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이스라엘이 만주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이름없는풀뿌리 2017. 9. 29. 08:51

이스라엘이 만주에 들어 설 수도 있었다.


1938. 12. 05. 동경

육군대신 아다가키 세이시로, 일본수상 고노에 후미마로, 외무대신 아리타 하치로,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 대장대신 겸 통산사업대신 이케다 시게아키,가 한자리에 모여 내각회의를 개최했다.

 

 

프로젝트 이름 “복어(fugu)"란 계획이 정식으로 만들어졌다.

복어계획의 핵심내용은 일본은 중국의 유태인과 협력하여 유태인이 하르빈에 ”유태인 국가재건“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조건으로 유태인의 일본에 대한 전쟁자금지원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복어 계획이란 이름은 1938년 7월에 이누즈카 고레시게의 연설에서 유래한다. 유대인의 경제력과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 이누즈카는 유대인의 유치가 일본으로서 매우 득이 되는 일이긴 하나, 자칫 잘못하면 거대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누즈마는 이 이면성을 고급요리이나 맹독을 가진 복어에 빗대어 이것(유대인 이주 계획)은 복어 요리와 같다고 발언하였다. 후에 일본통으로 알려진 미국인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가 이 계획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하면서 이 비유를 빌려 복어 계획(Fugu Plan)이란 명칭을 붙이면서 명칭이 정착되었다. 단, 이 명칭은 당시에도 비공식적으로만 사용되었다고 한다.


복어 계획(-魚 計劃) 또는 후구(하돈) 계획(河豚計劃, 일본어: 河豚計画 (ふぐけいかく), 영어: Fugu/Blowfish Plan, Jewish settlement in the Japanese Empire) 혹은 육족협화(六族協和, 영어: Six Races Under one Union)는 1930년대일본에서 추진된 유대인 난민만주국으로 이주시키려던 계획이다.1934년아유카와 요시스케가 처음 제안한 계획에서 시작되어 1938년5부장관 회의에서 정부의 방침으로 정해졌다. 육군 대좌 야스에 노리히로, 해군 대좌 이누즈카 고레시게 등이 실무를 주도하였다. 박해를 피해 유럽에서 이탈한 유대인들을 만주국에 정착시켜 자치구를 건설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유대인 적대정책을 추진해가던 나치 독일과의 우호관계 손상을 우려하여 계획이 점차 흐지부지되었으며, 삼국 군사 동맹의 결성, 나치 독일일본 제국 양국이 연합국과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사라져 결국 계획은 1941년 12월 7일 일본놈의 美 진주만 공격으로  만주 이스라엘 건국은 무산되고 만다.

하얼빈을 중심으로
유대국가를 건설하려 노력했던
2만 여명의 유대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복어계획전문:

  http://ko.wikipedia.org/wiki/%EB%B3%B5%EC%96%B4_%EA%B3%84%ED%9A%8D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영국에서 독립)

 남한의 1/4.5 크기, 인구 6백만명....

 

2차대전이 한창일 무렵 이스라엘 민족지도자 (대표 벤구리온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들은 영국과 협상을 시도하여 전쟁비용을 지원해 주는 조건으로 종전후 옛유대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약속한 사실을 안 독일 힛틀러는 가공할만한 유대인 학살을 감행하게 되었으며 영국과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수수방관 하였고   

 

전쟁이 끝날당시인 1948년영국 정부는 이스라엘에게도 승낙을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에게도 반대도 승낙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을 취한 사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영국과의 협상중에 각지에 흐트진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 땅에 강제 이주를 감행하게 된다.  

   

이주와 동시 건국을 선포하고 국제사회에 재빨리 승인을 받는 조치를 취하자  

2천년을 살던 팔레스타인 인들은 졸지에 땅을 빼앗기게되고 난민으로 전락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내건 이유는 이땅이 우리선조땅이다 그 근거는 구약성서에 쓰여줘있다 바로 그 한마디 뿐이였고 팔레스타인은 그 당시 구심점이 없는 유목민 집단 거주 형태이므로 조직적인 구성을 할수 없었던것이 최대의 약점이였다. 이렇게 시작한 분쟁이 3번의 중동전으로 이어저 오늘에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강대국의 이중적 외교방식으로 빗어진 중동 사태는 몇차례의 중동전쟁으로 그 열기가 더욱 악화 되었고 현재에 이르런 국면이다.   

 


현재의 대한의 모습


[단독]美, 한일합방 과정 日에 천문학적 재정지원

 

[쿠키 사회] 1910년 경술국치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고 일본에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을 했다는 사료가 책으로 공개됐다.

서울대 출판부는 25일 미국의 재야 사학자 캐롤 카메룬 쇼(Carole Cameron Shaw·61·여·작은 사진)의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외세에 의한 한국 독립의 파괴·큰 사진)'를 발행했다.


책은 1901년부터 미국의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가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도서관과 미 국회도서관 등에서 발굴한 이 사료들은 1900년대 초 한·중·일에서 근무했던 미국 공사가 루스벨트 대통령 및 국무장관과 한국 정책을 협의한 편지와 문서, 보도 문건 등이다.

특히 일본이 1904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루스벨트 대통령 주선으로 미·영의 대기업들로부터 전비 차관을 받은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쇼씨는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이 앞장서 앤드류 카네기의 철강회사, 제이피 모건 등 미 대기업을 통해 일본의 전쟁비용 약 7억엔(현재 14조원 상당)을 조달했다는 사실을 '강철왕' 카네기의 편지 등을 통해 확인했다. 그는 또 미국이 1905년 러·일 전쟁 처리를 위한 포츠머스 회담에서 한국과 중국을 배제하는 전략을 썼다는 것도 조약 참여자들의 개인문서를 통해 밝혀냈다.

학계에서는 쇼의 책이 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과정에 미국 정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미국측 원본자료를 이용해 밝혀낸 최초의 서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본은 그 동안 미·영이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용인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쇼의 연구결과로 미국이 인정한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이 부도덕하고 위법한 것이었다는 반박이 가능해졌다.

'한국병합에 대한 역사적·국제법적 재조명팀'을 주관해온 이태진 서울대 인문대학장(국사학과)은 "국내 학자들은 그동안 미국 자료에 접근이 어려워 일본 주장에 대한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상황"이라며 "쇼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논쟁을 정당하게 풀어나가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버드대학 동아시아 학과에서 '한국어' '근대 중국사'등을 전공한 쇼씨는 59년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으며 2000년 주미 한국대사관의 역사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쇼씨는 "100여년 전 우리(미국)가 '공공의 선'이란 미명하에 작은나라(대한제국)의 국권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라"며 "미국인 한 사람으로서 사죄의 뜻을 표하고 싶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노용택 박지훈 기자 nyt@kmib.co.kr
 

전문:http://media.daum.net/society/affair/newsview?newsid=20070426070508998

위 기사를 보면서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미국으로부터 뒷통수 제대로 맞은 모습이 연상되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고종을 안심시키고  일본과는 카스라테프트밀약을 진행한 것입니다.



 

한일 강점의 조약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