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sr]역사,종교

홀연히 사라진 문명, 구게 왕국 / 서하(西夏)의 후예들은 어디로 갔는가?

이름없는풀뿌리 2017. 12. 3. 21:12

홀연히 사라진 문명, 구게 왕국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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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8  09: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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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구게(古格) 왕국은 9세기 티베트의 토번(吐蕃)왕국이 분열된 뒤 성립된 비교적 세력이 강성한 국가였다고 한다. 토번의 마지막 왕 랑다마(郎達瑪)가 죽은 뒤 벌어진 수차례의 왕위 쟁탈전에서 패한 지더니마(吉德尼瑪) 왕자가 아리(阿里) 지역으로 이주해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아들들에게 나눠 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타크 왕국과 푸란 왕국, 그리고 구게 왕국이다.


구게 왕국은 지더니마의 셋째 아들인 더자오(德朝)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서장왕신기(西藏王臣記)』에 따르면 구게 왕조는 700여 년간 16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강성했을 때는 서쪽으로 카슈미르 일대와 지금의 파키스탄 일부까지도 지배했다고 한다. 또한 구게 왕성(王城)은 10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끊임없이 증축돼 황토산 전체가 왕궁과 사원, 방어시설과 주거지 등이 어우러진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이 됐다. 총면적이 72만㎡에 이르는 구게 왕국 유적지에는 방 445칸, 토굴 879개, 보루 58개, 비밀통로 4갈래, 불탑 28기 등이 남아있다. 왕성이 있는 황토산의 바닥에는 노예와 백성들이 살았던 300여 개의 동굴 주거지와 낡은 오두막이 줄지어 있고 산허리에는 작은 사원과 전각, 승방 등이 밀집해 있다.


놀라운 것은 왕실 사람들이 거주하던 황토산 꼭대기의 여름궁전과 산 밑바닥에서 추위를 피하던 지하궁전인 동궁(冬宮)이 비밀통로로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산성 내부에 인공 암도(暗道)를 상하로 파서 꼭대기까지 연결되도록 설계했고 2km가량의 회전식 취수도(取水道)를 만들어 산꼭대기 왕궁으로 물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구게 왕국은 1635년 카슈미르에서 온 라타크 인들의 집요한 공격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국왕은 성문을 닫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라타크 인들이 매일 산 아래에서 백성들을 학살하자 결국 투항했다고 전한다.

 

  
 

역사문화의 미스터리, 종교 신앙의 미스터리, 지연지리 환경의 미스터리를 다 갖추고 있는 구게 왕국은 너나없이 달려드는 신비의 세계가 됐다. 구게 왕국의 소멸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던 왕국이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더 큰 것은 동서양 문화의 정화를 융화시켰던 문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된다.


빙하와 고산, 성스러운 호수가 분포하고 있는 티베트는 기이하고 전기적 색채가 충만한 동화세계다. 사람들의 경모하는 신비의 여신이다. 멀고먼 티베트 서쪽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신비의 고원 ‘아리(阿里)고원’이 있다. 현재는 중국의 서쪽 변경에 속한 카슈미르, 인도, 네팔 등의 나라와 접경 지역이다. 중아시아, 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문명권의 랜드 브리지(Land bridge)이며 티베트 중 가장 신비한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구게 왕국은 1000여 년 전 아리 고원 위에 돌연히 출현(대략 북송 연간)해 700여 년을 존속하다가 불가사의하게 사라져 버렸다. 20세기 30년대 이탈이아의 저명한 티베트 학자 발두치(Massimo Balducci)가 그 신비한 땅을 방문했다. 그는 자세한 고증을 거치지 않고 간단하게 ‘자부랑 사찰 유적’이라고 했다. 사실 그곳은 구게 왕국의 유적이었다. 구게 왕국의 유적과 그곳에서 발견된 불교 건축, 예술품, 그리고 무수한 보루, 암도(터널), 성벽, 무기고 등 다수의 유적은 아리고원 문화예술사상 휘황찬란한 장을 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석기 시대 말기 신비하기 그지없는 샹슝(Zhang Zhung, 像雄, 샹슝 문화는 고대 티베트의 서부에서 북서부에 걸쳐 존재했던 문명이며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인 기원전부터 643년까지 티베트 고대 종교인 뵌(Bön་)교의 무대였던 곳이다. 고대 티베트의 역사서에 티베트 중서부의 패자로 자주 언급되고 있었지만 최근 나취 지구에서 샹슝 유적지가 발견되기 전까지 고고학적 근거를 찾지 못했었다. 수도는 큔룰(琼隆)지방에 위치한 큔룰은성(琼隆银城, 白銀城)이었다)은 티베트 고대 문화의 발원지 중 하나다. 보에(Bod, 토번吐藩) 왕조가 건립되기 이전에 샹슝은 티베트 고원에 웅거했던 강대한 부족 연맹으로 그 세력은 페르시아와 아랍에까지 이르렀다.


7세기 샹슝은 강대해진 토번 왕국에 의해 멸망했다. 토번 왕국 말기, 보에 왕실 내부에 정치투쟁이 격렬해졌다. 왕실 직계 후예 지더니마가 투쟁에서 실패하자 아리로 이주했다. 푸란(Burang, 普蘭) 왕의 환영을 받고 왕으로 추대돼 ‘아리 3국’과 구게 왕국을 건설했다. 건국 후에 아리 지역을 세 부분으로 나눠 아들들에게 나눠 줬다. 불교를 부흥시키고 인도 고승을 초빙해 교리를 정리했고 아리 지역에 천금을 마다하지 않고 불사를 일으켰다.

 

  
 

구게 왕실은 불교를 선양하는데 진력하는 한편 출가해 수행자가 되기도 했다. 티베트 불교 후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왕자 이시워(意希沃)다. 그는 톨링(Toling) 사원을 구게 왕국을 넘어 티베트에서 가장 유명한 사원 중 하나로 건축했다. 구게 왕실은 티베트 화룡(火龍) 연간에 톨링 사원에서 대법회를 열었다. 이는 티베트 불교 전래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인도 고승 아티샤(Atisa)도 대법회에 참석해 대대적으로 티베트에서 불교를 발전시켰다. 그렇게 구게 왕국은 티베트에서 지위를 높여 나갔다.


구게 왕실은 불교를 깊게 믿었으나 정교분리를 견지했다. 왕권이 지고무상하다는 원칙아래 라마 집단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다. 정교합일의 풍조가 점차 굳어지던 티베트하고는 다른 형태다. 그러나 원나라 이후 티베트가 정교합일의 체제가 확립되면서 구게 왕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게 왕국의 라마 집단도 정권을 점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그래서 종교 세력과 왕실 사이에 모순이 발생했다. 바로 그때 변장하고 성지를 순례하던 인도 참배객 중에 포르투갈 전교사 안드라데(Andrade) 등이 고된 여정 끝에 구게 왕국의 수도인 자다(zhada)에 도착했다. 안드라데는 자신의 운이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왕이 후한 선물을 줬고 구게에서 전교를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큰돈을 들여 교회까지 지어줬기 때문이다.


구게 왕실이 전교사를 지원한 목적은 바로 천주교의 세력을 이용해 라마 집단을 견제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왕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천주교를 제창했다. 안드다레가 왕실의 신임을 받음으로써 구게 왕실과 라마 집단 사이에 모순이 격화됐다. 그러나 민중의 이해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라마 집단의 폭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구게 왕국과 한 집안인 라타크 왕국이 기회를 틈타 출병해 구게 왕국을 점령한다. 도성도 따라서 폐허가 돼 버렸다. 28대, 장장 700여 년의 통치가 그렇게 끝나 버렸다.

 

  
 

지금 보더라도 구게 왕국의 유적은 여전히 웅장하면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자다 현의 서쪽 10킬로미터의 랑친짱부(朗欽藏布, Langqên Zangbo)의 고원에 위치해 있다. 유적지는 남북으로 1200미터, 동서로 600여 미터, 총면적 72만 평방미터다. 수틀레지(상천象泉)강 남쪽 기슭의 토산 위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토산 남쪽 기슭에는 좁은 산등성이가 남쪽의 큰 토산과 연결돼 있다. 산의 동서 양쪽은 깊은 계곡으로 돼 있으며 샘물이 솟아 나온다. 구게 왕국 유적지 부근의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솟는 수원지다.


모든 건축물은 산을 의지해 세워졌다. 산을 등지고 강을 향해 있어 시야가 트여 있다. 멀리에서 보면 모든 건축물들이 아래에서 위로 점차 쌓아 올린 엇갈린 배열이 질서정열하게 늘어서 있다. 거대한 금자탑처럼 보여 장관을 이룬다. 유적지 내의 지형은 복잡하다. 계곡이 종횡으로 뻗어있어 미궁처럼 보인다. 안쪽에 평평하고 완만한 대지가 있으며 높이 솟은 절벽과 어슴푸레한 동굴도 있다. 지역 내의 비고가 200미터다.


구게 왕국의 성곽은 무척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다. 높이 200미터, 점지 면적 18평방미터로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산을 의지해 층층이 벽돌을 겹쳐 쌓았다. 한 층 한 층씩 올라가 11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궁전, 사원이 있고 주민 거류지역 및 군사 시설이 있다. 궁전은 산 정상에 집중돼 있고 사방이 모두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흙을 쌓아 만든 성벽으로 보호돼 있다. 두 갈래 가파른 암도를 지나야만 왕궁에 이를 수 있다.


왕궁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국왕이 정무를 처리하는 곳과 거주지역이다. 국왕과 왕족의 궁실은 작고 정교해 창의성을 느낄 수 있다. 서쪽 건축물은 국왕의 ‘동궁(冬宮)’으로 사면이 흙벽돌로 쌓아 올린 성벽이 둘러져 있어 좁고도 험준한 50미터의 굽은 길을 통해야만 오를 수 있다. 전체 도시의 제일 위쪽에 왕궁이 자리 잡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전 왕국을 살필 수 있고 전시에는 지휘소로도 이용했다. 지고무상한 왕권과 군림천하의 뜻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구게 왕국은 불교 국가다. 그래서 다른 시기 다른 교파의 크고 작은 사원들이 근 100좌나 건설돼 있다. 그런 불교 건축물들은 왕궁 아래 산기슭에 눈에 띠는 위치에 세워져 있다. 많은 별이 달을 에워싸듯 왕궁을 둘러싸 있다. 불교 사원의 벽화, 조상, 조각, 그리고 건축 예술은 서부 티베트의 독특한 풍격을 갖추고 있다. 중아시아, 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고대 예술의 풍격을 융화했을 뿐만 아니라 중원 지역과 티베트 지역의 다른 예술 풍격도 받아들여 높은 역사, 과학, 예술 가치를 지니고 있다. 티베트 고대 문화의 정수다.

 

  
 

산의 위아래에 현존하는 사원 건축물은 6좌가 있다. 그중 홍색, 백색의 두 사원이 가장 휘황찬란하다. 홍백 사이 토황색 기조의 토산에 몇 가지 색을 칠했다. 두 사원은 확실한 티베트 양식의 건축물이다. 사원 내 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있다. 불전 고사, 예불, 경전, 상려, 운수, 무술연습 장면 등 제재가 광범위하다. 묘사 정도도 생동감이 넘치며 신비스럽기까지 한 종교화이면서 민속화이다. 티베트, 인도, 네팔, 서아시아의 풍격을 융합시킨 회화수법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구게 왕국은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웅거했던 왕국이었지만 끝내 전쟁으로 멸망한다. 무수한 세월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그곳에서 투구, 말 뼈, 방패, 화살 등을 발굴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형제의 나라였던 라타크 인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라타크 인들은 구게 왕국이 권토중래할 것을 염려해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고.


일순간 천 년의 역사는 지났다. 남은 것은 그저 고요하게 휩싸인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 건축물들 뿐. 비바람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서있다. 일세를 풍미했던 왕국은 사라졌다. 한 시대의 아름다운 문명을 자랑했던 구게 인들도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풍파를 다 겪은 노인에게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도 대답할 수 없었을 테지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서하(西夏)의 후예들은 어디로 갔는가?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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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22  09: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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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서하는 1038년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Ordos)와 감숙(甘肅) 지역에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Tangut, 黨項)족이 세운 나라다. 명칭은 대하(大夏)인데 송(宋)과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고대 왕조인 하(夏)와 구분하여 서하(西夏)라고 부르면서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11세기∼12세기에 동서교역을 매개하며 유목과 농경, 불교문화가 결합된 독창적인 문화를 발달시키면서 내몽골(內蒙古)에서 돈황(敦煌), 난주(蘭州)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1207년 몽골에 복속된 뒤, 1227년 칭기즈 칸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서하 왕릉은 영하(寧夏) 회족자치구 은천(銀川)시 서쪽 약 30㎞ 지점의 허란산(賀蘭山) 동쪽 기슭에 있는 황가 능이다. 사방 53㎢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9기의 왕릉과 25기의 무덤이 있다. 현존 최대이며 지상의 유적이 잘 보전되어 있은 제왕의 무덤군이다. ‘신비한 기적(神秘的奇迹)’, ‘동방금자탑(東方金字塔)’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왕묘(王墓)는 지상능원과 지하묘실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능원은 모두 남향으로 배치돼 있고 평지에 조성돼 있다. 또한 북에서 남으로 문결(門闋), 비정(碑亭), 외성(外城), 내성(内城), 헌전(獻殿), 능대(陵台), 사방의 담으로 돼 있다. 능대는 팔각형과 원형 두 종류가 있으며 높이는 약 17∼20m로 동일하지 않다. 서하 왕릉 각각의 능원(陵园) 면적은 모두 10만㎡이상으로 규모가 매우 크며 외형이 불탑과 비슷하다. 중원의 사각형 능묘와 차이가 있다. 능묘의 내부는 앞부분이 좁고 후방이 넓은 사각형의 묘실로 양측 모두 깊이가 25m에 달한다. 토굴묘 형식으로 석마(石馬), 동우(銅牛) 등과 각종 금장식, 진주, 자기 등의 문물이 출토됐다.

 

  
 

서하 왕조가 건립 될 때 기본적으로는 당시 중원의 북송 왕조의 정치, 경제 제도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위구르 문화와 토번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탕구트 족은 창조성이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강족(羌族) 문화를 계승해 자신들만의 특색을 갖춘 서하문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대 원(元)나라 사람들이 역사를 편찬할 때 서하에 대해 송(宋), 요(遼), 금(金) 3국의 옛 사초만을 근거로 해 분량이 많지 않은 전기식 기록만 남겼다. 결국 사료의 부족으로 서하에 대한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됐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가 우리들에게 남겨져 있다. 서하 정권이 멸망한 후 탕구트 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양학자나 중국학자들 모두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다. 700여 년의 능곡의 변천으로 단일 민족 중 다시는 서하 유민이 출현하지 않고 있다. 서하의 말을 하는 사람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영원히 서하 유민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결론은 성급한 것일까? 역사 기록을 근거로 드러난 편린만을 가지고 중국과 외국 학자들은 서하의 후예들의 행방을 대략 6가지로 추론하고 있다.


첫째는 원(元) 왕조의 통치자들에게 투항했을 것이라 본다. 서하 멸망 후 탕구트 족의 통치 계급 중 일부는 원 왕조에 투항했고 원 왕조는 그들을 중시해 ‘색목인’ 계열로 대우했다. 둘째는 금(金) 왕조에 투항했다고 본다. 『금사․서하전』 기록에 따르면 일부 서하 유민들이 금나라에 투항해 하남 신양(信陽), 방성(方城) 일대에 정착했고 나중에 점차 한족에게 동화됐다.

 

  
 

셋째는 동쪽으로 이주했다고 본다. 하북 보정(保定) 북쪽 한장(韓莊)에서 출토된 서하문자 ‘勝相幢(승상당, 부처의 이름·불교의 경문을 새긴 돌기둥)’은 명대 홍치(弘治) 15년(1502)에 세워졌는데 기록된 인명 중에 탕구트 사람의 성씨가 있다. 이것은 서하가 멸망한 후 일부가 하북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서하가 멸망하고 270여 년 후 보정 지역에 탕구트 인들이 있었다. 이외에 원(元) 지정(至正) 5년(1345)에 거용관(居庸關)에 건조된 석각에도 나린(납린納鱗), 즈먀오미통(지묘미통智妙彌通) 등의 탕구트 사람들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넷째는 남쪽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천(四川) 강정(康定) 목아(木雅) 지역의 장족(藏族) 일부는 서하 유민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학자들이 조사한 적이 있고 최근에 영하(寧夏)사회과학원의 서하 전문가 이범문(李范文)도 조사했는데 일부 탕구트 민족은 외적에게 투항한 망국노가 되지 않기 위해 ‘장정(長征)’을 했다고 봤다. 그들은 감숙성 남쪽을 돌아 송반(松潘)으로 몰려들었고 아세(阿細)와 반좌(班佐)에서 나와 금천하(金川河)를 돌아 단파(丹巴), 건녕(乾寧)을 경유, 목아(木雅)에 도달한 후 심산계곡에 작은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다섯째는 각 민족 중에 숨어 지내다가 자신들의 민족성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하가 멸망한 후 불교를 믿던 탕구트 인들 중 일부는 서하 땅에 여전히 거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탕구트 민족이라 하지 않고 성씨와 이름을 바꾸면서 각 민족과 융합됐다고 보기도 한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감숙성 남부 지역에 아직도 여타 민족들과는 언어와 풍속 습관이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 그들이 서하 유민일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물론 선비(鮮卑)의 토욕혼(Tuyuhun, 土谷渾)의 원시 거주민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여러 가지 이유로 서하 후예들의 거취에 대해 아직까지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