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뉴스 속의 최태민, 최순실을 찾아보았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어쩌면 이미 예견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한 때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옛날 신문"이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검색해보니 지금은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서비스 하고 있었다.
접속주소 : http://newslibrary.naver.com/
접속하면 오늘 날짜의 뉴스 검색페이지로 접속할 수 있다.
검색할 수 있는 검색범위는 1920년 부터 1999년까지..
검색되는 신문은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겨레
2000년 부터는 서비스 안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는 네이버 사정이니... 뭐..
암튼 대단한 네이버이다.
Paper 형태의 신문기사를 Digital 형태로 변환하고 검색까지 가능하게 만들다니..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나라가 아닌 연길에서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로 서비스를 구현했다는 여담도 들은 적이 있는 듯 하다.
여튼,
요즘 날마다 들리는 뉴스가 바로 최순실,
검색해보니 1979년 6월 11일자 경향신문에 그녀의 이름이 나온다.
기사제목 : 박근혜총재 대학생제전서 치사 "협동으로 새마음 뿌리를"
기사 내용 중
- 서울시내 33개 대학교의 새마음봉사단원 7백50여명을 비롯, 서울시 새마음봉사대각구단원 7백50명, 새마음연예인봉사단원등 1천5백여명이 한양대운동장을 꽉채운'새마음제전'은 이날 상오 10시20분 최순실(단국대대학원1년)전국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회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
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최순실은 최태민의 딸.
이번에는 최태민을 검색해 보았다.
제일 첫번째 검색결과에 출력되는 검색결과는
"槿惠(근혜)와 槿暎(근영)사이…崔太敏(최태민)씨는 누구
1990.11.23동아일보 17면 정치 기사(뉴스)
槿惠(근혜)와槿暎(근영)사이┉ 崔太敏(최태민)씨는누구 4개教理(교리)합친「영세교」教主(교주) “꿈에 陸(육)여사가 돌봐주라 했다” 75年... 「사기꾼 崔太敏(최태민)을 엄벌해崔(최)씨에게 포위당해있..."
동아일보 주말판 '동아마당'의 17면 기사이다.
근혜와 근영사이...
최태민씨는 누구
4개교리 합친 '영세교' 교주
'꿈에 육영사가 돌봐주라 했다'
75년 근혜씨에 접근... 관계 밀착
지난 8월말 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실에 고박정희대통령의 유자녀중 근영지만씨의 이름으로 한 통의 탄원서가 날아들었다.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있는 언니 박근혜를 전직 국가원수 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한달여후인 지난달 3일 중추절. 오랫만에 서울 중구 신당동 고박대통령의 사저에 모인 근영지만씨와 김종필민자당최고위원 한병기전캐나다대사등 '박씨가'의 가족들은 차례상을 앞에 두고 근혜씨의 '결심'을 재촉하고 있었다.
당시 근혜씨에 대한 나머지 가족들의 호소는 '최태민씨가 근혜씨를 등에 업고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 돌아가신 분들께 누를 끼치고 있으니 최씨와의 관계를 끊고 재단이사장직에서 물러나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다고 한 가족은 전했다.
근혜씨(39)는 서울 성동구 능동 어린이회관안에 있는 재단법인 육영재단의 이사장직과 '고 박대통령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부터 어린이회관은 고박대통령을 추모한다는 '숭모회'회원들의 최태민퇴진요구시위와 근혜시의 돌연한 재단이사장직 사임, 그리고 근혜씨가 단장으로 있는 근화봉사단원들의 근혜씨 사임반대시위 등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면서 관심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어린이회관 주변에서는 '육영재단 운영권을 놓고 근혜 근영씨 자매가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다.' '숭모회등 외부세력이 근영씨를 내세워 막대한 규모의 재단재산을 가로채려한다'는 등 갖가지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근화봉사단원들은 '김종필'씨가 차기대권을 노리고 70만 근화봉사단원들의 표를 움켜쥐기위해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근혜씨를 내쫓아내려하고 있다'고 보고 여기저기 이같은 내용의 소문을 퍼뜨렸다.
여기에 근혜 근영 지만씨등 세 유자녀의 근황과 수수께끼의 인물 최태민씨와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어린이회관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눈동이처럼 커져 세인들의 호기심을 북돋우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어린이회관 분규의 두 주역격인 근혜씨와 숭모회 측이 각각 기자회견을 자칭하고 나섰다.
"지난 2년 동안의 노력으로 부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평가를 어느 정도 바로 잡았고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져 좀 쉬려는 것 뿐인데 왜 정체모를 단체가 나타나 남의 집안 일을 간섭하려드는지 모르겠다."(박근혜)
"숭모회는 박이사장을 배후조종, 고 육여사의 유업을 훼손하고 유자녀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최태민고문을 축출하기 위해 해고된 회관직원들과 청와대 경호실 출신들이 모여만든 단체일 뿐 근영씨의 측근은 아니다."(숭모회 이영도 회장)
이같은 주장을 놓고 볼 때 항간에 떠도는 자매간 또는 측근들 간의 '재산싸움'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실제로 지난 69년 고 육여사에 의해 기금 1천만원으로 출발, 지난 80년 자산총액이 41억원으로 평가됐던 육영재단의 자산은 부동산가격의 급등으로 현재 2천억원을 넘는다는 소문이지만 이는 재단 소유인 어린이회관 부지 3만여평의 부동산 시가를 단순 산출한 것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시말해 이같은 자산은 고박대통령가의 '사유재산'으로는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이밖에 기념사업회 기금 18억원과 서울 중구 신당동의 고박대통령사저, 그리고 박대통령이 교사시절 자취를 하던 집을 사들여 수리한 경북문경의 '청운각'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18면으로 계속.
당시 청와대 마음대로 드나들며 각종 감투써
비리소문에 정보부 조사..박대통령 직접 신문
수렴청정식 재단운영 말단 직원 채용까지 '승인'
이름 7개나... 분규나자 '시골간다' 한달 전 잠적
17면에서 계속
추적 끝에 지난 19일밤 겨우 전화 통화가 이루어진 지만씨(31)는 '그렇게 엄청나다는 육영재단이 우리집 재산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뒤 "절대로 형제간의 재산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항간의 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만씨는 박태준 포철회장의 배려로 지난해 10월부터 전자부품 원료생산업체인 충남금산의 삼양산업촉탁이사로 있다가 올해초부터는 대표이사직을 맡아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쌓고 있는데 "박회장께서 일부러 경영이 어려운 회사를 내게 맡긴 것 같아 어께가 무겁지만 열심히 뛰고 있다."고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근황을 소개했다.
어린이회관 분규의 원인에 대해 지만씨는 "최태민목사라는 사람때문에 큰누나가 욕을 먹고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도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최씨를 큰누나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하는데 최씨가 반발해 생긴일"이라고 나름대로 규정했다.
그러나 작은누나인 근영씨와 둘이서는 힘들 것으로 생각돼 같은 생각을 지닌 '숭모회'의 도움을 받았을 뿐인데 이 때문에 측근들 간의 재단운영권 다툼이 아니냐는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지만씨는 말했다.
지난 15일 근화봉사단원들과 숭모회원들이 충돌하는 와중에서 언니의 뒤를 이어. 육영재단이사장직에 취임한 근영씨(35)도 취재기자들에게 지만씨와 같은 내용의 얘기를 한 뒤 "언니는 최목사에게 철저하게 속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근영씨는 이사장 취임 후 그동안 소규모로 해오던 건강식품 운동기구 수출입사업을 정리하고 고육여사의 혼이 깃들어있는 육영재단의 일에만 전념할 뜻을 비쳤다고 한 측근은 전했다.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신분을 감춘 채 혼자 살면서 로얄살롱승용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니는 근영씨는 어린이회관 분규가 표면화 한 직후부터 서초동에 있는 외삼촌인 전국회의원 육인수씨(73)와 이복언니의 남편인 한병기 전 캐나다대사(59. 한국정경문화아카데미원장)의 집, 그리고 여관을 전전하며 언론의 추적을 피하고 있으며 인터뷰 요청에는 일제 응하지 않고 있다.
어린이회관 직원들은 근영씨가 이사장 취임 이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재단 이사장실에 두 번 들렸을 뿐 정상 출근을 하지 않고 있으며 전화로 신임 송재관관장에게 업무지시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20일 오전 서울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난 육인수씨는 "어젯밤 근영이로부터 가까운 시일 안에 어린이회관으로 초청하겠다는 전화가 왔다."며 "조만간 최목사의 재단전횡과 비리를 밝히는 자리를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처럼 근혜씨를 제외한 나머지 '박씨가' 사람들의 원성의 표적이 되고 있는 최태민씨(78)는 숭모회회원들의 '반최시위'가 터져나온 지난 달 말부터 부인 임모씨(70)와 함께 시골에 간다며 집을 떠난 뒤 행방을 감추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689의 25 뉴월드호텔 부근에 있는 최씨의 집은 대지 2백여평에 건평이 70~80평에 이르는 '저택'으로 시가가 20억원은 넘을 것이라는게 인근 부동산 소개소의 얘기다. 이 집은 대문이 굳게 닫힌 채 가정부가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어린이회관 분규의 직접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는 근혜씨와 최씨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소문의 시발은 고육영사의 피습 직후인 7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70년대 초 불교 기독교 천주교 천도교의 교리를 합쳤다는 '영세교' 교주행사를 하던 최씨가 어머니의 비명회사로 극심한 정신적 허탈감에 빠져있던 근혜씨에게 '꿈에 돌아가신 육여사가 나타나 근혜가 국모감이니 잘 도와주라고 지시하셨다."는 허무맹랑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이후 구국선교단 대한구국봉사단 새마을봉사단 총재 등을 지내며 청와대를 자유롭게 출입하던 최씨는 근혜씨를 등에 업고 재벌들로부터 돈을 뜯고 각종 이권에 개입하는 등 비리를 저지르다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는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당시 일선 기자로 활동했던 월간 '인사이드더월드' 발행인 손충무씨(50)의 말이다.
또 최씨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78년 어느날 청와대에서 있었던 고박대통령의 '친국'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던 최씨의 비리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보고서를 받아든 박대통령은 보고서 내용에 격분, 김재규 중정부장과 백광현 중앙정보부안전국장(현 변호사)이 지켜보는 가운데 근혜양과 최씨를 직접 불러 '신문'을 했으나 근혜양이 '사실과 다르다.'며 최씨를 적극 옹호하고 나서자 신문을 중단하고 오히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를 묵살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부장은 지난 80년 1월 항소심공판을 앞두고 재판부에 보낸 항소이유보충서 중 '구국여성봉사단과 연관한 큰영애의 문제'라는 장에서 "이 문제가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이었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최씨는 지난 80년 계엄합수부에 체포돼 변호사법 위반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돼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그후 최씨가 다시 근혜씨 주변에 등장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씨는 근혜씨가 지난 83년 전두환전대통령을 찾아가 육영재단을 직접 운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 재단이사장직을 맡은 직후부터 막후에서 '수렴청정'식으로 재단 운영에 관여해 온 것으로 어린이회관 주변에서는 보고 있다.
그러다가 최씨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지난 88년. 근혜씨가 '고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킬 때 고문자격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난 80년 당시 계엄합수부에서 조사한 기록에 따르면 문제의 인물 최태민씨는 황해도 사리원 출생으로 일제때인 지난 42년 일본인의 추천에 의해 경찰에 투신, 해방 직후인 지난 47년에는 인천경찰서에서 사찰주임(경위)까지 맡았던 것으로 돼있다.
그는 이후 육군헌병대문관 종교단체간부 공화당중앙위원 기업체사장 등으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최씨는 지난 65년 유가증권위조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이름을 방민으로 바꾸고 '영세교'라는 종교단체를 만들어 교주행세를 하게 된다.
숭모회가 제작 배포한 '7개의 이름을 가진 최태민 | 그는 누구인가' 라는 소책자에 따르면 최씨는 지금까지 최상훈, 최봉수, 최퇴운, 최방민, 최태민 등 일곱번이나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민등록표에는 이름이 최태민으로 돼있다.
한때 육영재단에서 발간하는 "어깨동무'꿈나라' '보물섬'의 운영에 관여한 적이 있는 한 관계자는 "근혜씨가 이사장이 된 뒤부터 말단직원 한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도 과장 부장급 간부들이 직접 결재서류나 메모를 들고 최씨의 집을 찾아가 '승인'을 받고 나서야 박이사장의 결재도장이 찍힐 정도였다'고 최씨의 전횡을 폭로했다.
이 관계자는 도 고곽상훈 전국회의장 최세경 전한국방송공사사장 등 '박씨가'의 사람들이 아닌 공익성을 띤 인사들이 육영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운영했을 때는 아무런 '말썽'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결국 최태민이라는 사람의 사교적 영향력이 어린이회관에 침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도 공익재단인 육영재단을 근혜씨 등 유자녀가 장악하면서 '개인왕국화'됐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게다가 새 이사장으로 취임한 근영씨도 당초에는 동생인 지만씨가 '가장'의 자격으로 육영재단의 운영을 맡을 것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재단이 유자녀들에 의해 계속 '상속'될 가능성이 많다고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아무튼 관계자들의 해명에도 불구,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는 이번 어린이회관 분규로 새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들 세 유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앞으로 계속 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창혁, 홍은택 기자>
박근혜의 최태민 파일, 해부와 논단
지난 4월경에 시중에 『박근혜 CD파일』17개가 나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중 13개가 최태민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 구체적 항목까지 인터넷에 다 나열되어 있었고 이미 그 내용까지 흘러나와 아는 사람들에게는 다 아는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70년대에 최태민을 조사했던 신모 수사관이 현 정권에서 잘나가고 있다고 하니 세간에 흘러나온 내용 외에 얼마나 더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런 박근혜 CD파일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유인물도 같이 들어있었고 BBK가 담긴 이명박 파일도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어떤 세력에 의한 한나라당 지지추락을 노린 예비 교란작전인지 민심 떠보기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차피 정보와 수사력을 지닌 반 한나라당 진영이 더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라 크게 염두에 둘 필요는 없을 듯 싶었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자체적인 검증에서 양 진영이 범여권과의 본선에서 서로 한방으로 당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흠결로 꼽고 있는 것이 이명박의 BBK와 박근혜의 최태민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김대중과 노무현이 “한나라당에게는 정권을 도저히 넘겨줄 수 없다.” 고 수없이 강조하는 것을 들어볼 때 그들이 최후 무렵에 보여줄 흑색선전이나 음해성비방은 한나라당의 자체검증은 비교조차 못할 정도로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지금의 이쯤에서 누락되기 쉬운 한나라당 자체의 검증뿐만 아니라 언론과 국민의 검증까지 거쳐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런 검증은 노골적인 음해성비방이 아니라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좋기 때문이고 나중을 위해서도 정당한 것이었다. 대통령은 결국 국민들이 뽑는 것이고 국민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숨긴 대통령에 의하여 또 다시 기만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할 수 있는 한 더 자세히 깊게 알려 국민들이 적어도 대통령에 대하여만은 어느 정도 알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있을 본선에서 범여권 후보에 대하여서도 그와 동등한 철저한 검증을 요구할 권리를 약속받은 길이기도 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조심스럽기도 하고 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도 한 최태민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먼저 한 마디 반드시 해둘 말이 있었다. 오늘 조선컴을 보니 모두가 당연한 사실로 알고 있었던 중일전쟁 때의 일본의 육탄3용사 이야기는 조작이라는 해당 언론사에 의한 자백성 보도가 있었다. 이처럼 언론의 보도라는 것도 어떤 사건의 진실을 안다는 것도 그 시대의 국민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도 그 진실성을 구별해내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어떤 역사적인 부분, 사건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모두가 묵시적 합의라도 한 듯 입을 다물어 다수에 의하여 전혀 엉뚱한 해석과 결과를 낳은 예를 잘 알고 있었다. 소위 그 유명한 정보사에서도 핵심이 바로 저기인줄 뻔히 알면서도 아무도 조사하지 않았고 그것은 대세와 이권과 분위기를 따름이었고 바로 그 자신이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해할 처지에 놓인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럼 이제부터 이런 논점에 입각해서 신동아의 07년 6월호에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최태민 사건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박근혜의 최태민 사건이란 76년 12월 최태민이라는 사이비 목사가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한 뒤 그 자신은 총재가 되어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국정을 농단하였고 그 후에도 역사적 파고와 겹쳐 국정중심세력에 의하여 배척과 추방 등등으로 박근혜으로의 접근을 중정과 보안사에 의하여 한 동안 차단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94년 사망할 때까지 박근혜의 지척에서 90년 육영재단 고문 등의 일을 돕게 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즉 이런 자를 끝까지 보호하려한 박근혜의 가치관과 판단력을 들어 어떤 일을 저질렀든 노무현의 자기편만 감싸주기와 같이 박근혜는 공정성을 앞세워야 하는 국정을 책임질 자격이 없다는 뜻에서 거론된 사건이었다. 우리가 본 박근혜는 자기중심관이 또렷하여 쉽게 남의 말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고 그런 면에서 장점인가 단점인가 몰라도 이것도 원칙과 조화의 문제였지만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으려하고 감싸주려 한다는 평을 받고 있기는 하였다.
그럼 최태민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의 이력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는 이유에서인지 23년(?)생 등등의 흔적이 있었지만 중정의 기록에 나오는 1912년생이 맞다고 본다. 27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해방전 3년의 순사에서 월남 후 경찰, 6.25전쟁 중엔 군의 비공식 문관, 기업가, 언론에 종사했으며 54년에는 가정불화로 승려, 비인가 중등교장, 농민회, 불교청년회, 건설회(임의단체)회장 등 이런 불교계 인맥으로 63년에는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중앙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65년에는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69년에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았고 71년에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복합하여 창업한 영세계의 교리인 ‘영혼합일법’을 주장했고 74년에는 사이비종교가처럼 ‘태자마마’를 자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최도원에서 법명 세레명 등등 구국선교단 총재 취임을 계기로 개명한 현 호적상의 최태민까지 무려 7개의 이름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평범한 일반인이 보기에도 쉽게 믿기 어려운 사람 측에 속했고 학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하였고 정신적 방황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과거의 흔적과는 관계없이 한 순간에도 변할 수 있어 인간의 선악을 함부로 구분짓기 힘들지만 최태민은 쉽게 종잡을 수없는 수수께끼같은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선악을 떠나 도리어 이런 최태민의 복잡하고 믿을 수 없게 하는 이력이 일종의 선입감으로 작용하여 중정조사보고서를 곧이곧대로 다 믿지 못하게 하고 피해를 부풀리게 하거나 사건의 성질을 왜곡시킬 가능성은 다분히 있었다. 이런 인물이 자부심에 가득 차 있는 권력의 중심부인 집단조직에 끼어들었을 경우, 그런 이력을 모르면 몰라도 안 이상 부정부패 여부를 떠나 그런 집단조직이 단체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눈에 보지 않아도 너무도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자신의 입장에서 그런 이력만 가지고 본다면 최태민을 어찌 대할지를 생각해보라. 보이지 않는 조직 내 다수의 묵시적 합의로 집단왕따로 배척하였을 것이고 한 번의 손짓에 벌떼처럼 달라붙어 없는 사실까지 지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비난하는 데 앞장서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글을 쓰고 있는 평범한 사람의 눈에도 최태민을 직접 겪어보기도 전에 미리 권력의 핵심근처에 두기에는 최태민은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측에 속한다.
이런 최태민 문제가 일반에게 겉으로 처음 드러나게 된 것은 79년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사형판결을 받은 뒤 군법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와 보충서에 10·26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최태민을 거론했기 때문이었다.
그 논거를 요약하면 이러하였다. 이런 문제성이 많은 최태민이라는 인물이 75년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자신은 총재가 되어 구국봉사단을 조직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박근혜가 관계된 일이라 아무도 문제삼지 못한다고 여러 사람들이 76년에 정보부장이 된 자신에게 상의해 왔다. 그래서 최태민을 조사해 보았더니 문제가 많아 최태민도 쫓아내고 박근혜도 그 조직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박정희에게 보고하였더니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냐.”고 반문하여 그 자신이 더 놀랐다고 하였다. 그 후 박근혜의 말과 김재규의 보고가 서로 다르자 77년 9월 박정희가 당사자들인 박근혜와 김재규와 사건을 조사한 백광현 국장을 불러 직접 친국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하여 시정조치가 되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박근혜가 총재, 최태민이 명예총재가 된 새마음봉사단으로 바뀐 일을 두고 말하고 있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 들어간 최태문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지만 그 밖에 파악한 종합정보로는 05년10월 박정희 피살현장에서 살아남은 김계원 비서실장이 중정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의 사이가 나빠진 것도 이런 박근혜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었다고 주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차지철이 몸을 피하지 않았으면 대통령은 시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김재규의 범행동기를 수사한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金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핑계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차지철과의 힘겨루기인 불화설과 함께 한번 따져보기로 하자.
그 당시 차지철은 74년부터 경호실장을 하고 있었고 김재규는 76년부터 중정부장을 맡고 있었다. 박정희의 친국은 77년 9월에 있었으니 조사기간까지 더하면 핵심에 있던 각료들이 중정부장이 되어 청와대 핵심으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김재규에게 최태민 문제를 떠민 것이 된다. 그리고 김재규는 마치 그들 사이에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로 표현되던 이 문제를 자신이 주도권을 쥘 기회로 여긴 것이고 먼저 청와대로 들어왔다고 생각한 차지철은 자연히 대립각을 세우며 반대편에 선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태민 문제는 권력욕에 차 있던 차지철과 김재규 대립에 있어서 표면상에만 나타난 아주 작은 문제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들의 대립과도 실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이었다. 또한 최태문 문제에 대한 박정희 처리방식도 큰 문제가 없었고 그것은 선우련 공보의 비망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었다.
김재규와 박근혜의 서로 다른 주장에 판단이 잘 안 선 박정희는 친국까지 하며 최태민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그 진의를 가리고자 하였고 결국 그 자신의 판단을 보태고 중정보고서를 존중하여 친국 얼마 뒤 선우련에게 최태민 축출과 차단, 그리고 구국봉사단 해체를 명한 것으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중정보고서에도 일부 최태민의 독단에 의한 비리혐의만 나올 뿐 박근혜가 관련된 항목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우련이 이런 대통령의 명령을 박근혜에게 알리자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하얘지며 눈물을 글썽이자 안쓰러운 맘이 든 선우련은 다시 대통령에게 잘 말해볼 테니 기다려 보라고 한다. 며칠 뒤 선우련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는 돌아가신 영부인 역을 대신하고 있는데 기존의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이니 구국여성봉사단만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하고 다시 간청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그간의 여러 마음의 고충을 토로하며 최태민을 차단하는 조건으로 절대로 잡음이 나지 않게 선우련의 책임 하에 허락한다. 과연 이렇게 전개된 과정을 중정부장인 김재규가 몰랐을까. 속칭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를 했는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돌아가는 사정에 대하여 낱낱이 보고받았을 것이 틀림이 없었다. 이번 최태민에 대한 보고와 친국에 대한 일로 김재규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더 떨어졌다는 흔적은 어디에서 없었다. 김재규는 그 후 79년 그 자신이 박정희를 시해할 때까지 중정부장 자리를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피했다던 최태민과 박근혜에 대한 직간도 해낸 사람이 유신정권이 흔들릴 때는 왜 자리를 걸고 직간하지 못했을까. 누가 쑤시고 부추긴 사람이 있었겠지만 유신정권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정권을 찬탈할 야욕이 없었다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나 할 말이 없었으면 최태민 사건까지 거론하였을까를 생각하니 누구의 농간인지 몰라도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김재규가 10·26 재판 때 “중정 백광현 국장이 최태민을 수사했다”고 밝힌 내용을 두고 백광현이 신동아와 전화통화한 기록이 있었는데 거기서 “김재규씨가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고 최태민 문제는 대통령 시해사건과는 관련이 없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백광현이 말하기를 그 당시 중정에는 3개국이 있었는데 자신이 관리한 3국에서 수사착수를 하지 않아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고 있었다.
중정보고서에 의한 최태민의 혐의는 300만 구국봉사단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횡령 14건(2억2천여만원)을 포함하여 사기, 이권개입, 회계부정행위, 추문 등 도합 44건이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300만 구국봉사단 조직이라는 말도 사실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 중 하나였다. 뒤에 나오겠지만 최태민이 처음 주도한 것은 구국선교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대표적 4건을 보면 76.1월 주택구입자금 1000만원, 77.3~6월 부인명의로 6000만원, 76,11~77,8월 가명 24계좌에 1억 5천만원, 77,5월 부인명의 승용차 1대 300만원의 횡령이었고 이 4건만 합해도 2억2천5백만원의 횡령이 되었다. 이런 44건에 들어있는 많은 건수도 수사관들이 철저히 조사했으나 워낙 교묘히 처리해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최태민이 구국봉사단 총재로 언론에 등장하는 시기는 75년 12월 31일이었고 박정희의 친국이 77년 9월 경에 있었으니 최태민이 독단으로 전횡할 수 있었던 기간은 1년 9개월 정도가 전부였고 그 이후는 박정희와 중정의 주목을 받고 있었고 그런 사실을 최태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처럼 부정부패로 큰 문제를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77년 말 박근혜가 구국여성봉사단 총재가 됨으로서 그 산하로 많은 여성단체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다른 조직을 잠식해야 하는 무모한 조직확대로 각종마찰과 부작용을 야기하여 여성단체들의 반발을 샀던 면은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것도 서류상이든 실질상이든 그 산하에 들어온다는 것에 불과할 뿐이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반발을 유도한 어떤 세력에 의한 의도적 부추김이 엿보이는 장면이었다.
10·26 이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는 최태민 비리의혹을 수사하였는데 이 수사를 이학봉 처장이 맡았다고 하였다. 이학봉에 의하면, 80년 초 최태민은 서빙고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이후 강원도로 보냈는데 삼청교육대는 아니라고 하였다. 비리혐의는 별로 없었고 박근혜의 연루의혹은 전혀 관계가 없었고 다만 문제소지가 있어 자숙할 필요가 있었고 최태민을 차단시켜놓을 필요성이 있어 그리하였지만 (1년여동안)오래두지 않았다고 하였다.
박근혜는 이런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하여 04년 7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분은 저를 많이 도와주셨고 그래서 음해도 많이 받았지만 정권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친척까지 이 잡듯이 뒤지고 조사도 많이 했지만 아무 것도 드러난 것이 없지 않은가”하고 답하여 그런 많은 의혹들에 대하여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태민 사건 속에는 어떤 음모가 숨어있고 왜 박근혜는 이런 모든 의혹들을 음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을까.
어떤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그런 심리상태를 알아보자.
―중정을 제쳐두고 경호실 정보처에서 다시 최목사를 조사하려니까, 박의원이 밥도 안 먹고 1주일 간 두문불출해 조사를 포기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 적 없어요. 저는 두문불출하고 밥 안 먹고 그런 일 안 해요. 얼마나 엄청난 모략이에요. 제가 편안하게 온실에서 자랐다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세상이 어떻다는 걸 잘 아는 이유가, 너무 많은 경험을 해서 일 거예요』
―국가정보기관에서 최목사의 전력이 의심스럽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를 하면 따르는 게 온당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권고하던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까』
―최태민 목사가 신군부에 구속돼서 강원도 인제로 쫓겨 갔을 때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석방운동을 하셨나요.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말한다고 됩니까. 그때 「유신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최목사를 한 번 더 조사했지만, 혐의가 없으니까 뭘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 양반이 감옥에 간 게 아니고 무슨 군부대에 가 있었어요. 문제가 있었으면 진짜 감옥에 갔든지, 돈을 물어냈든지 그렇게 됐겠죠』
만약 박근혜의 이런 말이 맞다면 이런 말의 진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박근혜 본인이 더 잘 알고 있기에 자신에 대한 언론보도내용조차도 다 이러하니 그런 근거없는 뜬 소문에 불과한 최태민에 대한 조사내용과 언론보도를 어떻게 다 믿어줄 수 있겠는가. 박근혜와 최태민은 서로 동병상련의 피해자가 되어 서로 더욱 감싸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15년간 이어진 관계로 인하여 최태문과 박근혜의 염문설까지 떠도는 판이었으니 그리고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김정일과의 1시간 독대를 상상의 염문설로 써대는 사람도 있었고 그걸 옮기는 언론매체도 있었으니 한번 생각해보라.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가당치않은 이야기들인지를,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붙는 유리벽 생활 속에서 20대 중반의 귀한 처녀인 박근혜와 60대 중반인 최태민의 염문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설명이 잘 안 되니 최태민이 요승이라서 최면술로 박근혜를 홀렸다나. 이런 극악무도한 못된 놈들,
최태민의 많은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백광현과 이학봉은 문제점이 좀 있는 것 같지만 실체규명불가라는 판정은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다수가 소문의 소문으로 그럴듯하게 말해도 무슨 큰 증거라도 대는 양 많은 양의 언론보도들을 갖다 대어도 어떤 사건의 진실은 때로는 당 사자가 아닌 이상 그 해답을 참으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이었다. 음해성 모략이 이처럼 무서운 것은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왜곡조작을 교묘히 섞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사실과 진실로 꾸며 그 구별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 최태문 사건에 대한 여러 글을 비교하다보니 다른 진실과 말하며 사실과 그럴듯한 허구를 교묘히 섞어 허구마저 진실로 포장하는 무수한 글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잘 짜여진 집단적 모략이라면 그들의 집요한 끈기는 참으로 무서울 지경이었다. 일일이 출처를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글의 대부분 자료출처는 박근혜와 최태민 비방 글에서 찾아왔음을 밝힌다.
최태문 사건을 파헤치다보니 문득 이 모든 것이 그 당시 어떤 경향신문 기자의 추적과 자료에 의하여 시작되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괜한 기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있지만 동경지국장 월북으로 야기된 64년의 경향신문의 매각사건과 이와 연계된 74년의 MBC와의 통합으로 인하여 경향신문이 5.16장학회 산하에 들어가게 된 일련의 일들, 이 경향신문 사건은 현 정권의 과거사위에 의하여 7대의혹사건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지만 얼마나 진실성이 있는지 몰라도 77년초 그 당시 그 경향신문 기자가 김재규에게 73년의 김대중 사건 해결과 최태민 관련자료들을 건네주었다는 사실에서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를 그런 일말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이런 자료를 넘겨받은 김재규는 백광현에 넘겨주고 극비수사를 명령했고 6개월 간 철저한 조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자세히 알기 위해 그 당시로 돌아가 보자. 74년 8월 육영수 여사가 저격으로 서거하자 박근혜는 허하고 허한 마음을 어디 둘 곳을 몰라 할 때였다. 75년 1월경 그런 그녀에게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의 허한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편지 세통이 연이어 날아왔는데 그런 편지를 선별한 경호원이 박근혜에게 건네주었던 것 같았다. 그 편지내용에 대해서도 경호원이 흘렸는지 알 길이 없지만 세간에 자세히 흘러나왔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최태민의 꿈에 국모님(육영수)이 현몽하여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 큰딸은 장차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것이다.”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기자와의 대화 한 대목을 보자.
―최태민씨가 박의원에게 「육영수 여사가 꿈에 나타나 도와드리라고 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만나게 됐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만나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어 하셔서 한 번 청와대에서 만났죠. 여러 가지로 나라를 걱정하시는 생각이 들어, 그분이 선교단을 할 적에 좋은 뜻으로 하니까 도와 드리기도 하고 일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했어요』
―어머니가 현몽했다는 유의 얘기는 사실이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이런 문제들이 왜 나오냐면, ...』
―여성잡지들에 그런 얘기가 쏟아져 나왔는데 왜 법적 대응을 안 했습니까.
『인터뷰에 응하고, 텔레비전에까지 나가서 질문에 다 답했어요. 꼭 법적인 대응을 해야만 합니까』
잘 대답을 하던 박의원은 최태민 관련 질문이 10분 이상 이어지자 『저의가 뭐예요』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공인으로서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건 알지만, 이런 식의 인터뷰는 더 이상 못 하겠다』는 그녀를 진정시켜 인터뷰를 계속했다. 반복된 이런 질문을 만나는 기자마다 다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을 것이었다. 사실 『그건 아니에요,』라는 말은 주로 부분만 부정할 때 쓰는 말이다.
사실 이런 현몽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더라도 그 속에는 그 흔한 현몽보다는 그보다 더 강한 무엇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편지가 세통이었다고 하였으니 처음 편지라면 몰라도 그 후의 편지는 아무도 뜯어보지 못했을 것이고 두 사람만의 사적 공간이라 다른 사람들이 알 수도 없는 내용이었고 특별히 왈가왈부할 일은 못 된다. 하여튼 박근혜는 이런 편지속의 어떤 내용에 강한 인상을 받고 호감을 가졌다는 것은 75년 3월 6일 청와대에서의 최태민과의 면접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