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정치·시담록

[스크랩]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름없는풀뿌리 2017. 11. 22. 11:55

*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다 *





그를 체포한 이대용(李大鎔)공사, 그를 조사했던 홍필용(洪弼用)국장등 당시 정보부 간부들이 털어놓은 20년만의 진실―『그것은 김형욱(金炯旭)의 조작이었다』


이대용(李大鎔)씨의 말 한 마디에서..


위장 귀순하여 여교수와 결혼, 잘 먹고 잘 살다가 느닷없이 가발을 쓰고 콧수염을 붙인 뒤 위조여권을 갖고 국외로 탈출했으나 중앙정보부의 활약에 의해 사이공 공항에서 붙들려 와 사형집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 전 북한중앙통신사 부사장 李穗根. 죽을 때의 나이가 만 45세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 일본제국군대 지원, 북한 노동당 입당, 북한 탈출, 남한 탈출 등 세 번의 체제변화를 겪었던 이 「언론인」에 대해 기자가 한 번 제대로 기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 묵은 탁상일기를 뒤져보았다.


1986 년 1월8일 오후에 기자는 서울 여의도에 사무실이 있던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 이대용(李大鎔)씨를 찾아갔었다. 李씨는 1969년 1월31일 오전 사이공의 탄손누트공항에서 이수근(李穗根)을 비행기로부터 끌어내렸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의 공사직함(육군 준장)을 가진 중앙정보부 월남책임자였었다. 이대용(李大鎔)씨는 이수근(李穗根)을 체포한 사람으로는 별로 유명하지 않다.


李공사는 1975년 4월에 사이공이 함락될 때 탈출하지 못하고 2명의 대사관 직원과 함께 억류돼 감옥생활을 했다.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이스라엘 상인 아이젠버그의 중계에 의한 비밀접촉 끝에 李공사일행은 1980년 4월에 풀려나 귀국하였었다.


억류 5년간 베트남 당국과 북한측의 집요한 회유를 받고도 사상적 변절을 거부했다고 하여 반공정신의 상징처럼 돼 있는 그는 「사이공 억류기」란 책도 냈고, 이 책은 텔리비전의 미니시리즈로 극화되었다. 육사 7기 출신인 그는 6·25 전쟁 때는 6사단의 중대장으로서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변인 초산에 맨 처음 당도한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월남 패망 때는 미군 헬리콥터에 타고 철수할 수 있었지만 대사가 먼저 가버린 상황에서 남아 있는 한국교민들과 운명을 같이하기 위해 일부러 헬기를 타지 않았던 사람이다. 「위장간첩 이수근(李穗根)」은 해외여행자 소양교육장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으니 두 李씨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한국인의 반공교육에 상당히 기여를 한 셈이다. 3년 전 그 날에 기자가 이대용(李大鎔) 이사장을 찾은 것은 이수근(李穗根)의 체포작전에 미국 CIA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기자는 월간조선 그해 2월 호에 「한국내 미 CIA」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의 취재를 하고 있었다. 李이사장은 두툼한 메모 책을 펴놓고 당시의 상황을 시간별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정보부와 주월 한국대사관 사이를 오고간 수십 통의 전문 내용, 이수근(李穗根)과의 대화내용 등등이 적힌 메모책을 덮으면서 李회장은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이수근(李穗根)이가 간첩이라고 생각합니까?』


『물론이지요』


『언젠가는 제가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그는 간첩이 아닙니다』


李회장은 『여기에 다 적혀 있다』는 듯 메모 책을 가리켰다. 어리둥절해진 기자는 궁금증을 나타내며 캐묻고 들어갔다. 李회장은『지금은 밝힐 단계가 아니다』면서도 몇 마디 참고가 될만한 얘기를, 내키지 않는 듯, 그러나 자신만의 비밀로 안고 있기에는 좀 안타까운 듯, 뱉어내었다. 퍼뜩 기자의 뇌리에 스친 이수근(李穗根)의 이미지는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위장간첩이 아니라 최인훈(崔仁勳)의 영원한 베스트셀러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李明俊)이었다.


사형 때 『김일성 만세!』 안 불러


李씨가 기자 앞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은 그런 말을 들어도 기자가 기사화 할 수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을지 모른다. 기자도 그 말을 기사화 하려는 취재작업을 벌이지 않았다. 진실을 알아도 어차피 못 쓸 기사인데 취재를 해보았자 무얼 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이수근(李穗根)사건을 기사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이 당시의 언론상황이었던 것이다.


李사장을 만난 지 석 달쯤 되는 날에 기자는 또 우연하게 이수근(李穗根)과 부딪쳤다. 한국의 사형집행 실상에 대해 취재하고 있던 기자는 화양동 성당의 사무장 고중렬(高重烈)씨를 만났다. 高씨는 서울구치소에서 20여 년간 사형수 교화담당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수백 명의 사형집행에 참여한 이다. 퇴직 뒤에는 「서울구치소」라는 책을 쓰기도 했었다. 高씨가 먼저 이수근(李穗根) 이야기를 꺼냈다. 이수근(李穗根)은 사형집행 때 많은 간첩들이 그러했듯 『김일성 만세!』를 부르지도, 신문이 보도했듯『자유대한 국민들을 배신하여 미안하다』는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신부님이 천주교 식의 영세를 받겠느냐고 했더니 이를 거절했어요. 신부님이 안타까와서 눈물을 쏟던 기억이 납니다. 이수근(李穗根)이는 신부님의 권유하는 말을 막고 자기 말을 계속하려고 했는데 집행관이 도중에 중단시키고 집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유언은 구체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전체적인 뜻이「나는 북도 남도 싫어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다.


남북 양 체제에서 생활한 경험을 살려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흐름이었습니다』 이수근(李穗根)이 남겼다는 마지막 말은 그가 이대용(李大鎔) 공사에게 붙들린 직후 자포자기 상태에서 쏟아놓았다는 말과 거의 일치했다. 高씨를 만난 지 두 달쯤 지나서 기자는 또 우연히 이수근(李穗根)과 만났다.


김형욱(金炯旭) 아래에서 정보부 국장을 지낸 金모씨는 김대중(金大中) 납치사건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이수근(李穗根)을 거론했던 것이다.

『내가 李를 맡아 관리했던 적이 있었지요. 사이공에서 붙들려 와서 조사를 받는 자리에 내가 갔더니, 그는 나를 붙들고 펑펑 울면서 감찰실장 방(方)모씨 욕을 하더군요. 方실장이 하도 그를 괴롭혀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겁니다. 수시로 그를 불러내, 권총을 들이대고, 「너 간첩이지」하면서 위협을 했으니…』


기자는 지난 3년간 이수근(李穗根)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자가 본격적으로 이 소재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한 달쯤 전부터였다. 이제는 「이수근(李穗根)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한국민주화의 한 산물인 셈이다. 이수근(李穗根)의 삶과 죽음이 분단상황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집행간여 검사의 증언


기자가 첫 취재대상으로 잡은 이종효(李宗孝)신부(서교동 성당)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사형집행의 집례를 본 경험이 짧은 때인데, 그를 영세 받게 하지 못해서 안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에 대한 선입감 때문에, 당연히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유언을 했으나 태도는 태연자약했어요.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수근(李穗根)이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당한 것은 1969년 7월2일 오전 11시쯤이었다. 당시의 신문들은 「서울지검 김병하(金炳河) 검사가 이름, 생년월일 등을 물어 사실확인을 했고 李가 『따뜻한 환대를 저버리고 탈출하려 한 데 대해서는 온 국민에게 미안하다』는 최후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다.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는 김병하(金炳河)씨는 『그때 신문에 보도된 李씨의 유언은 모두가 엉터리다. 오전에 이미 사형을 집행한 뒤 바깥으로 나오니 이미 신문에 추측기사가 실려 있더라』고 했다. 金변호사는 사형 집행장에서 신문하는 과정에서 이수근(李穗根)과 이런 문답을 나누었다고 기억했다.


김병하(金炳河) 검사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털어놓아라. 그러면 집행을 연기할 수도 있다.

이수근(李穗根) : 없다.


김(金)검사 : 왜 대한민국에서 도망갔는가?

이수근(李穗根) : 나는 북쪽과 남쪽 체제를 다 경험하여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중립국에 가서 통일방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였다.


김(金)검사 : 더 할말이 있는가?

이수근(李穗根) : …


( 金변호사는 『그는 가족에 대한 말을 남기지 않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담담했었다』면서 『그가 남한에서 감시를 당하는 등 자유를 속박 당한데 불만이 많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정보부, 李의 행방 이틀간 몰라


이수근(李穗根)이 아내 이강월(李江月)씨(당시 36세)에게는 알리지 않고 북에 있는 본처의 이질인 배경옥(裵慶玉)씨(당시 29세)와 함께 서울 성북구 삼양동 233의 3번지에 있던 자기 집을 나와 위조여권의 주인 오제녕(吳濟寧)씨 행세를 하면서 행선지를 태국으로 하여 김포 발 홍콩 행 케세이퍼시픽 항공사(CPA)의 여객기에 몸을 실은 것은 1969년 1월27일 오후 5시30분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다음날 밤에야 비로소 이수근(李穗根)이 자취를 감춘 사실을 알아냈다. 李穗根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던 감찰실 직원이 27일에 실시된 부내 승진시험에 참여하느라고 이틀간이나 李의 행방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정보부는 이수근(李穗根)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던, 李穗根의 누이 이신성(李信星)씨(당시 사망)의 아들 김세준(金世埈)씨(당시 22세·연세대 재학)를 28일 밤에 연행하여 李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金씨는 삼촌 李穗根을 김포공항까지 전송하여 李가 간 곳을 알고 있었으나 다음날(29일)까지 행선지를 대지 않아 정보부에서는 李穗根이 국내에 있는지 해외로 나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공의 대사관에서 이대용(李大鎔)씨가 본부(정보부)로부터 긴급 전문을 받은 것은 29일 새벽이었다. 그 내용은 이수근(李穗根)과 처조카 배경옥(裵慶玉)이 해외로 탈출했으니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李공사는 직원들을 탄손누트 공항과 여관 촌, 이민국으로 보냈다.


29 일 오전 8시에 또 한 통의 전문이 날아왔다. 李穗根이 이세준이란 가명으로 월남에 잠입한 것 같으니 체포하라는 지시였다. 李공사 팀이 월남 이민국의 입국자 명단을 조사해보니 이세준은 28일 오전 9시15분에 CPA편으로 사이공에 도착, 17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다낭으로 갔음이 밝혀졌다. 이세준을 잡아와서 조사해보니 그는 李穗根이 아니라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청룡부대 중대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확인됐다. 29일 오후에 비로소 이수근(李穗根)이 오제녕(吳濟寧)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갖고 출국했다는 전문이 李공사 앞으로 날아왔다. 정보부는 만 2일이 지나서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었다.


이수근(李穗根)과 배(裵)씨는 27일 홍콩에 도착, 이틀 밤을 호텔에서 보낸 뒤 29일에 목적지를 캄보디아로 변경, 프놈펜행 CPA기를 타려고 그날 오후에 홍콩 공항에 나타났다. 공항을 지키고 있던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李를 발견, 격투를 벌였다. 李의 가짜 콧수염이 떨어져나가고 가발도 벗겨졌다. 홍콩경찰은 영사관 직원들과 李 그리고 裵씨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영사관 직원들은 외교관 신분이었으므로 즉각 풀려났다.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은 이병두(李秉斗)차장을 급히 홍콩으로 보냈다.


미CIA 한국지부장 라자스키씨에게는 협조를 요청했다. 홍콩경찰은 1월31일 아침에 홍콩을 출발, 프놈펜으로 가는 CPA기에 이수근(李穗根)과 裵씨를 태워 출국시켰다. 이 여객기는 사이공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영국정보기관은 미국 CIA의 부탁을 받고 李를 일부러 사이공 경유 항공편에 태움으로써 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사이공 공항에서 붙들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가 있다.


비행기에서 끌어내린 이수근(李穗根)


미CIA는 이수근(李穗根)의 홍콩출발을 김형욱(金炯旭) 부장에게 직접 통보하였다. 金부장은 홍콩에 나가 있는 이병두(李秉斗)차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李차장은 李가 아직 경찰서 안에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金부장은 욕설을 퍼부은 뒤, 사이공의 이대용(李大鎔)공사에게 긴급지시를 내렸다. 그때는 이미 李가 탄 CPA기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2분 뒤인 31일 오전 10시17분이었다.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는 교통체증으로 1시간쯤 걸린다. 李공사는 보좌관을 티우 대통령에게 보내 비행기의 이륙을 지체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李공사는 미국에서, 티우 대통령이 군 장교시절, 그와 함께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李씨가 1963년에 무관으로 부임해 온 이래 절친한 친구가 됐는데, 대통령 관저도 뒷문으로 무상출입 할 정도였다. 李씨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티우 대통령의 지시로 비행기는 아직 이륙하지 않고 있었다. 비행기로 뛰어올라갔다. 부하인 이택근씨만을 데리고 갔다.


李공사는 단박에 이수근(李穗根)을 알아봤다고 한다. 李穗根은 앞자리의 창 쪽에, 앉아 있었다. 李공사는 스튜어디스에게 신분을 밝히고 승객 명단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스튜어디스는 미스 장이란 예쁜 한국 아가씨였다. 승객명단 맨 끝에 오제녕(吳濟寧)이라고 볼펜으로 써넣은 이름을 확인했다. 2대 2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끌어낼까 궁리하고 있는데 배경옥(裵慶玉)씨가 다가왔다.


『대사관에서 오셨습니까』

『너 배경옥이지!』

배(裵)씨는 기가 푹 죽은 표정으로 여권을 내밀었다. 이택근씨에게 裵씨를 꼭 붙들고 있게 했다. 李공사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수근(李穗根)에게 다가가 『이 선생이지요』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야 이놈아! 난 죽을 각오가 돼 있어!』라면서 李공사의 정갱이를 걷어찼다. 태권도 2단인 李공사는 위에서 그의 어깨를 갈겼다.


기장이 달려와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李공사는 신분을 밝히고 티우 대통령의 특명이 있었음을 상기시켰다. 기장은 물러났다. 그 사이 한국 대사관 직원 대여섯 명이 달려와 합세, 李穗根을 무사히 끌어낼 수 있었다. 수갑을 채워 대사관으로 데려가는 차 중에서 『야, 우리 부장 좋아하시겠구만』 『야, 이 선생은 훈장 타게 됐구먼』이라고 빈정대기도 했다고 한다.


이상의 경위는 이대용(李大鎔)씨가 3년 전 기자에게 털어놓은 내용이었다. 기자는 지난 1월 하순에 李大鎔 생명보험협회 회장을 다시 찾아갔다. 李공사는 69년 1월 31일 오전에 李, 배(裵)씨를 붙들어 대사관으로 데리고 와 그날 밤 11시55분에 C-54 한국공군기 편으로 김포로 보낼 때까지 12시간쯤 같이 있었다.


李공사가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이 아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이때의 관찰 때문이다. 李공사는 3년 전에 보여주었던 그 메모 책을 다시 뒤적이면서 기억을 되살렸다. 『모든 게 분단의 비극이지요. 이수근(李穗根)은 고향이 황해도 서흥군인데 저는 금천으로서 가까운 곳이지요. 그날 이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북도 남도 싫었다』


李공사 팀은 대사관 2층에 李와 배(裵)씨를 꽁꽁 묶어 의자에 앉혀 두었다. 도리우찌 모자, 안경, 현금(미화), 수첩 등 50여 점의 소지품을 압수했다. 이수근(李穗根)은 엉엉 울면서 하소연하듯 그 동안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오후에 정보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李穗根에게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먹여 재워두라는 것이었다. 그는 별 저항 없이 약을 먹고 의자에 앉은 채로 잠에 떨어졌다고 한다. 李穗根은 마침 그때 사이공을 방문한 「정보부의 모 간부뮈?이야기를 오래했는데 李공사는 곁에서 주로 듣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李공사가 메모해둔 대화 내용의 중요부분은 이러한 것이었다.


문 : 왜 이런 짓을 했나?

답 :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서도 자유가 없더군요. 방(方)○○, 그 ○○가 나를 일일이 감시하고 수시로 불러서 북쪽과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면서 때리고, 내 발을 향해 권총을 쏴 위협을 하지 않나….


울분을 술로 달래고 나서 다음날 아침에 속이 아파 물을 달라고 하면 아내도 냉대하고….


문 : 그래도 남한이 북쪽보다 낫지 않나?

답 : 그렇지요. 북쪽보다야 백 번 낫지요.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북한이 바로 지옥이지요. 그래서 탈출했는데, 남쪽도 틀렸어요. 자유도 없고, 독재이고 해서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살려고 했어요. 남쪽, 북쪽을 다 경험한 것을 책으로 쓰면 한 40만에서 1백만 달러는 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수근(李穗根)은 『방○○에게 괴로움을 당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方씨는 당시 정보부 감찰실장이었다. 方씨는 육사8기 출신의 헌병장교였는데 모종의 사건에 연루돼 면직되었다가 5·16쿠테타 뒤에 정보부에 들어갔었다. 김형욱(金炯旭)은 방(方)씨를 감찰실장으로 승진시키고 악역을 주로 맡겼다고 한다. 方씨는 장기영(張基榮)당시 부총리의 집무실에 침입, 캐비넷을 뒤지고 정보부 전·현직 간부들의 비행을 조사한다면서 여러 가지 무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 간 방(方)씨에 대해서 이대용(李大鎔)씨는 『그런 사람에게 이수근(李穗根)의 관리를 맡긴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方씨가 李穗根을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고 했다.


김형욱(金炯旭)의 실토


이대용(李大鎔)씨는 『방(方)씨가 정보부에서 밀려난 뒤 사이공에서 음식점을 차렸는데, 「누가 날 죽이려 한다」면서 불안 해 하는 등 강박심리를 보이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당시의 정보부 국장 金모씨도 『方씨는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이였다』고 했다. 그는 또『이수근(李穗根)이 간첩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정보부 안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대용(李大鎔)회장은 더욱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李穗根사건 뒤 티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제가 따라 왔지요. 그때 김형욱(金炯旭)부장이 자기 사무실로 저를 불러 당부를 하더군요. 「이수근(李穗根)이가 2중 간첩이라고 발표했는데 그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은 李공사가 더 잘 알지 않소. 그렇다고 李穗根이를 살려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당신을 포함하여 몇 사람밖에 안 되니 절대로 보안에 붙여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 이수근(李穗根)은 한 2년쯤 징역을 살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李회장은 메모 책을 다시 뒤적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의 소지품 중에는 영한사전, 한영사전, 기초영문법, 중국어 4주간이 있습니다. 북한으로 넘어가려 했다면 이게 무슨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다가 스위스 같은 유럽의 중립국으로 가서 살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사전류는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이죠』


이대용(李大鎔)공사가 탄손누트 공항에서 李穗根을 붙들지 못했다면 김형욱(金炯旭) 정보부장은 틀림없이 면직되었을 것이다. 李穗根이 중립국으로 탈출, 남한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박정희(朴正熙)정권의 독재성을 폭로했다면, 朴대통령은 굉장히 화를 냈을 것이고 李의 탈출을 모르고 있었던 정보부의 책임자는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金炯旭부장은 李穗根을 수중에 넣자 이 실패담을 성공담으로 둔갑시킨다. 중앙정보부는 李穗根을 체포한지 13일 뒤인 1969년 2월13일에 이 사실을 국내 언론에 공개했다. 이 날의 발표전문은 이러했다.


중앙정보부 발표 전문


(1) 1967년 3월22일 판문점을 통하여 자유대한으로 월남한 북괴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李穗根)(45)은 그가 북괴 공산사회에서 급진적으로 출세한 배경이라든지, 월남한 동기 및 당시 판문점에서의 상황 등에 있어 처음부터 석연치 않은 점이 허다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괴 거물급 언론인이라는 점을 감안, 승공 계몽활동으로서 순회강연, 라디오방송, 텔리비젼 기자회견 등 반공행사에 참여케 한 바 있으나 이수근(李穗根)은 반공연설과정에서 북괴학정의 핵심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하여 폭로하는 일이 적었고 김일성을 비난하는 논지는 의식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이 노정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소 측근인물들과의 대화에 있어 『6·25는 북침이다』라는 등의 많은 의문점을 나타내기 시작하므로 당부(當部)는 그의 위장귀순문제에 혐의를 두고 다각적으로 검토 분석하는 한편 표면적 내지 본격적 수사는 피하고 이면적 감시의 강화와 내사를 계속하여 왔던 바 서울 종로거주 배경옥(裵慶玉)(남·29·재북 본처의 이질)과 해외탈출을 모의한 끝에 裵로 하여금 인장업자인 오제녕(吳濟寧)(남·43)을 포섭 吳에게 태국에 가서 인장업을 하면 월3백 불은 벌 수 있다고 꾀어 吳의 명의로 여권수속을 완료, 발급 받은 여권을 吳에게 주지 않고 콧수염과 가발로 변장한 이수근(李穗根)사진을 갈아붙인 다음 1월27일 裵와 같이 동일오후 5시30분 CPA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하므로 당부는 이를 추적 끝에 해외 모 지점에서 1월31일 캄보디아로 출국하려는 이들을 검거하여 2월1일밤 8시50분 공군기로 김포로 압송하여 왔다.


(2) 이 사건 관련자에 대하여는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을 적용, 철야수사를 진행 중에 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죄상은 다음과 같다. 이수근(李穗根)은 1967년 2월 중순께 북괴노동당 대남 사업 총국장 이효순(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동인의 안내로 괴수 金日成을 면담, 동 석상에서 金日成으로부터 『조국을 위하여 부하 된 사명을 다하라』는 격려를 받은 후 비밀 아지트에서 李孝淳으로부터


①판문점에서 극적인 탈출을 가장한 귀순방법으로 한국에 침투하라

②침투한 후 귀순동기를 『2·8절(괴뢰군 19주년) 기념행사 기사 작성시 김일성을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에 숙청대상이 되었음을 감지하고 탈출하였다』고 진술하라

③표면상 한국정부에 협조하여 신임을 획득, 신분의 합법을 쟁취하라

④여하한 악조건이 있더라도 적화통일이 될 때까지 장기 잠복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67년 3월22일 판문점을 통하여 위장 귀순하였으나 한국국민의 철두철미한 반공사상으로 공작기반구축이 난관에 부딪치고 더욱이 당부의 감시가 심한데다가 무의식중의 언동이 갖가지 의문점을 남기게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가 탄로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한국 내에서의 임무수행을 포기하고 재 북 본처의 이질인 배경옥(裵慶玉)을 포섭하여 대동 월북할 목적 하에 캄보디아로 탈출을 기도하였는바 이수근(李穗根)은 탈출 후 행동계획으로서 裵慶玉에게 보고서를 휴대시켜 주 캄보디아 북괴대사관을 경유, 북괴에 전달, 당의 승인을 얻은 다음 장차 북괴에 복귀하려 하였는데 李穗根의 보고서요지는①긴박한 사정에 의하여 공작지를 이탈한 것을 보고한다 ②당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③당에서 허락하면 제3국(캄보디아)에서 대남 우회공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는 등으로 되어 있음.


(3) 이상이 이수근(李穗根)사건의 개요이나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에 있어 사건전모를 발표치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며 사건수사에 있어서의 국민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는 물론 특히 이 사건과 관련된 낭설에 현혹됨이 없기를 바란다.


실패를 선전의 호기로 반전시켜


정보부의 발표를 계기로 터져 나온 언론의 보도는 정보부의 끈질긴 수사를 찬양하고 이수근(李穗根)의 배신을 인격적 차원에서까지 매도하는 방향이었다. 「그놈이 그럴 줄이야…」라는 컷 제목이 사회면 머리에 실렸고, 「사형도 모자란다」「흉물스런…」 따위의 원색적인 시민 반응이 그대로 기사화 되었다. 1969년은 6·25이후 한반도에서 긴장이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1968년 1·21사태(청와대 습격기도사건), 그해 11월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상륙 사건 등 북한의 대남(對南)공작이 남한을 베트남화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고 68년 1월의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69년 4월의 미 전자첩보기 EC121기 격추사건은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남쪽에서는 예비군 창설로 맞서는 등 전운마저 감돌고 있을 때 터진 이수근(李穗根) 탈출 사건은 언론의 뭇매, 당국의 무리한 수사, 재판의 일사 천리식 진행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수근(李穗根)을 오판했고 해외탈출을 예방하지 못한 정보부의 실수는 일체 지적되지 않고 해외에서의 활약상만 부각되면서 김형욱(金炯旭)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선전의 호기로 반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부 신문은 고위당국자(金炯旭을 가리킴)의 말이라면서, 「정보부가 李를 일부러 해외로 달아나게 하여 접선 현장에서 체포하는 것을 꾀했었는데 이는 증거확보와 함께 다른 조직까지 일망타진하려는 의도였다」고 선전해 주기도 했다.


조사책임자 증언: 『간첩아니다』


주월 한국대사관 2층에 이수근(李穗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정보부의 모 간부」는 기자의 취재로 홍필용(洪弼用)변호사(70)임이 확인되었다. 육군법무감출신인 그는 1964년에 중앙 정보부로 들어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동백림 사건을 다루었고, 李穗根이 1967년 3월22일에 판문점을 통해 탈출해오자 그의 신병을 인수, 보름간 생활을 함께 하면서 위장귀순 여부를 조사했다.


그 뒤에도 1년간 李穗根의 남한생활을 관리한 인연이 있었다. 1969년 1월말에 洪씨는 정보부장 특별보좌관이었다. 태국에 출장 중이었다. 김형욱(金炯旭)부장의 긴급 지시에 의해 洪씨가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에 李穗根이 붙들려 끌어내려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洪변호사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간 기자에게 『이런 것을 지금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속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홍(洪) 당시 특별보좌관이 대사관2층에서 이수근(李穗根)을 대면하자 李는 처음에는 반가와서 눈물을 흘리더니 「할 소리, 못할 소리」를 막 털어놓더라는 것이다. 『날 못 잡았으면 모가지 달아나는 건데 우리 부장 또 영웅 되게 됐어』라면서 신나게 이야기한 李의 심리에 대해 洪변호사는 『비관이 너무 크니까 낙관적으로 돼버린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洪변호사도 『감찰실장의 무리한 감시와 李의 성격적 결함이 합쳐져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면서 『간첩은 아니었다』고 못박았다. 『金日成이를 많이 욕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심을 산 모양인데 진짜 위장간첩이라면 金日成이 욕을 더 열심히 했을 것 아닙니까. 李穗根의 성격이 자신을 죽인 겁니다. 그는 어떤 사회에서 살든 간에 불평불만을 많이 할 그런 사람이지요』


홍(洪)씨는 李의 성격을 「표독, 경박, 거만, 자유분방, 그러나 뒤가 없는」이란 말로 표현했다. 시계를 주었는데 시간이 자주 틀린다고 신경질을 내면서 풀어 던지고『새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는가 하면 『金日成이가 나를 오라고 해도 안 가겠어』라는 농담을 해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성격의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 있어요. 느긋하게 해야 하는데 방(方)실장은 사사건건 혼을 내는 식으로 했으니 갈등이 깊어진 겁니다. 이수근(李穗根)도 매를 맞을 만한 짓을 하기는 했어요. 하이얏 호텔 근방에 정보부 안가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李씨가 정착하도록 여자를 소개해 주었는데 서, 너 명을 퇴짜놓아 우리가 참 곤란했어요. 그 사람이 여자를 좋아했는데 북한에서 여자를 겁탈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물었더니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하고 되받더군요』


남한생활에 있어서 이수근(李穗根)의 불만은 정보부의 끊임없는 감시(그의 운전수와 가정부는 정보부에서 심어놓은 정보원이었고 전화는 도청되었으며 그의 감시 조가 따로 짜여 있었다)에 기인한 것 이외에도 또 있었다고 한다. 李는 당국이 제공해준 코로나 승용차를 타고 골프를 배우며 유명가수와 데이트로 하고 여교수와 결혼하는 등 유명인사의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한국사회의 범죄·퇴폐·부정 및 이를 보도하는 언론을 끝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살인·강도사건을 보도해서 뭘 하겠다는 것이냐고 흥분하는 것을 보고 역시 그는 북쪽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언론은 국민에게 안 알릴 권리도 있지 않나」면서 범죄보도가 그 수법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더군요』


위장귀순 아니다


홍(洪)변호사는 이수근(李穗根)의 위장귀순여부를 판단한 부서의 책임자였음인지 『귀순동기가 딱 부러지게 나타나지 않아 판단하는 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위장귀순은 절대로 아니었다』고 단언했다. 李穗根과 같은 귀순자의 경우, 정보부에선 먼저 대공수사 차원에서 위장여부를 가려낸다. 순수한 귀순이라는 사실이 판명되면 공작담당 부서로 돌려 그가 가진 정보를 빼내는 작업을 한다.


洪변호사는 『李穗根이 직책은 높았지만 실권은 강하지 못했고, 남한언론인처럼 활동범위가 넓은 것도 아니어서 중요한 정보를 캐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다음 단계로서 귀순자는 심리전 부서에 넘어가 기자회견, 대중강연 등을 통해서 선전목적에 쓰여진다. 그 다음에는 시민화 되지만 정보부 감찰실의 감시를 받는다. 李穗根의 경우엔 정보부 판단관으로 취직(?), 매일 정보부로 출근하였었다.


『이수근(李穗根)은 귀순 직후부터 내가 그를 데리고 보름간 같이 있으면서 조사를 했고, 그 뒤에도 1년간 안가에서 생활하게 하고 대중강연· 좌담 등을 시키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1년 뒤 관계관들이 회합하여 李는 위장귀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요. 그 회의에서 별다른 이견을 낸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판정 뒤로는 李에대한 감시를 다소 완화했을 것입니다』 서울지검공안부 최대현(崔大賢)부장검사가 이수근(李穗根)·배경옥(裵慶玉) 및 裵씨의 여동생 배인향(裵仁香)(당시 22세)과 김세준(金世俊)씨(당시 22세·李의 조카)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한 것은 1969년 3월 22일이었다.


이들은 중앙 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검찰에 송치되었다. 구속 기속 할 때 검찰이 발표한 공소장에는 2월13일의 정보부 발표문에는 나오지 않았던 중요사실이 적혀 있다. 「68년 4월 사이공에서 일시 귀국한 이질 배경옥(裵慶玉)과 만나 북괴와 접선할 것을 모의기도 했고 68년 5월4일 하오 6시 李는 金日成의 집인 조선노동당 중앙당위원회 5호댁 앞으로 보내는 암호문을 작성했다. 이 암호문은「배은 망덕하고 고향을 떠난 불효자식(李수근 자신을 뜻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제 잘못을 뉘우치고 사업을 하겠습니다. 여기에 약(북괴에 도움이 되는 재료)를 구해놓았으니 인편(북괴 지도원)을 보내주십시오. 지난 정월달에 그곳에서(북괴) 여기(한국)에 보낸 선물(1·21무장공비침투)의 답례로 무엇을 보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받지 마세요.


나에게 인편을 보낼 때는 전쟁 때 죽은 금순이 삼촌의 이름을 대면 아버지가 보내주신 사람으로 믿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68년 5월5일 배경옥(裵慶玉)이 출국했을 때 이 암호문을 한글로 된 성경책 속에 감추어 홍콩에서 모스크바 천주교회에 우송토록 했다.


李는 또한 입북한 후 사이공에 체류할 배경옥(裵慶玉)을 통해 주월 군용기를 이용, 한국에 보내는 연락물건 속에 권총이나 무기 등을 한국에 반입키고 모의한 후 그 반입 루트를 ①평양―홍콩―사이공―서울 ②평양―프놈펜―사이공―서울 ③평양―하노이―사이공―서울로 정한 후 배경옥(裵慶玉)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裵가 월남여자와 국제 결혼하여 위장 귀화토록 모의했다」



우스꽝스러운 암호문


이 암호문이 진짜라면 이수근(李穗根)은 간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암호문은 너무나 조잡하다. 우선 정보부의 1차 수사발표문에 이 결정적인 증거가 빠진 것이 이상하다. 정보부는 李와 裵씨를 수사한 지 13일째 되는 날에 발표문을 냈으니 수사기간은 충분하였다. 모든 것을 포기한 두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암호문이야기가 늦게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李모 간부는 『간첩으로 꾸미려고 암호문이란 것을 만들어냈겠죠』라고 했다. 간첩이 암호문을 직접 金日成에게, 그것도 우편으로 제3국을 경유해서 보내는 경우가 도대체 있을 수 있는가? 「배은망덕한 불효자식」이란 표현은 오히려 李의 귀순이 진심이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이수근(李穗根)은 1심 재판과정에서 『배(裵)가 모스크바 중앙교회로 부쳤기 때문에 金日成이에게는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李穗根은 재판과정에서 암호문을 보낸 사실을 포함하여 모든 공소사실을 다 자백하였다. 이에 대해서 홍필용(洪弼用)변호사는 『어차피 죽을 것인데 빨리 죽자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공소장은 「金日成과 북괴를 폭로 규탄하면 북괴에 다시 가게 될 때 재기 불능하게 되므로 고민에 싸이게 되었다」고 했다. 공소장은 李穗根의 행선지가 북한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사이공에서 귀국한 배경옥(裵慶玉)을 만나 북괴와의 접선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콩, 프놈펜을 통해 입북키로 모의했다」고 했다.


李는 2심에서 「홍콩에서 裵를 소련대사관을 통해 입북시킬 생각도 했지만 소련 대사관을 통하면 환영을 받지 못할 것 같아 프놈펜으로 가기로 했다」고 진술했다. 이 공소 사실대로라면 李穗根은 거물 간첩으로서의 기초적인 소양, 즉 행동지침이나 접선 방법도 알지 못하는 지리멸렬한 인간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상한 항소포기, 서둔 사형집행


이수근(李穗根)과 배경옥(裵慶玉)씨 외에도 여권위조를 도와준 피고인까지 합쳐 모두 7명이 재판을 받았다. 공판은 이례적으로 급속히 진행되었다. 1969년 4월10일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재판장 이상원(李相元) 부장판사, 배석 정상학(鄭相鶴)·진성규(陳成圭)판사)의 심리로 열린 1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은 공소사실을 거의 시인, 검찰 측 신문이 하루로 끝나버렸다. 4월24일의 2차 공판에서는 국선변호인의 신문이 있었다. 5월2일에 벌써 구형공판이 있었다.


이수근(李穗根)·배경옥(裵慶玉) 사형 김세준(金世俊)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 李穗根은 최후 진술에서『거국적인 환대를 배신한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기회를 한번만 더 주면 반공전선에 앞장서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배(裵)씨는 『나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른다. 李가 삼촌이라 도와주었을 뿐이다』고 최후 진술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5월 10일에 선고공판. 李·裵씨는 사형, 金世俊씨는 징역 6년에 자격정지 6년.


주심이었던 정상학(鄭相鶴)씨(현재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재판에 정보부의 간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수근(李穗根)이 모든 것을 시인했기 때문에 합의할 때 형량에 이견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간첩이란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967∼69년은 간첩사건이 워낙 많았습니다. 난수표가 간첩의 증거로 많이 제출될 때인데 李穗根의 경우엔 가발과 가짜 콧수염이 증거로 나왔더군요』


원래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사람은 이해우(李亥雨)변호사였다. 그는「가증스런 李를 변호할 가치가 없다」고 변호 기피서를 재판부에 냈다고 보도되었다. 박원서(朴元緖)변호사가 그 뒤를 이어 李穗根을 변호했었다. 朴변호사는 李피고인을 한번도 면담한 적이 없이 변호했었다고 말했다. 『본인이 다 시인하니 변호래야 정상론을 펴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69 년 5월10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李피고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돼있다. 이 날짜 석간에는「뻔뻔하게 항소하다니 너무나 가증스럽다」는 제목의 시민반응이 실렸다.


「그러나 이수근(李穗根)은 항소만료기간인 5월17일이 지나도록 항소하지 않아 사형이 확정되고 말았다. 배경옥(裵慶玉)·김세준(金世俊)피고인은 항소, 2심에서 裵피고인은 사형에서 무기로, 金피고인은 6년 징역에서 5년으로 감형선고를 받았다. 李穗根이 왜 항소를 포기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이왕 죽을 것 빨리 죽자는 심산이었는지, 재판에 협조하면 살려줄 줄 알았는지…. 당시 서울지검공안부 검사였고 李의 사형집행 때 참여하였던 김형하(金炯河)변호사는 『李는 수사나 재판에 고분고분 협조하면 살려주어 활용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수근(李穗根)이 서울구치소에서 수감돼 있을 때 교무계 직원이었던 고중렬(高重烈)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가죽수갑을 찬 채 포승에 묶여 2사(舍) 상(上)의 25방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독방이었다. 문 앞에는 정보부 직원이 의자를 갖다 놓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우리 구치소 직원들도 정보부 사람의 양해를 얻고 李피고인을 만날 수가 있었다. 사형수는 종교적 교화대상인데도 접촉이 금지돼 종교담당인 나는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다』정보부가 그 힘이 최강일 때, 수사단계에서 수감생활까지 철저하게 李穗根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李의 운명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었는지는 외부인이 알 수가 없었다.


이수근(李穗根)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69년 7월2일 오전이었다. 귀순한 지 8백33일 만에 , 형이 확정된 지 두 달도 안된 날에, 더구나 종범인 배경옥(裵慶玉) 등 피고인들의 항소가 서울고법에 계류중인 데도 주범을 사형 집행해버린 것은 사법의 관행에 있어서 그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당시의 한 정보부 간부는 『김형욱(金炯旭)은 李의 문제를 강박관념처럼 지니고 다녔다. 李의 입을 영원히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서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당시 법무장관은 이호(李澔)씨(전 적십자사 총재)였다. 사형집행 명령서는 법무장관이 서명하는데, 李씨는 『그 사건은 기억이 나지만 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20 년째 복역중인 배경옥(裵慶玉)


이수근(李穗根)이 저승으로 가고 없는 지금 진실을 캐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는 배경옥(裵慶玉)씨다. 기자는 裵씨를 찾아 나서기에 앞서 그가 비록 무기선고를 받았으나 석방돼 서울 어디에선가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李穗根탈출사건에서 裵씨가 한 일은 李에게 오제녕(吳濟寧)의 이름으로 된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일뿐이었기 때문에, 시국사범처럼 감형, 형 집행정지, 사면 등등의 그 흔한 특례조치로써 훨씬 전에 옥문을 나와 과거의 악몽을 잊으려고 더욱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구속될 때 청년이었던 裵씨는 51세란 초로(初老)의 나이에 지금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지난해 12월21일에 겨우 무기에서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오는 12월22일에 만기 출소하게 돼 있다. 그는 형이 확정된 지 1년 반 만에 일찌감치 전향서를 썼는데도 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서울 중곡동에는 裵씨의 어머니 金모씨(75)가 지금도 생존해 있었다. 金씨의 여동생 김순배(金順培)씨가 이수근(李穗根)이 탈출할 때 북녘에 남기고 온 본처이다. 배경옥(裵慶玉)씨는 1955년7월에 육군에 입대, 탈영했다가 붙들려 3년간 복역한 뒤 제대했었다. 이 전과로 출국을 못하게 되자 이복형의 이름을 빌어 여권을 내 월남에 취업했다가 1968년 7월에 귀국했었다. 다시 출국하려고 할 때 여권을 잃어버렸다.


이때 李穗根을 알게 되어 운명이 바뀐 것이었다. 裵씨를 가끔 면회 가는 그의 동생 裵모씨(45)는 『한번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형과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여동생의 이야기 등을 종합해 보면 형은 李穗根이 정부의 양해하에 어떤 임무를 띠고 외국으로 가는 줄 알았다가 홍콩에서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고 했다. 배경옥(裵慶玉)씨는 그림에 취미를 붙여 전시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裵씨는 정식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朴모 여인과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었다. 裵씨가 감옥에 간 뒤 그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배(裵)씨 집안은 얼굴도 모르는 이모부 이수근(李穗根)의 출현에 의해 풍지박산이 된 셈이다. 배경옥(裵慶玉)씨의 여동생 裵모씨(41)도 외국 나간다는 오빠를 김포공항까지 출영 나간 죄로 구속돼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었다. 裵여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李穗根씨가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하기 전에 그분의 집에서 한 여섯 달 동안 집을 봐주고 부엌일도 해주곤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오빠가 지프차를 몰고 와서 저를 앞자리에 태우고 김포공항으로 갔었지요. 지프차 뒷자리에는 오빠와 김세준(金世俊)학생, 그리고 李씨가 타고 있었는데, 李씨는 변장을 했었기 때문에 누구인 줄 몰랐지요. 저는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늘 약을 먹어야 하는 몸인데 정보부에 끌려가서 1주일간 몹쓸 고문을 당했습니다. 후유증으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조카 김세준(金世俊)씨의 증언


이수근(李穗根)에게는 이길성(李吉星)이라는 여섯 살 위의 누님이 있었다. 李여인은 첫 결혼한 남편이 폐결핵을 앓자 별거했다가 월남하여 김영섭(金永燮)씨(지난 81년에 71세로 사망)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 난 아들이 이세준(金世俊)씨였다. 李여인은 金군을 낳은 직후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고 김영섭(金永燮)씨는 재혼했다. 김세준(金世俊)씨는 李穗根이 홍콩으로 탈출할 때 22세의 연세대 정외과 1학년 학생이었다.


金씨는 李穗根이 이문동의 정보부 안가에서 살 때부터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하여 성북구 삼양동에서 살 때까지, 그리고 李가 CPA기 편으로 김포를 떠나던 그 순간까지 근 2년간 李씨를 따라다니며 개인 심부름을 한 사람이다. 일부 신문에는 金씨를 李穗根의 개인비서라고 쓸 정도였다. 李의 도망을 방조한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다 살고 지난 74년에 대전교도소를 나왔던 金씨는 지금 부산에서 보험 모집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와의 2시간에 걸친 전화인터뷰에서『외삼촌이 간첩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거듭 주장했다.


金씨가 李씨의 홍콩 행을 안 것은 1969년 1월27일 바로 그날 오전이었다고 한다. 서울 북창동 어느 여관에서 이수근(李穗根), 배경옥(裵慶玉)씨와 함께 투숙, 은행에 가서 원화를 달러로 바꿔오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裵씨가 여권을 金씨에게 맡기고 은행으로 갔는데, 李穗根의 변장한 사진이 오제녕(吳濟寧)이름의 위조여권에 붙은 것을 보고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李穗根은 이 자리에서 조카 金씨에게 대강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다.


『여기도 자유가 없다. 강연할 때 써준 원고대로 읽지 않았다고 불러서 때리곤 하는데, 지식인의 양심상 남이 시키는 대로 할 수도 없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제3국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 정보부에서는 3선 개헌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데 외국에 나가서 이 사실을 신민당 유진오 당수에게 알려 줄 생각이다. 내가 출국한 뒤에는 아마도 정보부에서 너를 불러다가 괴롭힐 것 같은데 학생인 너를 심하게 할 수야 있겠는가』


검찰 공소장에는 「李는 김세준(金世俊)에게 3개월만에 이북으로 데리고 가겠으니 경북 법흥사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고 돼 있다. 金씨는 『법흥사는 나의 작은아버지가 주지로 있는 절인데 삼촌이 나에게 그 절에가 있으라는 얘기는 했지만 북으로 데려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보부에서 쓴 진술서는 고문에 못 이겨 살고 보자고 시키는 대로 한 것이다』면서 이를 부인했다.


金씨는 『만약 그때 삼촌이 간첩 같았다면 내가 먼저 신고했을 것이다. 삼촌은 평소에도 정보부 사람들이 괴롭힌다고 나에게 털어놓은 적도 있어, 그때의 순진한 생각으로 내가 좀 고생하더라도 삼촌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28일 밤에 정보부로 불려가 「이수근(李穗根)의 행방을 대라」는 추궁과 고문을 받았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고 했다. 29일에 정보부 수사관들은 金씨에게 편지를 하나 쓰게 했다. 「외삼촌께서 돌아오시면 처벌을 받지 않고 다 용서될 것이다」는 요지였다. 수사관들은 이 편지를 갖고 홍콩으로 갔다고 한다.


이수근(李穗根), 재판에 너무 협조적


金씨는 또 『삼촌은 가끔 「김일성이가 쳐 내려오면 나를 맨 먼저 잡아죽일 것이다」고 했다. 출국하는 그날에 삼촌은 영어사전을 샀는데 북한으로 갈 마음이 있었다면 영어사전을 살 필요가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삼촌은 남한 사회의 도덕적 문란,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에 대해서 가끔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삼촌은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서로 자존심이 세어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李穗根은 1968년 8월28일에 우석대학교 물리치료과 주임교수 이강월(李江月)씨와 결혼했었다. 金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봉급을 나누는 문제 등 사소한 것으로 의견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金씨는 수사·재판과정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정보부에서 20일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물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갱 영화에서 보면 여러 명이 삥 둘러서서 한사람을 축구공 차듯이 이리저리 돌려가며 치는데 꼭 그런 구타였습니다.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진술서를 썼는데 검찰로 송치돼 구치소로 넘어 와서는 변호사를 한번도 면담한 적이 없고, 검사신문을 구치소에서 꼭 한번 받았어요. 정보부 직원이 입회를 했더군요.


「전에 한 진술이 틀림 없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지요. 몇 마디 더 물어본 뒤 볼펜과 종이를 넣어줄 테니까 자술서를 다시 써 달라고 한 뒤 가버렸어요. 그러나 볼펜과 종이는 끝내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판사들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더군요. 교도관들도 「공연히 재판정에서 똑똑한 척 하지 말라」고 하고…』


金씨는 이수근(李穗根)·배경옥(裵慶玉)씨가 『재판에 무척 협조적이었다』고 했다. 『나에게 법흥사에 숨어 있으면 이북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는 대목까지 삼촌이 시인 하길래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협조하면 살려준다는 보장을 받았다고 생각했지요. 삼촌은 재판을 받으면서 생기에 차 있었고, 구치소에선 운동도 열심히 하더군요. 재판 때 붙어 다니던 정보부 요원이 공판이 끝난 뒤 교도관에게 「돌아가거든 목욕시켜 주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삼촌의 손등은 거죽이 벗겨지는 등 고문 받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金씨가 2심에 계류중일 때 李穗根이 사형집행 당했는데,『간수가 「신부님이 눈물을 흘리며 나오더라」고 일러주면서 나를 위로해 주더라』고 했다. 金씨는 『배경옥(裵慶玉)씨를 만나면 왜 재판 때 그런 식으로 예, 예만 했는지 꼭 묻고 싶다』고도 했다.


1974 년 2월에 출소한 金씨는 대전에서 살다가 그 이듬해에 발효된 사회 안전법에 의해 주거제한처분을 받게 되었다. 당시 대전지검 이한동(李漢東) 부장검사가 신청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 81년에 양모는 지난 80년에 사망했다. 아버지가 위독해도 경찰서장의 여행허가가 나지 않아 제때에 가지 못했고, 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도 허가가 지체되어 상주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고생을 남의 집 딸에게까지 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서 한때는 결혼을 단념했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부산에서 취직이 되자 주거제한이 보호관찰로 풀려 3개월마다 한번씩 동향보고만 경찰서 정보과에 내면 되었다. 지난 80년에는 결혼도 했다는 그는 지난 연말에 보호관찰에서도 해방되었다고 한다.



북한탈출현장 목격기


이수근(李穗根)이 달아났다가 붙잡혀오자『평소에도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정보부에서도 李에게 늘 의문점을 두고 면밀히 관할해 온 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수사과장 이용택(李龍澤)씨(전 국회의원)는 『북한탈출 동기가 석연치 않아 일단 강연·좌담 등을 시키면서 분석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었다. 청중들이 「저 친구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여 우리가 그를 다시 불러 추궁했으나 확증이 없어 감시만 해 왔었다』고 했다. 갼쓴?李穗根이 탈출할 때 판문점의 북한측 경비병들이 李가 탄 차를 겨냥하지 않고 45도 각도로 공중을 향해 쏜 것도 이상하다고 판단하여 사진을 분석하기도 했다.


이수근(李穗根)에 대한 의문점은 ①탈출동기의 석연치 않음 ②경비병들의 사격 자세 ③방송이나 강연에서 金日成을 욕하려 하지 않은 점 따위가 주로 꼽혔었다. 李를 조사했던 홍필용(洪弼用) 당시 수사국장은 『귀순군인의 경우엔 동기가 단순하지만 지식인인 李穗根의 경우에는 그 동기도 관념적일 수가 있으며, 위장귀순 했었다면 金日成이를 더욱 심하게 비방했을 것이다. 李는 지식인으로서 자존심이 대단해 金日成이를 비난하는 원고를 주면, 유치하다면서 그대로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수근(李穗根)의 탈출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기자는 당시 동양방송의 김엽(金燁)씨였다. 그는 1967년 3월22일 오후 5시25분쯤 이 긴박한 장면을 목격, 임시뉴스로 보도했다. 이 특씬막關?제1회 한국기자상(한국기자협회 제정)을 받기도 했었다. 그의 특종기를 인용한다.


「22일 제2백42차 본회의가 예정대로 상오 11시 정각에 시작됐으나 회의 내용은 시시했다. 안건도 별것이 아니었다. 상호간에 내용 없는 설전이 오갔다. 오후 4시5분, 회의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엔 측 기자 인솔장교가 예고도 없이 기자들에게 『서울로 갑시다』고 통보했다. 이때는 괴뢰대표 박중국이 한창 반미발언을 하다가 『나도 더 이상 제의할 만한 안건이 없으니 휴회하자』고 제의하는 찰나였다.


그래서 우리측 기자 30여명은 철수를 시작, 나도 녹음기를 메고 나오다가 문득 이상한 감촉이 온몸을 스쳤다. 여태까지 10여년 동안 판문점 주변을 취재했어도 미군 측의 요청으로 기자들이 철수한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떠나는 버스에는 탈 생각을 않은 채 군사 정전위 유엔 측 연락장교실 막사로 갔다. 유엔군 측은 경비대장 톰슨 중령도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본 회의장주변에 나타났다.


괴뢰경비병들은 회의가 끝날 무렵에 배치되는 정 위치에 서 있었으나 유엔 측 치콜렐러 소장은 공산 측 휴회제의를 묵살하고 계속 공산 측에 대한 공격발언을 하고 있었다. 오후 6시5분, 치콜렐러 소장의 마지막 발언이 시작될 무렵, 자유의 집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우리측 대표단의 승용차가 본회의장 유엔 측 출입문 앞으로 평상시보다 좀 빨리 대기했다.


그 당시 공산 측 기자 4, 5명이 유엔 측 대표가 있는 북쪽 유리창 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으며 이들 속에 이수근씨가 끼어 본회의장과 자유의 집을 두리번거리며 서성댔다. 오후 5시23분 유엔측의 마지막 발언에 대한 중국어 통역이 끝나고 양측 대표가 퇴장하려고 일어서는 순간, 유엔 측 영국대표 세단(USA SG104)의 본회의장에 면한 뒷문이 열리면서 40세 가량의 괴뢰기자 1명이 뛰어 들었다. 뒤따라 군복차림의 유엔군 1명이 올라탔다. 이 세단 앞자리에는 톰슨 중령이 재빨리 탔다. 이 순간 주변에 있던 괴뢰경비병 1명이 톰슨 중령의 오른 팔을 잡고 당기며 매달렸다. 이미 자동차는 발동이 걸려 움직이는데….


톰슨 중령은 손을 잡은 괴뢰경비병을 밀어 제치면서 문을 닫고 치콜렐러 수석대표 차를 S자형으로 앞질러 전속력, 일로 남으로 향했다. 괴뢰경비병들은 『야!』하면서 고함을 질러 주변에 있던 괴뢰경비병 30여명이 남쪽 통로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집결했다. 괴뢰경비대장으로 보이는 한 명이 권총1발을 하늘로 발사하자 괴뢰경비병들은 일제히 세단의 뒤를 쫓으며 발사했다. 그러나 이 무렵 세단 차는 본회의장 남쪽에 있는 언덕길을 넘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 언덕길에 괴뢰경비병들이 당도했을 때 세단 차는 남방공산초소 앞 차단대를 돌파했었다. 이수근씨가 차에 타서 괴뢰군초소 차단대를 돌파, 귀순하기까지의 20초, 극적인 탈출, 순간적인 민완동작이었다」


미국 측 의견, 「간첩증거 없다」


이수근(李穗根)은 귀순할 때 미리 군사정전위 사무국의 한국인 직원에게 뜻을 전했고, 이 연락을 받은 유엔군 측 치콜렐러 소장이 李를 받아들이도록 승용차와 인원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KBS 국제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집(金鏶)씨는 북한경비병들이 李가 탄 세단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지 않았다고 의심하는 데 대해서 『판문점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고 했다. 『공동관리구역 안에서는 쌍방간 시설물 공격을 못하게 돼 있습니다. 이 구역 안에는 권총만 갖고 들어가게 돼있고요. 북한경비병이 하늘을 향해 위협사격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만약 조준사격을 했다면 UN측 경비병의 보복사격을 받아 총격전으로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이수근(李穗根)의 북한 탈출과 그의 체포에는 미군과 미 정보기관이 깊게 개입했다. 미군은 북한탈출을 도왔고 CIA는 그의 체포를 도왔다. 그래서 기자는 미국 측 정보기관에 李穗根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은밀히 물어보았다. 李에 관한 자료를 뒤져본 한 미국인은 『李가 간첩인지 아닌지 우리로서는 판단할 자료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李가 간첩이라는 자료를 우리는 갖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미국정보기관의 판단이 한국정부 및 사법부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 기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자는 李穗根을 교수대로 보내는 데 실무적인 역할을 했던 당시의 정보부 수사간부·검사·판사들도 많이 만나 보았다.


당시 서울지검 검사로서 배경옥(裵慶玉)씨를 담당했던 한 현직검사는 『裵는, 영감님 제가 살겠습니까, 라고 애원 조로 묻는 등 생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 검찰조사는 정보부의 수사를 재확인하는 정도였다고 한다.『이수근(李穗根)이 항소포기를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고 했다. 그는 또 『李穗根이가 감옥에서 털옷을 넣어달라고 해서 아내에게 연락해주었는데 답이 없었다』고 했다. 이 검사에게 기자는 「李穗根의 도망?북한으로 가려는 목적이 아니라 제3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으로 생각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는 다 듣고 나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다.


전창희(全昌熙) 수사국장과의 일문일답


사이공에서 붙들려 온 이수근(李穗根)을 조사한 것은 정보부 대공수사국 이었고 당시 국장은 全昌熙씨였다. 서울 한남동에 살고 있는 全씨(68)을 찾아내 이런 질문을 던졌다.


- 정보부에서 항소포기를 권유했나?


『그런 일 없다』


- 왜 종범들의 재판이 진행중인데 李를 서둘러 처형했나?


『그 과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런 거물은(공산당에 의해) 독살 당할 위험이 있고…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 김형욱(金炯旭)은 사석에서 『이수근(李穗根)은 빨갱이가 아니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金부장의 변명일 것이다. 李가 귀순했을 때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데 대한… 김부장이 너무 서둘러 李를 선전 목적에 이용하여 밑에서는 반발이 컸었다』


- 李穗根이 왜 金日成에게 보내는 암호문을 하필 교회로 부쳤나?


『교회는 성역이니까 그렇게 했을 것이다』


- 그런데 모스크바 중앙교회로 부친 암호문은 金日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데…


『암호문에 대해서는 박삼철(朴三喆) 수사단장으로부터 보고만 받아 잘 모른다』



- 왜 정보부 발표문에는 암호문 이야기가 없나?


『그런 사항은 원래 발표하지 않게 돼 있다』


- 기소장에는 실렸는데.


『그것은 범죄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니까』


- 집행될 때 李는『김일성 만세!』도 안 부르고, 중립국으로 가서 살려했다고 말했다는데. 『어설픈 간첩이 「김일성 만세」를 외친다. 대구폭동을 주도한 이재복이도「대한민국 만세!」하고 죽었다』


- 李가 金日成이 욕을 한다고 해서 재기불능이 되나? 더구나 金日成이 직접 李를 만나 임무를 부여했다고 정보부 발표문에 적혀 있지 않은가.


『북한의 다른 사람들은 李가 金日成을 비방한 의도를 모른다』


북한 전문가이며 이수근(李穗根) 해외탈출사건 수습에 관여했던 당시의 정보부 간부는 『나는 조(趙)기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서 『李가 캄보디아로 가려 했다는 것은 그가 북한으로 가려는 뜻이 없었다는 증거가 아닐까』라고 했다.


그는 『북한으로 가려면 홍콩에서 바로 구룡반도를 통해 중공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쫓기는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뭣 하러 프놈펜까지 가려 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기자는 전창희(全昌熙)씨 밑에서 수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李穗根 신문을 지휘했던 당시 수사과장 이병정(李炳丁)씨(현재 미륭건설 부사장)에게 『암호문이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李穗根이 남한에서 지하간첩활동을 했다든지, 접선·무전교신 따위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고급 2중 간첩이었으므로 북한의 대남 공작 부서가 직접 관리했던 하급 간첩과는 다르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가 갖고 달아났다가 압수된 노트 8권에는 남한 사회에 대한 자세한 견문기록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기록과 그의 행동들을 분석해보니 李가 공산주의 이념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사 실무자일수록 감이 정확한데 저는 그가 간첩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가 사형 집행장에서 남긴 이수근(李穗根)의 유언이야기를 전해주니까 이병정(李炳丁)씨는 『그렇게 말하면 관용을 받을까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현실 속의 이명준(李明俊)?


이수근(李穗根)을 간첩으로 판단하도록 한 것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한 자백과 해외로 달아났다는 구체적 행동과 귀순·남한생활에 얽힌 의혹이지 물증은 없다. 무전기도, 난수표도, 암호문도, 국가 기밀을 탐지하여 북한에 보낸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李穗根이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이대용(李大鎔), 홍필용(洪弼用), 그리고 사형 집행자들에게 한 말은 법정에서 한 말과 달랐다.


어느 쪽의 李穗根 말을 믿느냐가 문제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개인의 안전보다 공직자의 의무를 택한, 반공정신의 상징적 인물인 이대용(李大鎔)씨를 신뢰하고 李씨에게 한 김형욱(金炯旭)의 실토를 믿는다면, 법정의 판단은 어찌 되었든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었고, 분단상황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생각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비극의 지식인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수근(李穗根)은 홍콩 경찰관에게『나는 간첩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다』고 주장했다는데, 기자가 만난 많은 정보부 관계자들조차 이 주장에 진실성을 부여하였다. 문제는 남북간에는 「정치적 망명」이란 개념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남과 북을 다 거부하고 중립국으로 가는 배에서 자살한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李明俊)과 서울구치소에서 목졸려 죽은 李穗根의 죽음은 「20세기의 한국적 비극」을 상상과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 두 사례인 셈이다. 李明俊과 李穗根은 다 같이 기자출신이었다. 李明俊이 살았다면 李穗根과 나이도 거의 같았을 것이다. 작가 최인훈(崔仁勳)씨는 李穗根을 모델로 하여 또 한 편의 「광장」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

[1989 년 3월 월간조선]

기자 조갑제의 세계(http://www.chogabje.com)에서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

11일간 잠 한숨 안 재우고 고문 오랜 독방생활 혀 굳어 말도 못해"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89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기자가 배경옥(裵慶玉·72)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9년 말이었다. 월간조선에서 막 기자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월간조선 1989년 3월호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이수근은 1969년 7월 3일, ‘위장 귀순한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 그후 20년간 우리 국민은 ‘이수근은 위장간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월간조선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배경옥씨는 이수근의 처조카다. 배씨는 베트남 사이공에서 이수근과 함께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의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89년 12월, 21년간 복역하고 나온 처조카 배경옥씨가 월간조선 사무실을 찾았다.

그게 배씨와의 첫만남이었다. 이후 기자는 이따금씩 배씨를 만났다. 지난해 12월, 기자는 출근길에 명동에서 배씨를 우연히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며칠 뒤 배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기자는 처음으로 배경옥씨에게 연락했고, 지난해 12월 30일과 1월 4일 두 차례 만나 총 4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2008년의 무죄 판결에 이어 민사소송에서도 승소했으니 이제 큰 짐을 덜으셨네요. “그 세월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요? 이제는 이모부님을 편안히 모시는 게 마지막 할 일입니다. 서울구치소에 이모부님의 유해가 합장되어 있는 걸 확인했어요. 100호비(碑)에 다른 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북한에 가족을 남겨두고 1967년 3월 귀순한 이수근은 서울에서 이모 교수와 결혼을 했다. 배씨는 북한에 남겨진 부인의 조카이다.

북에서 온 이모부와의 만남

어떻게 북한에 이모가 살게 되었나요. “어려서 서울 신당동에 살았는데, 그때 이모가 우리집에 함께 살았습니다. 이모님이 내 손을 잡고 여기 저기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당시 서울대 사대를 나온 이모님은 지방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셔서 경기도 개성으로 가셨어요. 거기서 당시 기자로 활동하던 이모부님을 만났지요. 얼마 뒤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모님은 개성에 발이 묶이셨습니다.”

귀순한 이수근씨가 이모부라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요. “나는 당시 베트남 주재 미
1사단 소속 파월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지요. 그때 라이프(LIFE) 잡지에 난 이수근의 사진을 보고 ‘이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이수근씨가 정보부 관계자에게 처가가 서울이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분이 나를 가장 예뻐해준 이모님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 그때 이모님이 개성에만 가지 않았어도 우리 집안에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판결서를 보니 원고에 배경옥씨 외에도 14명이 있던데요. “간첩 집안이라는 누명을 한번 뒤집어쓰면 집안 전체가 비참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는 것은 고사하고, 신원조회에 걸려서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천형(天刑)보다 더한 겁니다. 원고로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그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본 집사람과 딸아이, 저의 어머니와 형제들입니다.”

재산상의 피해도 컸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명의의 부동산이 경기도 고양, 여주, 이천에 많았습니다. 하지만 ‘간첩 집안’이라는 누명을 쓴 뒤 재산이 다 다른 사람 명의로 넘어갔습니다. 우리가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는 사이 당시 소작인 등이 땅을 가로챈 것이지요. 20년이 넘으면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특별조치법으로 인해 사유 재산을 강탈당했습니다. 여주에 있는 것을 다시 찾으려고 소송해봤지만 법원은 시효(時效)가 지나서 안된답니다.”

1969년 1월, 베트남에서 사업일로 서울에 왔을 때 여권 분실만 안했어도 이런 비극은 없었겠지요. “그때 여권분실 신고를 동아일보에 냈습니다. 만일 여권이 제게 돌아왔다면 나는 그냥 베트남 미1사단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이모부가 위조 여권을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잘못되면 큰일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요. “그때 이모부께서는 내게 중립국에 가서 글을 쓰며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가 권총을 쏘아 위협하고 때리기도 했답니다. 인텔리에게 그런 모욕을 했으니. 이모부는 중립국에 가면 북한에 대해서는 가족을 보내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남한도 나에 대해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고 나올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북한의 가족을 데리고 와 함께 살고 싶다는 이모부님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1969년 2월 1일 사이공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았는데요. “중앙정보부 5국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열하루 동안 한 시간도, 잠을 안재우며 자백하라고 고문했습니다. 잠을 못 자니까 책상의 나뭇결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데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수사관들이 하라는 대로 진술했습니다. 영장 없이 열하루 동안 조사한 것은 불법 감금입니다. 서대문구치소에 들어가서야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10개월 만에 가족과 첫 면회

그의 나이 서른 살. 아내와 다섯 살난 아들,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후 배씨는 20년11개월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한다. 서울 서대문구치소 1년, 대전교도소 3년, 광주교도소 16년, 그리고 안동교도소에서 1년. 전국의 교도소를 다 순례했다.

이수근(오른쪽)·배경옥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사형선고를 받고있는 장면. 1969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

가족과의 첫 면회는 언제 이뤄졌나요. “10개월 만에 처음 면회가 이뤄졌습니다.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 어머니, 동생, 아내가 면회를 왔습니다. 그때 집사람이 갓 태어난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딸아이의 얼굴을 처음 봤지요.”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딸아이 얼굴을 처음 본다는 기쁨보다는 저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보니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떻게 커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집사람에게 미안하고 어머니께 죄송했습니다. 나로 인해 가족이 고통을 당해야 하니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억울하게 간첩죄로 들어갔으니 그곳 생활이 더 힘들었겠습니다. “처음 들어가서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중앙정보부에서 하도 당해서 솔직히 살려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이수근씨와 배경옥씨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가족들도 진짜 내가 간첩인 줄 믿었습니다. 언론에서 다 그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모부, 저, 조카 김세준, 이대용 공사, 홍필용 중정 수사국장이 전부였죠. 재판을 받으러 나갈 때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입 다물라’는 위협을 받곤 했습니다.”

4년 지나니 원망도 사라져

교도소에서 독방생활을 하셨겠죠. “저는 ‘국제 간첩’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독방에 가둬놓고 출역(出役)도 안 시켰습니다. 독방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날 혀가 굳어버려 말이 안 나왔습니다. 너무나 충격이 컸죠. 그래서 혀가 굳어가는 걸 막으려고 화장실 창살 밖으로 혼자 말을 지껄이곤 했습니다. 출역은 대전교도소에서 광주교도소로 이송되기 한 달 전인 1974년에 처음 인쇄공장으로 나갔습니다.”

교도소에 계시면서 대한민국 정부를 원망했겠습니다. “4년차까지는 대한민국 정부를 원망했지요. 그런데 거기 있어보니까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분단이 안 됐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언제부터 살아야겠다는 생의 욕망을 느꼈습니까. “4년이 지나고부터 ‘여기 인생도 내 인생’이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나가게 되면 가족들에게 이곳에서 뭐라도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광주교도소 시절입니다. 붓을 잡으면 금방 몰두할 수 있으니 시간이 참 잘 갑니다.”

광주교도소는 전국교도소 중 최초로 창작, 서예, 회화를 배우는 문예반을 만들었다. 문예반 운영이 재소자들에게 호응이 좋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교도소로 확산되었다. 그는 광주직할시 승격 기념 광주시 미술대전에 산수화를 출품, 입선했다.

1989년 12월 22일,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나왔다는 기쁨 같은 건 없었어요. 그날 남동생이 안동교도소로 마중나왔습니다. 오늘처럼(1월 4일)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집에 가기 전에 경기도 광주경찰서에 먼저 가서 신고를 했습니다. 이후 11년간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죠.”

아들과의 마지막 통화

21년간 갇혀 있다 나오니 어떤 변화가 있던가요. “사람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연령 구분이 전혀 안돼요. 만날 교도소  안에서 삭발한 사람만 대하다 보니.”

30살에 교도소에 들어간 그는 51살이 되어 나왔다. 갇혀 지낸 21년의 세월은 이미 주변까지도 다 변화시킬 만큼 길고긴 시간이었다. 배씨의 아들은 스물여섯, 딸은 스물두 살이 되어 있었다.

가족과는 언제 재회를 했습니까. “내가 출소한 것은 아이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집사람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버지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릴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했다고 합니다. 마침 스물여섯 살 아들은 취직을 해 결혼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고 합니다. 딸아이는 일본에 있었고요. 근데 제가 출소한 겁니다. 집사람과 먼저 전화 통화를 했죠. 그리고 나서 아들과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저한테 그래요. ‘아버지, 여태까지 그냥 사시던 대로 사시면 안되겠습니까?’ 제가 그랬죠. ‘니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21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견뎌낸 배경옥씨였지만 자식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자기 엄마가 경찰서와 중앙정보부 끌려다니며 사는 걸 봐 왔으니 애들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들은 말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성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큰 모습은 본 일이 없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8월에 아들이 무주구천동에서 물에 빠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배씨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아들이 그렇게 된 게 가장 억울합니다. ‘아버지, 여태까지 그냥 사시던 대로 사시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마음을 내가 아니까. 평생 살면서 제 엄마 고통받는 걸 보면서 자랐으니까. 억울하고 분해요.” 

끝까지 진실 밝혀준 사람들에 감사

따님과는 언제 만났습니까. “아들이 죽고 나서 10년쯤 지난 뒤였죠. 제 엄마는 아들이 그렇게 되자 한동안 정신나간 것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따님을 알아볼 수 있겠던가요. “갓난아기 때 보고 처음인데…. 딸이라고 하니까 딸인가 생각했지요. 그런데 가만히 얼굴을 뜯어보니 제 할머니를 많이 닮았더군요. 생각해보세요, 아빠를 한번도 아빠라고 불러보지 못하고 자란 딸아이를. 친구들이 제 아빠와 노는 걸 보면서 딸아이가 얼마나 가슴에 맺혔겠어요. 딸은 현재 결혼 안하고 일본에서 직장 잡고 살고 있습니다.”

배씨는 출소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부인과 합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노모를 모시며 혼자 살고 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움이 크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움은 없습니다. 나는 한국 경제가 본격적으로 커나가기 시작할 때 베트남에 기술자로 파견된 사람입니다. 미1사단에서만 월급으로 1200달러를 받았습니다. 서울에 덤프 트럭을 두 대나 갖고 있었고요. 큰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권력의 하수인들 때문에 나와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늦긴 했지만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에서 이겼으니 조금은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나요. “그런 응어리가 풀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쨌거나 진실은 일시적으로 가릴 수는 있으나 영원히 가릴 수 없다는 진리가 확인되었습니다. 그간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지만 비로소 원위치에 돌아온 겁니다. 원위치로 돌아오는 데 이렇게 희생이 크고 힘들었으니.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너무 허망할 뿐이죠.”

누가 제일 고맙습니까. “조갑제 기자가 제일 고맙죠. 그 다음이 이대용 공사입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묻힐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내가 눈 감을 때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은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주셨습니다. 판사가 ‘이념과 진실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조갑제 기자가 ‘당연히 사실 쪽에 서겠다’고 말하더군요. 그분들한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

북한 기자 출신 숙청위기 몰려 1967년 귀순
한국생활 환멸, 제3국 망명 시도했다 사형

이수근의 사형집행을 보도한 1969년 7월 4일자 조선일보.

북한의 전직 기자 출신 귀순자 이수근. 이수근은 1924년 황해도 서흥 출신이다. 1944년 중학교 4년 재학 중 일본군 학병으로 징집되어 군복무 중 광복을 맞았다. 1946년 9월, 북조선 노동당에 입당, 황해도 노동신문 기자가 된다. 이후 이수근은 기자로 승승장구해 20년 만에 중앙통신사 부사장이 된다. 비록 공산체제의 기자로 일했지만 이수근은 신문기자의 특질인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1967년 2월, 그는 북한군 창립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수행 취재했다. 하지만 김일성 연설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숙청 위기에 몰린 그는 1967년 3월 판문점을 통해 귀순을 결행했다. 1960년대는 냉전의 최전선에 놓여 있던 남북한이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점. 박정희 정권은 북한 인텔리의 귀순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함을 알리는 데 적극 활용했다. 이수근은 영웅 대접을 받았고 서울에서 결혼도 했다.

이수근은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중앙정보부가 그의 신변을 관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체제 선전에만 이용하려는 당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이수근이 결정적으로 한국 생활에 환멸을 느낀 것은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의 괴롭힘과 모욕이었다.

1969년 1월, 베트남 미1사단 기술자로 일하던 처조카 배경옥씨가 가족을 만나러 한국을 방문했다. 배씨는 이수근이 북한에 남겨놓은 부인의 조카였다. 배씨는 여권을 잃어버려 신문에 분실신고를 낸 뒤 재발급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배씨가 여권을 재발급받기 위해 수속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이수근은 배씨에게 호소했다. “나는 북한도 싫고 한국도 싫다. 제3국으로 망명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고 싶다.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여권을 만들어달라.”

이모부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한 배씨는 여권 브로커에게 부탁해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 1969년 1월 27일, 이수근은 배씨와 함께 김포공항에서 홍콩행 여객기에 탑승했다. 배씨는 마침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모부의 출국 수속을 돕기 위해 함께 출국했다. 홍콩에 도착한 뒤 이수근은 스위스로, 배씨는 베트남으로 가려했다. 하지만 당일 출발하는 스위스행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두 사람은 홍콩에서 하룻밤을 자게 된다. 중앙정보부에서는 뒤늦게 이수근이 사라졌고,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비상이 걸렸다. 중정은 주홍콩 한국총사관에 이수근 체포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홍콩 경찰에 의해 잠시 억류되었다가 프놈펜행 비행기로 갈아탄다. 프놈펜행 비행기는 사이공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비행기가 사이공 공항에서 이륙하려는 순간, 이대용 주월공사는 티우 대통령에게 부탁해 이륙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되어 두 사람은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게 1월 31일 오전이었다. 이대용 공사는 군특별기가 올 때까지 두 사람을 면담한 사람이다. 두 사람은 2월 1일 한국으로 돌아왔고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1969년 5월 10일, 이수근과 배경옥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수근은 7월 3일 사형이 집행된다. 배경옥씨는 같은해 10월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9년 12월, 배씨는 21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2008년 12월 배씨는 재심에서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당시 김형욱 정보부장이 자신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 이수근을 위장간첩으로 몰아 죽였다는 게 결론이었다. 이어 지난해 12월 말, 서울 민사지법은 배씨와 가족 등 1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배씨 등에게 위자료로 총 22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