학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건의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건의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습니다.

③ 위와 같은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태도에서 본인은 그의 강한 이기심과 집권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자녀들의 문제이지만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국민을 우매하게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이런 기회에서나마 밝혀두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1980. 1. 28 김재규"

김재규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언급했던 가장 큰 동기는 최태민의 범죄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해 직접 심문까지 했지만,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돈독해졌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10.26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김재규가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통해 이 정권을 더는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 중의 하나는 분명해 보입니다.

후대에서도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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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혁명동기의 보충으로 최태민과 박근혜와의 관계를 거론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10월 25일 최순실 게이트로 대국민사과를 했다.
ⓒ 임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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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최순실 게이트 의혹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국민사과는 고작 1분 35초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사전에 녹화된 영상이었습니다.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정부를 흔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지만, 현재로선 도덕성과 신뢰가 모두 무너진 '식물 정부'라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김재규가 왜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박근혜와 박지만 문제를 언급했는가를 보면 장기 집권에 의한 권력 대물림을 예상하지 않았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2인자를 절대 두지 않는 박정희의 속성상 정권을 박근혜가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이를 혁명 동기의 하나로 충분히 고민했을 것입니다.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은 어쩌면 박정희와 박근혜 두 사람의 권력자를 몰락시킨 범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의 죽음과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재규는 마지막 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죽음, 즉 나의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절대 필요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절대 회복돼야 하겠구나 하는 것을 전체 국민이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고 또 그것을 확실히 자기 몸에다가, 목에, 자기 가슴에다가 못 박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재규의 유언 중에서)

박정희 일가에서 본다면 최태민 일가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재규의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 하십시오"라는 마지막 유언으로 본다면, 민주주의를 다시금 일깨워준 고마운(?) 사람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는 꼭두각시" 최순실 게이트 예언한 말말말

'아바타' '오장육부' '가족'... 지금 보니 '황당한' 말이 아니었다

16.10.25 20:17l최종 업데이트 16.10.26 14:23l

    

지난 24일 '비선 실세'로서 국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미리 받아봤다는 보도가 나왔다.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까지 관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최순실씨의 국정 영향력,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사이를 주목했던 과거의 '말'들이 주목받고 있다. 

1. "최순실씨가 권력서열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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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 마장마술 경기 지켜보는 최순실과 정윤회 박근혜 대통령의 의원 시절 비서실장인 정윤회(왼쪽)씨와 전 부인 최순실씨가 2013년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딸이 출전한 마장마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 사진제공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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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실세'로는 다양한 세력이 거론됐다. 7인회 (대통령 원로 자문 그룹), 만만회 (박지만 EG회장,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정윤회씨), 문고리 권력 3인방(비서관 3인) 등등이 꼽혔다. 그런데 정윤회 관련 청와대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조사받던 박관천 경정은 처음으로 최순실씨를 '실세'라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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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 경정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최순실씨가 권력서열 1위'라고 밝혔다고 한다. 당시에는 '황당한' 내용처럼 치부되었으나, 지금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며 다시 화제가 되는 분위기다.

"수사 초기 박 경정은 한창 조사를 하던 검사와 수사관에게 뜬금없이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면서 박근혜 정부의 권력 지형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윤회 씨의 전 부인이자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씨가 1위, 정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 동아일보 <'박관천의 황당한 '권력서열' 강의'> 중

2. "최태민과 그의 딸의 꼭두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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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6월 21일 배재고교 교정에서 열린 한국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참석한 박근혜씨. 오른쪽에 안경을 쓴 이가 최태민씨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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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당원이었던 김해호씨는 2007년 6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최태민 목사 비리에 박근혜 후보가 관련되어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동시에 그는 박근혜 후보가 최태민과 최순실의 '꼭두각시'라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84년 6월 좋은 환경을 버리고 성북동 집을 판 후 삼성동 최태민 씨 집 앞으로 이사했고, 박근혜 최태민 씨 집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최태민 씨의 딸인 최순실 씨 집이 있으며, 이 주변은 그들의 부동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최태민의 로열패밀리는 육영재단을 재산증식의 장으로 이용했고 박 전 대표는 육영재단 이사장이었지만 아무런 실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최태민과 그의 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유치원 원장이었던 최순실 씨가 현재 반포, 강남 등 부동산을 소유한 몇백 억대 자산가"라며 "최순실과 그 자매들의 재산은 과거 행적으로 추적하건대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재산들일 가능성이 있으니 철저히 추적해야 한다"
- 뉴시스 <"박근혜는 최태민과 딸의 꼭두각시"... 의혹제기> 중

김해호씨는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정책특보였던 임현규씨에게 자료를 전달받아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해호씨는 명예훼손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고, 항소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 후보가 당선되지 못하게 하려고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며 '성북동 자택 리베이트' 건이 허위사실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3. "최태민과 최순실, 정윤회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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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파>가 공개한 최순실씨과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영상. 1979년 6월10일 제1회 새마음 제전 당시의 모습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새마음봉사단 총재였고, 최순실씨는 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회장이었다.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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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 정윤회가 넘어서 최순실을 주목했던 기사들도 있었다. 2014년 12월에 각각 나온 주간경향의 <정윤회·최순실 실세설... 아니 땐 굴뚝의 연기?>와 주간조선의 <정윤회의 뒤에는 그녀가 있다>는 정윤회가 아닌 정윤회와 박근혜를 연결해준 최순실씨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 기사다. 그러나 이 당시엔 '의혹'에 가까웠으므로 큰 주목은 받지 못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최순실을 아는 주변에서 '어떻게 자신이 입고 다녔던 것과 똑같이 옷을 만들어 주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단적으로 '저도의 추억' 사진 때 입고 나온 옷과 목 칼라까지 똑같은 옷을 (최순실이) 전에 입고 다녔다는 것이다. 정윤회씨와 그런 남녀 사이라면 왜 그 전 부인과 박 대통령이 옷을 똑같이 입느냐, '박 대통령이 (최씨의) 아바타냐'라는 말이 나왔다."

"문고리 3인방은 생살이고 최순실은 오장육부다. 생살은 피가 나도 도려낼 수 있지만, 오장육부에는 목숨이 달려 있다"

"지난 2007년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측 박근혜 후보 검증팀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한 최측근 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박근혜에게 박지만은 가족이 아니라 애물단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최태민과 최순실, 정윤회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
- 주간경향 <정윤회·최순실 실세설... 아니 땐 굴뚝의 연기?> 중

"문건 파장의 주역으로 부각된 정윤회씨에 가려 있지만 최순실(58)씨는 박 대통령과 더 가까운 사이라고 일찍부터 얘기되어 왔다. 일각에서는 '최순실이 없었다면 정윤회도 없었다'고 말한다."

"2006년 지방선거 유세과정에서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곁에서 돌봐준 사람도 최순실씨였다는 것이 당시 당직자들의 말이다."
- 주간조선 <정윤회의 뒤에는 그녀가 있다> 중

4. 정권 실세로 불리었던 '7인회의 분노'

한때 정권 실세로 지목됐던 7인회 (강창희, 김기춘, 김용갑, 김용환, 안병훈, 최병렬, 현경대)는 2014년도 '정윤회 문건 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비선 실세'라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선 끝나고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하며, 누구와 상의하는지도 모른다고 밝힌다.

"세부적인 것은 모르겠어요. 대통령께서 누구를 불러 상의를 하는지 알 길이 없고. 다만 대통령은 가뜩이나 혼자인데 퇴근 후 청와대 안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서만 읽는 것인지, 이런 상식적인 걱정을 하는 거죠."
- 조선일보 <"박 대통령 스스로 분위기를 바꿔야... 훈풍처럼 좀 따뜻하면 좋지 않을까"> 중

세간에 7인회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한 배후세력이라는 설이 제기되자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등학교가 같다고 턱도 없는 이야기를 한다"라며, "보수라고 무조건 꼴통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분이 후보가 됐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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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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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7인회는 당선 직후 청와대와는 멀어졌다는 이야기이며, 당시 7인회가 아닌 '비선'에서 문창극씨를 추천했다는 추측이 계속 제기됐다. 박 대통령은 25일 대국민사과문에서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에게) 의견을 들은적은 있으나 청와대 보좌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밝혔다. 이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2014년 3월 28일 드레스덴 선언 연설문을 최순실씨가 '사전 검토'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문창극 총리 인선을 비롯한 박근혜 정부 초기의 인사난맥의 원인을 최순실씨가 제공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TV조선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씨가 민정수석실 인사에 개입한 정황도 포착됐다고 한다.

5. 대통령의 심리 정확히 꿰뚫은 말

"박 대통령은 심리적으로 의존 상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마저도 극소수다. 그리고 이들 소수는 '박근혜'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다. 박 대통령 본인도, 심리적으로 굉장히 의존하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수구 보수 세력의 공동 정권일 수 있다. 물론, '실세가 누구냐?'에 따라 정권의 주인이 달라질 테지만... (웃음) 
- 프레시안 <"박근혜는 연산군... 대통령 하기 싫다"> 중 

지난해 4월 프레시안은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의 인터뷰를 싣는다. 이 인터뷰는 박근혜 대통령의 심리가 연산군과 비슷하다고 하며, 겁이 많고 최측근에만 의존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게다가 위와 같이 현재 상황을 정확히 예언한 말들이 나와서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박근혜'를 다룰 줄 아는 극소수는 바로 최순실씨고, 연설문을 미리 받아볼 만큼 대통령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게 최순실씨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는 상황이다.




육영수 여사 저격,
사이비 종교인 최태민이 박근혜 옆에 접근

최태민은 죽은 육영수 여사의 성대모사를 하며 자신에게 고 육여사의 혼이 빙의 되었다고 박근혜를 속임
(속는게 시발 말이 되냐)

퍼스트 레이디 직을 수행하던 박근혜의 신임을 얻고(...) 최태민은 그녀의 전권을 위임.
정치,경제,언론에 영향력을 행사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크게 분노, 1977년 9월에 최태민을 직접 심문.

박정희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선우련씨의 비망록 중에 언급 된 최태민

정신 못차리는 박근혜
우둔하고 멍청한 탓에 이미 세뇌는 끝난 상태라
아버지 박정희의 만류에도 최태민을 곁에 둠


중앙정보부 및 기관들도 최태민에게 빡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섰으나

멍청한 박근혜는 최태민을 지켜준다.

그리고 최태민은 자식들 중 가장 자신의 영적인 짙게 능력을 이어 받았다는 최순실을 박근혜에게 소개한다.

이 들의 만행을 보다 못한 박근령과 박지만은 1990년 8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쓴다.


"순수한 저희 언니에게 교묘히 접근해 언니를 격리시키고 고립시킨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축재 행위가 폭로될까봐 계속해 저희 언니를 자신의 방패막이로 삼아 왔다"
"(최태민은) 경비원을 언니에게 붙여 우리 형제들과 완전히 차단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 형제들은 서로가 지척에 있으면서도 만나지도 못하고, 소식도 들을 수 없으며, 전화 대화마저도 못하는 실정"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최태민과 최순실은 이미 박근혜의 정신을 지배,장악.
이 후 박근혜는 대통령 되었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가기밀과 정책이 사이비종교인에게 휘둘리게 되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비박계는 그런 사실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명박이 옳았다.


한 나라의 정책, 안보, 외교가 사이비종교인에게 휘둘린 엄청난 사건.
이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1979년의 최순실, 1990년의 최태민 그리고...

땅콩껍딱 2016.10.23 00:12


오래 전 뉴스 속의 최태민, 최순실을 찾아보았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어쩌면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한 때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옛날 신문"이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검색해보니 지금은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서비스 하고 있었다.


접속주소 : http://newslibrary.naver.com/


접속하면 오늘 날짜의 뉴스 검색페이지로 접속할 수 있다.

검색할 수 있는 검색범위는 1920년 부터 1999년까지..

검색되는 신문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겨레

2000년 부터는 서비스 안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는 네이버 사정이니... 뭐..


암튼 대단한 네이버이다.

Paper 형태의 신문기사를 Digital 형태로 변환하고 검색까지 가능하게 만들다니..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나라가 아닌 연길에서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로 서비스를 구현했다는 여담도 들은 적이 있는 듯 하다.



여튼,


요즘 날마다 들리는 뉴스가 바로 최순실,


검색해보니 1979년 6월 11일자 경향신문에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



 

기사제목 : 박근혜총재 대학생제전서 치사 "협동으로 새마음 뿌리를"


기사 내용 중


- 서울시내 33개 대학교의 새마음봉사단원 7백50여명을 비롯, 서울시 새마음봉사대각구단원 7백50명, 새마음연예인봉사단원등 1천5백여명이 한양대운동장을 꽉채운'새마음제전'은 이날 상오 10시20분 최순실(단국대대학원1년)전국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회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

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최순실은 최태민의 딸.


이번에는 최태민을 검색해 보았다.


제일 첫번째 검색결과에 출력되는 검색결과는

"槿惠(근혜)와 槿暎(근영)사이…崔太敏(최태민)씨는 누구


1990.11.23동아일보 17면 정치 기사(뉴스)

槿惠(근혜)와槿暎(근영)사이┉ 崔太敏(최태민)씨는누구 4개教理(교리)합친「영세교」教主(교주) “꿈에 陸(육)여사가 돌봐주라 했다” 75年... 「사기꾼 崔太敏(최태민)을 엄벌해崔(최)씨에게 포위당해있..."



동아일보 주말판 '동아마당'의 17면 기사이다.


근혜와 근영사이...
최태민씨는 누구
4개교리 합친 '영세교' 교주
'꿈에 육영사가 돌봐주라 했다'
75년 근혜씨에 접근... 관계 밀착

지난 8월말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실에 고박정희대통령의 유자녀중 근영지만씨의 이름으로 한 통의 탄원서가 날아들었다.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있는 언니 박근혜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한달여후인 지난달 3일 중추절. 오랫만에 서울 중구 신당동 고박대통령의 사저에 모인 근영지만씨와 김종필민자당최고위원 한병기전캐나다대사등 '박씨가'의 가족들은 차례상을 앞에 두고 근혜씨의 '결심'을 재촉하고 있었다.

당시 근혜씨에 대한 나머지 가족들의 호소는 '최태민씨가 근혜씨를 등에 업고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 돌아가신 분들께 누를 끼치고 있으니 최씨와의 관계를 끊고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한 가족은 전했다.

근혜씨(39)는 서울 성동구 능동 어린이회관안에 있는 재단법인 육영재단의 이사장직과 '고 박대통령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부터 어린이회관은 고박대통령을 추모한다는 '숭모회'회원들의 최태민퇴진요구시위와 근혜시의 돌연한 재단이사장직 사임, 그리고 근혜씨가 단장으로 있는 근화봉사단원들의 근혜씨 사임반대시위 등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관심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어린이회관 주변에서는 '육영재단 운영권을 놓고 근혜 근영씨 자매가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다.' '숭모회등 외부세력이 근영씨를 내세워 막대한 규모의 재단재산을 가로채려한다'는 등 갖가지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근화봉사단원들은 '김종필'씨가 차기대권을 노리고 70만 근화봉사단원들의 표를 움켜쥐기위해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근혜씨를 내쫓아내려하고 있다'고 보고 여기저기 이같은 내용의 소문을 퍼뜨렸다.

여기에 근혜 근영 지만씨등 세 유자녀의 근황과 수수께끼의 인물 최태민씨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린이회관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눈동이처럼 커져 세인들의 호기심을 북돋우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어린이회관 분규의 두 주역격인 근혜씨와 숭모회 측이 각각 기자회견을 자칭하고 나섰다.

"지난 2년 동안의 노력으로 부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평가를 어느 정도 바로 잡았고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져 좀 쉬려는 것 뿐인데 왜 정체모를 단체가 나타나 남의 집안 일을 간섭하려드는지 모르겠다."(박근혜)

"숭모회는 박이사장을 배후조종, 고 육여사의 유업을 훼손하고 유자녀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최태민고문을 축출하기 위해 해고된 회관직원들과 청와대 경호실 출신들이 모여만든 단체일 뿐 근영씨의 측근은 아니다."(숭모회 이영도 회장)

이같은 주장을 놓고 볼 때 항간에 떠도는 자매간 또는 측근들 간의 '재산싸움'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지난 69년 고 육여사에 의해 기금 1천만원으로 출발, 지난 80년 자산총액이 41억원으로 평가됐던 육영재단의 자산은 부동산가격의 급등으로 현재 2천억원을 넘는다는 소문이지만 이는 재단 소유인 어린이회관 부지 3만여평의 부동산 시가를 단순 산출한 것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시말해 이같은 자산은 고박대통령가의 '사유재산'으로는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기념사업회 기금 18억원과 서울 중구 신당동의 고박대통령사저, 그리고 박대통령이 교사시절 자취를 하던 집을 사들여 수리한 경북문경의 '청운각'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18면으로 계속.



당시 청와대 마음대로 드나들며 각종 감투써
비리소문에 정보부 조사..박대통령 직접 신문
수렴청정식 재단운영 말단 직원 채용까지 '승인'
이름 7개나... 분규나자 '시골간다' 한달 전 잠적

17면에서 계속

추적 끝에 지난 19일밤 겨우 전화 통화가 이루어진 지만씨(31)는 '그렇게 엄청나다는 육영재단이 우리집 재산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뒤 "절대로 형제간의 재산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항간의 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만씨는 박태준 포철회장의 배려로 지난해 10월부터 전자부품 원료생산업체인 충남금산의 삼양산업촉탁이사로 있다가 올해초부터는 대표이사직을 맡아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쌓고 있는데 "박회장께서 일부러 경영이 어려운 회사를 내게 맡긴 것 같아 어께가 무겁지만 열심히 뛰고 있다."고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어린이회관 분규의 원인에 대해 지만씨는 "최태민목사라는 사람때문에 큰누나가 욕을 먹고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최씨를 큰누나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하는데 최씨가 반발해 생긴일"이라고 나름대로 규정했다.

그러나 작은누나인 근영씨와 둘이서는 힘들 것으로 생각돼 같은 생각을 지닌 '숭모회'의 도움을 받았을 뿐인데 이 때문에 측근들 간의 재단운영권 다툼이 아니냐는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지만씨는 말했다.

지난 15일 근화봉사단원들과 숭모회원들이 충돌하는 와중에서 언니의 뒤를 이어. 육영재단이사장직에 취임한 근영씨(35)도 취재기자들에게 지만씨와 같은 내용의 얘기를 한 뒤 "언니는 최목사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근영씨는 이사장 취임 후 그동안 소규모로 해오던 건강식품 운동기구 수출입사업을 정리하고 고육여사의 혼이 깃들어있는 육영재단의 일에만 전념할 뜻을 비쳤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신분을 감춘 채 혼자 살면서 로얄살롱승용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근영씨는 어린이회관 분규가 표면화 한 직후부터 서초동에 있는 외삼촌인 전국회의원 육인수씨(73)와 이복언니의 남편인 한병기 전 캐나다대사(59. 한국정경문화아카데미원장)의 집, 그리고 여관을 전전하며 언론의 추적을 피하고 있으며 인터뷰 요청에는 일제 응하지 않고 있다.

어린이회관 직원들은 근영씨가 이사장 취임 이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재단 이사장실에 두 번 들렸을 뿐 정상 출근을 하지 않고 있으며 전화로 신임 송재관관장에게 업무지시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20일 오전 서울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난 육인수씨는 "어젯밤 근영이로부터 가까운 시일 안에 어린이회관으로 초청하겠다는 전화가 왔다."며 "조만간 최목사의 재단전횡과 비리를 밝히는 자리를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처럼 근혜씨를 제외한 나머지 '박씨가' 사람들의 원성의 표적이 되고 있는 최태민씨(78)는 숭모회회원들의 '반최시위'가 터져나온 지난 달 말부터 부인 임모씨(70)와 함께 시골에 간다며 집을 떠난 뒤 행방을 감추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689의 25 뉴월드호텔 부근에 있는 최씨의 집은 대지 2백여평에 건평이 70~80평에 이르는 '저택'으로 시가가 20억원은 넘을 것이라는게 인근 부동산 소개소의 얘기다. 이 집은 대문이 굳게 닫힌 채 가정부가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어린이회관 분규의 직접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는 근혜씨와 최씨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소문의 시발은 고육영사의 피습 직후인 7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 초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의 교리를 합쳤다는 '영세교' 교주행사를 하던 최씨가 어머니의 비명회사로 극심한 정신적 허탈감에 빠져있던 근혜씨에게 '꿈에 돌아가신 육여사가 나타나 근혜가 국모감이니 잘 도와주라고 지시하셨다."는 허무맹랑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이후 구국선교단 대한구국봉사단 새마을봉사단 총재 등을 지내며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하던 최씨는 근혜씨를 등에 업고 재벌들로부터 돈을 뜯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비리를 저지르다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당시 일선 기자로 활동했던 월간 '인사이드더월드' 발행인 손충무씨(50)의 말이다.

또 최씨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78년 어느날 청와대에서 있었던 고박대통령의 '친국'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던 최씨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보고서를 받아든 박대통령은 보고서 내용에 격분, 김재규 중정부장과 백광현 중앙정보부안전국장(현 변호사)이 지켜보는 가운데 근혜양과 최씨를 직접 불러 '신문'을 했으나 근혜양이 '사실과 다르다.'며 최씨를 적극 옹호하고 나서자 신문을 중단하고 오히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부장은 지난 80년 1월 항소심공판을 앞두고 재판부에 보낸 항소이유보충서 중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영애의 문제'라는 장에서 "이 문제가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최씨는 지난 80년 계엄합수부에 체포돼 변호사법 위반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그후 최씨가 다시 근혜씨 주변에 등장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씨는 근혜씨가 지난 83년 전두환전대통령을 찾아가 육영재단을 직접 운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 재단이사장직을 맡은 직후부터 막후에서 '수렴청정'식으로 재단 운영에 관여해 온 것으로 어린이회관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다가 최씨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지난 88년. 근혜씨가 '고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킬 때 고문자격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난 80년 당시 계엄합수부에서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문제의 인물 최태민씨는 황해도 사리원 출생으로 일제때인 지난 42년 일본인의 추천에 의해 경찰에 투신, 해방 직후인 지난 47년에는 인천경찰서에서 사찰주임(경위)까지 맡았던 것으로 돼있다.

그는 이후 육군헌병대문관 종교단체간부 공화당중앙위원 기업체사장 등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최씨는 지난 65년 유가증권위조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이름을 방민으로 바꾸고 '영세교'라는 종교단체를 만들어 교주행세를 하게 된다.

숭모회가 제작 배포한 '7개의 이름을 가진 최태민 | 그는 누구인가' 라는 소책자에 따르면 최씨는 지금까지 최상훈, 최봉수, 최퇴운, 최방민, 최태민 등 일곱번이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민등록표에는 이름이 최태민으로 돼있다.

한때 육영재단에서 발간하는 "어깨동무'꿈나라' '보물섬'의 운영에 관여한 적이 있는 한 관계자는 "근혜씨가 이사장이 된 뒤부터 말단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도 과장 부장급 간부들이 직접 결재서류나 메모를 들고 최씨의 집을 찾아가 '승인'을 받고 나서야 박이사장의 결재도장이 찍힐 정도였다'고 최씨의 전횡을 폭로했다.

이 관계자는 도 고곽상훈 전국회의장 최세경 전한국방송공사사장 등 '박씨가'의 사람들이 아닌 공익성을 띤 인사들이 육영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운영했을 때는 아무런 '말썽'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결국 최태민이라는 사람의 사교적 영향력이 어린이회관에 침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도 공익재단인 육영재단을 근혜씨 등 유자녀가 장악하면서 '개인왕국화'됐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게다가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 근영씨도 당초에는 동생인 지만씨가 '가장'의 자격으로 육영재단의 운영을 맡을 것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재단이 유자녀들에 의해 계속 '상속'될 가능성이 많다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아무튼 관계자들의 해명에도 불구,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는 이번 어린이회관 분규로 새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들 세 유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앞으로 계속 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창혁, 홍은택 기자>




박근혜의 최태민 파일, 해부와 논단


지난 4월경에 시중에 『박근혜 CD파일』17개가 나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중 13개가 최태민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 구체적 항목까지 인터넷에 다 나열되어 있었고 이미 그 내용까지 흘러나와 아는 사람들에게는 다 아는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70년대에 최태민을 조사했던 신모 수사관이 현 정권에서 잘나가고 있다고 하니 세간에 흘러나온 내용 외에 얼마나 더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런 박근혜 CD파일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유인물도 같이 들어있었고 BBK가 담긴 이명박 파일도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어떤 세력에 의한 한나라당 지지추락을 노린 예비 교란작전인지 민심 떠보기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차피 정보와 수사력을 지닌 반 한나라당 진영이 더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라 크게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자체적인 검증에서 양 진영이 범여권과의 본선에서 서로 한방으로 당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흠결로 꼽고 있는 것이 이명박의 BBK와 박근혜의 최태민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김대중과 노무현이 “한나라당에게는 정권을 도저히 넘겨줄 수 없다.” 고 수없이 강조하는 것을 들어볼 때 그들이 최후 무렵에 보여줄 흑색선전이나 음해성비방은 한나라당의 자체검증은 비교조차 못할 정도로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지금의 이쯤에서 누락되기 쉬운 한나라당 자체의 검증뿐만 아니라 언론과 국민의 검증까지 거쳐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런 검증은 노골적인 음해성비방이 아니라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좋기 때문이고 나중을 위해서도 정당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결국 국민들이 뽑는 것이고 국민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숨긴 대통령에 의하여 또 다시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할 수 있는 한 더 자세히 깊게 알려 국민들이 적어도 대통령에 대하여만은 어느 정도 알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있을 본선에서 범여권 후보에 대하여서도 그와 동등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할 권리를 약속받은 길이기도 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조심스럽기도 하고 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도 한 최태민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먼저 한 마디 반드시 해둘 말이 있었다. 오늘 조선컴을 보니 모두가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었던 중일전쟁 때의 일본의 육탄3용사 이야기는 조작이라는 해당 언론사에 의한 자백성 보도가 있었다. 이처럼 언론의 보도라는 것도 어떤 사건의 진실을 안다는 것도 그 시대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도 그 진실성을 구별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어떤 역사적인 부분, 사건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모두가 묵시적 합의라도 한 듯 입을 다물어 다수에 의하여 전혀 엉뚱한 해석과 결과를 낳은 예를 잘 알고 있었다. 소위 그 유명한 정보사에서도 핵심이 바로 저기인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조사하지 않았고 그것은 대세와 이권과 분위기를 따름이었고 바로 그 자신이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해할 처지에 놓인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부터 이런 논점에 입각해서 신동아의 07년 6월호에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최태민 사건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박근혜의 최태민 사건이란 76년 12월 최태민이라는 사이비 목사가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그 자신은 총재가 되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하였고 그 후에도 역사적 파고와 겹쳐 국정중심세력에 의하여 배척과 추방 등등으로 박근혜으로의 접근을 중정과 보안사에 의하여 한 동안 차단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94년 사망할 때까지 박근혜의 지척에서 90년 육영재단 고문 등의 일을 돕게 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즉 이런 자를 끝까지 보호하려한 박근혜의 가치관과 판단력을 들어 어떤 일을 저질렀든 노무현의 자기편만 감싸주기와 같이 박근혜는 공정성을 앞세워야 하는 국정을 책임질 자격이 없다는 뜻에서 거론된 사건이었다. 우리가 본 박근혜는 자기중심관이 또렷하여 쉽게 남의 말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고 그런 면에서 장점인가 단점인가 몰라도 이것도 원칙과 조화의 문제였지만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으려하고 감싸주려 한다는 평을 받고 있기는 하였다.


그럼 최태민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의 이력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는 이유에서인지 23년(?)생 등등의 흔적이 있었지만 중정의 기록에 나오는 1912년생이 맞다고 본다. 27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해방전 3년의 순사에서 월남 후 경찰, 6.25전쟁 중엔 군의 비공식 문관, 기업가, 언론에 종사했으며 54년에는 가정불화로 승려, 비인가 중등교장, 농민회, 불교청년회, 건설회(임의단체)회장 등 이런 불교계 인맥으로 63년에는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중앙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65년에는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69년에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고 71년에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복합하여 창업한 영세계의 교리인 ‘영혼합일법’을 주장했고 74년에는 사이비종교가처럼 ‘태자마마’를 자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최도원에서 법명 세레명 등등 구국선교단 총재 취임을 계기로 개명한 현 호적상의 최태민까지 무려 7개의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평범한 일반인이 보기에도 쉽게 믿기 어려운 사람 측에 속했고 학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하였고 정신적 방황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과거의 흔적과는 관계없이 한 순간에도 변할 수 있어 인간의 선악을 함부로 구분짓기 힘들지만 최태민은 쉽게 종잡을 수없는 수수께끼같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선악을 떠나 도리어 이런 최태민의 복잡하고 믿을 수 없게 하는 이력이 일종의 선입감으로 작용하여 중정조사보고서를 곧이곧대로 다 믿지 못하게 하고 피해를 부풀리게 하거나 사건의 성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은 다분히 있었다. 이런 인물이 자부심에 가득 차 있는 권력의 중심부인 집단조직에 끼어들었을 경우, 그런 이력을 모르면 몰라도 안 이상 부정부패 여부를 떠나 그런 집단조직이 단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눈에 보지 않아도 너무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자신의 입장에서 그런 이력만 가지고 본다면 최태민을 어찌 대할지를 생각해보라. 보이지 않는 조직 내 다수의 묵시적 합의로 집단왕따로 배척하였을 것이고 한 번의 손짓에 벌떼처럼 달라붙어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눈에도 최태민을 직접 겪어보기도 전에 미리 권력의 핵심근처에 두기에는 최태민은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측에 속한다.


이런 최태민 문제가 일반에게 겉으로 처음 드러나게 된 것은 79년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사형판결을 받은 뒤 군법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보충서에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그 논거를 요약하면 이러하였다. 이런 문제성이 많은 최태민이라는 인물이 75년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자신은 총재가 되어 구국봉사단을 조직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박근혜가 관계된 일이라 아무도 문제삼지 못한다고 여러 사람들이 76년에 정보부장이 된 자신에게 상의해 왔다. 그래서 최태민을 조사해 보았더니 문제가 많아 최태민도 쫓아내고 박근혜도 그 조직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박정희에게 보고하였더니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고 반문하여 그 자신이 더 놀랐다고 하였다. 그 후 박근혜의 말과 김재규의 보고가 서로 다르자 77년 9월 박정희가 당사자들인 박근혜와 김재규와 사건을 조사한 백광현 국장을 불러 직접 친국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시정조치가 되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된 새마음봉사단으로 바뀐 일을 두고 말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 들어간 최태문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그 밖에 파악한 종합정보로는 05년10월 박정희 피살현장에서 살아남은 김계원 비서실장이 중정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의 사이가 나빠진 것도 이런 박근혜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차지철이 몸을 피하지 않았으면 대통령은 시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수사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金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핑계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차지철과의 힘겨루기인 불화설과 함께 한번 따져보기로 하자.


그 당시 차지철은 74년부터 경호실장을 하고 있었고 김재규는 76년부터 중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의 친국은 77년 9월에 있었으니 조사기간까지 더하면 핵심에 있던 각료들이 중정부장이 되어 청와대 핵심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김재규에게 최태민 문제를 떠민 것이 된다. 그리고 김재규는 마치 그들 사이에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로 표현되던 이 문제를 자신이 주도권을 쥘 기회로 여긴 것이고 먼저 청와대로 들어왔다고 생각한 차지철은 자연히 대립각을 세우며 반대편에 선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태민 문제는 권력욕에 차 있던 차지철과 김재규 대립에 있어서 표면상에만 나타난 아주 작은 문제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들의 대립과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이었다. 또한 최태문 문제에 대한 박정희 처리방식도 큰 문제가 없었고 그것은 선우련 공보의 비망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었다.


김재규와 박근혜의 서로 다른 주장에 판단이 잘 안 선 박정희는 친국까지 하며 최태민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그 진의를 가리고자 하였고 결국 그 자신의 판단을 보태고 중정보고서를 존중하여 친국 얼마 뒤 선우련에게 최태민 축출과 차단, 그리고 구국봉사단 해체를 명한 것으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중정보고서에도 일부 최태민의 독단에 의한 비리혐의만 나올 뿐 박근혜가 관련된 항목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우련이 이런 대통령의 명령을 박근혜에게 알리자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하얘지며 눈물을 글썽이자 안쓰러운 맘이 든 선우련은 다시 대통령에게 잘 말해볼 테니 기다려 보라고 한다. 며칠 뒤 선우련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는 돌아가신 영부인 역을 대신하고 있는데 기존의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이니 구국여성봉사단만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하고 다시 간청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간의 여러 마음의 고충을 토로하며 최태민을 차단하는 조건으로 절대로 잡음이 나지 않게 선우련의 책임 하에 허락한다. 과연 이렇게 전개된 과정을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몰랐을까. 속칭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를 했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돌아가는 사정에 대하여 낱낱이 보고받았을 것이 틀림이 없었다. 이번 최태민에 대한 보고와 친국에 대한 일로 김재규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더 떨어졌다는 흔적은 어디에서 없었다. 김재규는 그 후 79년 그 자신이 박정희를 시해할 때까지 중정부장 자리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피했다던 최태민과 박근혜에 대한 직간도 해낸 사람이 유신정권이 흔들릴 때는 왜 자리를 걸고 직간하지 못했을까. 누가 쑤시고 부추긴 사람이 있었겠지만 유신정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정권을 찬탈할 야욕이 없었다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나 할 말이 없었으면 최태민 사건까지 거론하였을까를 생각하니 누구의 농간인지 몰라도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김재규가 10·26 재판 때 “중정 백광현 국장이 최태민을 수사했다”고 밝힌 내용을 두고 백광현이 신동아와 전화통화한 기록이 있었는데 거기서 “김재규씨가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고 최태민 문제는 대통령 시해사건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백광현이 말하기를 그 당시 중정에는 3개국이 있었는데 자신이 관리한 3국에서 수사착수를 하지 않아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중정보고서에 의한 최태민의 혐의는 300만 구국봉사단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횡령 14건(2억2천여만원)을 포함하여 사기, 이권개입, 회계부정행위, 추문 등 도합 44건이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300만 구국봉사단 조직이라는 말도 사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 중 하나였다. 뒤에 나오겠지만 최태민이 처음 주도한 것은 구국선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대표적 4건을 보면 76.1월 주택구입자금 1000만원, 77.3~6월 부인명의로 6000만원, 76,11~77,8월 가명 24계좌에 1억 5천만원, 77,5월 부인명의 승용차 1대 300만원의 횡령이었고 이 4건만 합해도 2억2천5백만원의 횡령이 되었다. 이런 44건에 들어있는 많은 건수도 수사관들이 철저히 조사했으나 워낙 교묘히 처리해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최태민이 구국봉사단 총재로 언론에 등장하는 시기는 75년 12월 31일이었고 박정희의 친국이 77년 9월 경에 있었으니 최태민이 독단으로 전횡할 수 있었던 기간은 1년 9개월 정도가 전부였고 그 이후는 박정희와 중정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최태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처럼 부정부패로 큰 문제를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77년 말 박근혜가 구국여성봉사단 총재가 됨으로서 그 산하로 많은 여성단체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다른 조직을 잠식해야 하는 무모한 조직확대로 각종마찰과 부작용을 야기하여 여성단체들의 반발을 샀던 면은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서류상이든 실질상이든 그 산하에 들어온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반발을 유도한 어떤 세력에 의한 의도적 부추김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10·26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는 최태민 비리의혹을 수사하였는데 이 수사를 이학봉 처장이 맡았다고 하였다. 이학봉에 의하면, 80년 초 최태민은 서빙고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이후 강원도로 보냈는데 삼청교육대는 아니라고 하였다. 비리혐의는 별로 없었고 박근혜의 연루의혹은 전혀 관계가 없었고 다만 문제소지가 있어 자숙할 필요가 있었고 최태민을 차단시켜놓을 필요성이 있어 그리하였지만 (1년여동안)오래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박근혜는 이런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하여 04년 7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분은 저를 많이 도와주셨고 그래서 음해도 많이 받았지만 정권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친척까지 이 잡듯이 뒤지고 조사도 많이 했지만 아무 것도 드러난 것이 없지 않은가”하고 답하여 그런 많은 의혹들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태민 사건 속에는 어떤 음모가 숨어있고 왜 박근혜는 이런 모든 의혹들을 음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을까.


어떤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그런 심리상태를 알아보자.

―중정을 제쳐두고 경호실 정보처에서 다시 최목사를 조사하려니까, 박의원이 밥도 안 먹고 1주일 간 두문불출해 조사를 포기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적 없어요. 저는 두문불출하고 밥 안 먹고 그런 일 안 해요. 얼마나 엄청난 모략이에요. 제가 편안하게 온실에서 자랐다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세상이 어떻다는 걸 잘 아는 이유가,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 일 거예요』


―국가정보기관에서 최목사의 전력이 의심스럽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하면 따르는 게 온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권고하던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


―최태민 목사가 신군부에 구속돼서 강원도 인제로 쫓겨 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하셨나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말한다고 됩니까. 그때 「유신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최목사를 한 번 더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에 간 게 아니고 무슨 군부대에 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짜 감옥에 갔든지, 돈을 물어냈든지 그렇게 됐겠죠』


만약 박근혜의 이런 말이 맞다면 이런 말의 진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박근혜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기에 자신에 대한 언론보도내용조차도 다 이러하니 그런 근거없는 뜬 소문에 불과한 최태민에 대한 조사내용과 언론보도를 어떻게 다 믿어줄 수 있겠는가. 박근혜와 최태민은 서로 동병상련의 피해자가 되어 서로 더욱 감싸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15년간 이어진 관계로 인하여 최태문과 박근혜의 염문설까지 떠도는 판이었으니 그리고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김정일과의 1시간 독대를 상상의 염문설로 써대는 사람도 있었고 그걸 옮기는 언론매체도 있었으니 한번 생각해보라.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가당치않은 이야기들인지를,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붙는 유리벽 생활 속에서 20대 중반의 귀한 처녀인 박근혜와 60대 중반인 최태민의 염문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설명이 잘 안 되니 최태민이 요승이라서 최면술로 박근혜를 홀렸다나. 이런 극악무도한 못된 놈들,


최태민의 많은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백광현과 이학봉은 문제점이 좀 있는 것 같지만 실체규명불가라는 판정은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다수가 소문의 소문으로 그럴듯하게 말해도 무슨 큰 증거라도 대는 양 많은 양의  언론보도들을 갖다 대어도 어떤 사건의 진실은 때로는 당 사자가 아닌 이상 그 해답을 참으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었다. 음해성 모략이 이처럼 무서운 것은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왜곡조작을 교묘히 섞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사실과 진실로 꾸며 그 구별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 최태문 사건에 대한 여러 글을 비교하다보니 다른 진실과 말하며 사실과 그럴듯한 허구를 교묘히 섞어 허구마저 진실로 포장하는 무수한 글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잘 짜여진 집단적 모략이라면 그들의 집요한 끈기는 참으로 무서울 지경이었다. 일일이 출처를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글의 대부분 자료출처는 박근혜와 최태민 비방 글에서 찾아왔음을 밝힌다.


최태문 사건을 파헤치다보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그 당시 어떤 경향신문 기자의 추적과 자료에 의하여 시작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괜한 기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지만 동경지국장 월북으로 야기된 64년의 경향신문의 매각사건과 이와 연계된 74년의 MBC와의 통합으로 인하여 경향신문이 5.16장학회 산하에 들어가게 된 일련의 일들, 이 경향신문 사건은 현 정권의 과거사위에 의하여 7대의혹사건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지만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지 몰라도 77년초 그 당시 그 경향신문 기자가 김재규에게 73년의 김대중 사건 해결과 최태민 관련자료들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에서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를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이런 자료를 넘겨받은 김재규는 백광현에 넘겨주고 극비수사를 명령했고 6개월 간 철저한 조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자세히 알기 위해 그 당시로 돌아가 보자. 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저격으로 서거하자 박근혜는 허하고 허한 마음을 어디 둘 곳을 몰라 할 때였다. 75년 1월경 그런 그녀에게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의 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편지 세통이 연이어 날아왔는데 그런 편지를 선별한 경호원이 박근혜에게 건네주었던 것 같았다. 그 편지내용에 대해서도 경호원이 흘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세간에 자세히 흘러나왔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최태민의 꿈에 국모님(육영수)이 현몽하여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 큰딸은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다.”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기자와의 대화 한 대목을 보자.

 ―최태민씨가 박의원에게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도와드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만나게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한 번 청와대에서 만났죠. 여러 가지로 나라를 걱정하시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선교단을 할 적에 좋은 뜻으로 하니까 도와 드리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했어요』

―어머니가 현몽했다는 유의 얘기는 사실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런 문제들이 왜 나오냐면, ...』

―여성잡지들에 그런 얘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왜 법적 대응을 안 했습니까.

『인터뷰에 응하고,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질문에 다 답했어요. 꼭 법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까』


잘 대답을 하던 박의원은 최태민 관련 질문이 10분 이상 이어지자 『저의가 뭐예요』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공인으로서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의 인터뷰는 더 이상 못 하겠다』는 그녀를 진정시켜 인터뷰를 계속했다. 반복된 이런 질문을 만나는 기자마다 다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을 것이었다. 사실 『그건 아니에요,』라는 말은 주로 부분만 부정할 때 쓰는 말이다.


사실 이런 현몽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더라도 그 속에는 그 흔한 현몽보다는 그보다 더 강한 무엇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편지가 세통이었다고 하였으니 처음 편지라면 몰라도 그 후의 편지는 아무도 뜯어보지 못했을 것이고 두 사람만의 사적 공간이라 다른 사람들이 알 수도 없는 내용이었고 특별히 왈가왈부할 일은 못 된다. 하여튼 박근혜는 이런 편지속의 어떤 내용에 강한 인상을 받고 호감을 가졌다는 것은 75년 3월 6일 청와대에서의  최태민과의 면접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최태민 해부


육영수 대신에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떠맡고 나선 것은 큰딸 박근혜(朴槿惠)였다. 20대 초반이던 박양은 박-카터 정상회담 뒤의 만찬 등 모든 공식행사에 대통령과 함께 나갔다. 그는 1976년 4월 구국여성봉사단을 만들어 최태민이란 사람을 총재로 앉혀 충·효·예의 실천운동을 벌였다. 최태민은 의혹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묘하다. 최태민은 1975년 1월께 박근혜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필자 주 : 육영수를 가리킴)을 뵈었읍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읍니다……." 이런 요지의 야담 같은 내용이었다. 근혜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박근혜는 편지를 다 읽고는 직접 최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렇게 해서 최태민을 만난 근혜양은 단박에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때 70대 노인인 최태민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동안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최태민이 쉽사리 근혜양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데 대해, 최씨가 최면술과 심령술에 도통한 사람이라는 설도 있었다.
 
 박근혜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최태민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박근혜는 친면 있는 치안본부의 고위간부에게 최태민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 간부가 최태민을 만나러 갔더니, 최씨는 당황한 모습으로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간부가 근혜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최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이 간부는 뒷조사를 시켰다. 최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 불미스러운 점들이 드러났다. 이 간부는 직접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박대통령은 이 정보를 근혜양에게 알려주고, 주의를 주었다.
 
 박대통령은 으례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발끈한 박근혜는 치안본부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하였다. 이 간부는 그뒤로 박대통령과 근혜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근혜에게 최태민과의 관계를 끊도록 건의한 비서 3명도 그만두었다. 근혜는 최태민을 직접 불러들여 만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최태민이 추천한 김모씨가 근혜의 비서가 되었다. 1978년 김재규(金載圭)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최태민의 비행을 검사 출신인 백광현(白光鉉) 안전국장에게 조사시켰다. 박승규(朴升圭) 민정수석비서관이 여러 차례 비행보고를 대통령에게 올렸는데도 먹혀들지 않아 그가 나섰다는 것이다.
 
 최씨가 여러 재벌 총수들이 구국봉사단에 기탁한 수십억 원을 횡령한 사실, 여비서들과의 불륜 등이 드러났다. 김재규 부장이 이 조사 결과를 보고하자 박대통령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확인작업을 벌였다. 옛 임금의 친국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대통령은 한쪽에 김재규 부장·백광현 국장, 그 반대편에 박근혜·최태민을 앉히고 직접 신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김·백 두 사람에게 최씨의 비행을 보고하게 했다.
 
 대통령은 딸과 최씨에게 "이게 맞느냐?"고 물었다. 딸은 울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최씨는 "고문을 당해서 허위 자백을 했다"고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대통령은 검찰에 또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의 조사 결과도 김부장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최태민은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예총재로 뒤로 물러난 것 같았지만 총재가 된 박근혜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다.
 
 김재규는 박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10·26뒤 강신옥(姜信玉) 변호사에게 털어놓았다.
 
 "각하, 일본도 보십시오. 큰영애는 적십자사 같은 데나 관여하도록 해야지 이런 데서는 손을 떼게 해야 합니다." 박근혜는 울면서 김부장에게 "왜 남의 프라이버시 문제까지 조사하느냐"고 항의했다. 김부장은 박양의 수첩까지 압수하여 공정하게 조사했고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겠다"면서 제발 손을 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명예총재로 물러나서도 구국여성봉사단에 대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최태민에게 집요한 관심을 두었다.
 
 1979년 5월에 "최목사가 계속해서 대통령 큰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 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5·17 직후 계엄사에서는 최태민을 붙들어가 부정사실과 축재사실을 확인했으나 대통령의 가족에 대한 배려에서 잘 봐주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범행 동기를 수사한 한 관계자는 "김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고 했다. 박정희가 큰딸을 싸고 돈 것은 그의 정신에서 일어나고 있던 큰 변화의 한 표출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 뒤 혈족의 이권 개입을, 너무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철저히 막아왔다는 것은 유명하다. 누님 집에 경호원을 배치, 찾아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하게 했고, 수사기관을 시켜 친족을 자처하는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사, 혼을 내주기도 했었다.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 친척을 강제 사퇴시킨 적도 있었다. 그런 박대통령이 육여사의 사망 뒤로는 자기 자녀들마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나약한 면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자식들에 대해 느꼈을 측은함이 박대통령을 감상적으로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박정희는 아들 지만이 말썽을 부리고 다니는 것을 알고는, 직접 막대기로 아들을 수십 번이나 때리며 "대통령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너하고 나하고 같이 죽자"고 오열한 적도 있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 측근 인사의 말이다. 김재규는 10·26뒤 강신옥 변호사와의 옥중 면담에서 박지만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지만군이 육사에 재학중에 무단외출을 하여 ㄷ재벌 총수 아들과 함께 여자들과 어울려 다닌 것을 육사교장이 알고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이었다. 김재규는 대통령에게 "군을 위해서도 퇴교시켜 유학을 보내도록 합시다"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어머니가 없어서 그놈이 잔정을 받지 못해 그러는 모양이다"면서 아들을 직접 혼내주더라는 것이 김재규의 얘기였다.


2014년 박영선 "이재만, 밤에 자료들고 외출"…

2007년 MB캠프 "朴당선땐 최씨일가 국정농단"

입력 : 2016.10.27 03:00 | 수정 : 2016.10.27 07:56

[최순실의 국정 농단]

- 이번 사태 예견한 발언 화제
2014년 '문건 유출' 박관천 "우리나라 권력, 최순실이 1위"

최순실씨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자 2~3년 전부터 이런 일을 예견한 정치권 인사들의 발언과 의혹 제기가 주목받고 있다. 구체적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청와대나 정부가 강하게 부인해 논란이 확대되진 않았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4년 7월 7일 국회 운영위원회 결산 심사에서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에게 "밤에 외출을 자주 하신다고 들었다"며 "서면 자료를 잔뜩 싸 들고 외출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박 의원은 "(서류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신다는 얘기를 제가 들었다"고 했다. 이에 이 비서관은 "제가 하다 만 그런 서류라든지 또 집에 가서 보기 위한 자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 의원이 "청와대 서류를 함부로 집으로 가져가냐"고 따지자 "제가 읽고 있는 책이라든지 제가 가지고 있는…" 하고 말을 흐렸다.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은 최근 한 언론에 "최씨 사무실 책상 위에 30㎝ 두께 청와대 보고 자료가 항상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본지 통화에서 "정부 고위 관계자에게서 구체적 제보를 받아 질문한 것"이라며 "당시 이 비서관 답변 태도에서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청와대 행정관 출신 박관천 경정은 2014년 말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은 최순실씨가 1위, 정윤회씨 2위,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고 했다. 당시에는 '정윤회 문건 유출'로 최씨보다 남편 정씨가 주목받는 상황이었다. 비슷한 시기 야당 의원이던 정세균 국회의장은 당 회의에서 "국정 농단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특히 일부 언론이 제기한 '최순실 몸통설'에 주목한다"고 했다. 당시 야당에는 최씨 관련 제보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딸 정유라씨 승마 문제나 최씨 측근 관련 의혹 제기도 있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2014년 4월 8일 본회의에서 '마사회 마방 201호'의 영상을 틀며 "정윤회 최순실 부부의 딸인 정 아무개 선수의 말이 저 마방에 지금 있다. 세 마리가 있는데 관리비를 내지 않는다"며 "이것은 사적 채널에 의해서 국정 통치가 된 중대한 사건"이라고 했다 . 정부 측은 "국가대표 선수라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2007년 6월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 캠프의 장광근 대변인은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될 경우 최씨 일가에 의해 국정이 농단될 개연성이 없겠는가"라고 했다. 당시 이명박 캠프에서 여러 인사가 의혹을 제기했고, 당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도 질문이 나왔지만 박 대통령이 강하게 부인했다.




[최순실 단독 인터뷰] “연설문 수정, 신의로 한 일인데…국가 기밀인줄 몰랐다”

마침내 입 연 최순실… 일문일답 /

국민에 죄송… 죽고 싶다 /

팔선녀·자금특혜… 소설이다 /

건강악화… 당장 비행기 못 탄다

'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었을 때 도와준 인연’(박근혜 대통령), ‘대통령 비선 실세’, ‘대통령의 오장육부’ 등 극단적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순실씨. 그가 26일(현지시간) 베일을 벗고 언론에 모습을 처음 드러냈다.

최씨는 이날 검은색 뿔테 안경과 스포츠 복장, 운동화 차림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나타났다. 독일 생활이 힘들었는지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박 대통령과 딸 정유라씨 얘기를 할 때에는 간간히 눈물을 쏟기도 했다.

취재팀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최씨와 마주앉았다. 물어볼 말이 많았지만 최씨가 자주 흐느끼는 바람에 인터뷰가 이어지지 않고 자주 끊겼다. 최씨는 인터뷰에서 그동안 세간에서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일관되게 부인했다. 박 대통령 연설문 유출건에 대해서는 일부 시인했지만 비선실세 연루설 등 대부분 의혹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아 오히려 논란을 증폭시켰다. 다음은 일문일답.

고개 숙인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 청와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비선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씨에게 연설문 등을 전달한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앞서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대통령 연설문 유출관련 

― 박 대통령이 연설문 유출을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까지 했는데.


“박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다. 나라만 생각한 분이 혼자 해보려고 하는데 안돼 너무 가슴 아프다. 대통령이 훌륭한 분이고, 나라만 위하는 분인데, 그런 분에게 심적으로 물의를 끼쳐드려 사과 드리고 싶다. 정말 잘못된 일이다. 죄송하다.”

― 구체적으로 대통령 연설문의 무엇을 어떻게 수정한 것인가.

“대선 당시인지 그 전인가 했다. 대통령을 오래 봐 왔으니 심정 표현을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드리게 됐다. (박 대통령의) 마음을 잘 아니까 심경 고백에 대해 도움을 줬다. 그게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기밀인지도 몰랐다.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다면 손이나 댔겠느냐.”  

최순실 PC 저장 파일들 지난 24일 JTBC는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과 국무회의 모두발언 등의 자료를 실제 연설 전에 전달받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최씨 사무실에 있던 태블릿 PC에 저장된 파일들을 공개한 방송화면.  
JTBC 방송화면 캡처
― 지금 잘못했다고 생각하는지. 

“왜 그런 것을 가지고 사회 물의를 일으켰는지 박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이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국민 여러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 정말 죄송하다. 제가 신의(信義)로 뭔가 도와주고 싶었고, 제가 무슨 국회의원이 되거나 권력을 잡고 싶은 게 아니었다.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기 짝이 없다. 너무 잘못됐다. 대통령에게 폐를 끼친 것은 정말 잘못했다. 신의 때문에 했는데 이를 어떻게 하면 좋으냐.”

“어려울 때 도와준 인연”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로 지목되고 있는 최순실씨(대통령 왼쪽)가 1979년 6월 10일 한양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 행사장에서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뉴스타파 홈페이지 캡처
◆국정개입 의혹 관련 

― 청와대의 대통령(VIP) 자료를 받았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당선 직후 초기에는 이메일로 받아본 것 같다. 민간인이어서 그것이 국가기밀이나 국가기록인지 전혀 몰랐다.”

― 특히 당선자시절 이명박 대통령의 면담 내용이나 외교안보 관련 문서 등도 봤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뭐가 진실인지 잘 모르겠다.”

국정농단 의혹에 휩싸인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씨가 26일(현지시간) 오후 독일 헤센주 한 호텔에서 세계일보 기자와 인터뷰 하고 있다. 최씨는 “청와대 자료 유출에 대해 국민과 대통령께 마음의 상처를 주게 돼 죄송하다”고 말했다. 인터뷰 사진은 본인의 요청으로 측면 얼굴만 촬영했다.
헤센=류영현 기자
― 서울 강남 사무실에서 대통령의 보고서를 매일 봤다는 주장도 나왔는데.

“말도 안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 지칭하는 듯)이다. 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협박도 하고 5억(원)을 달라고 했다.”
 

― 청와대 정호성 비서관이 청와대 문서를 전달했다고 하는데.

“저는 정 비서관이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만난 적이 없다.”

― 태블릿 PC를 통해 VIP보고서를 사전에 받아봤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태블릿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그것을 쓸지도 모른다. 제 것이 아니다. 제가 그런 것을 버렸을 리도 없고, 그런 것을 버렸다고 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남의 PC를 보고 보도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어떻게 유출됐는지, 누가 제공한 지도 모른다. 검찰에서 확인해봐야 한다. 취득 경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인사개입 의혹 

― 당시 안종범 경제수석이나 김종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 등을 통해 국정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도 있는데.
 

“안 수석의 얼굴을 알지도 못한다. 그들도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김 차관의 경우 저와 연결하려는 ‘그림’인 것 같다. 한양대와 관련해 아는 사람이 없다.”

― 청와대 제2부속실 윤전추 행정관 인사 청탁 등 인사 개입 의혹도 제기되는데.
 

“나이와 연배도 달라 내가 전혀 추천이나 인사 청탁은 없었다. 이게(인사청탁 의혹) 전부 저를 엮어서… 사람이 살다보면 이렇게 알고 저렇게 알고 연관되는 것이다.”

― ‘팔선녀’라는 비선모임을 만들어 국정에 개입한다는데.

“처음 듣는 말이다. 팔선녀는 소설이다. 그와 같은 그룹을 만든 적도 없다.” 

◆미르 및 K스포츠재단 관련 

― 미르 및 K스포츠재단으로부터 자금 지원 및 용역 특혜 등의 의혹이 제기돼 왔는데.
 

“절대 자금 지원을 받은 것이 없다. 감사해보면 당장 나올 것을 가지고 (돈을) 유용했다는 건 말이 안된다.”
 

― 차은택 이사나 가까운 사람들을 이용해 이들 재단 운영을 사실상 좌우한다는데. 

“차씨와 가깝지도 않고 옛날 한번 인연이 있었을 뿐이다. 그 인연으로 나를 몰아붙이는 것 같다. 지금은 연락도 안한다. 저는 폐쇄적으로 살아왔다. 극히 폐쇄적으로 만난 사람들을 연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왜 저하고 연관시키느냐.”

― K스포츠의 노숭일 부장, 박헌영 과장 등이 대신 역할을 한다는데.

“노 부장이나 박 과장의 이름은 들어서 안다. 본 적은 있다. 극히 제한된 사람만 본다.”  

―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국장은 국정에 개입하고 있다고 폭로했는데.

“(이 전 사무국장은)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같이 일한 적도 없다. 저를 끼워 이슈를 만든 것 같다. 그 사람들 싸움에 왜 저를 끌어들이고 그런지 모르겠다.”

◆현재 생활 

― 그간 독일에서 어떻게 지냈느냐. 건강은 어떤가.

“저는 오늘도 약을 먹고 죽을 수 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 너무 지쳤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고자 했는데 여기까지 기자들이 와 우리를 범죄자로 만들어놨다.” 

― 독일에서 어떻게 집을 구입했느냐. 여러 말들이 나온다.

“(정)유라 아버지(정윤회)도 떠나서(이혼해) 독일로 이주하려고 왔다. 딸이 심리적으로 너무 힘들고 최악의 상황에서 딸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를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논란을 제기하니까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가 없어 장기 체류 목적으로 온 것이다. 집이 필요해 정식 절차를 거쳐 구입자금을 들여왔다. 집을 구할 때 36만 유로(약 4억5000만원)쯤 들었는데, 은행의 예금담보와 강원도 부동산을 담보로 해 서울에서 36만 유로를 만들어왔다. 집을 3, 4채로 부풀린 것은 완전히 오보다. 집을 두 채나 구입할 일도 없다.”  

― 국내에서 빨리 들어오라는 여론도 있는데.

“현재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신경쇠약에 걸려 있고 심장이 굉장히 안좋아 병원 진료를 받고 있어서 돌아갈 상황이 아니다. 더욱이 딸아이가 심경의 변화를 보이고 있어 두고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건강이 회복되면 용서를 구하고, 죄가 있다면 받을 것은 달게 받겠다.”

헤센=류영현·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박지원 “朴대통령, 최태민의 ‘영생교’에 빠져서 이런 일을…”

기사입력 2016-10-26 19:40   

[헤경제=이슈섹션]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최 씨 일가가 만든 종교에 심취해 일어난 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원내대표 겸직)는 26일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미르재단도 미륵과 연결된다고 한다. 최순실 씨의 선친인 최태민 씨는 스스로 미륵이라고 했다”고 운을 뗐다. 박 위원장은 이어 “지금 상황은 박 대통령이 최태민-최순실의 사교(邪敎)에 씌어서 이런 일을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고 의구심을 제기했다.


박 위원장이 말한 ‘사교’는 최태민 씨가 1970년대 불교와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해 만들어 스스로 교주가 된 ‘영생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영생교는 원래 신이었던 사람이 원래의 신체로 돌아가 신이 되면 불사의 영생체가 된다는 교리를 펼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태민 씨는 영생교를 접은 뒤 1975년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일정표에 최순실 씨가 자필로 보라ㆍ빨강ㆍ하얀 색깔을 써서 대통령의 옷 색깔을 지정했다”면서 “전문가의 얘기를 들어보니 박 대통령의 사주와 색깔의 궁합을 맞춰 최 씨가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위해 색깔을 지정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최 씨가 그냥 측근이 아니고 ‘주술적 멘토’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믿을 수가 없다”면서 “만약 그런 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대한민국 국정시스템이 대응해야 한다. 박 대통령 개인에게 맡길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박제균의 휴먼정치]두 父女의 10·26

박제균 논설위원

입력 2016-10-27 03:00:00 수정 2016-10-27 03:00:00


박제균 논설위원
 역사는 때론 잔인한 얼굴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날, 그 딸의 비극에 대해 글을 쓰려니 마음이 무겁다. 37년 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의 아버지 최태민을 증오했다. 동아일보가 장기 연재했던 시리즈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기자)을 보자.

김재규, 최태민에 분노해

 “그(김재규)는 박근혜 양을 붙잡은 ‘목사’ 최태민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김재규는 각하(박정희)에게 최의 비리를 보고했으나 박근혜 양이 최를 비호해 각하 앞에서 대질 친국(親鞫)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천하의 정보부장이 ‘사이비’ 목사와 나란히 앉아 우김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이었다. … 대통령 식구들, ‘로열패밀리’ 때문에 생긴 김의 스트레스도 10·26의 한 원인이었다고 당시 정보부 국장들은 증언하고 있다.” 

 시해 사건을 조사한 합동수사본부의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국장의 진술은 이렇다. “김 부장은 ‘최태민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아버지(박정희)의 기일(忌日)에 그 딸(박근혜)이 아버지 죽음의 한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최태민)의 딸(최순실) 때문에 초유의 위기를 맞은, 역사의 기막힌 우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정희 대통령 말기 국정을 농단한 차지철 경호실장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면 박근혜 대통령 시대에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은 딸을 정치적 죽음으로 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는 1972년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영 박정희’와 ‘올드 박정희’로 구분된다. 그가 무력으로 집권한 독재자란 사실은 같지만, ‘영 박정희’는 민족을 가난에서 구하고 근대화를 달성하겠다는 열정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남의 말을 충분히 들었고, 때론 반대 의견도 수용하며 능률적인 통치를 해나갔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올드 박정희’는 권력에 취했다. 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에는 더 나빠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통치보다 권력 유지에 집착했다. 대통령 주변의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대해 진언하면 비판받은 당사자에게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식이었다. 권력 핵심부가 곪을 대로 곪아 갔다.

 10월 유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스무 살이었다. 육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웠다. 통치에 능했던 ‘영 박정희’보다 권력에 집착했던 ‘올드 박정희’에게서 정치를 배운 것이 오늘날 박 대통령 비극의 출발점이다. ‘올드 박정희’는 고독했고, 그럴수록 몇몇 측근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보낸 박근혜 대통령도 고독했고, 그럴수록 최태민-최순실 부녀 같은 ‘사이비류(流)’에 의지했다. 

차기 대통령의 자격

 이번 ‘최순실의 난(亂)’을 겪으며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한국적 대통령제가 지속되는 한 차기 대통령은 무엇보다 심각한 ‘트라우마’가 없어야 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대통령직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국민과 같은 눈높이에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때 언론사는 각 대선후보의 신상명세표 같은 걸 작성한다. 물론 후보 본인이 아니라 캠프에서 답해 준다. 지난 대선 때 측근이 신상명세표를 채우기 위해 박 후보에게 ‘친구 관계’를 묻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고 한다. “친구?… 없어요.”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61027/81025053/1#csidx655ed8b0a280f7ea2780613dea9edf0


박지만 “누나, 최순실-정윤회 얘기만 나오면 최면 걸려”

신진우기자

입력 2016-10-27 03:00:00 수정 2016-10-27 11:04:59


[최순실 게이트]26일 박정희 前대통령 추도식에 불참


 
“‘누나가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정윤회 이야기만 나오면 최면이 걸린다’고 박지만 EG 회장(사진)이 말하곤 했다.”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던 전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 박관천 전 경정(50)이 이같이 밝혔다고 채널A가 26일 보도했다. 채널A에 따르면 박 전 경정은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 회장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최순실, 정윤회”라며 “박 회장이 요즘 많이 외로워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2014년 당시 사정 당국자에게 “피보다 진한 물도 있더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전 경정은 2014년 최순실 씨의 전 남편 정윤회 씨의 국정 개입 의혹을 담은 서류 등 청와대 내부 자료 17건을 박 회장 측에 유출한 혐의(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로 기소됐다. 지난해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4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났다.

 한편 박 회장의 한 측근은 이날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박 회장이 며칠 전 ‘참담하다’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박 회장은 대통령께 ‘제발 문고리 애들 정리하라고, 거리 두라는 말도 했었다’면서 안타까워했다”라고 덧붙였다. 이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37주기 추도식이 열렸지만 박 회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도 예년과 같이 불참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61027/81025232/1#csidxf6fc023e57a0f09ab9720660414f9e8




“언니를 최태민에게서 구출 해달라” 25년 전 근영·지만 씨의 탄원 재조명

박태근 기자

입력 2016-10-27 15:17:00 수정 2016-10-27 16:53:52


최순실 씨를 비롯한 비선실세가 국정을 농단했다는 의혹이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최순실 씨의 아버지 최태민 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다룬 25년 전 기사 한편이 눈길을 끈다. 

박근혜 대통령이 1990년 서울 성동구 능동 어린이회관 안에 있는 재단법인 육영재단의 이사장직과 고(故) 박정희 대통령∙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을 때 일이다. 

동아일보는 1990년 11월 23일자 신문에 ‘근혜와 근영 사이 최태민씨는 누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당시 기사를 원문 그대로 정리하면 내용은 이렇다. 그 해 8월 말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에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유자녀 중 근영∙지만 씨의 이름으로 한 통의 통의탄원서가 날라왔다.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있는 언니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 차원에서 구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한달 여 후인 10월 3일, 중추절을 맞아 서울 중구 신당동 고 박 대통령의 사저에 모인 근영∙지만씨 등 가족들은 차례상을 앞에 두고 언니(근혜)의 결심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가족 중 한 사람은 “가족들의 호소는 ‘최태민씨가 근혜씨를 등에 업고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 돌아가신 분들께 누를 끼치고 있으니 최씨와의 관계를 끊고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 나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박정희 대통령 추모 모임이라는 ‘숭모회’회원들은 “박근혜 이사장을 배후조종, 육 여사의 유업을 훼손하고 유자녀들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최태민 고문을 축출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반면 한편에서는 ‘숭모회 등 외부세력이 근영 씨를 내세워 막대한 규모의 재단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OOO이 차기 대권을 노리고 벌인 일이다’ 등 갖가지 소문이 난무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 이사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부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평가를 어느 정도 바로잡고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져 좀 쉬려는데 왠 정체모를 단체가 나타나 남의 집 일을 간섭하려드는지 모르겠다”고 분노했다. 

지만 씨는 당시 동아일보에 “최태민 목사라는 사람 때문에 큰누나가 욕을 먹고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최 씨를 큰누나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하는데 최 씨가 반발해 생긴일”이라고 주장했다. 근영 씨 역시 “언니는 최 목사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태민 씨의 집은 서울 역삼동의 뉴월드호텔 부근에 있었는데, 대지 200여 평에 건평이 70~80평에 이르며, 시가가 20억원이 넘는 대저택이었다. 최씨는 논란이 일자 부인과 함께 집을 떠난 뒤 행방을 감췄다고 신문은 기록했다. 

신문은 당시 최태민 씨에 관련된 주변 증언들을 모아 다음과 같이 실었다.

▽이하는 기사 원문▽ 

『근혜씨와 최씨의 이상한 관계에 관한 소문의 시발은 고 육여사의 피습직후인 지난 7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 초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의 교리를 합쳤다는 ‘영세교’ 교주행세를 하던 최씨가 어머니의 비명횡사로 극심한 정신적 허탈감에 빠져 있던 근혜씨에게 “꿈에 돌아가신 육여사가 나타나 근혜가 국모감이니 잘 도와주시라고 지시하셨다”는 허무맹항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이후 구국선교단 대한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총재등을 지내며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하던 최씨는 근혜씨를 등에 업고 재벌들로부터 돈을 뜯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비리를 저지르다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당시 일선기자로 활동했던 월간 ‘인사이드더 월드’ 발행인 손충무의 말이다. 

또 최씨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78년 어느날 청와대에서 있었던 고 박대통령의 친국(親鞫)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구국여성봉사단총재로 있던 최씨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보고서를 받아는 박대통령은 보고서 내용에 격분, 김재규 중정부장과 백광현 중앙정보부안전국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근혜양과 최씨를 직접 불러 신문을 했으나 근혜양이 사실과 다르다며 최씨를 적극 옹호하고 나서자 신문을 중단하고 오히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지난 80년 1월 항소심 공판을 앞두고 재판부에 보낸 항소이유보충서중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영애의 문제’라는 장에서 이 문제가 10.26혁명의 동기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중략)

지난 80년 당시 계엄합수부에서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문제의 인물 최태민 시는 황해도 사리원 출생으로 일제때인 지난 42년 일본인의 추천에 의해 경찰에 투신, 해방직후인 지난 47년에는 인천경찰서에서 사찰주임(경위)까지 맡았던 것으로 돼있다.

그는 이후 육군헌병대 전문관, 종교단체 간부, 공화당중앙위원, 기업체사장 등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최씨는 지난 65년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이름을 방민으로 바꾸고 ‘영세교’라는 종교단체를 만들어 교주행세를 하게 된다. (중략)

한때 육영재단에서 발간하는 ‘어깨동무’ ‘꿈나라’ ‘보물섬의’ 운영에 관여한적이 있는 한 관계자는 ” 근혜씨가 이사장이 된 뒤부터 말단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도 과장, 부장급 간부들이 직접 결재서류나 메모를 들고 최씨의 집을 찾아가 ‘승인’을 받고 나서야 박 이사장의 결제 도장이 찍힐 정도였다”고 최씨의 전횡을 폭로했다. 』

신문은 이같이 전하며 말미에 “이들 세 유자녀의 일거 수 일투족은 앞으로 계속 국민의 관심대상이 될수 밖에 없을 것 같다”고 글을 맺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Main/3/all/20161027/81037370/2#csidx3f8d094f22aaf5abd65c260e6c2bac7





정두언 "朴에게 앙심품은 누군가가 복수전 지휘"

  • 2016-10-28 17:03 

정두언 새누리당 전 의원 (사진=윤창원 기자)
정두언 새누리당 전 의원이 '최순실 게이트'가 박 대통령에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의 복수전이라며 배후설을 제기했다. 정두원 전 의원은 지난 2007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박근혜 후보의 검증을 도맡았던 인물이다. 

정 전 의원은 지난 2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앙심을 품은 ○○○가 복수전을 지휘하고 있다"며 "○○○는 과거 최태민 당시 조순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최태민 때 조순제 씨가 ○○○ 역할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일을 이렇게 엉성하게 처리하지는 않았다"고 부연했다. 

정두언 전 의원의 회고록에 따르면 조순제 씨는 최태민 씨의 마지막 부인이 데려온 의붓아들로 정수장학회 이사와 문화공보부 장관의 비서관을 지냈던 인물이다. 정 전 의원은 "만약 누군가가 현 사태를 지휘하고 있지 않다면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가 없다"며 "미르 재단 같은 것을 하루 만에 만들었다는 게 말이 되느냐. 태블릿 PC가 갑자기 기자 손에 들어간것도 너무 작위적이지 않느냐"고 의혹을 뒷받침했다.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관계에 대해 그는 "(박 대통령과 최씨가) 힘든 시절을 같이 보내고 그래서 각별하다는 건 틀린 사실"이라며 "주술적인 것, 샤머니즘적인 것이고 박 대통령은 최태민이 무슨 말만 하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반응을 보였다. 최순실은 그 후계자니까…"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건 어려운 시절을 같이 보내서가 아니라 그냥 매직이다. 최순실의 모든 의혹은 100% 팩트라고 본다"고 전했다. 앞서, 정 전 의원은 2007년 8월 MBC라디오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최태민 씨 사이를 낱낱히 밝히면 모든 사람이 경악할 것이고 박근혜를 좋아하는 사람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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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박근혜와 영적 부부… 최태민, 말하고 다녀”

최씨 측근이었던 전기영 목사 밝혀

입력 : 2016-10-30 17:43/수정 : 2016-10-30 17:44



[단독] “박근혜와 영적 부부… 최태민, 말하고 다녀” 기사의 사진
최순실씨의 부친이자 사교인 영세교 교주였던 최태민(1994년 사망)씨가 “박근혜와 나는 영적 세계의 부부”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또 “내가 육영수 여사로 빙의(憑依)한 몸이 되어 박근혜 앞에서 말하자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입신을 했다”고 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빙의 입신’ 대면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씨의 첫 대면 내용이 담겨 있는 중앙정보부 보고자료를 기준으로 볼 때 1975년 3월로 추정된다.  이 같은 증언은 7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최씨와 교계 활동 및 교류를 해온 전기영(78·서산 충성전원교회·사진) 목사와의 장시간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전 목사의 인터뷰는 지난 27∼30일 교회 사무실 등에서 직접 대면 및 전화 등을 통해 이뤄졌다. 

전 목사와 최씨는 70년대 말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종합총회의 부총회장과 총회장 신분으로 만났다. 종합총회는 70, 80년대 300여개 교회가 가입한 교단이었으나 지금은 50여개 교회가 속한 군소 교단이며 현재 전 목사가 총회장을 맡고 있다. 전 목사에 따르면 최씨는 당시 자신이 세운 영세교 교세 확장을 위해 이 교단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전 목사는 최씨와 함께 활동했던 당시 불거진 ‘최태민·박근혜 연인설’에 대해 “최씨에게 직접 물어본 적이 있다”면서 “그때 최씨는 ‘박근혜와 나는 영의 세계 부부이지 육신의 부부가 아니다’고 말한 걸 들었다”고 설명했다. 중앙정보부가 1979년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씨는 당시 각종 비위와 여자관계 추문 등으로 구설에 올라 있는 상황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최씨의 육영수 여사 현몽(現夢) 이야기(‘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박근혜를 도와주라고 전했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 전 목사는 “최씨가 현몽에 대한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데 이어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만났을 때 ‘내가 육 여사의 표정과 음성으로 빙의했다’고 말했다”면서 “최태민이 내게 말하길 ‘육 여사 빙의에 박근혜가 놀라 기절했다가 깨어났다. 육 여사가 내 입을 빌려 딸에게 나(최태민)를 따르면 좋은 데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박근혜는 입신(入神·신들림)한 상태였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변인을 지낸 전여옥 전 의원이 지난 29일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박 전 대표가) 꿈에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나를 밟고 가라. 그리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최태민 목사와 상의하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최태민 비리 자료’ 보고서에도 최씨가 1975년 박근혜에게 3차례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최순실 父 '사이비 교주' 최태민의 카멜레온 인생 들여다보니

권영미 기자 입력 2016.11.28 16:40 댓글 226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행태' 보고서
지난 26일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을 조명한 SBS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영됐다.© News1star /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비선 실세 국정 농단'의 주범으로 지목돼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1912~1994)의 실체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의 뿌리가 생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영애이던 시절부터 ‘대한구국선교단’ 등을 함께 운영했던 최태민까지 거슬러 올라가서다. 방송과 신문 등이 앞다투어 최태민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가운데 지난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총회장 여성삼 목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최태민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한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행태'(이하 보고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2793개 산하 교회에 배포했다.


보고서는 최태민의 출생과 사회활동, 영세교의 출발, 대한구국선교단 조직, 사회복지 재단을 통한 비리, 최태민에 대한 평가, 현 시국에 대한 제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목사'로 불려온 최태민은 젊은 시절 승려를 지내기도 하고 천주교 세례를 받고, '영세교'를 창시해 사이비교주가 되는 등 카멜레온처럼 변신했고 '신분 세탁'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이름을 6차례나 바꾸었다. 그리고 영부인인 육영수와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후 등 박근혜 대통령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최태민이 함께 있었다.


◇독립운동가 아들에서 사이비종교 교주까지

최태민은 1912년 5월 5일 ‘최도원’(崔道源)이란 아명으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서 태어났다. 특기할 만한 점은 그의 부친 최윤성 씨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가정조선 1990년 9월호를 인용해 최태민의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피신했고, 1920년에는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고 했다.


최태민의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보고서는 해방 이후 그가 월남해 ‘최상훈’(崔尙勳)이란 이름으로 강원도, 대전, 인천 등에서 경찰로 일했다고 전한다. 그의 이름은 불과 몇년 만에 다시 한번 바뀐다. 1951년 3월, 6·25전쟁의 소용돌이 중에 그는 ‘최봉수’(崔峰壽)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산'의 부사장을 지냈다. 보고서는 "1954년, 그가 42세 때 스무 살이나 더 많은 김모 씨와 결혼했다가 그녀에게 여자문제로 고소당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인 ‘퇴운’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쓰고 있다.


그후 운영이 어려운 한 중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1963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이 되기도 하는 등 그의 변신을 끝이 없었다. 1965년에는 천일창고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자 다시 도피하였다. 보고서는 "1969년 그는 도피 중에도 철저히 신분을 속이면서 ‘공해남’(孔亥南)이란 가명으로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이후 계시를 받았다며 ‘방민’(房敏)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밝혔다. '도원'에서 '방민'까지 총 다섯 차례 이름을 갈아치우면서 경찰, 기업가, 승려, 교장 등 다양한 직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불교와 천주교를 기웃거린 그는 1973년 ‘영세교’(靈世敎)를 창설하고 스스로를 ‘원자경’이라 부르며 사이비종교 교주로 나선다. 그는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고 선전했고 자신을 '칙사' 혹은 '태자마마'라고 불렀다. 그후 수년간 그는 자신을 '조물주의 사자'로 신격화하고 ‘단군’ 혹은 ‘미륵’이라 부르며 신도들을 이끌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연결하면 ‘미륵'(미르+k)이 된다"며 최순실 등이 만든 이들 재단의 이름의 유래를 최태민의 별칭에서 찾았다.


◇'영적인 부부'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

보고서는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이 육영수 여사 피살 후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1975년 2월 최태민은 심적 혼란을 겪던 박근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내 위로했는데, 그 편지에는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현몽'(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남)과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되었다는 주장까지 담겼다.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그의 편지는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최태민)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는 밀착되게 되었고 후일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영적인 부부’라고 설명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사이비 교주에서 '구국과 멸공'의 목사로

1975년 4월, 최태민은 영세교의 간판을 내리고 목사로 변신한다. 신학교육이나 목회의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의 조모 목사라는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보고서는 또 월간중앙 1993년 11월호를 인용하면서 "그후 불과 며칠 만에 최태민이 전국적 조직인 ‘대한구국선교단’(1976년 구국봉사단, 1979년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을 창설했고 이때부터 그는 일곱번째 이름인‘최태민’(崔太敏)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곧바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 아래 ‘대한구국선교단’ 총재가 되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1975년 5월 최태민은 임진강에서 2000명의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그 자리에서 즉석 제안하여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 일반 기도회가 아니라 ‘반공과 안보’를 전면에 내세운 궐기대회 성격이었다. 1975년 6월에는 공무원과 기독교 목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배재고등학교에서‘구국과 멸공’을 기치삼은 ‘대한구국십자군 창군식’을 거행하고 군사훈련까지 실시했다.


최태민은 기업인을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이들로부터 1인당 2000만~5000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는 식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이 단체는 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전국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총 300만 명의 단원을 확보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권력형 비리와 여성 스캔들 잇따라 불거져

하지만 최태민과 관련하여 지속해서 각종 이권개입, 횡령, 사기, 융자알선 등의 권력형 비리와 여러 여성들과의 스캔들 의혹이 터져 나왔다. 중앙정보부는 이에 최태민에 대해 수사하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신동아 2007년 6월호는 "당시 수사자료에는 비리혐의 44건에 3억 1700만원, 여성 스캔들이 12건이나 보고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 인터뷰를 통해 그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월간조선 2005년 11월호는 "1977년 9월 각종 비리와 스캔들에 대한 고발이 빗발치자 박정희 대통령이 특명을 내려 최태민을 구속하는 대신, “첫째로 최태민을 거세할 것, 둘째로 청와대 주변을 얼씬 거리지 말게 할 것, 셋째로 (구국여성봉사단만 남기고) 구국봉사단 관련단체는 모두 해체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최태민을 잠시 강원도에 피신시키고 자숙할 기회를 주었지만 1978년 2월 구국봉사단은 새마음봉사단으로 개편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총재를, 최태민은 명예총재를 맡는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하고 18년에 걸친 정권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실의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것은 최태민. 보고서는 신동아 2007년 6월호를 인용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하자 가장 먼저 박근혜를 찾은 사람이 최태민이라고 알려졌다"고 밝혔다. 이어 "이때 박근혜는 부친의 측근들에 대한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알려진다"고 덧붙였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박근혜 대통령은 대외 활동을 재개한다.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그후 1990년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근령·지만 등 형제들과 분쟁이 일었을 때 최태민과 최순실 등이 재단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1994년 5월 1일, 82세의 최태민은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만성신부전증의 치료를 위해 장기 입원하였다가 자택에 돌아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박근혜 대통령 "의혹은 많으나 실체는 없다" 주장

일반인들은 거의 잊힌 존재였던 최태민의 이름은 십여 년 후 다시 불거진다. 당내에서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박대통령은 후보 검증과정에서 최태민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의혹에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최태민의 부정 축재 등을 부인한다. 앞서 박대통령은 1990년 11월 동생 근령씨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넘기면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의혹을 일축한 바 있었다.


2007년 박근혜 대통령 역시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2007년 7월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에 “카리스마 넘치는 최태민 목사는 인격 형성기에 있던 박근혜 후보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당시 윌리엄 스탠턴 주한 미 부대사도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표현하는 등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에 대한 해외 인사들조차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2016년 가을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같은 최순실 게이트의 뚜껑이 열렸다.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국민을 참담함 속에 빠트린 이 사건의 뿌리는 40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최 씨 일가의 전횡을 막을 기회가 몇차례 있었음에도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고 최태민은 죽을 때까지 구속 한 번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